부엌의 냄비에서 보글보글 거품이 피어올랐다.안시연은 마음이 이만저만이 아니라 잠시도 편히 있을 수 없었다.그때,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안시연이 고개를 돌려 보니 연정훈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단추가 잠기지 않은 셔츠 깃 사이로 목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빨갛게 물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그는 그윽한 눈빛으로 안시연을 조용하게 바라보았다.그 눈빛에 안시연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알코올 알레르기 있으세요?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해산물 알레르기가 있어.”“실수로 먹은 거에요?”“오랫동안 먹지 않아서, 두 입만 먹어봤어.”“아...”냄비에서는 계속 거품이 올라왔다.‘아 참, 아까 올라올 때 운전 기사님이 바로 차를 몰고 가셨지? 설마... 교수님이 여기 남아서 나랑 같이 밤을 보낼 거라 생각한 건가?’사방은 고요했다.연정훈은 안시연의 고지식한 행동을 보고 입꼬리를 약간 올렸다.“내 카드 안 썼어?”안시연은 잠시 의아해하다가, 연정훈이 그 블랙카드를 자주 쓰는 모양이니 결제내역을 보는 것쯤이야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문득 떠올렸다.“안 썼어요.”“외할머니 수술은 다 끝났어?”그 말에 안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 사람이 저한테 돈을 돌려줬어요.”연정훈은 침묵했다. 그러고는 얼마 안 지나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화해했어?”“... 그렇다고는 할 수 없어요.”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투에 담담한 조롱을 섞어 말했다.“표면적으로만 관계를 정리했을 뿐, 아직 남아있긴 한다는 거네.”안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그녀는 일부러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연정훈의 신분으로는 아마 다시는 그녀를 보지 않을 테니.연정훈이 그녀에게 물었다.“이럴 거면, 왜 감히 나를 데리고 올라왔어?”“... 그 사람이랑 마주치는 게 두렵지 않아서요.”안시연은 그의 말에 농담과 조롱이 섞여 있다고 느꼈다.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니, 노란 불빛아래 남자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안
문손잡이가 돌아가는 그 1초 동안, 안시연은 혼이 날아갈 것 같았다.연정훈도 그녀의 몸에 누워 잠시 동작을 멈췄다.그러나 문은 예상과 달리 열리지 않았고 안시연은 그제서야 자신이 이미 자물쇠를 바꿨다는 사실을 떠올렸다.마치 영혼이 본체에 돌아온 것처럼, 이성을 되찾은 그녀는 연정훈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가 일어서기를 바랐다.그러나 연정훈은 서두르지 않으며 오히려 그녀의 입술을 깨물더니 귀에 대고 낮게 말했다.“오늘 저녁에 손님 온다고 알려주지 않았어?”안시연은 난감함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시연 씨, 문 열어요.”안시연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그러나 연정훈은 그녀의 허리를 더욱 세게 움켜잡은 채 당황하지 않고 움직임을 이어갔다.안시연은 다리를 조이며 그의 움직임을 거절했다.문밖의 인기척이 커질수록 몸을 통제할 수 없는 안시연과는 달리 연정훈은 더욱 여유가 넘쳤다.그녀는 갑자기 이해가 되었다. 왜 자신이 주지혁과 헤어지지 못하는 것을 개의치 않고 연정훈이 계속해서 찾아오는지.연정훈은 주로 그녀의 몸만을 사랑하는 것이지 순애보 같은 스타일이 아니다.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현재의 안시연은 그저 도망치고 싶을 뿐이었다.얼마쯤 지났을까, 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멈추고 거실의 온도가 급격하게 올라가자 연정훈은 더이상 안시연을 놀리지 않고 본격적인 주제를 향해 달려갔다.안시연은 미칠 지경이었다.그렇게 얼마 뒤, 남자가 갑자기 동작을 멈추자 안시연은 흐느끼며 엉겁결에 자신을 꼭 안았다.연정훈이 고개를 들고 눈썹을 찡그리며 그녀를 바라보니 안시연의 눈가는 촉촉이 젖어있었다.연정훈은 눈을 감더니 이내 냉정함을 되찾았고, 다시 무력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안시연을 바라보았다.잠시 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손을 보여주었다.뼈가 두드러지게 보이는 손가락 앞부분에는 검붉은 색이 묻어있었다.안시연은 잠시 어리둥절해졌다.‘너무 긴장해서 아랫배 통증조차 못 느끼고 있었어...’그렇다, 생리
방음이 되지 않는 복도에 있어 안시연은 연정훈을 꼭 끌어당긴 채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했다.얼마나 지났을까,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주지혁이 핸드폰을 꺼내는 것을 보고 안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허둥지둥하다가 연정훈을 끌고 아래층으로 뛰어갈 뻔하기도 했다.‘아 참, 나 핸드폰 집에 두고 왔지.’한숨을 돌리며 고개를 든 그녀는 연정훈의 아련한 눈동자와 마주쳤고 그 바람에 귀가 뜨거워졌다.밖에서 주지혁은 아직도 전화를 걸고 있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연정훈의 손을 잡아당기면서 그가 자신과 함께 조심히 아래층으로 내려가기를 바랐다.하지만 벽에 기대어 지긋이 그녀를 바라보는 연정훈의 얼굴에는 당황하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전혀 협조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안시연은 다시 한번 그의 악랄함을 목격했다.그녀는 한때 그가 이전에 이런 무자비한 일을 자주 하지 않았는지 의심했다.주지혁은 언제든 이쪽으로 올 수 있었다. 그녀는 주체할 수 없이 쿵쾅대는 심장을 뒤로 한 채 애원하며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오늘 저녁 술을 많이 마신 탓에 연정훈은 행동이 더욱 자유롭지 못했다.애원 가득한 안시연의 눈빛은 연정훈의 욕구를 더 불러일으켰다. 만약 주지혁이 갑자기 나타나 방해하지 않았더라면, 안시연이 아무리 불편하더라도 그들은 다른 걸 했을 것이다.호텔에서 그랬던 것처럼 연정훈에게 반항하지도 못한 채 불쌍한 눈빛을 하며 말이다.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주지혁이 있는 방향을 흘겨보다가 다시 안시연을 바라보았다. 괴롭히고 싶은 마음은 더욱 강해졌다.안시연도 바보는 아니었다.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두 팔을 들어 연정훈의 목을 잡고 힘껏 까치발을 들며 키스를 했다.작은 남자의 입술은 한없이 차가웠고,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간청했다.“교수님, 제발 내려가세요.”연정훈은 기쁜 나머지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입을 꼭 맞췄다.키스보다는 연정훈의 일방적인 약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서로의 입술이 떨어질 때, 안시연의 눈에는
“왜 왔어요?”안시연은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비닐 주머니를 들고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마구 캐물으려던 주지혁은 그녀의 보수적인 옷차림과 손에 든 생리대를 보고 약간 망설였다.“어디 갔었어요?”그러자 안시연은 천천히 다가와 문을 열며 말했다.“생리가 와서 생리대 사러 갔었어요.”“내 전화는 왜 안 받아요?”“핸드폰 배터리가 없어서 거실에 두고 충전 중이예요. 현금으로 결제했어요.”그녀는 시종일관 미적지근한 태도로 일관하며 방에 들어가자마자 부엌으로 가서 물을 끓이고 아무런 내색 없이 차를 내왔다.집안을 빙 한 바퀴 둘러보고 난 뒤 어떠한 이상한 점도 발견하지 못하고 나서야 주지혁은 한결 나아진 안색으로 물었다.“현관문 열쇠 바꿨어요?”안시연은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지난번 이후로 바꿨습니다.”지난번 두 사람 사이에 발생한 다툼이 떠오르자 주지혁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그는 부엌으로 들어가 안시연을 뒤에서 껴안았다.안시연은 본능적으로 몸이 굳어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그것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주지혁은 기쁜 마음에 안시연의 얼굴에 뽀뽀했다.“아직도 화내는 거예요?”“화내봐야 무슨 소용이겠어요. 곧 조이현 씨랑 결혼할 건데.”주지혁은 그녀가 질투하는 줄 알고 더욱 기뻐하며 안시연을 달랬다.“할머니 봐서라도 다른 사람 때문에 나한테 성질부리지 마요, 네?”‘곧 결혼해서 아내 될 사람이 다른 사람이라니...’안시연의 마음속에 있던 혐오감은 극에 달했다.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이 끓는 틈을 타서 그녀는 차를 들고 나가 주지혁과 어느 정도 거리를 고는 무의식적으로 한마디 물었다.“사건은 언제 해결되는데요?”주지혁은 그녀를 한 번 쳐다보더니 영악한 눈빛을 드러내며 자연스럽게 대답했다.“다 됐어요, 이틀만 있으면 되요.”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사건이 해결되기만 하면 그녀는 마음을 놓을 수 있다. 하지만 사건 사고는 모두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해결되는 것이 아닌데다가 주지혁의 권세가 아직 하늘을 찌를 지경에 이른
“시연 씨가 임신하면 내가 시연 씨를 해외로 보내줄게요. 시연 씨 혼자 외국에 있으면 많이 그리울 거니까 몇 년 안에 반드시 이혼하고 시연 씨랑 결혼할겁니다.”...정말 끔찍한 사랑이었다.두피마저 얼얼해지고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주지혁은 이 말을 마치고 침묵하는 그녀의 작은 얼굴을 보며 말을 덧붙였다.“며칠만 기다려요, 시연 씨 몸이 편해지면 같이 새로 산 집 보러 가요. 아, 우리 기념일 때 보러 갈까요?! 그럼 그날은 우리 신혼 밤을 보내는 셈이 되는거죠.”“시연 씨가 임신하면 사건 해결서랑 부동산 서류 그리고 20억 상당의 주식을 같이 줄게요.”앞의 말이 뻔뻔하다면 마지막의 말은 음흉하기 그지없었다.그는 그녀를 위협하고 있다.주지혁은 공포스러운 통제욕을 여실히 드러내며 안시연이 자신에게 단념할까 봐 기어코 그녀의 몸을 차지하려 했다.그 수단은 바로 임신으로써 그녀를 완전히 결박하는 것이었다....법률 사무소 로비에 앉아있던 안시연은 지난밤 주지혁과의 얽히고설킨 일이 떠올라 금방이라도 토할것 같았다.“안시연 씨, 장 변호사님 도착하셨습니다.”“네.”안시연은 소리를 듣고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다.현재로서 그녀는 주지혁에게 반항할 수 없기에 최악의 계획을 세우고 적어도 변호사를 잘 찾아야 했다. JX 법률 사무소는 부씨 가문 산하의 산업으로 현재 부승원이 관리하고 있으며 명성이나 실력 모두 경인 시에서 으뜸이었다.장 변호사가 매우 바쁜 탓에 면담 시간은 딱 15분으로 정해졌다.얼마 뒤, 사무실에서 나오는 안시연은 상대방의 모호한 말을 곱씹으며 불안에 떨었다.그때, 고개를 들어 보니 양복을 입은 한 무리 사람들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연정훈과 부승원이 제일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연정훈의 곁에는 우아하고 품위 있는 여성이 따라다녔다.안시연은 그 여자가 지난번 백화점에서 조이현과 이야기한, LK은행의 딸 임유정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안시연 씨, 장 변호사님은 시간이 별로 없으십니다. 혹시 문수철, 문 변호사님과
안시연이 두 통의 전화를 걸었지만 주지혁은 받지 않았다.그녀는 현재 불안에 떨고 있어 병원에 가 외할머니를 만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할머니를 걱정시킬까 봐서 말이다.안시연은 주지혁이 다시 전화할 틈을 기다려 법률 사무소 근처에 있는 식당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한편, 연정훈과 부승원은 일을 마치고 근처 빌딩에서 밥을 먹으려고 했다. 그렇게 1층 유리창을 지날 때, 한 여인이 의자에 기대어 앉아 아득한 눈길로 바깥의 차들이 늘어선 것을 쳐다보는 게 보였다.안시연과 몇번 만나보며, 연정훈은 그녀가 좋지 않은 형편에서 완강히 버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도 그는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담담하고 쓸쓸한 절망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내일의 떠오르는 태양을 보기 힘든 것처럼 말이다.이런 그녀의 모습은 어쩐지 보호 본능을 자극했다.‘또 괴롭힘을 당한 건가?’몇 초 후,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앞으로 걸었고 그렇게 천천히 안시연의 시야에서 벗어났다.차에 올라탔지만, 그 불쌍한 작은 얼굴은 연정훈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그러다 문득 부승원에게 물었다.“시연이가 너희 법률 사무소는 왜 찾아온 거야?”그 말을 듣자 부승원의 싸늘한 눈빛이 갑자기 흥미로운 듯 번뜩였다.“몰라.”“모른다고?”“법률 사무소에 얼마나 많은 사건이 들어오는데, 내가 그걸 다 일일이 알아야 해?”부승원은 미적지근하게 말했다.“알고 싶어? 그럼 내가 가서 물어볼게.”말을 끝내고 그는 조용히 얼굴을 돌려 연정훈을 바라보았다. 눈동자에는 장난기가 가득 서려 있었다.연정훈은 곧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입가로 갖다 댔다.그러고는 무슨 생각인지 읽을 수 없도록, 가볍게 피식 웃었다.‘둘 사이에 뭔가가 있는 거군.’이윽고 부승원이 조롱하듯 말했다.“안시연 씨 꽤 예쁘더라.”“시연이는 예전에 내 제자였어.”“내 기억으로는 소현주 씨도 네 학생이었던 것 같은데?”그러자 연정훈의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가라앉더니 이내 입술을 앙다
주지혁이 유 대표 얘기를 꺼내자 주효진은 잠깐 의아해하더니 이내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안시연 그년이 뻔뻔스럽게 오빠에게 그런 얘기를 했어?”그녀의 말에 주지혁은 이상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시연 씨가 나에게 얘기했다고? 유 대표 일은 내가 직접 본 거야.”“직접 봤다고?”주효진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남매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뭔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주효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난 지금 내가 안시연에게 약을 탔던 일을 말하는 거야.”“뭘 탔다고?”주지혁이 두 눈을 부릅떴다.“몰랐어? 그럼 유 대표는 또 뭔데?”주효진은 아직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다.주지혁은 이 일이 이미 그의 예상을 벗어난 것 같아 싸늘한 얼굴로 주효진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라고 호통쳤다. 친오빠의 표정이 확 달라진 걸 본 주효진은 하는 수 없이 전부 털어놓았다.잠시 후, 주효진은 주지혁에게서 주차장에서 있었던 일을 듣고는 손뼉을 탁 치며 분노를 터뜨렸다.“오빠, 유 대표는 안시연을 건드리지도 않았어.”주지혁의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주효진은 이틀 전에 유 대표와 호텔에 갔었다는 얘기는 차마 할 수가 없어 대충 둘러댔다.“유 대표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안시연 얘기를 꺼내더라고. 태도가 아주 안 좋았어. 안시연이 제 주제도 모르고 넘본다는지, 아무튼 엄청 언짢아했어.”그녀의 말에 주지혁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효진은 그의 옆에 앉아 계속 부채질했다.“유 대표가 안시연을 건드리지 않았으면 그날 밤 대체 어디 간 걸까? 무조건 다른 남자와 있었을 거야. 그리고 그날 밤에도 다른 남자와 잤어. 남자를 얼마나 많이 만나고 다니는지 몰라. 걔는 오빠를 가지고 논 거라고.”주지혁이 이를 꽉 깨물었다. 살짝만 건드려도 바로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날 안시연의 몸에서 봤던 흔적이 문득 떠올랐다. 그건 분명 다른 남자가 남긴 것이었지만 안시연은 주지혁이 그런 것이라고 속였다.유 대표에게 더럽혀진 게 아니라 다른 남자와
주지혁은 안시연네 집에 여벌 옷을 두고 있었다. 그가 샤워하러 들어간 후 안시연은 그의 옷을 꺼내주었다.안시연이 옷장 앞에 서 있던 그때 시선이 옆에 놓인 가방과 목걸이에 향했다.연정훈이 처음으로 그녀에게 선물한 가방이었는데 그때 당시 버렸었다. 그런데 이튿날 이웃이 와서 문을 두드리면서 돌려주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다시 가지고 들어왔다.지금 두 물건이 한데 놓여있으니 마치 판도라의 상자 속에 꼭꼭 숨긴 죄가 언제든지 드러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안시연은 가방을 안으로 깊숙이 밀어 넣고 옷장 문을 닫았다.주지혁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안시연은 책상 앞에서 뭔가를 쓰고 있었다. 예전에는 얘기가 끊이질 않던 두 사람이 이젠 서로 얼굴을 봐도 아무 말이 없었다.주지혁은 그녀의 헤어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린 후 옆에 쾅 던졌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안시연이 뒤를 돌아보았다.그녀가 일그러진 얼굴로 헤어드라이기를 거두려고 주지혁의 옆을 지나가던 그때, 주지혁은 그녀를 와락 끌어안고 옷 속을 마구 더듬거리기 시작했다.화들짝 놀란 안시연이 미간을 찌푸렸다.“나 아직 생리 중이란 말이에요.”하지만 주지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안시연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결국 입술을 훔쳤다.“다른 걸 하면 되지. 아, 그리고 앞으로 단둘이 있을 때는 말 놓자.”“말을 놓자고요? 갑자기요?”안시연은 순간 멍해졌다.“단둘이 있을 때 말 놓으면 편하잖아.”그러고는 계속하여 그녀의 몸을 더듬거렸다.“그럼 다른 걸 계속해볼까?”그의 뜻을 알아차린 안시연이 고개를 홱 돌렸다.“할 줄 몰라.”예전이었더라면 쑥스러워서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이 쿵쾅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이 남자는 그녀를 배신했고 손아귀에서 쥐고 흔들었다. 그동안 쌓인 감정이 점점 사라져 이제 남은 거라곤 미움밖에 없었다.안시연의 무뚝뚝한 표정을 본 주지혁은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할 줄 모르는 거야, 해주기 싫은 거야?”주지혁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점점 억
양시연은 주 팀장의 얼굴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계약서를 들어 확인한 후에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양시연의 마음 한편에 묘한 감정이 스쳐 갔으나 양시연은 담담히 받아들였다.“연 대표님과 정인 그룹이 저희 인터참을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저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양시연은 사람들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주 팀장은 환한 미소로 답했다.“그럼요. 저희는 양 대표님을 믿습니다.”양시연은 침묵했다.“...”부승원은 변함없는 담담한 얼굴로 계약 절차를 마무리한 뒤 일행과 함께 자리를 떴다.주 팀장은 양시연에게 식사를 제안했지만, 양시연은 정중히 거절했다.“다음에 주 팀장님께서 시간이 되시면 제가 초대하겠습니다.”“네. 좋아요.”그 사람들을 배웅한 후 비서가 사무실로 달려가 좋은 소식을 전했다. 양시연이 돌아서자마자 사무실 안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몇몇 담당자를 회의실로 불렀다.중요한 이야기를 마친 후 조려욱과 몇몇은 연정훈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주 팀장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어야 했다고 생각했다.“양 대표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몇몇 사람들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양시연의 답을 기다렸다.양시연이 말했다.“계약은 이미 체결했으니 이제는 우리의 몫입니다. 투자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보다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겠지요.”“연 대표님께서는 저희 쪽에 머무르고 계시잖아요.”비서가 상기시켰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연 대표님의 생활을 세심하게 챙기고 최고의 예우를 다하세요.”사람들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양시연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과거 그녀와 연정훈이 사귀었던 사이였고 연정훈이 이렇게까지 배려하는 것을 보고 혹시 그가 재결합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었다.하지만 재결합은 중요하지 않았다.설령 연정훈이 양시연을 다시 원한다 해도 양시연이 원하는 것은
연정훈의 폭탄 같은 질문에 양시연은 말문이 막혔다.다행히 연정훈의 얼굴에서 피가 멈추지 않아 허둥지둥 상처를 치료하느라 대화 주제를 넘길 수 있었다.상처를 달고 연정훈은 말을 멈췄다.그러나 그 질문에 양시연은 그날 밤 불면에 시달렸다.하지만 불면에 시달린 건 가장 큰 이유는 연정훈의 조건이었다.‘내 돈... 그게 어떤 돈인데.’양시연은 이튿날 아침까지 생각에 잠겼다. 연정훈이 아직 잠에서 깨지도 않았는데 부승원은 정인 그룹의 법무팀과 프로젝트 책임자를 대동해 이곳을 찾았다.“투자에 대해 대표님이 직접 얘기를 하셨습니다. 추후의 사항은 저희가 맡을 예정입니다.”양시연은 심장이 철렁했다.연정훈에게 연락하고 싶었으나 직원이 아직 쉬고 있다고 전해 감히 문을 두드릴 수가 없었다.어쩔 수 없이 양시연은 책임자와 배틀을 할 수밖에 없었다.중도에 양시연은 작은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비웠고 비서를 시켜 몰래 상황을 지켜보게 했다.그리고 예상한 대화가 흘렀다.“주 팀장님이 그러던데 연 대표님이 30% 아래로 승낙하셨다네요.”양시연은 화가 났다.어젯밤 고작 긁힌 거로 끝내는 게 아니었다!전 남자 친구치고 멀쩡한 사람이 없다더니 다 사실이었다!사무실 안에서 주지한은 부승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연 대표님이 이미 계약서 초안을 작성했다고 하던데 잠시 후 확인해 볼까요?”부승원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왜 주 팀장님이 작성한 게 아닌가요?”주지한은 단순한 사람이라 아무 걱정 없이 답했다.“연 대표님께서 다 생각이 있지 않겠어요? 어젯밤 확인하시고 아랫사람을 시켜서 작성했나 보죠.”부승원은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사실 그 이유가 아닐 것이다.주지한은 계속 말을 이었다.“양시연 씨도 참 대담하시지. 듣자 하니 고작 10%에 우릴 보내려고 하다니.”그리고 쯧, 소리를 내며 말했다.“꿈이 참 야무지셔요.”“아, 참.”주지한이 고개를 돌려 부승원에게 말했다.“대표님을 직접 체험하러 오게 한 건 미인계 아니에요?”부승원은 대답하지 않았으
그 소리에 양시연은 괜히 연정훈에게 좋은 음식을 먹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모든 노력이 거품이 되는구나 싶었는데 양시연이 다시 생각을 고치고 말했다.“연 대표님, 그 땅의 가치는 그 가격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나와의 협력에서 고작 땅만 노린다면 양시연 대표님의 선구안이 참 별로라고 생각되는데요.”“...”양시연이 눈을 데굴데굴 굴렀다.“연씨 가문의 투자를 받는다는 건 곧 경인에서 입장권을 받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그러니 입장권으로 50% 받는 것도 과분한 일이 아니지요.”양시연이 침묵했다.가치를 따져본다면 연정훈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가장 이상적인 결말이라면 연정훈이 땅을 넘기는 것이었으나 지금 보니 비현실적인 것 같았다.하지만 30%나 넘기는 건 너무 마음이 아팠다.“18%는 어떠세요? 서로 한 걸음만 양보하는 게...”연정훈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삼십.”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그럼 땅은 물론 그 위에 건축한 모든 시설까지 팔게요.”“안 살 겁니다.”“...”정말 말이 통하지 않았다.양시연이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연정훈이 작게 신음을 뱉는 게 들렸다.고개를 들어 상황을 확인한 양시연이 입을 딱 벌렸다.연정훈의 얼굴에 쉐이빙 크림이 반쯤 지워졌는데 왼쪽 얼굴에 빨간색 상처가 늘어났다.어린 직원은 이 상황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양시연은 빠르게 휴지를 뽑아 상처를 감싸며 큰 소리로 말했다.“빨리 의사 불러요!”양시연은 크게 힘을 주지 않았지만 연정훈은 상처가 아주 화끈거렸다. 아마 쉐이빙 크림이 상처를 타고 들어간 것 같았다.그래서 누를 필요가 없다며 되려 감염 우려가 있다고 말하려는데 고개 들어 긴장한 양시연을 발견하고 그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의사는 아주 빠르게 현장에 도착했다.양시연은 휴지를 들었고 상처는 꽤 깊어 보였다.연정훈을 편한 자리로 옮기게 하고 의사 여러 명이 연정훈을 둘러쌌다.이에 어지럼증을 느낀 연정훈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두
연정훈은 이렇게 배가 터질 정도로 먹긴 처음이었다. 거의 턱 끝까지 음식이 찬 것 같았다.식사 후 디저트도 삼킬 수가 없었다.양시연은 매실차를 들고 오며 배시시 웃었다.“이걸 마시면 소화에 좋대요.”“...”그렇게 연정훈은 또 매실차를 비웠다.11시를 막 넘긴 시간이라 아침이자 점심을 한 번에 먹은 셈이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얼굴을 살피다가 산책을 하자며 밖으로 끌었다. 그리고 드디어 공적인 일을 입에 올렸다.“이 프로젝트는 정인 그룹에 있어 보잘것없는 프로젝트라 해도 저희 회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한 걸음이 될 수 있어요.”양시연이 먼저 약한 모습을 보였다.연정훈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먼저 시선을 피해 앞으로 걸었다.양시연이 하루 종일 애를 쓴 건 자신의 투자를 받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양시연은 포기하지 않고 그 발걸음을 맞춰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만약 토지 제공이 어렵다면 혹시 투자는 안 될까요?”연정훈이 표정 한번 변하지 않고 말했다.“고려해 볼 게요.”“그럼 정말 다행이고요.”양시연은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몰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그때 연정훈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몇 시인지 물었다.“거의 12시가 되어가네요.”“점심 시간엔 일 얘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밥 먹고 일 얘기는 하지 말자니, 갑질이 아닐 수가 없었다.하지만 양시연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방을 잡아드릴 테니 고객으로서 체험 한번 해보시는 게 어떠세요?”“그렇게 해줘요.”양시연은 연정훈이 까다롭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직접 방을 체크하고 연정훈을 안으로 들여보냈다.깨끗한 방안에는 누군가 머문 흔적도 없었다. 침대 헤드에는 YSY라는 이니셜이 적힌 카드가 있었다.“다른 방은 이미 예약되어 있는데 제 방 하나만 비어 있어 그곳으로 모실게요.”양시연이 설명했다.“걱정마세요. 저도 아직 묵은 적이 없어 깨끗하답니다.”연정훈이 양시연을 힐끗 보며 말했다.“점심엔 어디에 있을 거예요?”“사무실이요.
제어 버튼은 모두 안전벨트 측에 있었고 그 손잡이를 잡으려면 연정훈의 몸 위를 가로 타야 했다.양시연은 자신이 넘치게 대답했지만 한참 더듬어도 손잡이가 느껴지지 않았다.‘응? 뭐지?’연정훈이 시선을 아래로 깔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손잡이 찾았어요?”연정훈은 등 뒤로 몸을 기대지 않고 바른 자세로 앉았고 목소리가 바로 양시연의 귓가에 전해졌다.조금 머쓱해진 양시연이 바로 몸을 뒤로 뺐다.“아, 그건 다른 차량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착각한 것 같은데 이 차량은...”버튼이 어디 있는지 기억을 되짚어 보는데 연정훈이 손을 뻗어 왼쪽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손쉽게 몸이 뒤로 빠지고 각도가 조절되었다.“...”‘할 줄 알았으면 진작 하지 그랬어?’이런 속마음을 읽은 건지 연정훈은 팔짱 끼는 자세를 취하며 천천히 말했다.“방금 알았어요.”양시연은 어이가 없었다.‘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기회를 놓친 것에 아쉬워하며 양시연은 시동을 걸었다.그러나 연정훈은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특히 입을 삐죽이는 모습이 방금 사무실보다 많이 편해 보여 만족스러웠다.목적지를 향하는 내내 양시연은 창을 내려 직접 과일나무와 양어장을 소개했다.대화속에서 연정훈은 양시연이 많이 변한 게 느껴졌다. 외모와 분위기가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논리와 단어 선택에서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앵두나무를 지나치며 양시연이 물었다.“맛 보실래요?”연정훈은 양시연이 먹고 싶은 게 아닌지 의심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양시연은 바로 근처에 차를 세우고 전문적인 도구로 빠르게 앵두를 땄다.차창 바로 밖에서 양시연은 페트병의 물로 앵두를 씻었고 한 줌을 연정훈에게 넘겼다.“이 앵두는 치라엘 쪽에서 옮겨온 거라 알이 크고 과즙이 많아요.”연정훈은 앵두를 힐끗 살폈다. 양시연은 크고 예쁜 앵두만 자신에게 넘겼다.그래서 하나를 쥐어 입안에 넣으니 단맛이 가득 퍼졌다.“어때요?”양시연이 물었다.“나쁘지 않네요.”그러자 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고 빙 돌아 다
양시연은 미리 손님이 올 예정이라 회사에 알렸었다. 그런데 연정훈이 이렇게 빠르게 올 줄은 미처 몰랐다.게다가 연정훈은 진수빈과 기사 한 명만 대동했다.어찌 보면 사적인 일정 같아 보이기도 했다.양시연을 발견한 진수빈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안시연 씨, 오랜만이에요.”양시연은 덤덤하게 미소를 지으며 굳이 이름을 고쳐주지 않았다. 대신 연정훈을 사무실로 안내했다.진수빈은 눈치껏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고 양시연의 비서가 차를 따라주러 들어가려 하자 빠르게 막아섰다.“연 대표님이 아직 아침 식사 전이라 죄송하지만 식사를 부탁드리겠습니다.”진수빈의 말에 비서는 바로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연정훈의 취향을 물었다.“다 괜찮습니다.”연정훈은 아침 식사를 하러 온 게 아니었고, 차라리 아침 식사를 하고 탈이 난다면 연정훈이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사무실 안에서, 양시연은 연정훈에게 직접 차를 따랐다.주변은 온통 조용하고 연정훈은 바삐 움직이는 양시연을 소파에 앉아 가만히 지켜보았다.겨우 몇십 평방 남짓한 사무실은 연정훈의 휴게실보다도 작았다.하지만 사무실 배치에 많은 신경을 쓴 건지 탁자 위에 편백 화분이 눈에 띄었다.편백 나무 향이 솔솔 나는 사무실 안에는 활짝 미소를 짓고 있는 양시연이 있었다.아늑한 분위기에 잠긴 연정훈을 양시연이 불렀다.“대표님.”“맛이 좋네요.”연정훈은 뜨끔해 갑자기 칭찬을 날렸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보며 무슨 말을 할지 몰라 했다.그러자 연정훈이 말을 이었다.“차를 내리는 사람이 손맛이 없는 편이네요. 너무 오래 숙성해 좋은 차를 낭비했어요.”“...”‘내가 차를 내린 걸 봤어? 봤냐고?’그러나 양시연은 덤덤하게 대답했다.“제 밑으로 일하는 친구들이 아직 신인이라 이쪽으로는 아직 많은 가르침이 필요합니다.”“학원을 끊어줘야겠군요.”양시연은 연정훈이 지금 비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마도 본인 같은 사장 아래에서 직원들이 배울 수 없을 거라는 의미일 것이다
9시를 막 넘긴 시간이었지만 회의실은 난리가 났다.손지은은 온몸의 털을 바짝 세우며 높은 목소리로 외쳤다.“감히 날 잘라요?”양시연이 말했다.“네. 아주 잘 들으셨네요.”“왜요!”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이유를 몰라서 물어요?”손지은이 말문이 막혔다.양시연은 손지은에게서 시선을 떼고 주변 사람들을 일일이 훑었다.인터참은 과거 거의 무너져가는 의료 보험 회사였다. 지금 남겨진 직원들 절반 이상은 그 회사 직원들이었다.회사 업무에 익숙해 보여 양시연은 경력자를 골라 남겼다.인수하고 처음에는 다들 열심히 일을 해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양시연이 ‘말 잘 듣는’ 대표라는 인식이 강해지자 점점 머리 위로 기어오르려 했다.특히 손지은이 제일 대표적이었는데 자꾸 양시연을 가르치려 들었다. 그래서 양시연은 새로 사람을 뽑아 책임자를 따로 만들었고 어린 친구들이 더 착실하게 일해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그런데 손지은은 성과를 내는 신인들이 꼴사나웠는지 문제가 있는 땅을 구매하도록 함정을 팠다.“토지 인수 건은 려욱 씨가 마음이 급해 큰 실수를 한 건 맞지만 다들 참여를 했으니 무슨 상황인지 모르지 않을 거로 생각합니다. 그러니 누가 사직을 당해 마땅한지는 잘 알겠지요. 보상금은 꿈도 꾸지 마세요. 그리고 회사 측에서 손해 배상도 신청할 겁니다!”“참여했던 사람들은 제 발로 이 회사를 나가던지 앞으로 숨죽이고 회사 생활하세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내가 손해 배상 신청하면 죽을 때까지 갚지 못할 빚이 생길 겁니다. 회사에 이렇게 큰 손해를 가져오다니, 얼마나 큰 범죄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잘 알겠지요?”“내가 행여나 모를 거라는 안일한 생각은 하지 마세요. 이미 경찰에 신고했고 충분한 조사를 거쳐 모두 알아냈어요!”회의실은 정적이 흘렀다.다들 양시연에게 이렇게 강한 모습이 있다는 것에 깜짝 놀란 것 같았다.손지은은 아예 자리에 굳어버렸다.그러자 양시연은 비서를 시켜 경호원을 대동해 직접 치워버렸다.손지은의 난동이 겨우 잠잠해질 무렵,
“방금 말한 계획이 완벽하지는 않으니 일단 이렇게 해봐. 먼저 연정훈을 꼬셔보는 거야. 과거에 정훈이도 네 감정을 이용했다며? 너도 한번 갚아주는 거야!”“...”양지원이 말을 이었다.“그리고 가장 아슬아슬해지는 순간에 연씨 가문을 찾아 오빠로 삼는 거지!”결국은 그 오빠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양시연은 이마를 짚었다.자신이 왜 양지원의 연애 충고를 이렇게 진지하게 듣고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양지원은 평소 말수가 적은 편이었으나 오늘 밤엔 흥분에 겨워 말을 멈추지 않았다.그러자 양시연이 제때 말을 끊었다.“엄마, 그만해요. 난 오빠한테 관심 없어요.”양지원이 입을 삐죽였다.모녀는 야밤에 대화가 끊이지 않았고 테이블에 앉았다가 소파로 옮겨 2차전을 이었다.이런 이벤트는 과거 몇 년 사이 종종 있었다.양지원은 양시연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새벽 시간에 자주 방을 찾아왔었다.양지원과 양석진 사이의 일도 이렇게 천천히 양시연에게 알렸다.하지만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었고 양지원은 긴 소매와 긴 바지 차림이 불편했다. 그래도 갑자기 슬립으로 갈아입는 건 이상했으니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하기로 했다.방을 나서려는데 양지원이 갑자기 자리에 멈춰 뜸을 들이다가 물었다.“요즘 혁수랑 연락하고 있어?”“네. 저번 주에 연락했었어요.”양지원은 조금 실망한 기색이었다.“나한테 연락하지 않은 지 꽤 됐어.”진실을 알아차린 양혁수는 꼭 한번 오성호와 소현정을 만나고 싶다고 뜻을 밝혔고 모자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양혁수는 양지원을 원망하지 않았다. 다만 더 이상 양지원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그리고 모든 상황이 조금 진정되고는 영국으로 훌쩍 떠나가 버렸다. 양씨 사업을 조금 물려받은 뒤 창업한다더니 요즘 들어 승승장구하고 있다고 들었다.양시연이 양지원을 위로했다.“자꾸 슬쩍 엄마 상황을 물어봤어요.”그 말에 양지원이 눈을 반짝였다.“정말?”“네!”양시연은 통화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고스
양지원이 인상을 팍 썼다.“너한테 넘기지 않는다는 거야?”“네. 태클을 걸고 싶은 모양이에요.”양시연의 솔직한 말에 양지원은 헛웃음을 터뜨렸다.“뭐, 정훈이는 네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거야?”“그런가 보죠.”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아무래도 차였다고 생각해 체면을 구겼다고 여긴 모양이에요.”양지원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생각하더니 좋은 수가 떠오른 것처럼 몸을 바짝 일으켰다.이에 양시연도 흥미를 보이며 그쪽으로 귀를 기울였다.“며칠 뒤 너에게 국내 인사들을 소개해 줄게. 그런데 가장 먼저 연씨 가문으로 가자. 정훈이 엄마와 내가 어떤 사이인데 바로 널 수양딸로 삼고 큰 잔치를 벌이게 하는 거지. 그럼 너와 정훈이는 오빠 동생 사이가 되는 거야.”“...”양시연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연정훈이 자신을 향한 마음이 남아있는지는 잘 몰라도, 오빠라고 부른다면 연정훈의 표정이 어떨지 너무 궁금했다.양지원은 흥이 난 듯 계속 말을 이었다.“그리고 정훈이 엄마가 널 괴롭혔다고 했지? 마침 잘됐네. 우리 한번 제대로 갚아주자.”모자를 한꺼번에 꼽 줄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왔다.“사모님이랑 친한 친구 사이 아니었어요?”양지원이 역겹다는 표정을 짓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너한테 어떻게 대했는지 전해 들었어. 보아하니 빈부로 신분에 급을 메긴 것 같은데 그동안 연락을 아예 끊고 지냈어.”“절교예요?”“비슷하지.”양지원이 턱을 감싸며 말했다.“날 먼저 찾아와도 거들떠보지 않았지.”“정말요?”“그래. 그래도 네가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내가 먼저 연락해 식사 자리를 잡을게. 방심한 틈을 타 널 소개해 주는 거야.”벌써 구체적인 틀이 잡혔다.양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졌다.양지원이 이런 양시연을 힐끗 보며 말했다.“이게 다 널 위해서 그러는 거잖아.”‘그러니까 열심히 들어줘!’양시연은 목을 가다듬고 다시 진지한 얼굴로 임했다.그리고 피는 속이지 못하는 건지 양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