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이 깨어나 보니 서브룸 침대에 누워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연정훈이 그녀를 안고 방으로 돌아간 것이다.그녀는 냉정하게 생각해 보았다.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 연정훈이 그녀를 데리러 왔고 시험문제의 포인트를 찍어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안고 방으로 간 후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이는 화해하자는 신호일 것이다.그들의 관계로 볼 때, 계속 팽팽하게 대립할 수는 없다.그래서 그녀는 아침을 만들 때 연정훈의 것까지 만들었다.얇게 썬 햄은 진수빈이 보내온 최상급 햄을 썰어놓은 것이다. 뜨거운 국수에 올리니 향긋한 냄새가 피어올랐다.연정훈도 잠시 생각해 보았다.그는 안시연이 손을 내민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녀의 그릇에는 햄도 없었다.아침부터 그의 마음을 답답하게 하던 속상한 감정도 고개 냄새와 함께 사라지고 가뿐한 기분만 남았다.‘됐다. 시시콜콜 따질 게 뭐가 있는가?’마음이 편해진 그는 젓가락을 들더니 햄 한 조각을 안시연의 그릇에 옮겨놓았다.안시연은 살짝 놀랐고, 연정훈은 얼굴에 어색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비싼 금테 안경 뒤에 감정을 숨겼다.그는 담담하게 말했다.“먹자.”안시연은 대답하면서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그녀는 소시지를 좋아하고 햄은 싫어하기 때문이다.하지만 주는 걸 먹지 않을 수도 없어서 그냥 입에 넣었다.연정훈은 그녀가 꿀떡 삼키는 모습을 보고 안쓰러운 나머지 정색하며 자기 그릇에 있던 햄을 전부 주었다.안시연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오전에 진 비서가 음식을 보낼 거야. 그리고 네가 운전을 배우고 수업을 듣는 동안 저녁 식사도 챙겨줄 거야.”연정훈의 말에 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이렇게 처리하는 것이 좋다. 조금 전까지도 그와 관계가 완화되면 저녁에 와서 밥해줄까, 고민하던 참이었다.이렇게 되면 그녀는 밥을 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연정훈이 그녀를 안방이 아닌 서브룸으로 안아갔다는 것은 당분간 그녀와 그 일을 하지 않을 생각이다.왠지 모르지만 그녀는 마음이 전에 없이 홀가
연정훈은 병이 나은 후, 아직 이승우 등 친구들과 모이지 못했다.부승희가 작은 장사를 하다가 문제가 생겨서 그들을 불러 모았다.“승희가 한참 동안 네 얘기만 했어. 한 번 나오면 어디가 덧나니?”전화에서 이승우가 연정훈을 비난했다.연정훈은 식탁에 앉아 안시연이 가져온 밀크티를 마시며 담담하게 말했다.“시간이 없어.”“산후조리라도 해? 벌써 며칠째 나오지 않고 집에만 있는 거야?”연정훈은 모임에 나가기 귀찮아서 한마디 했다.“승희한테 뭘 원하는지 확실하게 말하라고 해. 내가 사람을 시켜서 처리할 테니.”“지금 누구를 무시해? 승희가 네 덕을 보려고 그러는 줄 알아? 네가 오면 투자유치 계획을 들려주겠대. 괜찮은 것 같으면 그때 결정하면 돼.”연정훈이 입꼬리를 올렸다.“사업계획서를 나한테 보내라고 해.”“아무것도 안 먹힌다, 이거지? 쯧쯧! 그런데 네가 집에서 기다려도 소용없어. 승희가 안시연에게 전화했으니 안시연도 올 거야.”연정훈은 컵을 든 채 동작을 멈추었다. 안시연도 간다고? 오늘 저녁에 운전 연습을 하지 않나? 이렇게 하다 말다 하면 합격하는 게 더 이상하다.그는 어이가 없어서 가만히 있다가 컵을 내려놓았다.“주소를 찍어줘.”“아이고, 기다리지 않을 거야?”“...”부승희는 친구들을 모두 초대했고 일도 빈틈없이 처리했다. 그녀는 먹고 마시고 내기하는 등 모든 것을 준비했다.연정훈이 도착했을 때 이승우 등은 포커를 치기 시작했다.부승희가 일어나서 연정훈에게 자리를 내줬다.“승희야.”이승우가 입을 열었다.“왜?”“안시연은 도착했어?”부승희는 휴대폰을 꺼냈다.“내가 2시 넘어서 연락했는데, 초대에 흔쾌히 응했어. 아마 아직 퇴근하지 않았을 거야.”이승우가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연정훈을 쳐다보며 웃었다.“얼른 안시연 여신님을 모셔 와. 안 그러면 오늘 정훈 오라버니가 네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도 있어.”부승희는 연정훈의 옆에 앉았다.“내가 그걸 모를까 봐?”그녀는 팔꿈치로 연정훈을 쿡 찔렀다.“오빠, 요즘
안시연은 짐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부랴부랴 다른 직원들과 함께 출발했다.양주에 도착한 그녀는 업무 관련 인스타를 올린 후 바로 연정훈에게 문자를 보냈다.“짜증 나요. 감사팀 일인데 왜 저희를 보내는 걸까요?”장가희가 옆에서 투덜거렸다. 안시연도 이상하게 느껴졌다.이번 업무는 경인그룹에서 출자한 함풍목재라는 회사와 관련된 것이다. 함풍목재는 몇 년째 계속 적자를 냈고 올해는 심지어 몇 번이나 자금줄이 끊겼었다. 그래서 경인그룹 임원진은 함풍목재 지분을 양도할 의향이 있는데, 함풍목재는 통제권을 잃지 않으려고 경인그룹과 지분 회수에 관해 협상 중이었다.하지만 지분을 양도하기 전에 경인 본사에서 최종 지분 매각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전문팀을 파견해 함풍목재의 경영 상황을 검토했다.“일손이 부족해서 그런가 봐요.”“그러니까 우리는 막노동하러 온 거예요.”안시연의 말에 장가희가 한숨을 쉬며 소문을 전했다.“그거 알아요? 함풍목재 대표도 연씨 가문의 사람인데, 연명걸이라고 연정훈 대표님과 같은 항렬이래요.”안시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장가희가 말을 이었다.“정말 하늘과 땅 차이네요. 연정훈 대표님은 경인을 훌륭한 기업으로 이끌었는데, 그 형제가 운영하는 회사는 파산 직전이라니.”안시연은 연정훈이 생각났다.능력으로 말하자면, 정말 그를 따를 사람이 없다.그때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려서 장가희가 문을 열러 갔다. 옆 방의 동료였다.“함풍의 연 대표님이 밥을 사준대요. 늦지 않게 얼른 서둘러요.”“네네.”장가희가 웃으며 달려와 안시연 팔짱을 끼었다.“드디어 좋은 일이 생겼네요.”안시연은 속으로 생각했다.‘뭐가 좋은 일이라는 거지? 우리는 함풍의 장부와 경영 상황을 조사하러 온 건데 대표한테 밥을 얻어먹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경인시.룸에서 한참 동안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사이좋고 감정이 깊다면서 양주에 가는 것도 몰랐어?”머리 회전이 빠른 이승우는 갖은 방법을 다 써서 연정훈을 비꼬았다.“연 대표님은 인터넷이 안 되나?
안시연은 출발 전과 출발 후, 그리고 방금까지 모두 3건의 메시지를 보냈으니 나무랄 데가 없었다.오히려 연정훈이 한 개도 답장하지 않았다.주요 원인은, 그의 개인 휴대폰도 거의 업무와 연관돼 있어 오늘 일찌감치 벚꽃동으로 돌아간 후 휴대폰을 꺼내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는 벚꽃동에서 안시연을 만날 줄 알았는데, 그녀는 휴대폰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연정훈은 감정이 풍부한 부승희의 낭독을 들으면서 불쾌함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은근히 미안한 생각까지 들었고, 안시연이 그의 답장을 받지 못해 또 잡생각을 할까 봐 걱정됐다.“오빠, 안시연이 오빠를 너무 사랑하네요.”부승희가 결론을 내렸다.연정훈은 말을 잇지 않고 침착하게 안시연에게 답장을 보냈다.“알았어.”“이것 봐!”부승희가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매력 있는 남자는 당당하고 절대적인 발언권을 가지고 있어.”“...”이승우는 간식을 가져다 먹으면서 카드를 던졌다.“상황을 보니 네가 아직도 안시연을 쌀쌀맞게 대하는 것 같네?”부승희가 말했다.“우리 오빠 조건이면 도도한 것도 정상이지.”한우빈이 연정훈을 바라보며 물었다.“안시연이 없는데, 오늘 밤 어디서 잘 거야?”연정훈이 곁눈질도 하지 않고 말했다.“안시연이 없으면 내가 잘 곳도 없겠어?”“잘 곳이 있다고 잠이 오는 건 아니잖아.”이승우가 느릿느릿 말했다.“나는 너와 달라. 재워줄 필요 없어.”연정훈이 마지막 카드를 던졌다.그가 이긴 것을 보고 이승우는 밑장빼기를 했나 해서 한참 확인했다.결과, 정말 연정훈이 이긴 것이었다.“성공한 남자는 사랑과 도박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군.”부승희가 계속해서 알랑거렸다.이승우는 하찮게 여기며 일어나더니 부승희더러 대신 놀라고 했다.머리 회전이 빠른 부승희가 연정훈에게 말했다.“오빠, 이번에 내가 이기면 나랑 같이 양주에 갔다 와야 해.”연정훈은 안시연이 생각나서 마음이 흔들렸다.하지만 입이 싼 이승우가 옆에 있어서 그는 얼굴에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양주.안시연 쪽의 식사 자리는 일찍 끝나지 않았다. 연명걸이 직접 참석해 테이블마다 술을 권했다.연명걸은 상상속의 부잣집 도련님과 달리 점잖았고, 누구 앞에서나 웃는 얼굴이었다.“돈을 잘 벌 것 같은 얼굴인데, 왜 회사가 적자일까요?”장가희의 말에 안시연은 피식 웃었다.사람을 그렇게 판단하는 법이 어디 있는가?연명걸이 왔다 간 후 모두가 긴장을 풀고 열심히 먹었다.안시연은 중도에 화장실에 갔다.문을 나설 때, 익숙한 모습이 언뜻 보였는데 임유정이었다.두 사람은 천창을 사이에 두고 복도에 마주 섰다.임유정은 그녀를 보자마자 안색이 어두워졌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안시연은 그녀와 마주치기 싫어서 돌아서서 다른 길로 갔다.그녀가 가버리자, 임유정은 돌아서서 룸으로 들어갔다.담배 연기가 자욱한 룸에서 남자 몇 명이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고, 연명걸이 상석에 앉아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여자가 냉랭한 표정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는 부드럽게 그녀를 끌어안았다.“왜? 기분이 안 좋아?”“네.”꽤 예쁘게 생긴 그녀는 화를 내면 도도한 매력이 있었다.연명걸은 그녀의 집안과 예쁜 외모가 마음에 들어 그녀를 추어올리며 참을성 있게 이유를 물었다.옆에서 줄곧 임유정에게 호의를 보였던 이철수도 친절하게 물었다.임유정은 한숨을 쉬며 연명걸을 바라보았다.“정인에서 보낸 감사팀에 안시연이라는 사람이 있죠?”연명걸이 기억을 더듬는 것을 보고, 임유정이 은근히 비꼬며 말했다.“제일 예쁘고, 여우 같은 눈이 특히 매혹적인 여자요.”그녀가 이렇게 말하자, 연명걸뿐만 아니라 이철수도 즉시 기억해 냈다.“423호실, 흰 치마 입은 여자 말이야?”임유정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역시 그 여우 같은 년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남자는 없다.여자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연명걸이 무심하게 물었다.“둘 사이에 껄끄러운 일이 있었어?”“껄끄러운 일까지는 아니에요.”임유정은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핵심을 콕 집어 말했다.“다만 그
고속도로 입구.연정훈이 뒷좌석에서 쉬고 있고 부승희가 단톡방에서 이승우와 채팅했다.그녀는 이승우를 나무랐다.[하마터면 너 때문에 일을 그르칠 뻔했어.][나쁜 계집애, 너는 양심도 없어? 너만 아니었으면, 오늘 그 자식을 끝까지 감시했을 거야. 답답해 죽게. 그것도 몰라?]부승희는 얼굴이 빨개졌다.“누가 그러래?”그녀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연정훈이 조용히 눈을 떴다.진수빈이 때맞춰 입을 열었다.“대표님, 양주에 도착했어요.”“응.”연정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진수빈이 호텔 위치를 미리 알아봤기에 직접 그쪽으로 향했다.“안시연이 오빠를 보면 무척 좋아할 거야.”부승희의 말에 연정훈은 차분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왠지 기대됐다.안시연의 얼굴에서 기쁜 표정을 보지 못한 지 오래됐다.이 시간에 그녀는 자지 않을 것이다.이렇게 생각하니 양주의 장마 날씨도 그리 불편하지 않은 것 같았다.-호텔.안시연이 소파에 앉아 알파카 한 마리를 안고 있고, 그녀의 앞에 또 한 마리가 서 있었다.맞은편 침대에는 양혁수가 누워 있다.그녀는 몇 번째 한숨을 쉬는지 모르겠다.“알파카를 데리고 오면 나더러 어떻게 하라고요?”“방이 이렇게 큰데, 우리를 숨겨줄 수 없어요?”안시연은 어이가 없었다.“다른 직원과 방을 같이 써요.”“제가 사비로 그분 방을 따로 잡아줄게요.”“차라리 제가 돈을 낼 테니 당신이 알파카를 데리고 다른 방으로 가요.”양혁수는 미소를 지었다.“안 가요.”“...”그녀는 이제 겨우 마음 편히 살게 됐는데, 또 무슨 문제가 생기는 것이 싫다.“혁수 씨, 제발 좀 소란을 피우지 마세요. 저는 당신과 이러고 놀 수 없어요. 감당이 안 된다고요.”양혁수는 옆으로 누워 그녀를 바라보았다.“제가 지난번에 약속을 어겨서 화났어요?”안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진짜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어요.”양혁수가 피식 웃었다.“처음부터 저를 무시했어요?”“아니요, 제가 자신을 정확히 아는 거죠.”“당신이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이번에는 틀림없이 장가희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문을 연 안시연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 경찰이었다.여러 명 가운데 맨 앞에 선 경찰이 그녀에게 경찰증을 보여주었다.“경찰입니다. 일상적인 검사이니 협조해 주십시오.”안시연은 이내 상황을 파악했다. 이것은... 성매매를 잡는 것이다.그녀는 방 안의 상황을 생각하니 머리가 쭈뼛 섰다.하지만 경찰은 이미 안으로 들어왔다.연정훈과 양혁수가 거만하게 서 있고, 소파에는 알파카 두 마리가 있었다.중요한 것은, 양혁수가 목욕 가운을 입고 있고 그와 연정훈은 모두 방을 예약한 사람이 아니다.안시연이 설명하려는데, 경찰이 또 서브룸에서 술에 취해 쓰러진 남자를 찾아냈다.이에 양혁수도 놀랐다. 그가 방에 들어왔을 때 서브룸에 사람이 있는 것을 전혀 몰랐다.“안시연 씨, 이 방은 당신과 장가희 씨가 예약한 거 맞죠?”경찰의 질문에 안시연은 혼란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럼, 이 세 남자는 어떻게 된 겁니까?”안시연은 말을 못 했다.그녀의 첫 반응은 연정훈의 신분이 특수해서 큰일 날 수 있으니 절대 이 일에 휘말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게다가 양혁수의 옷차림을 보고 그쪽으로 생각하지 않기도 힘들다.그녀는 엉겁결에 연정훈 앞에 서며 말했다.“이분은 방을 잘못 찾아 들어왔습니다. 모르는 사람입니다.”경찰은 어리둥절해했다.양혁수는 헛웃음을 지었다.‘좋아. 차별 대우를 하겠다, 이거지?’화가 잔뜩 났던 연정훈은 안시연의 말을 듣고 화가 거의 다 가라앉았다.‘그래도 누구와 가까운 사이이고 누구와 먼 사이인지는 아는군.’하지만 안시연은 곧바로 양혁수를 가리키며 말했다.“이 사람은 제 남자친구인데, 저를 보러 왔고요. 불법행위를 하지 않았습니다.”양혁수는 눈이 번쩍 뜨였고, 연정훈은 어이가 없었다.그는 안시연이 왜 그러는지 안다. 평소라면 이성적으로 잘 대처했다고 그녀를 칭찬했겠지만 지금 이 순간 전혀 기쁘지 않다.그는 낯선 사람이고 양혁수가 남자친구라고 말하다니.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경찰서에서 안시연의 왼쪽에는 연정훈이, 오른쪽에는 양혁수가 나란히 앉아 골치 아픈 조사서를 쓰고 있었다.양혁수는 거짓말을 술술 뱉었다.“저와 제 여자 친구가 대화 중이었는데 이 낯선 남성분이 문을 두드렸고 문을 열자마자 강제로 집 안으로 들어와 깜짝 놀랐다고요!”“...”경찰이 바보도 아니고 연정훈과 안시연은 내내 서로를 부축하며 걸어온 걸 지켜봤었다. 서로 모르는 사이라는 말은 뻔한 거짓말이었다.“저기요. 경찰서에서 진실만을 말하세요!”양혁수는 진지한 얼굴로 방금 했던 말을 다시 뱉었다.“...”안시연은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었다.옆에 앉은 연정훈은 내내 침묵을 지켰다.경찰이 연정훈에게 질문하려고 하자 진수빈이 모두 막아섰다.“잠시만 기다려주세요.”‘기다려?’‘대체 뭘 기다리는 거지?’어리둥절해 보이는 경찰에 안시연이 손을 들고 먼저 조사를 받겠다고 했다.“저기 만취한 남성과는 어떤 사이입니까?”“저는 모르는 사람입니다.”“어떻게 안시연 씨 방으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까?”“저는 잘 모릅니다.”“어떻게 저 사람을 발견했습니까?”“제가 발견한 게 아니라 경찰이 먼저 발견하지 않았나요?”“...”양혁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진지한 얼굴의 안시연이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걸 듣고 있던 연정훈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안시연이 연정훈을 향해 낮은 소리로 말했다.“정말 몰라요.”“질문에 하나도 답하지 못하면서 왜 손을 든 거야?”말문이 막혀버린 안시연은 몰래 입을 삐죽였다.이동하는 내내 자신의 옆을 지켜준 고마운 마음에 대신 조사를 받겠다고 한 건데 연정훈은 자신의 마음을 몰라줬다.안시연은 한숨을 내쉬었다.조사가 잠시 중단되고 안색이 어두운 경찰을 보며 안시연은 상황 설명을 다시 이어가려고 했다.그때, 연정훈이 안시연의 손을 잡았다.“아무 말도 하지 마.”안시연이 당황해했다.“네.”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데 다른 한 손이 덥석 안시연을 잡았다.???고개를 돌리자 양혁수가
양혁수는 그녀가 갑자기 대담해진 것에 깜짝 놀랐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변여름, 내려가.”변여름은 말을 듣지 않고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살며시 쓸어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그의 어깨를 감쌌다.그녀가 고집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양혁수는 어지러운 머리를 억지로 참고 그녀를 몸에서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그녀의 몸에 닿자 손바닥이 부드러운 감촉에 젖어들었다.그는 마치 번개에 맞은 듯 머리가 하얘졌다. 손에 힘이 빠졌다.‘젠장. 이 꼬맹이 속옷도 안 입었어.’양혁수는 변여름이 꽁꽁 싸맨 옷차림을 보고 적어도 선을 지킬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허세를 부린 것이었다.목을 감싼 변여름은 이미 그의 반응을 예상한 듯 조급해하지 않고 마치 요정처럼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양혁수는 변여름의 팔을 잡고 얼굴을 찡그리며 진짜 화가 난 척 말했다.“계속 선을 넘으면 나 진짜로 화 낼 거야.”그 말을 듣고 변여름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을 감싼 손이 약간 풀렸다.양혁수는 속으로 안도하며 변여름을 제압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그는 그녀의 팔을 떼어내고 그녀를 완전히 떼어내려고 했지만 변여름은 갑자기 그를 공격하며 손을 꽉 잡고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양혁수는 멍해졌다.마치 머리가 텅 빈 것처럼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 몸을 뒤로 짚으며 눈을 크게 떴다.변여름은 그에게 강제로 키스할 뿐만 아니라 양혁수의 입술에 닿는 순간 능숙하게 두 입술로 그의 아랫입술을 감싸 안았다. 양혁수가 놀란 틈을 타서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전례 없는 경험에 양혁수는 숨이 가빠지고 두피가 저릿저릿했다.변여름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기가 코를 찔렀고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정신이 몽롱해졌다. 온몸이 굳어 버렸지만 저항할 힘이 없었다.양혁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그녀의 키스를 피하면서 손에 힘을 주어 변여름을 밀어내려고 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자신에게 주먹을 쓰지 않을 것을
양혁수가 말했다.“네가 날 좋아하는 건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야. 그러면 나중에 더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도 좋아하게 될 거야.”양혁수는 마침내 변여름의 논리적 허점을 찾아내 정확하게 반박했다.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나중에 노지혜 씨가 그러더라고요. 내가 오빠를 좋아하기 때문에 오빠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거라고요. 노지혜 씨는 오빠를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직 저의 오빠만 좋아하죠.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이 오빠보다 더 좋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저는 오빠만 바라보니까요.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제 눈에는 오빠밖에 안 보여요.”양혁수는 침묵했다.“...”‘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또다시 변여름의 고백 타임이 되어버렸네.’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일 무사히 떠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침묵 속에서 변여름이 그에게 물었다. “오빠, 오늘 오빠 옆에서 잠들어도 돼요? 내일이면 떠나잖아요. 오빠가 절 데려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아요. 제가 또 붙잡으면 오빠가 화낼 테니까 그냥 조용히 옆에 있을게요. 내일 아침 꼭 웃으며 오빠를 보내드릴게요.”양혁수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말이 왠지 믿음직스럽지 않다고 느꼈다.변여름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지만 눈에는 실망이 스며들어 있었다.“우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했는데도 오빠는 나를 단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것 같아요. 떠날 땐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겠죠. 전에 했던 건방진 말들은 모두 허세였어요. 나도 사람이에요. 아무리 기다려도 답을 받지 못하면 슬퍼질 수밖에 없어요. 오빠가 화내는 것도 정말 싫어하는 것도 다 싫어요. 그리고 이번엔 오빠를 붙잡을 자신이 없어요. 오빠, 에든베러로 가는 거죠? 거기에는 오빠와 양시연 언니의 추억이 있잖아요.”말을 마치자 그녀는 한순간에 기운이 빠진 듯 축 처졌고 머리 위에는 걷히지 않는 먹구름이 드리워진 듯했다.양혁수는 사랑을 얻지 못하는 아픔을 알았기에 그녀의 감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변여름은 항상 양혁수에게 변백호를 놀리는 농담을 했지만 사실 그 농담 속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단지 그녀가 처음 그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가 변백호에게 미친 영향 때문이라는 것을 양혁수는 알지 못했다.변백호는 그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고 그녀의 많은 행동은 변백호의 묵인 아래 이루어졌다.분명 전에는 모두 ‘비정상’이었는데 변백호가 한 번 외출하고 오더니 정상적인 사람을 만나고 나서 갑자기 그녀에게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변여름은 그걸 참을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씨 가문의 가풍에 싫증을 느꼈는지 다음 날 떠난 것을 변여름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아침 일찍 양혁수는 가방을 메고 혼자 외출했고 그 흰 고양이도 데려갔다.변여름이 맨발로 방에서 뛰쳐나왔을 때 복도는 희미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고 변백호는 혼자 창가에 서서 아래층을 깊게 응시하고 있었다.그녀는 변백호의 소매를 잡아당겼지만 변백호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변여름은 조용히 작은 발판을 옮겨 놓고 그 위에 올라섰다. 변백호를 안고 변백호처럼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그의 모습이 마당에서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 그녀는 봤다. 흰 고양이가 그의 어깨에 앉아 있었고 부드러웠다.그녀는 변백호에게 물었다.“다시 올 거예요?”그들의 모국어는 라틴어였고 평소 집에서 대화할 때도 라틴어를 썼다.변백호는 그녀에게 대답했지만 한국어로 말했다.“왜 돌아와? 네가 고양이를 괴롭히는 걸 보려고?”변여름은 의문스러웠다.???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녀는 변백호의 심정을 이해했다. 친구가 없던 기묘한 소년이 친구를 데려왔는데 결국 그 친구가 자기 가족이 모두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는 창피했을 것이다.다행히 양혁수는 나중에 변백호와 여전히 친하게 지냈다.추억에서 벗어나 변여름은 양혁수에게 물었다.“그 흰 고양이는 어떻게 됐어요?”양혁수는 말했다.“내가 집으로 데려가서 집사에게 맡겼어. 재작년에도 잘 지내고 있었어.”“다행이네요.”그녀가 안도하는 것을 듣고 양혁수는 그녀를 여
변여름은 잠깐만 있겠다고 했지만 결국 커다란 베개를 양혁수 옆에 두고 몸을 기대었다. 그녀는 얼굴을 베개에 살짝 묻은 채 마치 아기 고양이처럼 조용히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그녀가 곁에서 잠든 모습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양혁수는 이미 익숙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몸을 눕히고 눈을 감은 채 그녀의 말을 들었다.“오빠,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요?”양혁수는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응...”그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네가 여덟이나 아홉 살쯤 되었겠지.”“아니에요.”변여름은 그의 말을 부정했다.그는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아니라고? 내가 변백호랑 뉴성에 놀러 갔을 때 변백호가 널 데리고 왔잖아.”“저희 오빠랑 혁수 오빠가 처음 만나고 오빠를 집에 데려다줄 때 우리가 만났어요.”변여름이 바로잡았다.양혁수는 기억이 났다.놀란 표정으로 손을 베개 삼아 머리를 기대고 진지하게 되물었다.“그때 네... 네 살?”“거의 그렇죠.”‘정말 대단해. 그때 일을 다 기억하다니.’양혁수는 깊이 회상했다.그해 갓 성인이 된 그는 양지원과 함께 뉴성에서 열린 한국 상회의 파티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변백호와 불편한 일이 있었다.두 사람의 첫 만남은 서로를 싫어하는 사이였다.하지만 그날 밤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려던 순간 마당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밖으로 나가 확인했을 때 그는 피투성이가 된 변백호를 발견했고 변백호는 누군가의 습격을 받아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다.열여덟 살의 소년은 정의감이 넘쳐흘렀고 모른 척할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백호를 구한 뒤 그의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변여름을 보았다.그는 변씨 가문에 머물렀고 변씨 가문의 사람들은 변백호를 구해준 것에 감사하며 귀빈으로 대접했다.해가 질 무렵 그는 뒷정원을 거닐다가 정교한 인형 같은 아이를 발견했다. 그는 변여름은 너무 귀여워서 마치 꿈속에서 그리던 여동생 같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그녀
집으로 돌아오니 저택은 조용했다.양혁수는 간단하게 샤워하고 내일 떠날 준비를 하려고 전화를 걸려 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그는 문을 열었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가래떡 베개였다. 하얀색 베개가 변여름의 품에 안겨 있었고 크기는 거의 그녀의 키와 같았다.변여름은 고개를 살짝 들어 먼저 눈을 보였다.“오빠.”그녀는 긴 원피스 잠옷을 입고 겉옷은 작은 재킷을 입어서 긴 소매로 몸을 꽁꽁 싸맸다.양혁수는 술을 마셔서 머리가 띵했지만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달콤한 향기를 맡자 오장육부가 맑아지는 듯했으며 꽤 기분이 좋았다.그는 이마를 눌렀고 물었다.“무슨 일이야?”“오빠랑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어요?”시간이 늦었고 양혁수는 그녀를 경계하며 입을 열어 거절하려 했지만 변여름이 말했다.“잠깐만요. 오빠는 내일 떠나잖아요. 오빠랑 얘기 좀 하고 싶어요.”그녀는 품에 안은 베개를 꽉 껴안았고 양혁수는 베개가 눌린 주름을 보며 그녀의 마음속 갈등을 느꼈다.그녀를 달래지 않으면 내일 그는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양혁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옆으로 돌려 변여름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그녀의 눈빛이 반짝였고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양혁수는 가정부에게 야식을 만들어 달라고 했고, 그녀에게 영화를 틀어주었다. 음식은 따로따로 들어왔고 그로 인해 오랫동안 단둘이 있는 시간이 끊어졌다.침대 끝 쪽 카펫에 앉아 그는 변여름과 나란히 앉았다. 앞에는 음식이 가득했고 맞은편에는 변여름이 선택한 추리 영화가 나왔다.처음에는 그는 변여름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려고 했다. 그는 계속 멕하든에 머물며 변여름과 함께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없었다.하지만 영화를 보기 위해 방 안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졸음이 쏟아졌다. 그는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잠시 졸았다.짧은 잠 동안 그는 꿈꾸었고 꿈속에는 피뿐이었다.한을 품고 죽은 사람처럼 한 쌍의 눈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양혁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혼란스러운 어둠 속에서 변여름의 연이은 부름을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쏟아졌다.변여름은 먹던 것을 멈추고 편의점 직원에게 우산을 빌려 길 건너 차 쪽으로 향했다.“내가 운전할게.”양혁수가 말했다.변여름은 그를 거절했다.“오빠는 그냥 앉아 있어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눈에 물이 들어가면 안 좋아요.”“눈은 이제 괜찮아.”“그래도 술 마셨잖아요. 음주 운전 하면 안 되죠.”‘고작 백 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데.’양혁수가 말을 멈추는 사이 변여름은 이미 우산을 펼쳐 문을 열고 빗속으로 들어갔다.문이 열리자 비바람이 맹렬하게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변여름의 작은 몸은 역풍을 맞으며 비바람 속에서 무기력해 보였다. 마치 바람이 세게 불면 바로 날아갈 것 같았다.우산이 거추장스러워지자 중간쯤 왔을 때 그녀는 우산을 접고 재빨리 차 쪽으로 뛰어갔다.그녀가 차에 오르자 양혁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뒤에서 직원이 외국어로 한참을 부르지만 양혁수는 반응하지 않았고 직원은 어설픈 영어로 다시 소리쳐서 문을 닫으라고 했다.마침내 변여름은 차를 편의점 문 앞에 대었다.그녀가 다시 내려서 그를 데려오려는 것을 보고 양혁수는 먹지 않은 음식들을 모두 포장해 들고 나왔다.변여름은 그가 나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자신의 차 문을 닫고 그에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꽤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두 사람은 모두 차에 탔다.구운 바나나와 구운 고구마의 달콤한 냄새가 좁은 공간을 빠르게 채웠다.양혁수는 변여름이 꽤 많이 먹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자마자 음식을 뒷좌석에 놓았다.“돌아가서 따뜻하게 데워 먹어.”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변여름은 그에게 기대며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안경을 벗고 얼굴에 묻은 물을 닦아주었다.“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요. 내가 데리러 갈게요.”변여름은 한숨을 쉬며 마치 양혁수가 뭔가 잘못한 일을 한 것처럼 말했다.양혁수는 태연하게 말했다.“고작 물 몇 방울뿐이야.”변여름은 대답하지 않고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그를 닦아주었
양혁수는 술을 조금 마신 탓에 졸음이 밀려왔다.몽롱한 가운데 그는 마치 경인처럼 눈이 내리는 어느 도시를 떠올렸다. 한때 홀로 그곳을 여행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고 용산 거리의 눈 내린 풍경은 언제나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변여름이 갑자기 그를 불렀고 졸음은 한순간에 흩어졌다.“구운 바나나?”“네. 달콤해요.”양혁수는 그녀가 열정적으로 추천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사자.”“그럼 제가 사러 갈게요.”변여름은 기분 좋게 웃으며 재빨리 안전벨트를 풀었다.양혁수는 귀찮아 차에서 내리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가 차 앞을 돌아 지나가는 순간 마주 오는 건장한 남자 둘을 보고는 망설임 없이 차 문을 열고 그녀를 따라 걸었다.편의점은 길 건너편에 있었고 길이 넓어 변여름은 거의 반대편까지 다다랐다. 돌아서서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그녀는 살짝 놀랐다.양혁수는 코트를 여미며 그녀 옆을 지나쳤다.“멍하니 뭐 해? 더 늦으면 네 구운 바나나 다 팔릴지도 몰라.”“괜찮아요.”변여름은 그를 따라잡으며 기분 좋게 웃었다.“저긴 늦게까지 구워요.”편의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밖에서는 이미 달콤한 향이 퍼지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구운 고구마도 팔았는데 꿀 시럽 같은 것을 곁들여 양혁수에게는 다소 낯선 맛이었다.하지만 졸음은 어느새 사라졌고 변여름과 함께 유리창 앞에 앉아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변여름은 드물게 어린 소녀 같은 모습을 보이며 높은 의자에 앉아 발을 가볍게 흔들었다. 한 입씩 맛보며 천천히 음식을 나눠 주었다.“앞에 식당이 하나 더 있어요. 오빠랑 노지혜 씨랑 자주 가는 곳인데 다음엔 오빠도 같이 가요.”변여름이 양혁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양혁수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그는 변여름의 집착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그녀가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양혁수는 손을 뻗어 힘주어 그녀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나를 데려간다고? 네가 나를 데려갈 필요 있어? 이 도시는 십 년 전에 네 오빠랑 다 돌아다녔어.
“실험하다 실수로 손을 살짝 베었어요.”변여름이 말했다.양혁수는 속으로 그녀가 요 며칠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실험에서 다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과일은 더 자르지 않아도 돼. 굳이 나를 위해 요리할 필요 없어.”그가 차분히 말하자 변여름은 잠시 멈칫했다.그의 차가운 말투를 듣자 그녀는 또다시 그가 거절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변여름의 마음은 때론 강철처럼 단단했지만 가끔은 무너질 때도 있었다.실망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과일을 입에 넣으며 평소처럼 혼자 감정을 추스르려 했다.양혁수는 그녀 곁에서 일어나 주머니에 손을 넣고 저택 쪽으로 걸어갔다.“일단 손에 난 상처부터 낫게 해. 네가 해준 밥 몇 끼쯤 안 먹어도 괜찮으니까.”변여름은 의아했다.‘응?’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던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 순간 퍼지는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고개를 돌리니 그는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변여름은 손에 쥔 것을 내려놓고 양혁수를 따라 뛰어갔다....멕하든의 겨울은 비교적 따뜻했다.양시연이 첫눈 사진을 공유했을 때 양혁수는 이미 한 달 넘게 변씨 가문에 머물고 있었다.두 번만 더 치료받으면 눈 위의 흉터를 완전히 지울 수 있을 터였다.밤이 되자 변여름은 이미 차를 준비해 두었고 밖에서 뛰어 들어와 그에게 말했다.“오빠, 이제 출발할까요?”양혁수는 소파에서 일어나 변여름이 건네준 겉옷을 받아 들고 함께 밖으로 나갔다.양혁수는 눈을 보호하기 위해 요즘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을 자주 착용했다.시간이 흐르면서 예전의 거침없고 활기찬 모습은 많이 사라졌고 안경을 쓰니 더욱 편안하고 자유로운 옷차림을 했다. 마치 느긋한 귀공자처럼 보였다.변여름은 그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고 원인을 찾으려 애썼다.차에 타자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조용했다.찰리의 개인 병원은 규모가 크지 않았고 낮에는 꽤 바빴지만 요즘 밤에는 양혁수만을
양지원이 양혁수의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양혁수의 어이없고 짜증 섞인 불평을 듣고 한참을 웃다가 멈췄다.“백호 한 말도 틀리지 않아. 네가 꼬시는 능력은 있는데 차버리는 건 못하겠어?”양혁수는 할 말을 잃었다.그는 온갖 생각을 해봤지만 도대체 자신이 어떤 점에서 변여름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을 고치고 싶은 마음이었다.“됐어요.”양지원이 말했다.“그냥 휴가라고 생각하고 좀 있어. 요 몇 년 동안 너무 심심하게 살았잖아. 이참에 좀 짜릿한 일을 겪어봐.”“차라리 심심한 게 나아요.”양지원은 속으로 혀를 찼다.양지원과 양혁수는 전화를 끊었고 양혁수는 대나무 의자에 기대어 앉아 계속 머리를 앓았다.그는 벌써 사흘 더 있었지만 변여름은 마치 껌딱지처럼 그를 따라다녔다.이때 그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목이 마른 것 같아 무의식적으로 옆에 있는 물을 찾았다. 손으로 컵을 만지려는 순간 컵이 이미 그의 손 아래로 밀려왔다.고민할 것도 없이 그는 변여름이 돌아왔음을 직감했다.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컵을 들어 익숙하게 빨대를 물고 한 모금 마셨다.이 엉터리 컵도 변여름이 그를 괴롭히려고 만든 것이었다. 분홍색 큰 개구리 모양이었고 버튼을 누르면 뚜껑이 항상 ‘탁’하고 튀어나왔다.변여름은 그의 눈이 불편하니까 이 컵을 쓰면 물을 쏟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오빠, 나는 이미 찰리 선생님과 약속을 잡았어요. 우리는 저녁 6시에 가요.”변여름이 말했다.그의 눈은 다친 곳이 나아서 더 이상 붕대를 감을 필요는 없었지만 흉터가 남아 있어서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했다.양혁수는 말했다.“저녁에 갈 필요 없어. 오후에 갈 거야.”변여름은 고개를 숙이고 과일을 깎으며 자연스럽게 말했다.“오빠는 셋째 오빠와 오후에 골프 치기로 했잖아요? 골프 치고 샤워하면 시간이 늦어질 거예요.”양혁수는 침묵했다.‘잊고 있었다.’그는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눌렀다.양혁수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양지원은 특별히 지시해 일로 그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