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부자연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답안지를 책 속에 끼워 넣으려 했다.연정훈이 계속 쳐다보자 그녀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휴지를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안경을 닦아요.”연정훈은 휴지를 보지도 않고 손을 뻗어 책을 펼쳤다.수업 중이라 연정훈에게서 다시 뺏어올 수도 없는 상황이다.손바닥만 한 답안지를 손쉽게 손에 넣은 연정훈은 이내 뒤집어 보았다. 49와 123 두 개 숫자가 있었다.49가 점수라는 것을 아는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낙제야?”안시연은 입술을 깨물며 책 모서리를 비비적댔다.“이제 막 수업을 시작해서 학생들의 수준을 알아보기 위한 시험이에요.”연정훈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다른 사람들도 이래?”“비슷해요.”“그 옆에 숫자는 뭐야?”안시연이 입을 다물고 있자, 옆에 있던 여자가 끼어들었다.“그건 등수예요.”“...”연정훈은 곁눈질로 그 여자를 훑어보았다. 30대로 보이는 여자는 젊은 총각과 함께 수업을 들으러 왔다.그가 묻지도 않았는데 여자가 또 한마디 했다.“반에 학생 수가 130명이에요.”말을 마친 그녀는 답안지 한 장을 책상 위에 놓았다.연정훈이 힐끗 보니 3등이었다.“...”왠지 집에서 제일 못난 말썽꾸러기 아이의 학부모 회의에 참석했다가 수모를 당한 기분이었다.그는 어이가 없어서 입술을 꽉 깨물고 안시연의 답안지를 뒤집어 놓았다.강사는 학생들이 듣든 말든 열심히 강의하고 있었다.연정훈이 낮은 목소리로 안시연에게 물었다.“너 성진대학교 회계학과를 나왔는데, 그동안 배운 것은 다 선생님께 돌려줬어?”안시연은 억지를 부렸다.“이건 세법이에요.”“회사 다닌 지 몇 년 됐어? 이 부분에 대한 지식이 하나도 없어?”안시연은 얼굴이 빨개졌다.그녀는 어려서부터 성적이 뛰어났고 학부모에게 이런 비난을 당해본 적이 없다. 외할머니는 그녀의 유일한 학부모로서 항상 그녀를 칭찬했다.여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울분을 토했다.“보름 전에 강의를 구매했는데, 정식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들어야 하는 온라인 수업
성진대학교에 들어갈 정도이니 안시연의 학습 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다만 너무 많은 일에 얽매여 있어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오늘 저녁 이 몇 시간 동안은 정말 집중해서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수업이 끝나고 다른 사람들이 다 갔는데도 그녀는 계속 문제를 풀었다.연정훈은 답안지를 그녀의 옆에 놓고 연습지를 들여다보며 하나하나 풀게 했다.안시연은 말없이 열심히 풀다가 10시 반이 되어서야 멈추었다.“일단 집에 가요.”더 늦으면 교실 문도 닫을 것이다.연정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연습지를 가져갔다.“답과 맞춰봤는데, 다 맞아요.”그녀는 아주 자랑스럽게 말했다.연정훈은 그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돌아가서 계속 풀어.”“알았어요.”비가 줄어들었지만 완전히 그치지는 않았다.안시연은 연정훈을 따라 건물에서 나온 후에야 그가 직접 운전해서 왔다는 것을 알았다. 차는 건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되어 있었다.그는 우산을 하나만 가져왔고, 그녀를 찾아갈 때 온몸에 비를 맞았다.두 사람이 같이 쓰려고 하니 편할 리 없었다.안시연은 차에 우산이 더 있으면 가지러 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연정훈이 그녀를 보면서 말했다.“모자를 써.”안시연은 엉겁결에 알겠다고 대답하고 후드티 모자를 푹 눌러썼다.모자와 머리카락이 그녀의 시선을 가렸는데, 미처 정리하기도 전에 연정훈이 그녀의 어깨를 껴안았다. 왼쪽 어깨가 남자의 넓은 가슴에 닿자, 그녀는 멍해졌다.연정훈은 한 손으로 우산을 들더니 두 사람의 앞쪽을 향해 버튼을 눌렀다.우산이 쫙 펴지면서 미세한 물방울들이 사방으로 흩날렸다.약간 차가운 기운이 안시연의 얼굴에 밀려왔다.연정훈은 곧바로 그녀를 껴안고 계단을 내려간 후 재빨리 차 쪽으로 걸어갔다.건물 안에 있을 때는 가랑비 정도로 생각했는데, 빗속에 들어서니 빗물이 우산을 때리는 쫘르륵 소리가 들리며 꽤 큰 비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비를 맞지 않았고, 단지 발밑이 약간 시렸다.차 옆에 도착하자, 연정훈이 차 문을 열어주
집에 들어선 안시연은 맨 먼저 주방에 갔고, 생강 두 조각을 찾아내고 기뻤다.며칠 주방에 들어가지 않은 그녀는 생강차를 끓였을 뿐만 아니라 생강 우유푸딩까지 한 번에 성공했다.그녀의 ‘작품’들을 바라보는 연정훈의 마음은 착잡했다.이전에 그를 좋아할 때 그녀는 저녁 식사로 최소한 5개 요리를 했었다.지금은 이런 디저트 하나를 만드는 것도 기분이 좋아야 가능하다.그의 마음은 속상함 반 즐거움 반이었다.속상한 것은, 그녀의 좋은 감정이 너무 가벼워서 확 타오르다가 이내 꺼졌기 때문이다.즐거운 것은... 그녀가 생강 우유푸딩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그는 생강을 싫어하면서도 한 접시를 다 먹어버렸고, 그러고 나니 온몸이 따뜻해졌다.방에 돌아가서 샤워한 그는 수건을 가지고 들어가지 않아 안시연에게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그녀가 옆 방에 옮겨간 것이 생각났다.그 순간 즐거움보다 속상한 감정이 커졌고, 따뜻함도 사라졌다.그런데 샤워를 마치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머리를 닦고 있던 그는 말없이 걸어가서 문을 열었다.동물 잠옷을 입은 안시연이 문 앞에 서 있었다.“서재의 프린터를 좀 쓸게요.”“...편할 대로.”“고마워요.”안시연은 손을 뻗어 문을 닫았다.“...”‘정말 예의가 바르네!’그가 문가에 서서 언짢아하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또 울렸다.그는 바로 문을 열지 않고, 몇 초 후에야 손잡이를 잡았다.문이 다시 열렸다. 안시연은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프린터가 반응이 없어요...”연정훈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반응이 없는데, 나를 찾으면 반응이 있어?’“한번 봐주실래요?”안시연의 요청에 연정훈은 무표정한 얼굴로 문을 나섰다.안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의 뒤를 따라 서재로 갔다.그가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프린터는 작동하기 시작했다.“고마워요.”그녀는 또 고맙다고 말했다.연정훈은 이 말이 귀에 거슬려서 대답하지 않고 책상 앞에 앉았다.안시연은 그를 한번 쳐다보고는 눈치 있게
연정훈은 안시연의 침대 옆에 앉아 그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는 확실히 살이 빠졌다. 며칠 사이에 턱이 다 뾰족해졌다.그는 마음이 아팠지만 그녀의 옹고집을 생각하면 이가 갈렸다.그에게 앙탈을 부리고 양혁수와 엮이고.예전처럼 좀 얌전히 있을 수 없을까?안시연은 그의 속마음을 읽은 듯 눈살을 찌푸리며 돌아누웠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잠시 가만히 있던 연정훈은 이불을 위로 끌어당겼다.잠시 더 머물고 싶은데 휴대폰이 울리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왔다.안시연이 깨어날까 봐 그는 일어나서 나갔다.그녀의 방 문을 닫은 후에야 그는 걸음을 재촉했다.소리는 안방에서 들려왔다. 그가 방금 깜박하고 문을 닫지 않았던 것이다.휴대폰을 집어 들고 번호를 확인한 그는 눈빛이 어두워졌다.양민아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그는 느릿느릿 전화를 연결한 후 말하지 않았다.전화기 저편에서 양민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연정훈?”“무슨 일이야?”그의 쌀쌀한 말투에 양민아는 한숨을 쉬었다.“혁수와 안시연의 일을 알고 있지?”소파에 앉은 연정훈은 몸이 반쯤은 어둠 속에 있었다.“무슨 일인데?”양민아는 의아해했다.“설마 몰라?”“얘기해 봐.”양민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양혁수가 안시연과 결혼하려 했던 것을 말했다.“창수 아저씨 말로는 큰외삼촌까지 개입했다고 하던데, 네가 말했어?”“응.”“미안해. 혁수가 허튼짓을 해서 너에게 폐를 끼쳤어.”연정훈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그런데...”양민아가 말머리를 돌렸다.“정훈아, 내가 한마디 더 할게. 안시연 씨에게 이성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둬야 한다고 일깨워 줘야 할 것 같아.”연정훈은 입꼬리를 살짝 내리며 입을 열었다.“그 일에 대해 안시연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해?”양민아는 잠시 침묵했다.“아니, 그런 뜻이 아니야. 내 말은 이런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는 거야. 혁수가 양씨 가문에서 어떤 존재인지 너도 알잖아.”“이런 상황을 막으려면 나한테 내 사람을 잘 관리하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양 대표님
안시연이 깨어나 보니 서브룸 침대에 누워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연정훈이 그녀를 안고 방으로 돌아간 것이다.그녀는 냉정하게 생각해 보았다.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 연정훈이 그녀를 데리러 왔고 시험문제의 포인트를 찍어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안고 방으로 간 후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이는 화해하자는 신호일 것이다.그들의 관계로 볼 때, 계속 팽팽하게 대립할 수는 없다.그래서 그녀는 아침을 만들 때 연정훈의 것까지 만들었다.얇게 썬 햄은 진수빈이 보내온 최상급 햄을 썰어놓은 것이다. 뜨거운 국수에 올리니 향긋한 냄새가 피어올랐다.연정훈도 잠시 생각해 보았다.그는 안시연이 손을 내민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녀의 그릇에는 햄도 없었다.아침부터 그의 마음을 답답하게 하던 속상한 감정도 고개 냄새와 함께 사라지고 가뿐한 기분만 남았다.‘됐다. 시시콜콜 따질 게 뭐가 있는가?’마음이 편해진 그는 젓가락을 들더니 햄 한 조각을 안시연의 그릇에 옮겨놓았다.안시연은 살짝 놀랐고, 연정훈은 얼굴에 어색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비싼 금테 안경 뒤에 감정을 숨겼다.그는 담담하게 말했다.“먹자.”안시연은 대답하면서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그녀는 소시지를 좋아하고 햄은 싫어하기 때문이다.하지만 주는 걸 먹지 않을 수도 없어서 그냥 입에 넣었다.연정훈은 그녀가 꿀떡 삼키는 모습을 보고 안쓰러운 나머지 정색하며 자기 그릇에 있던 햄을 전부 주었다.안시연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오전에 진 비서가 음식을 보낼 거야. 그리고 네가 운전을 배우고 수업을 듣는 동안 저녁 식사도 챙겨줄 거야.”연정훈의 말에 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이렇게 처리하는 것이 좋다. 조금 전까지도 그와 관계가 완화되면 저녁에 와서 밥해줄까, 고민하던 참이었다.이렇게 되면 그녀는 밥을 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연정훈이 그녀를 안방이 아닌 서브룸으로 안아갔다는 것은 당분간 그녀와 그 일을 하지 않을 생각이다.왠지 모르지만 그녀는 마음이 전에 없이 홀가
연정훈은 병이 나은 후, 아직 이승우 등 친구들과 모이지 못했다.부승희가 작은 장사를 하다가 문제가 생겨서 그들을 불러 모았다.“승희가 한참 동안 네 얘기만 했어. 한 번 나오면 어디가 덧나니?”전화에서 이승우가 연정훈을 비난했다.연정훈은 식탁에 앉아 안시연이 가져온 밀크티를 마시며 담담하게 말했다.“시간이 없어.”“산후조리라도 해? 벌써 며칠째 나오지 않고 집에만 있는 거야?”연정훈은 모임에 나가기 귀찮아서 한마디 했다.“승희한테 뭘 원하는지 확실하게 말하라고 해. 내가 사람을 시켜서 처리할 테니.”“지금 누구를 무시해? 승희가 네 덕을 보려고 그러는 줄 알아? 네가 오면 투자유치 계획을 들려주겠대. 괜찮은 것 같으면 그때 결정하면 돼.”연정훈이 입꼬리를 올렸다.“사업계획서를 나한테 보내라고 해.”“아무것도 안 먹힌다, 이거지? 쯧쯧! 그런데 네가 집에서 기다려도 소용없어. 승희가 안시연에게 전화했으니 안시연도 올 거야.”연정훈은 컵을 든 채 동작을 멈추었다. 안시연도 간다고? 오늘 저녁에 운전 연습을 하지 않나? 이렇게 하다 말다 하면 합격하는 게 더 이상하다.그는 어이가 없어서 가만히 있다가 컵을 내려놓았다.“주소를 찍어줘.”“아이고, 기다리지 않을 거야?”“...”부승희는 친구들을 모두 초대했고 일도 빈틈없이 처리했다. 그녀는 먹고 마시고 내기하는 등 모든 것을 준비했다.연정훈이 도착했을 때 이승우 등은 포커를 치기 시작했다.부승희가 일어나서 연정훈에게 자리를 내줬다.“승희야.”이승우가 입을 열었다.“왜?”“안시연은 도착했어?”부승희는 휴대폰을 꺼냈다.“내가 2시 넘어서 연락했는데, 초대에 흔쾌히 응했어. 아마 아직 퇴근하지 않았을 거야.”이승우가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연정훈을 쳐다보며 웃었다.“얼른 안시연 여신님을 모셔 와. 안 그러면 오늘 정훈 오라버니가 네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도 있어.”부승희는 연정훈의 옆에 앉았다.“내가 그걸 모를까 봐?”그녀는 팔꿈치로 연정훈을 쿡 찔렀다.“오빠, 요즘
안시연은 짐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부랴부랴 다른 직원들과 함께 출발했다.양주에 도착한 그녀는 업무 관련 인스타를 올린 후 바로 연정훈에게 문자를 보냈다.“짜증 나요. 감사팀 일인데 왜 저희를 보내는 걸까요?”장가희가 옆에서 투덜거렸다. 안시연도 이상하게 느껴졌다.이번 업무는 경인그룹에서 출자한 함풍목재라는 회사와 관련된 것이다. 함풍목재는 몇 년째 계속 적자를 냈고 올해는 심지어 몇 번이나 자금줄이 끊겼었다. 그래서 경인그룹 임원진은 함풍목재 지분을 양도할 의향이 있는데, 함풍목재는 통제권을 잃지 않으려고 경인그룹과 지분 회수에 관해 협상 중이었다.하지만 지분을 양도하기 전에 경인 본사에서 최종 지분 매각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전문팀을 파견해 함풍목재의 경영 상황을 검토했다.“일손이 부족해서 그런가 봐요.”“그러니까 우리는 막노동하러 온 거예요.”안시연의 말에 장가희가 한숨을 쉬며 소문을 전했다.“그거 알아요? 함풍목재 대표도 연씨 가문의 사람인데, 연명걸이라고 연정훈 대표님과 같은 항렬이래요.”안시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장가희가 말을 이었다.“정말 하늘과 땅 차이네요. 연정훈 대표님은 경인을 훌륭한 기업으로 이끌었는데, 그 형제가 운영하는 회사는 파산 직전이라니.”안시연은 연정훈이 생각났다.능력으로 말하자면, 정말 그를 따를 사람이 없다.그때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려서 장가희가 문을 열러 갔다. 옆 방의 동료였다.“함풍의 연 대표님이 밥을 사준대요. 늦지 않게 얼른 서둘러요.”“네네.”장가희가 웃으며 달려와 안시연 팔짱을 끼었다.“드디어 좋은 일이 생겼네요.”안시연은 속으로 생각했다.‘뭐가 좋은 일이라는 거지? 우리는 함풍의 장부와 경영 상황을 조사하러 온 건데 대표한테 밥을 얻어먹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경인시.룸에서 한참 동안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사이좋고 감정이 깊다면서 양주에 가는 것도 몰랐어?”머리 회전이 빠른 이승우는 갖은 방법을 다 써서 연정훈을 비꼬았다.“연 대표님은 인터넷이 안 되나?
안시연은 출발 전과 출발 후, 그리고 방금까지 모두 3건의 메시지를 보냈으니 나무랄 데가 없었다.오히려 연정훈이 한 개도 답장하지 않았다.주요 원인은, 그의 개인 휴대폰도 거의 업무와 연관돼 있어 오늘 일찌감치 벚꽃동으로 돌아간 후 휴대폰을 꺼내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는 벚꽃동에서 안시연을 만날 줄 알았는데, 그녀는 휴대폰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연정훈은 감정이 풍부한 부승희의 낭독을 들으면서 불쾌함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은근히 미안한 생각까지 들었고, 안시연이 그의 답장을 받지 못해 또 잡생각을 할까 봐 걱정됐다.“오빠, 안시연이 오빠를 너무 사랑하네요.”부승희가 결론을 내렸다.연정훈은 말을 잇지 않고 침착하게 안시연에게 답장을 보냈다.“알았어.”“이것 봐!”부승희가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매력 있는 남자는 당당하고 절대적인 발언권을 가지고 있어.”“...”이승우는 간식을 가져다 먹으면서 카드를 던졌다.“상황을 보니 네가 아직도 안시연을 쌀쌀맞게 대하는 것 같네?”부승희가 말했다.“우리 오빠 조건이면 도도한 것도 정상이지.”한우빈이 연정훈을 바라보며 물었다.“안시연이 없는데, 오늘 밤 어디서 잘 거야?”연정훈이 곁눈질도 하지 않고 말했다.“안시연이 없으면 내가 잘 곳도 없겠어?”“잘 곳이 있다고 잠이 오는 건 아니잖아.”이승우가 느릿느릿 말했다.“나는 너와 달라. 재워줄 필요 없어.”연정훈이 마지막 카드를 던졌다.그가 이긴 것을 보고 이승우는 밑장빼기를 했나 해서 한참 확인했다.결과, 정말 연정훈이 이긴 것이었다.“성공한 남자는 사랑과 도박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군.”부승희가 계속해서 알랑거렸다.이승우는 하찮게 여기며 일어나더니 부승희더러 대신 놀라고 했다.머리 회전이 빠른 부승희가 연정훈에게 말했다.“오빠, 이번에 내가 이기면 나랑 같이 양주에 갔다 와야 해.”연정훈은 안시연이 생각나서 마음이 흔들렸다.하지만 입이 싼 이승우가 옆에 있어서 그는 얼굴에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위층 병실에는 양옆으로 각종 의료 기기가 늘어서 있었고 간간이 울리는 기계음은 마치 폭탄의 카운트다운처럼 들렸다.연정훈은 단 한 순간도 양시연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하룻밤 사이에 초췌해진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마치 피 한 방울 없는 듯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손을 꼭 잡고 싶었지만 혹여나 의료 기기에 닿을까 조심스러워 손끝에 힘조차 줄 수 없었다.그녀의 얼굴에는 상처 하나 없었지만 입술은 창백하게 변해 생명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폭발 응급처치 그리고 혼수상태까지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휘몰아친 듯했다.마치 오래전 그날처럼 갑작스레 울린 전화 한 통이 생각났다. 삼촌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갔지만 그는 이미 마지막 순간을 놓쳐버린 뒤였다.그때와 똑같이 반복되는 비극이였다. 또다시 교통사고가 났고 이번에는 연정훈의 아내와 아이가 그 중심에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병원으로 이송하는 동안 팽팽한 긴장 속에서도 냉정하게 일을 처리했다. 밤을 꼬박 새운 지금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그 순간의 수많은 가능성을 떠올렸고 온몸을 휘감는 공포에 휩싸였다.‘시연, 시연.’연정훈은 쉰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시간을 되짚어가며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깨어나길 간절히 바랐다.양시연이 괜찮은 모습을 보여야만 가슴속에 박혀 있던 돌덩이를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때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연정훈은 원래 아무런 대꾸도 할 생각이 없었지만, 양지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방 문이 열리자 그는 입을 열었고 그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쉬어 있었다.“어머님...”양지원은 급히 달려왔고, 경인에 막 도착했을 때쯤 양시연은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녀는 오는 내내 가슴을 졸였고 급한 마음에 뛰다가 그만 넘어져 발목까지 삐고 말았다.그녀는 초췌한 연정훈을 훑어보며 조용히 말했다.“이제 곧 아침이야. 밤새 한숨도 못 잤을 텐데 뭐라도 좀
[오늘 저녁 6시경 가로수길 중부에서 차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사고 직후 한 대의 마이바흐가 갑자기 폭발했으며 폭발의 여파는 상당히 컸습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보고되지 않았습니다.]“...”구타이 국제공항에서 선글라스를 쓴 한 여성이 뉴스를 바라보며 얼굴을 굳혔다.‘생각보다 일이 너무 빨리 터졌다. 탁승호 그 무능한 놈.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내가 그렇게 공을 들였는데.’연정훈도 양시연도 끝내 살아남았다.그녀는 이를 악물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러나 방송을 듣는 순간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었다. 일이 터진 이상 지금 당장 떠나야만 했다. 망설이면 다음 차례는 그녀가 될 것이었다. ‘인생은 길어. 너희들 끝까지 지켜보겠어.’병원에서.근처 병원에서 치료받았기에 개인 병원과는 달리 병실은 그렇게 호화롭지 않았다.반우희와 승주는 나란히 누울 수 있는 2인실에 배정되었다. 폭발의 충격을 받았지만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고 단지 깊은 기절 상태에 빠져 있었다.새벽 4시에 부승원은 두 아이와 함께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밤새 뜬눈으로 지새운 그들의 얼굴엔 피로가 가득했지만 누구도 잠들지 못했다.복도 넘어 다른 병실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이 초조하게 머물고 있었다.부승원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병상에 누워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었고 가라앉지 않는 긴장감이 온몸을 조였다.‘교통사고’와 ‘폭발’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칠 때마다 그의 온몸이 떨렸다.‘몇 초만 늦었어도...’“우희 언니, 왜 아직도 안 깨나?”“곧 깨어날 거야...”“승주 형도 아직 안 깨어났어.”두 꼬마는 각각 한 명씩 침대 옆에 앉아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새 입술이 삐죽해지고 커다란 눈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감정을 참지 못하고 결국 함께 울음을 터뜨렸다.“우희 언니...”“승주 형...”부승원은 침묵했다.“...”부승원은 이마를 눌러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이것은 이미 세 번째 생
어두운 저녁 거센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넓은 가로수길 양옆으로 거대한 나무들이 우뚝 서 있었고 그 사이로 한 대의 마이바흐가 갑자기 차선을 바꾸더니 커다란 굉음과 함께 두 그루의 나무 사이로 돌진했다.띠 띠디. 따르릉.폭탄을 연상케 하는 소리와 함께 경고음 휴대폰 벨 소리가 뒤섞여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 모든 소음은 순식간에 터진 에어백에 묻혀버렸다.양시연은 차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귓가에 울리는 진동과 멈추지 않는 타이어 소리가 여전히 차가 공중에 떠 있거나 어딘가에 걸려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코끝을 찌르는 지독한 냄새 점점 뜨거워지는 공기가 그녀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예고했다.아직 몇 분도 지나지 않았고 어쩌면 1분 내로 연정훈이 도착할 수도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차 안에 탄 사람들의 운명은 단 몇 초 안에 결정될 터였다.결국 그녀가 가장 두려워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몸은 움직일 수 없었고 곳곳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무언가가 몸 밖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양수뿐만이 아니라 피도 섞여 있을 것 같았다.그제야 생명이 이렇게도 연약하다는 걸 깨달았다.양시연은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고 마음속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부모님 연정훈 모두 마지막으로 보지 못했고 가장 지키고 싶었던 배 속의 아이마저 이제는 지킬 수 없게 되었다.“아!”그 순간 귓가에 힘찬 소년의 외침이 들려왔고 곧이어 덜컹거리는 거친 소리가 났다.그것은 발로 차 문을 거세게 걷어차는 소리였고 이어서 차 안으로 빗물이 쏟아져 들어왔다.양시연이 간신히 고개를 돌려보려는 그 순간 한 손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양시연 누나, 내가 꺼내 줄게요. 누나도 힘을 내요.”양시연은 깊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본 듯 본능적으로 소년을 향해 힘을 내기 시작했다.그러나 다음 순간 또렷한 띠 띠디 소리가 들려오자 두려움이 엄습했고 그녀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승주...너 먼저 가...”“싫어요. 절대 안 갈 거예요
도시 안이라 차에 도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반우희는 초보 운전자로 아직 면허도 따지 못했다.“우희 씨, 차를 좀 한적한 곳으로 몰아 기름을 다 소모해 버려요.”양시연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배는 점점 더 아파지고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이 점점 강해졌다.앞에서 반우희는 이미 운전석에 앉아 길을 주의 깊게 보며 눈을 크게 뜨고 운전하고 있었다.반우희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양시연 언니, 사실 지금 차를 모는 게 아니라 그냥 장애물 피하기 게임을 하고 있어요. 길 위의 차들만 피하고 있지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못 해요.”‘차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는데 한적한 곳으로 가는 건 더 어려워.’양시연은 반우희를 이해하고 응원하는 그것밖에 못 했다.“우희 씨, 3분만 더 참아요. 3분만 더 참으면 돼요.”연정훈은 몇 분 내로 인근 교통 시스템에 사람들을 보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반우희는 3분을 버틸 수 있다고 말할 수도 보장할 수도 없었다. 3분은 그녀에게도 너무 길게 느껴졌다.갑자기 앞에서 한 대의 차가 다가왔고 반우희는 눈을 크게 뜨며 핸들을 급하게 돌렸다.이번에도 너무 급하게 돌린 탓에 양시연은 다시 안전벨트에 의해 쪼여졌다.승주는 휴대폰을 들고 연정훈에게 상황을 계속 전달하며 양시연을 보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양시연 누나, 피를 흘리고 있어요.”“양시연!”연정훈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고 승주는 급히 전화를 양시연의 귀에 가져다 대었지만 양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더 이상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대신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띠 띠디.“정훈 씨, 우리 차에 아마 폭탄이 있는 것 같아요.”그 말을 듣자마자 전화 너머로 들려온 연정훈의 목소리는 마치 천둥에 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둘은 더 이상 말을 할 기회도 없이 반우희가 앞에서 소리쳤다.“양시연 언니, 앞에 바로 가로수길이에요. 차는 별로 없어요.”“차는 없지만 폭탄은 있어요!”승주가 절망적으로 외쳤다.“제발
빗방울이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고 양시연은 뒷좌석에 몸을 기대어 창밖의 빠르게 스쳐 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을지 생각했다.조수석에 앉은 반우희가 부승원에게 전화를 걸며 장난스럽게 말했다.“나 지금 어디 있는지 맞혀봐요.”승주는 질색하며 대꾸했다.“정말 오글거리네요.”양시연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반우희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감추고 고개를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부승원과 대화를 이어갔다.양시연은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확인하자 몇 분 전 연정훈이 보낸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그는 가장 먼저 그녀의 안부를 물었고 함께 좋은 소식도 전해왔다.양시연은 배를 가만히 쓸어내리며 잔잔한 만족감을 느꼈다.“오늘 밤은 야근하지 말아요...”앞좌석에서 반우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양시연은 장난삼아 그녀를 놀리려 했다. 그러나 그때 차가 무언가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모두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지만 강한 충격에 몸이 앞으로 쏠렸다. 운전자는 급히 핸들을 틀었고 단순한 차선 변경이 아니라 차량이 갑자기 속력을 내며 질주하기 시작했다.“무슨 일이에요?!”반우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양시연은 충격에 숨이 턱 막혔고 안전벨트에 강하게 되감기면서 배에 묵직한 압박감이 몰려왔다.운전석에서 운전사가 다급하게 외쳤다.“차가 이상해졌어요. 갑자기 통제가 안 되면서 옆 차와 부딪쳤습니다!”“그...그러면 빨리 멈춰야죠.”승주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소리쳤다.양시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고통을 참았다.“맞아요. 얼른 갓길에 세우세요!”“멈출 수 없습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 같습니다.”운전사의 한마디에 차 안 공기가 한순간에 얼어붙었고 양시연을 포함한 모두의 손발이 차갑게 굳었다.승주와 반우희는 창백한 얼굴로 안전벨트를 꽉 움켜쥔 채 마치 목소리를 잃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양시연은 억지로 침착함을 유지하며 휴대전화를 꺼냈다.연정훈에게 전화를 걸려는 순간 동시에 반우희에
큰 천둥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졌고 연씨 가문의 본가에서 표세연이 전화를 받았다.“좋아. 알았어.”양시연은 2층에 서서 표세연의 기쁜 목소리를 들으며 대충 짐작했지만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표세연은 전화를 끊고 고개를 들어 올리며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이제 괜찮아. 연정훈의 아버지가 다 해결했어.”‘아이고.’“맞아. 오늘 양석진 씨께서 모습을 보이셨대.”표세연이 덧붙였다.양시연은 몇 번 고개를 끄덕이며 모든 문제가 깔끔하게 정리되었음을 실감했다.그녀는 연정훈을 보고 싶었지만 아직 돌아오지 않은 걸 보니 아마도 후속 처리할 일이 남아 있는 듯했다.집에서 기다릴까 했지만 마침 반우희가 세 아이를 데리고 가려 하자 그녀도 차라리 반우희를 태우고 연정훈을 데리러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너무 서두르지 마. 연정훈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표세연이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양시연은 신경 쓰지 않고 배를 살짝 받치며 계단을 내려갔다.“마침 답답했는데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싶어요.”“알았어. 네가 답답해할 줄 알았어.”표세연은 결국 운전사를 불러 그들을 밖으로 데려가 바람을 쐬게 했다.주차장에서는 세 아이가 여러 차를 구경하고 있었고 반우희가 좋아하는 마이바흐는 승주도 탐을 내는 차였다.“아니면 우리 이 차를 타고 나갈까요?”양시연이 제안했다.“그래도 돼요?”반우희와 승주가 동시에 묻자 양시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아싸.”탁승호는 없었고 표세연이 정해준 운전사는 오랫동안 일해온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안전을 위해 희주와 동준은 다른 차에 태웠다.반우희는 마이바흐의 조수석에 앉았고 승주는 양시연과 함께 뒷좌석에 올랐다.“나도 이제 출세했네요. 마이바흐를 타보다니.”양시연은 그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리며 운전사에게 차를 출발하라고 지시했다.출발!...단 15분만에 양원 그룹의 분위기는 완전히 뒤바뀌었다.누구도 그 전화의 내용을 직접 듣진 못했지만 위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결과는
“괜찮아요. 반우희 씨는 그냥 한 번 올라가서 볼 거예요. 탁승호 씨는 차 시동 켜고 조수석에 앉아요. 우희 씨가 잠깐이나마 만족할 수 있도록 해줘요."양시연이 웃으면서 말했다.탁승호는 입술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네.”반우희는 기분 좋게 차에 올라탔고 양시연은 차 밖에서 앉아 있었으며 실내는 시원하게 느껴졌다.탁승호는 계속해서 옆에서 지켜보았고 반우희는 여기저기 둘러보며 그의 눈빛이 다소 불친절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마음대로 만지지 않았다.그녀가 차에서 내리자 양시연은 웃으면서 물었다.“마음에 들어요?”“네. 마음에 들어요.”“사법시험 끝나면 부승원 씨에게 차 한 대 사달라고 해요.”반우희는 진지하게 한숨을 쉬었다.“시연 언니가 나한테 좋아한다고 물어보길래 차 한 대 선물해 줄 생각인 줄 알았어요.”양시연이 일어나서 반우희 코를 살짝 쥐었다.“욕심쟁이네요.”반우희는 쑥스럽다는 듯이 웃었다.그때 또 한 번 우르릉거리는 천둥소리가 들렸고 반우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이제 곧 폭우가 올 것 같아요.”“그럴 것 같네요.”...양원 그룹 회의실에서 6시가 다 되어가지만 사람들은 아직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회의라지만 사실 중요한 사항은 이미 끝났고 남은 건 윗사람들의 연설뿐이었다.회의는 이 회장이 직접 참석했고 그의 말 속에는 일부 얌전하지 않은 사람들을 경고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15분 전 누군가가 또다시 창고에서 발생한 사고를 언급했다.“지금까지 사망자 가족은 아직 보상안을 받지 못했습니다.”이 회장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책임이 아직 명확하지 않은데 보상안이 나올 수 있나요?”“우리는 어쨌든 태도를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누군가 말했다.정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죠. 사람들의 입이 무섭죠.”정 회장은 표원정의 의견을 지지했고 그는 이미 조재민과 얽히기 시작했으며 지금은 이 회장과 연정훈과 대립 중이었다.이 회장은 그를 한 번 쳐다본 후 웃을 듯한 표정으
양시연이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모습을 보니 양혁수는 그녀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걸 단번에 눈치챘다. 마음 한구석이 살짝 쓰렸지만 그래도 그녀가 행복하다니 다행이었다.“이제 곧 출산인데 괜히 돌아다니지 말고 얌전히 있어. 요즘 같은 때는 한 발짝 덜 움직이는 게 안전한 법이야.”양혁수가 걱정스레 말했다.“어쩜 정훈 씨랑 하는 말이 똑같아?”“연정훈 씨랑 나를 비교하지 마. 난 그 사람이랑 상종도 안 해.”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렸다.한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전화 너머로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변여름이야?”“응. 변백호가 볼일 있어서 왔는데 변여름도 같이 따라왔어. 한강시에 한 번도 안 와봤다길래 데리고 놀러 왔지.”“잘됐네.”“혹시 처리할 일 있으면 말해. 너희가 직접 움직이기 어려운 건 내가 대신 해줄게.”전화를 끊기 전 양혁수가 덧붙였고 양시연은 그의 배려가 고마워 감사 인사를 건넨 뒤 전화를 끊었다.저녁 무렵 반우희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다. 세 아이를 데리고 복숭아를 따러 갔다가 양시연에게도 좀 가져다주고 싶다고 했다.마침 무료하던 참이라 양시연은 주소를 알려주며 저녁을 함께하자고 했다.아이들이 도착하자 집안 분위기가 한층 활기차졌다.표세연은 특히 동준이가 작은 몸집에 커다란 안경을 쓰고 있는 모습이 마치 만화 캐릭터 같다며 귀여워했다.양시연과 반우희는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반우희는 대게를 한입 베어 물며 무심히 말했다.“요즘 다들 너무 바쁜 것 같아요. 벌써 이틀이나 부승원 씨 얼굴을 못 봤네요.”“내가 없으니 많이 힘들겠죠.”양시연이 말하자 반우희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답했다.“그게 아니라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바쁘진 않았는데 요즘은 뭔가 이상해요.”양시연은 부승원이 왜 바쁜지 알고 있었지만 굳이 설명하지 않고 반우희를 달래며 더 많이 먹으라고 권했다.“오늘 부승원 씨의 생일이에요. 이따가 그
이전에는 민수희가 있었기 때문에 표세연은 민씨 가문의 기생충 같은 사람들을 참을 수 있었지만 민수희가 떠나고 나서는 이제 조금도 참을 수 없었다.게다가 요즘 마음도 편치 않아 누구에게라도 화풀이를 하고 싶은 참이었다.그때 민지연이 버릇없이 덜컹거리며 들어오는 것을 본 표세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뺨을 한 대 때렸다.‘팍!’양시연은 위층에 있었고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동 소리를 듣고 급히 문을 열였다. 그곳에서는 어린 여자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방미선은 아마도 체면이 상했는지 표세연에게 기어이 몇 마디 반박하며 말했다.“혹시 갱년기 아니야?”“갱년기? 너야말로 갱년기야!”“나는 곧 손자를 볼 거야. 갱년기는 이미 다 지나갔다고.”민지연과 방미선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그 모습을 본 양시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었다.표세연은 화가 나서 말이 거칠어졌다.“앞으로 너희는 이 집에 다시 발 들이지 마. 어머님도 돌아가셨고 이제 이 집엔 민씨는 없어. 정인은 이미 내 며느리와 함께 성을 바꿔서 양씨가 되었어. 만약 돈을 원하고 손자 행세를 하려면 양씨 가문에 가서 해.”“사모님.”가정부들은 놀라서 표세연에게 말을 그만하라고 했지만 표세연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덧붙였다.“내가 하나만 말해줄게. 우리 사부인 성격이 나보다 더 안 좋아. 가서 손자 행세하고 싶으면 절이라도 소리 크게 내서 해.”방미선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당장이라도 화병이 날 듯했고 얼굴이 붉어진 채 말 한 마디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입을 열고 욕을 하려 했지만 자신이 남의 집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이빨을 꽉 깨물며 참았다. 그런 다음 표세연에게 정신과 약을 먹으라고 권한 후 떨리는 손으로 민지연을 끌고 나갔다.가정부 중 한 명은 원래 표세연을 말리려 했지만 방미선의 말을 듣고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저희 사모님은 건강하세요. 오히려 당신이나 민지연 씨가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겠어요!”표세연은 한바탕 화풀이를 끝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