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정은 수도 없이 진실이 밝혀지는 날을 환상해 보았다. 양지원이 친딸을 봤을 때 딸이 잘 지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된다면 그 장면이 얼마나 통쾌할지.그러니 안시연이 연정훈의 뒤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안시연의 얼굴을 보고 또 이름을 듣고 난 후, 이 여자애가 바로 양지원의 딸인 것을 확정할 수 있었다.소현정은 먼저 놀라고 그러고는 당황해했다. 필경 모녀는 마음이 이어져있다고 하니 이렇게 마주 향해 보면 양지원이 이상한 낌새를 느끼기라도 할까 봐 걱정했다.그러고는 질투와 분노가 가득했다.천한 년.경인시 하인 굴에 처박에 넣었는데 연정훈의 다리를 잡았더니.소현정이 혼란스러울 때 연정훈은 이미 사람을 불러 강제로 3층에 데리고 가서 차를 마시게 했다.누군가 자신을 끌고 가서야 소현정은 정신을 차렸다.김세연과 양민아는 양지원더러 화를 풀라고 다독였다.연정훈은 안시연을 보호했다.화면이 머릿속에 박혀 소현정은 급히 달아났다.안시연이 연정훈을 잡은 건 그렇다고 쳐도 연씨 가문과 양씨 가문이 이렇게 가까운 사이인데 계속 연락을 하게 내버려둔다면 종이로는 불을 감싸지 못하게 된다.어떡하지.“사람이 이미 떠났고 나도 괜찮아요. 아가씨가 처리를 잘했어요. 내 조건도 만족을 시켰고 기자들이 일을 만드는 것도 피했으니 말이에요.”양지원이 안시연을 보며 말했다.안시연이 웃으며 말했다.“만족하시면 다행이에요.”말을 하고는 인사를 하고 떠나려고 했다.연정훈이 안시연의 손을 잡았다.맞은 편에 있는 김세연과 양지원 모녀는 이 모습을 똑똑히 봤다.김세연은 미쳐 돌아버릴 것 같았다.김세연은 연재혁에게 당신 아들이 하는 꼴 좀 보라고 하고 싶었다.연정훈은 엄마의 얼굴을 보지 못한 듯 말했다.“지원 이모, 전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양지원은 차분했다.“그래.”연정훈은 손을 잡고 나갔다.김세연은 어색해서 미칠 것 같았다. 미래 사돈에게 웃고는 양민아를 바라봤다.양민아는 얼굴색이 변하지 않았다.“이모, 제 전시관에 가보실래요?”김세연
양민아의 전시회에서 돌아온 김세연은 먼발치에서 연정훈이 안시연의 손을 잡고 글쎄 문화국의 국장 양민혁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 광경에 김세연은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까무러칠 뻔했다.그러자 양지원은 그녀 곁에 서서 농담조로 입을 열었다.“사돈댁이 엄청나네요. 저라면 겁 나서 결혼 못 시키겠어요.”김세연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오늘이 어떤 자리인데 연정훈은 아직도 안시연과의 관계를 숨기지도 않고 다 드러내고 다닌단 말인가. 정말 혈압이 수직으로 상승하는 기분이었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혈압약을 뒤적이며 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멀지 않아 양 국장이 자리를 뜨고 안시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러자 연정훈이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그렇게 기뻐?”안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기분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기에 입을 앙다물고 중얼거렸다.“어머니께서 엄청 혼내실 거예요.”그녀의 말에 연정훈이 멀지 않은 곳을 슬쩍 바라보았다.그리고 마침 그를 죽어라 노려보고 있는 김세연과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그러나 그는 담담하게 시선을 거두며 안시연의 얼굴을 꼬집었다.“어쩔 수 없지. 그래도 네가 마음속으로 날 욕하는 것보다 낫지.” 이에 당황한 안시연이 입술을 오므리며 조금 미안한 듯 말을 더듬었다.“누가 욕을 했다고...”연정훈은 그녀의 마음을 잘 알고 있기에 그녀를 달래주는 것 또한 달가웠다.밤에는 함께 잠을 청하지만 낮에는 낯선 사람 행세를 해야 한다니, 하물며 오늘 같은 날에는 그녀가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욕하면 욕했지 뭐. 넌 욕해도 돼.”그 말에 안시연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이윽고 그녀는 눈을 들어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연정훈은 그러한 그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었다.그런데 그때, 그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리기 시작했다.안시연은 이미 마음이 절반 이상 가라앉은 터라 그가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주었다.그리고 전화를 받은 연정훈이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담담하지만 확신하고 있는 양지원의 결론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안시연의 가슴에 푹푹 박혔다.그리고 통증과 동시에 그녀를 잠깐 환상 속에서 깨어날 수 있도록 자극해 주었다.양지원은 그녀가 연정훈과 연애하다 보면 연정훈도 서서히 그녀를 사랑하게 되리라 여겼다.하지만 그녀는 결혼이라는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잊었다.“당신 신분으로 연씨 가족은 고사하고 아마 정훈이 본인도 당신과 결혼할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시연 씨는 아직 어리잖아요. 그러니까 바보짓 하지 마요.”양지원은 담담히 그녀에게 조언을 해주고는 안시연의 시야에서 유유히 사라져버렸다.한편, 안시연은 갤러리 중앙에 서서 그녀와 연정훈 두 사람의 피가 담긴 전시품들을 보면서 순간 눈앞의 모든 것이 색채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갤러리를 나서니 오후에서 가장 더운 시간이었다.머리를 가득 채운 고민거리에도 안시연은 강남시티로 가 연정훈의 옷 두 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가는 길에 휴대폰이 계속 울려댔고 전화를 받아보니 외할머니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전화 건너편 외할머니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시연아, 지금 어디 있어?”“일하고 있어요.”“그래? 그럼 일 끝나면 병원에 좀 와.”안시연은 혹여나 외할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가뜩이나 어수선한 마음이 긴장감에 더욱 팽팽하게 조여들었다.“무슨 일이세요? 혹시 편찮으세요?”“아니, 아니. 그냥 친척이 왔는데 너도 만나봤으면 해서.”안시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딱딱한 눈빛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네, 일 끝나면 갈게요.”그녀는 전화를 끊고 조용히 뒷좌석에 앉았다.강남에 도착했을 때, 아주머니들도 자리를 비워 그녀는 혼자 위층으로 올라갔다.연정훈의 옷을 정리하고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마당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계단 모퉁이에 서서 밖을 내다보자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다름 아닌 연정훈과 그의 어머니였다.지난번에 이곳에서 김세연과 만난 경험이 아직 눈앞에 선한지라 안시연은 내려갈까 말까
온몸의 온도가 그 순간,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버리는 것만 같았다.넋을 잃은 그녀는 옆 손잡이를 잡고 나서야 주저앉지 않고 비로소 버틸 수 있었다.한 달여 동안의 달콤함이 한순간에 전부 그녀의 일방적인 헛된 꿈으로 되고 말았다.환상도 이제 깨질 때가 된 것이다.아래층, 김세연은 아들의 답을 듣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언제 보낼 거냐?”“그건 제 일입니다.”“네 일은 무슨. 너 이제 스물아홉이야. 이제 서른이 코앞인데 하루빨리 혼사를 마련해야지.”아래층은 잠시 조용해졌고 김세연은 결국 한발 물러선 듯 말투를 누그러뜨렸다.“정훈아, 널 강요하는 게 아니야. 안시연 같은 여자는 마냥 응석받이로 지내게 할 순 없어. 네가 맨날 사랑을 퍼다 주면 어느 날 혼자 착각해서 한사코 너와 결혼하고 싶다고 하면 어떡할래? 그땐 떼려야 뗄 수도 없어.”“시연이 그렇게 멍청하진 않아요.”“그럼...”“시간이 되면 알아서 다 될 거예요.”연정훈이 목소리를 낮추었다.안시연은 그 말을 듣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시간이 되면...하마터면 그들 사이에 기한이 지정된 계약이 있다는 것을 잊을 뻔했다.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연정훈에게 안시연의 존재는 잠깐 흥에 겨워 산 장난감일 뿐이었다. 기쁘면 그녀에게 모든 것을 줄 수 있고 흥이 다하면 그녀를 멀리 보내서 깨끗하게 끊을 수도 있다.그런 연정훈과 진지하게 감정을 논하다니. 정말 어리석기 그지없었다.“됐어, 일단 이렇게 하자. 어쨌든 너무 오래 곁에 두진 마.”김세연은 계속하여 잔소리를 해댔고 연정훈은 슬슬 인내심이 바닥나기 시작했다.더 이상 참아줄 수 없었던 연정훈은 몸을 돌려 위층으로 걸어갔다.모퉁이에 몸을 숨긴 안시연은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고 몸을 돌려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힘이 풀려버린 것인지 마치 넝쿨에 걸린 듯 아무리 애써도 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그렇게 안시연은 그대로 연정훈과 정면으로 부딪치게 되었다.당황한 안시연은 어쩔 줄 몰라 했고 연정훈도 순간 멈칫했다.한편, 김세연
안시연은 거의 도망치듯 강남시티를 떠났고 밖으로 나와 지나가는 차를 붙잡고 황급히 차에 올라탔다.만감이 교차하는 시점, 운전기사가 그녀에게 목적지를 물었다.하지만 안시연은 전혀 듣지 못했다.“아가씨? 꼬마 아가씨!”운전기사가 언성을 높여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린 안시연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양 볼을 툭툭 건드려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의 얼굴 전체가 차갑고 촉촉한 자국으로 범벅이 된 것을 알아차렸다.운전기사는 그녀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보고 혹여나 사고라도 날까 봐 걱정되어 물었다.“아가씨, 119나 경철 불러줄까요?”그러자 안시연은 재빨리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눈물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경인 예술원으로 가주세요.”운전기사는 몇 마디 중얼거리고는 혹시라도 그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 두려워 계속하여 백미러를 통해 안시연을 흘끔흘끔 쳐다보았다.휴대폰 벨 소리가 계속 울려댔는데 모두 연정훈의 전화였다.하지만 안시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같은 시각, 운전기사는 연신 혀를 끌끌 차며 그녀에게 인생 조언을 건네주며 말을 걸었다.하지만 안시연 한마디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드디어 벨 소리가 멈추고 안시연은 시트에 기대어 창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생기가 없는 눈으로 바라보니 바깥 풍경도 전부 시들어 보였다. 차에서 내린 그녀는 예술원에 들어가지 않았다. 무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길가 벤치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는데 견디기 힘들다는 생각조차 한 번도 들지 않았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가 다가와 그녀를 불렀다.“시연 씨?”안시연은 가물가물한 눈을 들어 속눈썹에 맺힌 땀방울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 얼굴을 희미하게 바라보았다.“승희 씨...”부승희는 마침 오늘 놀러 나온 사람인데 조리, 핫팬츠, 크롭톱에 손에는 트렌디한 가방을 들고 있었다.게다가 그녀의 뒤에도 한 무리의 친구들이 따라다녔다.“정말 시연 씨였어요?”안시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입꼬리를 잡아당기며 대꾸했다.그러나 무서울 정도로 창백하게 질린 안시연
나무 아래.부승희는 아이스 밀크티 두 잔을 얼굴에 맞대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어이, 시연 씨, 우리 제발 먼저 차에 타면 안 될까요? 나 더워 죽을 것 같단 말이야.”“승희 씨...”“거 잔소리 좀 그만하면 안 될까요? 난 이미 오빠와 약속했고 인제 와서 당신을 빼놓을 수 없다고요.”원래 무더위 때문에 짜증이 나는데 반쯤 죽은 듯 넋이 나간 안시연을 보고 있자니 더 짜증이 났다.“저기요! 여기 좀 도와주세요.”느려빠지긴.부승희가 사람을 부르는 제스쳐를 취하자 안시연은 그제야 벤치를 부축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이곳은 사람들이 왕래가 잦은 곳인지라 얼굴이 팔려서 좋을 건 없었다.그녀가 일어나자마자 부승희는 다짜고짜 안시연의 팔을 잡고 바로 그녀를 차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문이 열리고 시원한 공기가 온몸을 감싸 안았다.“아, 살 것 같다.”아가씨 부승희가 탄성을 내뱉으며 시원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안시연은 부승희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 차에서 내리려 했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부승희가 밀크티를 찔러 빨대를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흡!”“...”안시연은 원체 온순한 성격이었고 게다가 상대방이 좋은 마음으로 건네준 것이기에 어쩔 수 없이 한 모금만 마실 수밖에 없었다.“옳지. 이래야죠.”부승희는 그녀의 손을 잡아 밀크티를 강제로 건네주고는 티슈도 한 봉지 던져주었다.“그래서, 어떻게 된 거예요?”부승희가 묻자 안시연은 눈을 내리깔고 계속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부승희는 씹고 있던 껌을 뱉으며 다시 한번 물었다.“오빠랑 싸웠죠?”“아니에요...”“어? 아직도 시치미 떼시네?”부승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신발을 벗어 던지고 발도 편하게 바람을 좀 쐴 수 있도록 해주었다.“지난번에 알아챘지만 시연 씨는 정말로 오빠를 진심으로 좋아하네요.”그러자 안시연이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렸다.알고 보니 전 세계가 안시연이 연정훈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다.그럼 그들도 다 알고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연
부승희가 다가와 안시연의 어깨를 감싸 안더니 허심탄회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시연 씨가 예쁘지만 않았다면 이런 말은 굳이 해주지도 않았을 텐데.”그 말을 들은 안시연은 순간 자신을 칭찬해준 것에 감사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헷갈렸다.오히려 못생겼다면 이토록 많은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텐데.“근데 오빠랑 싸운 이유가 뭐예요?”잠시 침묵이 흐르고 안시연이 꾹 다물었던 입을 천천히 열었다.“제가 멍청했어요.”“혹시 결혼하고 싶어요?”안시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결국 묵인이었다.지난 한 달 동안, 안시연은 사실 단 한 번도 결혼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연정훈이 준 부드러운 품속에 빠져 단지 그들도 일반적인 연인처럼 서로 사랑하고 연정훈이 정말로 그녀를 사랑하리라 생각했을 뿐이다...잠깐 생각에 잠긴 부승희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녀를 나무랐다.“정말 정훈 오빠와 결혼하고 싶었다면 그건 정말 멍청한 게 맞아요.”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한쪽으로 가서 노래를 선곡하고 겸사겸사 그녀에게 조언을 건네주었다.“아휴, 설마 아직도 연씨 집안이 어떤 개념인지 모르는 거 아니에요?”그러자 안시연이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며 답했다.“아뇨, 알고 있어요...”“알긴 무슨. 연정훈 오빠네 집 조상들은 정말 순수한 비상장주식이라니까요. 아버지는 현재 도시의 2인자고 할아버지는 세운에 계시는데 명목상으로는 물러났다지만 권세가 엄청나요. 게다가 오빠는 현재 정인 그룹의 대표이고.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정인 그룹은 단지 오빠가 기술을 연마하는 데 사용하는 것뿐이에요.”부승희는 몸을 벽에 기대더니 계속하여 말을 이었다.“아마 마음만 먹고 몇 년만 더 단련하다 보면 아버지의 길을 걸을 수 있을걸요.”한편, 안시연은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부승희는 그녀 쪽으로 다가가 반바지 주머니에 손으로 꽂아 넣었다.“이렇게 말할게요. 당신뿐만 아니라 제가 거기 가도 어머님은 성에 안 차셨을 거예요. 임유정 알죠? 그 집
부승희는 계속하여 안시연에게 연정훈의 권세가 어떤 개념인지 설명하고 그녀와 연정훈은 완전히 두 세계의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룸 안에는 노랫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부승희는 탁자에 앉아 노래를 부르는 데 완전히 빠졌다--임연희의 다만 여자는 사랑에 빠지기 쉽고 항상 사랑에 시달릴 뿐이다.부승희가 부르는 노래 가사는 마치 안시연의 현재 모습을 그려주는 것만 같았다.소파에 앉아 계속하여 생각해보니 머릿속이 점차 맑아지는 것 같았다.머릿속은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지난 한 달 사이의 추억들이 영화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망원경, 자동차를 가득 채운 꽃, 목걸이, 옥비녀, 그 집, 그리고 천문 전시회와 수없이 많은 밤낮...스쳐 지나가는 한 장면 한 장면이 모두 그녀의 마음을 반복적으로 고문했다.안시연은 연정훈을 진심으로 좋아한다.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에게는 미래가 없다.게다가 감정조차도 그녀의 일방적인 희망일 뿐이고 연정훈에게 있어 그녀는 기껏해야 물을 만난 물고기, 그리고 남녀 사이의 일시적인 욕망 해소제와도 같았을 것이다.이건 안시연이 선을 넘었다.독한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사레에 걸려 연신 기침을 했다.그러나 기침 소리에 안시연을 돌아본 부승희는 휴지를 건네주는 것이 아닌 계속하여 술잔을 기울이고 잔을 부딪쳤다.“마셔요, 푹 취하고 내일 깨서 정신 차리고 살아보자고요.”안시연은 애처롭게 웃다가 다시 눈물을 흘렸고 자신을 벌하기라도 하는 듯 한 잔 또 한 잔 술잔을 기울였다.위는 금방 뒤집혔고 위보다 더 심한 건 뇌와 마음이었다.추억은 물밀 듯 밀려오고 마음은 한없이 저리고 아파졌다.“정훈 씨...”안시연은 무의식적으로 연정훈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반복했다.그러다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흐려지고 얼굴이 점점 얼룩지기 시작했다.“아, 시연 씨 곧 잠들 것 같은데 내가 내려갈게.”그때, 어디선가 부승희의 목소리가 들려 오고 누군가가 그녀의 뺨을 두드리는 것이 느껴졌다.“여기 가만히 있어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승주와 아이들은 숙제하러 방으로 돌아갔다.반우희는 부승원과 함께 제 방으로 돌아갔고 부승원에게 자리를 찾아준 뒤 열심히 문제지를 풀었다.부승원은 그제야 반우희의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다.자신이 반우희에게 잘해주는 날이면 반우희는 보답을 하기 위해 문제지를 푸는 것이었다.‘정말 바보 같긴.’“2년 안으로 사법고시 넘을 자신 있어?”반우희는 씩씩하게 대답했다.“자신 있습니다!”“사법고시 넘으면 뭘 할 건데?”“음... 사건 받아야죠?”“...”“꿈도 야무져. 그렇게 쉽게 사건 의뢰가 들어올 것 같아?”반우희는 또 바보같이 웃었다.그때, 부승원은 부모님이 했던 말이 떠올라 반우희를 빤히 바라보았다.“계속 공부하고 싶은 생각 있어?”“지금 하고 있잖아요?”“그거 말고. 좋은 대학 다니고 싶은 그런 거 말이야.”“에이. 학력도 안 좋은데 누가 절 받아주겠어요?”“그게 뭐가 중요해. 너만 좋다면 내가 다 해줄 수 있어.”“어느 대학인데요?”“세계 어디든.”반우희는 멈칫하더니 펜을 내려두고 부승원을 바라봤다. 왠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날... 해외로 보내려는 거예요?”반우희는 아무것도 모르는 게 아니었다. 연애를 실컷 하고 해외로 보내, 반 헤어짐 상태로 끝나는 사람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반우희를 보며 부승원은 설명하려고 했으나 말 대신 볼을 쭉 잡아당겼다.“해외 연수가 그렇게 쉬운 줄 알아? 지금 성적으로는 돈 가득 쏟아부어도 안 돼.”반우희는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미소를 되찾았다.“그쵸? 아무리 나한테 반했다고 해도 그렇게 뭐든지 해주면 안 되는 거죠.”부승원은 입꼬리를 올렸다.“해외 연수 가고 싶어?”부승원은 다시 떠보듯 물었고 반우희는 당황하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했다.“아니요.”“왜?”반우희는 대답 대신 노래를 불렀다.“동해 물과 백두산이...”“...”부승원은 두 눈을 질끈 감았고 또 반우희의 볼을 쭉 잡아당기며 말했다.
“내 얘기 하는 것 같은데 뭐라고 했어요?”반우희가 다가오자 희주는 빠르게 시선을 피했다.“비밀이에요.”반우희는 몰래 혀를 찼다.다른 한편, 배가 부른 승주는 애어른처럼 요즘 가정 상황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우리가 이렇게 배부르고 등 따신 나날을 보낼 수 있게 된 건 모두 한 사람 덕분이죠.”그러자 반우희가 바로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바로 누나... 의 남자 친구 덕분이에요!”“...”“야!”반우희는 승주는 슬쩍 노려봤으나 승주는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그리고 몰래 맥주 맛을 보더니 쓴맛에 혀를 두르며 말했다.“매형, 솔직히 우리 셋이 발목 잡는다고 생각하지 않아요?”그 말에 집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꼬맹이들은 모두 부승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털털한 반우희와는 달리 세 아이는 아닌 척해도 걱정이 많아 보였다.그래서 자신의 돈을 쓰는 게 불편하고 누나의 발목을 잡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부승원은 가재를 입에 넣더니 승주와 짠을 하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 실력으론 너희 셋이 아니라 백 명이라도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으니까.”“...”승주는 몰래 숨을 돌리며 부승원과 하이 파이브를 했다.식사 막바지에 다다르니 가재는 줄지 않고 오로지 대화만 오갔다.반우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동준에게 줄 아이스크림을 찾았다.희주도 손을 씻으러 자리를 비웠다.부승원은 승주가 아직도 저에게 할 얘기가 남아 있는 걸 발견했다.“누나한테 들어보니 매형 어머니가 오늘 누나 만났다면서요?”부승원은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켜며 말했다.“그래. 조금 긴장한 건지 딸꾹질했는데 그것도 너한테 말한 거야?”“별건 아니고, 너무 창피했다면서 누나가 용기를 달라고 했어요.”“어머니가 우희 괴롭힌 거 아니야. 우희가 지레 겁을 먹은 거지.”“누나는 언젠간 삼촌 어머니가 드라마처럼 수표 던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그 말에 부승원이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했다.“정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너희 누나는 어떻게 할 대책이었는데?”“대책이라
부승원은 승주의 초대를 받고 반우희의 집으로 향했다.집 안은 벌써 떠들썩했는데 승주와 반우희가 티격태격 다투고 있었다. 그 원인은 두 사람이 좋아하는 입맛이 달랐기 때문이었다.“마늘 향이 제일 맛있어!”“에이 마라가 찐이죠!”승주가 반우희를 타이르듯 말했다.“마늘 향 먹으면 양치해도 마늘 향이 남는데 남자 친구랑 뽀뽀할 수 있겠어요?”“...”반우희는 순식간에 목소리가 낮아졌다.그 틈을 타 승주가 마지막 승부사를 날렸다.“그러니까 내 말이 맞아요. 우리 마라 맛으로 해요!”“마늘 맛 조금만.”반우희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마늘 맛도 조금 해줘. 너희 누나 정말 먹는 거에 진심이라니까.”부승원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그 목소리에 승주와 반우희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반우희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왔어요?”승주는 그사이에 삶은 가재를 한입 먹으며 부승원을 불렀다.“삼촌, 여기로 와서 앉아요. 동준아, 우리 매형한테 술 따라드려!”“네.”반우희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승주의 귀를 쭉 잡아당겼다.“삼촌이었다가 매형이었다가 호칭 좀 통일하면 안 돼?”“나한테는 삼촌이지만 누나의 남자 친구일 때는 매형이니까 틀린 거 없잖아요!”승주는 아주 당당하게 대답했다.“어휴. 좀 조용히 해!”그러나 승주는 이런 일로 풀이 죽을 아이가 아니었고 바로 가재를 입안 가득 넣었다.부승원은 자연스레 주방으로 향했고 소매를 걷어붙였다.“남은 거 뭐 있어? 내가 할게.”그러자 반우희가 말했다.“오이무침할 줄 알아요?”“응.”“그럼 부탁할게요.”주방에는 거실의 에어컨 바람이 잘 들어오지 않아 온도가 아주 뜨거웠다.부승원은 언젠간 이 집의 가전제품을 다 새것으로 갈아주겠다고 몰래 다짐했다.손놀림이 빠른 부승원은 빠르게 오이무침을 완성했다.반우희는 가재를 입맛별로 나눠 상에 올렸고 작은 상이 부러질 듯한 한 상 차림이 완성되었다.부승원은 그전에도 여러 번 집을 오갔던 터라 이젠 익숙하게 밥상 앞에 앉았다.희주는 부승
날이 어두워지고 부승원은 본가로 향했다.부승희는 집에 없었고 부모님은 거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부승원을 발견한 채애정은 활짝 웃으며 손 씻고 함께 밥을 먹자고 했다.“아니에요. 일이 있어서 바로 나가봐야 해요.”“약속인 것이냐?”아버지 부형석의 질문에 부승원은 표정 변화 한번 없이 대답했다.“네.”중요한 약속이 있다고 하니 부모님은 부승원을 잡아 둘 수가 없었다. 대신 꿀물로 속을 채우게 했다.“네 어머니가 오늘 그 아이를 만나고 왔다고 들었어. 복스럽게 생겼다던데.”“네. 얼굴도 동글동글하고 예쁘던데 나이가 좀 어려요.”채애정의 말에도 부승원은 묵묵히 꿀물을 마시며 대꾸하지 않았다.한참 뒤 부혁석이 물었다.“그 아이랑은 어떻게 할 생각인 것이냐?”부승원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무슨 말씀인지?”부형석은 고개를 돌려 제 아내를 바라봤고 채애정은 몰래 고개를 저었다.‘그런 말 마요. 우리 아들이 어떤 성격인지 몰라서 그래요?’부형석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래도 질문을 이어가기로 했다.“나와 네 어머니의 생각은 그 아이가 나이가 어리니 네 옆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는 해외 연수를 다녀와 몇 년 뒤에 결혼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그러자 채애정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본인 생각이면서 왜 나까지 함께 묶고 그래요?’부형석은 말없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무게를 잡았다.부승원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고 침착하게 잔을 내려놓았다.이런 부승원의 모습에 채애정과 부형석은 절로 긴장이 되었다.도우미 아주머니는 내려놓은 잔만 챙겨서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도련님 부승원에게 쉽게 밉보여서는 안 되었다.부승원은 입가를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그 시선에 두 사람은 절로 허리를 꼿꼿이 세워졌다.“몇 년간 해외 연수를 다녀왔다가 결혼하면 그래도 짝으로 걸맞으니 창피하지 않으실 거고, 내가 그동안 견디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을 소개해 주실 거잖아요. 그 아이는 돈과 명예를 가졌으니 더 이상 미안해할 필요도 없고요.”“그렇죠?
부승원의 사무실에서.소파에 앉은 반우희는 소파 등받이에 고개를 처박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부승원은 이런 반우희가 너무 웃겨 사무실 책상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평소에 그렇게 당당하더니 우리 어머니 만나고 왜 그렇게 겁을 먹었어?”반우희는 영혼이 빠진 얼굴로 말했다.“나도 모르겠어요...”부승원이 반우희를 불렀다.“그렇게 넋이 빠진 모습으로 있지 말고 여기로 와.”반우희는 한숨을 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부승원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그리고 턱받침을 하고 눈을 깜빡거렸다.“어머님이 나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하셨으면 어떡해요?”부승원이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마음에 안 들면 뭐 어때?”반우희가 입을 삐죽이더니 평소대로 언성을 높여 말했다.“이게 다 변호사님을 위해서 그러는 거잖아요!”부승원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정말? 네가 내 생각을 했다고?”반우희는 작게 콧방귀를 뀌더니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어머님이 날 좋아하지 않으면 변호사님이 날 만나지 못할 테니까요.”“...”반우희는 부승원의 옆으로 조금 더 당겨 앉으며 말했다.“변호사님은 나이도 들고 나한테 이렇게 돈도 많이 쏟았는데 결혼까지 가지 못하면 변호사님만 억울하잖아요.”그리고 반우희는 팔을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꽤 양심 발언이네? 내가 억울할 가봐 걱정도 하고?”반우희는 다시 턱을 괴고 한숨을 내쉬었다.“난 늘 그랬어요. 다른 사람한테 빚지고는 못 살아요.”“내가 제안 하나 할까?”부승원은 펜을 내리고 옆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어머니 아마도 옆방에 계실 거야. 그러니까 마음 가라앉히고 다시 가서 인사드리는 게 어때?”그 말에 반우희는 바로 풀이 죽은 얼굴이 되었다.이에 부승원은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결국 너도 말뿐이네.”반우희는 한숨만 풀풀 내쉬었고 더 고민에 휩싸였다.‘정신 차려 반우희! 너 왜 이렇게 나약해졌어?’그리고 머리를 싸매며 말했다.“저녁에 집에 돌아가면 승주한테 조언을 받아야겠어요.”‘승주한테 조언을 받는
딸꾹!딸꾹!반우희는 부승원의 등 뒤로 몸을 숨기고도 딸꾹질을 멈추지 못했다.부승원은 몸을 돌려 반우희를 살폈다.“왜 그래?”‘그게 아니라.’반우희는 서둘러 부승원을 당겨 채애정의 시선을 가렸다.지금 딸꾹질 때문에 얼굴이 시뻘게졌을 게 뻔했고 못생기게 보일 수는 없었다.부승원은 자기 셔츠 끝자락을 잡은 반우희를 보며 빠르게 자리에 앉히고 물을 따라줬다. 그리고 채애정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어머니, 먼저 돌아가세요. 우린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그게...”채애정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부승원이 반우희를 챙기느라 손이 부족하자 채애정은 대신 물을 따라 건넸다.“우희 씨, 괜찮아요?”“딸꾹... 네! 딸꾹... 괜... 찮습니다!”“...”부승원은 물을 건네받고 직접 반우희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 병원 갈까?”반우희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어머님만 가면 괜찮아질 거예요.’부승원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부승원이 옆에 있었기에 반우희는 서서히 진정되었고 드디어 딸꾹질을 멈출 수 있었다. 이에 채애정이 다가가 또 말을 걸었다.그런데!반우희는 더 긴장되어, 또 딸꾹, 하고 딸꾹질하고 말았다.“...”딸꾹!딸꾹!결국 다시 시작이 되었다.부승원은 반우희가 긴장이 되어 딸꾹질하는 것임을 알아차렸다.그래서 거의 자신의 품에 가두다시피 하며 채애정을 향해 손을 저었다.채애정은 더 이상 대화는 무리라는 생각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럼 먼저 가볼게. 내가 뭐 겁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놀란 거야?”“오신다고 미리 말해주지도 않았으니 얼마나 놀랐겠어요.”“...”‘정말 연애 좀 한다고 이 엄마는 뒷전인 거니?’‘어휴. 그래도 드디어 연애한다니 다행이긴 해.’채애정은 가방을 챙겨 밖으로 걸었다.그때, 반우희가 빠르게 부승원의 셔츠를 잡아당겼다.부승원은 고개를 돌려 반우희가 핸드폰에 적은 문자를 확인하고 채애정을 다시 불렀다.채애정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부
“이름은 뭐예요?”“반우희입니다. 넉넉할 우와 기쁠 희입니다.”“그래요?”“그럼, 나이는?”“스물두 살입니다...”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반우희는 도시락을 손에 쥐었지만 한 입도 입에 넣을 수가 없었다. 마치 학창 시절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처럼 물어보는 질문에만 꼬박꼬박 대답했다.“괜찮아요. 편하게 먹어요.”채애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반우희는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로 크게 한 입 떠먹었다.채애정은 다정한 말투로 또 질문을 이었다.“승원이가 없어도 혼자 사무실에 있었던 거예요?”반우희는 채애정이 아직 본인과 부승원의 사이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조금 머리를 굴려 이렇게 대답했다.“저는 평소에 사내 식당을 이용하고 자주 사무실에 오는 않는 편은 아닙니다.”채애정은 알면서도 모른 척해주며 반우희에게 반찬을 집어줬다.반우희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감사합니다.”“아니에요.”채애정은 동그란 얼굴의 반우희가 꽤 마음에 들었다. 평소에 부승희가 반우희에 대한 좋은 말을 많이 했기에 좋은 인상도 남아 있었다.그러나 반우희의 나이를 들은 채애정은 기분이 조금 착잡했다.제 아들이 이성에 눈을 뜨지 못해 걱정이었는데 부승희의 말 대로 그동안 할 건 다 하고 산 모양이었다.게다가 그 깔끔하던 아들이 사무실을 이렇게 어지럽히는 것도 용납하고 있다니, 꽤 놀라운 사실이었다.‘그래 스물둘이면 미성년자도 아니고 괜찮지, 뭐.’반우희는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구별이 되지 않았으나 채애정이 계속 반찬을 집어주는 덕에 멈출 수가 없었다. 게다가 채애정이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짓는 모습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뭐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 거지? 수표 한 장 던져주면서 아들이랑 헤어지라는 전개는 아닌 것 같은데.’‘설마 내가 마음에 드는 건가?’‘음... 머리를 굴리자. 머리를!’그러나 그렇다 할 결론을 내리기 전에 위가 감당을 하지 못할 것 같았다.반우희는 끝내 참지 못하고 딸꾹질을 했다.
“내가 가서 밥 먹여줄까?”“좋죠.”“그래. 15분 뒤에 도착할 것 같아.”연정훈이 농담을 진심으로 받아치자 양시연은 다급하게 말렸다.“그러지 마요! 혼자 먹을 수 있어요.”“그럼 밥 먹을 때 영상 통화할까? 같이 먹고 싶어.”양시연이 입꼬리를 올렸다.“그건 좋아요.”한참 알콩달콩 얘기를 나누다가 회사에 거의 도착할 무렵, 양시연은 방금 주지혁과 만났던 사실을 입에 올렸다.“지혁 씨는 똑똑한 사람이니까 조이현을 말리지 못한다고 해도 간섭은 할 거예요. 앞으로도 조씨 가문의 도움이 필요할 테니 조이현이 가문을 망치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예요.”연정훈은 애초에 조씨 가문을 크게 염려하지는 않았다. 다만 양시연이 주지혁을 만나게 한 건 신중한 고민 끝에 결정한 것이었다.주지혁이 정말 똑똑한 사람이라면 바로 조이현을 처리할 것이다.하지만 주지혁이 그럴 만한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오늘 양시연이 주지혁을 만나는 건 되려 위험한 일일 수 있었다. 연재혁이 가장 중요한 시점에 있는데 더 이상 조씨 가문이 논란을 만들게 하지 막아야만 했다.만약 주지혁이 계속 다른 사람과 만남을 이어가고 굳이 논란을 피운다면 그건 결국 본인의 무덤을 파는 일이었다.연정훈은 양시연에게 이러한 얘기를 했었고 양시연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사람 시켜 주 대표 조사하라고 해. 똑같은 방법으로 되갚아 주는 건 좋은 데 우리가 위험해져서는 안 되잖아.”“나도 알아요.”대화가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양시연도 회사에 도착했다.이어 점심을 주문하고 영상 통화를 시작했다.반우희는 요즘 들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점심시간이었다. 요즘엔 사내 식당도 아닌 양시연의 사무실로 직행했는데 양시연은 음식을 많이 주문하고 혼자 먹기엔 버거워 반우희와 함께 나눴었다.그런데 멀리서 보니 오늘엔 연정훈과 영상 통화를 하고 있었고 반우희는 도시락을 들고 양시연의 사무실로 향하려다가 부승원의 사무실로 발걸음을 돌렸다.오늘 부승원은 점심 약속이 있어 사무실을 비웠다.그래서 부승원의 큰
점심시간이 되자 양시연은 배가 고팠다. 하지만 주지혁 앞에서 게걸스레 먹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간단히 배만 채우며 바로 조이현이 신고한 일을 입에 올렸다.주지혁은 인상을 찌푸리며 바로 반박했다.“이 일은 정말 나도 몰랐어.”양시연은 지금 와서 잘잘못을 따질 생각은 없었다.“이현 씨가 이러는 건 정말 난동이고 민폐예요. 난 이현 씨에게 잘못한 거 하나 없고 잘못이라면 오히려 두 사람이 내게 저지른 거죠.”주지혁은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시연아, 내가 미안해.”“지난 일은 다시 꺼내고 싶지 않아요. 오늘 이렇게 찾아온 건 제발 본인 아내 간수를 잘하라고 말하러 왔어요. 다른 사람한테 민폐 끼치지 말아줘요.”양시연은 과거와 많이 달라진 것 같았다.주지혁은 고개를 숙여 양시연의 손끝을 바라봤다. 과거의 양시연은 일하는 데 불편하고 집안일하는데 거슬린다며 관리를 전혀 하지 않았었다.그리고 차라리 네일 하는 돈으로 간식이나 사는 게 이득이라 했다.돈을 차곡차곡 모아 집을 사고 차를 사는 게 더 현실적이라며, 힘들게 돈을 버는 주지혁을 마음 아파하며 선물한 팔찌도 마다했었다.돈 모아서 결혼하자고 말했던 과거 양시연을 떠올리며 주지혁은 고개를 숙여 쓴 차를 들이켰다.“돌아가서 잘 얘기해 볼게. 다시 이런 일 없을 거야.”“그러길 바랄게요.”양시연은 덤덤하게 말했다.“우린 이제 책임질 가족도, 사업도 있는 사람이에요. 조씨 가문은 경인에서 좋은 입지를 가졌고 지혁 씨도 승승장구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각자 자신의 길을 찾아 행복하게 살자고요.”‘행복이라... 내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어?’‘미친 조이현은 평생 내게 들러붙으러 작정을 한 것 같은데.’주지혁은 더 올라가려면 피를 깎는 고통을 겪어야 했고 죽을힘을 다해야 조이현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이런 생각에 주지혁은 점점 마음이 무거워졌다.양시연이 본인을 찾아온 이유는 아마도 연정훈의 부담을 덜어주려 온 것 같았고, 진심으로 연정훈을 아끼는 모습을 보며 예전에는 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