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침착하게 맞섰다.“선배, 저희 전시관은 홀 동쪽에 있잖아요. 연 대표님이 이쪽으로 오시려면 길을 돌아야 한답니다.”구혜은은 웃으며 말했다.“후배가 여기 있는데 조금 먼 길을 돌아올 가치도 없겠어요?”안시연도 똑같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는 비즈니스인 이니 사소한 일 대신 전체적인 형세를 돌봐야 하죠. 선배, 우리 일이나 잘하는 게 어떨까요?”“시연 씨의 말이 맞네요.”구혜은은 화를 내지 않았다.인간관계를 정세에 따라 교활하게 처리하는 것은 그녀만의 스킬이었다.예전에는 안시연을 험담하느라 바빴지만 지금은 이익을 위해 안시연의 비위를 맞춰 줄 수도 있었다.안시연은 몸을 돌려 떠났다.그녀는 창가에 서서 대문 쪽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이 먼저 어디로 가는지는 상관이 없었고, 대신 그가 그들의 일을 가지고 떠벌리고 있는지 신경 쓰였다.그녀는 이익 극대화에 대해 동의하는 편이었지만 그들의 관계는 특별했고 네트워크의 힘은 어마어마했으므로 만약 그녀의 정보가 유출된다면 그녀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상상할 수 없었다.조용히 생각하던 차에 갑자기 전시홀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구혜은이 제일 먼저 나서서 팀원들을 모두 불러 루틴에 따라 일 처리를 진행했다.안시연은 서둘러 마스크를 착용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에 과연 많은 미디어 기자가 떼를 지어 몰려들었다. 두 팀의 경호원이 앞장서서 길을 내주자 연정훈과 몇몇 상사들이 비로소 전시홀로 향했다.안시연은 앞으로 더 나아가지 않았고 이런 얼굴을 드러내야 하는 순간을 그녀는 장 교수와 그의 팀에게 남겨주었다.연정훈은 검은색 수트를 입고 있었는데 신사처럼 고급스러우면서도 우아했고, 잘 다려진 바짓가랑이는 그가 걸어 다닐 때 그의 훤칠한 다리를 더 꼿꼿하게 부각해 주었고, 배가 불룩 나온 기름진 중년 상사들 사이에서 특히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안시연은 그렇게 빛나는 그를 보며 마음속에서 맴돌던 의문은 잠시나마 풀려졌다.그녀는 그가 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잡고 여유 있게 연설하는 모습을
매체 기자들 앞에서 연정훈과 양민아는 매우 여유로웠다.그 이야기에 대하여 그들은 회피하고 더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나란히 무대 위에 서서 화제의 중심을 모두 예술관으로 이끌었다.하지만 여전히 포기할 줄 모르고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려는 기자가 있었다.양민아는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연정훈을 한 눈 보고 말했다.“여러분, 연 대표님은 항상 공사 구분이 확실하신 분이에요. 예술관의 준공은 아무 개인적인 이유 없이 오직 경인시의 관광을 돕고 경제 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것입니다.”그러면서 카메라는 연정훈으로 향했다.연정훈의 답변은 양민아가 한 말과 별다르지 않았다.안시연은 무대 아래쪽에 서서 카메라의 규칙적인 작동 소리를 무심코 들으며 침묵을 지켰다.옆 사람은커녕 그녀 자신도 연정훈과 양민아가 매우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들의 사고방식 또한 완전히 일치했다.몇 마디 주고받는 사이에 그들은 이미 장내의 흐름을 손에 넣었다.이런 능력은 그녀에게 아마 한 평생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진행자가 주의를 주기 전까지 그녀는 생각에 빠져 무대 위의 말들이 하나도 안 들렸다.“다음 순서로 연 대표님과 여러 상사분께서 함께 이번 전시회 제막식 기념 테이프 커팅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장 교수는 안시연을 불러내고 구혜은과 같이 팀을 대표하여 무대에 오르게 했다.단지 연정훈의 체면을 봐서 한 말이라는 것을 안시연은 알고 있었다.그녀는 평온하게 웃더니, 자신보다 더 무대에 설 자격을 갖춘 선배를 추천하고 자신은 인파 속으로 조용히 숨어버렸다.무대 위, 연정훈과 장 교수가 중앙에 서 있고 그들 옆에는 양민아가 서 있었다.기념 테이프가 잘린 동시에 ‘찰칵’, 완벽한 단체 사진이 완성되었다.귓가에선 박수 소리와 찬사가 끊이지 않았다.안시연은 마치 진정한 스태프처럼 자질구레한 일을 차분하게 처리하며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바쁘게 움직였다.도중에 연정훈이 그녀에게 전화를 한 통 걸었다.서로 한 층만 떨어져 있는 거리에서 그는 VIP
“당신을 때린다고요? 내가 때리는 건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이런 곳에 누구 마음대로 오는 건데요.”양지원은 드센 태도로 소현정의 따귀를 두 번 때리고는 화가 나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나한테 초대장이 있는데 왜 오면 안 되죠?”“초대장? 저기 마침 전시회 책임자가 계시네요.”양지원이 비웃고는 고개를 돌려 안시연을 보며 말했다.안시연은 두피가 당기는 듯했다. “양 대표님, 필요한 거라도 있으신가요?”양지원은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소현정의 초대장을 가져다가 땅에 던졌다.“이분은 다른 사람의 초대장을 남용했으니 당장 내보내 주시길 바래요.”소현정은 얼굴을 감싸고 눈을 둥그렇게 뜨고 쳐다봤다.안시연이 그 초대장을 들어 위에 있는 이름을 보니 오성호였다.이 이름은 아무 이름이 아닌 재벌 랭킹에서도 유명한 양지원의 남편이었다.양지원이 이 여성에 대한 태도를 보니 안시연은 금세 이해가 되었다.정실과 첩이 부딪쳤는데 첩이 양지원의 남편의 초대장을 가지고 있은 것이다.VIP 관람 구역에는 실명이어야 하고 오는 사람마다 다 귀빈이기에 혼인이 오지 못하여 대신 오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 사람을 내쫓는다면 밖에 있는 기자들에게 화젯거리를 만들어주게 된다.안시연이 생각하는 동안 양지원은 계속 부담을 주고 있었다.“이 여자는 성이 소씨 라고요.”소현정은 이 말을 듣고 말했다.“이건 내 남편 초대장이에요. 남편 대신 와도 괜찮죠?”안시연은 심장이 덜컹하는 듯했다.양지원은 이 말을 듣고 낯빛이 어두워졌다.소현정은 양지원의 모습을 보고는 득의양양해하며 안시연에게 말했다.“우리 남편한테 연락이라도 해드릴까요?”양지원은 눈을 감고 화를 억누르고 있었다.“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게 하세요.”안시연은 더 이 여자를 내보내지 않으면 큰 일이 생길 것을 알고 있다.안시연은 초대장을 거두고는 소현정에게 말했다.“3층에 디저트가 있는데 올라가셔서 차라도 마시는 게 어떤가요.”양지원은 안시연을 한눈 쳐다봤다.소현정은 자신을 말을 돌려서 내보내는
소현정은 수도 없이 진실이 밝혀지는 날을 환상해 보았다. 양지원이 친딸을 봤을 때 딸이 잘 지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된다면 그 장면이 얼마나 통쾌할지.그러니 안시연이 연정훈의 뒤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안시연의 얼굴을 보고 또 이름을 듣고 난 후, 이 여자애가 바로 양지원의 딸인 것을 확정할 수 있었다.소현정은 먼저 놀라고 그러고는 당황해했다. 필경 모녀는 마음이 이어져있다고 하니 이렇게 마주 향해 보면 양지원이 이상한 낌새를 느끼기라도 할까 봐 걱정했다.그러고는 질투와 분노가 가득했다.천한 년.경인시 하인 굴에 처박에 넣었는데 연정훈의 다리를 잡았더니.소현정이 혼란스러울 때 연정훈은 이미 사람을 불러 강제로 3층에 데리고 가서 차를 마시게 했다.누군가 자신을 끌고 가서야 소현정은 정신을 차렸다.김세연과 양민아는 양지원더러 화를 풀라고 다독였다.연정훈은 안시연을 보호했다.화면이 머릿속에 박혀 소현정은 급히 달아났다.안시연이 연정훈을 잡은 건 그렇다고 쳐도 연씨 가문과 양씨 가문이 이렇게 가까운 사이인데 계속 연락을 하게 내버려둔다면 종이로는 불을 감싸지 못하게 된다.어떡하지.“사람이 이미 떠났고 나도 괜찮아요. 아가씨가 처리를 잘했어요. 내 조건도 만족을 시켰고 기자들이 일을 만드는 것도 피했으니 말이에요.”양지원이 안시연을 보며 말했다.안시연이 웃으며 말했다.“만족하시면 다행이에요.”말을 하고는 인사를 하고 떠나려고 했다.연정훈이 안시연의 손을 잡았다.맞은 편에 있는 김세연과 양지원 모녀는 이 모습을 똑똑히 봤다.김세연은 미쳐 돌아버릴 것 같았다.김세연은 연재혁에게 당신 아들이 하는 꼴 좀 보라고 하고 싶었다.연정훈은 엄마의 얼굴을 보지 못한 듯 말했다.“지원 이모, 전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양지원은 차분했다.“그래.”연정훈은 손을 잡고 나갔다.김세연은 어색해서 미칠 것 같았다. 미래 사돈에게 웃고는 양민아를 바라봤다.양민아는 얼굴색이 변하지 않았다.“이모, 제 전시관에 가보실래요?”김세연
양민아의 전시회에서 돌아온 김세연은 먼발치에서 연정훈이 안시연의 손을 잡고 글쎄 문화국의 국장 양민혁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 광경에 김세연은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까무러칠 뻔했다.그러자 양지원은 그녀 곁에 서서 농담조로 입을 열었다.“사돈댁이 엄청나네요. 저라면 겁 나서 결혼 못 시키겠어요.”김세연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오늘이 어떤 자리인데 연정훈은 아직도 안시연과의 관계를 숨기지도 않고 다 드러내고 다닌단 말인가. 정말 혈압이 수직으로 상승하는 기분이었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혈압약을 뒤적이며 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멀지 않아 양 국장이 자리를 뜨고 안시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러자 연정훈이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그렇게 기뻐?”안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기분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기에 입을 앙다물고 중얼거렸다.“어머니께서 엄청 혼내실 거예요.”그녀의 말에 연정훈이 멀지 않은 곳을 슬쩍 바라보았다.그리고 마침 그를 죽어라 노려보고 있는 김세연과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그러나 그는 담담하게 시선을 거두며 안시연의 얼굴을 꼬집었다.“어쩔 수 없지. 그래도 네가 마음속으로 날 욕하는 것보다 낫지.” 이에 당황한 안시연이 입술을 오므리며 조금 미안한 듯 말을 더듬었다.“누가 욕을 했다고...”연정훈은 그녀의 마음을 잘 알고 있기에 그녀를 달래주는 것 또한 달가웠다.밤에는 함께 잠을 청하지만 낮에는 낯선 사람 행세를 해야 한다니, 하물며 오늘 같은 날에는 그녀가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욕하면 욕했지 뭐. 넌 욕해도 돼.”그 말에 안시연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이윽고 그녀는 눈을 들어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연정훈은 그러한 그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었다.그런데 그때, 그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리기 시작했다.안시연은 이미 마음이 절반 이상 가라앉은 터라 그가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주었다.그리고 전화를 받은 연정훈이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담담하지만 확신하고 있는 양지원의 결론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안시연의 가슴에 푹푹 박혔다.그리고 통증과 동시에 그녀를 잠깐 환상 속에서 깨어날 수 있도록 자극해 주었다.양지원은 그녀가 연정훈과 연애하다 보면 연정훈도 서서히 그녀를 사랑하게 되리라 여겼다.하지만 그녀는 결혼이라는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잊었다.“당신 신분으로 연씨 가족은 고사하고 아마 정훈이 본인도 당신과 결혼할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시연 씨는 아직 어리잖아요. 그러니까 바보짓 하지 마요.”양지원은 담담히 그녀에게 조언을 해주고는 안시연의 시야에서 유유히 사라져버렸다.한편, 안시연은 갤러리 중앙에 서서 그녀와 연정훈 두 사람의 피가 담긴 전시품들을 보면서 순간 눈앞의 모든 것이 색채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갤러리를 나서니 오후에서 가장 더운 시간이었다.머리를 가득 채운 고민거리에도 안시연은 강남시티로 가 연정훈의 옷 두 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가는 길에 휴대폰이 계속 울려댔고 전화를 받아보니 외할머니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전화 건너편 외할머니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시연아, 지금 어디 있어?”“일하고 있어요.”“그래? 그럼 일 끝나면 병원에 좀 와.”안시연은 혹여나 외할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가뜩이나 어수선한 마음이 긴장감에 더욱 팽팽하게 조여들었다.“무슨 일이세요? 혹시 편찮으세요?”“아니, 아니. 그냥 친척이 왔는데 너도 만나봤으면 해서.”안시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딱딱한 눈빛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네, 일 끝나면 갈게요.”그녀는 전화를 끊고 조용히 뒷좌석에 앉았다.강남에 도착했을 때, 아주머니들도 자리를 비워 그녀는 혼자 위층으로 올라갔다.연정훈의 옷을 정리하고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마당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계단 모퉁이에 서서 밖을 내다보자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다름 아닌 연정훈과 그의 어머니였다.지난번에 이곳에서 김세연과 만난 경험이 아직 눈앞에 선한지라 안시연은 내려갈까 말까
온몸의 온도가 그 순간,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버리는 것만 같았다.넋을 잃은 그녀는 옆 손잡이를 잡고 나서야 주저앉지 않고 비로소 버틸 수 있었다.한 달여 동안의 달콤함이 한순간에 전부 그녀의 일방적인 헛된 꿈으로 되고 말았다.환상도 이제 깨질 때가 된 것이다.아래층, 김세연은 아들의 답을 듣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언제 보낼 거냐?”“그건 제 일입니다.”“네 일은 무슨. 너 이제 스물아홉이야. 이제 서른이 코앞인데 하루빨리 혼사를 마련해야지.”아래층은 잠시 조용해졌고 김세연은 결국 한발 물러선 듯 말투를 누그러뜨렸다.“정훈아, 널 강요하는 게 아니야. 안시연 같은 여자는 마냥 응석받이로 지내게 할 순 없어. 네가 맨날 사랑을 퍼다 주면 어느 날 혼자 착각해서 한사코 너와 결혼하고 싶다고 하면 어떡할래? 그땐 떼려야 뗄 수도 없어.”“시연이 그렇게 멍청하진 않아요.”“그럼...”“시간이 되면 알아서 다 될 거예요.”연정훈이 목소리를 낮추었다.안시연은 그 말을 듣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시간이 되면...하마터면 그들 사이에 기한이 지정된 계약이 있다는 것을 잊을 뻔했다.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연정훈에게 안시연의 존재는 잠깐 흥에 겨워 산 장난감일 뿐이었다. 기쁘면 그녀에게 모든 것을 줄 수 있고 흥이 다하면 그녀를 멀리 보내서 깨끗하게 끊을 수도 있다.그런 연정훈과 진지하게 감정을 논하다니. 정말 어리석기 그지없었다.“됐어, 일단 이렇게 하자. 어쨌든 너무 오래 곁에 두진 마.”김세연은 계속하여 잔소리를 해댔고 연정훈은 슬슬 인내심이 바닥나기 시작했다.더 이상 참아줄 수 없었던 연정훈은 몸을 돌려 위층으로 걸어갔다.모퉁이에 몸을 숨긴 안시연은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고 몸을 돌려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힘이 풀려버린 것인지 마치 넝쿨에 걸린 듯 아무리 애써도 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그렇게 안시연은 그대로 연정훈과 정면으로 부딪치게 되었다.당황한 안시연은 어쩔 줄 몰라 했고 연정훈도 순간 멈칫했다.한편, 김세연
안시연은 거의 도망치듯 강남시티를 떠났고 밖으로 나와 지나가는 차를 붙잡고 황급히 차에 올라탔다.만감이 교차하는 시점, 운전기사가 그녀에게 목적지를 물었다.하지만 안시연은 전혀 듣지 못했다.“아가씨? 꼬마 아가씨!”운전기사가 언성을 높여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린 안시연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양 볼을 툭툭 건드려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의 얼굴 전체가 차갑고 촉촉한 자국으로 범벅이 된 것을 알아차렸다.운전기사는 그녀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보고 혹여나 사고라도 날까 봐 걱정되어 물었다.“아가씨, 119나 경철 불러줄까요?”그러자 안시연은 재빨리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눈물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경인 예술원으로 가주세요.”운전기사는 몇 마디 중얼거리고는 혹시라도 그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 두려워 계속하여 백미러를 통해 안시연을 흘끔흘끔 쳐다보았다.휴대폰 벨 소리가 계속 울려댔는데 모두 연정훈의 전화였다.하지만 안시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같은 시각, 운전기사는 연신 혀를 끌끌 차며 그녀에게 인생 조언을 건네주며 말을 걸었다.하지만 안시연 한마디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드디어 벨 소리가 멈추고 안시연은 시트에 기대어 창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생기가 없는 눈으로 바라보니 바깥 풍경도 전부 시들어 보였다. 차에서 내린 그녀는 예술원에 들어가지 않았다. 무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길가 벤치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는데 견디기 힘들다는 생각조차 한 번도 들지 않았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가 다가와 그녀를 불렀다.“시연 씨?”안시연은 가물가물한 눈을 들어 속눈썹에 맺힌 땀방울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 얼굴을 희미하게 바라보았다.“승희 씨...”부승희는 마침 오늘 놀러 나온 사람인데 조리, 핫팬츠, 크롭톱에 손에는 트렌디한 가방을 들고 있었다.게다가 그녀의 뒤에도 한 무리의 친구들이 따라다녔다.“정말 시연 씨였어요?”안시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입꼬리를 잡아당기며 대꾸했다.그러나 무서울 정도로 창백하게 질린 안시연
욕실에서 물소리가 부드럽게 퍼지고 있었다. 양시연은 큰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었고 연정훈은 조금 떨어진 그곳에서 샤워하고 있었다.조명이 은은하게 빛나 욕실은 아늑하면서도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양시연은 물줄기를 마사지 모드로 바꾸고 물의 부드러운 압력에 몸이 노곤해지며 마치 물속에 녹아드는 듯했다.그런데 뒤에서 갑자기 샤워 소리가 멈췄다.타일 위에 맨발이 닿는 소리가 하나씩 울릴 때마다 양시연의 심장도 덩달아 쿵쿵 뛰었다.얼마 후 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 연정훈은 이미 가운을 걸치고 축축한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며 서 있었다.그는 양시연을 보며 부드럽게 물었다.“뭐 마실래?”“...물 주세요.”“알겠어.”연정훈이 이렇게 순순히 물러나자 양시연은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다.잠시 뒤 욕조 끝에 몸을 기대고 있던 양시연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른한 눈길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연정훈은 물 한 잔을 들고 천천히 다가왔다. 양시연이 손을 내밀어 받으려 했지만 그는 물을 건네지 않고 욕조 옆의 검은색 모던 의자에 느긋하게 몸을 기대며 앉았다.그 의자는 욕조와 가까운 곳에 있어 팔을 살짝 뻗으면 욕조 가장자리에 닿을 거리였다. 연정훈은 물잔을 들어 양시연의 입가에 가져다 댔고 컵 안에는 빨대가 꽂혀 있었다.몇 시간 전 병원에서 자신이 연정훈을 이렇게 챙겼던 기억이 스쳤다. 그땐 오히려 양시연이 연정훈을 쥐락펴락하며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터였다.‘쯧.’그녀는 불만스러운 마음에 눈을 감고 빨대를 꽉 물었다. 예상치 못하게 컵 안에는 달고 시원한 꿀물이 담겨 있었다.양시연은 반쯤 마시고 빨대를 빼낸 뒤 욕조 가장자리에 몸을 기대었다.연정훈은 컵을 거두고 의자에 기대어 앉아 양시연을 바라보며 떠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딱 그 순간 양시연은 연정훈의 눈빛에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알아차렸고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참다 못한 그녀는 손으로 물을 퍼 올려 그의 얼굴에 튀겼다.연정훈은 고개를 살짝 돌리며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더니 여전히
“안돼...”방안에는 잠시 소란이 있었지만 곧 뜨거운 숨소리가 들려왔다.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에 두 사람은 온몸이 바짝 긴장되었다.이젠 막다른 골목까지 내몰린 양시연은 연정훈의 어깨를 살짝 깨무는 것으로 반항을 포기했다.너무 오랫동안 잠자리를 가지지 않았다 보니 처음 관계를 가진 그날만큼이나 긴장이 되었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저 눈을 뜨면 눈 앞의 전등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키스는 쉴 새 없이 몰려왔고 숨이 벅찬 양시연이 밀어내려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연정훈 이 나쁜 자식! 풀에 죽은 강아지 모습을 연기한 늑대가 따로 없어! 이러다가 정말 복상사라도 나면 어떡해!’몇 년 동안 닿지 못해 급한 연정훈의 마음을 알겠으나 양시연은 정말 이러다가 죽지 않을 까 걱정이 되었다.과거 연정훈과 처음 만났던 시절에도 이렇게 급했던 적은 없었다. 양시연은 초반에만 반항이라는 걸 시도했고 그 뒤로는 연정훈의 페이스에 겨우 맞춰갈 뿐이었다.그리고 현재, 두 손목은 연정훈의 목에 감겨 있었고 입술을 잡혀 먹힐 것처럼 키스를 하고 있었다.양시연의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이제 몸도 제 것이 아닌 것 같고 마치 연정훈과 한 몸이 된 듯한 착각이 들었다.다시 눈을 뜨자 두 사람은 자세를 바꿔 양시연이 연정훈의 위로 올라갔다.연정훈의 호흡 소리에 맞춰 양시연도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그러다가 연정훈이 한 손으로 양시연의 머리를 감싸쥐고 또 다른 한 손으로 턱을 쥔 채로 키스를 이어갔다. 그렇게 둘은 또 한 몸이 되었다.겨우 끝나가나 싶었는데 다시 불씨가 보이자 양시연은 연정훈의 가슴팍을 꼬집었다.갑작스러운 고통에 연정훈이 앓는 소리를 냈다.그리고 그 틈을 타 양시연은 빠르게 연정훈의 품에서 떨어졌다.그렇게 허둥지둥 도망을 가다가 방의 전등이 꺼졌다.하지만 캄캄한 어둠속에서도 연정훈은 정확하게 양시연을 찾아 다시 품에 꽉 껴안았다.양시연은 살짝 인상을 구긴 채로 머리를 굴려 가볍게 연정훈을 밀어냈다.이미 한바탕 체력을 써버린 터라
주변 공기는 3초 동안 얼어붙었다.양시연은 크게 숨을 들이쉬고 도망가려 몸을 움직였다.그러나 연정훈의 품안에서 도망갈 구멍은 없었고 어느새 두 손이 잡히고 다리까지 포획된 채로 키스가 이어졌다.“읍!”도망은커녕 호흡까지 뺏겨버렸다.병원에서의 키스는 감히 키스라고 불리울 수도 없었다.강렬한 키스는 양시연을 삼켜버릴 것 같았다. 양시연이 고개를 돌리려 하면 연정훈이 손을 뻗어 턱을 잡고 입을 벌리게 했다. 입술을 할짝이고 깊게 감아오는 바람에 양시연은 온 몸에 짜릿짜릿 전율이 울렸다. 양시연은 어느새 이성을 잃고 힘이 스르르 풀려버렸다.양시연이 반항할 의지가 없어 보이자 연정훈은 잡았던 손을 놓고 겁없이 이불 안으로 들어왔다.그 사이 양시연의 입술에서 잠시 멀어져 이마 위로 거친 숨소리를 늘어놨다. 그리고 콧등, 볼, 귀, 쇄골까지 키스를 이어갔다.양시연은 연정훈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심장이 콩닥콩닥거렸다.연정훈은 절대 틈을 보이지 않고 양시연을 점점 더 옭아맸다. 그래서 양시연은 연정훈이 오늘을 위해 오랫동안 계획을 세웠던 건 아닌 지 의심이 갔다.양시연은 두 눈을 감고 고개를 살짝 쳐든 채로 키스를 순순히 받아드렸다.“정훈 씨...”그 소리에 연정훈도 두 눈을 감고 지금 이 순간을 몸으로 느꼈다.“왜?”양시연은 침을 꿀꺽 삼키고 양 손을 연정훈의 어깨 위로 올렸다. 그리고 살짝 밀어내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나랑 약속했잖아요... 음...”말이 끝나기도 전에 쇄골에서 짧은 고통이 찾아왔다.연정훈은 고개를 들어 다시 양시연의 콧등에 키스를 하며 말했다.“며칠 동안 날 애달게 한 거로 아직 부족해?”양시연은 온 몸에 개미가 기어다니는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고 나른한 얼굴로 연정훈을 노려보며 말했다.“누가 애달게 했다고... 그래요?”“널 건드리게도 하지 못하게 했잖아.”“그건...”“안된다는 말은 하지마.”연정훈은 양시연의 입술에 입을 맞췄고 양시연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리고 연정훈은 양시연의 귓가에 대고 낮은 소리
병원에서 나오자 벌써 저녁 11시가 넘었다.그러나 연정훈은 전혀 졸린 기색 없이 되려 활력이 넘쳤다.그건 양시연도 마찬가지였다. 집에 도착한 양시연은 여 아주머니에게 연정훈의 상태를 알려주고 또 나비를 찾았다.드디어 침대에 누운 두 사람은 그제야 긴 한숨을 내쉬었다.샤워를 마치고 나니 안방 공기에 달콤한 바디 워시 향이 맴돌았다.양시연은 이불을 쭉 당겼고 이불에서 상대의 체온이 느껴졌다.양시연이 고개를 돌려 연정훈에게 물었다.“아직도 불편해요?”어둠 속에서 연정훈은 바로 대답을 하지 않았고 조금 뒤척이다가 거친 호흡을 내쉬었다.이상을 눈치 챈 양시연이 물었다.“어디 아파요?”연정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위가 조금 아프네.”양시연은 큰일이라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연정훈의 옆으로 다가갔다.“팥빙수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덥고 차고 반복하니까 위가 아픈거죠.”그리고 빠르게 연정훈 주변의 무드등을 켰다.어두운 불빛이 연정훈의 얼굴을 비췄고 연정훈의 안색이 평소보다 창백한게 보였다. 게다가 눈만 꿈뻑거리는 모습에 공격력은 제로로 보였다.“약 챙겨 올 게요.”양시연은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가려 했다.그러나 이불 속에서 연정훈이 손을 뻗어 양시연을 잡았다.연정훈의 손바닥은 아직도 비정상적으로 뜨거웠고 그 온도에 양시연은 심장이 철렁했다.“왜 그래요?”양시연이 낮은 목소리로 묻자 연정훈이 덤덤하게 대답했다.“약 먹을 필요 없어. 그냥 위가 조금 쓰릴 뿐이야.”양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소화가 안돼서 그래요. 소화제 가지고 올 게요.”그러나 연정훈은 대답 대신 양시연을 침대에 도로 눕게 했다.“약 바로 저기 있는데...”양시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정훈은 이불을 덮어주고 양 팔로 양시연을 품에 가두었다.“...”양시연은 두 눈을 감고 이를 꽉 깨물었다.‘정말...’그리고 고개를 돌려 연정훈을 힐끗 노려봤다.“또 힘이 솟아나는 거죠?”“그래.”연정훈이 솔직하게 대답하자 양시연은 어이가 없어
연정훈은 가만히 양시연을 바라만 볼 뿐 움직이지 않았다.양시연도 다급해하지 않고 미소를 지은 채로 연정훈과 시선을 마주했다.연정훈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목을 가다듬었다. 양시연의 페이스에 말릴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그래서 먼저 입을 열었다.“지금 뭐 하는 거야?”양시연은 여전히 말없이 연정훈을 향해 손을 젓고 있었다.“...”그렇게 한참 실랑이가 이어지고 연정훈은 양시연의 옆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양시연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서로의 호흡이 섞이고 닿을락 말락 가까이 붙었다.양시연의 시선은 연정훈의 입술로 고정되고 그 시선은 심히 도발적이었다.연정훈은 침을 꿀꺽 넘기고 숨까지 멎은 채로 이어질 양시연의 행동을 기다렸다.양시연의 시선은 입술에서 코까지,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두 눈으로 향했다.양시연은 자세를 바로 하고 턱을 살짝 치켜들어 당장이라도 연정훈에게 키스할 것처럼 굴었다.그러자 연정훈은 온몸이 굳어버렸다.양시연의 호흡이 점점 더 가깝게 느껴졌으나 곧 허공에 멈춰 섰다.연정훈은 멈칫했고 웃음기 섞인 양시연을 발견했다.“...”그제야 당한 걸 알아차린 연정훈은 이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 두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휙 돌렸다.양시연은 웃음이 터졌고 연정훈이 고개를 돌리는 찰나 머리를 잡고 입술에 키스했다.쪽.선명한 소리에 연정훈은 이게 꿈이 아닌지 의심이 갔다.방금까지 털을 바짝 세우고 있던 고양이가 순식간에 장화 신은 고양이로 변해버렸다.양시연은 속으로 웃고 있었지만, 티를 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링거를 톡톡 두드렸다.“이제 얼마 남지 않았네요.”연정훈은 양시연의 몸에 위치추적기라도 단 듯 시선으로 졸졸 따라갔다.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몰랐다.한참 뒤 연정훈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꽤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소리만 크고 실속은 없네...”양시연은 뒷짐을 진 채로 말했다.“계속 그러면 뽀뽀도 없어요.”“...”연정훈은 방금 사이에 코피를 얼마나 흘린
양시연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연정훈은 양시연의 편애가 필요했고 이런 자신을 달래주기를 원했다.그래서 냉전을 시작한 걸 누구보다 후회했다. 게다가 양시연은 연정훈이 그러든 말든 평소와 다름없이 먹고 자고 했으니 연정훈은 후회막심했다.“내일 양혁수 보러 가도 돼.”연정훈이 꽤 진지한 얼굴로 말하자 양시연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이젠 질투 안 해요?”“내가 무슨 말을 해도 넌 양혁수 보러 갈 거잖아.”그 말을 들은 양시연은 연정훈이 평소에 쌓인 게 많다는 게 느껴졌다.“내일 정훈 씨 건강하게 회복되면 혁수 보러 갈게요.”“그럴 필요 없어. 바로 비행기 티켓 끊어.”“정훈 씨가 나으면...”“난 그렇게 빨리 괜찮아지지 않을 거야.”“왜요?”“네가 날 피해 다닐수록 난 예민해질 테고, 또 양혁수에 질투하게 될 거야.”연정훈은 갑자기 풀이 죽은 얼굴로 말했다.그러자 양시연이 다급해졌다.“내가 언제 정훈 씨 피해 다녔다고 그래요?”“이불 덮고 잠만 자는 게 그 뜻이지 뭐.”“...”양시연은 그제야 연정훈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우린 법상 부부가 되었는데도 그렇게 불안해요?”연정훈은 대꾸하지 않았다.그러자 양시연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톡 쐈다.“링거까지 꽂고 꼭 그렇게 불순한 생각을 해야겠어요?”서론을 길게 늘여놓은 건 결국 양시연과 잠자리를 가지고 싶다는 뜻이었다.“난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야.”양시연이 힐끗 노려봤다.“이미 연정훈 씨 아내인데 내가 어딜 도망가겠어요?”양시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쳇.’연정훈은 침을 꿀꺽 넘겼다. 양시연이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는데 마치 귓가에 속삭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두 사람 사이에는 꽤 거리가 있었는데 말이다.그래서 다시 침을 꿀꺽 넘기며 애써 침착하게 행동했다.“누가 알아? 네가 정인 그룹만 손에 쥐고 튈지?”“내가 왜 그러겠어요. 이렇게 좋은 남편을 어디 가서 또 찾는다고.”연정훈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양시연은 자연스레 고개를 돌려 연정훈
양시연의 시선은 또 연정훈의 목울대로 향했고 숟가락에 묻은 팥빙수를 슬쩍 핥는 것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그러자 숟가락을 입에 대니 가만히 올려다보던 연정훈의 시선이 자연스레 떠올랐다.‘음... 뭐랄까?’마치 비에 폭삭 젖어버린 큰 강아지가 문밖으로 쫓겨나 풀이 죽은 모습 같았다.양시연은 연정훈의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잠금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그러자 잠금 화면이 풀리고 거실에 앉아 책을 보는 본인을 찍은 사진이 보였다. 아마도 2층 계단에서 몰래 찍은 것 같았다.‘이건 언제 찍은 거지?’양시연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슬쩍 올렸고 고개를 드니 팥빙수를 먹던 연정훈은 뭐에 걸린 듯 캑캑 대고 있었다.“줘요.”양시연의 말에 연정훈은 고분고분 팥빙수를 넘겼다. 그리고 양시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힘에 부친 듯 크게 호흡을 들이마셨다.연정훈이 더 이상 팥빙수에 관심을 보이지 않자 양시연은 휴지로 연정훈의 입가를 닦아주고 일어서서 과일을 챙겨왔다.연정훈은 이런 양시연을 대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뭘 봐요? 다음에도 이렇게 멍청한 짓을 하면 정말 국물도 없어요.”연정훈은 기분이 퍽 좋아졌다.지금 보니 오늘도 크게 손해를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다음번에는 적정량만 조절하면 되었다.“돌아가면 여 아주머니와 제대로 얘기를 해야겠어.”연정훈이 덤덤하게 말했다.“무슨 얘기요?”“다음에도 보약을 챙겨줄 거면 적정량을 제대로 체크해보라고 언질을 줘야지.”양시연은 어이가 없었다.그래서 어처구니없다는 듯 손가락으로 연정훈의 이마를 쭉 밀었다.“그런 바보 같은 소리 마요.”“건강으로 장난할 생각하지 마요. 적당량을 딱 마셔 병원에 올 정도는 아니었어도 몸은 어딘가 불편했을 거예요. 난 그 탕약에 위험한 신고가 딱 느껴지던데 어떻게 그걸 먹어요?”연정훈은 되려 당당하게 말했다.“그걸 재고 따지면 우리 사이엔 진전이 없을걸.”“...”양시연은 연정훈을 말없이 째려보았다.“알고 보니 정훈 씨도 변태였나 보네요.”“나도 그런 사람이
연정훈이 멈칫하자 양시연은 숟가락으로 연정훈의 입술을 톡톡 건드렸다.“입 벌리고 빨리 먹어요.”“...”연정훈은 배가 고픈 건 아니었으나 목이 바짝바짝 마르고 있었다. 그리고 양시연이 장난이 아닌 진심으로 보이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러자 양시연은 냉큼 숟가락을 돌려 제 입에 넣었다.“음! 너무 맛있네!”“...”‘그럼 그렇지.’연정훈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이렇게 중얼거렸다.“그러다가 큰코다치는 수가 있어.”“그럴 리가요.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라고 했어요.”“...”연정훈은 다시 눈을 감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치사하게.”그러자 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팥빙수를 맛있게 먹다가 이상할 정도로 얼굴이 붉어진 연정훈 얼굴을 보며 양시연이 말했다.“정훈 씨에게도 이런 날이 다 오네요.”‘다시 냉전하기만 해 봐. 흥.’내킬 만큼 괴롭힌 양시연은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막 도착한 팥빙수는 이가 시릴 만큼 차가웠지만 이젠 조금 녹아 먹기 딱 좋았다.팥빙수의 상태를 체크한 양시연은 숟가락으로 크게 퍼 연정훈에게 건넸다.“먹어봐요. 팥이 많은 게 좋으면 팥만 골라서 줄게요.”그리고 고개를 숙여 직접 입가까지 가져다주었다.그러나 이번에는 연정훈이 양시연을 못 본 척 무시했다.티가 나게 삐진 연정훈을 보며 양시연은 웃음이 나왔다.그래서 말라 터진 연정훈의 입술을 노크하듯 숟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자자. 방금까진 장난이었어요. 지금 조금 녹아서 딱 먹기 좋아요.”연정훈은 다정한 양시연의 말투에 마음이 녹았다. 그러나 여전히 입을 굳게 닫은 채로 이어질 양시연의 행동을 기다렸다.그때, 양시연은 연정훈의 두 볼을 쭈욱 잡아당겼다.눈을 깜빡이다가 다시 시선을 마주한 연정훈의 두 눈에는 의문이 가득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두 볼을 만지작거리다가 좌우로 흔들기까지 했다.“계속 입 벌리지 않으면 내가 정말 다 먹어버릴지도 몰라요.”‘내가 어린애인 줄 아나? 겨우 이런 말로 겁먹게?’연정훈은 속으로 꿍얼거렸으나 양시연의 미소를
속셈이 들통나자 연정훈은 자세를 고쳐 누우며 이렇게 말했다.“빨리 휴지나 챙겨서 갈아줘. 코피가 아직도 멈추지 않은 것 같아.”양시연이 쯧하고 혀를 찼다.“말하지 마요. 코피를 그렇게 흘렸는데 아직도 힘이 남아 있어요?”“...”“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 이렇게 치졸한 방법을 써야겠어요?”양시연이 재차 속을 긁자 연정훈은 다시 눈을 감았다.“뭐예요? 눈만 감으면 장땡이라는 건가?”“...”‘체면을 이렇게 구기다니!’다시 등을 돌린 연정훈을 보며 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드디어 의사가 병실을 찾았다.그리고 그 뒤로 여 아주머니도 함께였는데 양시연과 달리 여 아주머니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요즘 들어 여 아주머니는 연정훈이 꽤 마음에 들었는데 오늘 연정훈을 다치게 만든 게 본인이다 보니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여 아주머니는 자책하며 마른 입술의 연정훈을 향해 물었다.“차가운 음료수라도 가지고 올까요?”연정훈은 생각보다 덤덤했고 방금 양시연이 팥빙수 얘기를 꺼낸 걸 떠올리며 가볍게 부탁했다. 왠지 자꾸 목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네네. 바로 만들어 올게요.”여 아주머니는 드디어 안심이라는 듯 말했다.연정훈이 입꼬리를 올렸다.“1인분만 만드시면 돼요. 수고스럽게 많이 만드실 필요 없으세요.”여 아주머니는 양시연을 힐끗 바라봤고 연정훈이 바로 말을 이었다.“시연이는 안 먹을 거예요. 저 놀리느라 먹을 시간이 없거든요.”여 아주머니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표정이었다.연정훈의 말에 양시연은 연정훈을 힐끗 노려보았다.하지만 여 아주머니는 아픈 아이를 달래듯 연정훈을 달래며 양시연더러 옆을 잘 지키고 있으라고 당부했다.“알겠어요.”양시연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여 아주머니가 병실을 나섰다.그렇게 병실에는 양시연과 연정훈만 남겨지고, 양시연은 고개를 돌려 장난기 넘치는 얼굴로 연정훈을 바라봤다.연정훈은 아예 이불을 쭉 당겨 얼굴까지 가렸다.눈 감고 자는 척하는 연정훈의 속셈을 눈치챈 양시연은 혀를 쯧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