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로 연약해 보이는 이 여인은 꽤 큰 힘으로 안시연을 퍽 밀었다.안시연은 약간 휘청이며 두어 걸음 물러섰다.상대방이 안시연에게 뭐라고 더 말하기 전에 양혁수가 나서서 앞을 가로막았다.젊은 남성의 듬직하고 힘 있는 뒷모습이 그녀의 시선을 완전히 가렸다. 너무 가까이 선 탓에 상대의 은은한 남성 향수 향기가 풍겨오자, 그녀는 덫에 걸린 토끼처럼 화들짝 놀라 얼른 뒤로 두 걸음 더 물러섰다.이어 양혁수의 비웃는 듯한 말이 들려왔다.“내가 누군지 당신과 무슨 상관이야.”“혁수야...”“착한 척 오지네. 낸데 먹힐 줄 알았어?”여인은 목소리가 점점 꺼져 들어갔지만 그래도 마음을 굳게 먹고 입을 열었다.“혁수야, 난 그래도 네 웃어른이야!”“가지가지 한다, 정말. 요즘 세대는 스폰녀도 어른 행세를 할 수 있었나?”“너!”“빨리 꺼져요, 당신 얼굴만 봐도 짜증 나는데.”안시연은 살벌한 분위기에 놀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입이 독하네. 아까 건드리지 않아서 다행이야...’그 여자는 무슨 말을 더 하려고 했던 것 같았지만 끝내 참고 입을 다물었다.안시연이 고개를 내밀고 양혁수의 등 뒤에서 나와 서자, 상대방 증오의 눈빛이 마침 그녀의 얼굴에 박혀 있었다. 마치 방금 양혁수에게 당한 굴욕은 모두 그녀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그녀가 타고 있던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그녀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양혁수의 농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우리 집사람이 널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안시연은 소름이 끼쳤는지 목을 움츠렸다.그녀는 가방을 메고 두 손을 몸 앞에 공손히 모아 다시 한번 사과했다.“양혁수 씨, 오늘 정말 죄송합니다.”양혁수는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태도가 산만했다.“걱정 마, 연정훈에게 고자질 같은 거 안 할 테니까 너희 둘 사이 감정에 영향이 없을 거야.”“...”엘리베이터가 다시 올라오자, 그녀는 양혁수를 한 눈 쳐다보았다.양혁수는 그녀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안시연은 들어가고 나서
오성호가 깜짝 놀라 물었다.“당신 혁수 만나러 갔어?”소현정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우리 엄마가 아프셔서 내가 병문안을 갔는데 마침 병원에서 혁수를 만났지 뭐예요. 어느 미친년에게 교통사고를 당해서 머리에 온통 피범벅이라 내가 몇 마디 관심해 줬는데 조금도 고마워할지언정 나에게 욕설을 퍼부었단 말이에요!”“당연한 소릴 하고 있어! 당신이 어떤 신분이고, 걔가 어떤 신분인데 당신에게 좋은 태도로 대할 수 있겠어?”소현정은 듣자마자 더욱 큰소리로 엉엉 울어댔다.오성호는 화가 치밀어 언성을 높여 말했다.“당신 또 이렇게 함부로 굴어봐! 고의로 그에게 접근했다가 일이 발각되면 아들이 양씨 가문을 계승할 생각은 하지도 마!”소현정은 흐느끼며 울부짖었다.“상속 안 하면 안 했지, 지금 상황이 이런데 돈만 있으면 무슨 소용이에요! 내 아들이 나를 인정하지 않는데!”“우리 아들이 당신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그럼, 지원이는? 지원이는 나와 쟤 딸을 얼굴도 본 적이 없다고!”오성호는 얼굴이 극도의 분노로 새파랗게 질려있었다.“애초에 당신을 위해 두 아이를 바꿨는데, 지금 또 이 바보짓을 한다고?! 당신은 정말 내가 죄책감이 없다고 생각해? 지원은 나의 초혼 아내야!”이 말을 듣자, 소현정은 울음을 그쳤다.그녀를 위한 거고 뭐고, 이 따위 말은 모두 그의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마음속으로 잘 알고 있었다.양지원의 아이는 딸로 태어났는데 해산을 앞두고 교통사고를 당해 자궁을 뗐고, 오성호는 또 일편단심으로 아들을 원했기 때문에 아이를 바꾸는 일이 생겼다.하지만 그녀는 이런 말을 당연히 입 밖으로 내보내지 않을 것이었다.“당... 당연히 속이 타서 그랬죠. 혁수를 못 본 지 1년이 넘었는데.”그녀가 아직 제정신인 것을 보고 오성호는 태도를 누그러뜨려 소파에 털썩 앉았다.“다시는 걔 앞에서 얼씬거리지 마, 뜻밖의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반년만 더 있으면 어르신께서 수혁이를 이사회에 들어오게 할 생각이야.”“정말?”소현정은 놀라서 되물었다.
안시연은 양혁수의 연락처를 몰라 목걸이를 돌려줄 방법이 없었다.오후 내내 쉴 새 없이 바빴던 그녀는 황급히 집에 돌아가 씻고 정리하고는 이 일을 금방 잊어버렸다.연정훈이 직접 차를 몰고 집 아래까지 데리러 왔다. 그녀가 계단을 내려갈 때 마침 황혼 무렵이었고, 저녁놀의 여운이 하늘에 아름답게 걸려 있어 마치 황금 비단을 수놓은 것 같았다. 남자는 주름 한결 안 잡힌 말끔한 수트를 차려입고 차 옆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단지 서 있는 것만으로도 남다른 고귀한 분위기를 자랑했다.그녀는 종종걸음으로 그에게 달려갔다.“운전기사는요?”연정훈은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훑어보았다.그녀는 흰색 슬림핏 롱드레스에 검은색 가디건을 걸친 채 온몸의 주얼리라고는 손가락에 끼고 있는 보석 반지 하나뿐이었으나 전체적으로 매우 고급지고 우아하면서도 속되지 않았다.“내가 직접 운전한다면, 싫어?”안시연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연 교수님에게 이런 궂은일을 시킨 것 같아서 괜히 마음이 불편하네요.”연정훈은 그녀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그러자 그녀는 두 손을 등 뒤로 한 채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교활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연정훈이 그녀에게 키스하려고 한 것을 그녀가 눈치 빠르게 예측했기 때문이다.그는 입가를 살짝 올리며 조금도 어색한 기색 없이 시선을 그녀의 뒤로 향했다.“뭘 들고 있어?”안시연은 쑥스러워하며 반대로 물음을 그에게 던졌다.“저녁 드셨어요?”“아직 안 먹었는데.”“배고프실까 봐 디저트를 조금 싸 왔어요.”안시연은 이렇게 말하며 뒤에 숨긴 물건을 꺼냈는데 아기자기하고 네모난 도시락이었다.연정훈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그는 그녀에게 잠시 후 참석할 저녁 연회에 배불리 먹어도 남을 만큼 한 음식이 있다고 알려주고 싶었다.하지만 초롱초롱한 그녀의 눈망울에 담겨있는 진심을 보며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고마워. 마침 배고팠어.”안시연은 흐뭇했다.차에 오르기 전,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도시락 뚜껑을 열고 두 손
“안시연.”“아니, 이름을 물어보는 게 아니라, 너랑 무슨 사이냐고.”이승우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모두가 궁금해하며 연정훈의 대답을 기다렸다.한우빈이 건넨 술잔을 받아 든 연정훈은 안시연을 한 눈 쳐다보며 그에게 되물었다.“네 생각엔?”“생각할 필요가 있어? 당연히 여자 친구 아냐?”이승우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장난기 가득한 태도로 말했다.“우리 연 대표님은 여성분들의 감정을 가지고 노는 그런 인간 아니고 진지한 분이시지.”안시연은 그녀를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감당하기 어려워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연정훈은 그때 구혜은 등 사람들 앞에서 그녀가 자신의 여자 친구라고 한 적이 있지만, 오늘 이 사람들은 달랐다. 이들은 모두 그와 알던 사이였고 이후에도 계속 접점이 생길 사람들이었다.‘설마 그러시진 않을 거야...’“내가 진지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 앞으로 그런 쓸데없는 말은 삼가.”연정훈의 차분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안시연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주위가 금방 떠들썩해졌고 벌써 그녀가 어디에서 일하는지 묻는 사람이 있었다.그녀는 놀라움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본능적으로 이미 상대방에게 대답하고 있었다.“정인 과학기술이요.”“진짜 여자 친구 맞네요. 어느 정도로 아끼고 숨겨두고 계셨으면...”상대방이 웃으며 농담했다.안시연은 수줍은 기색이 드러났고 귓가의 온도가 점점 상승하고 있었다.연정훈은 그녀의 손을 잡고 하얀색 큰 텐트 아래로 천천히 걸어갔다.그동안 그의 손바닥으로부터 전해지는 온도는 그녀의 초조한 마음을 따뜻하게 달래주었다.텐트는 상당히 컸고 달빛만 살짝 가렸을 뿐 사방이 뚫려 있었으며 어두운 불빛이 몽롱하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안시연은 미리 준비한 선물을 한우빈에게 건네주며 말했다.“한 대표님, 개업 축하합니다.”“감사하네요.”그때 누가 걸어와 연정훈과 얘기를 나누기 시작하자 안시연은 그의 곁에 조용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우빈은 금방 눈치채고 매너 있게 그녀더러 여자
날이 점점 어두워졌다.한우빈은 사람들을 이끌고 와이너리 내부로 들어가 2층 플랫폼에서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안시연은 물배만 가득 채우고 서둘러 화장실에 갔다.화장실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안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잘난 척 쩐다, 진짜. 우리랑 놀기 싫다고?”“설마 연 대표님이 말한 여자 친구가 진짜 서로 사랑하는 여자 친구라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이 말을 한 여인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이승우 씨는 나랑 자고 난 다음날에 내 이름도 모르면서 친구를 만났을 땐 그래도 여자 친구라고 불렀잖아.”문밖에서 듣고 있던 안시연은 누군가 머리 위에 찬물을 끼얹은 것만 같았다.하룻밤 사이에 쌓아두었던 기쁨이 한순간 무자비하게 무너져버렸다.그녀는 재빨리 몸을 돌려 여인들이 나오기 전에 위층으로 올라갔다.넋 나간 사람처럼 화장실에 다녀온 그녀는 싱크대 가장자리를 짚고 찬물을 얼굴에 두 번 끼얹었다.그녀는 줄곧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스스로를 타일렀지만, 자신이 연정훈을 좋아한다는 마음에 확신하고 연정훈이 그녀를 아무 조건 없이 아껴준 후부터는 판단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연정훈은 많은 사람 앞에서 그녀를 자신의 여자 친구라고 대범하게 인정했는데, 그녀는 뜻밖에도 이 말을 진짜로 여겼다.연정훈 같은 사람들은 일을 할 때 항상 체면이 일 순위라는 사실을 그녀는 잠깐 잊고 있었다.‘여자 친구’라는 네 글자는 그와 침대 위에서 있었던 일들을 합리화하는 수단일 뿐이었다.찬바람이 복도에서 불어 들어오자, 그녀는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머릿속이 점차 맑아졌고 그녀는 자신의 겉모습을 정리한 뒤 플랫폼으로 돌아갔다.플랫폼 중앙에는 연정훈 등 사람들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테이블 한 바퀴가 모두 남자인 가운데 유일한 여자인 양민지가 끼어있었다.그녀는 담담하고 침착한 태도로 말을 이어가고 있었고 연정훈 등이 그녀의 관점을 진지하게 듣고 분석하고 있음을 쉽게 보아낼 수 있었다.안시연은
안시연의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이승우의 말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그녀는 고개를 저었다.이승우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날 못 믿겠어요?”“그게 아니라...”“이렇게 해보죠. 내가 원리를 좀 설명해 줄게요.”안시연은 “...” 이승우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한 남자가 당신을 좋아한다면, 당신이 다른 남자와 어울리는 걸 질투하지 않겠어요?”안시연은 잠시 말이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이승우는 몸을 바로 세우고 그녀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가만히 있어요.”안시연은 의아해했다.하지만 사람들이 많은 공개된 장소였기에 이승우가 함부로 행동하진 않을 거라 생각하고 그녀는 정말 가만히 있었다.갑자기!이승우가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를 안았고, 다음 순간 그의 얼굴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뺨에 스쳐 지나간 감촉에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이승우는 재빨리 그녀를 놓아주었지만, 그녀는 얼굴이 붉어져 그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근처에 있는 연정훈이 생각나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이승우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움직이지 마요! 절대 움직이면 안 돼요! 움직이면 연정훈의 마음을 얻을 수 없어요.”안시연은 “...”그녀는 순간 굳어버렸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이승우가 웃었다.“연정훈이 그렇게 좋아요?”안시연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고, 고개를 숙였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말했다. “승우 씨, 뭐 하시는 거예요!”이승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못 알아보겠어요? 연정훈이 질투하는지 시험해 보는 거죠.”안시연의 시선은 완전히 그에게 가려져 연정훈의 반응을 전혀 볼 수 없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연정훈이 있는 쪽을 보려 했다.하지만 이승우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어이, 조급해하지 마요. 조금만 참아요.”안시연은 그의 말에 더욱 당황스러워졌다.멀지 않은 곳에서 부승원 등은 이쪽 상황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다.그들의 시선에서 보면 이승우가 거의 안시연에게 입을 맞춘 것처럼
이승우는 셋째 이야기를 하려다 일부러 오래 멈췄다.안시연은 호기심이 생겨 그가 무슨 말을 더 할지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그녀의 순진한 표정에 이승우는 여러 번 웃음을 참아야 했다.그녀가 조급해하는 것을 보고서야 그는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셋째, 그가 끝까지 아무 말 없이 모르는 척하다가 집에 가서 침대에서 당신을 마음껏 굴리고 나서, 다 끝나고 나서야 무심한 듯이 내가 당신한테 뭐라고 했는지 물어본다면, 당신은 그를 봐주지 말아야 해요.”안시연은 그가 갑자기 그런 얘기를 꺼낼 줄 몰라 당황스러워 손을 꽉 쥐었지만, 그래도 계속 듣고 싶어 참았다.이승우는 잠시 멈췄다가 또박또박 말했다. “봐주지 마요.”안시연의 얼굴이 완전히 붉어졌다.이승우가 물러섰다.그녀의 얼굴이 아침노을처럼 붉어진 것을 보고 그는 또 장난스럽게 다가갔다.안시연은 그가 또 얼굴을 비비려나 싶어 얼른 얼굴을 가리고 한 걸음 물러났다.이승우는 상처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보통 사람이라면 내가 얼굴을 비비고 싶어 하지도 않을 텐데.”안시연은 마침내 연정훈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 아까와 같은 모습이었다.그녀는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고, 이승우를 한번 쳐다보았다.“그만 장난치세요.”이승우도 연정훈 쪽을 한번 보았다.그는 다시 안시연 옆으로 다가와 나란히 서서 재빨리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연기하는 거예요, 긴장하지 마요.”“...”그녀는 약간 무력한 듯 다시 둘 사이의 거리를 벌렸다.“더 이상 저를 놀리지 마세요.”이승우는 웃으며 샴페인 잔을 들어 반쯤 마시고는 여유롭고 멋진 자세를 취했다.농담이라고.연정훈이 마음이 멀었다고 해서 자기까지 눈이 멀 순 없지.실내 분위기가 묘해지고 있을 때, 갑자기 테라스의 유리문이 열렸다.쾅!꽤 큰 소리가 났다.키가 큰 젊은 여자가 들어왔다.그녀는 20대 초반으로 보였고, 살짝 웨이브가 있는 중간 길이의 머리를 높게 묶었다. 순수한 검은색 청바지 반바지에 흰색
순간 안시연은 상대방의 선악을 판단하기 어려워 무의식적으로 연정훈의 손목을 잡았다.하지만 연정훈은 아무 내색 없이 손을 빼냈다.그녀의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다음 순간, 남자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의 표정을 살펴보았으나 기분 좋아 보이진 않았다.부승희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 얼굴로 임유진은 불문하고...”그녀는 양민아를 흘깃 보며 빈정거리듯 말했다. “민아 언니도 당신 신발 끈 묶어주기도 버거울 거예요.”이 말은 겉으로는 칭찬 같았지만, 오히려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았다.하지만 양민아는 침착하게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옆에 있던 이승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민아가 시연 씨 신발 끈을 묶어준다고? 넌 뭘 하고 있는 거야?”“나? 난 비교할 필요가 없지.”부승희는 손뼉을 치며 말했다. “난 정훈 오빠 아내가 되고 싶지도 않고, 연정훈 오빠의 몸에 욕심내지도 않아. 내가 뭘 비교한다는 거야?”그녀는 과일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양민아를 바라보았다.“그렇지 않아요, 민아 언니?”공기 중에는 화약 냄새가 가득했다.연정훈의 품에 안겨있던 안시연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를 더욱 긴장시킨 건 연정훈의 침묵이었다.테이블 위의 설전을 그는 한마디도 듣지 않은 것 같았다.그녀가 몇 번이나 그의 품 안에서 움직이려 했지만, 그는 더 큰 힘으로 그녀를 붙잡았다.맞은편에서 양민아가 말했다. “네 승우 오빠도 시연 씨를 많이 좋아하더라.”안시연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그녀는 재빨리 이해했다. 이 아가씨가 십중팔구 이승우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과연 부승희의 얼굴에 순간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가 이내 고개를 꼿꼿이 들며 말했다. “그가 좋아한다고 뭐해요? 안시연 씨의 눈은 크고 반짝이는데, 보면 알 수 있잖아요. 멀쩡한 눈을 가졌는데 연정훈 오빠 놔두고 그를 택하겠어요?”그녀는 어색한 분위기를 완화하려는 듯 안시연에게
까드득.반우희는 쿠키를 입안 가득 넣으며 창가에서 아래층을 살피고 있었다.그런데 오가는 차 한 대 없자 반우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오늘에는 운 좋은 줄 알아. 부승원!’그리고 발을 쿵쿵 구르며 테이블에 모아둔 간식 쓰레기를 정리했다.그런데 그때, 도어락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뭐야!’반우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방금까지 기세등등한 모습은 사라진 채로 황급히 간식 쓰레기를 감췄다.그리고 문이 벌컥 열렸다.반우희는 입안 가득 쿠키를 문 채로 빠르게 문 앞으로 달려가 온몸으로 간식을 가렸다.부승원은 집 안에 반우희가 있을 거라고 먼저 예상하고 있었기에 첫 만남에 어떤 말을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그런데 입안 가득 우물거리는 반우희를 보며 걱정하던 마음이 눈 녹듯 녹아내렸다.‘다행이야. 간식을 먹고 있는 거면 그렇게 화가 난 게 아닐지도 몰라.’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고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이어 등 뒤로 또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선배님.”반우희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그 목소리의 주인을 살폈고 부승원은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두 눈을 감은 채로 등 돌려 루나에게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아래층에서 기다리라고!”루나는 머리를 정리하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아래층은 춥잖아요.”“차 안에 히터 틀어져 있어.”“말도 마요. 시트 냄새 때문에 멀미 나요.”그리고 루나는 제 멋대로 집 안으로 들어오더니 반우희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 듯 말했다.“어머 어린 친구가 집에 있었네요?”루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반우희가 누구인지 떠올리는 시늉을 했다.“아, 맞다.”“우리 회사 우희 씨 맞죠?”반우희는 서서히 표정을 굳히고 루나를 바라봤다.‘그래서 뭐! 나 반우희인데 어쩔래!’부승원을 향해 고개를 돌린 루나가 또 이런 말을 했다.“회사에서 도우미도 찾아준 거예요?”부승원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알바일 뿐이야.”“아, 도우미 알바?”“...”부승원은 반우희 머리 위로 검은색 구름이 떠 있는 게 보
‘나쁜 놈!’‘공공장소에서 스킨십이라니!’‘며칠 전엔 나랑 키스하고 오늘엔 다른 여자랑 스킨십을 해?’엘리베이터에 오른 반우희는 커피를 쥐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고 얼굴이 시뻘게지고 있었다.“난 두 사람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선남선녀인데 두 사람 능력도 좋잖아요.”‘어울리긴 개뿔!’반우희는 억울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싶었다.‘그게 뭐가 중요해? 부승원이 나한테 키스를 했지 저 사람한테 한 것도 아니잖아.’‘부승원 개자식. 날 유혹하고 키스할 때는 언제고, 다른 사람이랑 엮기다니.’‘에라이 퉤.’“우희 씨?”같이 있던 직원이 점점 굳어가는 반우희를 보며 깜짝 놀라 물었다.“왜 그래요?”“아무것도 아니에요.”반우희는 입을 삐죽이며 서러움을 감추려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괜찮아. 괜찮아.’‘어차피 내 것 아니었고 줘도 안 가져.’띵.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반우희는 불만을 담아 쿵쿵거리며 밖을 걸었다.다른 한편 아래층.부승원은 세게 힘을 주어 루나를 내쳤고 루나는 쓰레기통 옆으로 내팽개쳐졌다. 하지만 부승원은 마음이 다른 곳으로 팔려 루나는 안중에도 없었다.비서는 좌수석에 앉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고 마른기침하며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려 했다.그때.핸드폰이 진동했고 비서는 반우희가 보내온 메시지를 받았다.[비서 언니, 저 그 알바 그만두지 않을래요! 오늘도 청소하러 갈게요!]비서는 눈을 반짝였다.[정말요?]반우희는 미소를 짓고 있는 이모티콘을 보내며 물었다.[그동안 알바비는 언제 주시는 거예요?]그 내용에 비서는 웃음이 나갔다.이런 상황에서도 돈만 걱정하는 모습이 딱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오늘 업무 끝나는 대로 보내 드릴게요!][좋아요!!!]연속 세 개의 느낌표는 반우희의 벅찬 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비서는 문자를 보내고 서둘러 고개를 돌려 부승원을 바라봤다. 그런데 부승원은 잔뜩 얼굴을 굳히고 있었고 루나는 덤덤하게 메이크업 수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슬쩍 부승원을 떠보았다.“부 대표님,
‘쳇. 대시하면 하는 거지 뭐.’‘정말 연애하면 여자만 고생하는 거야. 흥.’‘하루 종일 잔소리만 하고 문제 틀렸다고 얼굴에 엑스나 그을 사람이라고!’‘다투면 무시하고 냉전이나 할거고 키스하고도 아닌 척 모르는 체할 거야.’반우희는 꾸역꾸역 파이를 입에 넣고 방금 들은 정보를 소화했다.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계속 기분이 더러웠다.그래서 아마도 간식을 너무 많이 먹어 속이 부대끼는 거라 여겼다.‘그래. 틀림없이 그런 거야.’반우희가 자기 암시를 하고 있을 때 사무실 안의 부승원은 루나를 향해 경고를 날리고 있었다.그리고 풍성한 꽃다발을 척 가리키며 말했다.“루나 씨, 이번 일은 교수님 얼굴을 봐서 한번 넘어가 주는 거야. 그런데 또 한 번 이렇게 멍청한 일을 한다면...”“절대 없을 겁니다!”루나는 맹세했다.“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그러자 부승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만 나가봐.”“넵!”루나는 배시시 웃으며 고분고분 방을 나섰다.그리고 루나가 밖으로 나서자 모든 사람들이 시선을 집중했다.루나는 더 활짝 웃으며 핸드폰을 꺼내 들고 연기를 시작했다.“네. 저녁 10시 창가 자리로 예약해 주세요.”그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벌써 두 사람이 데이트한다는 소문이 무성하게 퍼졌다.그리고 두 시간도 되지 않아 회사 내에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사실 예전의 부승원이었다면 절대 부연의 설명을 붙이지 않고 시간이 지나 잠잠해질 때까지 내버려뒀을 것이다.하지만 오늘따라 짜증이 치솟고 자꾸 반우희가 마음에 걸렸다.반우희는 늘 가십거리에 예민했고 이런 일을 가장 먼저 전해 들었다.반우희와 키스를 한 사건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는데 회사 직원과 스캔들이 터진다면 반우희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눈에 뻔했다.‘아니지. 내가 왜 반우희 걱정을 해?’부승원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요즘 들어 반우희에게 너무 많은 관심을 쏟고 있었다.똑똑똑.노크 소리
다시 사무실.양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떼를 썼다.“아 더는 못 먹겠어요.”사실 양시연은 몇 입 삼키지도 않고 못 먹겠다고 했고 연정훈은 인내심을 가지고 입가에 숟가락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말 들어. 몇 입만 더 먹자.”‘그래...’양시연은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려 음식을 삼켰다.그런데 연정훈이 또 계란찜을 떠서 건네자 양시연은 연정훈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이제 정말 못 먹어요. 턱 끝까지 음식으로 찬 것 같아요.”연정훈은 더 이상 양시연을 재촉하지 않고 수저를 내려놓았다.그때 마침 지인이 찾아와 연정훈에게 인사를 걸었다.그 사람은 바로 루나, 부승원이 뽑아온 젊은 여성 직원이자 연정훈과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었다.“어머 선배님이 이렇게 다정하신 분이셨어요? 직접 사모님 식사 챙기러 오신 거예요?”연정훈은 하나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간단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루나는 연정훈에게 짧은 인사를 하려고 찾아왔으나 연정훈이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계속 승원이랑 연락하고 지냈던 거야?”“네. 전공 선배이잖아요.”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양시연을 바라보았다.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는 연정훈을 보며 양시연은 연정훈이 또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눈치챘다.그리고 연정훈은 양시연의 손을 놓더니 사무실을 나서며 루나에게 말했다.“마침, 부탁할 일이 있는데 지금 좀 들어줄 수 있을까?”“선배님, 말씀만 하세요. 뭐든지 들어드릴게요.”연정훈은 내색하지 않고 커피를 들고 창가 자리로 걸어갔다.그리고 루나는 연정훈을 따라나섰다.양시연의 사무실은 과거 연정훈이 지냈던 공간이었고 너무 큰 공간 탓에 연정훈과 루나가 어떤 대화를 하고 있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하지만 양시연은 굳이 두 사람을 따라가지 않았고 침착하게 기다렸다.그때, 연정훈의 말을 들은 루나는 갑자기 흥분에 겨워 눈을 반짝이더니 곧 마른기침하더니 금색 머릿결을 뒤로 넘기며 말했다.“이건 좀 너무하지 않을까요?”연정훈이 말했다.“네가 수고 좀 해줘. 정말 성사되면
“내가 돈만 많았어도 회사 때려 치고 더 좋은 사장 아래에서 일했을 거예요.”반우희가 양시연에게 했던 말을, 양시연은 바로 냉큼 부승원에게 고자질을 했다.부승원은 그 옆자리에 앉아 무언가를 끄적이다가 하던 일을 멈췄다.양시연은 예민하게 그 변화를 캐치했다.“부 대표님, 소감이 어떠신가요?”그리고 농담 섞인 목소리로 부승원을 취재하듯 물었다.부승원은 슬쩍 양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본인이 할 일이나 완성하시죠.”양시연은 말문이 막혔다.‘대체 누가 진짜 회사 대표인 거야!’사실 부승원이야말로 정말 답답한 노릇이었다.이튿날 잠에서 깬 부승원은 완전히 정신을 차리고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반우희에게 키스했던 기억이 아주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리고 그날 아침, 부승원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출근하고 싶지 않은 기분에 휩싸였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써도 연차를 쓸 핑계가 떠오르지 않아 일단 해야 할 일이나 하자는 마음으로 회사를 나갔다.그러나 회사에서 반우희를 마주치는 순간 부승원은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반우희는 아예 부승원을 모르는 사람 취급하더니 시선 한번 돌리지 않고 몰래 빠져나갔다.예전에는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를 애용하던 반우희였지만 부승원이 안에 탄 걸 확인하고 얌전히 사람으로 꽉 찬 직원 전용 엘리베이터를 비집고 올랐다.이렇게 선을 긋는 반우희를 보며 무언가 변명이라도 하려던 결심은 눈 녹듯 사라져 갔다.결심이라고 말하는 것도 참 웃긴 상황이었다.어쩌다가 반우희와 대화하는 일에 결심까지 해야 하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그리고 냉전이 시작된 것도 참 이상했다. 첫 만남에 대화를 망설이자 그 뒤의 만남은 더 어색해졌고 입을 열기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반우희가 자신을 피한 첫날엔 그냥 체면을 구겼다고만 생각했다.그러나 두 번, 세 번... 반우희가 자신을 피하는 차수가 많아질수록 점점 스트레스로 다가오고 부담이 생겼다. 부승원은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이 본인에게 있고 자신이 저지른 행동
부승원이 이상하다.이건 며칠 동안 모든 회사 직원이 내린 결론이었다.“그제부터 자꾸 사소한 실수를 하셨어.”“맞아. 자꾸 정신이 다른 곳에 팔린 것 같기도 하고.”“아까는 내가 눈앞에 서 있는데 날 다미 씨라고 부른 거 있지? 난 강아영인데.”양시연은 따뜻한 우유 한잔을 들고 회의실을 지나치다가 그 대화를 듣고 생각에 잠겼다.양시연도 요즘 들어 부승원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상한 사람은 또 한 명 있었는데...그게 바로 반우희였다!반우희는 늘 간식 시간이 되면 시간 맞춰 양시연의 주변을 맴돌며 간식을 먹는 낙으로 살았었다.그런데 이 며칠 동안 한 번도 나타나지 않더니 먼저 말을 걸어도 속이 불편해 간식을 끊었다며 거절했었다.‘참 이상하단 말이지!’반우희는 부승원 쪽에서 무슨 일인지 알아내 보려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그래서 부승원의 비서부터 손을 쓰기로 했다비서는 이상한 점을 가장 먼저 눈치챈 사람이었으나 털어놓은 사람이 없어 답답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양시연에게 낮은 소리로 속닥였다.“백 퍼센트 두 사람이 싸운 거예요. 그것도 엄청 크게 다툰 거죠.”“정말요?”양시연이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두 사람이 어떻게 다퉈요?”사실상 부승원이 늘 우세를 가지고 반우희에게 폭풍 잔소리를 하는 게 일상이었다.비서는 살짝 웃음을 터뜨리더니 양시연을 향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그러니까 흥미로운 거죠. 우리 변호사님 일상에 변화를 일으킨 일이면 아주 큰 일 아니겠어요?”그리고 비서는 주변을 살피며 한마디를 더 보탰다.“어쩌면 아주 민망한 일인지도 몰라요. 변호사님이 실수한 거라 그렇게 당당하지 못한 것 같기도 하고요.”그 말에 양시연은 점점 호기심이 깊어져 갔다.오후 시간, 사람이 드물 때를 틈타 양시연은 길 가던 반우희를 잡아 사무실로 끌었다.“어어! 이러시면 안 돼요!”반우희는 한시도 쉬지 않고 쫑알거리며 기회를 보아 도망가려 했으나 양시연이 임신한 걸 생각해 결국 얌전히 끌려갔다.“시연 언니 왜 그래요?”양시
부승원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지만 어떻게 입을 열지 난감했다.그래서 말없이 조용해진 반우희를 자꾸 힐끔거렸다.‘오늘 밤 일에 대해 반우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그러다가 자신의 이미지가 완전히 붕괴되었다고 생각되었고 인상을 찌푸린 채로 크게 심호흡했다.다른 한편 쪼그리고 앉아 있는 반우희는 사실... 부승원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감히 부승원을 바라볼 자신이 없는 거였다.‘젠장! 어떡해! 무슨 말이라도 좀 해봐. 너무 어색해 죽을 것 같아.’반우희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목도리를 다시 두르며 부승원을 애써 외면했다.저도 모르게 입술을 오므릴 때면 방금 부승원과 키스했던 게 떠올라 부승원이 오해라도 할까 빠르게 표정을 풀었다.‘엉엉... 어떡해.’반우희는 순결을 빼앗긴 것 같아 입술을 버리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예전부터 흔들리고 있었던 마음이 부승원의 한방에 아예 무너지고 있었다.회사 다니는 건 그렇다고 쳐도 집 청소 알바는 이제 그만둬야 할 것 같았다. 다시 마주치면 그냥 혀 깨물고 죽는 게 나을 것이다.‘내가 부자 되는 꼴을 못 봐요.’부승원은 반우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오로지 붕괴된 이미지를 되찾으려는 계획만 세우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지금 자신이 얼마나 반우희를 신경 쓰고 있는지를 미처 자각하지 못했다.하지만 부승원은 자신이 반우희의 눈에 변태로 보이는 건 피하고 싶었다.두 사람이 동상이몽을 하는 동안 밖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유리문을 통해 보니 부승원의 차가 도착한 게 보였다.그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황급히 온몸으로 문을 밀며 밖으로 나가려 했다.문은 무거운 편이라 반우희는 힘에 부쳤지만, 부승원이 바로 그 뒤에 서서 손으로 힘을 실어주었고 문이 손쉽게 열렸다.반우희는 눈을 깜빡이다가 빠르게 틈을 타 밖으로 나섰다.그리고 부승원도 그 뒤를 따르려는데 반우희가 휙 몸을 돌리며 말했다.“변호사님은 나오지 마세요!”반우희는 뒷걸음질하며 말했다.“빨리 위층으로 올라가세요. 안
반우희는 어려운 고민 끝에 위층으로 올라가 핸드폰을 가져오기로 했다.‘가방만 챙기고 튀는 거야.’‘부승원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야!’‘어쨌든 부승원이 먼저 시작한 거니까 나한테 책임은 없어.’‘그래. 그게 맞아!’반우희는 주먹을 꽉 쥐고 자신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그런데 엘리베이터는 바로 1층에 멈춰 섰다.‘응?’‘이런 우연이?’띵.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먼저 타 있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반우희는 그 사람이 부승원 일 거라는 예상은 전혀 하지 못했고 귀신이라도 마주친 것처럼 바로 몸을 돌려 도망가려 했다.이번엔 부승원이 한발 빠르게 반우희 패딩 모자를 확 잡아 엘리베이터 안으로 끌었다.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문이 닫히고 반우희는 또다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두 사람은 다른 버튼을 누르지 않았고 엘리베이터는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부승원은 무의식적으로 반우희를 잡았으나 또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했다.반우희는 부승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아등바등했다.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없자 얌전히 그 자리를 지켰다.그때, 머리 위로 중저음 목소리가 들려오고 그 목소리에서 알코올 향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핸드폰도 없이 어떻게 집으로 가려고?”반우희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그걸 아는 사람이 물어?’“일단 이거부터 놓고 말해요...”반우희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부승원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모자에서 손을 놓았다. 자신이 모자를 움켜쥔 흔적이 남자 대신 정리도 해주었다.반우희는 모자가 불편하게 느껴져 손을 뻗어 정리하려 했다.그러다가 부승원의 손과 닿게 되었다.그 순간 전기가 통하듯 찌르르했고 황급히 손을 내렸다.“...”엘리베이터 안의 분위기는 너무 이상했고 부승원은 다시 술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아 머리가 어지러웠다.그래서 모자를 정리해 주고 엘리베이터 문을 열었다.문이 열리자마자 반우희는 밖으로 쏙 나가버렸다.그 뒤의 남자도 따라 밖으로 나왔다.반
부승원은 술을 마셨지만 정신은 멀쩡했고 현재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다. 다만 알코올의 힘을 빌려 내일은 잠시 잊기로 했다.부승원은 키스 한 번으로 부족했고 머릿속엔 오래전 그날 밤이 떠올랐다.그날엔 키스뿐만 아니라 더 많은 일을 했었다.반우희와의 키스는 달콤했고 점점 더 욕심이 났다. 그래서 반우희의 손목을 잡고 품 안으로 더 넣었다.그러다가 반우희의 숨소리가 가빠지자 부승원은 다정하게 잠시 숨을 고를 시간을 주었다. 그리고 또 참지 못하고 얼굴을 맞대다가 반우희의 귓불에 키스했다.반우희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먼 곳의 크리스탈 조명을 바라보다가 점점 이성이 돌아오는 걸 느꼈다.그래서 부승원이 방심한 사이 손을 뻗어 단숨에 부승원을 밀어냈다.아무런 예상도 하지 못했던 부승원은 자칫하다가 소파에서 떨어질 뻔했다.그러나 부승원은 다행히 자세를 바로잡아 떨어지는 불상사를 피했고 반우희의 얼굴을 마주하기도 전에 다시 소파 등받이로 밀려났다.등 뒤로 푹신한 소파 쿠션이 느껴졌고 안 그래도 어지럽던 머릿속이 확 밀려 뒤죽박죽이 되어갔다.반우희는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잠시 시선을 마주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그러나 고민하다가 빠르게 몸을 돌려 도망을 갔다.부승원은 소파에 멍하니 앉은 채로 머리를 재부팅했다.그때, 반우희는 빠르게 집 밖으로 나갔고 한시도 지체하지 않은 채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이어 1층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 안의 자신을 확인하며 이마의 온도를 체크했다. 사실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지금 자신의 얼굴이 얼마나 빨갛게 되었을지는 예상이 되었다.반우희는 자기 입술을 매만지며 아직 남은 온기를 느꼈다.그러자 얼굴이 점점 더 뜨거워지고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띵.아래층에 도착하고 반우희는 멍하니 밖을 걸었다. 그리고 오피스텔 밖으로 나서는 찰나 찬 바람이 불어오자 지하철을 타려면 핸드폰이 필요하다는 게 떠올랐다!‘핸드폰을 어디에 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