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연정훈을 따라 자리를 떴고, 이승우는 그들을 따라 나와 계속 시연 씨라고 부르다가 마지막엔 ‘시연아’ 라고 부르기까지 했다.차가 와이너리 입구에 서자 그는 창문에 기대어 안시연에게 말했다. “시간 나면 놀러 나와요, 맨날 집에만 있지 말고.”마치 오랜 친구에게 하는 말투였다.안시연은 그가 몇 번이나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는 바람에 속으로 무척 긴장했고, 그가 더 이상 말하지 않기만을 바랐다.운전석의 연정훈은 담배를 피우며 서두르는 기색 없이 그들이 대화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마지막으로 부승희가 나와 이승우를 놀렸다. “남이 싫어하는데 붙어다니면 재미있어?”이승우는 눈을 굴리며 또 기회를 노려 안시연에게 눈짓을 했다.“...”드디어 이승우가 물러났다.그들의 차가 와이너리를 벗어나자 안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또 연정훈의 표정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말을 걸려 했지만 연정훈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가슴속 열기가 점점 식어가며, 그녀는 또 “여자 친구”라는 말과 그 여자들의 조롱을 떠올렸고 옅은 서운함이 밀려왔다.그녀의 표정 변화를 연정훈은 백미러로 다 봤다.이승우와 말할 때는 괜찮더니 지금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갑자기 차 속도가 빨라졌다.안시연은 계기판을 보며 가슴이 조여왔다.“교수님...”그녀가 그를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연정훈은 계속 차선을 바꾸며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안시연은 온몸이 긴장되었고, 망설이다 결국 입을 열었다.“연정훈 씨.”“천천히 가세요.”“너무 위험해요...”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마치 그를 무척 두려워하는 것처럼.연정훈은 속도를 줄였지만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드디어 무사히 도착했다.안시연이 차에서 내릴 때 발바닥까지 차가웠다.올라가는 내내 둘 다 말이 없었다.그녀는 속으로 후회했다, 이승우와 장난치지 말았어야 했다.연정훈과 관계를 정리할 때 그가 세 가지 규칙을 정했었는데, 그는 다른 사람이 자기 물건을 만지는 걸 싫어했다.
연정훈은 욕실에서 한번만 그녀를 취했고,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오자마자 그는 서재로 갔다.안시연은 허리와 다리가 아파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을 때야 자신의 두 눈이 토끼처럼 빨개진 걸 발견했다.샤워기 물소리가 커서 나중엔 그녀가 소리 내어 울었고, 연정훈은 그녀의 입을 막으며 더욱 거칠게 그녀를 취했다. 그녀는 눈물을 머금은 채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한 지붕 아래서 이런 냉대를 견딜 수 없어 그녀는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서재에서 연정훈은 책상 뒤에 앉아 무표정하게 화면의 문서를 보고 있었다.안시연이 문을 열 때 그의 손가락 사이엔 담배가 끼워져 있었다.방 안 가득한 담배 연기에 안시연은 기침을 두어 번 하고 환기를 시켰다.그녀는 차를 내려놓고 남자를 한번 보았다. “숙취에 좋은 차를 좀 끓여왔어요.”연정훈은 그녀를 보지 않고 일어나 프린터로 갔다.“난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어.”그는 담담하게 한마디로 그녀의 호의를 거절했다.프린터가 작동하기 시작했고, 그 소리가 둘 사이의 침묵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안시연은 잔에서 올라오는 김을 보며 눈가도 서서히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연정훈이 책상으로 와서 만년필로 종이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뒤에서 들리는 미세한 콧소리에 그의 펜이 잠시 멈췄다.안시연은 한숨을 내쉬고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화나셨나요?”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만년필을 내려놓으며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그리고 무심하게 재를 크리스탈 재떨이에 털었다.안시연이 계속 말했다. “승우 씨가 저랑 말을 좀 더 나눈 것뿐이에요. 조금 친밀해 보였을 수도 있겠네요. 다음엔 조심하겠습니다.”그녀는 이미 충분히 낮은 자세를 취했다. 이래도 그가 만족하지 않는다면 그냥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방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그는 여전히 그녀를 상대할 생각이 없어 보였고, 담배만 피우며 문서를 보고 있었다.됐다.안시연은 이렇게 생각하며 차를 들고 나가려 했다.막 돌아서려는 순간, 연정훈이 무심한
방 안의 부드러운 조명 아래에서도 안시연의 눈에 담긴 애정과 고뇌가 선명히 보였다.그녀의 눈가는 붉었고 눈동자는 촉촉했다.연정훈의 강한 마음도 조금은 누그러질 수밖에 없었다.더군다나 그녀의 질문이 정곡을 찔렀다.그녀의 감정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지금도 누리고 있었다.“여자의 마음은 바닷속 바늘 같아서 변덕스럽지.” 그는 교묘하게 그녀의 질문을 피했다.안시연은 입꼬리를 살짝 당겼다.“교수님은 하늘의 별도 연구해 내시는데, 바닷속 바늘이 뭐 그리 어려우세요?”그녀는 고개를 들어 다소 고집스럽게 그를 바라보며, 꼭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표정을 지었다.연정훈의 가슴 속 이름 모를 화가 그녀의 눈빛에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하필 그녀가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자 그의 마음이 뜨거워졌다.그는 조금 후회했다. 아까 그녀를 괴롭히지 말았어야 했다.그런 압박적인 수법을 어린 여자애에게 쓰는 건 정말 떳떳하지 못했다.그는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 직접 그녀의 눈 아래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왜 울어?”“날 좋아하는 게 뭐 그리 부끄러운 일이야? 그렇게 겁먹을 일은 아닌데.”그의 태도가 누그러지자 안시연은 눈을 내리깔았다.“계약서에 제가 당신을 좋아해도 된다는 말은 없었잖아요?”“연정훈 씨, 이러면 제가 계약 위반인가요?”그녀의 목소리는 작고 순진한 질문이었지만, 충분히 사람 마음을 흔들었다.연정훈은 갑자기 그녀를 받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계약의 최종 해석권은 내게 있어.”안시연은 그의 셔츠를 꼭 잡았고, 그의 유혹적인 말이 그녀의 귓가에 떨어졌다.“내가 말했잖아, 넌 날 시험해 봐도 된다고.”안시연의 심장이 더 빨리 뛰었고, 그녀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교수님도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나요?”연정훈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보았다. “그건 그 사람의 능력에 달렸지.”안시연은 입술을 깨물며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보고 당신을 쫓으라는 건가요?”연정훈은 가볍게 웃었다.
책상 위에 쌓여있던 서류들은 모두 연정훈의 손에 의해 바닥으로 흩어졌다. 이번은 욕실에서와는 달랐다. 그는 너무나도 부드러웠다. 안시연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부끄러운 소리가, 아까 욕실에서보다 더 과장되게 들렸다.그들은 서재에서 한번, 그리고 연정훈은 안시연을 안아 침실로 데려갔다. 욕실에서 그는 그녀를 깨끗하게 해주겠다고 했지만, 그 말은 다른 의미로 변해버렸다. 그녀의 몸이 세면대 위로 올려지고, 손으로 거울을 짚고 있는 동안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는 순간이 찾아왔다.안시연은 거울 속에서 그녀와 연정훈의 방탕한 모습을 선명히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부끄러워 입술을 깨물고 더 이상 보지 않으려 했지만, 눈길을 돌리다가 그의 눈과 마주쳤다. 그들은 이미 여러 번 함께 했지만, 이번만큼은 그가 눈 속에 가득 담긴 욕망을 완전히 드러낸 것을 처음 보았다.그는 그녀의 턱을 돌리고, 입술을 강하게 맞댔다. “집중해,”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안시연은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들은 온 밤을 보내며 침실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아침이 되었을 때도 여전히 서로의 몸이 얽혀있었다.안시연은 그저 고백을 했을 뿐인데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연정훈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분명히 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변화는 그녀를 기쁘게 했다. 그녀 마음속의 큰 바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어쩌면, 그도 그녀를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자, 연정훈과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설레기 시작했다.아침이 되자, 그녀는 그의 셔츠를 입고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연정훈은 어느새 나타나 그녀를 뒤에서 안으며 턱을 그녀의 어깨에 올렸다. “뭘 하고 있어?”안시연은 달콤한 마음으로 속삭였다. “토마토 계란 국수, 괜찮을까요?”연정훈은 도마 위에 잘려진 토마토를 보았다. “좋아,” 그는 말하며, 한 조각의 토마토를 집어 그녀 입에 넣어주었다.안시연은 입을 벌려 받아먹으며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그
“정말로 안 받을 거야?” 안시연이 고개를 저었다. 연정훈은 더 말하지 않고 그녀를 안고 일어섰다. “그래, 그게 좋겠어. 나도 순간적인 충동이었으니까.” “사실 이 카드는 그 누구에게도 준 적 없어.” 그가 그렇게 말하며 카드를 주머니에 넣으려 했다. 앞의 두 마디는 그냥 넘길 수 있었지만, 마지막 말은 정말로 큰 유혹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준 적이 없다는 것... 이건 유일무이한 거잖아. 안시연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카드를 막으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후회스러운 마음에 그를 바라보자, 연정훈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 그거 받을래요.” 연정훈은 못 들은 척하며 그녀를 안고, 한 손으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안시연은 조바심이 났다. 급히 그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그는 여전히 무시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두 번이나 키스를 하자, 그는 마침내 동작을 멈추고 얼굴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살짝 내렸다. 안시연은 그의 눈을 바라보며, 손을 그의 바지 주머니에 넣어 블랙 카드를 꺼냈다. 연정훈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그녀의 얼굴을 살짝 꼬집었다. 안시연은 수줍게 웃으며 그를 안고, 그의 품에 기대 카드를 바라보았다. “난 함부로 쓰지 않을 거예요.” 연정훈은 말했다. “그럴 거면 왜 줬겠어? 마음껏 써. 최대한 잘 활용해서 너 자신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안시연은 그의 의도를 이해했지만, 지금의 능력으로는 이 카드를 들고 할 수 있는 일이 쇼핑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어젯밤 연정훈이 양민아와 진지하게 대화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캠퍼스 카드를 보며, 남대 도서관의 모든 책을 머릿속에 넣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마음속엔 여러 가지 생각이 얽혀 있었지만, 동시에 기쁨도 가득했다. 아침 식사를 하는 동안, 안시연은 연정훈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연정훈도 그녀를 혼자 회사에
안시연은 정각에 사무실에 도착했고, 오전 내내 기분이 좋았다. 점심시간에 연정훈은 그녀를 찾지 않았고, 그녀는 회사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점심 휴식 시간에 갑자기 구혜은에게서 전화가 왔다. 근처 카페에서 만나자고 했다.안시연은 거절하며 용건이 뭔지 직접 물었다.구혜은도 둘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어 솔직히 말했다.“장 교수님의 순회 전시회에 함께 참여해 줬으면 해.”안시연은 놀랐다.장 교수의 순회 전시는 대형 프로젝트였고, 현재 경인시 업계에서 모두 주목하고 있었다. 구혜은이 주요 책임자 중 한 명이 될 수 있다면 꼭 붙잡아야 할 기회인데, 오히려 그녀에게 와서 나눠 달라고 하다니.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선배,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그냥 말씀해 주세요.”구혜은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순회 전시의 주요 장소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어.”안시연은 이해했다.“제가 장소 찾는 걸 도와드리길 바라시는 거군요.”구혜은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연 대표님의 능력이라면 장소 하나 찾는 게 어렵지 않겠지?”안시연은 천문학에 관심이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주목받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더군다나 연정훈의 자원을 빌려 이런 쓸데없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죄송해요, 저는 순회 전시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선배님을 도와드리기 어려울 것 같아요.”구혜은이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안시연이 먼저 말을 잘랐다. “점심시간이라 이만 끊을게요.”그리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이대로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잠시 후 구혜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주요 전시의 주제는 연정훈이 남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해에 처음 열었던 연구 주제야.”“그는 당시에도 순회 전시를 하고 싶어 했지만, 시간이 없어서 못 했지.”“난 그의 모든 원고를 가지고 있어.”안시연은 메시지를 보며 마음이 흔들렸다.구혜은은 정말 그녀의 약점을 정확히 찔렀다. 이어서 말했다. “그가 하고 싶었지만 못한 일을, 네가 대신 완성해 주고 싶지 않나?”안시연은 침묵했다.그녀는 연
안시연은 15분 정도 앉아 있었고, 곧 모두가 흩어졌다.연정훈이 그녀 뒤에서 다가와 의자 팔걸이에 손을 올리고 테이블 위 음식을 살펴보았다.“한 입도 안 먹었어?”안시연이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며 소금물에 담긴 대하를 가리켰다. “다 벗겨 놨어요.”연정훈이 웃음을 터뜨렸다.“왜 이렇게 착해?”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다.안시연이 눈을 굴리며 말했다. “선생님들은 다 착한 학생을 좋아하시잖아요?”연정훈이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의 입술에 살짝 키스했다.“음, 착한 학생에겐 상이 있지.”안시연이 얼굴을 붉히며 그의 소매를 당겼다. 그에게 앉으라는 신호였다.연정훈은 그녀 맞은편에 앉았다.그들은 한 명은 밥을, 한 명은 국을 떠주며 조화롭게 움직였다.“오늘 뭘 했어?” 연정훈이 물었다.안시연은 착한 아이처럼 일과를 자세히 설명했지만, 점심시간에 대해서는 숨기는 게 있었다.연정훈이 그녀의 그릇에 고기를 하나 올려주며 말했다. “그래, 그럼 점심에는 무슨 나쁜 짓을 했길래 말 못 하는 거야?”안시연은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약간 당황스러웠다.“교수님.” 연정훈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안시연이 턱을 괴며 물었다. “대학에서 심리학을 부전공하셨어요?”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점으로 끝냈지.”안시연은 그저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진실이었다니.그가 항상 그녜를 한눈에 꿰뚫어 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그녀는 한숨을 쉬며 구혜은이 찾아온 일을 말했다.“내가 했던 연구 주제로 전시를 하고 싶대?” 연정훈이 정곡을 찔렀다.안시연은 조금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이고 밥을 뒤적거렸다. “제가 아는 게 별로 없어서 잘 못할 것 같아요.”“네가 혼자 하기에는 확실히 무리지.”안시연의 어깨가 축 처졌다.“하지만,” 연정훈이 말을 돌렸다. “연구 주제의 원작자가 바로 네 앞에 앉아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안시연이 잠시 멍해졌다.그의 말뜻을 깨닫고 기쁘게 고개를 들었다.“저와 함께 하시겠다고요?”“너와
“오늘 밤에는 일이 좀 있어서 강남 시티로 돌아가야 해.”연정훈이 말했다.안시연도 순순히 알겠다고 했다.그들은 회사에서 9시가 넘도록 머물다가 강남 시티로 내려갔다.엘리베이터에서 나와 잠깐 걷는 동안 연정훈은 안시연의 손을 잡았고 그것 때문에 안시연은 몰래 기뻐했다.강남 시티로 돌아와서 연정훈이 위층으로 올라가 일을 보고 있을 때, 그녀는 옆에 앉아서 그의 원고를 빤히 쳐다보았다.안시연은 원래 그날 밤 구혜은에게 연락을 하려 했다.“서두르지 마. 지금 급한 건 네가 아니라 그쪽일 거야.”이렇게 말하는 연정훈의 말을 듣고 그녀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사람의 마음을 알아보는 것에 있어서 안시연은 배운 적이 있었다.추석 무렵이라 정원에는 추석을 맞이하는 장식품들이 가득 걸려 있었다.안시연은 좀 심심했는지 창가에 엎드려 밖을 내다보았다.연정훈이 일을 끝냈을 때,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정원의 디자인을 훑어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연성훈은 문득 그녀와 엮이기 시작하고 나서 침대에서만 제대로 된 대화를 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안시연을 데리고 나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게 어렴풋이 떠 올랐다.“야식 먹고 밖으로 나가볼까?”연정훈이 먼저 이렇게 제안했다.안시연은 의외이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쉬지 않아도 돼요?”“어제도 이렇게 일찍 쉬진 않았잖아.”안시연의 얼굴이 빨개졌다.어제 이맘때쯤이면 그들이 몸을 섞고 있을 때였다.그녀는 입술을 오므리더니 입을 열었다.“그럼 전 내려가서 아주머니더러 만두를 삶아달라고 할게요.”말을 마친 안시연은 토끼처럼 활기차게 뛰어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런 그녀를 보는 연정훈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그들이 함께 야식을 먹고 아파트에서 나왔다. 바람이 살살 부는 게 산책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길을 걷다 보면 신기한 식물들이 많을 뿐, 놀거리는 딱히 없었다. 강남 시티 외곽에서 멀지 않은 곳까지 걸어간 그들은 복권 자판기를 발견했다.“한 장 살까요?”안시연이 묻는다.연정훈이 휴대전
까드득.반우희는 쿠키를 입안 가득 넣으며 창가에서 아래층을 살피고 있었다.그런데 오가는 차 한 대 없자 반우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오늘에는 운 좋은 줄 알아. 부승원!’그리고 발을 쿵쿵 구르며 테이블에 모아둔 간식 쓰레기를 정리했다.그런데 그때, 도어락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뭐야!’반우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방금까지 기세등등한 모습은 사라진 채로 황급히 간식 쓰레기를 감췄다.그리고 문이 벌컥 열렸다.반우희는 입안 가득 쿠키를 문 채로 빠르게 문 앞으로 달려가 온몸으로 간식을 가렸다.부승원은 집 안에 반우희가 있을 거라고 먼저 예상하고 있었기에 첫 만남에 어떤 말을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그런데 입안 가득 우물거리는 반우희를 보며 걱정하던 마음이 눈 녹듯 녹아내렸다.‘다행이야. 간식을 먹고 있는 거면 그렇게 화가 난 게 아닐지도 몰라.’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고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이어 등 뒤로 또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선배님.”반우희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그 목소리의 주인을 살폈고 부승원은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두 눈을 감은 채로 등 돌려 루나에게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아래층에서 기다리라고!”루나는 머리를 정리하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아래층은 춥잖아요.”“차 안에 히터 틀어져 있어.”“말도 마요. 시트 냄새 때문에 멀미 나요.”그리고 루나는 제 멋대로 집 안으로 들어오더니 반우희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 듯 말했다.“어머 어린 친구가 집에 있었네요?”루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반우희가 누구인지 떠올리는 시늉을 했다.“아, 맞다.”“우리 회사 우희 씨 맞죠?”반우희는 서서히 표정을 굳히고 루나를 바라봤다.‘그래서 뭐! 나 반우희인데 어쩔래!’부승원을 향해 고개를 돌린 루나가 또 이런 말을 했다.“회사에서 도우미도 찾아준 거예요?”부승원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알바일 뿐이야.”“아, 도우미 알바?”“...”부승원은 반우희 머리 위로 검은색 구름이 떠 있는 게 보
‘나쁜 놈!’‘공공장소에서 스킨십이라니!’‘며칠 전엔 나랑 키스하고 오늘엔 다른 여자랑 스킨십을 해?’엘리베이터에 오른 반우희는 커피를 쥐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고 얼굴이 시뻘게지고 있었다.“난 두 사람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선남선녀인데 두 사람 능력도 좋잖아요.”‘어울리긴 개뿔!’반우희는 억울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싶었다.‘그게 뭐가 중요해? 부승원이 나한테 키스를 했지 저 사람한테 한 것도 아니잖아.’‘부승원 개자식. 날 유혹하고 키스할 때는 언제고, 다른 사람이랑 엮기다니.’‘에라이 퉤.’“우희 씨?”같이 있던 직원이 점점 굳어가는 반우희를 보며 깜짝 놀라 물었다.“왜 그래요?”“아무것도 아니에요.”반우희는 입을 삐죽이며 서러움을 감추려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괜찮아. 괜찮아.’‘어차피 내 것 아니었고 줘도 안 가져.’띵.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반우희는 불만을 담아 쿵쿵거리며 밖을 걸었다.다른 한편 아래층.부승원은 세게 힘을 주어 루나를 내쳤고 루나는 쓰레기통 옆으로 내팽개쳐졌다. 하지만 부승원은 마음이 다른 곳으로 팔려 루나는 안중에도 없었다.비서는 좌수석에 앉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고 마른기침하며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려 했다.그때.핸드폰이 진동했고 비서는 반우희가 보내온 메시지를 받았다.[비서 언니, 저 그 알바 그만두지 않을래요! 오늘도 청소하러 갈게요!]비서는 눈을 반짝였다.[정말요?]반우희는 미소를 짓고 있는 이모티콘을 보내며 물었다.[그동안 알바비는 언제 주시는 거예요?]그 내용에 비서는 웃음이 나갔다.이런 상황에서도 돈만 걱정하는 모습이 딱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오늘 업무 끝나는 대로 보내 드릴게요!][좋아요!!!]연속 세 개의 느낌표는 반우희의 벅찬 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비서는 문자를 보내고 서둘러 고개를 돌려 부승원을 바라봤다. 그런데 부승원은 잔뜩 얼굴을 굳히고 있었고 루나는 덤덤하게 메이크업 수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슬쩍 부승원을 떠보았다.“부 대표님,
‘쳇. 대시하면 하는 거지 뭐.’‘정말 연애하면 여자만 고생하는 거야. 흥.’‘하루 종일 잔소리만 하고 문제 틀렸다고 얼굴에 엑스나 그을 사람이라고!’‘다투면 무시하고 냉전이나 할거고 키스하고도 아닌 척 모르는 체할 거야.’반우희는 꾸역꾸역 파이를 입에 넣고 방금 들은 정보를 소화했다.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계속 기분이 더러웠다.그래서 아마도 간식을 너무 많이 먹어 속이 부대끼는 거라 여겼다.‘그래. 틀림없이 그런 거야.’반우희가 자기 암시를 하고 있을 때 사무실 안의 부승원은 루나를 향해 경고를 날리고 있었다.그리고 풍성한 꽃다발을 척 가리키며 말했다.“루나 씨, 이번 일은 교수님 얼굴을 봐서 한번 넘어가 주는 거야. 그런데 또 한 번 이렇게 멍청한 일을 한다면...”“절대 없을 겁니다!”루나는 맹세했다.“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그러자 부승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만 나가봐.”“넵!”루나는 배시시 웃으며 고분고분 방을 나섰다.그리고 루나가 밖으로 나서자 모든 사람들이 시선을 집중했다.루나는 더 활짝 웃으며 핸드폰을 꺼내 들고 연기를 시작했다.“네. 저녁 10시 창가 자리로 예약해 주세요.”그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벌써 두 사람이 데이트한다는 소문이 무성하게 퍼졌다.그리고 두 시간도 되지 않아 회사 내에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사실 예전의 부승원이었다면 절대 부연의 설명을 붙이지 않고 시간이 지나 잠잠해질 때까지 내버려뒀을 것이다.하지만 오늘따라 짜증이 치솟고 자꾸 반우희가 마음에 걸렸다.반우희는 늘 가십거리에 예민했고 이런 일을 가장 먼저 전해 들었다.반우희와 키스를 한 사건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는데 회사 직원과 스캔들이 터진다면 반우희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눈에 뻔했다.‘아니지. 내가 왜 반우희 걱정을 해?’부승원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요즘 들어 반우희에게 너무 많은 관심을 쏟고 있었다.똑똑똑.노크 소리
다시 사무실.양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떼를 썼다.“아 더는 못 먹겠어요.”사실 양시연은 몇 입 삼키지도 않고 못 먹겠다고 했고 연정훈은 인내심을 가지고 입가에 숟가락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말 들어. 몇 입만 더 먹자.”‘그래...’양시연은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려 음식을 삼켰다.그런데 연정훈이 또 계란찜을 떠서 건네자 양시연은 연정훈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이제 정말 못 먹어요. 턱 끝까지 음식으로 찬 것 같아요.”연정훈은 더 이상 양시연을 재촉하지 않고 수저를 내려놓았다.그때 마침 지인이 찾아와 연정훈에게 인사를 걸었다.그 사람은 바로 루나, 부승원이 뽑아온 젊은 여성 직원이자 연정훈과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었다.“어머 선배님이 이렇게 다정하신 분이셨어요? 직접 사모님 식사 챙기러 오신 거예요?”연정훈은 하나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간단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루나는 연정훈에게 짧은 인사를 하려고 찾아왔으나 연정훈이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계속 승원이랑 연락하고 지냈던 거야?”“네. 전공 선배이잖아요.”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양시연을 바라보았다.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는 연정훈을 보며 양시연은 연정훈이 또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눈치챘다.그리고 연정훈은 양시연의 손을 놓더니 사무실을 나서며 루나에게 말했다.“마침, 부탁할 일이 있는데 지금 좀 들어줄 수 있을까?”“선배님, 말씀만 하세요. 뭐든지 들어드릴게요.”연정훈은 내색하지 않고 커피를 들고 창가 자리로 걸어갔다.그리고 루나는 연정훈을 따라나섰다.양시연의 사무실은 과거 연정훈이 지냈던 공간이었고 너무 큰 공간 탓에 연정훈과 루나가 어떤 대화를 하고 있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하지만 양시연은 굳이 두 사람을 따라가지 않았고 침착하게 기다렸다.그때, 연정훈의 말을 들은 루나는 갑자기 흥분에 겨워 눈을 반짝이더니 곧 마른기침하더니 금색 머릿결을 뒤로 넘기며 말했다.“이건 좀 너무하지 않을까요?”연정훈이 말했다.“네가 수고 좀 해줘. 정말 성사되면
“내가 돈만 많았어도 회사 때려 치고 더 좋은 사장 아래에서 일했을 거예요.”반우희가 양시연에게 했던 말을, 양시연은 바로 냉큼 부승원에게 고자질을 했다.부승원은 그 옆자리에 앉아 무언가를 끄적이다가 하던 일을 멈췄다.양시연은 예민하게 그 변화를 캐치했다.“부 대표님, 소감이 어떠신가요?”그리고 농담 섞인 목소리로 부승원을 취재하듯 물었다.부승원은 슬쩍 양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본인이 할 일이나 완성하시죠.”양시연은 말문이 막혔다.‘대체 누가 진짜 회사 대표인 거야!’사실 부승원이야말로 정말 답답한 노릇이었다.이튿날 잠에서 깬 부승원은 완전히 정신을 차리고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반우희에게 키스했던 기억이 아주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리고 그날 아침, 부승원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출근하고 싶지 않은 기분에 휩싸였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써도 연차를 쓸 핑계가 떠오르지 않아 일단 해야 할 일이나 하자는 마음으로 회사를 나갔다.그러나 회사에서 반우희를 마주치는 순간 부승원은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반우희는 아예 부승원을 모르는 사람 취급하더니 시선 한번 돌리지 않고 몰래 빠져나갔다.예전에는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를 애용하던 반우희였지만 부승원이 안에 탄 걸 확인하고 얌전히 사람으로 꽉 찬 직원 전용 엘리베이터를 비집고 올랐다.이렇게 선을 긋는 반우희를 보며 무언가 변명이라도 하려던 결심은 눈 녹듯 사라져 갔다.결심이라고 말하는 것도 참 웃긴 상황이었다.어쩌다가 반우희와 대화하는 일에 결심까지 해야 하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그리고 냉전이 시작된 것도 참 이상했다. 첫 만남에 대화를 망설이자 그 뒤의 만남은 더 어색해졌고 입을 열기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반우희가 자신을 피한 첫날엔 그냥 체면을 구겼다고만 생각했다.그러나 두 번, 세 번... 반우희가 자신을 피하는 차수가 많아질수록 점점 스트레스로 다가오고 부담이 생겼다. 부승원은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이 본인에게 있고 자신이 저지른 행동
부승원이 이상하다.이건 며칠 동안 모든 회사 직원이 내린 결론이었다.“그제부터 자꾸 사소한 실수를 하셨어.”“맞아. 자꾸 정신이 다른 곳에 팔린 것 같기도 하고.”“아까는 내가 눈앞에 서 있는데 날 다미 씨라고 부른 거 있지? 난 강아영인데.”양시연은 따뜻한 우유 한잔을 들고 회의실을 지나치다가 그 대화를 듣고 생각에 잠겼다.양시연도 요즘 들어 부승원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상한 사람은 또 한 명 있었는데...그게 바로 반우희였다!반우희는 늘 간식 시간이 되면 시간 맞춰 양시연의 주변을 맴돌며 간식을 먹는 낙으로 살았었다.그런데 이 며칠 동안 한 번도 나타나지 않더니 먼저 말을 걸어도 속이 불편해 간식을 끊었다며 거절했었다.‘참 이상하단 말이지!’반우희는 부승원 쪽에서 무슨 일인지 알아내 보려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그래서 부승원의 비서부터 손을 쓰기로 했다비서는 이상한 점을 가장 먼저 눈치챈 사람이었으나 털어놓은 사람이 없어 답답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양시연에게 낮은 소리로 속닥였다.“백 퍼센트 두 사람이 싸운 거예요. 그것도 엄청 크게 다툰 거죠.”“정말요?”양시연이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두 사람이 어떻게 다퉈요?”사실상 부승원이 늘 우세를 가지고 반우희에게 폭풍 잔소리를 하는 게 일상이었다.비서는 살짝 웃음을 터뜨리더니 양시연을 향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그러니까 흥미로운 거죠. 우리 변호사님 일상에 변화를 일으킨 일이면 아주 큰 일 아니겠어요?”그리고 비서는 주변을 살피며 한마디를 더 보탰다.“어쩌면 아주 민망한 일인지도 몰라요. 변호사님이 실수한 거라 그렇게 당당하지 못한 것 같기도 하고요.”그 말에 양시연은 점점 호기심이 깊어져 갔다.오후 시간, 사람이 드물 때를 틈타 양시연은 길 가던 반우희를 잡아 사무실로 끌었다.“어어! 이러시면 안 돼요!”반우희는 한시도 쉬지 않고 쫑알거리며 기회를 보아 도망가려 했으나 양시연이 임신한 걸 생각해 결국 얌전히 끌려갔다.“시연 언니 왜 그래요?”양시
부승원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지만 어떻게 입을 열지 난감했다.그래서 말없이 조용해진 반우희를 자꾸 힐끔거렸다.‘오늘 밤 일에 대해 반우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그러다가 자신의 이미지가 완전히 붕괴되었다고 생각되었고 인상을 찌푸린 채로 크게 심호흡했다.다른 한편 쪼그리고 앉아 있는 반우희는 사실... 부승원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감히 부승원을 바라볼 자신이 없는 거였다.‘젠장! 어떡해! 무슨 말이라도 좀 해봐. 너무 어색해 죽을 것 같아.’반우희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목도리를 다시 두르며 부승원을 애써 외면했다.저도 모르게 입술을 오므릴 때면 방금 부승원과 키스했던 게 떠올라 부승원이 오해라도 할까 빠르게 표정을 풀었다.‘엉엉... 어떡해.’반우희는 순결을 빼앗긴 것 같아 입술을 버리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예전부터 흔들리고 있었던 마음이 부승원의 한방에 아예 무너지고 있었다.회사 다니는 건 그렇다고 쳐도 집 청소 알바는 이제 그만둬야 할 것 같았다. 다시 마주치면 그냥 혀 깨물고 죽는 게 나을 것이다.‘내가 부자 되는 꼴을 못 봐요.’부승원은 반우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오로지 붕괴된 이미지를 되찾으려는 계획만 세우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지금 자신이 얼마나 반우희를 신경 쓰고 있는지를 미처 자각하지 못했다.하지만 부승원은 자신이 반우희의 눈에 변태로 보이는 건 피하고 싶었다.두 사람이 동상이몽을 하는 동안 밖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유리문을 통해 보니 부승원의 차가 도착한 게 보였다.그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황급히 온몸으로 문을 밀며 밖으로 나가려 했다.문은 무거운 편이라 반우희는 힘에 부쳤지만, 부승원이 바로 그 뒤에 서서 손으로 힘을 실어주었고 문이 손쉽게 열렸다.반우희는 눈을 깜빡이다가 빠르게 틈을 타 밖으로 나섰다.그리고 부승원도 그 뒤를 따르려는데 반우희가 휙 몸을 돌리며 말했다.“변호사님은 나오지 마세요!”반우희는 뒷걸음질하며 말했다.“빨리 위층으로 올라가세요. 안
반우희는 어려운 고민 끝에 위층으로 올라가 핸드폰을 가져오기로 했다.‘가방만 챙기고 튀는 거야.’‘부승원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야!’‘어쨌든 부승원이 먼저 시작한 거니까 나한테 책임은 없어.’‘그래. 그게 맞아!’반우희는 주먹을 꽉 쥐고 자신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그런데 엘리베이터는 바로 1층에 멈춰 섰다.‘응?’‘이런 우연이?’띵.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먼저 타 있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반우희는 그 사람이 부승원 일 거라는 예상은 전혀 하지 못했고 귀신이라도 마주친 것처럼 바로 몸을 돌려 도망가려 했다.이번엔 부승원이 한발 빠르게 반우희 패딩 모자를 확 잡아 엘리베이터 안으로 끌었다.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문이 닫히고 반우희는 또다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두 사람은 다른 버튼을 누르지 않았고 엘리베이터는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부승원은 무의식적으로 반우희를 잡았으나 또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했다.반우희는 부승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아등바등했다.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없자 얌전히 그 자리를 지켰다.그때, 머리 위로 중저음 목소리가 들려오고 그 목소리에서 알코올 향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핸드폰도 없이 어떻게 집으로 가려고?”반우희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그걸 아는 사람이 물어?’“일단 이거부터 놓고 말해요...”반우희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부승원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모자에서 손을 놓았다. 자신이 모자를 움켜쥔 흔적이 남자 대신 정리도 해주었다.반우희는 모자가 불편하게 느껴져 손을 뻗어 정리하려 했다.그러다가 부승원의 손과 닿게 되었다.그 순간 전기가 통하듯 찌르르했고 황급히 손을 내렸다.“...”엘리베이터 안의 분위기는 너무 이상했고 부승원은 다시 술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아 머리가 어지러웠다.그래서 모자를 정리해 주고 엘리베이터 문을 열었다.문이 열리자마자 반우희는 밖으로 쏙 나가버렸다.그 뒤의 남자도 따라 밖으로 나왔다.반
부승원은 술을 마셨지만 정신은 멀쩡했고 현재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다. 다만 알코올의 힘을 빌려 내일은 잠시 잊기로 했다.부승원은 키스 한 번으로 부족했고 머릿속엔 오래전 그날 밤이 떠올랐다.그날엔 키스뿐만 아니라 더 많은 일을 했었다.반우희와의 키스는 달콤했고 점점 더 욕심이 났다. 그래서 반우희의 손목을 잡고 품 안으로 더 넣었다.그러다가 반우희의 숨소리가 가빠지자 부승원은 다정하게 잠시 숨을 고를 시간을 주었다. 그리고 또 참지 못하고 얼굴을 맞대다가 반우희의 귓불에 키스했다.반우희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먼 곳의 크리스탈 조명을 바라보다가 점점 이성이 돌아오는 걸 느꼈다.그래서 부승원이 방심한 사이 손을 뻗어 단숨에 부승원을 밀어냈다.아무런 예상도 하지 못했던 부승원은 자칫하다가 소파에서 떨어질 뻔했다.그러나 부승원은 다행히 자세를 바로잡아 떨어지는 불상사를 피했고 반우희의 얼굴을 마주하기도 전에 다시 소파 등받이로 밀려났다.등 뒤로 푹신한 소파 쿠션이 느껴졌고 안 그래도 어지럽던 머릿속이 확 밀려 뒤죽박죽이 되어갔다.반우희는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잠시 시선을 마주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그러나 고민하다가 빠르게 몸을 돌려 도망을 갔다.부승원은 소파에 멍하니 앉은 채로 머리를 재부팅했다.그때, 반우희는 빠르게 집 밖으로 나갔고 한시도 지체하지 않은 채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이어 1층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 안의 자신을 확인하며 이마의 온도를 체크했다. 사실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지금 자신의 얼굴이 얼마나 빨갛게 되었을지는 예상이 되었다.반우희는 자기 입술을 매만지며 아직 남은 온기를 느꼈다.그러자 얼굴이 점점 더 뜨거워지고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띵.아래층에 도착하고 반우희는 멍하니 밖을 걸었다. 그리고 오피스텔 밖으로 나서는 찰나 찬 바람이 불어오자 지하철을 타려면 핸드폰이 필요하다는 게 떠올랐다!‘핸드폰을 어디에 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