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훈은 욕실에서 한번만 그녀를 취했고,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오자마자 그는 서재로 갔다.안시연은 허리와 다리가 아파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을 때야 자신의 두 눈이 토끼처럼 빨개진 걸 발견했다.샤워기 물소리가 커서 나중엔 그녀가 소리 내어 울었고, 연정훈은 그녀의 입을 막으며 더욱 거칠게 그녀를 취했다. 그녀는 눈물을 머금은 채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한 지붕 아래서 이런 냉대를 견딜 수 없어 그녀는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서재에서 연정훈은 책상 뒤에 앉아 무표정하게 화면의 문서를 보고 있었다.안시연이 문을 열 때 그의 손가락 사이엔 담배가 끼워져 있었다.방 안 가득한 담배 연기에 안시연은 기침을 두어 번 하고 환기를 시켰다.그녀는 차를 내려놓고 남자를 한번 보았다. “숙취에 좋은 차를 좀 끓여왔어요.”연정훈은 그녀를 보지 않고 일어나 프린터로 갔다.“난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어.”그는 담담하게 한마디로 그녀의 호의를 거절했다.프린터가 작동하기 시작했고, 그 소리가 둘 사이의 침묵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안시연은 잔에서 올라오는 김을 보며 눈가도 서서히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연정훈이 책상으로 와서 만년필로 종이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뒤에서 들리는 미세한 콧소리에 그의 펜이 잠시 멈췄다.안시연은 한숨을 내쉬고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화나셨나요?”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만년필을 내려놓으며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그리고 무심하게 재를 크리스탈 재떨이에 털었다.안시연이 계속 말했다. “승우 씨가 저랑 말을 좀 더 나눈 것뿐이에요. 조금 친밀해 보였을 수도 있겠네요. 다음엔 조심하겠습니다.”그녀는 이미 충분히 낮은 자세를 취했다. 이래도 그가 만족하지 않는다면 그냥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방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그는 여전히 그녀를 상대할 생각이 없어 보였고, 담배만 피우며 문서를 보고 있었다.됐다.안시연은 이렇게 생각하며 차를 들고 나가려 했다.막 돌아서려는 순간, 연정훈이 무심한
방 안의 부드러운 조명 아래에서도 안시연의 눈에 담긴 애정과 고뇌가 선명히 보였다.그녀의 눈가는 붉었고 눈동자는 촉촉했다.연정훈의 강한 마음도 조금은 누그러질 수밖에 없었다.더군다나 그녀의 질문이 정곡을 찔렀다.그녀의 감정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지금도 누리고 있었다.“여자의 마음은 바닷속 바늘 같아서 변덕스럽지.” 그는 교묘하게 그녀의 질문을 피했다.안시연은 입꼬리를 살짝 당겼다.“교수님은 하늘의 별도 연구해 내시는데, 바닷속 바늘이 뭐 그리 어려우세요?”그녀는 고개를 들어 다소 고집스럽게 그를 바라보며, 꼭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표정을 지었다.연정훈의 가슴 속 이름 모를 화가 그녀의 눈빛에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하필 그녀가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자 그의 마음이 뜨거워졌다.그는 조금 후회했다. 아까 그녀를 괴롭히지 말았어야 했다.그런 압박적인 수법을 어린 여자애에게 쓰는 건 정말 떳떳하지 못했다.그는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 직접 그녀의 눈 아래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왜 울어?”“날 좋아하는 게 뭐 그리 부끄러운 일이야? 그렇게 겁먹을 일은 아닌데.”그의 태도가 누그러지자 안시연은 눈을 내리깔았다.“계약서에 제가 당신을 좋아해도 된다는 말은 없었잖아요?”“연정훈 씨, 이러면 제가 계약 위반인가요?”그녀의 목소리는 작고 순진한 질문이었지만, 충분히 사람 마음을 흔들었다.연정훈은 갑자기 그녀를 받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계약의 최종 해석권은 내게 있어.”안시연은 그의 셔츠를 꼭 잡았고, 그의 유혹적인 말이 그녀의 귓가에 떨어졌다.“내가 말했잖아, 넌 날 시험해 봐도 된다고.”안시연의 심장이 더 빨리 뛰었고, 그녀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교수님도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나요?”연정훈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보았다. “그건 그 사람의 능력에 달렸지.”안시연은 입술을 깨물며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보고 당신을 쫓으라는 건가요?”연정훈은 가볍게 웃었다.
책상 위에 쌓여있던 서류들은 모두 연정훈의 손에 의해 바닥으로 흩어졌다. 이번은 욕실에서와는 달랐다. 그는 너무나도 부드러웠다. 안시연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부끄러운 소리가, 아까 욕실에서보다 더 과장되게 들렸다.그들은 서재에서 한번, 그리고 연정훈은 안시연을 안아 침실로 데려갔다. 욕실에서 그는 그녀를 깨끗하게 해주겠다고 했지만, 그 말은 다른 의미로 변해버렸다. 그녀의 몸이 세면대 위로 올려지고, 손으로 거울을 짚고 있는 동안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는 순간이 찾아왔다.안시연은 거울 속에서 그녀와 연정훈의 방탕한 모습을 선명히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부끄러워 입술을 깨물고 더 이상 보지 않으려 했지만, 눈길을 돌리다가 그의 눈과 마주쳤다. 그들은 이미 여러 번 함께 했지만, 이번만큼은 그가 눈 속에 가득 담긴 욕망을 완전히 드러낸 것을 처음 보았다.그는 그녀의 턱을 돌리고, 입술을 강하게 맞댔다. “집중해,”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안시연은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들은 온 밤을 보내며 침실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아침이 되었을 때도 여전히 서로의 몸이 얽혀있었다.안시연은 그저 고백을 했을 뿐인데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연정훈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분명히 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변화는 그녀를 기쁘게 했다. 그녀 마음속의 큰 바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어쩌면, 그도 그녀를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자, 연정훈과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설레기 시작했다.아침이 되자, 그녀는 그의 셔츠를 입고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연정훈은 어느새 나타나 그녀를 뒤에서 안으며 턱을 그녀의 어깨에 올렸다. “뭘 하고 있어?”안시연은 달콤한 마음으로 속삭였다. “토마토 계란 국수, 괜찮을까요?”연정훈은 도마 위에 잘려진 토마토를 보았다. “좋아,” 그는 말하며, 한 조각의 토마토를 집어 그녀 입에 넣어주었다.안시연은 입을 벌려 받아먹으며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그
“정말로 안 받을 거야?” 안시연이 고개를 저었다. 연정훈은 더 말하지 않고 그녀를 안고 일어섰다. “그래, 그게 좋겠어. 나도 순간적인 충동이었으니까.” “사실 이 카드는 그 누구에게도 준 적 없어.” 그가 그렇게 말하며 카드를 주머니에 넣으려 했다. 앞의 두 마디는 그냥 넘길 수 있었지만, 마지막 말은 정말로 큰 유혹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준 적이 없다는 것... 이건 유일무이한 거잖아. 안시연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카드를 막으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후회스러운 마음에 그를 바라보자, 연정훈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 그거 받을래요.” 연정훈은 못 들은 척하며 그녀를 안고, 한 손으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안시연은 조바심이 났다. 급히 그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그는 여전히 무시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두 번이나 키스를 하자, 그는 마침내 동작을 멈추고 얼굴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살짝 내렸다. 안시연은 그의 눈을 바라보며, 손을 그의 바지 주머니에 넣어 블랙 카드를 꺼냈다. 연정훈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그녀의 얼굴을 살짝 꼬집었다. 안시연은 수줍게 웃으며 그를 안고, 그의 품에 기대 카드를 바라보았다. “난 함부로 쓰지 않을 거예요.” 연정훈은 말했다. “그럴 거면 왜 줬겠어? 마음껏 써. 최대한 잘 활용해서 너 자신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안시연은 그의 의도를 이해했지만, 지금의 능력으로는 이 카드를 들고 할 수 있는 일이 쇼핑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어젯밤 연정훈이 양민아와 진지하게 대화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캠퍼스 카드를 보며, 남대 도서관의 모든 책을 머릿속에 넣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마음속엔 여러 가지 생각이 얽혀 있었지만, 동시에 기쁨도 가득했다. 아침 식사를 하는 동안, 안시연은 연정훈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연정훈도 그녀를 혼자 회사에
안시연은 정각에 사무실에 도착했고, 오전 내내 기분이 좋았다. 점심시간에 연정훈은 그녀를 찾지 않았고, 그녀는 회사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점심 휴식 시간에 갑자기 구혜은에게서 전화가 왔다. 근처 카페에서 만나자고 했다.안시연은 거절하며 용건이 뭔지 직접 물었다.구혜은도 둘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어 솔직히 말했다.“장 교수님의 순회 전시회에 함께 참여해 줬으면 해.”안시연은 놀랐다.장 교수의 순회 전시는 대형 프로젝트였고, 현재 경인시 업계에서 모두 주목하고 있었다. 구혜은이 주요 책임자 중 한 명이 될 수 있다면 꼭 붙잡아야 할 기회인데, 오히려 그녀에게 와서 나눠 달라고 하다니.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선배,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그냥 말씀해 주세요.”구혜은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순회 전시의 주요 장소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어.”안시연은 이해했다.“제가 장소 찾는 걸 도와드리길 바라시는 거군요.”구혜은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연 대표님의 능력이라면 장소 하나 찾는 게 어렵지 않겠지?”안시연은 천문학에 관심이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주목받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더군다나 연정훈의 자원을 빌려 이런 쓸데없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죄송해요, 저는 순회 전시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선배님을 도와드리기 어려울 것 같아요.”구혜은이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안시연이 먼저 말을 잘랐다. “점심시간이라 이만 끊을게요.”그리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이대로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잠시 후 구혜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주요 전시의 주제는 연정훈이 남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해에 처음 열었던 연구 주제야.”“그는 당시에도 순회 전시를 하고 싶어 했지만, 시간이 없어서 못 했지.”“난 그의 모든 원고를 가지고 있어.”안시연은 메시지를 보며 마음이 흔들렸다.구혜은은 정말 그녀의 약점을 정확히 찔렀다. 이어서 말했다. “그가 하고 싶었지만 못한 일을, 네가 대신 완성해 주고 싶지 않나?”안시연은 침묵했다.그녀는 연
안시연은 15분 정도 앉아 있었고, 곧 모두가 흩어졌다.연정훈이 그녀 뒤에서 다가와 의자 팔걸이에 손을 올리고 테이블 위 음식을 살펴보았다.“한 입도 안 먹었어?”안시연이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며 소금물에 담긴 대하를 가리켰다. “다 벗겨 놨어요.”연정훈이 웃음을 터뜨렸다.“왜 이렇게 착해?”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다.안시연이 눈을 굴리며 말했다. “선생님들은 다 착한 학생을 좋아하시잖아요?”연정훈이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의 입술에 살짝 키스했다.“음, 착한 학생에겐 상이 있지.”안시연이 얼굴을 붉히며 그의 소매를 당겼다. 그에게 앉으라는 신호였다.연정훈은 그녀 맞은편에 앉았다.그들은 한 명은 밥을, 한 명은 국을 떠주며 조화롭게 움직였다.“오늘 뭘 했어?” 연정훈이 물었다.안시연은 착한 아이처럼 일과를 자세히 설명했지만, 점심시간에 대해서는 숨기는 게 있었다.연정훈이 그녀의 그릇에 고기를 하나 올려주며 말했다. “그래, 그럼 점심에는 무슨 나쁜 짓을 했길래 말 못 하는 거야?”안시연은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약간 당황스러웠다.“교수님.” 연정훈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안시연이 턱을 괴며 물었다. “대학에서 심리학을 부전공하셨어요?”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점으로 끝냈지.”안시연은 그저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진실이었다니.그가 항상 그녜를 한눈에 꿰뚫어 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그녀는 한숨을 쉬며 구혜은이 찾아온 일을 말했다.“내가 했던 연구 주제로 전시를 하고 싶대?” 연정훈이 정곡을 찔렀다.안시연은 조금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이고 밥을 뒤적거렸다. “제가 아는 게 별로 없어서 잘 못할 것 같아요.”“네가 혼자 하기에는 확실히 무리지.”안시연의 어깨가 축 처졌다.“하지만,” 연정훈이 말을 돌렸다. “연구 주제의 원작자가 바로 네 앞에 앉아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안시연이 잠시 멍해졌다.그의 말뜻을 깨닫고 기쁘게 고개를 들었다.“저와 함께 하시겠다고요?”“너와
“오늘 밤에는 일이 좀 있어서 강남 시티로 돌아가야 해.”연정훈이 말했다.안시연도 순순히 알겠다고 했다.그들은 회사에서 9시가 넘도록 머물다가 강남 시티로 내려갔다.엘리베이터에서 나와 잠깐 걷는 동안 연정훈은 안시연의 손을 잡았고 그것 때문에 안시연은 몰래 기뻐했다.강남 시티로 돌아와서 연정훈이 위층으로 올라가 일을 보고 있을 때, 그녀는 옆에 앉아서 그의 원고를 빤히 쳐다보았다.안시연은 원래 그날 밤 구혜은에게 연락을 하려 했다.“서두르지 마. 지금 급한 건 네가 아니라 그쪽일 거야.”이렇게 말하는 연정훈의 말을 듣고 그녀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사람의 마음을 알아보는 것에 있어서 안시연은 배운 적이 있었다.추석 무렵이라 정원에는 추석을 맞이하는 장식품들이 가득 걸려 있었다.안시연은 좀 심심했는지 창가에 엎드려 밖을 내다보았다.연정훈이 일을 끝냈을 때,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정원의 디자인을 훑어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연성훈은 문득 그녀와 엮이기 시작하고 나서 침대에서만 제대로 된 대화를 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안시연을 데리고 나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게 어렴풋이 떠 올랐다.“야식 먹고 밖으로 나가볼까?”연정훈이 먼저 이렇게 제안했다.안시연은 의외이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쉬지 않아도 돼요?”“어제도 이렇게 일찍 쉬진 않았잖아.”안시연의 얼굴이 빨개졌다.어제 이맘때쯤이면 그들이 몸을 섞고 있을 때였다.그녀는 입술을 오므리더니 입을 열었다.“그럼 전 내려가서 아주머니더러 만두를 삶아달라고 할게요.”말을 마친 안시연은 토끼처럼 활기차게 뛰어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런 그녀를 보는 연정훈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그들이 함께 야식을 먹고 아파트에서 나왔다. 바람이 살살 부는 게 산책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길을 걷다 보면 신기한 식물들이 많을 뿐, 놀거리는 딱히 없었다. 강남 시티 외곽에서 멀지 않은 곳까지 걸어간 그들은 복권 자판기를 발견했다.“한 장 살까요?”안시연이 묻는다.연정훈이 휴대전
먼저 뽀뽀를 한 안시연은 조용해졌다.그는 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물었다.“나왔어요?”연정훈은 복권을 긁던 동작을 계속하지 않고 그녀를 한 번 쳐다보았다.“돈을 원하면 돈만 바라야지. 중간에 갑자기 생각 바꾸기 있어? 나를 먼저 갖고 싶었나 봐.”안시연은 두 손을 뒤로 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마지막 숫자 하나만 남았으니 당첨된다고 해도 그렇게 큰돈은 아닐 거야.”그녀는 속삭이듯 말하며 그를 다시 쳐다보았다. “돈을 바랐지만 이미 실패했으니 다른 곳에서 만회해 보려고요.”연정훈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맞는 말이네.”안시연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리스크를 미리 알아내고 예방하는 거죠.”연정훈이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맞아.”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칭찬했다.“총명하네.”그는 마침내 마지막 숫자를 긁어냈다.안시연이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정말 있어요!”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눈동자는 기쁨으로 가득 찼다.연정훈은 아직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밝은 곳에 가서 보니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만 원에 샀는데 천 원 당첨해 놓고 뭐가 그렇게 기쁜 건지.’하지만 안시연은 너무 기뻐했다.“지금 바로 환전할까요?”안시연은 처음에 환전하려고 했지만 그러면 복권을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연정훈은 이상하게 여겼다.“천 원이 너무 적어서 그래?”안시연은 활짝 웃어 보이더니 복권을 가져오면서 말했다.“제가 잘 소장할 거예요.”그 복권은 처음으로 밤 산책을 나왔을 때 연정훈이 사준 것이기 때문이었다.연정훈은 그녀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복권 한 장일 뿐인데 무슨 소장할 가치가 있다고...’하지만 안이연이 원한다고 했으니 상관없었다.“그럼 그렇게 해.”“네!”안시연은 복권을 보물처럼 잘 챙겼다.돌아가는 길에, 연정훈은 그녀보다 한 발짝 늦게 걸었다.그녀의 경쾌한 발걸음 그리고 이따금 표정에서 드러나는 사소한 감정들을 보며 그녀가 왜 기뻐하는지 어렴
혀가 제압당하고 있어 물러날 수 없었다.예전에도 연정훈이 강하게 나온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한 적은 거의 없었다. 양시연은 연정훈 앞에서 작고 연약한 존재가 된 듯 반격할 힘조차 없었다.연정훈의 커다란 몸이 양시연을 감싸 안았고 그의 가슴과 팔은 마치 쇠처럼 단단해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다.양시연은 벽에 밀려났고 연정훈의 손에 머리가 완전히 고정되어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입술을 깨물려는 순간 양시연의 볼을 단단히 쥐고 거칠게 밀어붙였다.자극적인 감각이 입가로 번져왔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입술을 스치며 그 모든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빨아들였다.그리고 다시 그녀의 모든 호흡을 빼앗아 갔다.양시연은 눈을 뜬 채로 연정훈과 마주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양시연은 온몸이 떨리는 가운데 저항해 보려 했으나 연정훈은 그녀의 감정을 의도적으로 자극하며 허점을 놓치지 않았다. 양시연은 어쩔 수 없이 두 다리를 모으며 본능적인 반응을 억누르려 애썼다.양시연이 낮게 신음하자 근처에 있던 나비는 머리를 돌려 외면하는 듯했다.아니다. 나비가 이 상황을 목격한들 연정훈을 막을 순 없었다.양시연은 부끄러움과 분노로 힘을 빼려 했지만, 그의 억압적인 힘에 완전히 눌렸다.몸이 몇 번씩 움직이며 오히려 그의 접촉이 더 많아졌고 마치 양시연이 일부러 그에게 몸을 맡기고 있는 듯했다.“아주머니...”구조를 청하려 입을 떼었으나 도중에 또다시 막혀버리고 말았다.연정훈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양시연의 고급스러운 블라우스를 통해 그녀의 몸을 어루만졌다. 그 손길은 점점 더 강렬해졌다.양시연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연정훈이 미친 건 아닌지 이렇게 무작정 행동하는 그가 정말로 더 나아간다면 어쩌냐고 하는 두려움이 양시연의 마음을 스쳤다.양시연이 잠시 생각에 잠기던 순간 입술에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연정훈이 먼저 양시연의 입술을 깨물었고 살짝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아프다.사람을 이렇게 물다니 잠깐 연정훈이 짐승인지 의심스러웠다.속으로 욕을 내
너무 가까이 앉아 있던 양시연은 태연한 모습으로 연정훈을 바라보았다. 연정훈은 양시연 때문에 화가 나기 시작해 얼굴을 찡그리며 테이블로 향했다.아이스티를 한 잔을 마신 후 연정훈은 조금 정신이 돌아온 듯했다.양시연은 할 말이 거의 끝나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등지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 몇 년 동안 어디 있었어?”마침내 그 질문을 꺼냈다.양시연은 솔직하게 대답했다.“미국, 영국, 멕시코 그리고 한동안 한강시에 살았었어요.”한강시.양시연은 돌아온 적이 있었지만, 연정훈을 만나러 간 적은 없었다.연정훈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재미있었군.”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정말 재미있었어요. 이전에 본 것들이 얼마나 적었는지 나가보면 알게 될 거예요. 그래서 눈앞의 아름다움에 홀려 발이 움직이지 못했어요.”그녀가 풍경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연정훈은 분명히 알아챘다.밖의 아름다움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하하.양시연은 솔직했다.연정훈은 배신감으로 가득 차 차가운 음료로도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찡그린 얼굴로 양시연에게 물었다.“왜 그때 떠난 거야?”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당신에게 이별을 이야기한 적이 있잖아요.”“내가 동의했어?”“당신이 동의하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평생 당신과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잖아요?”“...”“연애가 싫어지면 계속할 이유가 없으니 헤어지는 게 정상이에요.”양시연은 연정훈의 뒷모습을 보며 조금도 망설임 없이 말했다.“이 점에 대해 당신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하고 싶어요.”“말해봐.”양시연은 미소 지으며 턱을 약간 치켰다.“당신은 다 괜찮은데 전 여자친구를 너무 그리워하는 것 같아요. 기억하고 싶고 놓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현재의 사람도 소홀히 하게 되는 거죠.”“이렇게 되면 손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계속 이러면 매번 연애가 악순환에 빠
“어디 가려고?”연정훈이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잠시 바라보았다.연정훈의 말투는 마치 그녀가 떠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예전 그대로였다.양시연이 무덤덤하게 말했다.“깼어요?”“응.”“아주머니를 불러서 돌보게 할게요.”양시연은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저도 이제 가봐야 해요.”말을 끝내고 양시연은 일부러 손을 빼려 했다.연정훈은 점점 더 손을 꼭 쥐었다.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양시연은 당황하지 않았다. 양시연은 가방으로 테이블 위의 물건을 밀어내고 유리 테이블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나한테 술주정 부리려는 거예요?”연정훈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재미있어요?”양시연이 계속 물었다.자존심이 강한 연정훈이었기에 보통 때라면 손을 놓았겠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는 양시연의 손을 놓지 않았다.연정훈은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감고 여전히 양시연의 손을 쥐고 있었다.양시연은 옆에 놓인 탕후루 꼬치가 눈에 들어오자 주저 없이 하나를 집어 연정훈의 손목을 찔렀다!연정훈은 반사적으로 손을 놓았다.양시연은 흘끗 연정훈을 쳐다본 후 손목을 주무르며 꼬치를 쓰레기통에 던졌다.서로 간의 긴장감이 오래 이어지자, 옆에 있던 나비마저 지루해하며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얹고 네 발을 쭉 뻗고 있었다.“네 방에 있는 남자는 누구지?”연정훈이 물었다.양시연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내 남자친구 변백호 씨예요.”연정훈은 마치 목이 막힌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연정훈은 고개를 돌려 양시연을 바라보며 시선을 고정했다.“남자친구가 있으면서도 한밤중에 전 남자친구를 집에 데려다줄 수 있는 용기가 대단하네.”“연 대표님은 보통의 전 남자친구와는 다르죠. 연 대표님은 인품도 좋고 함께 있어도 늘 안전할 거로 생각해요.”양시연이 말했다.연정훈은 콧방귀를 뀌었다.“누가 내 인품이 좋다고 했어?”양시연은 대답했다.“저는 경험이 많아요. 전 여자친구들한테 늘 잘 챙겨주셨던 거 다 봤거든요.”“비교해 보면 현재의 여자친구가 아니라
쳇!‘2만 원이라니! 나를 거지로 보는 건가?!’반우희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홱 돌려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차 안에서 부승원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반우희가 몇 걸음 더 걸었을 때 뒤에서 다시 경적 소리가 울렸다.돌아보니 현금은 여전히 두 장이었지만, 부승원의 엄지가 살짝 움직이자 그 두 장이 마치 부채처럼 펼쳐져 여러 장으로 변했다!반우희는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가늘게 뜨고 금액을 재빨리 셈했다.16만 원!한 번 더 돌아보면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을지 반우희는 잠시 고민했다.그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부승원은 여유롭게 경적을 누르고는 휴대폰을 꺼내 한 손으로 타자를 하기 시작했다.메시지를 보내고 난 뒤 부승원은 눈짓으로 반우희에게 휴대폰을 보라는 신호를 보냈다.반우희는 서둘러 휴대폰을 확인했다.부승원이 보낸 메시지가 화면에 떠올랐다.[셋을 세기 전에 한 걸음 더 나가면 이 돈은 없는 셈 칠 거야.]반우희는 어이없었다.“...”아아!‘또 협박이야?! 나도 자존심이 있는데!’차 안에서 부승원은 여유롭게 기다렸다.셋...그가 막 입을 떼려는 순간 반우희는 주먹을 꽉 쥐며 화난 얼굴로 돌아서더니 차 문을 열고 단숨에 들어와 문을 쾅 닫아버렸다!반우희는 손을 내밀었다.‘돈 줘!’부승원은 어이없었다.“...”좀 더 버틸 줄 알았다.부승원은 손을 치우며 반우희의 무릎 위로 돈을 던졌다.반우희는 금세 표정을 바꾸고 기쁜 얼굴로 돈을 집어 들었다.돈을 세던 그녀는 부승원의 지갑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 안에 현금이 더 들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반우희는 가볍게 헛기침했다.부승원이 냉소적으로 말했다.“탐욕스럽게 침 흘리지 마.”쳇.부승원이 차를 출발시켰고 방향을 보아 반우희를 집까지 데려다주려는 것 같았다.돈을 받은 반우희는 기분이 풀려 더 이상 부승원에게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다음엔 이런 식으로 하지 마세요. 저랑 시연 언니는 친구라 이런 일은 우리 사이를 어색하게 만들 수도 있잖아요. 이해하시죠?
“부 변호사님, 연 대표님을 데려가지 않으면 저 여기 두고 갈 거예요!”술집 3층 복도에서 반우희는 부승원을 다시 한번 위협했다.부승원은 느긋한 태도로 대답했다.“그래. 두고 가.”반우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부 변호사님, 제발 저를 그만 괴롭혀요! 한 달에 월급 100만 원밖에 안 주시면서요!”“양시연 씨에게 전화해 봤어?”반우희는 불만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정말 너무하네요. 양시연 언니까지 끌어들이는 건 아니잖아요?”부승원은 계속해서 질문했다.“전화했어?”반우희가 대답했다.“...했어요!”부승원은 냉소적인 어조로 대답했다.“우정 때문에 그 정도 의지도 없어졌어.”반우희는 어이없었다.“...”‘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어쩌지?’반우희는 방문을 열고 연정훈이 소파에 기대어 조용히 쉬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한시름 놓았다.“양시연 씨가 연정훈을 데려가면 너는 후문으로 나가.”부승원이 말했다.“왜요?”반우희가 불만스럽게 물었다.부승원은 즉시 전화를 끊어버렸다.반우희는 미칠 것 같은 마음에 핸드폰 화면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화를 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시연이 가방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왔다.반우희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이 달려가 사과했다.“언니, 죄송해요. 일부러 여기까지 오게 해서.”양시연은 반우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방에서 작은 액세서리를 꺼내 반우희에게 건넸다.“미안해할 건 나예요. 우희 씨까지 곤란하게 해서요.”“아니에요!”반우희는 팔찌를 찬 순간 얼굴이 환해졌다.그녀는 양시연을 데리고 연정훈을 보러 가며 말했다.“연 대표님이 계속 핸드폰을 들고 계셨어요. 언니에게 전화하려는 것 같더니 중간에 언니를 차단해 버렸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무슨 이유인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한 술 냄새가 확 밀려왔다. 양시연은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빈 병들을 훑어보았다.싱글 소파에 앉아 있는 연정훈은 눈을 감고 반쪽이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머리를
밤10시.방 안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변백호는 손에 책을 말아 쥐고 소파를 두드리며 양시연을 재촉했다.“빨리 해. 이러다 시간 다 되겠어.”양시연은 펜을 쥔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이마에 땀을 흘리며 문제를 풀고 있었다.시험지는 다양한 언어와 주식, 은행, 세무 지식이 얽힌 난해한 문제들로 가득했다.점수가 잘 나올 것 같지 않자 양시연은 살짝 변명할 생각이 들었다.“이거...네가 안 가르쳐 준 부분이 많아서...”“어떤 문제?”변백호는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 전공과 관련된 부분에서 변백호는 무섭게 엄격했다.양시연은 선택지 하나를 펜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변백호는 말아놓은 책을 펼쳐 양시연의 머리를 툭 쳤다.“이 문제 네가 귀국하기 전 마지막 수업에서 가르쳤던 거잖아!”양시연은 머리를 감싸 쥐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문제 빨리 풀어.”변백호는 싫증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 네가 제일 형편없어.”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서둘러 답안을 작성했고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시험지를 제출했다.변백호는 즉석에서 채점했고 양시연의 점수는 80점이었다.됐다. 합격이다.변백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형편없어.”양시연은 할 말이 없었다.변백호는 학생들에게 매우 엄격해서 100점 만점에서 80점이 되어야 겨우 통과라고 인정했다. 그의 다른 학생들은 모두 천재에 가까워서 양시연은 그들을 따라가기 버거웠다.중에는 이제 막 성인이 된 혼혈 여학생이 있었고 그녀는 대학을 일찍 마친 상태였다. 그녀는 기계처럼 정확한 두뇌를 가졌고 정보를 입력하면 답이 바로 나오는 듯했다.“그럼...이제 집에 가도 될까?”양시연은 조심스럽게 변백호를 살피며 물었다.변백호는 조금 더 양시연을 잡아두려 했지만, 휴대폰 알림이 울리자 태연히 자세를 고쳐 앉으며 손짓했다.“가 봐.”양시연은 마침내 해방된 기분으로 방을 빠져나갔다.양시연이 나가자마자 변백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카톡 화
양시연이 일어나 문을 열려고 하자 변백호가 양시연의 목을 감싸며 앞으로 끌어당겼다.“이거 놔. 무슨 짓이야.”변백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힘 좀 써서 나한테서 벗어나 봐.”양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변백호, 너가 내게 복싱을 몇 번이나 가르쳤다고! 그마저도 나를 샌드백 삼아 때리기만 했는데 내가 대체 뭘 배웠겠어?”변백호가 혀를 차며 말했다.“에이. 정말 형편없네.”양시연은 어이없었다.“...”“당장 놔!”양시연은 소리쳤다.양시연이 정말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변백호는 흥미를 잃은 듯 양시연을 풀어주며 투덜거렸다.“양혁수가 널 어디가 좋다고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체력도 허약한 데다 그다지 똑똑해 보이지도 않는데.”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 짜증이 치밀었다.변백호는 매번 만날 때마다 이렇게 양시연을 깎아내리곤 했다.분노에 찬 얼굴로 양시연은 문을 열었다. 배달 직원일 거로 생각했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양시연은 멈칫했다.연정훈...?연정훈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겉옷을 대충 손에 걸친 채 흰 셔츠의 단추는 두어 개 풀려 있었고 손등의 핏줄은 도드라져 있었다. 창백한 얼굴엔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비서가 전한 말이 떠오르며 혹시 따지러 온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양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떻게 오셨어요?”‘무슨 일이냐고?’양시연은 묘하게도 차분했다.연정훈은 숨이 막힐 듯 분노가 치밀었지만, 이를 악물고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시계를 방에 두고 왔어요.”“시계요?”양시연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어디 두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찾아드릴게요.”“내가 직접 찾을 거예요.”양시연은 잠시 멈칫했다. 생각에 잠긴 찰나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변백호의 귀찮은 듯한 연극조 목소리가 들려왔다.“자기야, 누구랑 얘기 중이야?”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의 검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은 채 응시하자, 양시연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의
검은색 벤츠가 스쳐 지나가며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길가에 서 있던 연정훈은 입가에 냉소를 띠고 있었다.배은망덕하다.아주 좋다.양시연이 연정훈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양시연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지 의아했다. 계약을 체결한 다음 날부터 마치 동물을 훈련하듯 연정훈의 눈앞에 나타나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그녀의 열정도 점차 식어갔다. 어젯밤에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자동차의 배기가스가 연정훈의 얼굴을 스쳤다.연정훈은 무거운 표정으로 방으로 돌아가며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양시연에게 강한 한 수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는 스스로 억눌렀다.연정훈은 계속해서 양시연에게 핑계를 만들어 주었다. 아마 그녀가 너무 바빠서 그럴 것이라 스스로 위로했다.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시연이 계속 연정훈에게 신경 쓸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점심 무렵 양시연의 비서가 나타나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다.“양 대표님께서 오전에 급한 일이 생겨 연 대표님과의 쇼핑을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연정훈의 마음속 불만은 어느 정도 가셨고 연정훈은 냉랭한 표정으로 비서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인가요?”“별일은 아닙니다.”비서는 미소 지었다.“그냥 양 대표님의 남자친구가 귀국해서 대표님께서 마중 나가신 것입니다.”스윽!비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등 뒤로 한기가 느껴졌다. 눈앞에서 연정훈의 얼굴이 급격히 변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검은 눈동자 속에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스쳤고 곧 차가운 눈빛으로 얼어붙었다.연정훈은 고개를 들고 천천히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양 대표님이 왜 가셨다고요?”“남자친구...마중 나갔습니다.”비서는 울고 싶은 지경이었다.이 일이 목숨을 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비서는 연정훈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연정훈이 묻지 않는 틈을 타 살짝 자리를 피했다.다시 돌아보니 연정훈은 표면적으로 여전히 냉정을 유지하며 젓가락으로
양시연은 주 팀장의 얼굴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계약서를 들어 확인한 후에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양시연의 마음 한편에 묘한 감정이 스쳐 갔으나 양시연은 담담히 받아들였다.“연 대표님과 정인 그룹이 저희 인터참을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저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양시연은 사람들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주 팀장은 환한 미소로 답했다.“그럼요. 저희는 양 대표님을 믿습니다.”양시연은 침묵했다.“...”부승원은 변함없는 담담한 얼굴로 계약 절차를 마무리한 뒤 일행과 함께 자리를 떴다.주 팀장은 양시연에게 식사를 제안했지만, 양시연은 정중히 거절했다.“다음에 주 팀장님께서 시간이 되시면 제가 초대하겠습니다.”“네. 좋아요.”그 사람들을 배웅한 후 비서가 사무실로 달려가 좋은 소식을 전했다. 양시연이 돌아서자마자 사무실 안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몇몇 담당자를 회의실로 불렀다.중요한 이야기를 마친 후 조려욱과 몇몇은 연정훈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주 팀장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어야 했다고 생각했다.“양 대표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몇몇 사람들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양시연의 답을 기다렸다.양시연이 말했다.“계약은 이미 체결했으니 이제는 우리의 몫입니다. 투자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보다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겠지요.”“연 대표님께서는 저희 쪽에 머무르고 계시잖아요.”비서가 상기시켰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연 대표님의 생활을 세심하게 챙기고 최고의 예우를 다하세요.”사람들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양시연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과거 그녀와 연정훈이 사귀었던 사이였고 연정훈이 이렇게까지 배려하는 것을 보고 혹시 그가 재결합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었다.하지만 재결합은 중요하지 않았다.설령 연정훈이 양시연을 다시 원한다 해도 양시연이 원하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