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그들의 무리에 잘 어울리지 못해서 원래 연정훈의 친구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연정훈이 말했다.“앞으로 이런 자리에 자주 데리고 나올 테니 너도 슬슬 익숙해져야 해.”그들의 관계를 모든 사람에게 다 알릴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그가 무심코 내뱉은 이 말은 왠지 모르게 그녀를 모든 사람에게 소개하고 싶다는 뜻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그 때문에 안시연의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꺼냈다.“어떤 스케일이죠? 제가 어떤 옷을 입어야 하나요?”“드레스요?”“아니면 그냥 치마?”그녀는 연신 물으며 또 화장대를 가리켰다.“액세서리도 해야 하나요?”연정훈은 그녀가 이렇게 긴장하는 모습을 보며 웃음을 금치 못했다.그는 대답 대신 오히려 문 쪽으로 걸어갔다.“아무거나 입어.”“네?”“옷은 결국 사람이 받쳐 주는 거야. 시연이가 자신감을 가져야지.”그는 문 앞에서 몸을 돌려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넌 해진 치마를 입어도 눈에 띄게 예뻐.”안시연은 두 손을 등 뒤로 한 채 그의 말에 조금 기뻤다.그녀는 줄곧 자신이 예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쁘다고 칭찬을 받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그녀는 그를 따라 문밖으로 배웅해 주고 발꿈치를 들어 그의 턱에 가볍게 입맞춤했다.“저녁에 봐요.”‘교수님.’연정훈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안시연은 간단히 정리를 하고 서둘러 회사로 달려갔다.장가희는 그녀의 피곤한 안색과 감출 수 없이 새어 나오는 미묘한 여성스러운 느낌을 빠르게 눈치채고 장난치듯이 말했다.“요즘 밤 생활이 아주 행복했나 보네요.”안시연은 얼굴을 붉혔다.때마침 주임이 그들에게 함께 본사 빌딩에 계약서를 보내러 가라고 했다.아래층을 지날 때 마침 연정훈이 사람들을 데리고 문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모두 길을 비켜주었고 안시연도 고개를 숙이고 한쪽으로 비켜섰다.연정훈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며 장가희는 감탄하듯이 말했다.“연 대표님은 저희랑 거리가 정말 머네요. 항상
병실 안.점심에 간호사가 잠시 볼일이 생겨서 할머니에게 휴가를 신청했다.할머니께서도 기분이 좋았던 참이라 어서 가보라고 했다.간호사가 금방 떠나고 얼마 안 있어 누군가가 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할머니는 어리둥절해하며 입을 열었다.“들어오세요.”병실 문이 열리더니 나이와는 다르게 관리가 엄청나게 잘 된 한 중년 여인이 들어섰다.들어온 사람의 신분을 확인하고 할머니는 잠시 멍해 있더니 곧 벼락을 맞은 듯 깜짝 놀라 심장 박동이 걷잡을 수 없이 빨라졌다.소현정은 비록 몇 년 동안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지만, 어머니의 건강 상태는 잘 알고 있었으므로 서둘러 병실 안으로 들어와 어머니를 다독여 주었다.“어머니, 괜찮으세요?”몇 년 만에 다시 듣게 되는 “어머니”라는 말에 할머니는 정신이 어질어질해 쓰러질 뻔했다.한참 동안 가까스로 숨을 돌린 후에야 할머니는 침대 옆 가드레일을 움켜쥐고 격동된 어조로 그녀에게 소리쳤다.“이제 돌아와서 어쩌자는 거냐!”어머니의 늙고 병든 모습을 보면서 소현정도 양심의 가책을 느꼈고 가슴이 아파졌다.“그동안 죄송했어요.”“나한테 죄송해할 거 없고 네 딸내미한테는 미안하지도 않냐?!”안시연을 언급하자 소현정은 눈살을 약간 찌푸리더니 별다른 감정이 없어 보였다.“일단 물 한 잔 따라드릴게요.”아무래도 친딸이라 그런지 어르신네는 더 쌀쌀하게 굴지 못했다.그러다 보니 분위기가 점차 누그러졌다.그 두 모녀는 서로 눈물을 훔치며 이 몇 년 동안의 사정을 이야기했다.“네가 어떻게 지내든 상관없다. 그런데 네 딸 시연이가 곧 결혼이잖니. 돈이라도 좀 마련해 두거라.”“결혼이라니?”소현정은 잠깐 멍해졌다.“누구랑요?”할머니가 말했다.“시연이 대학 동기라는데 참 노력하는 아이여.”말만 들어도 평범한 사람인 것 같았는데 소현정은 오히려 피식 웃었다.“좋네요.”“때가 되면 집 한 채를 선물로 보내드리죠.”그녀는 담담하고 여유롭게 말했으나 할머니는 듣더니 눈살을 찌푸렸다.그해 소현정은 안시연의 아버지와
운전기사는 애초에 경찰에게 신고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양혁수와 엮인 일이라면 일단 그를 병원으로 데려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안시연도 자연히 이 도리를 알고 있다.그녀도 차에 타고 있었으므로 그냥 가버리기에 좀 무례한 것 같아서 양혁수랑 같이 병원에 가기로 했다.병원으로 가는 도중 그녀는 연거푸 사과했다.“그만해, 같은 말을 두세 번 하는 게 안 지겨워?”양혁수가 언짢은 말투로 그녀를 찔렀다.안시연은 난처해하며 입을 다물었다.양혁수의 이마에서 아직도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이 장면은 꽤 섬뜩했다.안시연은 종이 두 장을 뽑아 그에게 건네주려고 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그녀가 종이를 다시 가져가자, 그는 또 뭐가 내키지 않은 지 가시 돋친 말만 골라서 내뱉었다.“내가 과다 출혈로 네 차에서 죽어버리면, 넌 나와 함께 땅속에 묻힐 각오를 해.”“...”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휴지를 들고 그의 상처를 꾹 눌렀다.그녀의 손은 이미 충분히 힘을 뺀 상태였지만 양혁수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살살해.”“... 네.”안시연은 이렇게 그의 상처를 눌러주는 자세로 병원에 도착하기 전까지 버텼다.다행히 운전기사는 빠르게 움직여 미리 응급실을 예약해 두었다.양혁수의 상처는 보기에 섬뜩했지만 사실 별로 심하지 않았고 간단한 소독 처치 후 붕대로 싸매기만 하면 끝이었다.안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양혁수는 의자에 앉아 간호사에게 치료를 받는 내내 여전히 심기 불편한 모습이었다.운전기사는 약을 가져오며 안시연에게 신신당부했다.“연 씨와 양 씨 두 가문은 사이가 아주 좋답니다. 이 도련님은 양씨 가문의 외아들이에요.”이 말뜻은 꼭 양혁수의 눈에 찍히지 않게 그를 잘 달래야 하고, 안 그러면 언젠가는 연정훈의 사랑을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셈이었다.안시연은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뭐라고 할 수 없었다.응급실 내에서 간호사는 손길이 거칠어 양혁수가 아프다고 느꼈는지 한창 욕을 먹고 있었다.안시연이 걸어 들어
겉으로 연약해 보이는 이 여인은 꽤 큰 힘으로 안시연을 퍽 밀었다.안시연은 약간 휘청이며 두어 걸음 물러섰다.상대방이 안시연에게 뭐라고 더 말하기 전에 양혁수가 나서서 앞을 가로막았다.젊은 남성의 듬직하고 힘 있는 뒷모습이 그녀의 시선을 완전히 가렸다. 너무 가까이 선 탓에 상대의 은은한 남성 향수 향기가 풍겨오자, 그녀는 덫에 걸린 토끼처럼 화들짝 놀라 얼른 뒤로 두 걸음 더 물러섰다.이어 양혁수의 비웃는 듯한 말이 들려왔다.“내가 누군지 당신과 무슨 상관이야.”“혁수야...”“착한 척 오지네. 낸데 먹힐 줄 알았어?”여인은 목소리가 점점 꺼져 들어갔지만 그래도 마음을 굳게 먹고 입을 열었다.“혁수야, 난 그래도 네 웃어른이야!”“가지가지 한다, 정말. 요즘 세대는 스폰녀도 어른 행세를 할 수 있었나?”“너!”“빨리 꺼져요, 당신 얼굴만 봐도 짜증 나는데.”안시연은 살벌한 분위기에 놀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입이 독하네. 아까 건드리지 않아서 다행이야...’그 여자는 무슨 말을 더 하려고 했던 것 같았지만 끝내 참고 입을 다물었다.안시연이 고개를 내밀고 양혁수의 등 뒤에서 나와 서자, 상대방 증오의 눈빛이 마침 그녀의 얼굴에 박혀 있었다. 마치 방금 양혁수에게 당한 굴욕은 모두 그녀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그녀가 타고 있던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그녀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양혁수의 농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우리 집사람이 널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안시연은 소름이 끼쳤는지 목을 움츠렸다.그녀는 가방을 메고 두 손을 몸 앞에 공손히 모아 다시 한번 사과했다.“양혁수 씨, 오늘 정말 죄송합니다.”양혁수는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태도가 산만했다.“걱정 마, 연정훈에게 고자질 같은 거 안 할 테니까 너희 둘 사이 감정에 영향이 없을 거야.”“...”엘리베이터가 다시 올라오자, 그녀는 양혁수를 한 눈 쳐다보았다.양혁수는 그녀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안시연은 들어가고 나서
오성호가 깜짝 놀라 물었다.“당신 혁수 만나러 갔어?”소현정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우리 엄마가 아프셔서 내가 병문안을 갔는데 마침 병원에서 혁수를 만났지 뭐예요. 어느 미친년에게 교통사고를 당해서 머리에 온통 피범벅이라 내가 몇 마디 관심해 줬는데 조금도 고마워할지언정 나에게 욕설을 퍼부었단 말이에요!”“당연한 소릴 하고 있어! 당신이 어떤 신분이고, 걔가 어떤 신분인데 당신에게 좋은 태도로 대할 수 있겠어?”소현정은 듣자마자 더욱 큰소리로 엉엉 울어댔다.오성호는 화가 치밀어 언성을 높여 말했다.“당신 또 이렇게 함부로 굴어봐! 고의로 그에게 접근했다가 일이 발각되면 아들이 양씨 가문을 계승할 생각은 하지도 마!”소현정은 흐느끼며 울부짖었다.“상속 안 하면 안 했지, 지금 상황이 이런데 돈만 있으면 무슨 소용이에요! 내 아들이 나를 인정하지 않는데!”“우리 아들이 당신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그럼, 지원이는? 지원이는 나와 쟤 딸을 얼굴도 본 적이 없다고!”오성호는 얼굴이 극도의 분노로 새파랗게 질려있었다.“애초에 당신을 위해 두 아이를 바꿨는데, 지금 또 이 바보짓을 한다고?! 당신은 정말 내가 죄책감이 없다고 생각해? 지원은 나의 초혼 아내야!”이 말을 듣자, 소현정은 울음을 그쳤다.그녀를 위한 거고 뭐고, 이 따위 말은 모두 그의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마음속으로 잘 알고 있었다.양지원의 아이는 딸로 태어났는데 해산을 앞두고 교통사고를 당해 자궁을 뗐고, 오성호는 또 일편단심으로 아들을 원했기 때문에 아이를 바꾸는 일이 생겼다.하지만 그녀는 이런 말을 당연히 입 밖으로 내보내지 않을 것이었다.“당... 당연히 속이 타서 그랬죠. 혁수를 못 본 지 1년이 넘었는데.”그녀가 아직 제정신인 것을 보고 오성호는 태도를 누그러뜨려 소파에 털썩 앉았다.“다시는 걔 앞에서 얼씬거리지 마, 뜻밖의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반년만 더 있으면 어르신께서 수혁이를 이사회에 들어오게 할 생각이야.”“정말?”소현정은 놀라서 되물었다.
안시연은 양혁수의 연락처를 몰라 목걸이를 돌려줄 방법이 없었다.오후 내내 쉴 새 없이 바빴던 그녀는 황급히 집에 돌아가 씻고 정리하고는 이 일을 금방 잊어버렸다.연정훈이 직접 차를 몰고 집 아래까지 데리러 왔다. 그녀가 계단을 내려갈 때 마침 황혼 무렵이었고, 저녁놀의 여운이 하늘에 아름답게 걸려 있어 마치 황금 비단을 수놓은 것 같았다. 남자는 주름 한결 안 잡힌 말끔한 수트를 차려입고 차 옆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단지 서 있는 것만으로도 남다른 고귀한 분위기를 자랑했다.그녀는 종종걸음으로 그에게 달려갔다.“운전기사는요?”연정훈은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훑어보았다.그녀는 흰색 슬림핏 롱드레스에 검은색 가디건을 걸친 채 온몸의 주얼리라고는 손가락에 끼고 있는 보석 반지 하나뿐이었으나 전체적으로 매우 고급지고 우아하면서도 속되지 않았다.“내가 직접 운전한다면, 싫어?”안시연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연 교수님에게 이런 궂은일을 시킨 것 같아서 괜히 마음이 불편하네요.”연정훈은 그녀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그러자 그녀는 두 손을 등 뒤로 한 채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교활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연정훈이 그녀에게 키스하려고 한 것을 그녀가 눈치 빠르게 예측했기 때문이다.그는 입가를 살짝 올리며 조금도 어색한 기색 없이 시선을 그녀의 뒤로 향했다.“뭘 들고 있어?”안시연은 쑥스러워하며 반대로 물음을 그에게 던졌다.“저녁 드셨어요?”“아직 안 먹었는데.”“배고프실까 봐 디저트를 조금 싸 왔어요.”안시연은 이렇게 말하며 뒤에 숨긴 물건을 꺼냈는데 아기자기하고 네모난 도시락이었다.연정훈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그는 그녀에게 잠시 후 참석할 저녁 연회에 배불리 먹어도 남을 만큼 한 음식이 있다고 알려주고 싶었다.하지만 초롱초롱한 그녀의 눈망울에 담겨있는 진심을 보며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고마워. 마침 배고팠어.”안시연은 흐뭇했다.차에 오르기 전,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도시락 뚜껑을 열고 두 손
“안시연.”“아니, 이름을 물어보는 게 아니라, 너랑 무슨 사이냐고.”이승우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모두가 궁금해하며 연정훈의 대답을 기다렸다.한우빈이 건넨 술잔을 받아 든 연정훈은 안시연을 한 눈 쳐다보며 그에게 되물었다.“네 생각엔?”“생각할 필요가 있어? 당연히 여자 친구 아냐?”이승우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장난기 가득한 태도로 말했다.“우리 연 대표님은 여성분들의 감정을 가지고 노는 그런 인간 아니고 진지한 분이시지.”안시연은 그녀를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감당하기 어려워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연정훈은 그때 구혜은 등 사람들 앞에서 그녀가 자신의 여자 친구라고 한 적이 있지만, 오늘 이 사람들은 달랐다. 이들은 모두 그와 알던 사이였고 이후에도 계속 접점이 생길 사람들이었다.‘설마 그러시진 않을 거야...’“내가 진지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 앞으로 그런 쓸데없는 말은 삼가.”연정훈의 차분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안시연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주위가 금방 떠들썩해졌고 벌써 그녀가 어디에서 일하는지 묻는 사람이 있었다.그녀는 놀라움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본능적으로 이미 상대방에게 대답하고 있었다.“정인 과학기술이요.”“진짜 여자 친구 맞네요. 어느 정도로 아끼고 숨겨두고 계셨으면...”상대방이 웃으며 농담했다.안시연은 수줍은 기색이 드러났고 귓가의 온도가 점점 상승하고 있었다.연정훈은 그녀의 손을 잡고 하얀색 큰 텐트 아래로 천천히 걸어갔다.그동안 그의 손바닥으로부터 전해지는 온도는 그녀의 초조한 마음을 따뜻하게 달래주었다.텐트는 상당히 컸고 달빛만 살짝 가렸을 뿐 사방이 뚫려 있었으며 어두운 불빛이 몽롱하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안시연은 미리 준비한 선물을 한우빈에게 건네주며 말했다.“한 대표님, 개업 축하합니다.”“감사하네요.”그때 누가 걸어와 연정훈과 얘기를 나누기 시작하자 안시연은 그의 곁에 조용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우빈은 금방 눈치채고 매너 있게 그녀더러 여자
날이 점점 어두워졌다.한우빈은 사람들을 이끌고 와이너리 내부로 들어가 2층 플랫폼에서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안시연은 물배만 가득 채우고 서둘러 화장실에 갔다.화장실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안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잘난 척 쩐다, 진짜. 우리랑 놀기 싫다고?”“설마 연 대표님이 말한 여자 친구가 진짜 서로 사랑하는 여자 친구라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이 말을 한 여인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이승우 씨는 나랑 자고 난 다음날에 내 이름도 모르면서 친구를 만났을 땐 그래도 여자 친구라고 불렀잖아.”문밖에서 듣고 있던 안시연은 누군가 머리 위에 찬물을 끼얹은 것만 같았다.하룻밤 사이에 쌓아두었던 기쁨이 한순간 무자비하게 무너져버렸다.그녀는 재빨리 몸을 돌려 여인들이 나오기 전에 위층으로 올라갔다.넋 나간 사람처럼 화장실에 다녀온 그녀는 싱크대 가장자리를 짚고 찬물을 얼굴에 두 번 끼얹었다.그녀는 줄곧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스스로를 타일렀지만, 자신이 연정훈을 좋아한다는 마음에 확신하고 연정훈이 그녀를 아무 조건 없이 아껴준 후부터는 판단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연정훈은 많은 사람 앞에서 그녀를 자신의 여자 친구라고 대범하게 인정했는데, 그녀는 뜻밖에도 이 말을 진짜로 여겼다.연정훈 같은 사람들은 일을 할 때 항상 체면이 일 순위라는 사실을 그녀는 잠깐 잊고 있었다.‘여자 친구’라는 네 글자는 그와 침대 위에서 있었던 일들을 합리화하는 수단일 뿐이었다.찬바람이 복도에서 불어 들어오자, 그녀는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머릿속이 점차 맑아졌고 그녀는 자신의 겉모습을 정리한 뒤 플랫폼으로 돌아갔다.플랫폼 중앙에는 연정훈 등 사람들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테이블 한 바퀴가 모두 남자인 가운데 유일한 여자인 양민지가 끼어있었다.그녀는 담담하고 침착한 태도로 말을 이어가고 있었고 연정훈 등이 그녀의 관점을 진지하게 듣고 분석하고 있음을 쉽게 보아낼 수 있었다.안시연은
“부 변호사님, 연 대표님을 데려가지 않으면 저 여기 두고 갈 거예요!”술집 3층 복도에서 반우희는 부승원을 다시 한번 위협했다.부승원은 느긋한 태도로 대답했다.“그래. 두고 가.”반우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부 변호사님, 제발 저를 그만 괴롭혀요! 한 달에 월급 100만 원밖에 안 주시면서요!”“양시연 씨에게 전화해 봤어?”반우희는 불만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정말 너무하네요. 양시연 언니까지 끌어들이는 건 아니잖아요?”부승원은 계속해서 질문했다.“전화했어?”반우희가 대답했다.“...했어요!”부승원은 냉소적인 어조로 대답했다.“우정 때문에 그 정도 의지도 없어졌어.”반우희는 어이없었다.“...”‘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어쩌지?’반우희는 방문을 열고 연정훈이 소파에 기대어 조용히 쉬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한시름 놓았다.“양시연 씨가 연정훈을 데려가면 너는 후문으로 나가.”부승원이 말했다.“왜요?”반우희가 불만스럽게 물었다.부승원은 즉시 전화를 끊어버렸다.반우희는 미칠 것 같은 마음에 핸드폰 화면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화를 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시연이 가방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왔다.반우희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이 달려가 사과했다.“언니, 죄송해요. 일부러 여기까지 오게 해서.”양시연은 반우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방에서 작은 액세서리를 꺼내 반우희에게 건넸다.“미안해할 건 나예요. 우희 씨까지 곤란하게 해서요.”“아니에요!”반우희는 팔찌를 찬 순간 얼굴이 환해졌다.그녀는 양시연을 데리고 연정훈을 보러 가며 말했다.“연 대표님이 계속 핸드폰을 들고 계셨어요. 언니에게 전화하려는 것 같더니 중간에 언니를 차단해 버렸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무슨 이유인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한 술 냄새가 확 밀려왔다. 양시연은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빈 병들을 훑어보았다.싱글 소파에 앉아 있는 연정훈은 눈을 감고 반쪽이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머리를
밤10시.방 안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변백호는 손에 책을 말아 쥐고 소파를 두드리며 양시연을 재촉했다.“빨리 해. 이러다 시간 다 되겠어.”양시연은 펜을 쥔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이마에 땀을 흘리며 문제를 풀고 있었다.시험지는 다양한 언어와 주식, 은행, 세무 지식이 얽힌 난해한 문제들로 가득했다.점수가 잘 나올 것 같지 않자 양시연은 살짝 변명할 생각이 들었다.“이거...네가 안 가르쳐 준 부분이 많아서...”“어떤 문제?”변백호는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 전공과 관련된 부분에서 변백호는 무섭게 엄격했다.양시연은 선택지 하나를 펜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변백호는 말아놓은 책을 펼쳐 양시연의 머리를 툭 쳤다.“이 문제 네가 귀국하기 전 마지막 수업에서 가르쳤던 거잖아!”양시연은 머리를 감싸 쥐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문제 빨리 풀어.”변백호는 싫증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 네가 제일 형편없어.”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서둘러 답안을 작성했고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시험지를 제출했다.변백호는 즉석에서 채점했고 양시연의 점수는 80점이었다.됐다. 합격이다.변백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형편없어.”양시연은 할 말이 없었다.변백호는 학생들에게 매우 엄격해서 100점 만점에서 80점이 되어야 겨우 통과라고 인정했다. 그의 다른 학생들은 모두 천재에 가까워서 양시연은 그들을 따라가기 버거웠다.중에는 이제 막 성인이 된 혼혈 여학생이 있었고 그녀는 대학을 일찍 마친 상태였다. 그녀는 기계처럼 정확한 두뇌를 가졌고 정보를 입력하면 답이 바로 나오는 듯했다.“그럼...이제 집에 가도 될까?”양시연은 조심스럽게 변백호를 살피며 물었다.변백호는 조금 더 양시연을 잡아두려 했지만, 휴대폰 알림이 울리자 태연히 자세를 고쳐 앉으며 손짓했다.“가 봐.”양시연은 마침내 해방된 기분으로 방을 빠져나갔다.양시연이 나가자마자 변백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카톡 화
양시연이 일어나 문을 열려고 하자 변백호가 양시연의 목을 감싸며 앞으로 끌어당겼다.“이거 놔. 무슨 짓이야.”변백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힘 좀 써서 나한테서 벗어나 봐.”양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변백호, 너가 내게 복싱을 몇 번이나 가르쳤다고! 그마저도 나를 샌드백 삼아 때리기만 했는데 내가 대체 뭘 배웠겠어?”변백호가 혀를 차며 말했다.“에이. 정말 형편없네.”양시연은 어이없었다.“...”“당장 놔!”양시연은 소리쳤다.양시연이 정말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변백호는 흥미를 잃은 듯 양시연을 풀어주며 투덜거렸다.“양혁수가 널 어디가 좋다고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체력도 허약한 데다 그다지 똑똑해 보이지도 않는데.”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 짜증이 치밀었다.변백호는 매번 만날 때마다 이렇게 양시연을 깎아내리곤 했다.분노에 찬 얼굴로 양시연은 문을 열었다. 배달 직원일 거로 생각했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양시연은 멈칫했다.연정훈...?연정훈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겉옷을 대충 손에 걸친 채 흰 셔츠의 단추는 두어 개 풀려 있었고 손등의 핏줄은 도드라져 있었다. 창백한 얼굴엔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비서가 전한 말이 떠오르며 혹시 따지러 온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양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떻게 오셨어요?”‘무슨 일이냐고?’양시연은 묘하게도 차분했다.연정훈은 숨이 막힐 듯 분노가 치밀었지만, 이를 악물고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시계를 방에 두고 왔어요.”“시계요?”양시연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어디 두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찾아드릴게요.”“내가 직접 찾을 거예요.”양시연은 잠시 멈칫했다. 생각에 잠긴 찰나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변백호의 귀찮은 듯한 연극조 목소리가 들려왔다.“자기야, 누구랑 얘기 중이야?”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의 검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은 채 응시하자, 양시연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의
검은색 벤츠가 스쳐 지나가며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길가에 서 있던 연정훈은 입가에 냉소를 띠고 있었다.배은망덕하다.아주 좋다.양시연이 연정훈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양시연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지 의아했다. 계약을 체결한 다음 날부터 마치 동물을 훈련하듯 연정훈의 눈앞에 나타나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그녀의 열정도 점차 식어갔다. 어젯밤에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자동차의 배기가스가 연정훈의 얼굴을 스쳤다.연정훈은 무거운 표정으로 방으로 돌아가며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양시연에게 강한 한 수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는 스스로 억눌렀다.연정훈은 계속해서 양시연에게 핑계를 만들어 주었다. 아마 그녀가 너무 바빠서 그럴 것이라 스스로 위로했다.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시연이 계속 연정훈에게 신경 쓸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점심 무렵 양시연의 비서가 나타나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다.“양 대표님께서 오전에 급한 일이 생겨 연 대표님과의 쇼핑을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연정훈의 마음속 불만은 어느 정도 가셨고 연정훈은 냉랭한 표정으로 비서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인가요?”“별일은 아닙니다.”비서는 미소 지었다.“그냥 양 대표님의 남자친구가 귀국해서 대표님께서 마중 나가신 것입니다.”스윽!비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등 뒤로 한기가 느껴졌다. 눈앞에서 연정훈의 얼굴이 급격히 변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검은 눈동자 속에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스쳤고 곧 차가운 눈빛으로 얼어붙었다.연정훈은 고개를 들고 천천히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양 대표님이 왜 가셨다고요?”“남자친구...마중 나갔습니다.”비서는 울고 싶은 지경이었다.이 일이 목숨을 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비서는 연정훈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연정훈이 묻지 않는 틈을 타 살짝 자리를 피했다.다시 돌아보니 연정훈은 표면적으로 여전히 냉정을 유지하며 젓가락으로
양시연은 주 팀장의 얼굴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계약서를 들어 확인한 후에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양시연의 마음 한편에 묘한 감정이 스쳐 갔으나 양시연은 담담히 받아들였다.“연 대표님과 정인 그룹이 저희 인터참을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저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양시연은 사람들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주 팀장은 환한 미소로 답했다.“그럼요. 저희는 양 대표님을 믿습니다.”양시연은 침묵했다.“...”부승원은 변함없는 담담한 얼굴로 계약 절차를 마무리한 뒤 일행과 함께 자리를 떴다.주 팀장은 양시연에게 식사를 제안했지만, 양시연은 정중히 거절했다.“다음에 주 팀장님께서 시간이 되시면 제가 초대하겠습니다.”“네. 좋아요.”그 사람들을 배웅한 후 비서가 사무실로 달려가 좋은 소식을 전했다. 양시연이 돌아서자마자 사무실 안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몇몇 담당자를 회의실로 불렀다.중요한 이야기를 마친 후 조려욱과 몇몇은 연정훈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주 팀장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어야 했다고 생각했다.“양 대표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몇몇 사람들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양시연의 답을 기다렸다.양시연이 말했다.“계약은 이미 체결했으니 이제는 우리의 몫입니다. 투자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보다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겠지요.”“연 대표님께서는 저희 쪽에 머무르고 계시잖아요.”비서가 상기시켰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연 대표님의 생활을 세심하게 챙기고 최고의 예우를 다하세요.”사람들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양시연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과거 그녀와 연정훈이 사귀었던 사이였고 연정훈이 이렇게까지 배려하는 것을 보고 혹시 그가 재결합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었다.하지만 재결합은 중요하지 않았다.설령 연정훈이 양시연을 다시 원한다 해도 양시연이 원하는 것은
연정훈의 폭탄 같은 질문에 양시연은 말문이 막혔다.다행히 연정훈의 얼굴에서 피가 멈추지 않아 허둥지둥 상처를 치료하느라 대화 주제를 넘길 수 있었다.상처를 달고 연정훈은 말을 멈췄다.그러나 그 질문에 양시연은 그날 밤 불면에 시달렸다.하지만 불면에 시달린 건 가장 큰 이유는 연정훈의 조건이었다.‘내 돈... 그게 어떤 돈인데.’양시연은 이튿날 아침까지 생각에 잠겼다. 연정훈이 아직 잠에서 깨지도 않았는데 부승원은 정인 그룹의 법무팀과 프로젝트 책임자를 대동해 이곳을 찾았다.“투자에 대해 대표님이 직접 얘기를 하셨습니다. 추후의 사항은 저희가 맡을 예정입니다.”양시연은 심장이 철렁했다.연정훈에게 연락하고 싶었으나 직원이 아직 쉬고 있다고 전해 감히 문을 두드릴 수가 없었다.어쩔 수 없이 양시연은 책임자와 배틀을 할 수밖에 없었다.중도에 양시연은 작은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비웠고 비서를 시켜 몰래 상황을 지켜보게 했다.그리고 예상한 대화가 흘렀다.“주 팀장님이 그러던데 연 대표님이 30% 아래로 승낙하셨다네요.”양시연은 화가 났다.어젯밤 고작 긁힌 거로 끝내는 게 아니었다!전 남자 친구치고 멀쩡한 사람이 없다더니 다 사실이었다!사무실 안에서 주지한은 부승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연 대표님이 이미 계약서 초안을 작성했다고 하던데 잠시 후 확인해 볼까요?”부승원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왜 주 팀장님이 작성한 게 아닌가요?”주지한은 단순한 사람이라 아무 걱정 없이 답했다.“연 대표님께서 다 생각이 있지 않겠어요? 어젯밤 확인하시고 아랫사람을 시켜서 작성했나 보죠.”부승원은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사실 그 이유가 아닐 것이다.주지한은 계속 말을 이었다.“양시연 씨도 참 대담하시지. 듣자 하니 고작 10%에 우릴 보내려고 하다니.”그리고 쯧, 소리를 내며 말했다.“꿈이 참 야무지셔요.”“아, 참.”주지한이 고개를 돌려 부승원에게 말했다.“대표님을 직접 체험하러 오게 한 건 미인계 아니에요?”부승원은 대답하지 않았으
그 소리에 양시연은 괜히 연정훈에게 좋은 음식을 먹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모든 노력이 거품이 되는구나 싶었는데 양시연이 다시 생각을 고치고 말했다.“연 대표님, 그 땅의 가치는 그 가격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나와의 협력에서 고작 땅만 노린다면 양시연 대표님의 선구안이 참 별로라고 생각되는데요.”“...”양시연이 눈을 데굴데굴 굴렀다.“연씨 가문의 투자를 받는다는 건 곧 경인에서 입장권을 받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그러니 입장권으로 50% 받는 것도 과분한 일이 아니지요.”양시연이 침묵했다.가치를 따져본다면 연정훈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가장 이상적인 결말이라면 연정훈이 땅을 넘기는 것이었으나 지금 보니 비현실적인 것 같았다.하지만 30%나 넘기는 건 너무 마음이 아팠다.“18%는 어떠세요? 서로 한 걸음만 양보하는 게...”연정훈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삼십.”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그럼 땅은 물론 그 위에 건축한 모든 시설까지 팔게요.”“안 살 겁니다.”“...”정말 말이 통하지 않았다.양시연이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연정훈이 작게 신음을 뱉는 게 들렸다.고개를 들어 상황을 확인한 양시연이 입을 딱 벌렸다.연정훈의 얼굴에 쉐이빙 크림이 반쯤 지워졌는데 왼쪽 얼굴에 빨간색 상처가 늘어났다.어린 직원은 이 상황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양시연은 빠르게 휴지를 뽑아 상처를 감싸며 큰 소리로 말했다.“빨리 의사 불러요!”양시연은 크게 힘을 주지 않았지만 연정훈은 상처가 아주 화끈거렸다. 아마 쉐이빙 크림이 상처를 타고 들어간 것 같았다.그래서 누를 필요가 없다며 되려 감염 우려가 있다고 말하려는데 고개 들어 긴장한 양시연을 발견하고 그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의사는 아주 빠르게 현장에 도착했다.양시연은 휴지를 들었고 상처는 꽤 깊어 보였다.연정훈을 편한 자리로 옮기게 하고 의사 여러 명이 연정훈을 둘러쌌다.이에 어지럼증을 느낀 연정훈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두
연정훈은 이렇게 배가 터질 정도로 먹긴 처음이었다. 거의 턱 끝까지 음식이 찬 것 같았다.식사 후 디저트도 삼킬 수가 없었다.양시연은 매실차를 들고 오며 배시시 웃었다.“이걸 마시면 소화에 좋대요.”“...”그렇게 연정훈은 또 매실차를 비웠다.11시를 막 넘긴 시간이라 아침이자 점심을 한 번에 먹은 셈이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얼굴을 살피다가 산책을 하자며 밖으로 끌었다. 그리고 드디어 공적인 일을 입에 올렸다.“이 프로젝트는 정인 그룹에 있어 보잘것없는 프로젝트라 해도 저희 회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한 걸음이 될 수 있어요.”양시연이 먼저 약한 모습을 보였다.연정훈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먼저 시선을 피해 앞으로 걸었다.양시연이 하루 종일 애를 쓴 건 자신의 투자를 받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양시연은 포기하지 않고 그 발걸음을 맞춰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만약 토지 제공이 어렵다면 혹시 투자는 안 될까요?”연정훈이 표정 한번 변하지 않고 말했다.“고려해 볼 게요.”“그럼 정말 다행이고요.”양시연은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몰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그때 연정훈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몇 시인지 물었다.“거의 12시가 되어가네요.”“점심 시간엔 일 얘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밥 먹고 일 얘기는 하지 말자니, 갑질이 아닐 수가 없었다.하지만 양시연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방을 잡아드릴 테니 고객으로서 체험 한번 해보시는 게 어떠세요?”“그렇게 해줘요.”양시연은 연정훈이 까다롭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직접 방을 체크하고 연정훈을 안으로 들여보냈다.깨끗한 방안에는 누군가 머문 흔적도 없었다. 침대 헤드에는 YSY라는 이니셜이 적힌 카드가 있었다.“다른 방은 이미 예약되어 있는데 제 방 하나만 비어 있어 그곳으로 모실게요.”양시연이 설명했다.“걱정마세요. 저도 아직 묵은 적이 없어 깨끗하답니다.”연정훈이 양시연을 힐끗 보며 말했다.“점심엔 어디에 있을 거예요?”“사무실이요.
제어 버튼은 모두 안전벨트 측에 있었고 그 손잡이를 잡으려면 연정훈의 몸 위를 가로 타야 했다.양시연은 자신이 넘치게 대답했지만 한참 더듬어도 손잡이가 느껴지지 않았다.‘응? 뭐지?’연정훈이 시선을 아래로 깔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손잡이 찾았어요?”연정훈은 등 뒤로 몸을 기대지 않고 바른 자세로 앉았고 목소리가 바로 양시연의 귓가에 전해졌다.조금 머쓱해진 양시연이 바로 몸을 뒤로 뺐다.“아, 그건 다른 차량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착각한 것 같은데 이 차량은...”버튼이 어디 있는지 기억을 되짚어 보는데 연정훈이 손을 뻗어 왼쪽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손쉽게 몸이 뒤로 빠지고 각도가 조절되었다.“...”‘할 줄 알았으면 진작 하지 그랬어?’이런 속마음을 읽은 건지 연정훈은 팔짱 끼는 자세를 취하며 천천히 말했다.“방금 알았어요.”양시연은 어이가 없었다.‘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기회를 놓친 것에 아쉬워하며 양시연은 시동을 걸었다.그러나 연정훈은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특히 입을 삐죽이는 모습이 방금 사무실보다 많이 편해 보여 만족스러웠다.목적지를 향하는 내내 양시연은 창을 내려 직접 과일나무와 양어장을 소개했다.대화속에서 연정훈은 양시연이 많이 변한 게 느껴졌다. 외모와 분위기가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논리와 단어 선택에서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앵두나무를 지나치며 양시연이 물었다.“맛 보실래요?”연정훈은 양시연이 먹고 싶은 게 아닌지 의심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양시연은 바로 근처에 차를 세우고 전문적인 도구로 빠르게 앵두를 땄다.차창 바로 밖에서 양시연은 페트병의 물로 앵두를 씻었고 한 줌을 연정훈에게 넘겼다.“이 앵두는 치라엘 쪽에서 옮겨온 거라 알이 크고 과즙이 많아요.”연정훈은 앵두를 힐끗 살폈다. 양시연은 크고 예쁜 앵두만 자신에게 넘겼다.그래서 하나를 쥐어 입안에 넣으니 단맛이 가득 퍼졌다.“어때요?”양시연이 물었다.“나쁘지 않네요.”그러자 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고 빙 돌아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