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로 이승하는 그동안 쌓아둔 욕망을 한꺼번에 터트리듯 서유를 집 안에 가둬두고 매일 밤 그녀를 안았다.일주일 내내 그에게 시달린 서유는 이제 침대에서 내려올 힘조차 없었고 간신히 내려오면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고도 이승하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고 매일매일 새로운 자세까지 시도해가며 그녀를 괴롭혔다.서유는 이쯤 되니 결혼식 당일 밤은 지금보다 더할 것 같다는 무서운 예감이 들었다. 지금은 고작 프러포즈한 날에 불과하니 말이다.게다가 더 무서운 건 이승하는 그녀의 체력 보충을 위해 각종 약재가 잔뜩 들어간 삼계탕까지 만들어주며 거기에 영양제까지 먹였다.그와 잠자리를 함께하는 건 어찌어찌 감당할 수 있다고 해도 음식은 정말 너무나도 맛이 없었다.서유는 침대 위에서 그가 만든 삼계탕을 한입 먹고는 불평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그냥 배달시키는 게 어때요?”이승하는 티슈로 그녀의 입가를 닦아내더니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밖에 음식은 안 돼. 내가 한 거 먹어.”서유는 배달 음식은 죽어도 안 된다는 그의 단호함에 속으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결국,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고 멀쩡히 돌아다닐 수 있을 때 그녀는 직접 부엌으로 가 일부러 소금 가득 든 달걀 스크램블을 만들고서 활짝 웃는 얼굴로 이승하의 앞에 가져다 놓았다.“내가 한 거 먹어봐요.”이승하는 언뜻언뜻 보이는 소금에 잠시 멈칫하다가 천천히 입에 넣었다.서유는 한입 먹은 뒤 아무런 반응도 없이 꾸역꾸역 계속 요리를 입에 넣는 그의 모습에 의문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혹시 맛을 못 느끼는 건 아니죠?”이승하는 고개를 젓더니 식탁 위에 얼굴을 괴고 마치 신기한 물건을 발견한 아이처럼 자신을 보는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누가 만들어준 건데 다 먹어야지.”그러고는 또다시 음식을 집어 먹으려고 했다. 이에 서유가 다급하게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그만 먹어요.”그냥 한번 당해보라는 식으로 일부러 짜게 만들었건만 이 미련한 남자는 그걸 알면
다행히 서유에게는 소리 지르는 습관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위층에 있는 남자는 소리를 듣고 수상한 소수빈을 한 방에 죽였을지도 모른다.깜짝 놀란 서유는 소수빈이 온 이유를 듣고 급히 설명했다.“이미 말했어요. 승하 씨 내일 회사로 갈 거예요.”서유는 진작 이승하를 설득했지만, 그는 몇십억의 일에 관심이 없는 듯 늘 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했다.소수빈은 이승하가 내일 회사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얼른 뒤꿈치를 세워 창문에 엎드려 작은 소리로 말했다.“서유 씨, 정말 감사해요.”발꿈치를 들어도 창문 입구에 닿지 않는 서유는 작은 걸상 위에 올라서 그와 손을 흔들었다.“아니에요.”소수빈이 돌아서서 가려는데 서유가 걱정스레 물었다.“주 선생님은 퇴원하셨어요?”그는 고개를 끄덕였다.“어제 퇴원했고 잘 지내고 있어요.”서유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손을 흔들었다.“잘 가요.”두 사람이 인사를 나눈 뒤 소수빈은 허리를 굽혀 카메라를 피해 벽 틈을 따라 맨션 입구로 조금씩 이동했다.맨션 꼭대기 층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남자가 가볍게 입을 열었다.“소 비서.”위에서 들려오는 싸늘한 목소리에 소수빈은 놀라 온몸을 떨었고 그 서늘한 기운은 발끝에서 이마까지 닿는 것 같았다.소수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벽 틈으로 빠져나와 꼭대기 층 창문에 서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대, 대표님...”완벽한 몸매에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외모의 남자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처리해야 할 문서 보내 줘.”소수빈은 이승하가 자신을 꾸짖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서류를 보내라고 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러나 이 한숨이 반쯤 나왔을 때 머리 위에서 또다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3개월 감봉.”소수빈은 묻지 않아도 그것이 심야에 그의 여자와 회담한 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다음날 소수빈이 데리러 왔을 때 서유가 그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는 간단하게 대답할 뿐 한사코 입을 열지 않았다.서유는 이상하게 여겨 계속 소수빈을 힐
이승하는 명령을 마치고 소수빈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혼담 잘 처리하면 네가 마음에 드는 저택에 바로 입주하는 거야.”소수빈은 눈이 번쩍 뜨였다. 갑자기 4개월 감봉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는 단번에 승낙하려 했지만 자신이 점 찍어둔 대저택이 200억 원이 넘는다는 것이 생각났다.소수빈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약간 쑥스러워서 말했다.“대표님, 제가 봐 놓은 건 성동의 저택이에요.”차 문 앞에 서 있는 꼿꼿하고 우아한 분위기의 남자가 차갑게 말했다.“내가 살 능력이 없다고 생각해?”소수빈은 연신 손사래를 쳤다. 아시아계 재벌이 별장 한 채도 살 능력이 없다는 건 말도 안 되었다.이승하는 다른 건 몰라도 돈 하나는 차고 넘쳤다. 소수빈은 자신이 그 별장을 받는 것이 이승하를 위해 돈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라 여겼다.그렇게 생각한 소수빈은 즉시 마음이 편안해졌고 그를 향해 깍듯이 허리를 굽혔다.“대표님, 걱정 마세요. 제가 반드시 잘 처리하겠습니다!”이승하는 더 이상 소수빈을 상대하지 않고 차 문을 열고 차에 탄 다음 손을 뻗어 옆에 있는 여자를 품에 안았다.방금 두 사람의 대화를 차 안의 서유는 듣지 못했다. 어떻게 정가혜의 별장으로 돌아가겠다고 할지 궁리만 하고 있었다.지금 이승하가 자신을 껴안자 서유는 내친김에 그의 어깨에 기대어 여광으로 그를 몇 번 힐끗 본 후 용기를 내어 호소했다.“승하 씨, 나 가혜한테 다녀와야 해요.”서유가 JS 그룹 본사를 위해 만든 설계도가 아직 정가혜의 별장 서재에 있으니 가서 가져와야 했다.그리고 휴대폰도 침실에 있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공사 현장을 탐사하는 심이준은 분명 그녀에게 여러 번 연락했을 것이다.그녀는 전에 심이준과 약속했다. 그가 한 군데씩 탐사를 끝날 때마다 상대방의 요구를 그녀에게 보내기로 말이다.지난 반년 동안 서유는 지현우에게 납치되어 있었고, 돌아와서도 이승하와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 지냈으니 심이준은 얼마나 애가 탈까?그리고 정가혜 별장 옆에 집을 샀는데 결혼
그녀는 이승하가 자신을 정가혜 별장으로 돌려보내고 JS 그룹으로 갈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는 긴 다리를 뻗어 그녀를 따라 별장으로 들어갔다.정가혜의 가정부 노현정은 이승하가 오는 것을 보고 사위를 만난 듯 기뻐하며 얼른 그를 거실로 공손히 맞아들였다.“대표님, 잠시만 앉아 계시면 제가 커피를 끓여 올게요.”노현정은 말을 마치고는 이승하를 돌아보며 서유에게 응원하는 손짓을 하며 눈빛으로 암시했다.‘이 남자 꼭 잡으세요!’서유는 손을 들어 이마를 쓰다듬은 후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당신에게 줄 선물이 있어요. 잠시만 기다려요.”소파에 등을 기대고 늘씬한 다리를 꼬고 있던 남자는 그녀가 선물을 주겠다는 말에 눈가에 미소를 머금었다.“좋아.”서유는 돌아서서 서재로 갔다. 거실에 앉아있던 남자는 핸드폰을 꺼내서 아직 야간근무 중인 정가혜에게 전화를 걸었다.그가 핸드폰을 내려놓았을 때, 서유가 서재에서 급히 뛰쳐나오는 것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서재에 놓은 설계도 못 보셨어요?”부엌에서 커피를 타고 있던 노현정은 얼른 고개를 내밀며 대답했다.“그 설계도는 이 대표님이 가져가지 않으셨어요?”서유는 소파의 냉랭하고 신중한 남자를 바라보았다.“당신이 JS 그룹 본사 설계도를 가져갔어요?”이승하는 그제야 그녀가 말한 선물이 설계도라는 것을 깨달았다.“응, 이미 그 설계도로 건설 중이야.”서유는 멍하니 그를 몇 초 동안 쳐다보았다. 전에 JS 그룹 재건에 관한 기자 회견을 떠올리며 그제야 천천히 이해했다.“당시 나한테 엄청 화났으면서 왜 계속 내 설계도를 사용한 거예요?”이승하는 개의치 않고 늘씬한 손을 내밀어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난 네 설계도를 사용하겠다고 약속했고, 그 그림을 가지고 대회에 참가하겠다고 약속했으니 어떤 상황에서라도 그 약속을 지켜야지.”그녀가 건축 분야에서 성과를 이룩하는 데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그의 개인적인 감정은 중요하지 않았다.서유는 코끝이 찡해지며 그의 품에 머리를 묻고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서유는 완전히 멍해졌다. 3년 전에 산 신혼집은 연지유에게 사준 것이 아닌가?감히 묻지 못한 그녀는 눈을 늘어뜨리고 그의 양복 셔츠를 움켜쥔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다행히 남자는 그녀의 서운한 마음을 알아차리고 다급하게 설명했다.“그 신혼집은 널 위해 산 거야. 그 웨딩드레스와 같이 샀어. 다른 사람과 아무 상관이 없는 오직 너의 것이야.”서유는 다이아몬드가 가득 박힌 값비싼 웨딩드레스를 떠올리며 마음속 실망의 감정을 조용히 떨쳐버렸다.이승하는 3년 전에 그녀를 위해 값비싼 웨딩드레스를 낙찰받은 적이 있다. 원래는 서유에게 청혼하고 싶었지만... 서유는 더 이상 과거의 일을 생각하고 싶지 않아 감정을 추스르고 그를 올려다보았다.“좋아요, 그럼 내가 신혼집 설계도를 선물할게요.”그녀는 말을 마치고 다시 그의 품에 안겨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이승하 씨, 인테리어 스타일에 대해 특별한 요구 사항이 있나요?”이승하는 그녀의 얼굴에 웃음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당황한 마음을 차츰 내려놓았다.“내 아내의 요구가 바로 나의 요구죠.”그 말은 그들의 신혼집을 그녀가 디자인하고, 그녀가 좋아하는 대로 꾸밀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스타일대로 꾸미든 그는 의견이 없었다.서유는 흠잡을 데 없는 남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참지 못하고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커피를 들고나온 노현정은 마침 이 장면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웃었다.“어머, 두 사람 이렇게 금슬이 좋은데 언제 결혼하는 거예요?”노현정에게 들킨 서유는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져서 이승하의 다리에서 내려오려다가 그에 의해 허리를 잡혔다.남자는 그녀의 작은 머리를 품에 안은 채 활짝 웃는 노현정을 향해 말했다.“오늘 혼담을 꺼내러 왔어요.”서유는 완전히 멍해졌다.어쩐지 그가 회사에 가지 않더라니, 알고 보니 혼담을 꺼내려고 했다니.‘이건... 너무 빠른데?’혼담을 꺼내러 왔다는 말에 노현정은 빙그레 웃으며 눈을 반짝였다.“정말요? 그럼 어서 가혜 씨를 불러올게요
두 사람이 의논하고 있을 때, 소수빈은 캐리어를 모두 유리 탁자 위에 놓고 소파에 있는 남자에게 보고했다.“대표님, 예물 준비는 다 마쳤습니다. 어르신 쪽에 말씀을 드렸고, 어떤 반응이든 상관하지 않고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이승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유가 정가혜와 이야기를 마치고 거실로 돌아왔을 때,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정가혜 앞으로 갔다.“가혜 씨, 저는 오늘 서유의 혼담을 꺼내러 왔어요. 가혜 씨는 서유 언니나 다름없으니 결혼 문제는 가혜 씨가 결정하시죠.”보통은 남자 쪽에서 정해놓고 혼담을 꺼내고 여자 쪽과는 기껏해야 의논하는 정도이다.그러다 보니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남녀가 헤어져 부부의 인연을 맺지 못하고 오히려 원수가 되는 경우가 많다.그러나 눈앞의 이 존귀한 남자는 모든 격식을 생략하고 당장 서유와 결혼식을 치르고 혼인신고를 할 수 있었는데도 예물을 들고 찾아왔다. 상의라는 단어조차 꺼내지 않고 아예 정가혜가 원하는 대로 결정하라고 한다.정가혜는 명목상 서유의 언니일 뿐 직접적인 혈연관계가 없었다. 그런데 이승하가 이렇게 정가혜를 존경하는 걸 보면 이 남자는 확실히 믿음직한 사람이었다.이승하에게 저도 모르게 호감이 생긴 정가혜는 얼른 손사래를 쳤다.“같이 상의하시죠.”그녀는 청하는 자세를 취하고 모두를 거실 소파에 앉게 한 다음 가정부에게 차를 준비하라고 했다.양측이 앉은 후 소수빈은 이승하의 지시에 따라 탁자에 다 놓을 수 없어 카펫 위에도 줄지어 놓은 캐리어를 열라고 명령했고 두 사람을 향해 공손하게 말했다. “이건 저희 대표님께서 준비한 예물입니다.”정가혜와 서유는 서로 눈이 마주쳤다. 방금 그들은 이 캐리어 안에 있는 것이 모두 현금인 줄 알았는데 안에 든 것이 모두 서류, 부동산 증명서, 은행 카드 등일 줄은 몰랐다.두 사람이 어리둥절해 하자 소수빈은 탁자 위에 놓인 캐리어를 가리키며 서유에게 말했다.“이것들은 모두 대표님의 개인 자산입니다. 전에 이미 서유 씨 명의로 넘어갔고 이제 이 문서들을
시종 입을 열지 않던 이승하는 부담스러워하는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어차피 지금 가문의 자산도 내가 번 거예요. 이씨 가문과 무관해요. 누구를 주든 그건 내 일이니 두 사람은 부담스럽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다만...”그의 시선은 서유의 작은 얼굴로 향했다.“앞으로 내 모든 자산은 서유 몫이에요.”그의 예물은 가문 것뿐만 아니라 그의 몸값, 향후 장부에 들어갈 모든 금액이었다.정가혜가 또 무슨 말을 하려는데 이승하가 말을 끊었다. “가혜 씨, 재산은 저에게 단지 몸 밖의 물건일 뿐입니다. 저는 개의치 않아요. 저는 서유를 위해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놓을 수 있으니 예물은 부담 없이 받으세요.”그의 진심을 느낀 정가혜는 더 이상 말리지 않고 물었다.“댁 어르신들이 아직 서유를 보지도 못했는데 동의하실까요?”이승하의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졌다.“이씨 가문은 제가 장악하고 있어요. 제 부인은 그들을 만날 필요 없어요.”그가 이 말을 할 때 온몸에서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풍겨 정가혜는 흠칫 놀랐다.하마터면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가 이씨 가문, 연씨 가문, 박씨 가문의 권력자라는 것을 잊을 뻔했다.이씨 집안 어른들이 서유를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그녀가 굽실거릴 필요가 없었다.이런 든든한 백이 있으니 서유가 시집가도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것이고 그의 사랑을 가득 받으며 살 수 있을 것이다.그 생각에 정가혜는 여전히 그녀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예물이 너무 많다고 하는 서유를 상관하지 않고 말했다.“좋아요, 그럼 이렇게 하죠.”정가혜가 결정을 내리고 혼담은 결정되었다.서유의 고민하던 작은 얼굴이 그대로 굳어졌다.두 사람은 예물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 서유를 고려하지 않고 곧 결혼 날짜까지 잡았다.결혼식 날짜는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 당일로 결정되었고 웨딩 사진 촬영과 같은 작은 일들도 순식간에 정했다.결혼식에 관해 모든 세부 사항을 결정한 후 소파 위의 남자가 소수빈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넌 여기 남아서 두 사람 보
이승하가 떠난 후, 서유는 급히 일어나 안방으로 정가혜를 찾으러 갔다.그녀가 화장대 앞에 앉아 서류뭉치를 보며 멍하니 보고 있는 것을 보고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가혜야, 뭐 보고 있는 거야?”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정가혜는 송사월이 전에 준 서류 봉투를 재빨리 집어 서랍에 넣었다.이 서류 봉투를 송사월은 서유의 결혼식 날 그녀에게 주라고 당부했고 정가혜는 여태까지 숨기고 있었다.서유는 정가혜가 당황하는 것을 보았으나 더이상 캐묻지 않고 말했다.“가혜야, 내가 옆에 있는 별장 샀어.”정가혜는 무슨 별장을 살 필요가 있냐고, 여기서 그녀와 함께 살면 된다고 말하려 했지만 곧 서유의 의도를 알게 되었다.서유는 이씨 가문 식구들이 그녀를 업신여길까 봐 스스로 별장을 마련해 시집가려는 것이다.부잣집에 시집가는 것도 매우 고민되는 일이다. 다행히 서유는 디자인에 재능이 있어서 그림 한 장으로 수 억 원을 벌 수 있다. 이것만으로도 많은 사람의 비난을 막을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정가혜는 아무런 재능과 능력도 없으니 사람들이 무시하는 클럽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다. 정가혜는 잠시 넋이 나갔다. 문득 자신은 부잣집에 시집갈 기회가 없다고 느껴졌다.고졸인 그녀가 클럽의 사장이 될 수 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그렇게 생각한 정가혜는 다시 자신감이 생겼고 하얀 손을 뻗어 서유를 옆에 앉혔다.“참, 혼수는 내가 우리 클럽 지분 50%를 너한테 줄 생각이야. 그동안 모은 유동자금, 부동산 등등도 모두 너한테 줄게.”서유는 정가혜가 결혼할 때 그녀에게 4천만 원 밖에 주지 못한 것이 생각났다.후에 심이준을 따라 워싱턴으로 갈 때 정가혜는 그 4천만 원에 돈을 보태 2억 원으로 만들어 슬그머니 돌려주기도 했다.언니가 남긴 프로젝트로 돈을 벌어 그 2억 원을 강제로 정가혜에게 송금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마 받지 않았을 것이다.이제는 전 재산을 털어 자신을 돕겠다는 정가혜의 말에 서유는 감동했다.그녀는 정가혜의 팔을 붙잡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