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의논하고 있을 때, 소수빈은 캐리어를 모두 유리 탁자 위에 놓고 소파에 있는 남자에게 보고했다.“대표님, 예물 준비는 다 마쳤습니다. 어르신 쪽에 말씀을 드렸고, 어떤 반응이든 상관하지 않고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이승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유가 정가혜와 이야기를 마치고 거실로 돌아왔을 때,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정가혜 앞으로 갔다.“가혜 씨, 저는 오늘 서유의 혼담을 꺼내러 왔어요. 가혜 씨는 서유 언니나 다름없으니 결혼 문제는 가혜 씨가 결정하시죠.”보통은 남자 쪽에서 정해놓고 혼담을 꺼내고 여자 쪽과는 기껏해야 의논하는 정도이다.그러다 보니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남녀가 헤어져 부부의 인연을 맺지 못하고 오히려 원수가 되는 경우가 많다.그러나 눈앞의 이 존귀한 남자는 모든 격식을 생략하고 당장 서유와 결혼식을 치르고 혼인신고를 할 수 있었는데도 예물을 들고 찾아왔다. 상의라는 단어조차 꺼내지 않고 아예 정가혜가 원하는 대로 결정하라고 한다.정가혜는 명목상 서유의 언니일 뿐 직접적인 혈연관계가 없었다. 그런데 이승하가 이렇게 정가혜를 존경하는 걸 보면 이 남자는 확실히 믿음직한 사람이었다.이승하에게 저도 모르게 호감이 생긴 정가혜는 얼른 손사래를 쳤다.“같이 상의하시죠.”그녀는 청하는 자세를 취하고 모두를 거실 소파에 앉게 한 다음 가정부에게 차를 준비하라고 했다.양측이 앉은 후 소수빈은 이승하의 지시에 따라 탁자에 다 놓을 수 없어 카펫 위에도 줄지어 놓은 캐리어를 열라고 명령했고 두 사람을 향해 공손하게 말했다. “이건 저희 대표님께서 준비한 예물입니다.”정가혜와 서유는 서로 눈이 마주쳤다. 방금 그들은 이 캐리어 안에 있는 것이 모두 현금인 줄 알았는데 안에 든 것이 모두 서류, 부동산 증명서, 은행 카드 등일 줄은 몰랐다.두 사람이 어리둥절해 하자 소수빈은 탁자 위에 놓인 캐리어를 가리키며 서유에게 말했다.“이것들은 모두 대표님의 개인 자산입니다. 전에 이미 서유 씨 명의로 넘어갔고 이제 이 문서들을
시종 입을 열지 않던 이승하는 부담스러워하는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어차피 지금 가문의 자산도 내가 번 거예요. 이씨 가문과 무관해요. 누구를 주든 그건 내 일이니 두 사람은 부담스럽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다만...”그의 시선은 서유의 작은 얼굴로 향했다.“앞으로 내 모든 자산은 서유 몫이에요.”그의 예물은 가문 것뿐만 아니라 그의 몸값, 향후 장부에 들어갈 모든 금액이었다.정가혜가 또 무슨 말을 하려는데 이승하가 말을 끊었다. “가혜 씨, 재산은 저에게 단지 몸 밖의 물건일 뿐입니다. 저는 개의치 않아요. 저는 서유를 위해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놓을 수 있으니 예물은 부담 없이 받으세요.”그의 진심을 느낀 정가혜는 더 이상 말리지 않고 물었다.“댁 어르신들이 아직 서유를 보지도 못했는데 동의하실까요?”이승하의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졌다.“이씨 가문은 제가 장악하고 있어요. 제 부인은 그들을 만날 필요 없어요.”그가 이 말을 할 때 온몸에서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풍겨 정가혜는 흠칫 놀랐다.하마터면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가 이씨 가문, 연씨 가문, 박씨 가문의 권력자라는 것을 잊을 뻔했다.이씨 집안 어른들이 서유를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그녀가 굽실거릴 필요가 없었다.이런 든든한 백이 있으니 서유가 시집가도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것이고 그의 사랑을 가득 받으며 살 수 있을 것이다.그 생각에 정가혜는 여전히 그녀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예물이 너무 많다고 하는 서유를 상관하지 않고 말했다.“좋아요, 그럼 이렇게 하죠.”정가혜가 결정을 내리고 혼담은 결정되었다.서유의 고민하던 작은 얼굴이 그대로 굳어졌다.두 사람은 예물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 서유를 고려하지 않고 곧 결혼 날짜까지 잡았다.결혼식 날짜는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 당일로 결정되었고 웨딩 사진 촬영과 같은 작은 일들도 순식간에 정했다.결혼식에 관해 모든 세부 사항을 결정한 후 소파 위의 남자가 소수빈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넌 여기 남아서 두 사람 보
이승하가 떠난 후, 서유는 급히 일어나 안방으로 정가혜를 찾으러 갔다.그녀가 화장대 앞에 앉아 서류뭉치를 보며 멍하니 보고 있는 것을 보고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가혜야, 뭐 보고 있는 거야?”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정가혜는 송사월이 전에 준 서류 봉투를 재빨리 집어 서랍에 넣었다.이 서류 봉투를 송사월은 서유의 결혼식 날 그녀에게 주라고 당부했고 정가혜는 여태까지 숨기고 있었다.서유는 정가혜가 당황하는 것을 보았으나 더이상 캐묻지 않고 말했다.“가혜야, 내가 옆에 있는 별장 샀어.”정가혜는 무슨 별장을 살 필요가 있냐고, 여기서 그녀와 함께 살면 된다고 말하려 했지만 곧 서유의 의도를 알게 되었다.서유는 이씨 가문 식구들이 그녀를 업신여길까 봐 스스로 별장을 마련해 시집가려는 것이다.부잣집에 시집가는 것도 매우 고민되는 일이다. 다행히 서유는 디자인에 재능이 있어서 그림 한 장으로 수 억 원을 벌 수 있다. 이것만으로도 많은 사람의 비난을 막을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정가혜는 아무런 재능과 능력도 없으니 사람들이 무시하는 클럽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다. 정가혜는 잠시 넋이 나갔다. 문득 자신은 부잣집에 시집갈 기회가 없다고 느껴졌다.고졸인 그녀가 클럽의 사장이 될 수 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그렇게 생각한 정가혜는 다시 자신감이 생겼고 하얀 손을 뻗어 서유를 옆에 앉혔다.“참, 혼수는 내가 우리 클럽 지분 50%를 너한테 줄 생각이야. 그동안 모은 유동자금, 부동산 등등도 모두 너한테 줄게.”서유는 정가혜가 결혼할 때 그녀에게 4천만 원 밖에 주지 못한 것이 생각났다.후에 심이준을 따라 워싱턴으로 갈 때 정가혜는 그 4천만 원에 돈을 보태 2억 원으로 만들어 슬그머니 돌려주기도 했다.언니가 남긴 프로젝트로 돈을 벌어 그 2억 원을 강제로 정가혜에게 송금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마 받지 않았을 것이다.이제는 전 재산을 털어 자신을 돕겠다는 정가혜의 말에 서유는 감동했다.그녀는 정가혜의 팔을 붙잡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
서유는 코웃음을 쳤다.“심이준 씨, 내가 지현우한테 납치당한 걸 알았으면서 왜 나 구하러 오지 않았어요?”심이준은 얼굴에 묻은 먼지를 닦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어차피 못 이기는 데 구하러 가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잖아요?”게다가 천하의 JS 그룹 대표가 가만히 있을 리도 없고 이런 절호의 기회는 이승하에게 맡기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닌가?서유는 이미 할 말을 잃었다.“그래요, 자기 자신을 아주 잘 알고 있네요.”심이준은 여전히 대칭적인 미소를 지으며 경직된 입꼬리를 잡아당겼다.“자각지명은 내 사람됨의 기본 수양이죠!”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맞은편에서 갑자기 한 무리의 동남아 노동자들이 나타나 그가 있는 방향을 가리키며 목청을 돋우어 크게 한번 소리쳤다!“바로 저 사람이야! 계속 우리 월급을 안 주고 있는 자가!”“얘들아, 손에 든 삽 들고 나 따라와. 가서 쳐 죽이자!”곧이어 서유는 저편에서 심이준이 쏜살같이 달리는 소리를 들었다.“서유 씨를 도와 현장 답사를 다니는 지난 반년 동안 난 이 사람들에게 수천 번이나 구타 당했어요!”“잘 기억해요. 내가 돌아간 후에 반드시 내 황금비율에 따라 황금 몸을 만들어줘야 해요!”그리고 뚜뚜 신호가 끊어진 소리가 들렸다. 지금쯤 땅바닥에 짓눌려 마찰을 당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이미 빠져나간 건지 알 수 없었다.서유는 휴대폰을 손에 쥐고 생각한 후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아직 답사하지 못한 공사장이 얼마나 남았어요?]심이준이 답장을 보내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예상 밖으로 1초 만에 메시지를 보냈다.[아직 마지막 하나 남았어요. 그 프로젝트는 서유 씨가 직접 가야 할 것 같아요.]서유는 왜 직접 가야 하냐고 물었지만 답장 대신 깨진 문자만 보내왔다.이에 서유는 심이준이 분명 사람들에게 붙잡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서유는 그의 말투를 빌어 메시지를 보냈다.[너무 슬퍼하지 말아요.]이어 서유는 채팅 기록을 뒤적거리다가 한 달 새 8개국의 공사현장을 돌아다닌 심이준의 모습에
서유는 피식 웃으며 연이를 다시 설득하려고 할 때, 조지가 메시지를 보내왔다.[서유 씨, 안심하세요. 제가 연이를 달래서 학교에 보낼게요.]서유도 조지에게 답장했다.[선생님, 만약 연이가 정말 지현우와 더 함께 살고 싶어 한다면 연이가 다치지 않도록 잘 보살펴 주세요. 부탁드릴게요.]조지는 곧 메시지를 보내왔다.[사실 현우는 연이를 아주 아껴요. 안심하세요]서유는 이 짧은 글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네.]라고 답장했다.지현우는 처음에는 연이에게 잘 대해주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그 어린아이를 받아들인 것 같다.어쩌면 연이가 곁에 있다면 지현우는 언니를 잃은 슬픔에서 서서히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서유는 그런 생각을 하며 책상 앞에 앉아 잠시 멍하니 있다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일어나 정가혜를 찾았다.지난 반년 동안 두 사람은 서로 만나지 못했다. 모처럼 서유가 돌아와서 정가혜도 들떠 있었다.그녀는 서유를 끌고 푹신한 침대 위에 누워 팩을 하면서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3년 전, 정가혜가 시집가던 날처럼 두 사람은 침대에 누워 과거와 미래에 관해 이야기했다.다만, 그때는 정가혜가 시집갔지만 지금은 서유로 바뀌었다. 그리고......예전에는 이승하와 결혼하지 말라고 설득했던 정가혜는 지금 완전 이승하의 편이 되어 줄곧 좋은 말만 하고 있었다.앞으로도 이승하에게 잘해주어야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오래갈 수 있다고 계속 설득하기도 했다.서유는 정가혜의 수다를 들으면서 천장을 쳐다보며 달콤하게 웃었다.순간 자신이 다시 태어난 의미가 무엇인지 깨달았다.그녀의 아쉬움을 달래주고 이승하도 자신을 사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정가혜 곁에 돌아와 가족의 배려와 따뜻함을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포기하고 모습을 감춘 소년까지.정가혜는 서유가 자신의 말을 받아주지 않자 고개를 돌려 물었다.“서유야, 무슨 생각해?”서유는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승하 씨가 보낸 꽃이 모두 시들었는데 왜 아직 안 버렸
서유는 이승하의 할아버지를 본 적은 없지만 그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이태석이 집권했을 때 유럽 4대 가문은 모두 물러났다고 한다.그의 막강한 영향력으로 이씨 가문은 아시아 시장, 나아가 세계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다.그렇게 막강한 인물이 갑자기 서유를 찾아온 것은 분명 결혼 때문일 것이다.서유는 자신을 찾아온 목적을 어렴풋이 짐작하고는 긴장하고 두려웠지만 침착한 척하며 계단을 내려갔다.초대받지 않고 들어온 이태석은 잘 짜인 양복에 용머리 지팡이를 짚고 늠름한 모습으로 거실에 서 있었다.노인은 일흔다섯 살이지만 백발홍안이고 정정하며 온몸에 산천을 삼킨 기운과 고상한 선비의 냉담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서유는 그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그가 주는 압박감을 느낄 수 있었지만 용기를 내어 손바닥을 꼭 쥐고 그에게 다가갔다.“처음 뵙겠습니다. 어르신.”그녀가 예의 바르게 부르자 이태석은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던 시선을 거두어 그녀에게로 옮겼다.그 온화하고 침착한 눈은 서유를 훑어보기보다는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고 있는 것 같았다.서유는 그의 발바닥에 찬 기운이 도는 것을 보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온몸의 모공 하나하나가 긴장되는 것 같았지만 얼굴에는 조금도 티를 내지 않았다.그녀는 이태석이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애써 침착한 척 그에게 앉으라고 청했다.“어르신, 여기 앉아서 얘기 나누시죠.”그녀는 청하는 자세를 취하여 이태석을 소파에 앉히려고 했지만 그는 손을 내흔들었다.“아니네, 몇 마디만 하고 가겠네.”이태석의 목소리는 세월의 변화무쌍함을 담고 있었지만 여전히 웅장하고 힘차 감히 그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는 기세를 갖고 있었다.서유는 할 수 없이 내민 손을 거두어 키가 매우 큰 노인을 올려다보았다.“어르신께서 분부할 말씀이 무엇인지요?”그녀는 자신에게 무슨 일로 왔는지, 무슨 말을 하려고 왔는지 묻지 않고 분부할 일이 있냐고 물으면서 충분히 존중해 주었다.원래는 서유를 안중에도 두지 않던 이태석은 그 말을 들은 후
서유는 심장이 쫄깃하더니 서서히 눈꺼풀을 늘어뜨렸다. 고아가 어떤 신분 배경이 있단 말인가...이태석은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을 보고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내가 조사해보니 자네는 고아로 자랐더군. 후에 언니를 찾았다고는 하지만 한낱 디자이너 출신이 어떻게 내 손자와 어울릴 수 있겠나?”신분을 놓고 본다면 그녀는 확실히 이승하에 어울리지 않았다.“디자이너일 뿐이지만 제 언니는 자신의 분야에서 꽤 뛰어난 성과를 거뒀어요.”그녀의 출신을 뭐라 하는 건 괜찮지만 자신의 언니가 비웃음 받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이태석은 일개 디자이너를 경멸하지만 서유와 더 이상 다투지 않고 강조했다.“자네도 말했듯이 그건 자네 언니가 일군 성과네. 자네랑 아무 상관 없는.”그의 뜻은 서유 언니의 성과가 곧 서유의 성과가 아니란 뜻이다. 이 점은 그녀도 동의하는 바였다.하지만 이태석은 서유의 뜻을 오해했다. 서유는 그저 자기 언니를 위해 한마디 했을 뿐이다.서유가 입을 열어 설명하려 했지만 이태석은 첫 번째 문제를 뛰어넘어 두 번째 손가락을 들었다.“두 번째 문제, 자네는 어느 대학을 졸업했나?”이 문제는 서유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직격 되어 그녀의 안색이 더욱 굳어졌다.말문이 막힌 그녀를 본 이태석이 대신 대답했다.“서울대도 못 가고 보통 대학을 졸업했더군. 내 손자는 어린 나이에 하버드대에 입학했어. 그런 자네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서유의 손톱은 손바닥에 깊이 박혔다. 지금의 그녀는 이태석의 카리스마에 겁을 먹은 것이 아니라 이 두 가지 질문으로 인해 깊은 자괴감에 빠졌기 때문이다.그녀의 묵묵부답에 이태석은 오히려 온화하고 점잖은 표정을 지었다.“서유 양, 우리 집안에 시집오는 여자들은 모두 명문가에서 태어났어. 그런데 자네의 신분은 보통 집안이라고 할 수도 없어.”“내가 보통 집안을 경멸하는 것은 아니네. 만약 자네의 노력으로 높은 학벌을 얻었다면 인정할 수 있어. 적어도 우리 가문의 자손들이 좋은 유전자를 이어갈 수 있도록 보장할 수
이승하의 보름이 넘는 보살핌 덕에 겨우 혈색을 되찾은 서유의 얼굴색이 순간 하얗게 질렸다.그녀는 몸을 떨더니 발을 헛디뎌 뒤로 물러섰고 하얀 손가락은 더욱 통제 불능이 되어 아랫배를 어루만졌다.그녀와 이승하는 며칠 동안, 몇 번이나 계속 잠자리를 가졌지만 배에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정말 그녀는 생육 능력을 잃었을까?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을 때, 이태석이 덤덤하게 귀띔했다.“우리 가문의 권력은 반드시 자손이 물려받아야 하네. 그런데 자네는 아이도 낳을 수 없으면서 어찌 감히 우리 가문에 발을 들이겠다는 건가?”이씨 가문에서 출신과 학력도 보잘것없는 데다 아이까지 못 낳는 여자를 며느리로 들였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큰 비웃음을 살 것이다.이태석은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는 것을 눈 뜨고 지켜볼 수 없었다.그는 말을 마친 뒤 양복 주머니에서 미리 작성한 수표를 꺼내 서유에게 건넸다.“승하가 자네와 결혼하려고 우리 가문 전체 자산을 예물로 가져왔지. 승하가 준 물건은 돌려받지 않을 거네. 그리고 이 수표까지 주겠네. 금액은 자네가 원하는 대로 쓰게. 유일한 조건은 내 손자를 떠나는 것이야.”이태석이 인내심 있게 지금까지 서유와 말한 것은 그녀를 떠나게 하기 위해서였다.서유가 반박할 수 없는 약점 몇 개를 내걸었으니 일이 다 된 것 같아 수표를 주고 이야기를 마치려 했다.그러나 서유는 그 수표를 받은 후 반으로 찢어 돌려주었다.“어르신, 이 수표로 저를 쫓아내시면 손자의 마음을 상하게 할 뿐만 아니라 저 또한 이씨 가문의 전직 권력자를 존경하지 못하게 될 겁니다.”덤덤하게 말을 마친 그녀는 점차 혈색을 되찾았다.“어르신이 말씀하신 출신, 학벌 그리고 아이에 관한 일 때문에 저도 승하 씨를 거절한 적이 있어요. 하지만 승하 씨는 개의치 않았어요. 아이는 필요 없고 저만 원한다고 했어요.”이태석은 총명한 사람이라 그녀의 말 속에 숨은 뜻을 자연스럽게 알아챘다. 이승하가 그녀를 매우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 아니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하지만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