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하면 네 생존 확률은 10%에 불과해. 지금 아이를 꺼낸다면 30%까지는 가능해.” 이승하는 다른 손으로 서유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그녀의 눈썹, 이목구비, 얼굴선을 섬세히 그렸다. “서유야, 난 네가 다시 떠나는 걸 견딜 수 없어. 아이는 신경 쓰지 말고, 네 목숨부터 살려야 해. 알겠지?” 그의 말을 들은 서유는 온몸이 얼음 속으로 떨어진 듯했다. 자신의 생존 가능성이 10%와 30%로 나뉜다는 말은, 결국 어떻게 해도 죽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었다. 자신도, 아이도 모두 잃을 수 있다는 생각에 절망감이 밀려왔다. 생사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던 그녀였지만 죽음 자체는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승하... 그녀는 촉촉해진 눈망울을 들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죽는 건 괜찮아요. 그런데... 당신을 두고 떠나는 건 정말 싫어요.” 그와 헤어질 생각만으로도 서유는 눈물이 터져 나왔다. 뺨 위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며 이승하의 손등에 닿았다. 그 따뜻한 눈물은 마치 그의 목을 조이는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그는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에 가슴이 죄어오는 고통을 느꼈다. 이승하는 그 아픔을 견디며 그녀의 손을 자신의 심장 위로 가져갔다. 결코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강하게 말했다. “난 네가 죽게 놔두지 않을 거야.” 그의 허락 없이는 저승사자조차 그녀를 데려갈 수 없었다. 설령 그녀를 데려간다 해도, 그는 그 뒤를 따라 지옥의 악령이 되어 모든 저승사자를 무너뜨릴 것이다. 이승하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서유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 심장 이식도 했고, 지금은 임신성 고혈압에 혈액 응고 장애까지 있어요. 솔직히 내가 살 확률이 얼마나 되겠어요. 그래서...” 그녀는 그의 손을 밀어내며 자신이 부풀어 오른 배 위에 올렸다. 마치 어떤 결심을 한 듯, 담담하게 이승하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내가 죽을 가능성이 높다면 차라리 아이를 살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모든 어머니는 아이를 먼
이승하는 최고 수준의 산부인과 전문의를 찾아 서유의 상태를 다시 평가하도록 했다. 그녀와 아이 모두를 살릴 방법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의사들이 내놓은 결과는 이 병원의 이 원장이 말한 것과 동일했다. 그는 이번엔 조지와 워싱턴 병원의 원장에게 보고서를 보내 자문을 구했다. 두 사람 모두 보고서를 검토한 후, 임신성 고혈압으로 수술을 할 경우 대량 출혈, 심부전, 뇌출혈 등의 위험이 크다고 말했다. 서유는 게다가 심장 이식 수술을 받은 적이 있어, 결과는 그야말로 생사의 기로였다. 조지와 워싱턴 병원 원장은 산부인과 수술 전문가가 아니었기에, 다른 권위 있는 전문가를 찾아 이승하에게 추천했다. 그 전문가는 이승하를 만난 자리에서 병원의 이 원장과 함께 힘을 합쳐 30%의 성공 가능성을 40%로 끌어올리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조차도 수술의 위험성을 인정하며, 확실한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고 했다. 결국 선택지는 30% 또는 40%의 가능성뿐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둘 다 죽음을 맞이할 가능성이 크다. 이승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그는 의사들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수술을 완벽하게 성공시켜야 한다고 요구하며, 그렇지 못하면 그들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위협적인 말을 남겼다. 그의 강렬한 압박에 의사들은 어쩔 수 없이 수술 전 또 한 번의 심도 있는 평가 회의를 열었다. “임 선생님, 이번 수술의 집도는 임 선생님이 맡아줘요. 아이를 꺼낼 때 아이의 생명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길 바랍니다. 저는 추가로 다른 의사를 대기시켜 만일의 상황에 즉시 응급 처치가 가능하도록 하겠습니다.” “원장님, 산모의 현재 상태로는 첫 칼을 대는 순간 대량 출혈이 발생할 가능성이 큽니다. 저는 가능한 한 신속히 지혈하며 산모를 살리는 데 집중할 겁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이가 산소 부족으로 사망할 가능성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지만은 없어요. 지금은 아이의 생사보다 산모의 생명을 먼저 구하
문밖에 조용히 서 있던 이승하는 서유가 오열하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무너졌다. 아내와 아이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그에게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는 남자였다. 이 모든 것을 감당하는 것은 그의 몫이었다. 다만 그가 바라는 건 선택의 끝에서 아내가 무사히 살아남는 것뿐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의 삶에 남은 의미도 없을 것이다. 서유는 아기 옷을 품에 안고 여자아이 방 안에서 눈물을 머금은 채 잠들었다. 이승하는 서유 곁에 앉아 밤새도록 그녀의 등을 지켜보며 단 한숨도 자지 못했다. 수술 준비 과정에서 서유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병상에 기대어 한 손은 배를 쓰다듬고, 다른 한 손은 아기 옷을 움켜쥔 채, 마치 영혼 없는 도자기 인형처럼 고요했다. 살아 있으나 쉽게 부서질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이승하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다. 그는 틈틈이 그녀를 안아주고, 입을 맞추고, 쓰다듬었다. 그녀의 생기를 되찾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수술 당일이 되어서야 서유는 이승하의 손을 붙잡았다. 거의 간청하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나 10% 가능성에 걸고 싶어요. 아이를 낳게 해줘요. 제발, 제발 부탁이에요...” 이승하는 자신을 꽉 붙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며 마음이 무너졌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손목을 반대로 잡고는 피곤으로 붉어진 눈으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서유야, 나는 그 10%에 모든 걸 용기가 없어.” 그 한마디가 서유의 희망을 완전히 부숴버렸다. 그녀는 마치 공기가 빠진 풍선처럼 힘을 잃고, 더 이상 날아오를 힘조차 없었다. 서유는 조금씩 손을 풀고 체념한 표정으로 수술복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수술대에 누워 의사들이 자신을 수술실로 데려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수술실 문이 닫히기 직전, 이승하는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서유야, 걱정 마. 넌 절대 무사할 거야. 내가 그렇
수술 도구를 준비하던 두 간호사가 고개를 돌리자 환자가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한 명은 그녀를 쫓아갔고, 다른 한 명은 이 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이 원장은 순간 놀랐지만 곧바로 탈의실 문을 두드렸다. “대표님, 큰일 났습니다! 사모님께서 갑자기 수술실에서 도망쳤습니다...” 멸균복을 막 갈아입은 이승하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탈의실 문을 힘차게 열고 바람처럼 빠르게 서유를 찾으러 뛰쳐나갔다. 한편, 간호사에게 쫓기던 서유는 비틀거리며 도망치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사람과 부딪혔다. 부딪힌 남자는 휘청거리는 서유를 붙잡아 그녀를 지탱해 주었다. 이어 차가운 눈빛으로 당황한 채 뒤돌아본 서유를 응시하며 물었다. “왜 도망치는 거예요?” 부딪힌 사람이 육성재임을 확인한 서유는 급히 죄송하다고 말한 뒤 그를 피해 다시 달리려 했다. 그러나 두 발짝도 가지 못해 육성재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 당겼다. “누구를 피해 다니는 건데요?” 서유가 고개를 돌리자 마침 간호사가 복도를 가로질러 자신에게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황급히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육성재의 손은 강하게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 서유가 화가 나서 막 욕이라도 하려던 찰나, 육성재는 다가오는 간호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상황인진 모르겠지만, 저 간호사가 당신을 찾는 건 확실해 보이네. 내가 도와줄까요?” 서유는 잠시 망설였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육성재가 간호사를 막아줄 줄 알았던 그녀는 뜻밖에도 그가 몸을 숙여 자신을 번쩍 안아 들고 병원 밖으로 빠르게 걸어 나가기 시작하자 깜짝 놀랐다. 간호사가 병원 밖으로 나왔을 때, 서유는 이미 차 안에 있었다. 그녀는 급히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원래는 간호사가 쫓아오고 있는지 확인하려 했지만, 그 순간 병원 입구 계단 위에 서 있는 이승하가 보였다. 그는 멸균복을 입고 있었고, 높고 날카로운 자세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차는 곧 출발했고 서유는 창문에 몸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이미 수술복은 벗은 상태였고, 그의 모습은 마치 지옥에서 온 사신 같았다. 냉랭한 기운이 온몸에 맴돌았고 얼굴은 창백하며 눈썹과 눈매에 서린 억눌린 분노는 더 이상 감출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조수석 쪽으로 걸어가 검은 창문을 통해 차 안에 앉아 있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스스로 내릴래? 아니면 내가 이 차를 부수고 널 데리고 나갈까?” 창밖에서 분노로 이글거리는 남자를 바라보던 서유는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손을 들어 문을 열었다. 아직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남자의 차가운 손가락이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만약 그녀가 임신 중이지 않았다면, 아마 그 손에 의해 거칠게 끌어내려졌을 것이다. 그는 서유의 손목을 꽉 잡은 채 조심스럽게 차에서 내리도록 도왔다. 그리고 나서 냉혹한 눈빛으로 운전석에 앉아 있는 육성재를 한번 쏘아보았다. 두 남자의 시선이 부딪히는 순간, 육성재는 이승하의 눈에 서린 살기를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살기는 순식간에 사라졌고, 이승하는 서유를 끌고 부가티 쪽으로 걸어갔다. 이승하는 분노를 꾹꾹 참아내며 조수석 문을 열었다. 서유가 자리에 앉자, 몸을 숙여 그녀의 손에서 안전벨트를 가져와 직접 채워주었다. 턱선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는 이승하의 모습을 바라보던 서유는 입을 열려 했지만, 남자는 이미 몸을 일으켜 문을 닫고 운전석으로 향했다. 그는 차에 올라타 그녀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은 채 차를 출발시켰다. 운전은 느리고도 산만했으며, 목적지도 없어 보였다. 길 잃은 듯한 이승하를 지켜보던 서유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보, 내가 수술대에 누워 있을 때 아기가 움직였어요. 정말 격렬하게 움직였어요, 마치 저항하는 것처럼. 그래서... 그래서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어요.” 그녀의 말에도 이승하는 여전히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서유는 고개를 숙이며 작게 말했다. “미안해요. 내가 수술을 하고 싶지 않아
이승하는 그녀의 품에 안긴 순간, 모든 감정을 내려놓고 날카로운 얼굴을 서유의 목덜미 깊숙이 파묻었다. 마치 마지막 이별을 준비하듯 온 힘을 다해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무 말 없이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로, 창밖에서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며 곧 유리창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며칠 동안 제대로 잠을 못 잔 이승하는 핏발이 선 눈으로 창문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바라보았다. 입가를 힘없이 올려 보였지만, 그의 마음속은 비에 가로막힌 길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10%와 30%의 가능성 사이에서 10%를 선택했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키기도 전에, 그날 오후 이승하가 서유를 데리고 블루리도로 돌아가던 길에 서유가 갑작스럽게 출혈을 겪었다. 처음엔 출혈량이 많지 않았지만, 서유가 어지럼증을 느껴 신호등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고 나서야 이상함을 느꼈다. 그녀는 아래를 내려다보았고 이미 많은 피가 흘러나와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이승하를 잡으려 했지만, 눈앞이 깜깜해지면서 그의 옷자락만 겨우 닿은 채 앞으로 쓰러졌다. “서유야!” 귓가엔 이승하의 겁에 질린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서유는 말 한마디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사랑한다는 말도 하지 못한 채, 의식을 잃고 말았다. 이승하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의식을 잃은 서유를 한 손으로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핸들을 움켜쥔 채 병원으로 전속력으로 달렸다. 이미 병원에 대기 중이던 이 원장은 이승하의 수술 철회 명령을 받지 못했기에 계속 수술실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온몸이 빗물에 젖은 이승하가 피로 물든 서유를 안고 병원에 뛰어들었다. “뭘 멍하니 있어요! 빨리 구하지 않고 뭐 하는 겁니까!” 이승하의 분노에 이 원장은 정신을 차리고, 즉시 모든 의료진을 소집해 수술실로 향했다. 자신도 서유를 넘겨받으려 다가갔지만, 이승하는 그녀를 넘기지 않고 직접 수술실로 뛰어들었다. 그가
“그리고... 첫 수술을 시작할 때부터 산모가 이미 대량 출혈을 겪었습니다. 산모를 살리기 위해 분주한 사이에 태아는 자궁 안에서 너무 오래 있었고, 꺼냈을 땐 이미 숨을 쉬지 않았습니다...” 무릎 위에 팔꿈치를 대고 상체를 약간 앞으로 기댄 이승하는 의사의 말이 이어질수록, 눈빛에서 서늘한 살기를 드러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의사의 목을 움켜쥐고 단숨에 벽으로 밀쳤다. “뭐라고?” 놀란 남자 의사는 공중에 들어 올려진 채 온몸을 떨었지만, 이승하의 압도적인 기세에 짓눌려 두려움을 억누르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산... 산모가 대량 출혈로... 태아는 심장 박동은 약했지만... 숨을 쉬지 않았고... 거의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승하의 심장이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마치 깊은 절벽 아래로 떨어진 것처럼 주위가 적막에 휩싸였다. 온 세상이 멈춘 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귓가에는 죽음의 울림만이 맴돌았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눈앞이 캄캄해지며 바닥없는 절벽으로 떨어졌고, 다시 누군가가 손을 붙잡아 절벽 아래에서 간신히 끌어올리는 듯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이승하는 눈빛이 핏빛으로 물든 채 의사를 벽에 내던지고, 맹렬히 걸음을 옮겨 수술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수술실 안에서는 여전히 응급처치가 진행 중이었다. 수술대 아래로 붉은 피가 쉴 새 없이 흘러내렸고, 공기 중에는 진한 피 냄새가 가득했다. 차가운 수술실 조명 아래, 핏기 하나 없는 얼굴이 비쳤다. 이승하는 그 많은 피를 보자마자 시야가 좁아지며 심장이 강렬한 공포를 느꼈다. 그는 그렇게 많은 피를 본 적이 없었다. 사람 몸에서 그렇게 많은 피가 쏟아져 나올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마치 그녀의 모든 피가 미친 듯이 작은 몸에서 솟구쳐 나오는 것 같았다. 그는 흐르는 피를 보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도저히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문 앞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은 세상에 버려진 사람처럼 쓸쓸하고
고개를 돌리니 의약 상자를 든 하석준이 이쪽으로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이승하는 그의 손목을 잡아당겨 재빨리 수술실로 들어갔다. 서유의 상태를 보니 심정지 상태일 뿐 아직 뇌사 단계는 아니었다. 하석준은 빠르게 지혈겸자를 꺼내 들고 지혈을 시작했다. “다들 모두 나가 있어.”“당장 수술실 깨끗하게 정리하고 나머지 의사들은 전부 날 도와.”지혈을 하면서 하석준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는 임 선생한테 명했다.“지혈을 마치면 얼른 심폐소생술 시작해. 산모가 심장 박동을 회복할 때까지!”“네. 알겠습니다.”하석준이 도착한 후, 수술실 전체는 다시금 정신없이 바삐 돌아쳤고 그들은 최선을 다하여 생사를 넘나들고 있는 서유를 구했다. 한편, 이승하와 급히 달려온 정가혜는 수술실을 나갈 생각이 없었다. 서유 곁에 있고 싶은 마음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데 옆에 있던 이연석이 두 사람을 강제로 끌고 나갔다. 그들이 넋이 나간 채 수술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 차가운 얼굴을 한 이태석이 긴 복도를 지나 다른 문을 통해 수술실로 들어갔다.“하 박사, 아이부터 구하시게.”서유를 구하고 있던 하석준은 이태석의 소리에 어안이 벙벙해졌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이보다 어른이 먼저 아닌가?”“그렇긴 하지만 서유는 이미 죽었네. 죽은 사람을 구하는 데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태아의 심장은 아직 뛰고 있어. 호흡이 없을 뿐이지. 하 박사 자네의 능력이라면 반드시 아이를 살릴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네.”“일시적인 심정지일 뿐이야. 제때 심폐소생술을 한다면 살릴 수 있단 말일세.”“피가 멈추지 않고 있지 않나. 살려도 오래 살지는 못할 걸세. 차라리 그 시간에 아이를 구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마음이 흔들렸지만 하석준은 손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지혈했다. “하 박사, 자네와 난 오래된 친구일세. 내가 증손자를 이리 잃는 것을 자네도 바라지 않겠지.”그 말을 들으며 한참을 망설이던 하석준은 결국 지혈겸자를 임
그가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입을 열었다.“난 죽는 게 두려운 사람이 아니었어. 그런데 당신을 만난 후부터 죽는 게 그렇게 겁이 나더라.”죽는 게 두려웠기 때문에 전 서계를 돌아다니며 의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원하는 결과는 끝내 얻지 못하였고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기만 했다. 겁이 난 서유는 그를 꼭 껴안았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당신한테는 내가 있고 우리 하준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절대 죽으면 안 돼요. 당신이 죽으면 우리는 어떡하라고요?”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미 5년을 버텨온 그는 점점 더 통증이 심해졌고 하느님이 조금씩 조금씩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통이 전해지는 횟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통증은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칩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것 같았다. 다만 떠나기 전에 모든 일을 다 마치고 가야 하는데...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품 안에 있는 여인이 가장 걱정되었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깊이 파고들었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만큼 뜨겁고 짜릿한 느낌, 슬픈 마음을 녹일 수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은 뜨겁게 몸을 섞으며 하나가 되었다. 그녀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쯤, 두 사람의 아찔한 행위가 끝이 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소중한 물건을 끌어안듯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유람선 안으로 들어온 희미한 달빛을 빌려 그가 세월의 흔적도 없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다음 생에도 당신이 내 여자였으면 좋겠는데. 당신의 다음 생은 송사월한테 주기로 약속했었나?”아직 잠들지 않은 서유가 그의 가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번 생에 당신이 나보다 먼저 가면 나 절대 당신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다음 생에 당신 안 만날 거라고요.”그가 슬픈 표정을
그 당시 풋풋한 어린 소녀였던 연이는 심우주가 자신과 같은 학교에 간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교과서는 정말 내가 가져오지 않았어. 아마도 애들이 가져간 것 같은데 내일 학교에 가면 돌려주라고 할게.”연이도 하준이와 마찬가지로 학교에서는 짱이었다. 친구를 괴롭히는 일은 없었지만 너무 인기가 많아서 여자아이들이 그녀를 짱으로 받들고 남자아이들도 하루 종일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꼬리를 흔들었다.반면, 심우주는 착실히 공부만 했고 가끔 연이의 괴롭힘에 그는 반격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였기 때문에 심우주는 그런 그녀가 얄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가 제멋대로 하는 걸 사랑스럽게 지켜보았았다. 다들 오냐오냐하니까 연이는 학교에서도 늘 제멋대로였다. 그러나 그 당시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던 심우주는 연이의 그런 모습에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다. 잠시 후, 어른들에게 차례로 작별 인사를 마친 이하준이 차에 올라탔다. 늘 차갑기만 하던 아이가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차에서 내려와 서유를 덥석 끌어안았다.“엄마, 몸 잘 챙겨요.”갑작스러운 아이의 행동에 서유는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하준아, 엄마 아빠는 집에서 우리 하준이 기다리고 있을게.”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손을 풀고 옆에 있던 이승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아빠, 제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아빠도 절 이길 수 없을 거예요.”입꼬리를 살짝 올리던 그가 손을 뻗어 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남의 칼에 찔리기 쉬운 법이야. 자세를 낮추는 법을 배우거라.”아빠의 충고를 아이는 가슴 깊이 새겼다.“네, 그렇게 할게요.”이내 그가 허리춤에서 ‘S'라고 새겨진 금빛 칼을 꺼내 아이한테 건네주었다. “돌잡이 때 네가 잡은 칼이야. 이제는 네가 갖고 있어.”전에 소지섭한테서 아빠의 이야기를 들은
서유는 어쩔 수 없이 의사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문밖을 지키고 있던 소지섭은 의사가 떠나는 것을 보고 급히 물었다.“방금 연이랑 하준이가 와서 묻더라고요. 대표님한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서유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이승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감기라고 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고개를 끄덕이던 소지섭은 자리를 떴고 그녀 혼자 덩그러니 문밖에 서 있었다. 그가 얼마나 더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을지...어느 순간 갑자기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가 옆에 있어도 그녀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하준이 유학길에 오른 그날, 이씨 가문과 상씨 가문 사람들이 그를 배웅하러 왔다. 마치 하준이의 돌잡이 때처럼 정원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어른들의 모습이 이미 많이 변했고 아이들도 훌쩍 자란 상태였다. 서유와 이승하의 우월한 유전자만 이어받은 이하준은 10살밖에 안 된 나이지만 정교한 이목구비에 곧은 몸매를 가지고 있어 보기만 해도 귀티가 철철 흘러넘쳤다. 게다가 180 가까이 되는 아이큐를 가지고 있어 누가 봐도 엄친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특히 이연석은 흰색 스웨터 차림에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한 손에 가방을 든 채로 계단을 내려오는 이하준의 모습을 보고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았다. 그는 옆에서 초등학생 교복을 입은 채 케이크를 뺏어 먹고 있는 오뚝이와 깡순이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똑같은 10살인데 이게 뭐냐? 누구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명문 학교에 입학하고 누구는 아직도 초등학교나 다니고 있으니.”그 말에 정가혜가 그를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는 거죠. 내가 몇 번을 말해요. 자꾸만 애들 다그치지 말라고 했죠.”이를 갈던 그가 두 아이 앞으로 다가가 케이크를 낚아채 입에 쑤셔 넣었다.“너희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로 일찍 진학 못 하면 아빠 진짜 가만 안 둬.”두 아이는
“승하 씨...”깜짝 놀란 그녀는 미친 듯이 핸드폰을 찾았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어떻게 의사를 찾아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애틋한 그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긴장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고 바닥을 짚고 있던 손에도 덩달아 힘이 풀렸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고 입술이 파르르 떨려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당신... 왜... 그래요?”지난 10년 동안, 이승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지내온 그녀는 거의 울어본 적이 없다. 잠깐 정신을 잃은 모습에도 이렇게 펑펑 우는 것을 보니 그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애써 두통을 참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던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녀를 품에 안고 소파에 쓰러지더니 세월조차 비껴간 잘생긴 얼굴을 살짝 치켜들었다.“깊게 잠이 든 것뿐이야. 왜 이렇게 겁을 먹어?”말을 하면서 손을 뻗어 눈물로 뒤덮인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부러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당신 요즘 살이 좀 오른 것 같은데.”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그녀는 눈물이 글썽한 두 눈을 들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도 그렇죠. 어떻게 사람이 깨우는데 아무 반응이 없어요?”맑고 깨끗한 그녀의 눈을 그는 차마 마주칠 수가 없었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떼어 그녀의 등을 눌러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얹었다. “바보,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야. 피곤할 때는 꿈을 꾸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거든.”그 말을 그녀는 당연히 믿지 못하였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왜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있었다.단단한 가슴 위에 얹혀있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미안해요. 당신 머릿속에 있는 칩을 꺼낼 의사를 찾아야 하는데...”겁이 났다. 이승하를 잃을까 봐 두려웠다. 자신을 목숨보다 더
지난주, 토론 대회에 나간다고 말하는 연이를 향해 이하준은 엄청 비꼬았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연이는 씩씩거리며 이하준과 내기를 했고 뜻밖에도 그녀가 이기게 될 줄은 몰랐다.눈꺼풀을 내리깔던 하준이가 손을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평소에 그렇게 재잘재잘하더니 실력 한번 제대로 발휘했네. 축하해.”진심으로 축하하는 것 같지 않고 그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아무튼 이번에는 네가 졌어. 그러니까 잊지 말고 돈 입금해.”이하준은 천천히 냅킨을 깔면서 담담하게 말했다.“밥 먹고 나서 줄게. 근데 누나...”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기세등등하게 연이를 쳐다보았다.“누나 올해 열일곱이지? 아직까지 고등학교에 다니고. 수시 자격도 따내지 못했으니 수능 봐서 어떤 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지 정말 걱정이다.”그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너... 명문대에 합격했다고 잘난 척하지 마. 내년에 나도 그 학교에 합격할지 모르니까.”이하준은 칼과 포크를 집어 들고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었다.“그럼 내 후배가 되는 건가?”화가 난 연이가 반격할 겨를도 없이 그가 또 빈정거렸다.“내년에 학교에서 만나. 만나면 나한테 선배라고 부르는 거 잊지 말고.”“아악. 열받아 죽겠네.”연이가 가슴을 내리치더니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서유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기댄 채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이모, 하준이 쟤 정말 얄미워죽겠어요. 빨리 학교에 보내버려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요.”서유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막상 가고 나면 또 보고 싶을걸?”“아니요.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입을 삐죽거리면서 시선은 이하준의 얼굴로 향해 있었다. 솔직히 이 녀석과 10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정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얄미운 동생인 건 사실이다.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웃음을 짓던 서유가 포크로 과일을 집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연이는 과일을 받아먹으면서 이하준을 향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 회사에서 돌아온 서유는 정원에서 칼자루를 쥔 채 아이한테 칼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다가가 말을 건네려고 했지만 아름다운 광경에 발걸음을 멈추고는 문 옆에 살짝 기대어 잔디밭의 크고 작은 그림자를 멀리서 바라보았다. 아이한테 관심이 없었던 남자는 아이를 뛰어난 인재로 키우기 위해 온갖 정성을 쏟았다. 시간이 흘러 아이는 아빠를 존경했고 아빠를 많이 따랐다. 이승하는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빠였다. 그가 있었기 때문에 이 집이 따뜻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좋은 남자가 그녀와 아이의 옆에서 평생을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랐다. 잠시 후,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날카롭던 시선도 이젠 나이가 드니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세월마저 그의 얼굴을 그냥 스쳐 지나간 듯 그는 처음 봤을 때와 큰 차이가 없었다. 검은색 셔츠와 긴 바지 사이에 흰색 허리띠를 두르고 있는 그의 몸이 석양 아래에 우뚝 서 있었고 그가 양쪽 허리춤에 손을 얹고 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머리 뒤로 잘 빗겨져 있었고 약간 고개를 돌리니 머리카락이 왼쪽으로 살짝 흔들렸다. 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서유한테 가까이 오라고 했다. 옅은 미소를 짓던 그녀는 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소지섭을 지나치다가 손에 있던 손수건을 챙겨 앞으로 다가갔다. “여보, 허리 숙여요.”그가 허리를 약간 숙이자 서유는 발끝은 세우고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주었다.“저녁에 뭐 먹고 싶어요?”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잡자 가녀린 그녀가 그의 품에 쏙 들어왔다. “우리 서 대표님이 직접 요리를 하실 건가?”그의 장난에도 그녀는 화를 내지 않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그렇게 좀 부르지 말아요.”지난 5년 동안 서유도 많이 바삐 보냈고 자신의 건축 사무소까지 차렸다. 그러나 프로젝트를 많이 맡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남편과 아이를 돌봤다. 하지만 이승하는
그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칼, 총, 레이싱카, 배, 비행기 이것들 중에서 뭐부터 배우고 싶어?”하준이가 초롱초롱한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아빠, 저한테 가르쳐주시려고요?”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던 남자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이론 지식은 이미 거의 다 배웠으니 이제부터는 호신술을 가르쳐 줄 생각이야. 나중에 날 대신해 네가 엄마를 지켜줘야 하니까.”아이는 머리를 살짝 기울인 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아빠가 옆에 있는데 왜 제가 엄마를 지켜줘야 해요?”벌써 두통 증상이 심해진 그는 머릿속에 있는 칩에 대해 아이한테 얘기하지 않았다.“당분간은 로봇 프로젝트 때문에 많이 바쁠 거야. 자주 자리를 비우게 될 테니까 내가 없는 동안에는 네가 엄마를 지켜줘야 해.”요즘 아빠가 로봇 개발 중인 걸 알고 있던 이하준은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열심히 배워서 엄마를 지켜줄 거예요.”아이의 약속을 듣고 이승하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일단 총 쏘는 법부터 가르쳐줄게.”하준이도 냉큼 그의 뒤를 따라 일어섰다.“세 살 때, 총을 가지고 놀다가 아빠한테 호되게 맞았던 적이 있었는데. 다시는 총을 못 잡게 할 줄 알았어요.”아이가 그 어릴 때의 일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는 네가 너무 어렸으니까 총을 가지고 놀지 못하게 한 거야.”“저 이제 겨우 10살인데요. 지금은 총 가지고 노는 거 안심하세요?”발걸음을 멈추던 그가 뒤돌아서 어느새 허리 높이까지 키가 훌쩍 큰 아이를 바라보았다.“이제 곧 공부하러 해외로 가잖아. 돌아와서 배우면 그땐 이미 늦었어.”천재가 맞는 건지 하준이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학교의 입학 통지서를 받게 되었고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이국땅에서 다른 천재 아이들과 함께 공부를 하게 되었다. 서재로 들어간 그는 10년 동안 사용하지 않은 총을 꺼내 하준이를 데리고 정원으로 향했다.한편, 이승하가 아이에게 사격을 가르치려 한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이연석은 급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아닙니다. 그냥 기부하려던 거예요.”하지만 전문가는 그런 돈을 받을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의 고지식한 태도에 이연석은 화가 나서 책상을 치며 일어섰다.“그러니까 머리카락 한 올 없이 다 빠졌지! 다 선생님 고지식함이 다 빨아먹은 거예요!”전문가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같은 책상을 치며 맞섰다.“도련님, 제 지능을 모욕하는 건 참겠는데, 머리카락을 모욕하는 건 안 됩니다!”“그래요? 그럼 선생님 머리카락을 모욕하죠!”두 사람이 거의 싸울 뻔한 순간, 이하율 남매가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아빠, 우리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너무 배고파요...”이연석은 남매에게 화살을 돌리며 소리쳤다.“하루 종일 먹을 것만 찾고! 하준이처럼 간식 줄이고 책 좀 보란 말이야!”이하율 남매는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아빠, 우린 아직 글도 다 못 읽어요. 책 보는 것도 재미없어요. 우리에겐 간식이 제일 재미있어요.”옆에 있던 전문가는 그 말을 듣고 자신감이 생겼다.“보세요. 이 두 아이가 어디 130과 148의 IQ를 가진 것처럼 보이시나요?”이연석은 할 말을 잃었다. 화가 난 그는 두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이 고집불통 대머리야! 이런 허접한 기관은 확 망해버려!”전문가는 속으로 생각했다.‘지금까지 수많은 IQ 테스트를 해봤지만, 이런 사람은 처음이야. 이럴 수가!’A시로 돌아가기 전, 이연석은 테스트 결과를 컴퓨터로 수정하고 새로 출력한 뒤 두 아이를 데리고 이승하를 찾아갔다.“형, 봐봐. 우리 애들도 IQ가 엄청 높아! 특히 내 아들, 148이야! 나중에 mensa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그 말을 듣던 이승하는 고개도 들지 않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이하율에게 물었다.“오뚝아, 68 곱하기 42는 얼마야?”감자칩을 먹으며 손에 기름이 잔뜩 묻은 이하율은 손가락을 세며 계산하기 시작했다.3분 뒤, 그는 대답했다.“110!”순간 이연석은 참지 못하고 이하율을 향해 발길질을 하
흐트러진 커튼 너머로 달빛이 스며드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서유는 무의식적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해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크게 외쳤다.“여보, 성재 씨의 보디가드가 그러던데 그 사람이 망원경으로 우리 집을 자주 훔쳐본대요. 제발 여기선 그러지 마요.”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던 이승하는 짙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는 맞은편 별장을 한 번 흘겨보더니, 아무렇지 않은 척 리모컨을 집어 들고 불을 꺼버렸다.“걱정 마, 안 보여.”“하지만...”서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자 팔걸이에 손을 짚은 이승하가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리고 늑대처럼 그녀의 혀끝을 휘감아 그녀가 하려던 말을 그대로 삼켜버렸다.처음에는 저항하던 서유도 이승하가 한쪽 무릎을 꿇는 순간, 온몸이 떨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두 손톱으로 의자 등받이를 필사적으로 긁을 뿐이었다.예전에는 체력에만 의지하던 이승하가 오늘은 어쩐 일인지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가 꺼낸 물건들은 서유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제발 그런 거 쓰지 마요!”서유가 간절히 부탁했지만, 남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낮고 매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여보, 참지 말고 소리 내봐.”서유는 도저히 소리를 낼 수가 없어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런 그녀를 본 이승하는 도구와 체력을 총동원해 강도를 높였다.“난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만약 방음이 되지 않았다면, 그리고 커튼이 창문을 가리지 않았다면, 서유는 지금 부끄러움에 혀를 깨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더욱 끔찍한 것은 그녀가 꼼짝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저 이승하에게 온전히 ‘당하기’만 했다.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두 번, 세 번...기진맥진한 서유는 뒤돌아 닫혀 있는 방문을 바라보며 간절히 바랐다.‘제발, 하준이가 문을 두드리며 배가 아프다고, 병원에 같이 가달라고 했으면...’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이하준은 수많은 문제 속에 갇혀 있었다.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