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이미 수술복은 벗은 상태였고, 그의 모습은 마치 지옥에서 온 사신 같았다. 냉랭한 기운이 온몸에 맴돌았고 얼굴은 창백하며 눈썹과 눈매에 서린 억눌린 분노는 더 이상 감출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조수석 쪽으로 걸어가 검은 창문을 통해 차 안에 앉아 있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스스로 내릴래? 아니면 내가 이 차를 부수고 널 데리고 나갈까?” 창밖에서 분노로 이글거리는 남자를 바라보던 서유는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손을 들어 문을 열었다. 아직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남자의 차가운 손가락이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만약 그녀가 임신 중이지 않았다면, 아마 그 손에 의해 거칠게 끌어내려졌을 것이다. 그는 서유의 손목을 꽉 잡은 채 조심스럽게 차에서 내리도록 도왔다. 그리고 나서 냉혹한 눈빛으로 운전석에 앉아 있는 육성재를 한번 쏘아보았다. 두 남자의 시선이 부딪히는 순간, 육성재는 이승하의 눈에 서린 살기를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살기는 순식간에 사라졌고, 이승하는 서유를 끌고 부가티 쪽으로 걸어갔다. 이승하는 분노를 꾹꾹 참아내며 조수석 문을 열었다. 서유가 자리에 앉자, 몸을 숙여 그녀의 손에서 안전벨트를 가져와 직접 채워주었다. 턱선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는 이승하의 모습을 바라보던 서유는 입을 열려 했지만, 남자는 이미 몸을 일으켜 문을 닫고 운전석으로 향했다. 그는 차에 올라타 그녀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은 채 차를 출발시켰다. 운전은 느리고도 산만했으며, 목적지도 없어 보였다. 길 잃은 듯한 이승하를 지켜보던 서유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보, 내가 수술대에 누워 있을 때 아기가 움직였어요. 정말 격렬하게 움직였어요, 마치 저항하는 것처럼. 그래서... 그래서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어요.” 그녀의 말에도 이승하는 여전히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서유는 고개를 숙이며 작게 말했다. “미안해요. 내가 수술을 하고 싶지 않아
이승하는 그녀의 품에 안긴 순간, 모든 감정을 내려놓고 날카로운 얼굴을 서유의 목덜미 깊숙이 파묻었다. 마치 마지막 이별을 준비하듯 온 힘을 다해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무 말 없이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로, 창밖에서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며 곧 유리창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며칠 동안 제대로 잠을 못 잔 이승하는 핏발이 선 눈으로 창문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바라보았다. 입가를 힘없이 올려 보였지만, 그의 마음속은 비에 가로막힌 길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10%와 30%의 가능성 사이에서 10%를 선택했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키기도 전에, 그날 오후 이승하가 서유를 데리고 블루리도로 돌아가던 길에 서유가 갑작스럽게 출혈을 겪었다. 처음엔 출혈량이 많지 않았지만, 서유가 어지럼증을 느껴 신호등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고 나서야 이상함을 느꼈다. 그녀는 아래를 내려다보았고 이미 많은 피가 흘러나와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이승하를 잡으려 했지만, 눈앞이 깜깜해지면서 그의 옷자락만 겨우 닿은 채 앞으로 쓰러졌다. “서유야!” 귓가엔 이승하의 겁에 질린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서유는 말 한마디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사랑한다는 말도 하지 못한 채, 의식을 잃고 말았다. 이승하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의식을 잃은 서유를 한 손으로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핸들을 움켜쥔 채 병원으로 전속력으로 달렸다. 이미 병원에 대기 중이던 이 원장은 이승하의 수술 철회 명령을 받지 못했기에 계속 수술실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온몸이 빗물에 젖은 이승하가 피로 물든 서유를 안고 병원에 뛰어들었다. “뭘 멍하니 있어요! 빨리 구하지 않고 뭐 하는 겁니까!” 이승하의 분노에 이 원장은 정신을 차리고, 즉시 모든 의료진을 소집해 수술실로 향했다. 자신도 서유를 넘겨받으려 다가갔지만, 이승하는 그녀를 넘기지 않고 직접 수술실로 뛰어들었다. 그가
“그리고... 첫 수술을 시작할 때부터 산모가 이미 대량 출혈을 겪었습니다. 산모를 살리기 위해 분주한 사이에 태아는 자궁 안에서 너무 오래 있었고, 꺼냈을 땐 이미 숨을 쉬지 않았습니다...” 무릎 위에 팔꿈치를 대고 상체를 약간 앞으로 기댄 이승하는 의사의 말이 이어질수록, 눈빛에서 서늘한 살기를 드러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의사의 목을 움켜쥐고 단숨에 벽으로 밀쳤다. “뭐라고?” 놀란 남자 의사는 공중에 들어 올려진 채 온몸을 떨었지만, 이승하의 압도적인 기세에 짓눌려 두려움을 억누르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산... 산모가 대량 출혈로... 태아는 심장 박동은 약했지만... 숨을 쉬지 않았고... 거의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승하의 심장이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마치 깊은 절벽 아래로 떨어진 것처럼 주위가 적막에 휩싸였다. 온 세상이 멈춘 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귓가에는 죽음의 울림만이 맴돌았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눈앞이 캄캄해지며 바닥없는 절벽으로 떨어졌고, 다시 누군가가 손을 붙잡아 절벽 아래에서 간신히 끌어올리는 듯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이승하는 눈빛이 핏빛으로 물든 채 의사를 벽에 내던지고, 맹렬히 걸음을 옮겨 수술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수술실 안에서는 여전히 응급처치가 진행 중이었다. 수술대 아래로 붉은 피가 쉴 새 없이 흘러내렸고, 공기 중에는 진한 피 냄새가 가득했다. 차가운 수술실 조명 아래, 핏기 하나 없는 얼굴이 비쳤다. 이승하는 그 많은 피를 보자마자 시야가 좁아지며 심장이 강렬한 공포를 느꼈다. 그는 그렇게 많은 피를 본 적이 없었다. 사람 몸에서 그렇게 많은 피가 쏟아져 나올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마치 그녀의 모든 피가 미친 듯이 작은 몸에서 솟구쳐 나오는 것 같았다. 그는 흐르는 피를 보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도저히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문 앞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은 세상에 버려진 사람처럼 쓸쓸하고
고개를 돌리니 의약 상자를 든 하석준이 이쪽으로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이승하는 그의 손목을 잡아당겨 재빨리 수술실로 들어갔다. 서유의 상태를 보니 심정지 상태일 뿐 아직 뇌사 단계는 아니었다. 하석준은 빠르게 지혈겸자를 꺼내 들고 지혈을 시작했다. “다들 모두 나가 있어.”“당장 수술실 깨끗하게 정리하고 나머지 의사들은 전부 날 도와.”지혈을 하면서 하석준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는 임 선생한테 명했다.“지혈을 마치면 얼른 심폐소생술 시작해. 산모가 심장 박동을 회복할 때까지!”“네. 알겠습니다.”하석준이 도착한 후, 수술실 전체는 다시금 정신없이 바삐 돌아쳤고 그들은 최선을 다하여 생사를 넘나들고 있는 서유를 구했다. 한편, 이승하와 급히 달려온 정가혜는 수술실을 나갈 생각이 없었다. 서유 곁에 있고 싶은 마음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데 옆에 있던 이연석이 두 사람을 강제로 끌고 나갔다. 그들이 넋이 나간 채 수술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 차가운 얼굴을 한 이태석이 긴 복도를 지나 다른 문을 통해 수술실로 들어갔다.“하 박사, 아이부터 구하시게.”서유를 구하고 있던 하석준은 이태석의 소리에 어안이 벙벙해졌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이보다 어른이 먼저 아닌가?”“그렇긴 하지만 서유는 이미 죽었네. 죽은 사람을 구하는 데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태아의 심장은 아직 뛰고 있어. 호흡이 없을 뿐이지. 하 박사 자네의 능력이라면 반드시 아이를 살릴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네.”“일시적인 심정지일 뿐이야. 제때 심폐소생술을 한다면 살릴 수 있단 말일세.”“피가 멈추지 않고 있지 않나. 살려도 오래 살지는 못할 걸세. 차라리 그 시간에 아이를 구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마음이 흔들렸지만 하석준은 손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지혈했다. “하 박사, 자네와 난 오래된 친구일세. 내가 증손자를 이리 잃는 것을 자네도 바라지 않겠지.”그 말을 들으며 한참을 망설이던 하석준은 결국 지혈겸자를 임
“부셔.”상철수의 손짓에 뒤를 따라오던 검은 옷차림의 사람들은 바로 도구를 꺼내 들고 수술실의 문을 잘랐다. 얼마 되지 않아, 수술실 문 전체가 잘려 나갔다.“당장 내 외손녀를 구하거라. 살리지 못하면 다들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해.”“네.”그의 명령에 의사들이 수술실로 몰려들었고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인 임 선생은 도와주러 온 다른 의사들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수술 자리에서 물러나 그들에게 메스를 넘겨주었다.한편, 아이를 구하고 있던 하석준도 그제야 한시름 놓고 아이를 구하는 데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이태석은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문밖에서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상철수를 쳐다보았다.저자가 방금 뭐라고 했는가?서유가 외손녀라고?서유가 상철수의 외손녀란 말인가?상씨 가문은 북미에서 엄청난 가문이었다. 서유가 이런 가문의 사람이란 말인가?문밖의 상철수는 새빨간 눈으로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감히 내 손녀를 포기해? 죽고 싶어 환장했군.”살기 가득한 싸늘한 목소리가 수술실에 울려 퍼지자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북미의 거물이 되기까지 상철수가 손에 피를 얼마나 묻혔는지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 점에 대해 이태석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을 죽일 것처럼 노려보는 그의 시선을 마주한 순간 이태석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턱을 치켜들었다. “당신은 당신 외손녀 살리고 난 내 증손자를 살릴 거야. 입장이 다를 뿐이지. 자신이 지키고 싶은 사람을 지키기 위한 것이니 누구도 잘못이 없네.”상철수가 어두운 얼굴을 들고 이를 악물었다.“잘못이 없다? 그건 당신이 할 소리가 아니야.”상철수는 그동안 북미에서 총을 자주 다루었었고 그 점에서 이태석은 상철수를 이길 수가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상철수의 말을 잇지 못하였고 상철수도 더는 소리를 내지 않고 수술하는 걸 지켜봤다. 한쪽은 서유를 주시하고 있었고 한쪽은 아기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의사들이 죽음
이승하는 새빨간 눈을 들어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여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자신의 곁으로 돌아오라고 한 그의 부탁에 따라 그녀는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살아서 돌아왔다. 서유, 당신은 정말 강한 여자야. 돌아와 줘서 고마워.지금껏 살면서 이렇게 고마운 적도 두려운 적도 없었다. 그녀가 이리 완강하게 버텨낸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있는데 손바닥의 피가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그걸 보니 아직도 등골이 오싹해졌고 몸이 떨려서 일어서지도 못할 만큼 힘이 없었다. 이때, 수술실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이승하는 그제야 눈을 들어 하석준의 손에 쥐어진 아이를 바라보았다. 손바닥만 한 작은 몸집의 아이가 엄마를 닮아서 꿋꿋이 버텨냈다. 아이의 울음소리와 심전도 모니터에서 들려오는 심장 소리를 들으면서 그는 처음으로 생명의 위대함을 느꼈고 저도 모르게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갓난아이는 인큐베이터에 들어갔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위험에서 벗어난 건 아니었고 지금은 그저 살아있을 뿐 의사들이 최선을 다해 치료를 해야만 했다. 증손자가 살아난 것을 보고 이태석은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승하를 지나치던 그때, 남자가 차가운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덥석 잡았다. 고개를 숙이고 새빨간 이승하의 눈을 마주한 순간, 이승하가 그를 바닥에 쓰러뜨리고는 반응할 겨를도 없이 미친 듯이 그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미친 사람처럼 온몸의 힘을 다해 주먹질을 했고 이내 선홍색의 피가 이태석의 입가에서 흘러넘쳤다.이태석을 뒤따라온 사람들은 그가 얻어맞는 것을 보고 달려들어 그를 구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주먹을 휘두르고 있던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움직이기만 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이승하의 복수심이 이렇게 불타오를 줄 이태석은 상상도 못 했다. 그러나 후회하지는 않는다. 하석준에게 먼저 아이를 구하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아이는 분명 죽었을 것이다. 아이를 살려준 나한
고개를 끄덕이던 하석준은 수술실에 남았고 옆에서 대기하며 피터의 분부를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예상대로 각종 합병증 증상이 나타났다. 피터는 하석준에게 메스를 맡긴 뒤 이 원장과 임 선생에게 다른 합병증 치료를 맡기고 자신은 심부전 증상에만 집중했다.평생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의 문턱에서 끌어냈지만 이번 경우는 상황이 아주 어려웠다. 계속해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합병증 증상에 그조차도 무기력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응급수술을 하면서 간호사를 내보내어 가족들에게 환자의 위독 상황을 알리게 하였다. 합병증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그도 서유를 살려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술실 밖, 다시 절망에 빠진 이승하는 간호사가 전한 소식을 듣고 혼이 빠진 사람처럼 그 자리에서 굳어져 버렸다.“이 대표님, 사인해 주시죠.”병세 위급 통지서에 서명한다는 건 서유의 병세가 심각하여 피터조차도 그녀를 구하지 못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해 버리는 꼴이었다. 그에게 사인할 용기가 어디 있겠는가? 그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선생님, 포기하시면 안 됩니다. 제발 그녀를 살려주세요.”밖에서 애원하는 소리에 피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구해야 할지. 의사가 열 명이 있어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다.한편, 인큐베이터 속의 아이는 엄마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인지 쉴 새 없이 울어댔고 그 모습에 의사들과 간호사들은 모두 눈시울을 붉혔다.“선생님, 제발 부탁입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주세요. 사모님을 살려주십시오.” 피터는 이 원장과 임 선생을 힐끗 쳐다보고는 환자를 살리려고 애쓰는 의사들을 쭉 훑어보았다. 그들의 노력에 젖어 든 것인지 포기하려는 순간 다시 희망이 불타올랐다.“계속해서 환자를 살려.”“네.” 의사들과 간호사들의 힘을 모은 외침이 귀청을 찢을 듯 울려 퍼졌고 수술실 밖에 서 있던 가족들은 감동을 금치 못하였다. 한편, 이씨 가문의 형제들은 각지
비틀거리며 다가선 남자는 차가운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피범벅이 된 손끝이 닿은 순간 남자의 창백한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여졌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피범벅이 된 그녀의 몸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이렇게 많은 피를 흘리고 그 오랜 시간 동안 수술을 했으니 얼마나 아팠을까?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 대신 차라리 자신이 고통받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가능하다면 이 고통을 그가 받고 싶었다. 모든 죄를 그가 감당하고 싶었고 서유만 괴롭히지 않는다면 그는 죽어도 좋았다. 피곤이 가득한 얼굴을 숙이고 서유의 손을 꼭 잡았다. 우뚝 솟은 그림자가 수술대 앞에서 구부정한 자세로 있는 것을 보니 마치 무릎을 꿇고 속죄하는 사람 같았다. 수술실 밖, 멀리 떨어져 있어도 키가 큰 남자가 온몸이 떨릴 정도로 어깨를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이 훤히 보였다. 남자가 지금 울고 있는지 그건 중요치 않다. 그가 지금 죽을 만큼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걸 다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살고자 해도 살 수 없고 죽고자 해도 죽을 수가 없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겠나? 남편으로서 아내와 아이가 동시에 생사의 고비를 겪는 것을 지켜봤으니 20시간이 넘는 동안 그가 어떻게 버텨냈는지는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산후조리가 아직 끝나지 않았던 정가혜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고 통곡하는 그녀를 이연석이 부축하지 않았더라면 이미 바닥에 쓰러졌을 것이다. 산후조리원에 있던 정가혜는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울었고, 이연석이 잡아주지 않았다면 이미 쓰러졌을 것이다. 옆에 있던 이승연은 그녀의 울음소리를 듣고는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그녀를 위로했다. 이씨 가문의 사람들은 서유의 처지를 동정하고 이승하의 무력함을 안타까워하며 할아버지가 한 일에 대해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서유가 이승하한테 목숨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태석은 끝내 서유를 버렸다. 이런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손자 손녀로서 어찌 실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