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서유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남편인 이승하보다 더 사랑할 수 있을까? 육성재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좋아서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하는 것을 남들이 뭔 상관이겠는가?다만 이런 서유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는 많이 후회되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날 그녀가 죽기 전에 했던 말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솔직하게 대답할 걸 그랬다.나약한 자신을 원망했고 끝까지 예의를 지킨다고 선을 넘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서유를 안타까워하는 마음에 비하면 이런 감정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할 수만 있다면 하느님께 그녀를 대신해 자신이 이 고통을 받게 해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그럼 이승하와 서유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아무도 그의 죽음은 신경 쓰지 않을 거니까. 그러나 서유는 그와 달리 많은 사람들이 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이승하는 물론 정가혜, 연이 그리고 갓 태어난 그녀의 아들... 그녀를 아끼는 사람이 이 세상에 너무도 많다. 그가 마음속으로 하늘에 빌고 있을 때, 검은 코트를 입은 한 남자가 비를 맞으며 차에서 내리더니 다급한 걸음으로 빠르게 들어왔다. 송사월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서유는 이미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이승하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곁을 지키며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았다. 의사의 말은 단호했고 사람들은 서유가 깨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중환자실 밖에서 하루 동안 지켜보고 있다가 하나둘씩 자리를 떴고 이승하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서유는 단지 길을 잃었을 뿐, 곧 돌아올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남자는 소수빈과 소지섭에게 세계 각지에서 유명한 의사를 찾아보라고 하였다. 언젠가는 기적이 일어날 거라는 생각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약속대로 그녀와 함께 죽을 것이다. 그녀가 길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송사월은 피범벅이 된 서유를 보지 못하고 중환자실 유리창 너머로 창백한 얼굴의 이승하가 그녀의 손을
송사월은 예의를 지켰고 선을 넘지 않았다. 서유가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여전히 그녀를 굳건하게 사랑했다. 그 마음이 귀하다고 생각한 이승하는 고개를 들고 정직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짙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핏발이 선 그의 눈망울에 복잡한 감정이 차올랐다. 중환자실의 문이 닫히려고 할 때 차가운 목소리가 송사월의 귓가에 들려왔다. “고마워요.”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병상 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들 앞에서는 늘 당당하던 남자가 서유의 앞에서는 한껏 작아진 모습이었다.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게 진심으로 그한테 고맙다고 하는 것이겠지...그 후, 송사월은 여기저기서 의사를 수소문하였고 찾는 족족 의사를 병원에 데리고 왔다. 그러나 그들은 서유의 상황을 보고 피터와 똑같이 깨어날 확률이 거의 없다고 했다. 육성재가 찾아온 의사도 그렇게 말했고 상씨 가문, 이씨 가문 그리고 김씨 가문에서 찾아온 의사도 하는 말이 똑같았다.희망이 없다는 의사들의 말에 상철수는 모든 잘못을 이태석의 탓으로 돌렸다. 이태석이 퇴원 후, 기회를 봐서 차로 그를 치어 죽일 작정이었다. 어차피 살 생각이 없었던 터라 노인네 하나쯤 끌어들여 같이 죽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상철수가 액셀을 미처 밟기도 전에, 병원에서 나와 차에 올라탄 이태석을 향해 대형 화물차가 돌진했고 그가 타고 있던 차량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그 광경에 상철수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이승하의 말을 떠올렸다. 악한 사람은 하늘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언젠가는 천벌을 받을 것이다. 한편, 이태석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승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도 않았다. 지금 그는 오직 서유를 구하는 일에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하지만 매번 불타올랐던 희망은 의사의 답변에 의해 처참히 짓밟히게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인큐베이터 안에 있던 아이한테 문제가 발생하였다. 밤낮으로 중환자실을 지키고 있던 남자는 매일 병세
아이를 건네받지 않은 그 모습에 정가혜는 더 이상 그를 강요하지 않았다. 서유가 이렇게 된 게 아이 탓이라고 생각해 일부러 아이를 멀리하는 것은 아닌지...그녀는 아이를 안아 서유 옆에 놓고는 서유의 손을 잡아 아이의 아랫배에 가져다 댔다. 엄마와 아들 사이에는 마음이 통하는 것인지 서유의 손을 얹는 순간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갓난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이승하는 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아이의 작은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엉엉 울고 있던 아이는 남자의 손이 닿자 천천히 울음을 그쳤고 눈물을 머금은 깨끗한 눈을 뜨고는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이승하를 쳐다보면서 작은 손으로 이승하의 새끼손가락을 잡았다. 아이의 작은 손이 그의 새끼손가락을 잡는 순간, 아이한테 이승하는 이 세상의 전부였다. 그가 다른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눈물을 쏟았다. 온몸이 떨릴 정도로 흐느끼면서 그가 서유를 향해 애원했다. “당신은 언제쯤이면 깨어날 수 있을까? 당신이 다시 깨어나지 않으면 난 어떡하라고... 나 정말 너무 힘들어...”옆에 있던 정가혜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벌써 두 달이 지났지만 서유는 아무런 반응조차 없었고 죽은 사람처럼 누워있기만 했다. 석 달이 되던 그때, 소수빈과 소지섭은 수소문 끝에 연세가 있는 한의사 한 명을 찾아냈다. 그 의사는 의식불명인 환자를 치료하는 걸 전문으로 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있어 진작에 퇴직하고 외국에 머물고 있었다. 소수빈과 소지섭은 골목을 돌아다니며 찾아다니다가 끝내 상대방의 주소를 알아냈다. 한의사는 환자를 치료하지 않은 지 꽤 오래되었고 상대가 JS 그룹의 안주인이라는 말을 듣고는 자신이 치료하지 못할까 봐 더더욱 두려워하며 거절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승하는 한의사가 서유를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일말의 희망조차 놓치고 싶지 않아 3일 동안 시간을 내서 외국으로 갔다. 거액의 돈을 챙겨와서는 한의사에게 몇 번이나 부탁하여 그를 서울로 데려갔다. 서유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지금의 그로서 는 서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용기가 있었다.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녀는 이내 그에게 주소를 알려주었고 주소를 받은 남자는 곧장 절로 향했다. 감은사는 산 아래에서 산꼭대기에 이르기까지 한 발짝 앞으로 걸을 때마다 무릎을 꿇고 절을 해야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여태껏 부처님을 믿지 않았던 남자는 예전 같으면 그저 터무니없는 말이라고만 생각했겠지만 지금...양복 차림을 한 그가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한 걸음씩 계단을 올라가며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무릎이 다 까지고 이마가 부딪혀 피를 흘리면서도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산꼭대기에 오른 그가 부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는 핏기 하나 없는 얼굴을 들고 두 손을 모은 채 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향불을 피우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부처님, 세 가지 청이 있습니다. 첫째, 서유가 하루빨리 깨어나게 해주십시오.둘째, 아이가 건강히 자라게 해주십시오.셋째, 아내와 아이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게 해주십시오. 다른 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뜻을 이루게 해주신다면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바치겠습니다. 재물은 물론이고 제 목숨까지 다 바치겠습니다. 그는 절에 있는 모든 신들에게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그때, 그의 이런 경건한 모습을 보고 한 스님이 다가와 그에게 소원 띠를 건네주면서 구하고자 하는 사람의 이름을 적어 나무의 가장 높은 곳에 걸어두라고 했다. 그럼 신께서 그걸 보신다고...고맙다는 말을 전하고는 소원 띠를 받아 붓을 들어 소원을 적었다. 그러고는 시큰거리는 다리를 짚고 사다리에 올라가 소원 띠를 나무의 가장 높은 곳에 걸었다. 띠를 묶고 내려오려고 하는데 얼룩덜룩한 나뭇가지를 통해 자신의 이름이 적힌 오래된 소원 띠를 보게 되었다. 그 순간, 바람이 불어와 소원 띠가 날아갔다. 사다리에서 내려와 나무 밑에 서서 소원 띠를 뒤적거렸다. 잠시 후, 소원 띠를 발견한 남자는 자신의 이름
침대는 창가 쪽에 자리 잡고 있었고 유리창이 조금 열려 있어 산들바람과 함께 눈꽃이 안으로 들어왔고 하얀 커튼이 살랑살랑 흔들려 시원한 느낌이 침대 위를 스쳐 지나갔다.기온의 변화를 느낀 서유가 천장에서 눈을 떼고는 천천히 유리창 밖으로 내다보았다. 깨끗한 하늘에 하얀 눈송이가 꽃잎처럼 흩날렸다. 손가락을 움직여서 날아오른 눈송이를 잡으려고 했지만 움직이기만 해도 고통이 전해졌다. 손끝에서부터 배, 심장, 하반신 그리고 머리까지 온몸이 떨릴 정도로 아파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때, 병실 입구에서 의약 상자를 들고 있던 한의사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 서유가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흠칫하더니 이내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가 눈꺼풀을 뒤집어 보고 맥박을 짚어보고 정말 깨어난 것인지를 확인했다. 잠시 후, 확인을 마친 그가 소리를 질렀다.“가혜 씨, 사모님께서 깨어났습니다.”화장실에서 수건을 씻고 있던 정가혜는 한의사의 감격스러운 소리에 급히 화장실을 뛰쳐나왔다.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서유의 모습에 그녀는 코끝이 찡해지며 가슴속에 쌓인 감정이 폭발했다.“서유야.”그녀는 달려가 서유의 손을 덥석 잡았고 기쁨에 겨워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드디어 깨어났네.”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서유가 계속 깨어나지 않는다면 이승하는 물론 그녀도 곧 무너질 것만 같았다. 하늘이 도운 건지 다행히도 서유는 드디어 깨어났다.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보고 서유는 손을 내밀어 눈물을 닦아주려고 하였지만 너무 아파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가혜야...”이름을 부른 것뿐인데 메마른 목구멍에서 통증이 전해져 한 글자도 더는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옆에 있던 한의사가 재빨리 의약 상자를 열고 은침 몇 개를 꺼내 그녀의 팔에 찔러 넣었다.침을 놓자 통증이 순식간에 많이 줄어든 것 같았지만 여전히 아팠고 몸에 꽂혀있는 튜브가 사람을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다. 튜브를 뽑으려고 발버둥 치니 한의사가 그녀를 막아섰다.“방금 깨어났으니 완쾌할 때까지는 하고
정가혜는 절망스러운 얼굴을 한 채 의자에 주저앉았다.“선생님, 기억상실증인가요? 어떻게 열여덟 살 전의 일만 기억하고 있는 거예요?”그 물음에 한의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글쎄요. 정확한 건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바로 의사한테 검사 진행하라고 하겠습니다. 승하 씨가 돌아오기 전에 기억이 돌아와야 해요.”정가혜는 진심으로 이승하가 걱정되었다. 하여 그가 절에서 돌아오기 전에 서유가 기억을 되찾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검사 결과 의사들은 뇌출혈로 인한 일시적인 기억상실이라고 했다. 그 말인 즉 서유의 기억은 지금 열여덟 살에 멈춰있고 그 후의 일들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검사 결과를 듣고 정가혜는 어안이 벙벙해졌다.“그럼 기억은 언제쯤 회복되는 거예요?”검사 결과를 내려놓으며 의사가 대답했다.“구체적인 건 환자의 상태에 달렸습니다.”“약물 치료를 할 수는 없나요?”“기억이라는 게 약물로 치료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뭔가 자극이 필요한데...”자극이라면... 그녀는 서유가 목숨 걸고 낳은 아이가 생각나서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난 반년 동안 아이는 정가혜가 데리고 있으면서 돌보았다. 모유 수유도 직접 했고 함부로 다른 사람의 손에 아이를 맡기지 않았다.그녀와 이연석의 정성 어린 보살핌 끝에 아이는 지금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귀여운 아이를 보면 서유가 분명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그녀는 이승하가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 집에 가서 아이를 데려오려고 했다. 그런데 병원을 나서자마자 마침 송사월과 마주쳤다.“누나, 서유는 오늘 좀 어때요? 깨어날 기미 없었어요?”발걸음을 멈추던 그녀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깨어났어. 깨어나긴 했는데...”서유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어두웠던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반짝였다.“정말이에요? 다행이네요.”그가 설레는 마음으로 돌아서려 할 때, 정가혜가 그의 팔을 덥석 잡았다.“깨어나긴 했지만 기억을 잃었어. 열여덟 살 전의 일만 기억하고 있어
자신의 얼굴이 비친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그는 한순간 넋을 잃었다. 그러나 그녀가 이젠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아니.”송사월과의 아이가 아니라면 이승하와의 아이겠지. 낯선 이름, 낯선 사람 때문에 그녀는 매우 혼란스러웠다.“우리 영원히 함께하기로 약속한 거 아니었어? 왜 헤어진 거야?”정가혜와 의사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남편이 이승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가장 결혼하고 싶었던 사람은 송사월인데... 왜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된 걸까?그녀는 손가락을 꽉 움켜쥐었다. 마음속에서 갈등하던 송사월은 결국 그녀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내가 널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자신이 기억을 잃었다는 것과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그 말이 너무 슬펐다.“네가 그랬잖아. 영원히 날 사랑할 거라고. 이런 핑계 대지 마. 하나도 믿지 않으니까.”마음이 변한 건 내가 아니라 너라는 말을 그는 차마 할 수가 없었다.“네가 나보다 널 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 거야. 그 사람이 돌아오면 우리가 왜 헤어지게 되었는지 너도 알게 될 거야.”빨갛게 달아오른 그의 눈을 보며 그녀는 뭔가 깨달은 듯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돼서 우리가 헤어지게 된 거구나...”그가 입을 열려는 순간, 소수빈과 소지섭의 부축을 받으며 이승하가 병실 안으로 허겁지겁 들어왔다. 정가혜가 아닌 의사한테서 소식을 들었을 때, 이승하는 한창 부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는 중이었다. 서유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미 무릎이 아파 일어서질 못할 정도였기 때문에 소수빈과 소지섭의 부축을 받아 겨우 병원으로 돌아왔다. 의사는 서유가 깨어났다는 말만 하고 그녀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지금 깨어난 그녀의 모습을 보고 그동안 늘 긴장하고 있던 마음이 한순간에 느슨해졌다. 절망스러웠던 그의 눈빛에 다시 희망이 불타올랐다. 소수빈과 소지섭의
그녀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내 목숨까지 다 바치겠다고 부처님께 애원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지 않았고 서유는 기억만 잃었을 뿐 무사히 의식이 돌아왔다. 어찌 보면 수지에 맞는 장사다. 그렇게 자신을 위로했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만 헛웃음이 나왔다. 십여 년 동안 그녀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은 그저 한 여름날의 꿈에 불과했던 것일까?수척하고 초췌한 얼굴과 핏발이 선 그의 두 눈, 쓴웃음을 짓고 있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마음이 불편했다. 심장이 또 고장 난 줄 알고 손을 뻗어 가슴을 누르니 이상한 통증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이때 송사월이 그 틈을 타 그녀의 손을 밀어냈다. “서유야, 남편이 돌아왔으니까 잘 얘기 나눠봐. 난 이만 가볼게. 다음에 또 보러 올게.”그가 자리를 뜨려 하자 서유가 급하게 그를 향해 소리쳤다.“가지 마. 나 저 사람 모른단 말이야. 나 혼자 여기 두지 마. 무서워.”무섭다는 그녀의 말이 비수처럼 이승하의 심장에 박혀버렸다. 그 칼이 심장을 관통하여 그의 목숨을 조금씩 조금씩 앗아갔다. 여전히 침대에 기대고 있던 남자는 한참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짙은 눈을 내리깔고는 겁에 질려 있는 여자를 쳐다보았다.“내가 무서워?”그가 무서운 게 아니라 낯섦이 두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도와달라는 눈빛으로 송사월을 쳐다보았다. 그는 예전의 그녀가 송사월을 어떻게 사랑했는지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잠결에 송사월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았을 뿐, 지금 이리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침대 시트에 놓인 손을 꽉 움켜쥐었다. 손톱이 피부를 긁어 피가 흘러내렸고 그가 통증을 억누르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절망적인 눈을 들어 송사월을 쳐다보았다. “날 무서워한다니 당신이 여기 남아있어요. 난... 먼저 가볼게요.”그 말을 하면서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들이 볼까 봐 두려웠던 건지 이승하는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