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사월은 예의를 지켰고 선을 넘지 않았다. 서유가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여전히 그녀를 굳건하게 사랑했다. 그 마음이 귀하다고 생각한 이승하는 고개를 들고 정직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짙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핏발이 선 그의 눈망울에 복잡한 감정이 차올랐다. 중환자실의 문이 닫히려고 할 때 차가운 목소리가 송사월의 귓가에 들려왔다. “고마워요.”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병상 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들 앞에서는 늘 당당하던 남자가 서유의 앞에서는 한껏 작아진 모습이었다.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게 진심으로 그한테 고맙다고 하는 것이겠지...그 후, 송사월은 여기저기서 의사를 수소문하였고 찾는 족족 의사를 병원에 데리고 왔다. 그러나 그들은 서유의 상황을 보고 피터와 똑같이 깨어날 확률이 거의 없다고 했다. 육성재가 찾아온 의사도 그렇게 말했고 상씨 가문, 이씨 가문 그리고 김씨 가문에서 찾아온 의사도 하는 말이 똑같았다.희망이 없다는 의사들의 말에 상철수는 모든 잘못을 이태석의 탓으로 돌렸다. 이태석이 퇴원 후, 기회를 봐서 차로 그를 치어 죽일 작정이었다. 어차피 살 생각이 없었던 터라 노인네 하나쯤 끌어들여 같이 죽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상철수가 액셀을 미처 밟기도 전에, 병원에서 나와 차에 올라탄 이태석을 향해 대형 화물차가 돌진했고 그가 타고 있던 차량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그 광경에 상철수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이승하의 말을 떠올렸다. 악한 사람은 하늘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언젠가는 천벌을 받을 것이다. 한편, 이태석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승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도 않았다. 지금 그는 오직 서유를 구하는 일에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하지만 매번 불타올랐던 희망은 의사의 답변에 의해 처참히 짓밟히게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인큐베이터 안에 있던 아이한테 문제가 발생하였다. 밤낮으로 중환자실을 지키고 있던 남자는 매일 병세
아이를 건네받지 않은 그 모습에 정가혜는 더 이상 그를 강요하지 않았다. 서유가 이렇게 된 게 아이 탓이라고 생각해 일부러 아이를 멀리하는 것은 아닌지...그녀는 아이를 안아 서유 옆에 놓고는 서유의 손을 잡아 아이의 아랫배에 가져다 댔다. 엄마와 아들 사이에는 마음이 통하는 것인지 서유의 손을 얹는 순간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갓난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이승하는 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아이의 작은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엉엉 울고 있던 아이는 남자의 손이 닿자 천천히 울음을 그쳤고 눈물을 머금은 깨끗한 눈을 뜨고는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이승하를 쳐다보면서 작은 손으로 이승하의 새끼손가락을 잡았다. 아이의 작은 손이 그의 새끼손가락을 잡는 순간, 아이한테 이승하는 이 세상의 전부였다. 그가 다른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눈물을 쏟았다. 온몸이 떨릴 정도로 흐느끼면서 그가 서유를 향해 애원했다. “당신은 언제쯤이면 깨어날 수 있을까? 당신이 다시 깨어나지 않으면 난 어떡하라고... 나 정말 너무 힘들어...”옆에 있던 정가혜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벌써 두 달이 지났지만 서유는 아무런 반응조차 없었고 죽은 사람처럼 누워있기만 했다. 석 달이 되던 그때, 소수빈과 소지섭은 수소문 끝에 연세가 있는 한의사 한 명을 찾아냈다. 그 의사는 의식불명인 환자를 치료하는 걸 전문으로 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있어 진작에 퇴직하고 외국에 머물고 있었다. 소수빈과 소지섭은 골목을 돌아다니며 찾아다니다가 끝내 상대방의 주소를 알아냈다. 한의사는 환자를 치료하지 않은 지 꽤 오래되었고 상대가 JS 그룹의 안주인이라는 말을 듣고는 자신이 치료하지 못할까 봐 더더욱 두려워하며 거절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승하는 한의사가 서유를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일말의 희망조차 놓치고 싶지 않아 3일 동안 시간을 내서 외국으로 갔다. 거액의 돈을 챙겨와서는 한의사에게 몇 번이나 부탁하여 그를 서울로 데려갔다. 서유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지금의 그로서 는 서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용기가 있었다.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녀는 이내 그에게 주소를 알려주었고 주소를 받은 남자는 곧장 절로 향했다. 감은사는 산 아래에서 산꼭대기에 이르기까지 한 발짝 앞으로 걸을 때마다 무릎을 꿇고 절을 해야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여태껏 부처님을 믿지 않았던 남자는 예전 같으면 그저 터무니없는 말이라고만 생각했겠지만 지금...양복 차림을 한 그가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한 걸음씩 계단을 올라가며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무릎이 다 까지고 이마가 부딪혀 피를 흘리면서도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산꼭대기에 오른 그가 부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는 핏기 하나 없는 얼굴을 들고 두 손을 모은 채 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향불을 피우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부처님, 세 가지 청이 있습니다. 첫째, 서유가 하루빨리 깨어나게 해주십시오.둘째, 아이가 건강히 자라게 해주십시오.셋째, 아내와 아이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게 해주십시오. 다른 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뜻을 이루게 해주신다면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바치겠습니다. 재물은 물론이고 제 목숨까지 다 바치겠습니다. 그는 절에 있는 모든 신들에게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그때, 그의 이런 경건한 모습을 보고 한 스님이 다가와 그에게 소원 띠를 건네주면서 구하고자 하는 사람의 이름을 적어 나무의 가장 높은 곳에 걸어두라고 했다. 그럼 신께서 그걸 보신다고...고맙다는 말을 전하고는 소원 띠를 받아 붓을 들어 소원을 적었다. 그러고는 시큰거리는 다리를 짚고 사다리에 올라가 소원 띠를 나무의 가장 높은 곳에 걸었다. 띠를 묶고 내려오려고 하는데 얼룩덜룩한 나뭇가지를 통해 자신의 이름이 적힌 오래된 소원 띠를 보게 되었다. 그 순간, 바람이 불어와 소원 띠가 날아갔다. 사다리에서 내려와 나무 밑에 서서 소원 띠를 뒤적거렸다. 잠시 후, 소원 띠를 발견한 남자는 자신의 이름
침대는 창가 쪽에 자리 잡고 있었고 유리창이 조금 열려 있어 산들바람과 함께 눈꽃이 안으로 들어왔고 하얀 커튼이 살랑살랑 흔들려 시원한 느낌이 침대 위를 스쳐 지나갔다.기온의 변화를 느낀 서유가 천장에서 눈을 떼고는 천천히 유리창 밖으로 내다보았다. 깨끗한 하늘에 하얀 눈송이가 꽃잎처럼 흩날렸다. 손가락을 움직여서 날아오른 눈송이를 잡으려고 했지만 움직이기만 해도 고통이 전해졌다. 손끝에서부터 배, 심장, 하반신 그리고 머리까지 온몸이 떨릴 정도로 아파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때, 병실 입구에서 의약 상자를 들고 있던 한의사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 서유가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흠칫하더니 이내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가 눈꺼풀을 뒤집어 보고 맥박을 짚어보고 정말 깨어난 것인지를 확인했다. 잠시 후, 확인을 마친 그가 소리를 질렀다.“가혜 씨, 사모님께서 깨어났습니다.”화장실에서 수건을 씻고 있던 정가혜는 한의사의 감격스러운 소리에 급히 화장실을 뛰쳐나왔다.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서유의 모습에 그녀는 코끝이 찡해지며 가슴속에 쌓인 감정이 폭발했다.“서유야.”그녀는 달려가 서유의 손을 덥석 잡았고 기쁨에 겨워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드디어 깨어났네.”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서유가 계속 깨어나지 않는다면 이승하는 물론 그녀도 곧 무너질 것만 같았다. 하늘이 도운 건지 다행히도 서유는 드디어 깨어났다.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보고 서유는 손을 내밀어 눈물을 닦아주려고 하였지만 너무 아파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가혜야...”이름을 부른 것뿐인데 메마른 목구멍에서 통증이 전해져 한 글자도 더는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옆에 있던 한의사가 재빨리 의약 상자를 열고 은침 몇 개를 꺼내 그녀의 팔에 찔러 넣었다.침을 놓자 통증이 순식간에 많이 줄어든 것 같았지만 여전히 아팠고 몸에 꽂혀있는 튜브가 사람을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다. 튜브를 뽑으려고 발버둥 치니 한의사가 그녀를 막아섰다.“방금 깨어났으니 완쾌할 때까지는 하고
정가혜는 절망스러운 얼굴을 한 채 의자에 주저앉았다.“선생님, 기억상실증인가요? 어떻게 열여덟 살 전의 일만 기억하고 있는 거예요?”그 물음에 한의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글쎄요. 정확한 건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바로 의사한테 검사 진행하라고 하겠습니다. 승하 씨가 돌아오기 전에 기억이 돌아와야 해요.”정가혜는 진심으로 이승하가 걱정되었다. 하여 그가 절에서 돌아오기 전에 서유가 기억을 되찾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검사 결과 의사들은 뇌출혈로 인한 일시적인 기억상실이라고 했다. 그 말인 즉 서유의 기억은 지금 열여덟 살에 멈춰있고 그 후의 일들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검사 결과를 듣고 정가혜는 어안이 벙벙해졌다.“그럼 기억은 언제쯤 회복되는 거예요?”검사 결과를 내려놓으며 의사가 대답했다.“구체적인 건 환자의 상태에 달렸습니다.”“약물 치료를 할 수는 없나요?”“기억이라는 게 약물로 치료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뭔가 자극이 필요한데...”자극이라면... 그녀는 서유가 목숨 걸고 낳은 아이가 생각나서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난 반년 동안 아이는 정가혜가 데리고 있으면서 돌보았다. 모유 수유도 직접 했고 함부로 다른 사람의 손에 아이를 맡기지 않았다.그녀와 이연석의 정성 어린 보살핌 끝에 아이는 지금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귀여운 아이를 보면 서유가 분명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그녀는 이승하가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 집에 가서 아이를 데려오려고 했다. 그런데 병원을 나서자마자 마침 송사월과 마주쳤다.“누나, 서유는 오늘 좀 어때요? 깨어날 기미 없었어요?”발걸음을 멈추던 그녀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깨어났어. 깨어나긴 했는데...”서유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어두웠던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반짝였다.“정말이에요? 다행이네요.”그가 설레는 마음으로 돌아서려 할 때, 정가혜가 그의 팔을 덥석 잡았다.“깨어나긴 했지만 기억을 잃었어. 열여덟 살 전의 일만 기억하고 있어
자신의 얼굴이 비친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그는 한순간 넋을 잃었다. 그러나 그녀가 이젠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아니.”송사월과의 아이가 아니라면 이승하와의 아이겠지. 낯선 이름, 낯선 사람 때문에 그녀는 매우 혼란스러웠다.“우리 영원히 함께하기로 약속한 거 아니었어? 왜 헤어진 거야?”정가혜와 의사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남편이 이승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가장 결혼하고 싶었던 사람은 송사월인데... 왜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된 걸까?그녀는 손가락을 꽉 움켜쥐었다. 마음속에서 갈등하던 송사월은 결국 그녀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내가 널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자신이 기억을 잃었다는 것과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그 말이 너무 슬펐다.“네가 그랬잖아. 영원히 날 사랑할 거라고. 이런 핑계 대지 마. 하나도 믿지 않으니까.”마음이 변한 건 내가 아니라 너라는 말을 그는 차마 할 수가 없었다.“네가 나보다 널 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 거야. 그 사람이 돌아오면 우리가 왜 헤어지게 되었는지 너도 알게 될 거야.”빨갛게 달아오른 그의 눈을 보며 그녀는 뭔가 깨달은 듯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돼서 우리가 헤어지게 된 거구나...”그가 입을 열려는 순간, 소수빈과 소지섭의 부축을 받으며 이승하가 병실 안으로 허겁지겁 들어왔다. 정가혜가 아닌 의사한테서 소식을 들었을 때, 이승하는 한창 부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는 중이었다. 서유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미 무릎이 아파 일어서질 못할 정도였기 때문에 소수빈과 소지섭의 부축을 받아 겨우 병원으로 돌아왔다. 의사는 서유가 깨어났다는 말만 하고 그녀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지금 깨어난 그녀의 모습을 보고 그동안 늘 긴장하고 있던 마음이 한순간에 느슨해졌다. 절망스러웠던 그의 눈빛에 다시 희망이 불타올랐다. 소수빈과 소지섭의
그녀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내 목숨까지 다 바치겠다고 부처님께 애원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지 않았고 서유는 기억만 잃었을 뿐 무사히 의식이 돌아왔다. 어찌 보면 수지에 맞는 장사다. 그렇게 자신을 위로했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만 헛웃음이 나왔다. 십여 년 동안 그녀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은 그저 한 여름날의 꿈에 불과했던 것일까?수척하고 초췌한 얼굴과 핏발이 선 그의 두 눈, 쓴웃음을 짓고 있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마음이 불편했다. 심장이 또 고장 난 줄 알고 손을 뻗어 가슴을 누르니 이상한 통증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이때 송사월이 그 틈을 타 그녀의 손을 밀어냈다. “서유야, 남편이 돌아왔으니까 잘 얘기 나눠봐. 난 이만 가볼게. 다음에 또 보러 올게.”그가 자리를 뜨려 하자 서유가 급하게 그를 향해 소리쳤다.“가지 마. 나 저 사람 모른단 말이야. 나 혼자 여기 두지 마. 무서워.”무섭다는 그녀의 말이 비수처럼 이승하의 심장에 박혀버렸다. 그 칼이 심장을 관통하여 그의 목숨을 조금씩 조금씩 앗아갔다. 여전히 침대에 기대고 있던 남자는 한참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짙은 눈을 내리깔고는 겁에 질려 있는 여자를 쳐다보았다.“내가 무서워?”그가 무서운 게 아니라 낯섦이 두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도와달라는 눈빛으로 송사월을 쳐다보았다. 그는 예전의 그녀가 송사월을 어떻게 사랑했는지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잠결에 송사월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았을 뿐, 지금 이리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침대 시트에 놓인 손을 꽉 움켜쥐었다. 손톱이 피부를 긁어 피가 흘러내렸고 그가 통증을 억누르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절망적인 눈을 들어 송사월을 쳐다보았다. “날 무서워한다니 당신이 여기 남아있어요. 난... 먼저 가볼게요.”그 말을 하면서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들이 볼까 봐 두려웠던 건지 이승하는
송사월은 침대 옆에 앉아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로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힘들게 여기까지 왓는지 그녀에게 다 얘기해줬다. 그 얘기를 다 듣고 나서 서유는 약간 멍해졌지만 이내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네가 한 얘기들은 전부 다 소설 같아. 내가 겪었던 일 아닌 것 같아.”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예전에 내가 기억을 잃었을 때도 그랬어. 네가 찾아와서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줬었는데 그때 나도 소설을 듣고 있는 기분이 들었었지... 그래서 내게 없는 낯선 기억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다시 기억을 찾았을 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어. 네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 함께하고 있는 모습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으니까. 나한테는 더 이상 널 붙잡을 자격이 없다라고...”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데 그가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 “서유야, 너한테 이런 말을 해주는 건 네가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오길 바라서가 아니야.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밀어내지 마. 나중에 네가 나처럼 후회하는 걸 난 원치 않아.”그녀는 천천히 눈을 내리깔고 이승하의 절망적인 모습을 떠올렷다. 여전히 낯설기는 했지만 그 남자가 자신을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그 순간, 그녀는 막막하기만 했다. 미간을 찌푸리며 그와 관련된 일에 대해 애써 기억해 내려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고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더 아팠다. 머리 전체가 폭발하는 것처럼 아팠고 온몸의 상처까지 덩달아 터질 것 같았다. 결국 엄청난 통증에 그녀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깜짝 놀란 송사월은 미친 듯이 의사를 불렀다. 마침 아이를 안고 병실을 들어서던 정가혜는 그 모습을 보고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의사가 들어와서 응급처치를 했지만 서유는 여전히 혼수상태였다. 한의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환자가 기억을 잃어서 조급한 건 알겠는데 이렇게
그가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입을 열었다.“난 죽는 게 두려운 사람이 아니었어. 그런데 당신을 만난 후부터 죽는 게 그렇게 겁이 나더라.”죽는 게 두려웠기 때문에 전 서계를 돌아다니며 의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원하는 결과는 끝내 얻지 못하였고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기만 했다. 겁이 난 서유는 그를 꼭 껴안았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당신한테는 내가 있고 우리 하준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절대 죽으면 안 돼요. 당신이 죽으면 우리는 어떡하라고요?”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미 5년을 버텨온 그는 점점 더 통증이 심해졌고 하느님이 조금씩 조금씩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통이 전해지는 횟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통증은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칩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것 같았다. 다만 떠나기 전에 모든 일을 다 마치고 가야 하는데...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품 안에 있는 여인이 가장 걱정되었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깊이 파고들었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만큼 뜨겁고 짜릿한 느낌, 슬픈 마음을 녹일 수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은 뜨겁게 몸을 섞으며 하나가 되었다. 그녀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쯤, 두 사람의 아찔한 행위가 끝이 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소중한 물건을 끌어안듯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유람선 안으로 들어온 희미한 달빛을 빌려 그가 세월의 흔적도 없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다음 생에도 당신이 내 여자였으면 좋겠는데. 당신의 다음 생은 송사월한테 주기로 약속했었나?”아직 잠들지 않은 서유가 그의 가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번 생에 당신이 나보다 먼저 가면 나 절대 당신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다음 생에 당신 안 만날 거라고요.”그가 슬픈 표정을
그 당시 풋풋한 어린 소녀였던 연이는 심우주가 자신과 같은 학교에 간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교과서는 정말 내가 가져오지 않았어. 아마도 애들이 가져간 것 같은데 내일 학교에 가면 돌려주라고 할게.”연이도 하준이와 마찬가지로 학교에서는 짱이었다. 친구를 괴롭히는 일은 없었지만 너무 인기가 많아서 여자아이들이 그녀를 짱으로 받들고 남자아이들도 하루 종일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꼬리를 흔들었다.반면, 심우주는 착실히 공부만 했고 가끔 연이의 괴롭힘에 그는 반격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였기 때문에 심우주는 그런 그녀가 얄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가 제멋대로 하는 걸 사랑스럽게 지켜보았았다. 다들 오냐오냐하니까 연이는 학교에서도 늘 제멋대로였다. 그러나 그 당시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던 심우주는 연이의 그런 모습에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다. 잠시 후, 어른들에게 차례로 작별 인사를 마친 이하준이 차에 올라탔다. 늘 차갑기만 하던 아이가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차에서 내려와 서유를 덥석 끌어안았다.“엄마, 몸 잘 챙겨요.”갑작스러운 아이의 행동에 서유는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하준아, 엄마 아빠는 집에서 우리 하준이 기다리고 있을게.”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손을 풀고 옆에 있던 이승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아빠, 제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아빠도 절 이길 수 없을 거예요.”입꼬리를 살짝 올리던 그가 손을 뻗어 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남의 칼에 찔리기 쉬운 법이야. 자세를 낮추는 법을 배우거라.”아빠의 충고를 아이는 가슴 깊이 새겼다.“네, 그렇게 할게요.”이내 그가 허리춤에서 ‘S'라고 새겨진 금빛 칼을 꺼내 아이한테 건네주었다. “돌잡이 때 네가 잡은 칼이야. 이제는 네가 갖고 있어.”전에 소지섭한테서 아빠의 이야기를 들은
서유는 어쩔 수 없이 의사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문밖을 지키고 있던 소지섭은 의사가 떠나는 것을 보고 급히 물었다.“방금 연이랑 하준이가 와서 묻더라고요. 대표님한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서유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이승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감기라고 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고개를 끄덕이던 소지섭은 자리를 떴고 그녀 혼자 덩그러니 문밖에 서 있었다. 그가 얼마나 더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을지...어느 순간 갑자기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가 옆에 있어도 그녀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하준이 유학길에 오른 그날, 이씨 가문과 상씨 가문 사람들이 그를 배웅하러 왔다. 마치 하준이의 돌잡이 때처럼 정원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어른들의 모습이 이미 많이 변했고 아이들도 훌쩍 자란 상태였다. 서유와 이승하의 우월한 유전자만 이어받은 이하준은 10살밖에 안 된 나이지만 정교한 이목구비에 곧은 몸매를 가지고 있어 보기만 해도 귀티가 철철 흘러넘쳤다. 게다가 180 가까이 되는 아이큐를 가지고 있어 누가 봐도 엄친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특히 이연석은 흰색 스웨터 차림에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한 손에 가방을 든 채로 계단을 내려오는 이하준의 모습을 보고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았다. 그는 옆에서 초등학생 교복을 입은 채 케이크를 뺏어 먹고 있는 오뚝이와 깡순이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똑같은 10살인데 이게 뭐냐? 누구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명문 학교에 입학하고 누구는 아직도 초등학교나 다니고 있으니.”그 말에 정가혜가 그를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는 거죠. 내가 몇 번을 말해요. 자꾸만 애들 다그치지 말라고 했죠.”이를 갈던 그가 두 아이 앞으로 다가가 케이크를 낚아채 입에 쑤셔 넣었다.“너희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로 일찍 진학 못 하면 아빠 진짜 가만 안 둬.”두 아이는
“승하 씨...”깜짝 놀란 그녀는 미친 듯이 핸드폰을 찾았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어떻게 의사를 찾아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애틋한 그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긴장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고 바닥을 짚고 있던 손에도 덩달아 힘이 풀렸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고 입술이 파르르 떨려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당신... 왜... 그래요?”지난 10년 동안, 이승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지내온 그녀는 거의 울어본 적이 없다. 잠깐 정신을 잃은 모습에도 이렇게 펑펑 우는 것을 보니 그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애써 두통을 참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던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녀를 품에 안고 소파에 쓰러지더니 세월조차 비껴간 잘생긴 얼굴을 살짝 치켜들었다.“깊게 잠이 든 것뿐이야. 왜 이렇게 겁을 먹어?”말을 하면서 손을 뻗어 눈물로 뒤덮인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부러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당신 요즘 살이 좀 오른 것 같은데.”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그녀는 눈물이 글썽한 두 눈을 들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도 그렇죠. 어떻게 사람이 깨우는데 아무 반응이 없어요?”맑고 깨끗한 그녀의 눈을 그는 차마 마주칠 수가 없었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떼어 그녀의 등을 눌러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얹었다. “바보,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야. 피곤할 때는 꿈을 꾸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거든.”그 말을 그녀는 당연히 믿지 못하였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왜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있었다.단단한 가슴 위에 얹혀있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미안해요. 당신 머릿속에 있는 칩을 꺼낼 의사를 찾아야 하는데...”겁이 났다. 이승하를 잃을까 봐 두려웠다. 자신을 목숨보다 더
지난주, 토론 대회에 나간다고 말하는 연이를 향해 이하준은 엄청 비꼬았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연이는 씩씩거리며 이하준과 내기를 했고 뜻밖에도 그녀가 이기게 될 줄은 몰랐다.눈꺼풀을 내리깔던 하준이가 손을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평소에 그렇게 재잘재잘하더니 실력 한번 제대로 발휘했네. 축하해.”진심으로 축하하는 것 같지 않고 그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아무튼 이번에는 네가 졌어. 그러니까 잊지 말고 돈 입금해.”이하준은 천천히 냅킨을 깔면서 담담하게 말했다.“밥 먹고 나서 줄게. 근데 누나...”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기세등등하게 연이를 쳐다보았다.“누나 올해 열일곱이지? 아직까지 고등학교에 다니고. 수시 자격도 따내지 못했으니 수능 봐서 어떤 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지 정말 걱정이다.”그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너... 명문대에 합격했다고 잘난 척하지 마. 내년에 나도 그 학교에 합격할지 모르니까.”이하준은 칼과 포크를 집어 들고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었다.“그럼 내 후배가 되는 건가?”화가 난 연이가 반격할 겨를도 없이 그가 또 빈정거렸다.“내년에 학교에서 만나. 만나면 나한테 선배라고 부르는 거 잊지 말고.”“아악. 열받아 죽겠네.”연이가 가슴을 내리치더니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서유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기댄 채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이모, 하준이 쟤 정말 얄미워죽겠어요. 빨리 학교에 보내버려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요.”서유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막상 가고 나면 또 보고 싶을걸?”“아니요.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입을 삐죽거리면서 시선은 이하준의 얼굴로 향해 있었다. 솔직히 이 녀석과 10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정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얄미운 동생인 건 사실이다.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웃음을 짓던 서유가 포크로 과일을 집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연이는 과일을 받아먹으면서 이하준을 향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 회사에서 돌아온 서유는 정원에서 칼자루를 쥔 채 아이한테 칼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다가가 말을 건네려고 했지만 아름다운 광경에 발걸음을 멈추고는 문 옆에 살짝 기대어 잔디밭의 크고 작은 그림자를 멀리서 바라보았다. 아이한테 관심이 없었던 남자는 아이를 뛰어난 인재로 키우기 위해 온갖 정성을 쏟았다. 시간이 흘러 아이는 아빠를 존경했고 아빠를 많이 따랐다. 이승하는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빠였다. 그가 있었기 때문에 이 집이 따뜻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좋은 남자가 그녀와 아이의 옆에서 평생을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랐다. 잠시 후,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날카롭던 시선도 이젠 나이가 드니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세월마저 그의 얼굴을 그냥 스쳐 지나간 듯 그는 처음 봤을 때와 큰 차이가 없었다. 검은색 셔츠와 긴 바지 사이에 흰색 허리띠를 두르고 있는 그의 몸이 석양 아래에 우뚝 서 있었고 그가 양쪽 허리춤에 손을 얹고 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머리 뒤로 잘 빗겨져 있었고 약간 고개를 돌리니 머리카락이 왼쪽으로 살짝 흔들렸다. 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서유한테 가까이 오라고 했다. 옅은 미소를 짓던 그녀는 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소지섭을 지나치다가 손에 있던 손수건을 챙겨 앞으로 다가갔다. “여보, 허리 숙여요.”그가 허리를 약간 숙이자 서유는 발끝은 세우고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주었다.“저녁에 뭐 먹고 싶어요?”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잡자 가녀린 그녀가 그의 품에 쏙 들어왔다. “우리 서 대표님이 직접 요리를 하실 건가?”그의 장난에도 그녀는 화를 내지 않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그렇게 좀 부르지 말아요.”지난 5년 동안 서유도 많이 바삐 보냈고 자신의 건축 사무소까지 차렸다. 그러나 프로젝트를 많이 맡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남편과 아이를 돌봤다. 하지만 이승하는
그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칼, 총, 레이싱카, 배, 비행기 이것들 중에서 뭐부터 배우고 싶어?”하준이가 초롱초롱한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아빠, 저한테 가르쳐주시려고요?”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던 남자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이론 지식은 이미 거의 다 배웠으니 이제부터는 호신술을 가르쳐 줄 생각이야. 나중에 날 대신해 네가 엄마를 지켜줘야 하니까.”아이는 머리를 살짝 기울인 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아빠가 옆에 있는데 왜 제가 엄마를 지켜줘야 해요?”벌써 두통 증상이 심해진 그는 머릿속에 있는 칩에 대해 아이한테 얘기하지 않았다.“당분간은 로봇 프로젝트 때문에 많이 바쁠 거야. 자주 자리를 비우게 될 테니까 내가 없는 동안에는 네가 엄마를 지켜줘야 해.”요즘 아빠가 로봇 개발 중인 걸 알고 있던 이하준은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열심히 배워서 엄마를 지켜줄 거예요.”아이의 약속을 듣고 이승하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일단 총 쏘는 법부터 가르쳐줄게.”하준이도 냉큼 그의 뒤를 따라 일어섰다.“세 살 때, 총을 가지고 놀다가 아빠한테 호되게 맞았던 적이 있었는데. 다시는 총을 못 잡게 할 줄 알았어요.”아이가 그 어릴 때의 일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는 네가 너무 어렸으니까 총을 가지고 놀지 못하게 한 거야.”“저 이제 겨우 10살인데요. 지금은 총 가지고 노는 거 안심하세요?”발걸음을 멈추던 그가 뒤돌아서 어느새 허리 높이까지 키가 훌쩍 큰 아이를 바라보았다.“이제 곧 공부하러 해외로 가잖아. 돌아와서 배우면 그땐 이미 늦었어.”천재가 맞는 건지 하준이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학교의 입학 통지서를 받게 되었고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이국땅에서 다른 천재 아이들과 함께 공부를 하게 되었다. 서재로 들어간 그는 10년 동안 사용하지 않은 총을 꺼내 하준이를 데리고 정원으로 향했다.한편, 이승하가 아이에게 사격을 가르치려 한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이연석은 급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아닙니다. 그냥 기부하려던 거예요.”하지만 전문가는 그런 돈을 받을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의 고지식한 태도에 이연석은 화가 나서 책상을 치며 일어섰다.“그러니까 머리카락 한 올 없이 다 빠졌지! 다 선생님 고지식함이 다 빨아먹은 거예요!”전문가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같은 책상을 치며 맞섰다.“도련님, 제 지능을 모욕하는 건 참겠는데, 머리카락을 모욕하는 건 안 됩니다!”“그래요? 그럼 선생님 머리카락을 모욕하죠!”두 사람이 거의 싸울 뻔한 순간, 이하율 남매가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아빠, 우리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너무 배고파요...”이연석은 남매에게 화살을 돌리며 소리쳤다.“하루 종일 먹을 것만 찾고! 하준이처럼 간식 줄이고 책 좀 보란 말이야!”이하율 남매는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아빠, 우린 아직 글도 다 못 읽어요. 책 보는 것도 재미없어요. 우리에겐 간식이 제일 재미있어요.”옆에 있던 전문가는 그 말을 듣고 자신감이 생겼다.“보세요. 이 두 아이가 어디 130과 148의 IQ를 가진 것처럼 보이시나요?”이연석은 할 말을 잃었다. 화가 난 그는 두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이 고집불통 대머리야! 이런 허접한 기관은 확 망해버려!”전문가는 속으로 생각했다.‘지금까지 수많은 IQ 테스트를 해봤지만, 이런 사람은 처음이야. 이럴 수가!’A시로 돌아가기 전, 이연석은 테스트 결과를 컴퓨터로 수정하고 새로 출력한 뒤 두 아이를 데리고 이승하를 찾아갔다.“형, 봐봐. 우리 애들도 IQ가 엄청 높아! 특히 내 아들, 148이야! 나중에 mensa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그 말을 듣던 이승하는 고개도 들지 않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이하율에게 물었다.“오뚝아, 68 곱하기 42는 얼마야?”감자칩을 먹으며 손에 기름이 잔뜩 묻은 이하율은 손가락을 세며 계산하기 시작했다.3분 뒤, 그는 대답했다.“110!”순간 이연석은 참지 못하고 이하율을 향해 발길질을 하
흐트러진 커튼 너머로 달빛이 스며드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서유는 무의식적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해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크게 외쳤다.“여보, 성재 씨의 보디가드가 그러던데 그 사람이 망원경으로 우리 집을 자주 훔쳐본대요. 제발 여기선 그러지 마요.”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던 이승하는 짙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는 맞은편 별장을 한 번 흘겨보더니, 아무렇지 않은 척 리모컨을 집어 들고 불을 꺼버렸다.“걱정 마, 안 보여.”“하지만...”서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자 팔걸이에 손을 짚은 이승하가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리고 늑대처럼 그녀의 혀끝을 휘감아 그녀가 하려던 말을 그대로 삼켜버렸다.처음에는 저항하던 서유도 이승하가 한쪽 무릎을 꿇는 순간, 온몸이 떨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두 손톱으로 의자 등받이를 필사적으로 긁을 뿐이었다.예전에는 체력에만 의지하던 이승하가 오늘은 어쩐 일인지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가 꺼낸 물건들은 서유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제발 그런 거 쓰지 마요!”서유가 간절히 부탁했지만, 남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낮고 매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여보, 참지 말고 소리 내봐.”서유는 도저히 소리를 낼 수가 없어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런 그녀를 본 이승하는 도구와 체력을 총동원해 강도를 높였다.“난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만약 방음이 되지 않았다면, 그리고 커튼이 창문을 가리지 않았다면, 서유는 지금 부끄러움에 혀를 깨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더욱 끔찍한 것은 그녀가 꼼짝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저 이승하에게 온전히 ‘당하기’만 했다.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두 번, 세 번...기진맥진한 서유는 뒤돌아 닫혀 있는 방문을 바라보며 간절히 바랐다.‘제발, 하준이가 문을 두드리며 배가 아프다고, 병원에 같이 가달라고 했으면...’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이하준은 수많은 문제 속에 갇혀 있었다.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