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련님, 미안해요. 승하 씨가 말솜씨가 별로라서 그래요.” 서유는 이승하를 약간 꾸짖듯 바라보며 말했다. “차라리 당신 먼저 돌아가고, 내가 여기 남아서 아기들이랑 좀 더 시간을 보낼게요.” 이미 소파에 앉아 있던 이승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내가 같이 있을게.” 즉, 서유가 가지 않으면 그도 가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연석은 도움을 청하듯 서유를 바라보았다. 서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아쉬운 마음으로 아이를 유나희에게 돌려주었다. 아기를 받아든 유나희는 아이가 정말 좀 못생겼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유나희는 아기를 한 번 보고, 이연석과 정가혜를 번갈아 보며 생각했다. 부모는 전혀 못생기지 않았는데, 어째서 아이는 이렇게 못생겼지? 유나희는 점점 아기가 못생겼다고 느껴져서 결국 아기를 다시 서유에게 건넸다. “숙모인 네가 여기 남아서 아기를 좀 더 안아줘.” 서유는 기쁘게 아기를 다시 품에 안으며 말했다. “그럼 좀 더 안아보다가 집에 돌아가야겠네요.” 병실에서 서유만이 아기가 귀엽다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들은 못생겼다고 생각을 했지만 아무도 그걸 입 밖에 내진 않았다. 서유는 한 손으로 아기를 안고 다른 손으로 아기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도련님, 어릴 때 조금 덜 예뻐 보이는 아이들이 커서 더 예뻐질 때가 많아요. 도련님이랑 가혜는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둘째 형수가 해주는 말은 항상 따뜻해서, 이연석은 이내 얼굴을 펴며 웃었다. “그렇죠! 저랑 가혜는 이렇게 잘생기고 예쁜데, 우리가 낳은 아이는 당연히 커가면서 더 예뻐질 거예요!” 턱을 괴고 있던 이승하는 그의 말을 듣고 살짝 미소 지으며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열었지만 이연석이 재빠르게 막았다. “형, 듣기 좋은 말이 아니면 하지 마!” 이승하는 시선을 서유에게 돌렸다. 서유는 그에게 귀여운 표정으로 엄하게 경고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이승하는 결국 입에 담으려던 ‘듣기 좋고 친절한
흰 셔츠를 입은 송사월은 말끔한 모습으로 문밖에 서 있었다. 휠체어에 앉아 있던 모습과는 달리 우뚝 선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온화한 서유의 시선이 그의 깨끗한 얼굴에서 다리로 옮겨졌다. 곧게 편 다리로 천천히 병실로 들어서는 그를 보며 그녀는 마음속에 쌓여있던 죄책감이 점차 사라져 버렸다. 마침내 송사월은 일어섰고 휠체어에 앉아 남은 인생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다. 이제부터는 정상적인 사람처럼 살 수 있게 되었다. 건강한 그의 모습에 서유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이승하가 옆에 있었기 때문에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이내 시선을 피했다. 송사월 또한 그녀에게 시선을 오래 두지 못하였다. 이미 스쳐 지나간 인연, 놓을 수가 없다면 마음속 깊이 묻어둘 수밖에.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여자이고 멀지 않아 엄마가 될 여자이니 아무리 힘들어도 그는 감정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이지민을 따라 정가혜에게 다가가자 서유는 아이를 안고 일어서며 그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는 스쳐 지나가는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고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서유가 그의 옆으로 다가와 앉더니 소매를 잡아당기면서 잠든 아기가 얼마나 귀여운지 보여주었다. 그녀는 온통 아이한테 정신이 팔려있었고 송사월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듯했다. 더 이상 송사월이라는 존재가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자신을 가득 담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이승하는 무의식적으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러더니 웬일인지 갑자기 손을 뻗어 아이의 작은 입술을 살짝 건드렸다.부드러운 아이의 살갗이 닿자 차가웠던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바로 그때, 서유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귀엽죠?”“귀엽게 못생겼네.”“남의 아이가 못생겼다고 하면 내 아이도 못생겨진대요.”그가 도도한 얼굴로 한마디 툭 내뱉었다.“당신이랑 내 아이인데, 어떻게 못생길 수가 있겠어?”작은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말소리가
그녀가 송사월과 함께하며 힘든 시간을 견뎌내는 동안 단이수는 등 뒤에 숨어서 그녀가 점점 송사월에게 마음이 뺏기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뼛속 깊이 새긴 그 사람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걸 보는 게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그녀의 입에서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단이수는 심장이 뻥 뚫린 것 같았다. 뼈가 긁히는 고통이 손바닥으로 파고들어 온몸에 펴졌고 살을 한 조각 한 조각 베어내듯 피가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이렇게 아프고 나니 갑자기 사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벽에 기댄 채 등을 돌린 그는 눈물이 글썽한 눈을 들 어올려 푸른 하늘을 쳐다보았다.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그의 마음은 왜 상처투성이인 것인지.이지민, 난 이미 준비가 다 되어있단 말이야. 평생 동안 묵묵히 네 곁을 지킬 생각이었어. 너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길 바랐는데... 결국은 네가 먼저 그걸 깨버리는구나.그러나 그 약속은 그녀와 상관없이 자신이 결정한 것이라는 걸 잊은 듯했다. 그러니 약속이 깨진 아픔은 스스로 감수할 수밖에. 그 아픔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는 손을 뻗어 썩을 대로 썩은 아픈 심장을 누르고 서유 옆에 앉아 있는 이지민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예전에 그가 모질게 떠났을 때 그녀는 하늘에 맹세했었다.“단이수, 똑똑히 기억해. 난 이제부터 오빠를 완전히 잊어버릴 거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거야. 그때 가서 다시 고개 돌리지 마. 오빠가 다시 뒤돌아선다면 내가 천벌 받을 거야.”귀청을 찢을 듯한 그 맹세가 수없이 깊은 밤 그의 가슴을 두드렸고 뼈에 사무칠 정도로 아팠다.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가 없어서 지금까지도 머릿속에 새겨져 있다.그 맹세가 현실이 되는 게 두려워 그는 그동안 그녀의 곁에서 지켜보기만 했었다. 그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러나 정말 이날이 찾아왔고 이렇게 고통스러운 줄은 몰랐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 후 이지민이 송사월에 대해 다시 언급할 때, 정가혜는 그녀에게 어떻게 송사월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물었었다. 송사월이 혼자 창가에 앉아 꽃을 볼 때마다 그가 불쌍하고 외로워 보였다고 했다. 그 사람을 안타까워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 마음이 기울어졌다는 뜻 아니겠는가? 그녀는 마음이 가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자신을 성에 가둔 송사월의 마음에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이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의 인생에 그의 세상에 그의 모든 것에는 서유밖에 없었다. 이지민이 마음을 드러내도 송사월은 거절했고 심지어 치료도 거부하고 그녀가 찾아오는 것조차 거부했다.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서유 이외의 그 어떤 여자도 다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마음을 열고 누군가를 받아들이게 되면 또다시 서유를 잊어버릴까 봐 겁이 났다. 서유와 어긋난 인연은 자신의 기억 상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여 그 누구도 그 어떤 일도 그의 마음에 들어와 그의 기억을 차지할 수는 없었다.하지만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이지민은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어쩌면 단이수를 사랑했던 것만큼 그를 사랑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을 다시 열게 해준 남자이니 그녀한테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단이수가 뒤에서 묵묵히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다. 다만 그녀는 쉽게 뒤돌아서는 사람이 아니다. 살면서 한번 또 한 번의 생이별을 겪게 되면 다시 뒤돌아설지도... 그들 세 사람의 일에 대해 서유는 더 이상 개입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도 자신만의 생활이 있고 지켜야 할 사람이 있으니까. 각자 잘 지내고 무사하면 된 것이다. 잠시 후, 정가혜와 함께 있던 서유는 이승하의 손에 이끌려 블루리도로 돌아갔다.차에서 내리자마자 차에 기대어 있는 육성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쌀쌀해진 날씨에 육성재는 얇은 블랙 코트를 입고 있었다. 준수한 얼굴의 그가 자신의 블랙 부츠를 쳐다보고 있는데 떨어진 검은 잔머리가 가끔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고독하고 쓸쓸해 보였다.
택이의 말에 맑고 깨끗하던 이승하의 눈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헤아릴 수 없는 후회가 밀려왔다. 짙은 속눈썹을 내리던 그의 눈 밑에 옅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잠시 후, 남자는 눈 밑의 아픔을 감추고는 고개를 들어 굳은 얼굴로 육성재를 쳐다보았다.“택이를 닮았다는 그 사람, 이름이 뭐야?”“주진모.”주진모.... 이승하는 마음속으로 그 이름을 곱씹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마침 일이 있어서 귀국했어. 겸사겸사 당신한테 알려주려고 찾아온 거야.”사실 이런 일은 전화로 알려주면 되는 것이었다. 그가 일부러 여기까기 찾아온 이유가 뭔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반대편에서 똑같이 짙은 색 코트를 입고 은은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던 남자가 그걸 왜 알아차리지 못했겠는가?그걸 알면서도 감정조절이 잘 안되는 육성재는 또 자기 멋대로 행동했다. 그동안 이상한 꿈을 꿨었는데 꿈에서 서유가 비틀거리며 그에게로 달려왔다. 그는 그녀를 단단히 붙잡고 말했다.“그래요. 나랑 같이 가요.”꿈에서 깬 그는 침대에 기대어 앉아 창밖의 쓸쓸한 풍경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꿈을 잊지 못하였다. 그 꿈 때문에 내려놓아야 할 마음이 또다시 설레기 시작했다. 맞은편, 두 사람이 손을 꼭 잡고 다정하게 서 있는 모습에 그는 그게 그저 꿈일 뿐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어차피 이루어질 수도 없는 허망한 꿈. “고마워.”뱀굴 속의 광경을 떠올리던 이승하가 무거운 마음을 거두고는 다시 육성재를 쳐다보는데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는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육성재의 시선을 따라 서유와 맞잡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는 순간, 그는 분노에 찬 육성재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육성재.”차가운 목소리에 육성재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드니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승하와 눈이 마주쳤다.“내 아내를 구해줘서 정말 고마워. 그리고 여기까지 찾아와서 이 소식을 내게 전해준 것도 고맙고.”그의 말에 가시가 박혀있었다. 자신에게 경고하는 말이라는
세 사람이 함께한 마지막 식사를 그녀도 기억하고 있었다. 단호한 그녀의 모습에 그는 더 이상 거절하지 않았다.“그래. 같이 가자.”그녀는 손을 뻗어 단단한 남자의 팔을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집에 가요. 여보.”남자는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잡고 한 손으로 그녀의 배를 잡고는 그녀와 함께 나란히 블루리도로 들어갔다.두 사람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보고 주태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기쁜 표정을 지으며 셰프한테 음식을 준비하라고 하였고 또 사람을 보내 연이를 데려오라고 하였다. 오랫동안 연이를 보지 못한 서유는 아이가 보고 싶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아직 어린아이한테 달랑 편지 한 통만 남기고 떠난 것이 너무 미안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주태현이 한마디 거들었다.“연이가 참 착해요. 이모랑 이모부한테 일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지 가끔 칭얼거리는 해도 떼를 쓴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울지도 않았어요?”“심이준 씨랑 조지가 곁에 있어 주고 달래주니 아이가 울고 싶어도 그럴 시간이 없었네요. 밤에 자다가 가끔은 울다가 깬 적이 있었죠. 어르고 달래니 또 금방 잠이 들더라고요.”아이가 몇 번 울었다는 말에 서유는 마음이 아파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주태현은 급히 그녀를 다독였다. “이모부한테만 화가 났다고 했어요.”“왜요?”“도련님이 얼마 전에 돌아왔었는데 연이가 학교 끝나고 집에 오기도 전에 떠났었거든요. 얼굴도 안 보고 갔다고 아이가 어찌나 화를 내던지. 이모부가 돌아오면 다시는 말 걸지 않겠다고 했어요.”그 얘기에 안색이 어두워진 그를 보며 서유는 피식 웃었다.“아직 어려서 그래요. 애들은 돌아서면 잊어버리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그러나 학교에서 돌아온 연이는 정말 이승하를 무시했다. 아무리 선물을 사서 달래봐도 소용없었다. 아이가 이제는 좀 컸다고 얼마나 고집이 센 건지, 이승하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고 더 이상 달래주지도 않았다.이모부가 자신을 외면하자 연이는 오히려 마음이 불편했다.
그는 더 이상 반박하지 않고 그녀가 얘기하길 기다렸다.“전에 사월이랑 약속했었거든요. 다리가 회복되어 다시 일어서게 되면 큰 선물을 해주겠다고요.”그가 오해할까 봐 그녀는 한마디 더 보탰다.“육성재 씨가 날 살려준 은혜도 갚아야 하고요. 그리고 연이를 돌봐준 이준 씨와 조지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하지 않을까요...”해명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당신 뜻대로 해. 내 허락 구할 필요 없어.”그녀는 잘생긴 남자의 얼굴을 살짝 치켜들고는 입술을 맞추었다. “당신 진짜 좋은 사람이에요.”“지금 바로 선물 몇 가지 준비해서 주 집사님한테 전달해달라고 부탁할게요.”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그가 그녀를 잡았다.“뭘 선물할 건지 나한테 말해. 내가 준비할게.”그는 조금도 그녀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좋은 남편이라...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졌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선물하고 싶었은 물건들은 일일이 그한테 얘기했더니 그는 바로 아랫사람들에게 준비하라고 명했다. 잠시 후, 그가 그녀를 부축하여 방으로 돌아갔다.서유가 혼자 샤워를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 그녀를 씻겨주었다.샤워를 마친 뒤 그녀에게 가운을 입혀주고는 그녀를 안아 침대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욕실로 다시 들어가 찬물에 샤워를 하며 들끓는 욕망을 가라앉혔다.욕망이 이글거리는데 안을 수 없고 만질 수도 없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얼마나 괴로운지. 그가 턱을 약간 젖히고 차가운 물에 얼굴을 적셨다. 살짝 벌어진 얇은 입술과 야릇한 자세에 욕정이 가득했다.잠시 후, 그가 간신히 참으며 서유의 곁에 다가가 누웠다. 품에 안겨 있는 그녀의 향긋한 살냄새를 맡으며 침을 꿀꺽 삼키던 그는 애써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연이는 학교에 갔고 주태현은 선물을 전달하러 집을 나섰으며 이승하와 서유는 다시 전용기에 올랐다. 두 사람이 치앙라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정오가 다 된 무렵이었고 푸른 하늘에 햇볕이 내리쬐고 날씨는 덥지도 춥지도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김선우는 너무 놀라서 밤새도록 잠을 이루리 못하였다. 이씨 가문과 김씨 가문은 원수 사이인데 이승하의 관계로 친척이 되었으니 누가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복수를 하고 싶었지만 김종수는 가족이니 복수는 그만두라고 경고했다. 이씨 가문에서 김씨 가문을 상대로 뒤에서 칼을 찌르는 사람이 없는 한 이승하를 찾아가 복수할 생각 따위는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김종수가 이렇게 당부한 이유는 바로 김선우의 머리로는 이승하의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김씨 가문의 마지막 핏줄을 지키기 위해 김종수는 좋은 말로 그를 타일렀다. 그 관계를 빌미로 설득한 걸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김씨 가문의 사람들이 아닌 이승하였다. 어찌 됐든 이제부터는 김종수를 만나면 외삼촌이라고 불러야 했고 촌수로만 놓고 보면 이씨 가문에서 피해를 본 거나 다름이 없으니까. 그 말을 듣고 김선우는 갑자기 눈빛을 반짝이며 허벅지를 탁 내리쳤다. 그러고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김종수의 팔을 흔들어댔다.“아버지, 진짜 대단하세요. 촌수로만 보면 우리 김씨 가문이 우세 아닌가요? 이제부터 허리 쭉 펴고 다니겠네요.”바보같이 천진난만한 아들의 모습에 김종수는 손을 뻗어 등짝을 한 대 때리고는 발로 걷어찼다. 그러나 김선우는 전혀 개의치 않았고 이내 짐을 싸서 치앙라이로 달려왔다. 이 기쁜 소식을 사촌 형과 사촌 누나에게 알리고 싶었다. 그런데 공항 문을 나서자마자 이들을 만나게 될 줄이야. 흥분에 겨운 김선우는 한 가지 일을 생각지 못하였다.“형, 이 대표님이 우리 아버지한테 외삼촌이라고 불러야 하고 고모한테 이모라고 불러야 한대. 그리고...”김선우가 손가락을 뻗어 뒷좌석에 앉아 한마디도 하지 않는 서유를 가리켰다.“누나가 우리 김씨 가문의 사람은 아니지만 누나의 엄마가 우리 가문에서 자랐으니 나한테는 작은이모가 되는 거지. 이 대표님도 작은이모라고 불러야 하는 거잖아. 너무 웃기는 관계 아니야?”말을 마치고는 입을 가린 채 껄껄 웃었다. 귀에 거슬리는 웃
그가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입을 열었다.“난 죽는 게 두려운 사람이 아니었어. 그런데 당신을 만난 후부터 죽는 게 그렇게 겁이 나더라.”죽는 게 두려웠기 때문에 전 서계를 돌아다니며 의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원하는 결과는 끝내 얻지 못하였고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기만 했다. 겁이 난 서유는 그를 꼭 껴안았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당신한테는 내가 있고 우리 하준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절대 죽으면 안 돼요. 당신이 죽으면 우리는 어떡하라고요?”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미 5년을 버텨온 그는 점점 더 통증이 심해졌고 하느님이 조금씩 조금씩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통이 전해지는 횟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통증은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칩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것 같았다. 다만 떠나기 전에 모든 일을 다 마치고 가야 하는데...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품 안에 있는 여인이 가장 걱정되었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깊이 파고들었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만큼 뜨겁고 짜릿한 느낌, 슬픈 마음을 녹일 수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은 뜨겁게 몸을 섞으며 하나가 되었다. 그녀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쯤, 두 사람의 아찔한 행위가 끝이 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소중한 물건을 끌어안듯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유람선 안으로 들어온 희미한 달빛을 빌려 그가 세월의 흔적도 없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다음 생에도 당신이 내 여자였으면 좋겠는데. 당신의 다음 생은 송사월한테 주기로 약속했었나?”아직 잠들지 않은 서유가 그의 가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번 생에 당신이 나보다 먼저 가면 나 절대 당신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다음 생에 당신 안 만날 거라고요.”그가 슬픈 표정을
그 당시 풋풋한 어린 소녀였던 연이는 심우주가 자신과 같은 학교에 간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교과서는 정말 내가 가져오지 않았어. 아마도 애들이 가져간 것 같은데 내일 학교에 가면 돌려주라고 할게.”연이도 하준이와 마찬가지로 학교에서는 짱이었다. 친구를 괴롭히는 일은 없었지만 너무 인기가 많아서 여자아이들이 그녀를 짱으로 받들고 남자아이들도 하루 종일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꼬리를 흔들었다.반면, 심우주는 착실히 공부만 했고 가끔 연이의 괴롭힘에 그는 반격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였기 때문에 심우주는 그런 그녀가 얄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가 제멋대로 하는 걸 사랑스럽게 지켜보았았다. 다들 오냐오냐하니까 연이는 학교에서도 늘 제멋대로였다. 그러나 그 당시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던 심우주는 연이의 그런 모습에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다. 잠시 후, 어른들에게 차례로 작별 인사를 마친 이하준이 차에 올라탔다. 늘 차갑기만 하던 아이가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차에서 내려와 서유를 덥석 끌어안았다.“엄마, 몸 잘 챙겨요.”갑작스러운 아이의 행동에 서유는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하준아, 엄마 아빠는 집에서 우리 하준이 기다리고 있을게.”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손을 풀고 옆에 있던 이승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아빠, 제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아빠도 절 이길 수 없을 거예요.”입꼬리를 살짝 올리던 그가 손을 뻗어 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남의 칼에 찔리기 쉬운 법이야. 자세를 낮추는 법을 배우거라.”아빠의 충고를 아이는 가슴 깊이 새겼다.“네, 그렇게 할게요.”이내 그가 허리춤에서 ‘S'라고 새겨진 금빛 칼을 꺼내 아이한테 건네주었다. “돌잡이 때 네가 잡은 칼이야. 이제는 네가 갖고 있어.”전에 소지섭한테서 아빠의 이야기를 들은
서유는 어쩔 수 없이 의사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문밖을 지키고 있던 소지섭은 의사가 떠나는 것을 보고 급히 물었다.“방금 연이랑 하준이가 와서 묻더라고요. 대표님한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서유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이승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감기라고 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고개를 끄덕이던 소지섭은 자리를 떴고 그녀 혼자 덩그러니 문밖에 서 있었다. 그가 얼마나 더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을지...어느 순간 갑자기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가 옆에 있어도 그녀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하준이 유학길에 오른 그날, 이씨 가문과 상씨 가문 사람들이 그를 배웅하러 왔다. 마치 하준이의 돌잡이 때처럼 정원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어른들의 모습이 이미 많이 변했고 아이들도 훌쩍 자란 상태였다. 서유와 이승하의 우월한 유전자만 이어받은 이하준은 10살밖에 안 된 나이지만 정교한 이목구비에 곧은 몸매를 가지고 있어 보기만 해도 귀티가 철철 흘러넘쳤다. 게다가 180 가까이 되는 아이큐를 가지고 있어 누가 봐도 엄친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특히 이연석은 흰색 스웨터 차림에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한 손에 가방을 든 채로 계단을 내려오는 이하준의 모습을 보고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았다. 그는 옆에서 초등학생 교복을 입은 채 케이크를 뺏어 먹고 있는 오뚝이와 깡순이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똑같은 10살인데 이게 뭐냐? 누구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명문 학교에 입학하고 누구는 아직도 초등학교나 다니고 있으니.”그 말에 정가혜가 그를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는 거죠. 내가 몇 번을 말해요. 자꾸만 애들 다그치지 말라고 했죠.”이를 갈던 그가 두 아이 앞으로 다가가 케이크를 낚아채 입에 쑤셔 넣었다.“너희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로 일찍 진학 못 하면 아빠 진짜 가만 안 둬.”두 아이는
“승하 씨...”깜짝 놀란 그녀는 미친 듯이 핸드폰을 찾았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어떻게 의사를 찾아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애틋한 그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긴장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고 바닥을 짚고 있던 손에도 덩달아 힘이 풀렸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고 입술이 파르르 떨려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당신... 왜... 그래요?”지난 10년 동안, 이승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지내온 그녀는 거의 울어본 적이 없다. 잠깐 정신을 잃은 모습에도 이렇게 펑펑 우는 것을 보니 그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애써 두통을 참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던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녀를 품에 안고 소파에 쓰러지더니 세월조차 비껴간 잘생긴 얼굴을 살짝 치켜들었다.“깊게 잠이 든 것뿐이야. 왜 이렇게 겁을 먹어?”말을 하면서 손을 뻗어 눈물로 뒤덮인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부러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당신 요즘 살이 좀 오른 것 같은데.”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그녀는 눈물이 글썽한 두 눈을 들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도 그렇죠. 어떻게 사람이 깨우는데 아무 반응이 없어요?”맑고 깨끗한 그녀의 눈을 그는 차마 마주칠 수가 없었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떼어 그녀의 등을 눌러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얹었다. “바보,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야. 피곤할 때는 꿈을 꾸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거든.”그 말을 그녀는 당연히 믿지 못하였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왜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있었다.단단한 가슴 위에 얹혀있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미안해요. 당신 머릿속에 있는 칩을 꺼낼 의사를 찾아야 하는데...”겁이 났다. 이승하를 잃을까 봐 두려웠다. 자신을 목숨보다 더
지난주, 토론 대회에 나간다고 말하는 연이를 향해 이하준은 엄청 비꼬았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연이는 씩씩거리며 이하준과 내기를 했고 뜻밖에도 그녀가 이기게 될 줄은 몰랐다.눈꺼풀을 내리깔던 하준이가 손을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평소에 그렇게 재잘재잘하더니 실력 한번 제대로 발휘했네. 축하해.”진심으로 축하하는 것 같지 않고 그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아무튼 이번에는 네가 졌어. 그러니까 잊지 말고 돈 입금해.”이하준은 천천히 냅킨을 깔면서 담담하게 말했다.“밥 먹고 나서 줄게. 근데 누나...”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기세등등하게 연이를 쳐다보았다.“누나 올해 열일곱이지? 아직까지 고등학교에 다니고. 수시 자격도 따내지 못했으니 수능 봐서 어떤 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지 정말 걱정이다.”그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너... 명문대에 합격했다고 잘난 척하지 마. 내년에 나도 그 학교에 합격할지 모르니까.”이하준은 칼과 포크를 집어 들고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었다.“그럼 내 후배가 되는 건가?”화가 난 연이가 반격할 겨를도 없이 그가 또 빈정거렸다.“내년에 학교에서 만나. 만나면 나한테 선배라고 부르는 거 잊지 말고.”“아악. 열받아 죽겠네.”연이가 가슴을 내리치더니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서유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기댄 채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이모, 하준이 쟤 정말 얄미워죽겠어요. 빨리 학교에 보내버려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요.”서유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막상 가고 나면 또 보고 싶을걸?”“아니요.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입을 삐죽거리면서 시선은 이하준의 얼굴로 향해 있었다. 솔직히 이 녀석과 10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정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얄미운 동생인 건 사실이다.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웃음을 짓던 서유가 포크로 과일을 집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연이는 과일을 받아먹으면서 이하준을 향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 회사에서 돌아온 서유는 정원에서 칼자루를 쥔 채 아이한테 칼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다가가 말을 건네려고 했지만 아름다운 광경에 발걸음을 멈추고는 문 옆에 살짝 기대어 잔디밭의 크고 작은 그림자를 멀리서 바라보았다. 아이한테 관심이 없었던 남자는 아이를 뛰어난 인재로 키우기 위해 온갖 정성을 쏟았다. 시간이 흘러 아이는 아빠를 존경했고 아빠를 많이 따랐다. 이승하는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빠였다. 그가 있었기 때문에 이 집이 따뜻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좋은 남자가 그녀와 아이의 옆에서 평생을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랐다. 잠시 후,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날카롭던 시선도 이젠 나이가 드니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세월마저 그의 얼굴을 그냥 스쳐 지나간 듯 그는 처음 봤을 때와 큰 차이가 없었다. 검은색 셔츠와 긴 바지 사이에 흰색 허리띠를 두르고 있는 그의 몸이 석양 아래에 우뚝 서 있었고 그가 양쪽 허리춤에 손을 얹고 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머리 뒤로 잘 빗겨져 있었고 약간 고개를 돌리니 머리카락이 왼쪽으로 살짝 흔들렸다. 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서유한테 가까이 오라고 했다. 옅은 미소를 짓던 그녀는 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소지섭을 지나치다가 손에 있던 손수건을 챙겨 앞으로 다가갔다. “여보, 허리 숙여요.”그가 허리를 약간 숙이자 서유는 발끝은 세우고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주었다.“저녁에 뭐 먹고 싶어요?”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잡자 가녀린 그녀가 그의 품에 쏙 들어왔다. “우리 서 대표님이 직접 요리를 하실 건가?”그의 장난에도 그녀는 화를 내지 않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그렇게 좀 부르지 말아요.”지난 5년 동안 서유도 많이 바삐 보냈고 자신의 건축 사무소까지 차렸다. 그러나 프로젝트를 많이 맡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남편과 아이를 돌봤다. 하지만 이승하는
그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칼, 총, 레이싱카, 배, 비행기 이것들 중에서 뭐부터 배우고 싶어?”하준이가 초롱초롱한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아빠, 저한테 가르쳐주시려고요?”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던 남자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이론 지식은 이미 거의 다 배웠으니 이제부터는 호신술을 가르쳐 줄 생각이야. 나중에 날 대신해 네가 엄마를 지켜줘야 하니까.”아이는 머리를 살짝 기울인 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아빠가 옆에 있는데 왜 제가 엄마를 지켜줘야 해요?”벌써 두통 증상이 심해진 그는 머릿속에 있는 칩에 대해 아이한테 얘기하지 않았다.“당분간은 로봇 프로젝트 때문에 많이 바쁠 거야. 자주 자리를 비우게 될 테니까 내가 없는 동안에는 네가 엄마를 지켜줘야 해.”요즘 아빠가 로봇 개발 중인 걸 알고 있던 이하준은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열심히 배워서 엄마를 지켜줄 거예요.”아이의 약속을 듣고 이승하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일단 총 쏘는 법부터 가르쳐줄게.”하준이도 냉큼 그의 뒤를 따라 일어섰다.“세 살 때, 총을 가지고 놀다가 아빠한테 호되게 맞았던 적이 있었는데. 다시는 총을 못 잡게 할 줄 알았어요.”아이가 그 어릴 때의 일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는 네가 너무 어렸으니까 총을 가지고 놀지 못하게 한 거야.”“저 이제 겨우 10살인데요. 지금은 총 가지고 노는 거 안심하세요?”발걸음을 멈추던 그가 뒤돌아서 어느새 허리 높이까지 키가 훌쩍 큰 아이를 바라보았다.“이제 곧 공부하러 해외로 가잖아. 돌아와서 배우면 그땐 이미 늦었어.”천재가 맞는 건지 하준이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학교의 입학 통지서를 받게 되었고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이국땅에서 다른 천재 아이들과 함께 공부를 하게 되었다. 서재로 들어간 그는 10년 동안 사용하지 않은 총을 꺼내 하준이를 데리고 정원으로 향했다.한편, 이승하가 아이에게 사격을 가르치려 한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이연석은 급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아닙니다. 그냥 기부하려던 거예요.”하지만 전문가는 그런 돈을 받을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의 고지식한 태도에 이연석은 화가 나서 책상을 치며 일어섰다.“그러니까 머리카락 한 올 없이 다 빠졌지! 다 선생님 고지식함이 다 빨아먹은 거예요!”전문가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같은 책상을 치며 맞섰다.“도련님, 제 지능을 모욕하는 건 참겠는데, 머리카락을 모욕하는 건 안 됩니다!”“그래요? 그럼 선생님 머리카락을 모욕하죠!”두 사람이 거의 싸울 뻔한 순간, 이하율 남매가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아빠, 우리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너무 배고파요...”이연석은 남매에게 화살을 돌리며 소리쳤다.“하루 종일 먹을 것만 찾고! 하준이처럼 간식 줄이고 책 좀 보란 말이야!”이하율 남매는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아빠, 우린 아직 글도 다 못 읽어요. 책 보는 것도 재미없어요. 우리에겐 간식이 제일 재미있어요.”옆에 있던 전문가는 그 말을 듣고 자신감이 생겼다.“보세요. 이 두 아이가 어디 130과 148의 IQ를 가진 것처럼 보이시나요?”이연석은 할 말을 잃었다. 화가 난 그는 두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이 고집불통 대머리야! 이런 허접한 기관은 확 망해버려!”전문가는 속으로 생각했다.‘지금까지 수많은 IQ 테스트를 해봤지만, 이런 사람은 처음이야. 이럴 수가!’A시로 돌아가기 전, 이연석은 테스트 결과를 컴퓨터로 수정하고 새로 출력한 뒤 두 아이를 데리고 이승하를 찾아갔다.“형, 봐봐. 우리 애들도 IQ가 엄청 높아! 특히 내 아들, 148이야! 나중에 mensa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그 말을 듣던 이승하는 고개도 들지 않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이하율에게 물었다.“오뚝아, 68 곱하기 42는 얼마야?”감자칩을 먹으며 손에 기름이 잔뜩 묻은 이하율은 손가락을 세며 계산하기 시작했다.3분 뒤, 그는 대답했다.“110!”순간 이연석은 참지 못하고 이하율을 향해 발길질을 하
흐트러진 커튼 너머로 달빛이 스며드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서유는 무의식적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해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크게 외쳤다.“여보, 성재 씨의 보디가드가 그러던데 그 사람이 망원경으로 우리 집을 자주 훔쳐본대요. 제발 여기선 그러지 마요.”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던 이승하는 짙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는 맞은편 별장을 한 번 흘겨보더니, 아무렇지 않은 척 리모컨을 집어 들고 불을 꺼버렸다.“걱정 마, 안 보여.”“하지만...”서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자 팔걸이에 손을 짚은 이승하가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리고 늑대처럼 그녀의 혀끝을 휘감아 그녀가 하려던 말을 그대로 삼켜버렸다.처음에는 저항하던 서유도 이승하가 한쪽 무릎을 꿇는 순간, 온몸이 떨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두 손톱으로 의자 등받이를 필사적으로 긁을 뿐이었다.예전에는 체력에만 의지하던 이승하가 오늘은 어쩐 일인지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가 꺼낸 물건들은 서유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제발 그런 거 쓰지 마요!”서유가 간절히 부탁했지만, 남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낮고 매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여보, 참지 말고 소리 내봐.”서유는 도저히 소리를 낼 수가 없어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런 그녀를 본 이승하는 도구와 체력을 총동원해 강도를 높였다.“난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만약 방음이 되지 않았다면, 그리고 커튼이 창문을 가리지 않았다면, 서유는 지금 부끄러움에 혀를 깨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더욱 끔찍한 것은 그녀가 꼼짝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저 이승하에게 온전히 ‘당하기’만 했다.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두 번, 세 번...기진맥진한 서유는 뒤돌아 닫혀 있는 방문을 바라보며 간절히 바랐다.‘제발, 하준이가 문을 두드리며 배가 아프다고, 병원에 같이 가달라고 했으면...’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이하준은 수많은 문제 속에 갇혀 있었다.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