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가혜는 선물을 받아 들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네가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해. 뭘 또 선물까지 준비했어.”얼마 전, 서유가 친부모를 만나러 가면서 며칠간 연락이 끊겼고, 정가혜는 전화가 닿지 않아 안절부절못하며 크게 걱정했다. 이승하와 이연석이 번갈아 가며 정가혜를 안심시키지 않았다면, 정가혜는 아마 배를 움켜쥐고라도 서유를 찾으러 나갔을 것이다.다행히도 이연석이 서유의 상황을 알게 되자, 도저히 정가혜에게 비밀로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진실을 전했다. 정가혜는 마음을 졸이며 그들의 소식을 기다렸고 며칠 후 이승하가 서유를 데리고 돌아왔을 때야 겨우 안도할 수 있었다. 그들 부부가 외국에서 총상을 치료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서야 정가혜는 안심하고 순산을 맞이할 수 있었다.하지만 이승하의 뇌에 있는 칩에 대한 이야기는 이연석이 정가혜에게 말하지 않았다. 이연석은 정가혜가 퇴원한 후에 형에게 직접 물어볼 생각이었다. 어쨌든, 이런 일은 남자인 그들이 책임지고 감당하려고 했다. 여자들은 그저 행복한 일상만을 즐길 수 있게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이연석과 이승하는 눈짓으로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며 조용히 합의에 도달했다. 서유는 아이가 주는 행복에 푹 빠져 있었고, 이승하가 건넨 선물 상자를 받아 병실 옆 탁자 위에 두었다.“아이들에게만 선물을 준비한 게 아니라 너에게도 작은 선물을 챙겼어.”서유는 상자를 열지 않고 상자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집에 가서 확인해.”그리고 서유는 기다렸다는 듯이 유나희와 이승연이 안고 있는 아기들을 바라보았다.“저... 제가 안아봐도 될까요?”“물론이죠.”이승연은 흔쾌히 아기를 서유에게 건네며 안는 법을 알려주었다. 서유는 겸손하게 배우며 작은 아기를 품에 안았고, 그 작은 존재가 품에 안기자마자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아이가 이렇게 작다니...”작고 여린 눈, 코, 입까지 모든 게 부드럽고 포근했다. 서유는 여자아이를 안고 있을수록 점점 더 애정을 느끼며, 자신의 아이도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도련님, 미안해요. 승하 씨가 말솜씨가 별로라서 그래요.” 서유는 이승하를 약간 꾸짖듯 바라보며 말했다. “차라리 당신 먼저 돌아가고, 내가 여기 남아서 아기들이랑 좀 더 시간을 보낼게요.” 이미 소파에 앉아 있던 이승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내가 같이 있을게.” 즉, 서유가 가지 않으면 그도 가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연석은 도움을 청하듯 서유를 바라보았다. 서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아쉬운 마음으로 아이를 유나희에게 돌려주었다. 아기를 받아든 유나희는 아이가 정말 좀 못생겼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유나희는 아기를 한 번 보고, 이연석과 정가혜를 번갈아 보며 생각했다. 부모는 전혀 못생기지 않았는데, 어째서 아이는 이렇게 못생겼지? 유나희는 점점 아기가 못생겼다고 느껴져서 결국 아기를 다시 서유에게 건넸다. “숙모인 네가 여기 남아서 아기를 좀 더 안아줘.” 서유는 기쁘게 아기를 다시 품에 안으며 말했다. “그럼 좀 더 안아보다가 집에 돌아가야겠네요.” 병실에서 서유만이 아기가 귀엽다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들은 못생겼다고 생각을 했지만 아무도 그걸 입 밖에 내진 않았다. 서유는 한 손으로 아기를 안고 다른 손으로 아기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도련님, 어릴 때 조금 덜 예뻐 보이는 아이들이 커서 더 예뻐질 때가 많아요. 도련님이랑 가혜는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둘째 형수가 해주는 말은 항상 따뜻해서, 이연석은 이내 얼굴을 펴며 웃었다. “그렇죠! 저랑 가혜는 이렇게 잘생기고 예쁜데, 우리가 낳은 아이는 당연히 커가면서 더 예뻐질 거예요!” 턱을 괴고 있던 이승하는 그의 말을 듣고 살짝 미소 지으며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열었지만 이연석이 재빠르게 막았다. “형, 듣기 좋은 말이 아니면 하지 마!” 이승하는 시선을 서유에게 돌렸다. 서유는 그에게 귀여운 표정으로 엄하게 경고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이승하는 결국 입에 담으려던 ‘듣기 좋고 친절한
흰 셔츠를 입은 송사월은 말끔한 모습으로 문밖에 서 있었다. 휠체어에 앉아 있던 모습과는 달리 우뚝 선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온화한 서유의 시선이 그의 깨끗한 얼굴에서 다리로 옮겨졌다. 곧게 편 다리로 천천히 병실로 들어서는 그를 보며 그녀는 마음속에 쌓여있던 죄책감이 점차 사라져 버렸다. 마침내 송사월은 일어섰고 휠체어에 앉아 남은 인생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다. 이제부터는 정상적인 사람처럼 살 수 있게 되었다. 건강한 그의 모습에 서유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이승하가 옆에 있었기 때문에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이내 시선을 피했다. 송사월 또한 그녀에게 시선을 오래 두지 못하였다. 이미 스쳐 지나간 인연, 놓을 수가 없다면 마음속 깊이 묻어둘 수밖에.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여자이고 멀지 않아 엄마가 될 여자이니 아무리 힘들어도 그는 감정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이지민을 따라 정가혜에게 다가가자 서유는 아이를 안고 일어서며 그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는 스쳐 지나가는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고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서유가 그의 옆으로 다가와 앉더니 소매를 잡아당기면서 잠든 아기가 얼마나 귀여운지 보여주었다. 그녀는 온통 아이한테 정신이 팔려있었고 송사월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듯했다. 더 이상 송사월이라는 존재가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자신을 가득 담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이승하는 무의식적으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러더니 웬일인지 갑자기 손을 뻗어 아이의 작은 입술을 살짝 건드렸다.부드러운 아이의 살갗이 닿자 차가웠던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바로 그때, 서유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귀엽죠?”“귀엽게 못생겼네.”“남의 아이가 못생겼다고 하면 내 아이도 못생겨진대요.”그가 도도한 얼굴로 한마디 툭 내뱉었다.“당신이랑 내 아이인데, 어떻게 못생길 수가 있겠어?”작은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말소리가
그녀가 송사월과 함께하며 힘든 시간을 견뎌내는 동안 단이수는 등 뒤에 숨어서 그녀가 점점 송사월에게 마음이 뺏기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뼛속 깊이 새긴 그 사람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걸 보는 게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그녀의 입에서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단이수는 심장이 뻥 뚫린 것 같았다. 뼈가 긁히는 고통이 손바닥으로 파고들어 온몸에 펴졌고 살을 한 조각 한 조각 베어내듯 피가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이렇게 아프고 나니 갑자기 사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벽에 기댄 채 등을 돌린 그는 눈물이 글썽한 눈을 들 어올려 푸른 하늘을 쳐다보았다.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그의 마음은 왜 상처투성이인 것인지.이지민, 난 이미 준비가 다 되어있단 말이야. 평생 동안 묵묵히 네 곁을 지킬 생각이었어. 너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길 바랐는데... 결국은 네가 먼저 그걸 깨버리는구나.그러나 그 약속은 그녀와 상관없이 자신이 결정한 것이라는 걸 잊은 듯했다. 그러니 약속이 깨진 아픔은 스스로 감수할 수밖에. 그 아픔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는 손을 뻗어 썩을 대로 썩은 아픈 심장을 누르고 서유 옆에 앉아 있는 이지민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예전에 그가 모질게 떠났을 때 그녀는 하늘에 맹세했었다.“단이수, 똑똑히 기억해. 난 이제부터 오빠를 완전히 잊어버릴 거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거야. 그때 가서 다시 고개 돌리지 마. 오빠가 다시 뒤돌아선다면 내가 천벌 받을 거야.”귀청을 찢을 듯한 그 맹세가 수없이 깊은 밤 그의 가슴을 두드렸고 뼈에 사무칠 정도로 아팠다.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가 없어서 지금까지도 머릿속에 새겨져 있다.그 맹세가 현실이 되는 게 두려워 그는 그동안 그녀의 곁에서 지켜보기만 했었다. 그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러나 정말 이날이 찾아왔고 이렇게 고통스러운 줄은 몰랐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 후 이지민이 송사월에 대해 다시 언급할 때, 정가혜는 그녀에게 어떻게 송사월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물었었다. 송사월이 혼자 창가에 앉아 꽃을 볼 때마다 그가 불쌍하고 외로워 보였다고 했다. 그 사람을 안타까워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 마음이 기울어졌다는 뜻 아니겠는가? 그녀는 마음이 가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자신을 성에 가둔 송사월의 마음에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이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의 인생에 그의 세상에 그의 모든 것에는 서유밖에 없었다. 이지민이 마음을 드러내도 송사월은 거절했고 심지어 치료도 거부하고 그녀가 찾아오는 것조차 거부했다.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서유 이외의 그 어떤 여자도 다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마음을 열고 누군가를 받아들이게 되면 또다시 서유를 잊어버릴까 봐 겁이 났다. 서유와 어긋난 인연은 자신의 기억 상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여 그 누구도 그 어떤 일도 그의 마음에 들어와 그의 기억을 차지할 수는 없었다.하지만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이지민은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어쩌면 단이수를 사랑했던 것만큼 그를 사랑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을 다시 열게 해준 남자이니 그녀한테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단이수가 뒤에서 묵묵히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다. 다만 그녀는 쉽게 뒤돌아서는 사람이 아니다. 살면서 한번 또 한 번의 생이별을 겪게 되면 다시 뒤돌아설지도... 그들 세 사람의 일에 대해 서유는 더 이상 개입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도 자신만의 생활이 있고 지켜야 할 사람이 있으니까. 각자 잘 지내고 무사하면 된 것이다. 잠시 후, 정가혜와 함께 있던 서유는 이승하의 손에 이끌려 블루리도로 돌아갔다.차에서 내리자마자 차에 기대어 있는 육성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쌀쌀해진 날씨에 육성재는 얇은 블랙 코트를 입고 있었다. 준수한 얼굴의 그가 자신의 블랙 부츠를 쳐다보고 있는데 떨어진 검은 잔머리가 가끔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고독하고 쓸쓸해 보였다.
택이의 말에 맑고 깨끗하던 이승하의 눈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헤아릴 수 없는 후회가 밀려왔다. 짙은 속눈썹을 내리던 그의 눈 밑에 옅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잠시 후, 남자는 눈 밑의 아픔을 감추고는 고개를 들어 굳은 얼굴로 육성재를 쳐다보았다.“택이를 닮았다는 그 사람, 이름이 뭐야?”“주진모.”주진모.... 이승하는 마음속으로 그 이름을 곱씹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마침 일이 있어서 귀국했어. 겸사겸사 당신한테 알려주려고 찾아온 거야.”사실 이런 일은 전화로 알려주면 되는 것이었다. 그가 일부러 여기까기 찾아온 이유가 뭔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반대편에서 똑같이 짙은 색 코트를 입고 은은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던 남자가 그걸 왜 알아차리지 못했겠는가?그걸 알면서도 감정조절이 잘 안되는 육성재는 또 자기 멋대로 행동했다. 그동안 이상한 꿈을 꿨었는데 꿈에서 서유가 비틀거리며 그에게로 달려왔다. 그는 그녀를 단단히 붙잡고 말했다.“그래요. 나랑 같이 가요.”꿈에서 깬 그는 침대에 기대어 앉아 창밖의 쓸쓸한 풍경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꿈을 잊지 못하였다. 그 꿈 때문에 내려놓아야 할 마음이 또다시 설레기 시작했다. 맞은편, 두 사람이 손을 꼭 잡고 다정하게 서 있는 모습에 그는 그게 그저 꿈일 뿐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어차피 이루어질 수도 없는 허망한 꿈. “고마워.”뱀굴 속의 광경을 떠올리던 이승하가 무거운 마음을 거두고는 다시 육성재를 쳐다보는데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는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육성재의 시선을 따라 서유와 맞잡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는 순간, 그는 분노에 찬 육성재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육성재.”차가운 목소리에 육성재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드니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승하와 눈이 마주쳤다.“내 아내를 구해줘서 정말 고마워. 그리고 여기까지 찾아와서 이 소식을 내게 전해준 것도 고맙고.”그의 말에 가시가 박혀있었다. 자신에게 경고하는 말이라는
세 사람이 함께한 마지막 식사를 그녀도 기억하고 있었다. 단호한 그녀의 모습에 그는 더 이상 거절하지 않았다.“그래. 같이 가자.”그녀는 손을 뻗어 단단한 남자의 팔을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집에 가요. 여보.”남자는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잡고 한 손으로 그녀의 배를 잡고는 그녀와 함께 나란히 블루리도로 들어갔다.두 사람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보고 주태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기쁜 표정을 지으며 셰프한테 음식을 준비하라고 하였고 또 사람을 보내 연이를 데려오라고 하였다. 오랫동안 연이를 보지 못한 서유는 아이가 보고 싶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아직 어린아이한테 달랑 편지 한 통만 남기고 떠난 것이 너무 미안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주태현이 한마디 거들었다.“연이가 참 착해요. 이모랑 이모부한테 일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지 가끔 칭얼거리는 해도 떼를 쓴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울지도 않았어요?”“심이준 씨랑 조지가 곁에 있어 주고 달래주니 아이가 울고 싶어도 그럴 시간이 없었네요. 밤에 자다가 가끔은 울다가 깬 적이 있었죠. 어르고 달래니 또 금방 잠이 들더라고요.”아이가 몇 번 울었다는 말에 서유는 마음이 아파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주태현은 급히 그녀를 다독였다. “이모부한테만 화가 났다고 했어요.”“왜요?”“도련님이 얼마 전에 돌아왔었는데 연이가 학교 끝나고 집에 오기도 전에 떠났었거든요. 얼굴도 안 보고 갔다고 아이가 어찌나 화를 내던지. 이모부가 돌아오면 다시는 말 걸지 않겠다고 했어요.”그 얘기에 안색이 어두워진 그를 보며 서유는 피식 웃었다.“아직 어려서 그래요. 애들은 돌아서면 잊어버리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그러나 학교에서 돌아온 연이는 정말 이승하를 무시했다. 아무리 선물을 사서 달래봐도 소용없었다. 아이가 이제는 좀 컸다고 얼마나 고집이 센 건지, 이승하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고 더 이상 달래주지도 않았다.이모부가 자신을 외면하자 연이는 오히려 마음이 불편했다.
그는 더 이상 반박하지 않고 그녀가 얘기하길 기다렸다.“전에 사월이랑 약속했었거든요. 다리가 회복되어 다시 일어서게 되면 큰 선물을 해주겠다고요.”그가 오해할까 봐 그녀는 한마디 더 보탰다.“육성재 씨가 날 살려준 은혜도 갚아야 하고요. 그리고 연이를 돌봐준 이준 씨와 조지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하지 않을까요...”해명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당신 뜻대로 해. 내 허락 구할 필요 없어.”그녀는 잘생긴 남자의 얼굴을 살짝 치켜들고는 입술을 맞추었다. “당신 진짜 좋은 사람이에요.”“지금 바로 선물 몇 가지 준비해서 주 집사님한테 전달해달라고 부탁할게요.”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그가 그녀를 잡았다.“뭘 선물할 건지 나한테 말해. 내가 준비할게.”그는 조금도 그녀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좋은 남편이라...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졌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선물하고 싶었은 물건들은 일일이 그한테 얘기했더니 그는 바로 아랫사람들에게 준비하라고 명했다. 잠시 후, 그가 그녀를 부축하여 방으로 돌아갔다.서유가 혼자 샤워를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 그녀를 씻겨주었다.샤워를 마친 뒤 그녀에게 가운을 입혀주고는 그녀를 안아 침대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욕실로 다시 들어가 찬물에 샤워를 하며 들끓는 욕망을 가라앉혔다.욕망이 이글거리는데 안을 수 없고 만질 수도 없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얼마나 괴로운지. 그가 턱을 약간 젖히고 차가운 물에 얼굴을 적셨다. 살짝 벌어진 얇은 입술과 야릇한 자세에 욕정이 가득했다.잠시 후, 그가 간신히 참으며 서유의 곁에 다가가 누웠다. 품에 안겨 있는 그녀의 향긋한 살냄새를 맡으며 침을 꿀꺽 삼키던 그는 애써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연이는 학교에 갔고 주태현은 선물을 전달하러 집을 나섰으며 이승하와 서유는 다시 전용기에 올랐다. 두 사람이 치앙라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정오가 다 된 무렵이었고 푸른 하늘에 햇볕이 내리쬐고 날씨는 덥지도 춥지도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