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들이 LED 전구로 만든 응원판이 구승훈의 등에 쾅 하고 내리꼰졌다.강하리가 화들짝 놀라며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불렀다.“승훈 씨!”부르고 나서야 강하리는 자기가 실수했음을 알아챘다.응원판에 맞은 구승훈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돌려 그 팬을 노려봤다. 눈빛이 차가운 게 섬뜩할 정도였다.이에 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대, 대표님, 저, 저희는 그냥 저 파렴치한 여자를 손봐주려고 그랬던 거예요. 저 여자 때문에 우리 언니가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데요! 대표님, 우리 언니를 대신해 꼭 복수해 주세요.”이 말에 구승훈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죠?”법원에 들어오려면 소지품 검사가 필요했다. 응원판 같은 물품은 절대 반입이 불가한 물품에 속했다.팬들은 너무 무서워 다리가 떨릴 지경이었고 구승훈이 캐묻자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전 그냥 저 여자가 너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랬어요. 분명 대표님은 우리 유라 언니랑 천생연분인데, 저 여자는 그냥 중간에 끼어든 나쁜 년일 뿐이라고요!”팬은 말하면 말할수록 흥분하기 시작했다.구승재가 얼른 사람을 데리고 와서 그 팬을 제압했다.“형, 괜찮아?”구승훈은 질문에 대꾸하지 않고 오히려 강하리를 바라봤다.“어디 다친 데 없지?”강하리가 고개를 저었다.“없어요.”강하리가 잠깐 고민하더니 다시 물었다.“고마워요.”강하리는 아직 얼굴이 하얗게 질린 상태였다.사실 아까 송유라가 정신질환 진단서를 꺼내 들었을 때부터 심드렁한 상태였다. 하여 팬이 응원판을 휘두른 것도 모르고 미처 피하지 못했다.구승훈은 강하리가 고맙다고 하자 마음이 먹먹했다. 꼭 이렇게 내외해야 할까?구승훈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뭐 날아오는 것도 모르고.”구승재가 이를 듣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은 이런 질문을 할 때가 아니라 위로를 건넬 때인데 말이다.“강 부장님, 형 다쳤으니까 케어 좀 해줘요. 나는 가서 팬들 좀 처리할게요.”팬들은 송유라가 법원에서
구승훈은 장진영을 뿌리치고 밖으로 나갔다.밖에 있는 팬들은 이미 거의 정리되고 없었다. 차 옆에 서 있는 강하리는 아무 표정 없이 덤덤하게 서 있었다. 손연지가 옆에서 뭐라 말하고 있었다.구승훈이 두 사람 앞으로 다가가자 손연지가 그를 힐끔 노려보더니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구승훈은 그런 손연지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하여 자기도 모르게 강하리에게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도울 생각 없어.”강하리는 이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일단 가요.”강하리가 차에 오르려는데 구승훈이 이를 막았다.“내 차로 가자. 이 차는 이따 승재가 끌고 오면 돼. 팬들이 또 따라오기라도 하면 어떡해?”강하리는 구승훈과 한 차에 타기가 싫었지만 구승훈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기에 잠깐 고민하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구승훈의 차는 병원으로 향한 게 아니라 바로 아파트로 향했다.강하리는 이내 노선이 이상하다는 걸 발견하고는 얼굴이 굳어졌다. 이에 구승훈이 얼른 해명했다.“병원까지 갈 필요 없어. 이따 약 좀 발라주면 돼.”강하리는 구승훈을 힐끔 쳐다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이 덧붙였다.“오늘 본 그 팬 내가 잘 조사해 볼게. 우연히 들어간 건 아닌 거 같아.”한참 침묵하던 강하리가 알겠다고 대꾸했다.차 안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구승훈은 강하리를 힐끔 쳐다보더니 아무 노래나 틀었다. 잔잔한 클래식이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자 강하리가 눈까풀이 살짝 흔들렸다강하리가 아파트로 들어오자 도우미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하리 씨 왔어요?”하리가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네, 일이 좀 생겨서 왔어요.”“식사하시고 가실 거죠?”도우미가 강하리와 구승훈을 번갈아 쳐다봤다.강하리가 대답했다.“아니요. 곧 갈 거예요.”도우미는 어딘가 실망한 눈치였다. 두 사람이 아직도 화해하지 못한 걸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구승훈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강하리가 남아서 식사끼지 할 거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없었다.강하리는 익숙하게 약상자를 가
응원판에 맞을 때도 끄떡없던 구승훈은 강하리의 응징에 자기도 모르게 낮은 신음을 냈다.“강하리!”구승훈은 단번에 강하리의 손목을 잡고 몸으로 그녀를 소파에 눌렀다. 구승훈은 지금 위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다. 맞닿은 피부는 마치 불덩이처럼 뜨거웠다.강하리의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다.“승훈 씨, 움직이기만 해봐요. 바로 성폭행으로 고소할 테니까!”“하리야.”구승훈의 목소리가 점점 갈라지고 있었다.“나 건강해. 여자랑 스킨십한 지 꽤 됐으니까 조금만 건드려도 반응이 오는 건 정상이야. 널 보고도 아무런 느낌이 없어야 만족해?”강하리가 빨개진 얼굴로 성질냈다.“승훈 씨가 고자가 된다 해도 나는 괜찮을 거예요!”구승훈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강하리, 그래도 우리 그쪽 궁합은 잘 맞았잖아! 근데 이렇게 저주한다고?”강하리의 몸이 순간 굳더니 이렇게 반박했다.“혼자만 그렇게 생각하는 걸 수도 있죠.”구승훈이 강하리를 노려보며 물었다.“뭐라고? 지금 내 스킬에 도전하는 거야?”두 사람의 자세는 지금 매우 위험했다. 강하리는 구승훈의 소중한 무언가가 아직도 꿋꿋하게 그녀를 찌르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녀는 더는 이 화제를 이어가기 싫었다.“승훈 씨, 여자가 고프면 지금 당장 나가서 찾아요. 여기서 발정 난 푸들처럼 굴지 말고. 난 이미 질렸다고요!”구승훈의 이마에 순간 핏줄이 섰다.“질렸다고?”강하리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어갔다.“당연하죠. 매일 그렇게 정신없이 해대는데 질리지 않는 게 이상하죠. 떠올리기만 해도 역겨워요.”구승훈은 어두운 표정으로 강하리를 보며 말했다.“안 믿어. 해보기 전엔 절대 안 믿어.”“저리 가요!”강하리가 발버둥 치며 일어나려 했다.하지만 이게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왔다. 강하리가 발버둥 치면 칠수록 구승훈의 눈동자는 점점 어두워졌다.“그만, 하리야, 움직이지 마.”구승훈이 순간 강하리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더 움직이면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장담 못 해.”강하리는 화가 치밀어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을 눈싸움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먼저 갈게요.”그러다 강하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구승훈이 강하리의 손목을 잡더니 이렇게 말했다.“샤워하고 올게. 잠깐 기다려. 할 얘기가 있어.”하지만 강하리는 남아있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구승훈이 한발 빨리 막아서더니 덧붙였다.“저번에 말한 강찬수 사건 내가 힌트 찾았다고 했잖아. 그거 진짜야. 계좌에 문제가 있었어.”강하리가 그제야 걸음을 멈추었다.“무슨 문제요?”구승훈이 이렇게 말했다.“일단 밥 먹으면서 얘기하자.”강하리가 받아쳤다.“그럼 구승재 씨더러 전달하라고 하세요.”구승훈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이렇게 말했다.“내가 알아낸 걸 왜 걔가 전달해?”강하리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심 변호사님과 만나기로 했어요. 여기서 이럴 시간 없다고요.”강하리는 심준호와 같이 밥을 먹고 어머니 정서원을 만나러 가기로 약속한 상태였다.구승훈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걔는 왜 맨날 한가해?”강하리는 더는 대꾸하기 싫어 몸을 돌렸다. 하지만 구승훈이 이번에도 따라왔다.“같이 가자. 준호는 개의치 않을 거야.”“내가 싫어요.”구승훈이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마침 강하리의 핸드폰이 울렸다.심준호가 걸어온 전화였다.“하리 씨, 예진이한테 일이 생겨서 잠깐 보경시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뒤에 다시 연락할게요.”심준호의 목소리가 매우 다급했다. 강하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전화를 끊었다.구승훈은 이런 상황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왜? 준호가 약속을 깨기라도 했나 보지?”강하리가 입꼬리를 당겼다.심준호의 말투가 너무 다급해 보였다. 그런 심준호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강하리는 혹시 무슨 큰일이 난 게 아닐지 걱정되기도 했다.잠깐 고민하던 강하리는 카톡으로 심준호에게 메시지 몇 개를 보냈다.구승훈은 강하리가 심준호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걸 보고 마음이 불편했다.강하리는 누구든 잘 지내지만 유독 그와는 그러지 못했다.심지어 아직도 구승훈의 전화번호는 강하
레스토랑에서 나가자마자 간병인 아줌마도 전화를 걸어왔다.간병인의 목소리가 매우 다급했다.“하리 씨, 얼른 병원으로 오세요. 사람들이 마치 미친 것처럼 달려들고 있어요.”강하리가 전화를 끊자마자 구승훈이 그녀의 손목을 잡더니 차에 태웠다.“이미 근처 경찰서에 연락해서 인력들 그쪽으로 보냈어. 민우도 이미 보디가드들 보냈고. 아무 일 없을 거야. 일단 걱정하지 마.”강하리의 안색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엔 한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정서원에게 힘은 되지 못할망정 폐를 끼쳤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찢어졌다.강하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음속엔 비통함과 분노만 남았다. 심지어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송유라와 싸우지 말 걸 그랬나?하지만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왜 참고 지내야 하지? 왜 송유라에게 당하고만 살아야 하지?송유라도 그렇고 구승훈도 그렇고 잘난 사람이었다. 서로 첫사랑이었고 서로가 서로에게 빛과도 같은 존재였다. 두 사람은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며 줄다리기를 계속했다.강하리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 희생양이 되기 싫었다.구승훈은 그런 강하리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핸들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가자 핏줄이 서서히 드러났다.구승훈은 알고 있었다. 만약 이번에 강하리의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와 강하리는 정말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걸 말이다.강하리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정서원이 있는 층을 달려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강하리는 넋을 잃었다. 밖은 아수라장이었고 바닥에는 사진이 적잖이 흩뿌려져 있었다. 어떤 팬은 그녀의 사진을 프린트해 전단을 만들었다. 위에 적힌 X 년, 세컨드 같은 단어들이 강하리의 눈을 찔렀다.팬들은 이미 정리되고 없었지만 복도에는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다.강하리가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 사람들의 눈길이 그녀에게로 쏠렸고 이내 손가락질하며 수군대기 시작했다.강하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정서원의 병실로 향했다.구승훈이 그 뒤를 바짝 따라갔다.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얼굴
구승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손연지 씨, 오지랖이 너무 넓다는 생각 안 해요?”손연지가 구승훈을 노려보며 말했다.“오지랖이 좀 넓으면 어때요? 그 오지랖에 누군가 걸려들었나 보죠.”구승훈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지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구승훈은 강하리를 보호할 생각이었다. 그녀를 모욕한 사람도 처리하고 차마 들어줄 수 없이 역겨운 말들도 사라지게 할 것이다.하지만 송유라는…구승훈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 도움도 주지 않는 것뿐이었다. 심지어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칠 수도 있지만 정말 그녀를 응징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손연지는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불쌍한 우리 하리, 보는 눈도 없지. 이런 사람한테 10년이라는 시간을 바쳤다니, 이런 과분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손연지는 이렇게 말하더니 안고 있던 물건을 전부 구승훈에게 던졌다. 그 바람에 구승훈 옆에 서 있던 노민우에게도 불똥이 튀고 말았다.억울하게 매를 맞은 노민우가 노발대발했다.“나랑은 아무 상관이 없는데 왜 나까지 맞아야 하죠?”손연지가 그런 노민우를 째려보며 말했다.“유유상종이라고, 저런 사람이랑 같이 노는 사람이 성품이 좋으면 얼마나 좋겠어요.”노민우는 어이가 없었다.“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지?”노민우는 화가 치밀어올랐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구승훈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멍한 눈빛으로 손연지를 바라보며 물었다.“아까 뭐라고 했어요?”사실 손연지는 구승훈에게 이런 말을 해줄 생각이 없었다.전에 강하리가 끝내기로 했으면 깔끔하게 끝내야 한다고 했던 게 떠올라서 가만히 있으려다가 강하리가 너무 불쌍해서 그럴 수 없었다.구승훈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게 너무 괘씸했다. 강하리가 10년이라는 시간을 갖다 바쳤는데 구승훈은 소중한 줄을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하리가 구승훈 씨를 10년이나 좋아했다고요! 10년! 근데 구승훈 씨는 우리 하리한테 어떻게 했어요? 첫사랑을 보호한다고 우리 하리한테 무슨
“네.”강하리는 대답을 회피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심장이 짓눌려져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강하리가 정말 자신을 10년이나 좋아했다니!몇 번씩이나 자신의 울화를 부른 그 연적 새끼가.강하리를 뺏길까 봐 노심초사했던 그 사람이.그게 우습게도 자기 자신이었다니.“왜……. 여태 말 안 했어.”강하리가 웃었다.“그럴 필요가 없어서요. 나 좋아하지도 않는데 말해 뭐 해요? 내 비천함을 더 돋보이려고? 아니면, 내 감정을 더 짓밟게 하려고요? 차라리 그냥 거래였으면 좋았겠네요.”“물론, 지금은 거래마저도 아니지만요.”“강하리!”구승훈의 눈이 벌개졌다. 강하리의 말 한 마디마디가 비수가 되어 그의 가슴에 꽂혔다.아픈 나머지 가슴이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나 좋아한 거 맞잖아!”강하리가 말이 없어졌다. 주위에는 온통 호기심의 눈길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녀는 더이상 구승훈과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말없이 돌아서 병실로 들어가는 강하리를 구승훈이 성큼성큼 따라갔다.안 따라가면 강하리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승훈 씨.”병실에 들어가서야 강하리가 입을 열었다.“네, 좋아했던 거 맞아요.”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말투.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녀의 마음 속 상처는 다시 헤집어지기 시작했다. 까이고 벌려져 다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내 어린 시절 꿈이었어요. 승훈 씨한테 좀만 더 가까이 가려고 내 자존심을 찢고 뭉개고, 내 자신을 먼지만큼 웅크렸어요. 하지만 그게 내 실책이었죠. 너무 나를 보잘것없게 만들어서, 승훈 씨한테 보이지도 않았으니까.”별것 아닌 듯 얘기하지만, 그녀는 눈 앞이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했다.“그래서 포기했어요. 너무 힘들어서. 그때 내 마음은 먼지처럼 흩어진 지 오래요. 그러니까 죽기 살기로 승훈 씨 곁을 떠나려고 했겠죠. 미련이 조금도 안 남았으니까.”뜨거운 것이 들끓던 구승훈의 눈이 점차 식어갔다.나중에는 얼음장처럼 찬 기운만 남긴 채 빛을 잃었다.이토록 괴로워 보긴 처음이었다.마음 뿐만 아니라
강하리가 긴 숨을 내 쉬었다.상처를 헤집을 땐 그렇게 아프던 것이, 다 털어놓고 보니 오히려 후련했다.허망했던 그 사랑도 이젠 털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승훈 씨가 도와준다면 너무 감사하겠지만, 안 그래도 전 할 말 없어요. 들어가 보세요.”“내가 잘 처리할게.”구승훈의 묵직한 대답이 돌아왔다.꺼졌던 불씨를 살리려면 자그마한 불꽃이라도 튀어야 할 것 아닌가.그 불꽃을 꺼버리려는 자를 싸고 돌 수는 없는 노릇.“전에 나한테 썼다던 그 편지 좀 볼 수 있을까?”“없어요. 태워버렸거든요.”“야 이…….”구승훈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태워…… 태워버렸다고? 그 손글씨로 쓴 편지를?”“네.”확인 말살을 하는 외마디 대답에 구승훈의 표정에 쩌적 금이 갔다.‘이런 거였구나. 원하는 걸 얻을 수 없는 기분이.’“독한 여자 같으니라고.”한 마디를 남긴 채, 구승훈이 병실을 나섰다.병실 문 앞, 갑자기 문이 열리며 나오는 구승훈의 모습에, 문 앞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손연지와 노민우가 흠칫 뒤로 한 발작 물러섰다.그들을 못 본 양, 구승훈이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겨 멀어져갔다.넓디넓은 그의 어깨가 오늘따라 뭐에 짓눌린 듯 무거워 보였다.차에 오른 뒤에도 그 묵직한 짓눌림은 사라지지 않았다.답답한 가슴에서 심술 비슷한 게 피어올랐다.나한테 쓴 편지인데. 수취인이 아직 보지도 못 했는데.그걸 그렇게 태워버리면 어떡하냐고.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구승훈은 핸드폰을 꺼내 승재에게 전화했다.“오늘 병원에서 난동 피우던 것들 다 찾아내서 기소해. 거리에서 찌라시 뿌리던 그 놈들도 모조리. 잡아서 심문할 수 있는 놈들 있으면 다 잡아들이고. 강하리 세컨드 설이 깡그리 사라지게 작업해.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멍해졌던 승재가 바삐 고개를 끄덕였다.“그나저나 형, 장진영과 송동혁이 회사 문 앞에서 지키고 있는데-.”“쫒아버려. 버티면 때리고.”그대로 통화를 마친 구승훈이 차를 몰아 회사로 질주했다.“구 대표님! 대표님! 우리 유라
주해찬의 표정이 확 바뀌며 핸들을 꺾었지만 그래도 피할 수 없었다.그는 무의식적으로 강하리를 보호했고 강하리의 시선은 다가오는 차에 고정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구승훈의 차다.차 번호판도 똑같았다.구승훈이 B시에 올 때마다 몰던 차였다.순식간에 강하리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곧 눈앞이 핑글 돌았다....강하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침대 옆에 앉아 있는 구승훈이 보였다.“좀 어때?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강하리는 멍한 표정으로 옆에 앉은 남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구승훈, 당신이야?”구승훈의 시선이 무겁게 가라앉았고 의심을 받은 그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하리야, 너 정말 나라고 의심하는 거야?”입술을 달싹이며 그를 바라보는 강하리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의심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차는 분명 구승훈의 것이었다.하지만 구승훈이 아니라고 말할 때 오히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서늘한 구승훈의 시선을 피하며 나지막이 물었다.“선배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네가 신경 쓰는 건 주해찬밖에 없지?”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날 구해준 사람이야.”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던 구승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내가 널 구해준 적은 없어? 하리야, 너 정말 사람 마음 아프게 한다.”강하리는 그의 손에서 손을 빼냈다.지금은 그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주해찬이 그녀의 몸을 감쌌기에 그는 꽤 심하게 다쳤을 거다.처음부터 주해찬에겐 미안한 것투성이였다.오랜 시간 동안 그의 헌신적인 모습을 보면서도 그에게 해줄 대답이 없었다.게다가 구승훈의 차로 교통사고까지 났으니 마음속에는 죄책감이 커져만 갔다.“선배는 어떻게 됐어?”여전히 똑같은 말에 구승훈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주해찬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목숨은 건졌지만 그가 깨어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지금 강하리의 태도로 볼 때, 주해찬이 자신을 구하려다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녀가 어떻게 행동할지 정말 알 수 없
주해찬의 표정이 잠시 번뜩이다가 미소를 지으며 정양철에게로 향했다.“아저씨, 오랜만이네요.”정양철의 얼굴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가 이내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해찬아, 여긴 무슨 일이야?”주해찬이 미소를 지었다.“친구 데려다주고 나오는데 여기서 아저씨랑 만났네요.”정양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그럼 가서 일 봐. 난 아직 할 일이 남아서.”“알았어요.”주해찬은 그 말을 하고 돌아서서 문을 나섰다.정양철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전화기를 꽉 쥐었다.한편 주해찬은 안에서 나오기 바쁘게 훅 안도하듯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한참 동안 멍한 표정으로 길가에 서 있었다.방금 정양철이 한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강하리나 구승훈과 무슨 일이 있는 걸까?손을 댔다고 했는데, 무슨 짓을 한 걸까.정주현에게 선을 긋던 강아리의 모습과 연관 짓자 주해찬은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그는 다소 창백한 얼굴로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강하리가 샤워하러 가려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선배?”하지만 강하리가 전화를 받을 때 주해찬은 갑자기 마음을 바꿨다.적어도 제대로 알아보고 강하리에게 알려줘야지 무턱대고 말하는 건 무책임한 행동이었다.“아니야, 그냥 내일 나랑 같이 팔찌 가지러 가자고.”“선배, 나 혼자 갈 수 있어요.” 강하리가 여전히 거절하려는데 주해찬이 말을 막았다.“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오늘 밤엔 일찍 쉬어.”주해찬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다음 날 이른 아침, 준봉은 구승훈의 전화를 받고 강하리에게 아침을 가져다주었다.그런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는 순간, 강하리 방 앞에 두 사람이 수상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그를 보자마자 뒤돌아 복도 쪽으로 달려갔고 준봉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그들을 쫓아갔다.일직 강하리가 묵고 있는 호텔 아래층에 도착한 주해찬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어젯밤 정양철의 그 말 때문에 거의 밤을 새
준봉이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대표님께서 마실 것 가져다드리래요.”말을 마친 준봉은 강하리에게 밀크티 한 잔을 건넸고 강하리는 눈앞에 놓인 밀크티를 보고 화를 내며 다시 한번 문을 닫았다.주해찬은 방에 앉아서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안 가면 조금 있다가 또 올걸.”주해찬은 말을 마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오늘 밤 모임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죄송해요, 선배.”구승훈이 이러면 주해찬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난처했다.주해찬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문득 어젯밤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던 모습이 떠올라 결국 포기했다.준봉은 강하리의 방에서 나오는 주해찬을 바라보며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았다면 다음에 문을 두드리러 갈 때 또 어떤 핑계를 대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주해찬이 나오며 준봉을 보고 웃었다.“구 대표님한테 그럴 필요 없다고 전해요. 하리가 원하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소용없고 하리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절대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요.”준봉은 주해찬을 바라보기만 했다.“안녕히 가세요, 주해찬 씨.”주해찬은 강하리를 힐끗 쳐다보며 작별 인사를 속삭인 뒤 곧장 돌아섰다.주해찬이 떠난 뒤에야 준봉은 다시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은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차는 경찰서를 향해 빠르게 달렸고 통화를 마친 그는 앞에서 운전하고 있는 구승재를 바라보았다.“목란정원 쪽 상황은 어때요?”“우리 쪽 사람들이 들어갔는데 안에 연정이가 없었대. 그리고 사람들이 들어갈 때 꼭 큰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순조롭게 들어갔대.”시선을 내려 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이 차갑게 웃었다.“역시.”구승재가 얼굴을 찡그렸다.“역시 뭐?”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빛만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어젯밤에 그녀는 일부러 그를 그곳으로 유인한 거다.연정이 사건은 여초연이 한 짓이다.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뒤틀렸다.하지만 잠시 후 그는
정주현은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강하리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본인이 말하지 않으니 더 물어볼 수도 없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방금 강하리 씨 데려다줬어. 웬일로 아들이 보고 싶어서 그래?”연미숙이 잠시 멈칫했다.“이 자식, 누가 보면 내가 평소에 너한테 관심 없는 줄 알겠다.”정주현은 연미숙 앞에서 늘 장난기 가득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그래, 관심 많은 거 알겠으니까 무슨 일인데 그래?”연미숙은 잠시 침묵했다.“강하리한테 같이 밥 먹자고 해.”차라리 말하지 않으면 좋았을걸. 그 말을 꺼내니 정주현은 더 우울해졌다.“엄마, 강하리 씨 바빠.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친구들이나 만나지 강하리는 왜?”연미숙이 웃었다.“우리 아들이 입이 닳도록 칭찬하는 여자를 내가 좀 만나면 안 돼?”정주현이 입을 삐죽거렸다.“영감탱이가 엄마처럼 정신 차렸으면 강하리가 며느리 됐을 텐데.”연미숙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루 종일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빨리 돌아와.”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은 후, 그녀의 눈에는 악의에 찬 눈빛만이 번쩍였다.강하리는 정주현을 배웅하고 창가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주해찬은 그녀의 뒤에 서서 물었다. “일부러 주현 씨랑 거리를 두는 거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정신을 차린 강하리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선배, 난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일 봐요.”주해찬은 그녀가 말하지 않으려는 것을 보며 다소 무력하고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만약 이 순간 그녀의 곁에 있던 사람이 구승훈이었다면 그녀는 바로 말하지 않았을까?아니면 구승훈은 굳이 묻지 않아도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고 있었을까?질투가 안 난다면 거짓말이다. 분명 그가 구승훈보다 먼저 강하리를 좋아했는데.“하리야, 가능하면 나도 네가 기댈 곳이 되어주고 싶어.”강하리의 표정은 굳어졌고 말투에는 분명하게 선을 긋고 거리를 두는 게 느껴졌다.“선배, 정말 고맙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여초연이 얼마나 치밀하게 움직이는 사람인지 구승훈이 제일 잘 안다.정말 여초연이 연정이를 데려갔다면 그렇게 쉽게 꼬리를 드러내지 않았을 테고 초조했던 그는 계속해서 그녀가 먼저 빈틈을 보이길 기다릴 수가 없었다.그래서 소란을 일으킨 뒤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할 생각이었다.그녀의 수단으로 봤을 때 누군가 자기를 지켜보는 걸 모를 리 없었다.그런데도 오늘 대놓고 이곳으로 왔다는 건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그를 유인한 걸까?그렇다면 연정이에게 일어난 일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더 분명해지지 않나?어쨌든 구승훈은 연정이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연정이가 정말 그녀의 손에 있고 막다른 길에 이른 그녀가 무슨 짓을 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조심할 수밖에 없다.그 시각 목란정원에서 여초연은 복도에서 누군가와 휴대폰을 들고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상대는 여자아이를 안고 있었다. 이쪽의 깊은 밤과 달리 저쪽은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강하리는 다음 날 주해찬과 함께 B시로 갔다.비행기에서 막 내린 두 사람은 입국 게이트에서 정주현이 신나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았다.“강하리 씨, 드디어 왔네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주해찬을 흘깃 쳐다보았다.주해찬은 무기력하게 어깨를 으쓱했다.“어쩔 수 없었어. 계속 물어보니까 시간을 알려줄 수밖에.”정주현은 곧바로 불만을 터뜨렸다. “강하리 씨, B시로 오면 알려준다면서 이러는 건 아니죠!”강하리는 힘없이 웃었다.“가요.”그러던 중 정주현은 강하리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걸 다시 한번 언급했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정주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하리 씨, 그래도 우리 같이 일한 적이 있는데 이러면 대양그룹에 불만이 있는 것 같잖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정 회장님이 절 찾아오라고 시켰어요?”정주현은 부인하지 않았다.“영감탱이한테 불만 있는 건 아니죠? 지난번에 구정우 도와줘서 그래요?”강하리는 침묵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주현은 그
구승훈의 주변에 우중충한 공기가 감돌았고 차가운 시선은 올곧게 주해찬에게 향했다.가까이 다가온 주해찬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구승훈은 조금도 피할 생각 없이 그대로 얻어맞은 뒤 이윽고 주해찬의 손목에 주먹을 내리쳤다.그 손이 조금 전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 구승훈은 그의 뼈를 부러뜨릴 기세로 달려들었다.주해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눈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구승훈, 하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알아? 병원에서 그 며칠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아? 네가 뭔데 계속해서 걔한테 상처를 줘, 네가 뭐라고 걔한테 그런 식으로 강요해!”강하리가 병원에서 지냈던 걸 언급하자 구승훈의 표정이 굳어졌다.당연히 그는 그녀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고 있었다.매일 의사가 진정제를 놓아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었다.심한 우울증이었다.노민준이 그날 했던 말을 그는 여태 기억하고 있었다.“이러면 언제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위험이 있어. 이젠 살아갈 의욕을 완전히 잃었어.”구승훈의 몸이 경직되었지만 꿋꿋하게 받아쳤다.“주해찬 당신이 뭔데 나랑 하리 사이에 끼어들어?”주해찬은 입가에 무심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아무리 그냥 선배라도 걔가 너한테 괴롭힘당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정말 그냥 선배가 되고 싶은 거야? 주해찬, 네 개수작을 모를 것 같아? 이 기회를 이용하려는 거잖아.”잠시 멈칫하던 주해찬은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내가 아무리 이용하는 거라고 해도 억지로 강요하는 너보다 나아. 구승훈, 사람 존중하는 방법부터 배우고 다시 하리 앞에 나타나. 그전까지 넌 자격 없으니까.”주해찬은 말을 마치고 곧장 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비를 맞으며 서 있던 구승훈은 한참이 지나서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자격이 없다고...맞는 말이긴 한데 그럼 주해찬은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그는 입가를 가볍게 문지르며 위쪽을 올려다보았다.강하리는 주방에 약을 먹으러 가다가 비속에 서 있는 구승훈을 보게 될 줄은 몰랐
가서 팔찌를 가지고 백아영의 생일을 보낸 후 출국할 생각이었고 그 외 일은 지금 당장 처리할 기분이 아니었다.구승훈이 무슨 말을 하려는데 손연지의 집 밑에 우산을 쓴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주해찬이었다.비 오는 밤, 가로등에 반사된 남자의 모습은 약간 서늘한 기운을 풍겼다.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무척 적극적이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렬한 불빛이 주해찬에게 비추자 뒤를 돌아본 그가 구승훈의 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강하리를 발견했다.구승훈은 보지 못한 듯 강하리를 향해 걸어가는 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검은 우산이 머리 위로 드리워지며 주해찬의 낮은 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걱정돼서 보러 왔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난 괜찮아요. 걱정시켜서 미안해요.”그때 주해찬이 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하리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구 대표님.”구승훈은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인 뒤 가벼운 웃음을 내뱉으며 주해찬을 향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주해찬 씨가 뭐라고 저한테 감사 인사를 하는 거죠?”주해찬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하리의 선배로서요.”그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시간도 늦었는데 일찍 집에 가서 쉬어.”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해찬이 우산을 들고 건물 쪽으로 따라나섰다.구승훈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굴에 서리가 낀 것 같은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헤드라이트가 두 사람의 실루엣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비를 맞으며 우산 아래서 두 사람의 어깨는 단단히 맞닿은 것 같았다.건물 입구에 다다랐을 때야 강하리가 나지막이 말했다.“선배, 나 혼자 올라가면 돼요.”주해찬의 시선이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입술이 어딘가 부딪힌 것처럼 살이 갈라져 있었다.갈 때는 괜찮았는데 돌아올 땐 입술이 찢어진 채로 왔다.구승훈에 대한 강하리의 쌀쌀맞은 태도는 다 지켜보고 있었다.“구승훈이 강요했어?”주해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강하리는 몸이 굳어지더
한편 여초연은 거실 소파에 앉아있고 도우미가 옆에서 옷을 걸쳐주었다.“사모님, 시간이 늦었는데 일찍 쉬세요.”여초연은 밖의 하늘을 바라보다가 옷을 두른 채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승훈이는 요즘 어떻게 지내요?”도우미는 얼굴을 찡그렸다.“잘 지내지 못해요. 강하리라는 여자가 우리 집안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보세요. 어르신까지 들여보냈는데 큰 도련님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여자한테 홀딱 넘어간 게 틀림없어요.”여초연은 밖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앞으로 그런 말 하지 마요. 승훈이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내 며느리니까.”도우미가 입술을 달싹였다.“그래도 구씨 집안이 그 여자 때문에 이 모양이 됐잖아요!”SH그룹이 합병되면서 구씨 집안은 뿌리 없는 나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도우미들의 일자리도 위협받는 상황에서 정작 여초연은 조금의 초조함도 보이지 않았다.“게다가 큰 도련님도 그 여자 때문에 사모님께 화를 냈잖아요.”여초연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우산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따라오지 마요.”그녀가 속삭이자 도우미는 즉시 발걸음을 멈췄다.비 내리는 어느 날 밤, 검은색 승용차가 구씨 집안 저택에서 시내 반대편 목란정원을 향해 유유히 달렸다.목란정원은 여초연이 소유한 정원인데 그녀는 때때로 며칠씩 이곳에 오곤 했다.구승재는 그녀를 따라 목란정원 입구까지 갔다가 차를 멈췄다.그는 목란정원의 출입구를 바라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그동안 형의 지시로 구씨 저택에 머물면서 집안사람들을 돌보고 있었지만 사실은 여초연을 감시하는 것이었다.여초연의 차가 목란정원에 들어가는 것을 본 구승재는 휴대폰을 꺼내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고요한 밤, 구승훈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의 입술은 그녀의 귀에 닿은 상태였다.“전화 좀 받고 올게.”구승훈이 떠난 후 강하리 휴대폰도 울렸다.주해찬의 전화였다.“하리야, 비행기표 샀으니까 내일 데리러 갈게.”“그래요.
구승훈은 상처받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었다.“하리야, 넌 늘 그렇듯 매정하네.”강하리가 뒤돌아 휴대폰으로 택시를 부르려는데 구승훈이 그녀의 휴대폰을 움켜잡았다.“딱 하룻밤만. 너 안 건드릴게, 응?”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하리야, 내 소원 들어주는 거라고 생각해. 네가 이 집에서 아이와 함께 지내는 모습을 몇 번이나 상상했는지 몰라. 여기가 우리 집이야.”강하리의 코끝이 시큰거렸지만 그래도 결국 구승훈의 손을 뿌리쳤다.너무도 분명한 그녀의 거절에 구승훈은 답답한 가슴에 고통이 밀려왔고 쓴웃음을 짓던 그는 더 그녀에게 강요하지 않았다.“샤워하고 나오면 다시 데려다줄게.”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화장실로 들어갔다.구승훈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데 강하리는 통화 중이었다.발걸음이 멈칫한 그는 통화 상대가 주해찬이란 것을 알아차렸다.“선배, 전 괜찮아요.”“알았어, 항공편 예약해. 나도 같이 갈게.”강하리가 전화를 끊는데 구승훈이 갑자기 다가와 그녀를 껴안고 고개를 숙여 입 맞추었다.“구승훈!” 강하리는 그의 키스에 깜짝 놀라 그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구승훈은 점점 더 꽉 그녀를 붙잡았다.그는 강하리의 턱을 잡고 깊숙이 파고들며 조금의 부드러움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마치 화풀이나 비난하듯 키스를 퍼부었다.강하리는 벽에 단단히 밀려서 몸부림을 치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그녀가 다리를 들어 그의 아랫도리를 가격하려는데 구승훈이 먼저 그녀의 다리를 붙들었다.강하리가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구승훈의 키스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힘의 격차로 인해 그녀는 반격할 방법이 없었다.강하리는 화가 나서 얼굴마저 하얗게 질렸고 구승훈은 실컷 헤집어놓은 뒤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강하리가 그의 뺨을 때렸고 이내 구승훈의 얼굴엔 손자국이 생겨났다.그러나 그의 손가락은 키스로 인해 부어오른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하리야, 나 생각이 바뀌었어.”강하리가 멈칫했다.“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