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토랑에서 나가자마자 간병인 아줌마도 전화를 걸어왔다.간병인의 목소리가 매우 다급했다.“하리 씨, 얼른 병원으로 오세요. 사람들이 마치 미친 것처럼 달려들고 있어요.”강하리가 전화를 끊자마자 구승훈이 그녀의 손목을 잡더니 차에 태웠다.“이미 근처 경찰서에 연락해서 인력들 그쪽으로 보냈어. 민우도 이미 보디가드들 보냈고. 아무 일 없을 거야. 일단 걱정하지 마.”강하리의 안색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엔 한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정서원에게 힘은 되지 못할망정 폐를 끼쳤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찢어졌다.강하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음속엔 비통함과 분노만 남았다. 심지어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송유라와 싸우지 말 걸 그랬나?하지만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왜 참고 지내야 하지? 왜 송유라에게 당하고만 살아야 하지?송유라도 그렇고 구승훈도 그렇고 잘난 사람이었다. 서로 첫사랑이었고 서로가 서로에게 빛과도 같은 존재였다. 두 사람은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며 줄다리기를 계속했다.강하리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 희생양이 되기 싫었다.구승훈은 그런 강하리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핸들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가자 핏줄이 서서히 드러났다.구승훈은 알고 있었다. 만약 이번에 강하리의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와 강하리는 정말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걸 말이다.강하리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정서원이 있는 층을 달려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강하리는 넋을 잃었다. 밖은 아수라장이었고 바닥에는 사진이 적잖이 흩뿌려져 있었다. 어떤 팬은 그녀의 사진을 프린트해 전단을 만들었다. 위에 적힌 X 년, 세컨드 같은 단어들이 강하리의 눈을 찔렀다.팬들은 이미 정리되고 없었지만 복도에는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다.강하리가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 사람들의 눈길이 그녀에게로 쏠렸고 이내 손가락질하며 수군대기 시작했다.강하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정서원의 병실로 향했다.구승훈이 그 뒤를 바짝 따라갔다.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얼굴
구승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손연지 씨, 오지랖이 너무 넓다는 생각 안 해요?”손연지가 구승훈을 노려보며 말했다.“오지랖이 좀 넓으면 어때요? 그 오지랖에 누군가 걸려들었나 보죠.”구승훈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지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구승훈은 강하리를 보호할 생각이었다. 그녀를 모욕한 사람도 처리하고 차마 들어줄 수 없이 역겨운 말들도 사라지게 할 것이다.하지만 송유라는…구승훈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 도움도 주지 않는 것뿐이었다. 심지어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칠 수도 있지만 정말 그녀를 응징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손연지는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불쌍한 우리 하리, 보는 눈도 없지. 이런 사람한테 10년이라는 시간을 바쳤다니, 이런 과분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손연지는 이렇게 말하더니 안고 있던 물건을 전부 구승훈에게 던졌다. 그 바람에 구승훈 옆에 서 있던 노민우에게도 불똥이 튀고 말았다.억울하게 매를 맞은 노민우가 노발대발했다.“나랑은 아무 상관이 없는데 왜 나까지 맞아야 하죠?”손연지가 그런 노민우를 째려보며 말했다.“유유상종이라고, 저런 사람이랑 같이 노는 사람이 성품이 좋으면 얼마나 좋겠어요.”노민우는 어이가 없었다.“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지?”노민우는 화가 치밀어올랐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구승훈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멍한 눈빛으로 손연지를 바라보며 물었다.“아까 뭐라고 했어요?”사실 손연지는 구승훈에게 이런 말을 해줄 생각이 없었다.전에 강하리가 끝내기로 했으면 깔끔하게 끝내야 한다고 했던 게 떠올라서 가만히 있으려다가 강하리가 너무 불쌍해서 그럴 수 없었다.구승훈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게 너무 괘씸했다. 강하리가 10년이라는 시간을 갖다 바쳤는데 구승훈은 소중한 줄을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하리가 구승훈 씨를 10년이나 좋아했다고요! 10년! 근데 구승훈 씨는 우리 하리한테 어떻게 했어요? 첫사랑을 보호한다고 우리 하리한테 무슨
“네.”강하리는 대답을 회피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심장이 짓눌려져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강하리가 정말 자신을 10년이나 좋아했다니!몇 번씩이나 자신의 울화를 부른 그 연적 새끼가.강하리를 뺏길까 봐 노심초사했던 그 사람이.그게 우습게도 자기 자신이었다니.“왜……. 여태 말 안 했어.”강하리가 웃었다.“그럴 필요가 없어서요. 나 좋아하지도 않는데 말해 뭐 해요? 내 비천함을 더 돋보이려고? 아니면, 내 감정을 더 짓밟게 하려고요? 차라리 그냥 거래였으면 좋았겠네요.”“물론, 지금은 거래마저도 아니지만요.”“강하리!”구승훈의 눈이 벌개졌다. 강하리의 말 한 마디마디가 비수가 되어 그의 가슴에 꽂혔다.아픈 나머지 가슴이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나 좋아한 거 맞잖아!”강하리가 말이 없어졌다. 주위에는 온통 호기심의 눈길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녀는 더이상 구승훈과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말없이 돌아서 병실로 들어가는 강하리를 구승훈이 성큼성큼 따라갔다.안 따라가면 강하리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승훈 씨.”병실에 들어가서야 강하리가 입을 열었다.“네, 좋아했던 거 맞아요.”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말투.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녀의 마음 속 상처는 다시 헤집어지기 시작했다. 까이고 벌려져 다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내 어린 시절 꿈이었어요. 승훈 씨한테 좀만 더 가까이 가려고 내 자존심을 찢고 뭉개고, 내 자신을 먼지만큼 웅크렸어요. 하지만 그게 내 실책이었죠. 너무 나를 보잘것없게 만들어서, 승훈 씨한테 보이지도 않았으니까.”별것 아닌 듯 얘기하지만, 그녀는 눈 앞이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했다.“그래서 포기했어요. 너무 힘들어서. 그때 내 마음은 먼지처럼 흩어진 지 오래요. 그러니까 죽기 살기로 승훈 씨 곁을 떠나려고 했겠죠. 미련이 조금도 안 남았으니까.”뜨거운 것이 들끓던 구승훈의 눈이 점차 식어갔다.나중에는 얼음장처럼 찬 기운만 남긴 채 빛을 잃었다.이토록 괴로워 보긴 처음이었다.마음 뿐만 아니라
강하리가 긴 숨을 내 쉬었다.상처를 헤집을 땐 그렇게 아프던 것이, 다 털어놓고 보니 오히려 후련했다.허망했던 그 사랑도 이젠 털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승훈 씨가 도와준다면 너무 감사하겠지만, 안 그래도 전 할 말 없어요. 들어가 보세요.”“내가 잘 처리할게.”구승훈의 묵직한 대답이 돌아왔다.꺼졌던 불씨를 살리려면 자그마한 불꽃이라도 튀어야 할 것 아닌가.그 불꽃을 꺼버리려는 자를 싸고 돌 수는 없는 노릇.“전에 나한테 썼다던 그 편지 좀 볼 수 있을까?”“없어요. 태워버렸거든요.”“야 이…….”구승훈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태워…… 태워버렸다고? 그 손글씨로 쓴 편지를?”“네.”확인 말살을 하는 외마디 대답에 구승훈의 표정에 쩌적 금이 갔다.‘이런 거였구나. 원하는 걸 얻을 수 없는 기분이.’“독한 여자 같으니라고.”한 마디를 남긴 채, 구승훈이 병실을 나섰다.병실 문 앞, 갑자기 문이 열리며 나오는 구승훈의 모습에, 문 앞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손연지와 노민우가 흠칫 뒤로 한 발작 물러섰다.그들을 못 본 양, 구승훈이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겨 멀어져갔다.넓디넓은 그의 어깨가 오늘따라 뭐에 짓눌린 듯 무거워 보였다.차에 오른 뒤에도 그 묵직한 짓눌림은 사라지지 않았다.답답한 가슴에서 심술 비슷한 게 피어올랐다.나한테 쓴 편지인데. 수취인이 아직 보지도 못 했는데.그걸 그렇게 태워버리면 어떡하냐고.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구승훈은 핸드폰을 꺼내 승재에게 전화했다.“오늘 병원에서 난동 피우던 것들 다 찾아내서 기소해. 거리에서 찌라시 뿌리던 그 놈들도 모조리. 잡아서 심문할 수 있는 놈들 있으면 다 잡아들이고. 강하리 세컨드 설이 깡그리 사라지게 작업해.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멍해졌던 승재가 바삐 고개를 끄덕였다.“그나저나 형, 장진영과 송동혁이 회사 문 앞에서 지키고 있는데-.”“쫒아버려. 버티면 때리고.”그대로 통화를 마친 구승훈이 차를 몰아 회사로 질주했다.“구 대표님! 대표님! 우리 유라
“강하리!”뚝. 뚜- 뚜-구승훈의 목소리가 들리기 바쁘게 전화를 끊어버리는 강하리.구승훈은 간병인 아줌마한테서 빌린 핸드폰을 쥔 채 쓴 입맛만 다셨다.‘이젠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는 건가.’“언제 그랬어요? 보경시에 데려갈 거라고?”“어제 여기가 안전하지 않다면서 보경시 병원 알아본다 그러셨어요. 그 사람들 미친 거 아니에요? 착한 하리 아가씨를 어떻게 그렇게 모욕할 수가 있는 걸까요.”아줌마가 혀를 쯧쯧 찼다.“오늘 병원에는 왔었고요?”아려오는 가슴을 갈무리하며 구승훈이 핸드폰을 돌려주었다.“오늘 안 오신댔어요. 어제 퇴근하고 다녀가셨는데, 주현 도련님이라는 남자분이 따라와서는 일 얘기를 한답시고 이글거리는 눈길로 우리 하리 아가씨를 위아래로 훓어보는데, 옆에 제가 다 부담스러웠지 뭐예요.”지나가는 얘기 같은 아줌마의 수다였지만, 구승훈은 귀가 번쩍 뜨였다.“정주현이요?”하지만 곧 피식 웃었다.“용을 쓰네요 참. 어차피 퇴짜 맞을 건데.”“하이고, 대표님이야말로 퇴짜 맞으신 거 아니에요? 핸드폰을 다 빌려쓰시고.”아줌마가 안쓰럽다는 눈길로 구승훈을 흘겨보았다.“……놀래켜 주려고 그랬던 겁니다.”겨우 한 마디 해명했지만, 아줌마에게 씨알도 안 먹혔다.“퍽이나요. 아가씨가 대표님 번호 차단하셨단 거 다 아는데요 뭘.”“…….”도망치듯 병원에서 나와버린 구승훈.그 길로 대양 지사로 찾아갔다.하지만 거기에도 강하리는 없었다. 띠꺼운 표정으로 마중 나온 정주현만 있을 뿐.“구 대표님께서 여긴 어쩐 일로?”말투마저 퉁명스러운 정주현. “환영하지 않음”을 온 몸으로 고스란히 내비치고 있었다.“강하리는?”“말이 짧으시네?”정주현이 입가를 삐뚜름히 올렸다.“내가 왜 그걸 알려줘야 하죠?”“이제 막 연성에 자리잡은 회사 치곤 태도가 영 맘에 안 드는데.”구승훈의 표정이 살벌해지기 시작했다.“하지만 강 경리가 있다면 곧 일떠서겠죠.”한 마디도 지지 않는 정주현.“그게 강하리를 끌어온 이유야? 정주현, 니들이 무슨 꿍꿍
송씨 집안에 들인다?참 하찮은 조건이기도 해라.“어려서부터 아빠도, 동생도 없는데 무슨 소리세요. 이제 와서 그 토 나오는 수작질은 집어치우시죠.”“하리야! 내가 이렇게 빌게. 직접 도와주지 않아도 돼! 구승훈에게 좋은 말 몇 마디라도…….”송동혁은 정말이지, 쓸 수 있는 방법은 다 동원했었다.한 치의 오차도 없는 계산이라고 생각했지만, 심준호가 한 수 위였다.일이 난 뒤에도 모진 애를 쓰며 송유라를 구제해내려고 했지만, 독한 구승훈이 아예 정신병원에 처넣어버렸고.병원에 갇힌 그날 밤, 송유라는 정신줄을 놓아버렸다.‘하긴, 거기가 좀 살벌해야지.’강하리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왜 구승훈에게 직접 찾아가지 않으신 거죠? 그쪽 따님을 보배처럼 아끼던 거 아니었나요?”“우리를 만나줘야 뭐든 해볼 거 아니야.”송동혁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 쉬었다.“아, 그래서 만만한 게 나다, 이 말씀이신가요?”강하리의 눈매가 갑자기 예리해졌다.“예전 그쪽이 했던 짓들 다 까발라 버려요 확?”이미 나락으로 떨어진 명성에 사생아 타이틀까지 덮씌워지는 건 정말 싫었지만.이미 나락으로 떨어진 이상, 더 잃을 명성이 없는 그녀이기도 했다.더 갈구면 당장이라도 터질 듯 팽팽한 그녀의 태도에 송동혁의 얼굴에서 핏기가 쏙 빠져나갔다.“진짜야! 내가 한 약속들 다 진짜라고! 공식적으로 하리 네가 내 딸이라고 밝힐 수도 있단 말이다!”“당신 같은 쓰레기의 딸 노릇을 내가 원할 것 같냐고! 당장 꺼져!”날카롭게 외친 강하리가 차에 올라탔다.부아앙!미친듯이 차가 사라졌고, 송동혁이 선 자리엔 차가 지나간 먼지만이 풀럭거렸다.멍해 굳어졌던 송동혁이 음침한 낯빛으로 바뀌더니 어딘가에 전화했다.……보경시.공항에서 나온 강하리 앞에 주해찬이 서 있었다.“선배.”주해찬이 자연스레 그녀의 손에서 캐리어를 받아쥔다.“피곤하지?”“아직은 괜찮아요.”“인터넷에 올라왔던 기사들, 신경쓰지 마. 다 네가 잘나서 꼬이는 것들이니까. 알았지?”“그럼요 선배.
익히 들어오긴 했지만, 강하리가 백아영을 실제로 만난 건 처음이었다.이름부터가 젊음으로 차 넘치는 백아영 전 외교부장은, 칠순 넘은 은빛 나이에도 불구하고 눈에서 맑은 정기가 돌고있었다.이쪽의 눈빛을 느꼈을까, 진태형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그 눈길을 따라 백아영의 눈길도 이쪽을 향한 순간.강하리의 얼굴에 눈길이 닿은 백아영이 넋이 나간 표정이 되었다.“부장님, 이쪽이 바로 준호가 입에 달고 다니던 강하리 양입니다.”진태형의 소개에 정신이 퍼뜩 든 백아영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준호한테서 얘기 많이 들었어요, 하리 양. 진작 만나보려고 했는데 이렇게나 오래 걸렸네요.”백아영의 따뜻한 눈빛 속에, 한 줌의 감회가 스쳐지났다. 마치 강하리에게서 다른 사람의 모습이 보이는 것처럼.그리고 이어 콧등이 시큰해왔다.준호가 몇 번이고 입에 올렸을 때도 반신반의하던 백아영이었다.그러나 강하리의 실물을 보는 순간,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내 딸이…… 살아 돌아왔어.’정말이지 닮아도 이렇게 닮을 수가 없다.마찬가지로 예쁘고 똑 부러지던 딸의 모습을 한 아이가, 햇살처럼 활짝 웃는다.“백 부장님, 티비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우세요.”“엄마”가 아니라 “부장님”으로 불리는 순간, 현실로 되돌아온 약간의 허망함을 갈무리하며, 백아영이 강하리의 두 손을 꼭 잡아쥐었다. “하리 양이야말로 정말 예쁘네요. 시간 날 때 집에 한 번 밥 먹으러 와요.”“네! 꼭 찾아뵙겠습니다!”“부장님, 하리 양이 오늘 회의 번역 전담입니다.”진태형의 귀띔에 그제야 백아영이 강하리의 손을 놓았다.“아, 그래요? 많이 바쁠 텐데, 내가 괜히 하리 양 시간을 잡아먹은 게 아닌지 모르겠네요. 오늘 회의 잘 부탁드려요.”“아닙니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깍듯이 인사를 마친 강하리가 박근형과 함께 멀어져갔다.백아영의 눈길은 강하리의 뒷모습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태형 씨, 혹시 그럴 가능성은 없을까요? 하리 양이…….”“저도 혹시나 해서
외교부 소속 호텔에서 열린 연회.강하리는 입장하는 대로 인파에 둘러싸였다.독보적으로 예쁘기도 했지만, 박근형의 뒤를 이를 사람이란 소문이 퍼진 탓도 있었다.“하리야, 어떻게 왔어? 그러잖아도 전화해볼까 망설이던 참이었는데.”주해찬이 눈을 빛내며 다가왔다.“교수님이 외교부 모임이라고 하셔서요. 한 번 와보고 싶었어요.”“진작 알았더라면 데리러 갔을텐데.”“그럼 하리는 해찬이 너한테 맡길테니 잘 챙겨줘야 한다?”박근형 교수가 웃으며 한 마디 끼어들고는 둘을 남긴 채 안쪽으로 들어갔다.한편 연회장 저쪽 켠.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주해찬과 강하리를 아니꼬운 눈길로 바라보는 한 여인이 있었다.“연란 씨, 저 쪽이 해찬이 여자친구야?”그 옆으로는 우아한 차림의 부인들이 모여있었다.누군가의 물음에 주해찬의 어머니, 석연란의 미간이 순간 구겨졌다.하지만 이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럴 리가. 우리 해찬이가 아무나 사귈 사람도 아니고.”말 속에 숨은 뜻을 알아챘다는 듯, 주위의 부인들이 고개를 끄덕인다.“그나저나 진짜 예쁘긴 한 걸. 여자인 내가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돈데 해찬이는 오죽하겠어. 안 그래요?”석연란의 입가에 맺혔던 미소가 살짝 흐트러졌다.“해찬이 대학 후배야. 해찬이가 워낙 착해서 딴 사람 잘 챙겨주잖아.”그 말에 묘한 웃음이 서리는 주위 부인들.착해서 그런 거라고?해찬이 눈길이 저 아가씨에게서 떨어질 줄을 모르는데?수상해지는 분위기를 감지한 석연란이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참다 못해 결국, 주해찬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강하리에게 다가갔다.막 손연지와 통화를 끝낸 강하리가 고개를 돌리자, 한 여인이 꼿꼿하게 서 있는 게 보였다.주해찬을 어느 정도 닮은 인상에 누군지 대뜸 짐작이 갔다.“안녕하세요 사모님.”“처음 보네요. 사진보다 훨씬 예쁘네.”치가 떨렸지만 석연란의 목소리는 온화하기만 했다.“감사합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남자가 모자라진 않을 거고. 그러니까 우리 해찬이 좀
강하리는 침실 문을 흘끗 보고는 구승훈을 무시했다.하지만 곧 밖에서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강하리가 ‘꺼져!’라고 말하려던 순간, 가정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사모님이 술 드셨으니, 숙취 해소에 좋은 차를 끓여 드리라고 하셨습니다.”“구승훈은 지금 옆에 있어요?”가정부는 옆에 서 있는 구승훈을 힐끗 보며 대답했다.“아니요, 대표님은 방금 준봉 씨와 함께 서재로 가셨습니다.”가정부가 말을 마치자 강하리는 바로 문을 열었다.그러자 문 앞에는 숙취 해소차를 들고 있는 구승훈과 그의 뒤에 서서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가정부가 있었다.“이제 가서 쉬세요.”구승훈은 가정부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러고는 숙취 해소차를 들고 침실로 들어왔다.강하리가 말할 틈도 없이 그는 숙취 해소차를 한 모금 마시고 바로 강하리에게 입을 맞췄다.강하리는 구승훈에게 숙취 해소차를 넘겨받았지만 삼키기도 전에 구승훈은 다시 키스를 퍼부었다.강하리가 숨이 가쁠 때까지 구승훈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고 숙취 해소차는 누가 더 많이 마셨는지 알 수 없었다.“맛있어?”구승훈은 강하리의 입술을 핥으며 아쉬운 듯 물었다.강하리는 그를 밀어내며 침실 안쪽으로 걸어갔다.“나가서 자.”구승훈은 숙취 해소차를 옆에 내려놓고 강하리의 손을 잡았다.“아직 화났어? 내가 잘못했어. 임희주 씨 문제는 내가 잘 처리할게. 응?”강하리는 그를 무시하고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구승훈은 강하리를 무릎에 앉히고 따뜻한 숨결을 그녀의 목덜미에 뿌리며 부드럽게 입술을 핥았다.“그럼 내가 잘못을 만회할게.”강하리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네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오늘 밤, 강 대표님을 편안하게 모실게. 어때?”강하리는 임희주의 끈질긴 집착 때문에 짜증이 났을 뿐이지 진짜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하지만 지금 이 남자의 뻔뻔한 모습을 보니 화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좀 염치가 있어야지.”“염치가 중요한 게 아니야.”구승훈은 콧방귀를 뀌며 손을 강하리의 잠옷
구승훈은 휴대전화 화면에 뜬 메시지를 보자마자 주저 없이 준봉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재로 와.”준봉은 곧 자료를 들고 서재로 왔다.“말해 봐.”준봉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보고했다.“임희주 씨의 과거는 조작된 것 같습니다. 이전에 조사했던 정보에 따르면 임희주 씨는 남쪽 작은 도시의 보육원 출신이고 여 사모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걸로 보입니다. 며칠 전에 대표님께서 여 사모님 쪽을 조사해 보라고 하셔서 관련된 사람들을 추적해 봤는데 여씨 가문의 오래된 집사가 몇 년 동안 연성시 외곽의 보육원을 후원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보육원을 조사해 보니 실제로 임희주 씨는 그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입양되었는데 입양한 사람이 그 집사의 고향 친구였답니다.”준봉은 말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구승훈의 표정을 살폈다.임희주의 출신을 보면 여초연이 얼마나 치밀하게 사람을 키워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만약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을 해치기 위해 이렇게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마음이 어떨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준봉은 구승훈의 표정을 긴장하며 지켜보았지만 구승훈의 표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었다.다만, 그 깊고 짙은 눈동자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대표님, 괜찮으세요?”구승훈은 눈썹을 살짝 올리며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괜찮아. 별일 아니야.”준봉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했다.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대표님은 사모님과 아가씨가 계시잖아요. 두 분 다 잘 지내고 계시니까요.”구승훈은 대답하지 않고 잠시 후 다시 물었다.“아내가 화난 데다가 꼬맹이까지 울려버렸어. 어떻게 달래야 할까?”“네?”준봉은 잠시 억울한 표정을 짓다가 한참 만에 대답했다.“대표님, 저는 아직 솔로예요.”구승훈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나가 봐.”“그럼 임 선생은 어떻게 할까요?”구승훈의 눈빛이 순간 차가워졌다.“계속 감시해. 조만간 여씨 가문 사모님과 연락할 거야.”준봉은
노민우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얼굴에 가득했던 득의만만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강하리의 화난 모습을 보니 솔직히 겁이 났다.“저기, 승훈이랑 싸웠어요?”“민우 씨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말해봐요, 무슨 일이에요? 손연지는 어디 있어요?”“손연지는 호텔에 있어요.”노민우는 잠시 말을 멈췄다.강하리는 서두르지 않고 노민우를 가만히 지켜보았다.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 노민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우리 회사, 강하리 씨가 인수해 줬으면 좋겠어요.”강하리는 놀라서 노민우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노씨 가문은 의학계의 명문가였고 대대로 의사 집안이었다.이번 세대에는 병원을 노민준에게 물려주었지만 노민우 또한 의료계를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다.그는 명인병원 지분 외에도 의약품과 의료기기 사업을 하는 회사를 직접 설립했고 꾸준히 잘 운영해 왔다.그런데 갑자기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가 뭘까?“무슨 뜻이에요?”노민우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솔직히 말해서, 전 어릴 때부터 엄마를 무서워했어요. 엄마는 항상 강압적이었고 제 결혼을 강요하면서 제가 거부하면 손연지에게 달려갈 거라고 협박했어요.”그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엄마 말에 따라 결혼했는데도 엄마는 손연지를 찾아가는 바람에 손연지가 많이 억울하게 됐어요. 다 제가 잘못한 탓이죠.”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아무 말 없이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노민우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손연지에게 보상을 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저도 노력해서 손연지에게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사실 전 승훈이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손연지에게 달려갈 수 없어요.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손연지에게 가면, 오히려 우리 둘 다 더 힘들어질 거예요. 그래서 우리 회사를 먼저 정리하고 싶어요.”강하리는 이제야 그의 의도를 이해했다.“하지만 굳이 저한테 부탁할 필요가 있을까요? 노민우 씨도 회사를 독립시킬 수 있잖아요. 아니면, 구승훈이 도와줄 수도 있고요.”노민우는 웃으며 말
강하리는 스스로 최근 구승훈에게 꽤 너그러웠다고 생각했다.그를 최대한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솔직히 속으로는 답답함이 끓어올랐다.강하리의 마음속에서 구승훈은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구승훈이 겪었던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여자의 끊임없는 도발까지 참을 수는 없었다.구승훈의 입가가 씰룩였다. 아마도 오랜만에 강하리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보아서인지 그는 오히려 흥미롭게 느껴졌다.그는 강하리를 번쩍 들어 자기 무릎에 앉히며 말했다.“내가 처리할게. 네가 직접 나서는 일은 없을 거야, 됐지?”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명히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닥쳐.”구승훈은 강하리를 달래려고 몇 마디 더 하려다가 강하리의 냉정한 말에 곧 입꼬리가 떨어지며 입을 다물었다.차가 저택 앞에 멈출 때까지 강하리의 표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차가 멈추자, 강하리는 화가 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문 앞에 도착하자 그녀는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노민우를 보았다.“담배 꺼요.”노민우는 떨리는 손으로 재빨리 담배를 껐다.그는 일어서서 강하리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고 다가갔지만 강하리는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가며 문을 쾅 닫아 버렸다.노민우는 당황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왜, 왜 이래?”구승훈은 노민우를 흘겨보며 쏘아붙였다.“너는 손연지랑 있지 않고 우리 집엔 왜 왔어?”노민우는 코를 긁적이며 답했다.“강하리 씨 만나러 왔어.”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누구 만나려고?”“노민우 씨, 들어오세요.”그때, 강하리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오자 구승훈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나 먼저 들어갈게.”노민우는 웃음을 머금고 구승훈에게 손을 흔들었고 구승훈의 어이없는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서재로 와요.”그는 강하리가 일어서서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쏜살같이 따라 올라갔다.구승훈은 한숨을 쉬며 가정부에게 연정이를 데려오라고 부탁했다.“쉬세요.
방에서 나온 강하리는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하지만 화장실에 도착하기 전, 그녀는 멀리서 구승훈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는 한 손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복도에 서 있었는데 거리가 멀어 그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와 마주 보고 서 있는 사람이 바로 임희주라는 것은 분명했다.강하리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옆으로 비켜섰다. 그때, 그녀 옆에서 누군가가 말했다.“강 대표님, 안 가보세요?”강하리가 고개를 돌리자 미소 띤 얼굴의 임명우가 보였다.“임 대표와 무슨 상관이죠?”임명우는 손에 술잔을 든 채, 그녀의 말에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냥 강 대표님은 눈에 든 모래 한 톨도 못 참는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너그러운 것 같네요.”강하리는 비웃으며 말했다.“임 대표님, 협상하려면 협상만 하세요. 이러시면 제가 방법을 써서 계약을 강제로 해지하는 수가 있어요.”임명우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가 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제가 너무 섣불렀네요. 하지만 강 대표님에게 남자를 너무 믿지 말라고 조언해 드리고 싶었어요.”그러고는 잠시 멈추다가 말을 이어갔다.“아, 내일 사업 협상이 있는데, 제가 자료를 이메일로 보내드릴게요. 강 대표님, 내일 뵙겠습니다.”임명우는 그녀에게 술잔을 들어 보이며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강하리는 임명우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이상한 짜증이 솟아올랐다.더 이상 망설일 것도 없이 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구승훈 쪽으로 걸어갔다.클럽은 그렇게 조용한 곳이 아니었지만 하이힐이 바닥을 찍는 소리는 여전히 또렷하게 들렸고 구승훈과 임희주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를 보는 순간, 구승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고 임희주는 잠시 멍한 표정을 보이다가 이내 따라 웃었다.“강하리 씨.”강하리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어요?”그녀는 구승훈 옆에 서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조명에 비친 그녀의 눈은 유난히 빛났다.구승훈은 손을 들어 그녀를 끌어안으며
“좋아해, 됐지?”손연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한 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하며 곧 잠들 준비를 했다.노민우는 순간적으로 숨이 막힐 듯한 느낌에 휩싸였다. 비록 손연지의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그의 마음 한편에는 미묘한 설렘이 피어오르고 있었다.그 말 한마디 속에 어쩌면 자신을 조금이라도 좋아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싹텄다.“그럼 소영준은 아직도 좋아해?”노민우가 조심스레 물었다.“귀찮게 굴지 마.”손연지는 짜증 섞인 어조로 대답했고 노민우는 잠시 말을 멈춘 후 다시 물었다.“그럼 누가 제일 좋아?”“하리.”손연지는 눈을 흐리게 뜬 채로 답했다.더 물어보려 했지만 그 순간 노민우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여사님’이라는 세 글자가 보이자 노민우는 머리가 지끈거렸고 화면을 보기만 할 뿐 전화를 받지 않았다.전화가 더 이상 울리지 않게 되자 노민우는 곧바로 노민준에게 전화를 걸었다.“형, 엄마 좀 말려줘. 그리고 나 결혼 취소한 거, 형이 할아버지께 말씀드려.”“너 확실한 거야?”노민준은 대답 대신 노민우의 마음을 물었다.노민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묻기 전에 노민준이 덧붙였다.“결혼 취소한 건 내가 할아버지께 말씀드릴 수 있어. 할아버지께서도 여씨 가문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시지 않으니까. 하지만 어머니의 반대를 꿋꿋이 이겨내고 손 선생이랑 잘 지낼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어? 동생아, 이렇게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야. 결심이 확실하지 않다면 함부로 약속하지 마. 너도 승훈이처럼 가족을 등 돌리게 될 수도 있어. 그럴 수 있겠어?”그럴 수 있다고 답하려던 찰나, 노민우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노민준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삼촌 쪽은 내가 막아볼게. 하지만 잘 생각해 봐. 그리고 정말 결혼을 취소할 거라면 여씨 가문에 직접 가서 이유를 설명해.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모든 일을 손 선생이 떠안게 될 거야. 알았지? 난 삼촌 보러 가야겠다.”전화를 끊은 후, 노민우는 한숨과 함께 손연지를 바
여명주는 얼굴이 붉어지며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노민우 오빠, 저 할 수 있어요.”노민우의 관자놀이가 뛰기 시작했고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조수석 문이 다시 열렸다.손연지가 비틀거리며 차에서 내렸다.노민우는 그녀를 돕기 위해 다가가려 했지만 여명주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노민우 오빠, 이게 무슨 일이에요?”노민우는 갑자기 인내심을 잃기 시작했다.“손연지가 술을 마셔서 내가 데려다 주려고요. 여명주 씨는 먼저 들어가세요.”말을 끝내고 그는 여명주를 밀어내며 손연지에게 다가갔다.손연지는 여전히 정신이 흐릿했지만 노민우가 다가오자 갑자기 그에게 한 대 때렸다.때리고 나서 잠시 얼떨떨해하던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손을 비비며 비틀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노민우는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았다.“어디 가는 거야?”손연지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때 여명주가 갑자기 다가와 손연지의 얼굴에 가방을 던졌다.“이 여우 같은 여자. 노민우 오빠를 유혹하는 것도 모자라서 오빠를 때리기까지 하다니.”손연지의 이마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하자 노민우는 급하게 말했다.“여명주 씨, 이제 그만해요!”여명주는 잠시 멈칫했다.“오빠, 정말 이런 여자 때문에 화내는 거에요?”노민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돌아서 손연지를 안고 차로 향했다.여명주는 뒤에서 소리 지르며 따라갔지만 노민우는 손연지를 차에 태우고 바로 차를 몰았다.노민우는 손연지를 병원으로 데려갔다.그녀의 이마 상처는 계속 피가 나고 있었고 손연지는 의자에 기대어 말없이 앉아 있었다.노민우는 손연지를 한 번 쳐다봤지만 그녀는 이미 눈을 감고 다시 잠이 들었다.노민우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었다.예전에 손연지가 여명주 때문에 직장을 잃었을 때나 그의 어머니가 손연지를 집으로 데려와 모욕했을 때도 그는 그 모습을 직접 본 적이 없었다.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할 때 그런 상황은 그에게 그저 가볍게 알고 있는 일일 뿐이었다.그래서 그는 사실 손연지가 왜 그렇게 과격하게 반응했는지
노민우는 갑작스러운 키스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손연지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감싸며 깊이 응답했다.차 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애틋하고 끈적한 느낌으로 변했다.노민우는 손을 뻗어 손연지의 의자 등을 부드럽게 눕혔고 그 후 자신도 몸을 살짝 기울였다.“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어?”노민우는 손연지의 턱을 부드럽게 잡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는 손연지의 술버릇을 익히 알고 있었다.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손연지는 술에 취해 그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자신에게 장난을 쳤다.그는 오늘만큼은 꼭 물어보겠다고 마음먹었다.게다가 최근 소영준이 손연지에 대해 다시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는 손연지가 그 사람과 다시 연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손연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노민우를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았고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잡고 힘껏 꼬집었다.“노민우, 너 진짜 이상해.”노민우는 혀를 차며 웃었다.“나한테 말할 때 좀 더 부드럽게 말할 수 없냐?”손연지는 짜증이 나서 그를 밀어냈고 노민우는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비록 술을 마셨지만 손연지는 여전히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녀가 계속 움직이자 노민우는 조금 흥분을 느꼈다.노민우는 목을 몇 번 굴린 뒤 힘으로 그녀를 눌렀다.“움직이지 마!”“너 나한테 화내는 거야?”손연지는 갑자기 속상해 보였다.노민우는 당황했다.“...““아이고. 미안해. 제발 움직이지 마. 그럼 진짜로 참을 수 없을 것 같아.”그 순간 손연지는 갑자기 그의 입술을 물었다.노민우는 이미 반응을 보였고 손연지가 적극적으로 다가오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그는 손을 들어 손연지의 옷을 벗기고 입을 맞췄다.“해도 될까?”목소리를 낮추며 노민우는 손연지의 턱을 잡았다.“말하지 않으면 네가 동의한 걸로 간주할게.”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차 안은 어느새 숨소리와 낮은 신음 소리만 가득했다.노민우는 재빨리 벨트를 풀었지만 그가 다음
“우리 연애 하자고. 어떻게 생각해?”연애라는 두 글자가 노민우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손연지는 심장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들었다.사실 그녀는 노민우와 무언가가 생길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고 예전에 말했던 1년은 단지 자신과 노민우에게 시간을 주는 방식에 불과했다.결국 신분 차이가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에 만약 노민우가 결혼을 취소한다고 해도 노씨 가문은 아마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노민우이 이 말을 꺼내는 순간 그녀는 여전히 마음이 흔들렸고 마음이 흔들리긴 해도 옳고 그름은 확실히 구별할 수 있었다.“너 약혼녀가 있는데 밖에서 여자친구를 사귀는 거 본 적 있어? 그럼 결국 너와 약혼녀가 결혼하고 나면 나는 네 두 번째 부인이 되는 거야? 너 나를 바보로 아냐?”손연지는 말하면서 그의 머리를 가볍게 쳤고 노민우는 그녀의 발걸음을 따라가며 말했다.“그럼 결국 우리가 결혼하게 되면 어쩔 거야?”“만약 내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 어떡할 건데?”“그만둬. 사실 나랑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우리는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잖아 맞지?”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계단을 내려갔고 아래층 거실에서는 모두 준비가 끝나 있었다.손연지는 노연정을 안고 밖으로 나가려 했고 그 뒤를 노민우가 따랐다.천아름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며 강하리에게 말했다.“여씨 가문 사람들이 또 와서 문제를 일으킬 거예요. 강하리 씨가 바쁠 때는 말해주세요. 제가 손연지 씨와 함께 있을게요.”강하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웨딩사진 촬영은 사실 강하리가 특별히 복잡하게 찍을 생각은 없었다.할아버지가 꼭 이 절차를 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다면 아마 생략했을 것이다.하지만 사진을 찍고 나서 컴퓨터 화면에 찍힌 한 장 한 장을 보면서 강하리는 이것이 사실 구승훈과 함께 찍은 첫 번째 사진임을 깨달았다.그녀는 옆에서 노민우와 얘기하는 구승훈을 보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손연지는 옆에서 혀를 찼다.“사실 나는 너희 둘이 결혼까지 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