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승훈은 문 앞에 서 있었고 몹시 난감한 표정이었다.구승훈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는 부인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때 그런 상황에서 강하리가 얘기해도 자신은 듣지 않았을 것이다.구승훈은 지금 머릿속에서 이 일이 도대체 언제 발생했는지 끊임없이 회상하고 있었다.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그 일이 떠올랐다. 송유라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와서 강하리가 자신을 때렸다고 했다.구승훈은 그때 자신이 뭐라고 했던지 생각해 보았다.아마도.강하리에게 당장 사과하라고 말했던 것 같았다.구승훈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그때 나에게 미리 말했다면...”강하리는 아무 말이 없었고 그때 손연지가 옆에서 걸어 나왔다.“그때 말하면 뭐가 달라질 게 있어요? 승훈 씨가 하리보고 송유라에게서 꺼지라고 다시 한번 말하게요? 구승훈 씨, 도대체 나쁜 짓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스스로 생각해 봤어요? 그동안 줄곧 하리 뒤를 따라다녔고 하리와 주해찬 씨의 관계를 망쳤죠. 승훈 씨는 화해하려고 부드럽게 말했지만 실질적인 일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잖아요. 승훈 씨의 송유라는 아직 멀쩡하죠. 심지어 송유라는 어쩌면 지금도 어떻게 하리를 해칠까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어요. 구승훈 씨, 송유라가 왜 이렇게 무서운 게 없이 행동하는지 생각해 보셨어요? 승훈 씨가 방관해서 그런 거라고요!”손연지는 말을 마치고 바로 가서 강하리를 와락 끌어안았다.강하리를 생각하니 손연지는 마음이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왜 강하리가 이렇게 괴롭힘을 당해야 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구승훈은 제자리에 서 있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강하리는 서운함을 참으며 손연지를 토닥였다.“난 괜찮아.”구승훈도 강하리의 이런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구승훈은 예전에 자신이 정말 나쁜 놈이었다고 생각했다.그래서 강하리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그녀의 상처를 전부 치료해 주기에 너무 부족했다.구승훈의 손에 핏줄이 불끈 솟았고 마음속에는 후회가 가득했다.후반 재판은 송유라의
얼마나 익숙한 장면인가.그 당시 강찬수가 정서원을 밀어 던질 때 강찬수의 대리 변호사도 막판에 이런 정신 진단 증명서를 제시했다.손연지도 당연히 이 일을 알고 있다. 그녀는 욕설을 퍼부으며 말했다.“X발, 강찬수의 상황과 똑같잖아. 천한 사람은 다 이런가?”현장에 있던 기자는 송유라의 정신병 진단 증명서를 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송유라가 정신병이 있다고?오늘 이 소송은 정말 치열하게 진행되었다.하지만 휴게실에 있던 강하리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지금 매우 복잡했다.지나친 우연의 일치 아닌가?구승훈도 이 모습을 보고 안색이 어두워졌다.이때 손연지가 다급하게 말했다.“어떡하지? 강찬수처럼 무죄로 풀려나는 건 아니겠지?”강하리가 입술을 꽉 깨물고 대답했다.“나는 심 변호사님을 믿어.”심준호는 상대방이 제시한 정신병 진단서를 보고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피고인에게 정말 정신질환이 있습니까?”그러자 상대방 측 변호사가 대답했다.“그럼요. 당사자는 연예인이기 때문에 이런 일로 죄를 피하지 않을 겁니다. 또 아까도 보시다시피 당사자의 정신 상태가 이상했잖아요.”그 말을 듣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아까 송유라의 행동을 곰곰이 되새겨보았다. 정말 정상인 것 같지는 않았다.심준호는 그윽한 눈빛으로 송유라의 변호사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모든 사람이 그가 반박할 것이라고 예상했을 때 심준호는 뜻밖에도 이를 인정했다.“피고인이 정신상태는 확실히 정상인 것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폭력적인 경향이 심하기 때문에 제 당사자의 안전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강제로 정신질환 감시 치료를 진행할 것을 요청합니다.”그 뜻인즉 강제로 정신 병원에 입원시키는 것이다.정신 병원은 감방보다 사람을 더 망가뜨리게 할 수 있다.특히 송유라는 유명인이자 연예인이기에 더 고통스러워할 것이다.사실 이번 소송이 정상적으로 진행되면 기껏해야 3개월에서 6개월의 판
팬들이 LED 전구로 만든 응원판이 구승훈의 등에 쾅 하고 내리꼰졌다.강하리가 화들짝 놀라며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불렀다.“승훈 씨!”부르고 나서야 강하리는 자기가 실수했음을 알아챘다.응원판에 맞은 구승훈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돌려 그 팬을 노려봤다. 눈빛이 차가운 게 섬뜩할 정도였다.이에 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대, 대표님, 저, 저희는 그냥 저 파렴치한 여자를 손봐주려고 그랬던 거예요. 저 여자 때문에 우리 언니가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데요! 대표님, 우리 언니를 대신해 꼭 복수해 주세요.”이 말에 구승훈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죠?”법원에 들어오려면 소지품 검사가 필요했다. 응원판 같은 물품은 절대 반입이 불가한 물품에 속했다.팬들은 너무 무서워 다리가 떨릴 지경이었고 구승훈이 캐묻자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전 그냥 저 여자가 너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랬어요. 분명 대표님은 우리 유라 언니랑 천생연분인데, 저 여자는 그냥 중간에 끼어든 나쁜 년일 뿐이라고요!”팬은 말하면 말할수록 흥분하기 시작했다.구승재가 얼른 사람을 데리고 와서 그 팬을 제압했다.“형, 괜찮아?”구승훈은 질문에 대꾸하지 않고 오히려 강하리를 바라봤다.“어디 다친 데 없지?”강하리가 고개를 저었다.“없어요.”강하리가 잠깐 고민하더니 다시 물었다.“고마워요.”강하리는 아직 얼굴이 하얗게 질린 상태였다.사실 아까 송유라가 정신질환 진단서를 꺼내 들었을 때부터 심드렁한 상태였다. 하여 팬이 응원판을 휘두른 것도 모르고 미처 피하지 못했다.구승훈은 강하리가 고맙다고 하자 마음이 먹먹했다. 꼭 이렇게 내외해야 할까?구승훈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뭐 날아오는 것도 모르고.”구승재가 이를 듣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은 이런 질문을 할 때가 아니라 위로를 건넬 때인데 말이다.“강 부장님, 형 다쳤으니까 케어 좀 해줘요. 나는 가서 팬들 좀 처리할게요.”팬들은 송유라가 법원에서
구승훈은 장진영을 뿌리치고 밖으로 나갔다.밖에 있는 팬들은 이미 거의 정리되고 없었다. 차 옆에 서 있는 강하리는 아무 표정 없이 덤덤하게 서 있었다. 손연지가 옆에서 뭐라 말하고 있었다.구승훈이 두 사람 앞으로 다가가자 손연지가 그를 힐끔 노려보더니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구승훈은 그런 손연지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하여 자기도 모르게 강하리에게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도울 생각 없어.”강하리는 이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일단 가요.”강하리가 차에 오르려는데 구승훈이 이를 막았다.“내 차로 가자. 이 차는 이따 승재가 끌고 오면 돼. 팬들이 또 따라오기라도 하면 어떡해?”강하리는 구승훈과 한 차에 타기가 싫었지만 구승훈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기에 잠깐 고민하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구승훈의 차는 병원으로 향한 게 아니라 바로 아파트로 향했다.강하리는 이내 노선이 이상하다는 걸 발견하고는 얼굴이 굳어졌다. 이에 구승훈이 얼른 해명했다.“병원까지 갈 필요 없어. 이따 약 좀 발라주면 돼.”강하리는 구승훈을 힐끔 쳐다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이 덧붙였다.“오늘 본 그 팬 내가 잘 조사해 볼게. 우연히 들어간 건 아닌 거 같아.”한참 침묵하던 강하리가 알겠다고 대꾸했다.차 안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구승훈은 강하리를 힐끔 쳐다보더니 아무 노래나 틀었다. 잔잔한 클래식이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자 강하리가 눈까풀이 살짝 흔들렸다강하리가 아파트로 들어오자 도우미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하리 씨 왔어요?”하리가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네, 일이 좀 생겨서 왔어요.”“식사하시고 가실 거죠?”도우미가 강하리와 구승훈을 번갈아 쳐다봤다.강하리가 대답했다.“아니요. 곧 갈 거예요.”도우미는 어딘가 실망한 눈치였다. 두 사람이 아직도 화해하지 못한 걸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구승훈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강하리가 남아서 식사끼지 할 거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없었다.강하리는 익숙하게 약상자를 가
응원판에 맞을 때도 끄떡없던 구승훈은 강하리의 응징에 자기도 모르게 낮은 신음을 냈다.“강하리!”구승훈은 단번에 강하리의 손목을 잡고 몸으로 그녀를 소파에 눌렀다. 구승훈은 지금 위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다. 맞닿은 피부는 마치 불덩이처럼 뜨거웠다.강하리의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다.“승훈 씨, 움직이기만 해봐요. 바로 성폭행으로 고소할 테니까!”“하리야.”구승훈의 목소리가 점점 갈라지고 있었다.“나 건강해. 여자랑 스킨십한 지 꽤 됐으니까 조금만 건드려도 반응이 오는 건 정상이야. 널 보고도 아무런 느낌이 없어야 만족해?”강하리가 빨개진 얼굴로 성질냈다.“승훈 씨가 고자가 된다 해도 나는 괜찮을 거예요!”구승훈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강하리, 그래도 우리 그쪽 궁합은 잘 맞았잖아! 근데 이렇게 저주한다고?”강하리의 몸이 순간 굳더니 이렇게 반박했다.“혼자만 그렇게 생각하는 걸 수도 있죠.”구승훈이 강하리를 노려보며 물었다.“뭐라고? 지금 내 스킬에 도전하는 거야?”두 사람의 자세는 지금 매우 위험했다. 강하리는 구승훈의 소중한 무언가가 아직도 꿋꿋하게 그녀를 찌르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녀는 더는 이 화제를 이어가기 싫었다.“승훈 씨, 여자가 고프면 지금 당장 나가서 찾아요. 여기서 발정 난 푸들처럼 굴지 말고. 난 이미 질렸다고요!”구승훈의 이마에 순간 핏줄이 섰다.“질렸다고?”강하리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어갔다.“당연하죠. 매일 그렇게 정신없이 해대는데 질리지 않는 게 이상하죠. 떠올리기만 해도 역겨워요.”구승훈은 어두운 표정으로 강하리를 보며 말했다.“안 믿어. 해보기 전엔 절대 안 믿어.”“저리 가요!”강하리가 발버둥 치며 일어나려 했다.하지만 이게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왔다. 강하리가 발버둥 치면 칠수록 구승훈의 눈동자는 점점 어두워졌다.“그만, 하리야, 움직이지 마.”구승훈이 순간 강하리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더 움직이면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장담 못 해.”강하리는 화가 치밀어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을 눈싸움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먼저 갈게요.”그러다 강하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구승훈이 강하리의 손목을 잡더니 이렇게 말했다.“샤워하고 올게. 잠깐 기다려. 할 얘기가 있어.”하지만 강하리는 남아있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구승훈이 한발 빨리 막아서더니 덧붙였다.“저번에 말한 강찬수 사건 내가 힌트 찾았다고 했잖아. 그거 진짜야. 계좌에 문제가 있었어.”강하리가 그제야 걸음을 멈추었다.“무슨 문제요?”구승훈이 이렇게 말했다.“일단 밥 먹으면서 얘기하자.”강하리가 받아쳤다.“그럼 구승재 씨더러 전달하라고 하세요.”구승훈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이렇게 말했다.“내가 알아낸 걸 왜 걔가 전달해?”강하리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심 변호사님과 만나기로 했어요. 여기서 이럴 시간 없다고요.”강하리는 심준호와 같이 밥을 먹고 어머니 정서원을 만나러 가기로 약속한 상태였다.구승훈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걔는 왜 맨날 한가해?”강하리는 더는 대꾸하기 싫어 몸을 돌렸다. 하지만 구승훈이 이번에도 따라왔다.“같이 가자. 준호는 개의치 않을 거야.”“내가 싫어요.”구승훈이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마침 강하리의 핸드폰이 울렸다.심준호가 걸어온 전화였다.“하리 씨, 예진이한테 일이 생겨서 잠깐 보경시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뒤에 다시 연락할게요.”심준호의 목소리가 매우 다급했다. 강하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전화를 끊었다.구승훈은 이런 상황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왜? 준호가 약속을 깨기라도 했나 보지?”강하리가 입꼬리를 당겼다.심준호의 말투가 너무 다급해 보였다. 그런 심준호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강하리는 혹시 무슨 큰일이 난 게 아닐지 걱정되기도 했다.잠깐 고민하던 강하리는 카톡으로 심준호에게 메시지 몇 개를 보냈다.구승훈은 강하리가 심준호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걸 보고 마음이 불편했다.강하리는 누구든 잘 지내지만 유독 그와는 그러지 못했다.심지어 아직도 구승훈의 전화번호는 강하
레스토랑에서 나가자마자 간병인 아줌마도 전화를 걸어왔다.간병인의 목소리가 매우 다급했다.“하리 씨, 얼른 병원으로 오세요. 사람들이 마치 미친 것처럼 달려들고 있어요.”강하리가 전화를 끊자마자 구승훈이 그녀의 손목을 잡더니 차에 태웠다.“이미 근처 경찰서에 연락해서 인력들 그쪽으로 보냈어. 민우도 이미 보디가드들 보냈고. 아무 일 없을 거야. 일단 걱정하지 마.”강하리의 안색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엔 한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정서원에게 힘은 되지 못할망정 폐를 끼쳤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찢어졌다.강하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음속엔 비통함과 분노만 남았다. 심지어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송유라와 싸우지 말 걸 그랬나?하지만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왜 참고 지내야 하지? 왜 송유라에게 당하고만 살아야 하지?송유라도 그렇고 구승훈도 그렇고 잘난 사람이었다. 서로 첫사랑이었고 서로가 서로에게 빛과도 같은 존재였다. 두 사람은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며 줄다리기를 계속했다.강하리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 희생양이 되기 싫었다.구승훈은 그런 강하리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핸들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가자 핏줄이 서서히 드러났다.구승훈은 알고 있었다. 만약 이번에 강하리의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와 강하리는 정말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걸 말이다.강하리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정서원이 있는 층을 달려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강하리는 넋을 잃었다. 밖은 아수라장이었고 바닥에는 사진이 적잖이 흩뿌려져 있었다. 어떤 팬은 그녀의 사진을 프린트해 전단을 만들었다. 위에 적힌 X 년, 세컨드 같은 단어들이 강하리의 눈을 찔렀다.팬들은 이미 정리되고 없었지만 복도에는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다.강하리가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 사람들의 눈길이 그녀에게로 쏠렸고 이내 손가락질하며 수군대기 시작했다.강하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정서원의 병실로 향했다.구승훈이 그 뒤를 바짝 따라갔다.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얼굴
구승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손연지 씨, 오지랖이 너무 넓다는 생각 안 해요?”손연지가 구승훈을 노려보며 말했다.“오지랖이 좀 넓으면 어때요? 그 오지랖에 누군가 걸려들었나 보죠.”구승훈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지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구승훈은 강하리를 보호할 생각이었다. 그녀를 모욕한 사람도 처리하고 차마 들어줄 수 없이 역겨운 말들도 사라지게 할 것이다.하지만 송유라는…구승훈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 도움도 주지 않는 것뿐이었다. 심지어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칠 수도 있지만 정말 그녀를 응징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손연지는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불쌍한 우리 하리, 보는 눈도 없지. 이런 사람한테 10년이라는 시간을 바쳤다니, 이런 과분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손연지는 이렇게 말하더니 안고 있던 물건을 전부 구승훈에게 던졌다. 그 바람에 구승훈 옆에 서 있던 노민우에게도 불똥이 튀고 말았다.억울하게 매를 맞은 노민우가 노발대발했다.“나랑은 아무 상관이 없는데 왜 나까지 맞아야 하죠?”손연지가 그런 노민우를 째려보며 말했다.“유유상종이라고, 저런 사람이랑 같이 노는 사람이 성품이 좋으면 얼마나 좋겠어요.”노민우는 어이가 없었다.“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지?”노민우는 화가 치밀어올랐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구승훈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멍한 눈빛으로 손연지를 바라보며 물었다.“아까 뭐라고 했어요?”사실 손연지는 구승훈에게 이런 말을 해줄 생각이 없었다.전에 강하리가 끝내기로 했으면 깔끔하게 끝내야 한다고 했던 게 떠올라서 가만히 있으려다가 강하리가 너무 불쌍해서 그럴 수 없었다.구승훈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게 너무 괘씸했다. 강하리가 10년이라는 시간을 갖다 바쳤는데 구승훈은 소중한 줄을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하리가 구승훈 씨를 10년이나 좋아했다고요! 10년! 근데 구승훈 씨는 우리 하리한테 어떻게 했어요? 첫사랑을 보호한다고 우리 하리한테 무슨
임명우가 강하리와 약속한 장소는 펠리스 빌딩 꼭대기 층에 있는 레스토랑이었다.강하리는 임명우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려던 순간, 닫히려던 문이 다시 열렸다.“잠깐만요! 구승훈 씨, 빨리요!”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강하리는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버렸다.바로 그때, 임희주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강하리를 예상하지 못했던 듯,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강 대표님, 우연이네요.”강하리는 차가운 눈빛을 던지며 가볍게 웃었다.“결혼 증명서 받기 전까지는 저, 아직 구 대표님 아내예요.”짧은 한마디에 임희주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이내 구승훈도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강하리의 굳은 표정과 달리 구승훈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자연스러웠다.구승훈은 강하리를 힐끗 보고는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엘리베이터 문은 좁은 공간은 순식간에 무겁고 숨 막히는 공기로 가득 찼다.임희주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가볍게 웃었다.“구 대표님, 아내분께 인사 안 하세요?”강하리가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구승훈이 입을 열었다.“필요 없어.”단 네 글자. 그 짧은 말이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이미 상처 난 마음을 다시 한번 깊숙이 베어냈다.강하리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결혼식도 제멋대로 취소하고 오지 않은 사람이 인사조차 하지 않는 건 대수로울 것도 없었다.엘리베이터 안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1층에서 68층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2분 남짓이었지만 강하리에게는 두 시간처럼 길고도 고통스러웠다.마침내 도착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강하리는 주저 없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임명우는 미소를 머금고 구승훈을 힐끗 바라보고는 이내 강하리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우리도 나가요.”임희주는 구승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구승훈의 표정은 아무 변화도 없었고 시선은 여전히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한참 후에야 짧게 입을 열었다.“가요.”임희주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구 대표님, 정말 병
구승훈은 여전히 아파트 건물 아래에 서 있었다.연성시의 겨울은 눈조차 내리지 않았지만 매서운 바람이 온몸을 얼어붙게 했다.그는 잔뜩 움츠린 채 목을 움직이며 대답했다.“알았어. 최대한 빨리 간다고 전해줘.”짧게 말을 마친 그는 전화를 끊었다.준봉은 끊긴 휴대폰 화면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창가에 앉아 있는 강하리에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강하리 씨.”강하리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멍하니 있는 건지, 깊은 생각에 잠긴 건지 알 수 없었다.방 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적막했다. 한참 뒤, 강하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준봉을 바라보았다.“부탁드려요. 주식 양도는 이미 공증을 마쳤고 그가 줬던 옷과 장신구도 모두 정리해서 보냈어요. 구씨 가문 할아버지가 주신 재산도 돌려드릴 거예요. 그리고 연정이 양육권은 제가 가질 겁니다.”마치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다는 듯, 강하리는 짧게 말을 끝맺고 방을 나섰다.준봉은 그녀를 불러 세우려 했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방을 나선 강하리는 문 앞에서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뒤돌아서 주택을 한동안 바라보았다.구승훈의 목소리가 방 안에서 들려오는 듯했다.또한, 연정이가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달려오는 모습이 아련하게 떠올랐다.강하리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애써 참았다.강하리가 결혼 증명서를 바꾸자고 했을 때, 적어도 잠시라도 망설일 줄 알았다.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하고 냉정했다. 이성적인 태도 뒤에 감춰진 무심함이 오히려 그녀를 조롱하는 듯했다.강하리는 시들어버린 정원을 바라보았다.강하리는 결국 포기할 수 없었다.이렇게 오랜 시간 노력하며 그녀가 원했던 건 단지 구성훈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다.그러나 그 단순한 바람조차 아무런 설명도, 아무런 미안함도 없이 이뤄지지 않는 꿈이 되어 버렸다.크게 숨을 들이쉰 그녀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차고 쪽에서 연정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심준호는 연정이를 안고 땅에 떨어진 참
강하리는 자신이 어떻게 호텔을 빠져나왔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모두의 만류를 뿌리치고 차를 몰고 나온 순간부터 도로를 질주하는 동안까지, 모든 것이 흐릿했다.그저 추웠다.차 안의 에어컨을 최대로 올렸지만 차가운 공기는 심장 속까지 스며드는 듯했다.창밖에는 녹지 않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고 휴대폰 화면은 여전히 ‘통화 중’ 상태를 반복하고 있었다.그러다 문득, 강하리는 핸들을 틀어 차를 길가에 세웠다.그 순간, 애써 참았던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렸다.현실을 부정하려고 애썼지만 이제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구승훈은 포기했다.그에게 어떤 이유와 사정이 있었든, 결국 그는 그런 선택을 한 것이다.그동안 자신이 쏟아부었던 모든 노력이 한낱 웃음거리로 전락했음을 깨닫고 강하리는 눈물을 머금은 채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뒤따라오던 심준호와 손연지도 급히 차를 세우고 달려왔다. 그리고 그들이 본 것은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맨발로 차에서 내리는 강하리였다.운전하려고 하이힐을 벗어 던진 듯했지만 차가운 눈밭 위에서도 그녀는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그녀의 모습은 마치 시들어 버린 꽃잎처럼 초라하고 쓸쓸해 보였다.더 이상 가고 싶지 않았다.구승훈을 찾아가고 싶지도 않았다.이제 그녀도 포기했다.그토록 오랫동안 얽매였던 남자를, 이제는 놓아주기로 했다.너무 지쳤고 더는 버틸 힘이 남아 있지 않았으며 그가 어떤 이유에서 그녀를 떠난 건지 이제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어차피 아무리 노력해도 남는 건 결국 상처뿐이었다.심준호는 다급히 코트를 벗어 강하리의 어깨에 덮어주었다.“걱정하지 마. 삼촌이 너를 위해 꼭 복수해 줄게.”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올린 강하리의 눈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삼촌, 너무 힘들어.”심준호는 말없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괜찮아. 삼촌이 있잖아. 울고 싶으면 울어.”하지만 강하리는 더 이상 울지 않았고 그저 심준호의 품에 기대어 쓰러질 듯 몸을 맡겼다.“하리야!”의식을 잃기 전, 그녀가 들
구승훈은 천천히 정신을 가다듬고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승재는 초조한 얼굴로 다급하게 외쳤다.“형, 왜 옷을 안 갈아입었어?”그러나 구승훈은 대답 대신 담배에 불을 붙이고 창밖의 정원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꽃이 다 시들었네. 그렇지?”구승재의 가슴에 순간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형, 오늘...”그러나 말을 끝맺기도 전에, 구승훈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그는 씁쓸한 미소를 띠며 나직이 말했다.“오늘 내가 어떻다는 건데?”그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담배를 깊게 들이마셨다. 희뿌연 연기 속에서 드러난 눈빛에는 깊은 허무함이 서려 있었다.구승재는 불안한 기색으로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형! 결혼 안 할 거야?”그 순간, 구승훈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잠시 침묵이 흘렀다.“결혼해서 뭐 해?”그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언제 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하리와 아이를 다치게 할지 모르는데.”구승재는 입술을 깨물었다.“하지만 형이 얼마나 힘들게 다시 강하리 씨를 만났는데, 형...”구승훈은 뻑뻑해진 눈가를 문질렀고 한참 후에야 마침내 짧게 입을 열었다.“내가 미안하지.”그 한마디에 구승재는 그동안 참고 있던 감정을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었다.“형, 그러지 마. 제발...”곁에서 지켜보던 노민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일단 검사부터 해 봐. 그 후에 이야기하자.”그는 캐리어를 내려놓고 가방에서 검사 장비를 꺼내며 말했다.“준봉 씨랑 노진우 씨는 어때? 이쪽으로 데려와서 검사받게 해.”구승훈은 시선을 거두며 대답했다.“병원으로 보냈어.”두 사람은 구승훈보다 더 심하게 다쳤다.그 순간, 구승훈은 문득 헛웃음을 지었다.오늘 아침, 방 안에 남겨진 피 묻은 흔적과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던 준봉을 발견했을 때, 구승훈의 마음이 얼마나 불안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어제 곁에 있었던 사람이 강하리와 연정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활기로 가득했던 바 안에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하리야, 괜찮아?”손연지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하리는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저었다.“괜찮아.”방금 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손연지는 그녀의 얼굴빛이 좋지 않자 조용히 일어나 따뜻한 물을 가져왔다.“몸이 안 좋아?”강하리는 물컵을 받았지만 입을 대지 않고 바닥에 깨진 술잔을 내려다보았다.한참 뒤, 강하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잠깐 전화 좀 해도 될까?”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말리지 않았고 강하리는 휴대폰을 들고 방을 나와 조용한 곳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신호가 몇 번 울린 뒤, 전화가 연결되었다.여전히 느긋한 구승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배경음악은 시끄러웠지만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벌써 파티 끝났어?”강하리는 아마도 과거의 경험 때문에 자신이 너무 예민한 건 아닐까 싶었다.모든 것이 순조롭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지곤 했었다.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최대한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직이야. 그냥... 너무 늦지 말라고.”“걱정 마. 늦지 않을게.”구승훈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고 다정했다.전화를 끊은 강하리는 다시 심씨 가문에 전화를 걸어 연정이의 안부를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더 이상 파티에 있을 기분은 아니었다.그녀의 분위기가 달라진 걸 눈치챈 친구들은 자연스레 자리를 정리했다.강하리가 심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는 밤 11시에 가까웠다.집 안은 여전히 분주했고 거실에는 장식들로 가득했다. 심지어 대문에도 큼직한 축하 문구가 붙어 있었다.하얀 눈밭 위에서 더욱 선명하게 빛나는 문구가 묘하게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즐거운 웃음소리 속에서 그녀의 마음도 차츰 차분해졌다.백아영이 그녀를 보자마자 다가와 말했다.“빨리 씻고 쉬어.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잖아.”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침실로 향했다.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휴대폰에 메시지가 와 있었다.[자기야,
구승훈은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고 누구도 감히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그는 축 처진 채 소파에 기대어 손에 든 술잔을 느릿하게 굴렸다.그때, 문이 열리며 몇 명의 여성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구승재는 그녀들의 의도를 알고 있었지만 내켜 하지 않으면서도 별다른 제지는 하지 않았다.그때 누군가가 구승훈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구승훈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자 그의 서늘한 시선에 겁먹은 여자가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설마, 이제 와서 몸 깨끗이 지키겠다는 거야?”구승훈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넘기며 대꾸했다.“집에서 아내가 엄하게 관리하거든.”그 말이 끝나자마자 방 안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구석에 앉아 있던 안현우가 구승훈 앞에 서 있는 여자에게 슬쩍 눈짓을 보냈다.그녀는 눈치 빠르게 술잔을 들고 다시 구승훈에게 다가갔다.그러더니 휘청거리며 일부러 손에 들고 있던 술을 그의 옷 위로 쏟았다.순간 얼어붙은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구 대표님, 죄송해요. 정말 실수였어요.”구승훈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짧게 내뱉었다.“꺼져.”그 말 한마디에 여자는 눈물을 글썽이며 황급히 방을 뛰쳐나갔다.구승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안현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안현우는 피하지 않고 오히려 도발적인 시선으로 맞섰다.“화장실 가서 닦아.”그러나 구승훈은 그 말을 무시한 채 옆에 놓인 외투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다들 즐겁게 놀아. 오늘은 내가 계산할게.”그가 나가려 하자 구승재는 안현우를 매섭게 흘겨보더니 이내 형을 따라갔다.“형, 화내지 마. 그런 놈들 때문에 기분 망칠 필요 없어. 오늘은 형이랑 형수님의 좋은 날이잖아. 즐겁게 보내야지.”그 말에 걸음을 멈춘 구승훈은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방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가식 떠는 꼴 좀 봐. 마치 여자 안 만나는 사람처럼. 그리고 그 강하리,
천아름이 정한 장소는 바로 바였다.구승훈은 차를 세우며 강하리를 바라보며 말했다.“너무 많이 마시지 마. 천아름이랑 엉뚱한 짓 하지 말고.”강하리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당신도 마찬가지야. 결혼식에 지장 생기기만 해, 어떻게 혼낼지 두고 봐.”그녀는 가볍게 구승훈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차에서 내렸다.강하리는 눈 속에서 멀어지는 구승훈의 차를 한동안 지켜보다가 바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하지만 그녀가 바에 들어서려는 순간, 문득 구승훈의 차를 바싹 따라붙는 차 한 대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지만, 차는 금세 사라지고 없었다.왠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했으며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하여 눈꺼풀이 떨렸다.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휴대전화를 꺼내 구승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조심히 가.]곧바로 답장이 도착했다.[응. 파티 끝나면 준봉이에게 전화해. 준봉이가 데려다줄 거야.][알았어.]강하리는 메시지를 확인한 후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고 룸 안으로 들어갔다.룸 안에 들어서자 그녀는 깜짝 놀랐다.손연지와 천아름만 있을 줄 알았는데, 안예서와 회사 직원 몇 명, 그리고 연성시에서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까지 모두 와 있었다.모두 그녀를 보자마자 달려와 환호성을 질렀고 그 순간 그녀의 휴대전화는 순식간에 압수당했다.“오늘 밤, 남자랑 연락하는 사람은 없어!”강하리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그들의 장난을 가만히 지켜보았다.한편, 구승훈이 클럽에 도착하자마자 한 남자가 그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방 안은 담배 연기와 술 냄새로 가득했고 사람들은 저마다 술을 마시거나 카드 게임을 하며 떠들고 있었다.몇몇은 옆에 여성을 두고 있었고 분위기는 자유로웠다.구승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형!”구승재가 반갑게 눈을 반짝이며 다가왔다.구승재의 목소리에 방 안의 시선이 일제히 구승훈에게로 향했다.그리고 바로 그때, 방구석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구승훈, 정말 오랜만이네. 강하리와 결혼하다니, 놀랍군
구승훈은 강하리와 나란히 걸으며 인수 건에 관해 이야기했다.두 사람은 다정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었고 그 모습은 누가 봐도 친밀해 보였다.멀리 차 안에서 임희주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두 사람을 응시했다. 핸들을 꽉 잡은 그녀의 손은 손끝까지 피가 가시지 않은 듯 창백했다.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휴대전화 화면에 뜬 전화번호를 본 임희주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질렸다.무의식적으로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망설이던 손가락이 움찔거리더니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반대편에서 여초연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됐어?”임희주는 긴장된 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답했다.“구승훈 씨가 그 방법을 받아들이려 하다가 강하리가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계획이 틀어졌어요.”한동안 저쪽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자 침묵 속에서 임희주의 손가락이 떨렸다.“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에는 반드시...”여초연은 가볍게 웃으며 말을 끊었다.“그랬으면 좋겠네. 임희주,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그러고는 전화를 끊었다....결혼식 전에 인수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싶었던 강하리는 철저한 계획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신혼여행을 떠나더라도 인수 과정이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그녀는 업무에 매달리고 있었다.눈 깜짝할 사이에 결혼식 전날이 되었다.회의실에서 서둘러 나와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려던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손연지였다.“손연지?”“오늘 저녁에 뭐 할 거야?”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천아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하리는 웃으며 답했다.“아무 계획 없어.”“좋아! 우리 싱글 파티하자. 결혼 전날에는 예비부부가 만나면 안 된다는 말 들어봤지? 혹시 구승훈이랑 붙어 있으려고 했던 건 아니지? 그럼 너무 재미없잖아.”천아름이 말을 마치자 손연지도 옆에서 거들었다.강하리는 거절하기 어려워 구승훈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곧바로 답장이 왔다.그가 보낸 것은 대화 캡처 화면이었는데 구승훈 역시 친구들에게 싱글 파티에 끌려가고
강하리는 임희주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구승훈을 돌아보며 말했다.“화장실 좀 다녀올게.”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임희주의 얼굴은 핏기가 가실 정도로 창백해졌다. 그녀는 구승훈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구 대표님, 사모님이 하신 일들 다 알고 계세요?”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대답했다.“알아요.”임희주는 순간 멍해졌다.어제 구승훈이 그녀를 찾아와 약효를 최대한 발휘하는 방법에 대해 다시 한번 물었을 때, 그녀는 그가 그 방법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늘 직접 강하리를 찾아온 것이었다.하지만 그의 반응은 예상과 완전히 달랐다.“그럼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건가요? 지금 제 진료소는 폐쇄됐고 면허증까지 압수당했어요. 더 이상 치료를 받고 싶지 않으세요?”구승훈은 한숨을 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임 선생님, 선생님의 방법이 효과적이라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심리 상담사는 많아도 제 아내는 하나뿐이에요.”임희주는 창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썼다.“구 대표님, 저는 제 본분을 다했을 뿐이에요. 그게 잘못된 건가요?”구승훈은 여전히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는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임 선생님, 만약 선생님이 제 아내에게 찾아가지 않았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복잡해지지는 않았을 거예요.”“저는 단지 대표님의 건강을 위해 사모님께 설명을 해드렸을 뿐이에요!”“하지만 전 분명히 말했어요. 아내에게 가지 말라고.”구승훈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어졌다.임희주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그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강하리가 화장실에서 돌아왔을 때는 임희주가 이미 자리를 떠난 뒤였다.강하리는 무심한 듯 구승훈을 흘끗 바라보며 테이블 위의 서류를 챙겼다.이때, 구승훈은 갑자기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아직도 화났어?”강하리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