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는 있고?”임순자가 꼭 잡은 강하리의 손을 놓아주질 않았다.얼마나 반가우면 이러실까.강하리는 시큰해나는 콧등을 슥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아이고야, 요만하던 애가 다 커서 남자친구가 다 생기고. 어머니가 얼마나 좋아하셨을까.”엄마 얘기가 나오자 강하리가 애써 웃음을 지었다.강하리의 표정 변화를 눈치챈 임순자가 조심스레 물었다.“어머니는……잘 계시지?”“그냥 그래요. 그래도 더 나빠지지 않으신 게 어디예요.”“그래, 요즘은 의학도 빠르게 발전하니까 곧 좋아지실 거다. 남자친구 데리고 병문안도 자주 가고 해.”임순자가 짧은 한숨을 내 쉬었다.이 어린 것이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강하리가 어릴 때부터 봐온 임순자는 강하리네 집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다.틈틈이 강하리를 집에 불러 맛있는 밥도 차려주고, 가끔씩 용돈도 쥐어주곤 했던 임순자였다.“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곧 헤어질 거니까요.”그때 불쑥 끼어든 구승훈의 산통 깨는 한 마디.강하리가 구승훈을 째릿 노려보았다.“신경쓰지 마세요 아주머니. 심리적으로 좀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 경호도 오늘이 마지막이거든요.”그러자 구승훈을 바라보는 임순자의 눈빛이 착 가라앉는다.“아주머니, 혹시 강찬…… 우리 아빠가 평소에 어떤 사람들과 만나는지 아시나요?”강찬수 얘기가 나오자 임순자가 인상을 구기며 혀를 쯧쯧 차기 시작했다.“그러잖아도 내가 쓴소리 한 번 할라 그랬어. 하루가 멀다하게 옷차림 야시꾸리한 여자를 데려와서는 밤새도록 쿵쾅대는 통에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우리 손주가 무서워서 이 할미 집에 오지를 못해요. 그런 놈한테서 어찌 이리 착하고 싹싹한 딸내미가 나왔을꼬…….”봇물 터지듯 쏟아내는 임순자의 불만에 강하리가 급급히 말을 잘랐다.“저기, 아주머니, 혹시 좀 특이한 사람을 만난 적은 없었을까요?”“특이할 게 뭐가 있겠어. 딱 봐도 유흥업소에서 데려오는 사람들인데. 하리 너, 들어가서 지낼 거면 집 구석구석 깨끗이 청소하고 소독제 쳐야 한다? 괜히
강하리가 입을 떼기도 전, 사진이 구승훈 앞으로 끌려갔다.황급히 사진을 뺏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구승훈이 피했다.“내놔요!”강하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구승훈이 떠나기 바로 전, 엄마한테 졸라 찍은 자신의 사진이었다.사진을 주기도 전에 구승훈이 가 버린 탓에 결국 자신에게 남겨졌지만.다시 만났을 때, 생소하기 짝이 없던 구승훈이 생각났다.자신과 하늘과 땅 차이가 되어버린.저도 모르게 씁쓸함이 밀려왔다.다시 뻗은 강하리의 손을 구승훈이 또 피해버렸다.“왜? 내가 못 볼 거라도 있어?”구승훈의 입가가 얄밉게 위로 휘어진다.하지만 사진에 눈길이 간 순간, 구승훈은 웃을 수가 없게 되었다.사진 속, 꽃밭 속 소녀.눈 속에 반짝이는 빛까지 사진에 오롯이 담겨있었다.새하얀 도라지꽃이 만개한 꽃밭 속에서, 꽃보다도 더 환한 웃음을 짓고있었다.왜인지 눈에 익은 도라지 꽃밭.그리고 갑자기 먹먹해오는 가슴.“이거 어디서 찍은 거야?”“어릴 적 살던 집 앞에서요.”무표정으로 사진을 휙 낚아챈 강하리가 냉랭하게 대답했다.차가운 음성 속에 자신만이 알고있는 긴장감 한 가락이 감춰져 있었다.그랬다. 구승훈이 알아볼까 봐 긴장해졌다.우습게도.“집 앞에 도라지를 심었었어? 도라지꽃 좋아해?”긴강했던 게 무색할 만큼 허무한 구승훈의 한 마디.‘그래. 나 같은 건 진작 잊은 거야.’강하리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눈 앞에 떡하니 서 있는 사람도 못 알아보는데, 고작 어릴 적 사진 한 장으로 알아봤을 리가.“아니요. 자주 봐서 익숙한 것 뿐입니다.”“그럼 좋아하는 게 뭔데?”이 능구렁이 같은 남자가 또 은근슬쩍 수작질을 시작한다.“그쪽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거요.”구승훈이 흥, 콧방귀를 뀌고는, 다시 사진 속 강하리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이렇게 환하게 웃는 강하리를 본 적이 있던가.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사진 속 강하리의 얼굴을 슥 매만졌다.“인기 많았겠네. 이렇게 예뻐서.”“만지지 마요!”사진을 확 앗아가는 강하리.“야
연말을 앞두고 주해찬이 급작스레 바빠지기 시작했다.새해맞이 외빈 영접에 문지방이 닳도록 외교부에 들락거렸다.강하리 또한 만만치 않았다. 초창기인 데다가 연말이라 예상외로 많은 업무들이 손을 거쳐야 하다 보니 잠꼬대로 브리핑 자료를 외울 지경이었다.평일 주말 할것 없이 둘 다 일에 매진하는 통에 만나려고 해도 시간 조율이 도톻 되지 않았다.밤 늦은 시간에 영통이나 전화 통화를 하는 게 전부.이날도 늦은 퇴근을 마친 강하리에게 낯선 번호로 전화가 들어왔다.고객사 쪽에서 온 전화가 아닌가 싶어 냉큼 받았지만, 웬 낯선 여인의 부드러운 음성이었다.“하리 양 맞죠? 갑자기 전화해서 죄송한데, 좀 만나볼 수 있을까요?”고객사라 하기엔 너무나도 비즈니스 톤이 아닌 목소리.“아참, 제 소개를 깜빡했네요. 저는 해찬이 이모예요.”잠시 멍해졌던 강하리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위치 말씀해 주시면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여인이 알려준 한 카페에 도착하자, 검은 정장 차림의 건장한 사내 하나가 막아섰다.“강하리 씨 맞으시죠? 죄송하지만 핸드폰은 반입 안되십니다.”강하리의 미간을 살짝 찌푸려졌다.“왜죠?”“카페를 대절할 만큼 극비리에 진행될 거라서요. 핸드폰 외 기타 촬영 또는 녹음 가능한 기기도 가지고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남자는 깍듯하지만, 가차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강하리는 순순히 핸드폰을 내놓는 대신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제가 잘못 찾아온 것 같네요. 전 남자친구 가족분을 만나러 온 거지, 무슨 기밀회의 같은 데 참석하러 온 게 아니라서요.”“들어오라고 해요.”안쪽에서 여인의 담담한 음성이 들려오자 그제야 정장남이 비켜섰다.휑한 카페 안, 차분한 걸음으로 들어간 강하리는, 우아한 자태로 앉아 스푼으로 커피를 휘젓고 있는 한 여인의 맞은편에 멈춰섰다.“앉아요.”눈을 내리깐 채, 하인에게 분부하듯 고개만 까닥인 여인.강하리가 자리에 앉자, 그제야 여인의 눈길이 강하리를 위아래로 훑기 시작했다.
”우리 해찬이가 만나는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던 것 뿐이에요.”여인이 뻔뻔스럽게 대꾸했다.“그랬는데 웬걸, 굉장하더라고요. 해찬이와 연애한답시고 딴 남자와 별 짓을 다 하더군요. 하리 양 같은 여자를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여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창녀라고 하죠. 우리 해찬이 빛나는 인생에 먹칠하기 딱 좋은.”강하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 들어갔다.“우리 해찬이, 업무에 티끌만 한 실수 한 번 없던 애예요. 그랬던 애가 하리 양 때문에 가장 중요한 외교부 회의까지 결석했다고요!”날 선 여인의 음성이 이어졌다.“구승훈 대표 정부 노릇 하면서 익힌 수단들을 남김없이 쓴 모양인데, 인정할께요. 어떤 의미로는 하리 양 참 대단해요. 하지만 그게 다예요. 우리 주씨 집안은, 하리 양처럼 천박한 여자는 절대 용납 못 합니다!”“어이구야. 겨 뭍은 개 흉보는 똥 뭍은 개를 이렇게 직관하다니.”느닷없이 끼어든 남자의 서늘한 목소리.강하리의 낯빛이 확 바뀌었다.차갑고 고고한 기운을 뿜어내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한 남자.“준호네 집에서 본 이후로 처음 뵙네요, 전 여사님.”“아 네, 오랜만이네요 구 대표님.”심씨 가문 큰 사모님, 전미연이 차갑게 흥, 콧방귀를 뀌었다.“마침 잘 오셨어요. 이 파렴치한 여자가 얼마나 낯짝이 두꺼운지 봐 두세요. 괜히 또 속지 마시고요.”구승훈이 입가가 조소적으로 말려 올라갔다.“낯짝 두꺼운 걸로 치면 세컨드에서 정실 자리 꿰찬 전 여사님을 이길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요.”“뭐라고요?”전미연의 표정이 마구 일그러졌다.“맞잖아요. 심씨 가문 소실이 정실로 탈바꿈한 사건, 꽤 컸었는데. 설마 세월이 지나 싹 잊혀졌다고 여기신 건 아니죠?”“이보세요 구 대표님!”전미연의 악에 받친 음성이 카패에 울려퍼졌다.“아무리 그래도 제가 윗어른인데 그런 망발을-.”“아까부터 자꾸 윗어른을 들먹이시는데.”윗어른에 대한 존중 따윈 1도 없는 구승훈의 말이 가차없이 전미연의 말을 잘랐다.“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전미연이 신경질적으로 통화 수락을 눌렀다.“준호야, 준호야! 당장 이쪽으로 와! 나 굴욕 당했다고!”핸드폰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전미연. 하지만 저쪽에서 뭐라 하자 낯빛이 확 바뀌면서 꺽 멈추더니, 한참 뒤에야 꽥 소리질렀다.“야! 심준호! 나 네 숙모야! 어떻게 나한태 이래?”이내 씩씩거리며 전화를 끊어버리는 전미연. 아마도 심준호 쪽에서 말이 곱게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딱 기다려요. 해찬이 설득시킬 테니까.”노기 가득찬 눈으로 전미연이 강하리를 죽일 듯이 한 번 노려보고는, 벌떡 일어나 카페를 나갔다.구승훈이 나타난 시점부터 강하리는 줄곧 말이 없었다.창피함? 어색함? 무슨 느낌인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전미연이 안겨준 굴욕감 하나만은 뚜렷했다.이런 상황을 진중히 고려해보지 못한 자신의 치기에 대한 경종이기도 했다.“왜? 속상해? 저런 수모를 당하고도 주씨 가문에 들어가고 싶어?”괘씸하리만치 담담한 구승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하리가 고개를 돌렸다. 구승훈을 향해 화살촉 같은 눈빛을 쏘아보냈다.“그러는 그쪽은 즐거우세요?”“즐겁다기보다는 약간, 그렇게 충고했는데 기어이 비집고 들으가더니 쌤통이다, 뭐 이런 생각.”거리낌 없이 직설을 날리는 구승훈.“주씨 집안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야. 네 과거로는 그 집 문턱을 넘을 수가 없어.”구승훈의 입가에 보일듯말듯 미소가 걸렸다.“사실 헤어진다 해도 별 거 아니지 않아? 세상에 너랑 잘 맞는 좋은 남자가 널렸을 건데.”“누가 헤여진가 그래요!”강하리가 냉소를 지으며 밖을 향해 걸어갔다.구승훈이 표정을 굳히며 따라가려다가, 곧 다시 돌아서서 탁자에 어질러진 사진들을 주섬주섬 챙겼다.본의는 아니지만, 강하리와의 첫 투샷들이었다.한편, 눈시울이 붉어진 강하리가 빠른 걸음으로 카페를 벗어나 차에 올랐다.이제 주해찬에게 막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고, 진심으로 갈 데까지 가 보려고 마음먹었는데.이런 방식으로 끝낸다니 분하고 억울했다.주
더없는 진심이 담긴 약속이었다.그러나 똑같은 말을 전에도 들어본 강하리한테는 그저 우스갯소리로 들릴 뿐.몸부림치며 구승훈의 품에서 벗어나 원망스런 눈길로 그를 노려보았다.“제발, 저 좀 놔주면 안 돼요?”구승훈이 멈칫했다. 무너져내리는 표정을 간신히 갈무리하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내가 안 놔줘서 너한테 생긴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야?”“그걸 말이라고 물어봐요? 사진 찍히게 만든 장본인이 누군데!”강하리가 원한 가득 담아 소리질렀다.아득한 주씨 가문 문턱이 언젠가는 마주해야만 하는 관문인 건 사실이지만.구승훈이 자꾸 들러붙지만 않았다면, 적어도 이런 말도 안 되는 건덕지는 안 잡혔을 터.“내가 없으면 주씨 가문에서 두 팔 활짝 열고 어서오세요 우리 며늘님, 이럴 것 같아? 상황 파악 좀 제대로 하라고!”“안 나가면 내가 나갑니다 내가!”운전석 문을 열어젖히는 강하리를 구승훈이 와락 잡았다.“어디 가! 새 차 버릴 거야?”“폐기처분할 겁니다. 더러워졌으니까요!”말문이 꺽 막힌 구승훈. 한참만에야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그냥 내가 만만하지, 강하리.”결국 구승훈이 차에서 내렸고, 차 문까지 잠근 강하리는 그제야 등받이에 털썩 쓰러져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온 몸의 힘을 다 쓴 듯한 무기력감이 전신을 휘감았다.……영혼 빠진 얼굴로 집에 들어서는 강하리를 본 손연지가 기겁을 하며,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왔다.“왜, 왜 이래? 강하리! 하리야! 무슨 일이야 이게!”붉어진 눈시울로 강하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냐, 아무것도.”“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까 해찬 선배가 전화왔었어. 하리 괜찮냐고.”오는 도중 주해찬이 다시 걸어온 전화를 받지 않은 강하리였다.하도 머릿속이 복잡해 받을 상황이 아니다보니.“일단 좀 씻을게. 씻고나서 얘기해.”도망치듯 욕실로 들어간 강하리가 핸드폰을 꺼냈다.주해찬의 부재중 전화가 수두룩히 들어와 있었다.통화를 누르자마자 1초도 안 돼 주해찬이 전화를 받았다.“하리야, 괜찮아?”걱정
”강하리, 이제 어떡할 거야?”가까스로 화를 다스린 손연지가 강하리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모르겠어. 선배가 소식 기다리라고 했으니까 일단 기다려 봐야지.”강하리가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평범한 집안이면 또 몰라도 상대는 권세 높은 명문가였다.손연지가 강하리를 꼭 껴안았다.“됐어. 다 필요 없고 한 잔 때리자.”벌떡 일어나 방에 들어간 손연지가 와인 한 병과 와인잔을 들고 돌아왔다.“짜잔. 우리 아빠 와인 캐비닛에서 어렵게 빼내온 건데, 들키기 전에 증거 인멸을 하는 거야!”강하리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 연지야.”“으악! 닭살! 너 지금 나 손발 오그라뜨리고 와인 독차지하려고 이러는 거지! 정의의 심판을 받아랏!”권선징악을 외치며 손연지가 달려들었고, 둘이 소파에서 한바탕 간지럼 난투극을 펼쳤다.비명과 웃음소리가 사라질 때쯤, 엉키고 막혔던 강하리의 마음도 한결 후련해졌다.붉은색 액체가 찰랑거리는 두 잔이 쨍 부딪쳤다.“강하리, 앞으로 꽃길만 걷는 거야.”진심 가득 담은 손연지의 축배사에 강하리는 콧잔등이 시큰해났다.“응, 우리 모두 꽃길만 걷자.”“하리야, 나 설 연휴 때 내려가지 말고 그냥 너랑 여기서 보낼까?”주해찬이 오기로 했었지만, 상황상 아무래도 물 건너간 것 같았다.“괜찮아. 혼자 설 지낸 게 한두 해도 아닌데 뭘.”“아니면 나랑 같이 우리 집에 내려가는 건 어때?”“병원에서 엄마랑 지내려고.”손연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달마저 빛이 바래가는 늦은 밤.손연지는 꿈나라로 간 지 오랬고, 강하리 혼자 거실 창가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낯선 보경 지역 전화번호였다.누군지 대략 감이 온 강하리는 깊게 심호흡을 한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안녕하세요, 하리 양. 해찬이 엄마입니다.”주해찬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핸드폰을 쥔 강하리의 손에 바싹 힘이 들어갔다.“우선 먼저 해찬이 이모의 미행과 무예의 호출에 사과드려요. 죄송합니다.”강하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선배? 얼굴에 또…….”대답 대신 다가온 주해찬이 강하리의 두 손을 꼭 잡았다.“하리야, 나는 너를 위해서 모든 걸 버릴 수 있어.”강하리의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는 주해찬의 눈에는 전에 없던 뜨거운 것이 일렁이고 있었다.“너는?”못박힌 듯 굳어진 강하리.“선배 나는…….”저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그렇게는 못 할 것 같아요. 미안해요 선배.”겨우 되찾은 자유로운 생활.병상에 누워계신 엄마.엄마 생명줄인 치료비를 벌 수 있는 직장.강하리는 그 모든 걸 버릴 자신이 없었다.또한, 주해찬이 고작 자신 때문에 모든 걸 버리게 할 수가 없었다.감당 못할 대가를 치른 뒤 남는 거라곤 풀썩이는 먼지 뿐인 사랑, 그건 강하리가 바라는 사랑이 아니었다.“하지만 하리야, 시작하자고 한 건 너잖아.”주해찬의 다급한 목소리에 하리는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주제넘게 시작하는 게 아니었는데.“맞아요. 제가 성급했어요. 정말 미안해요, 선배.”첫 걸음에 쓰라린 고배를 머금은 두 사람이었다.“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꼭…… 헤어져야만 하는 거야?”주해찬이 강하리에게 묻는 건지, 자기 자신에게 묻는 건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듯 던졌다.강하리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대신 고개를 푹 숙였다.주해찬의 눈에 고통스러운 빛이 스쳐지났다.하지만 이내 빙그레 웃었다.“미안해. 잘 해결하겠단 약속 못 지켰네.”강하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들었던 손이 허공에 멈췄다가 내려졌다.“하지만 다른 약속은 꼭 지킬게. 설날에 같이 있어주겠다던 약속.”강하리가 뭐라 하려던 순간.“하리야, 기다려달라는 염치 없는 말은 하지 않을게. 다만.”주해찬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경건했다.“내가 가문의 허락을 받아냈을 때, 그때 네가 혼자라면 나한테 돌아와 줘.”“……선배.”강하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나는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이에요.”“내가 있다면 있는 거야, 하리야.”미소를 지어보인 주해찬이 돌아서 멀어져갔다.강하리는 그 자리에 미동도 없
강하리는 스스로 최근 구승훈에게 꽤 너그러웠다고 생각했다.그를 최대한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솔직히 속으로는 답답함이 끓어올랐다.강하리의 마음속에서 구승훈은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구승훈이 겪었던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여자의 끊임없는 도발까지 참을 수는 없었다.구승훈의 입가가 씰룩였다. 아마도 오랜만에 강하리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보아서인지 그는 오히려 흥미롭게 느껴졌다.그는 강하리를 번쩍 들어 자기 무릎에 앉히며 말했다.“내가 처리할게. 네가 직접 나서는 일은 없을 거야, 됐지?”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명히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닥쳐.”구승훈은 강하리를 달래려고 몇 마디 더 하려다가 강하리의 냉정한 말에 곧 입꼬리가 떨어지며 입을 다물었다.차가 저택 앞에 멈출 때까지 강하리의 표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차가 멈추자, 강하리는 화가 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문 앞에 도착하자 그녀는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노민우를 보았다.“담배 꺼요.”노민우는 떨리는 손으로 재빨리 담배를 껐다.그는 일어서서 강하리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고 다가갔지만 강하리는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가며 문을 쾅 닫아 버렸다.노민우는 당황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왜, 왜 이래?”구승훈은 노민우를 흘겨보며 쏘아붙였다.“너는 손연지랑 있지 않고 우리 집엔 왜 왔어?”노민우는 코를 긁적이며 답했다.“강하리 씨 만나러 왔어.”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누구 만나려고?”“노민우 씨, 들어오세요.”그때, 강하리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오자 구승훈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나 먼저 들어갈게.”노민우는 웃음을 머금고 구승훈에게 손을 흔들었고 구승훈의 어이없는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서재로 와요.”그는 강하리가 일어서서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쏜살같이 따라 올라갔다.구승훈은 한숨을 쉬며 가정부에게 연정이를 데려오라고 부탁했다.“쉬세요.
방에서 나온 강하리는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하지만 화장실에 도착하기 전, 그녀는 멀리서 구승훈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는 한 손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복도에 서 있었는데 거리가 멀어 그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와 마주 보고 서 있는 사람이 바로 임희주라는 것은 분명했다.강하리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옆으로 비켜섰다. 그때, 그녀 옆에서 누군가가 말했다.“강 대표님, 안 가보세요?”강하리가 고개를 돌리자 미소 띤 얼굴의 임명우가 보였다.“임 대표와 무슨 상관이죠?”임명우는 손에 술잔을 든 채, 그녀의 말에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냥 강 대표님은 눈에 든 모래 한 톨도 못 참는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너그러운 것 같네요.”강하리는 비웃으며 말했다.“임 대표님, 협상하려면 협상만 하세요. 이러시면 제가 방법을 써서 계약을 강제로 해지하는 수가 있어요.”임명우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가 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제가 너무 섣불렀네요. 하지만 강 대표님에게 남자를 너무 믿지 말라고 조언해 드리고 싶었어요.”그러고는 잠시 멈추다가 말을 이어갔다.“아, 내일 사업 협상이 있는데, 제가 자료를 이메일로 보내드릴게요. 강 대표님, 내일 뵙겠습니다.”임명우는 그녀에게 술잔을 들어 보이며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강하리는 임명우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이상한 짜증이 솟아올랐다.더 이상 망설일 것도 없이 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구승훈 쪽으로 걸어갔다.클럽은 그렇게 조용한 곳이 아니었지만 하이힐이 바닥을 찍는 소리는 여전히 또렷하게 들렸고 구승훈과 임희주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를 보는 순간, 구승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고 임희주는 잠시 멍한 표정을 보이다가 이내 따라 웃었다.“강하리 씨.”강하리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어요?”그녀는 구승훈 옆에 서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조명에 비친 그녀의 눈은 유난히 빛났다.구승훈은 손을 들어 그녀를 끌어안으며
“좋아해, 됐지?”손연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한 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하며 곧 잠들 준비를 했다.노민우는 순간적으로 숨이 막힐 듯한 느낌에 휩싸였다. 비록 손연지의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그의 마음 한편에는 미묘한 설렘이 피어오르고 있었다.그 말 한마디 속에 어쩌면 자신을 조금이라도 좋아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싹텄다.“그럼 소영준은 아직도 좋아해?”노민우가 조심스레 물었다.“귀찮게 굴지 마.”손연지는 짜증 섞인 어조로 대답했고 노민우는 잠시 말을 멈춘 후 다시 물었다.“그럼 누가 제일 좋아?”“하리.”손연지는 눈을 흐리게 뜬 채로 답했다.더 물어보려 했지만 그 순간 노민우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여사님’이라는 세 글자가 보이자 노민우는 머리가 지끈거렸고 화면을 보기만 할 뿐 전화를 받지 않았다.전화가 더 이상 울리지 않게 되자 노민우는 곧바로 노민준에게 전화를 걸었다.“형, 엄마 좀 말려줘. 그리고 나 결혼 취소한 거, 형이 할아버지께 말씀드려.”“너 확실한 거야?”노민준은 대답 대신 노민우의 마음을 물었다.노민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묻기 전에 노민준이 덧붙였다.“결혼 취소한 건 내가 할아버지께 말씀드릴 수 있어. 할아버지께서도 여씨 가문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시지 않으니까. 하지만 어머니의 반대를 꿋꿋이 이겨내고 손 선생이랑 잘 지낼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어? 동생아, 이렇게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야. 결심이 확실하지 않다면 함부로 약속하지 마. 너도 승훈이처럼 가족을 등 돌리게 될 수도 있어. 그럴 수 있겠어?”그럴 수 있다고 답하려던 찰나, 노민우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노민준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삼촌 쪽은 내가 막아볼게. 하지만 잘 생각해 봐. 그리고 정말 결혼을 취소할 거라면 여씨 가문에 직접 가서 이유를 설명해.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모든 일을 손 선생이 떠안게 될 거야. 알았지? 난 삼촌 보러 가야겠다.”전화를 끊은 후, 노민우는 한숨과 함께 손연지를 바
여명주는 얼굴이 붉어지며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노민우 오빠, 저 할 수 있어요.”노민우의 관자놀이가 뛰기 시작했고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조수석 문이 다시 열렸다.손연지가 비틀거리며 차에서 내렸다.노민우는 그녀를 돕기 위해 다가가려 했지만 여명주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노민우 오빠, 이게 무슨 일이에요?”노민우는 갑자기 인내심을 잃기 시작했다.“손연지가 술을 마셔서 내가 데려다 주려고요. 여명주 씨는 먼저 들어가세요.”말을 끝내고 그는 여명주를 밀어내며 손연지에게 다가갔다.손연지는 여전히 정신이 흐릿했지만 노민우가 다가오자 갑자기 그에게 한 대 때렸다.때리고 나서 잠시 얼떨떨해하던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손을 비비며 비틀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노민우는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았다.“어디 가는 거야?”손연지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때 여명주가 갑자기 다가와 손연지의 얼굴에 가방을 던졌다.“이 여우 같은 여자. 노민우 오빠를 유혹하는 것도 모자라서 오빠를 때리기까지 하다니.”손연지의 이마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하자 노민우는 급하게 말했다.“여명주 씨, 이제 그만해요!”여명주는 잠시 멈칫했다.“오빠, 정말 이런 여자 때문에 화내는 거에요?”노민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돌아서 손연지를 안고 차로 향했다.여명주는 뒤에서 소리 지르며 따라갔지만 노민우는 손연지를 차에 태우고 바로 차를 몰았다.노민우는 손연지를 병원으로 데려갔다.그녀의 이마 상처는 계속 피가 나고 있었고 손연지는 의자에 기대어 말없이 앉아 있었다.노민우는 손연지를 한 번 쳐다봤지만 그녀는 이미 눈을 감고 다시 잠이 들었다.노민우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었다.예전에 손연지가 여명주 때문에 직장을 잃었을 때나 그의 어머니가 손연지를 집으로 데려와 모욕했을 때도 그는 그 모습을 직접 본 적이 없었다.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할 때 그런 상황은 그에게 그저 가볍게 알고 있는 일일 뿐이었다.그래서 그는 사실 손연지가 왜 그렇게 과격하게 반응했는지
노민우는 갑작스러운 키스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손연지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감싸며 깊이 응답했다.차 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애틋하고 끈적한 느낌으로 변했다.노민우는 손을 뻗어 손연지의 의자 등을 부드럽게 눕혔고 그 후 자신도 몸을 살짝 기울였다.“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어?”노민우는 손연지의 턱을 부드럽게 잡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는 손연지의 술버릇을 익히 알고 있었다.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손연지는 술에 취해 그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자신에게 장난을 쳤다.그는 오늘만큼은 꼭 물어보겠다고 마음먹었다.게다가 최근 소영준이 손연지에 대해 다시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는 손연지가 그 사람과 다시 연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손연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노민우를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았고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잡고 힘껏 꼬집었다.“노민우, 너 진짜 이상해.”노민우는 혀를 차며 웃었다.“나한테 말할 때 좀 더 부드럽게 말할 수 없냐?”손연지는 짜증이 나서 그를 밀어냈고 노민우는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비록 술을 마셨지만 손연지는 여전히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녀가 계속 움직이자 노민우는 조금 흥분을 느꼈다.노민우는 목을 몇 번 굴린 뒤 힘으로 그녀를 눌렀다.“움직이지 마!”“너 나한테 화내는 거야?”손연지는 갑자기 속상해 보였다.노민우는 당황했다.“...““아이고. 미안해. 제발 움직이지 마. 그럼 진짜로 참을 수 없을 것 같아.”그 순간 손연지는 갑자기 그의 입술을 물었다.노민우는 이미 반응을 보였고 손연지가 적극적으로 다가오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그는 손을 들어 손연지의 옷을 벗기고 입을 맞췄다.“해도 될까?”목소리를 낮추며 노민우는 손연지의 턱을 잡았다.“말하지 않으면 네가 동의한 걸로 간주할게.”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차 안은 어느새 숨소리와 낮은 신음 소리만 가득했다.노민우는 재빨리 벨트를 풀었지만 그가 다음
“우리 연애 하자고. 어떻게 생각해?”연애라는 두 글자가 노민우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손연지는 심장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들었다.사실 그녀는 노민우와 무언가가 생길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고 예전에 말했던 1년은 단지 자신과 노민우에게 시간을 주는 방식에 불과했다.결국 신분 차이가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에 만약 노민우가 결혼을 취소한다고 해도 노씨 가문은 아마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노민우이 이 말을 꺼내는 순간 그녀는 여전히 마음이 흔들렸고 마음이 흔들리긴 해도 옳고 그름은 확실히 구별할 수 있었다.“너 약혼녀가 있는데 밖에서 여자친구를 사귀는 거 본 적 있어? 그럼 결국 너와 약혼녀가 결혼하고 나면 나는 네 두 번째 부인이 되는 거야? 너 나를 바보로 아냐?”손연지는 말하면서 그의 머리를 가볍게 쳤고 노민우는 그녀의 발걸음을 따라가며 말했다.“그럼 결국 우리가 결혼하게 되면 어쩔 거야?”“만약 내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 어떡할 건데?”“그만둬. 사실 나랑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우리는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잖아 맞지?”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계단을 내려갔고 아래층 거실에서는 모두 준비가 끝나 있었다.손연지는 노연정을 안고 밖으로 나가려 했고 그 뒤를 노민우가 따랐다.천아름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며 강하리에게 말했다.“여씨 가문 사람들이 또 와서 문제를 일으킬 거예요. 강하리 씨가 바쁠 때는 말해주세요. 제가 손연지 씨와 함께 있을게요.”강하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웨딩사진 촬영은 사실 강하리가 특별히 복잡하게 찍을 생각은 없었다.할아버지가 꼭 이 절차를 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다면 아마 생략했을 것이다.하지만 사진을 찍고 나서 컴퓨터 화면에 찍힌 한 장 한 장을 보면서 강하리는 이것이 사실 구승훈과 함께 찍은 첫 번째 사진임을 깨달았다.그녀는 옆에서 노민우와 얘기하는 구승훈을 보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손연지는 옆에서 혀를 찼다.“사실 나는 너희 둘이 결혼까지 갈
손연지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꽤 시간이 지난 후에야 겨우 노민우를 밀어냈다.“너 진짜 병 있는 거 아니야?”노민우는 한 손으로 그녀를 문에 다시 밀어붙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넌 내가 병이 있다는 걸 항상 알고 있었잖아?”손연지는 이를 악물며 갑자기 예전에 노민우가 뻔뻔하게 산부인과를 예약하고 다녔던 일이 떠올랐다.“아쉽네. 그럼 난 상종 안 하는데.”노민우는 혀를 차며 웃었다.“그럼 내가 안 하는 거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나?”손연지는 잠시 생각하더니 웃으면서 말했다.“너 두세 달 동안 안 했던 거 아니야?”노민우는 이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이빨이 아픈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는 손연지의 두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을 재빨리 손연지의 코트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어 작은 전기충격기를 꺼냈다.그 물건을 보고 노민우는 갑자기 머리가 띵 했다.예전에 그가 그녀의 스폰서가 되어주겠다고 했을 때 손연지는 노민우를 오랫동안 무시했다.후에 노민우가 손연지를 찾으러 갔을 때 전기충격기에 다쳤다.그때 아주 중요한 부분을 맞고 두세 달 동안 문제가 생겼었는데 결국은 그의 형이 약을 처방해 주고 나서야 회복할 수 있었다.그 일 때문에 형은 그에게 계속 영양제를 먹으라고 했었다.“너 아직도 이거 갖고 있었어?”손연지는 그를 발로 차며 말했다.“다시 넣어둬.”노민우는 그걸 주머니에 넣으며 말끝을 흐렸다.“잠깐만 얘기 끝내고 돌려줄게.”“얘기할 것도 없어.”노민우는 혀를 차며 말했다.“조금만 얘기해 얘기 끝내고 손 좀 놔줄게. 그때 넌 날 때리지는 마.”손연지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해봐.”노민우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놓아주었지만 그가 손을 내리자마자 손연지는 그의 다리를 차버렸고 노민우는 반사적으로 몇 걸음 물러섰다.“손연지, 약속을 어기는 거야?”“누가 먼저 안 지켰는데?”손연지는 발그레해진 손목을 문지르며 말했고 노민우는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가서 그 손목을 살펴보며 물었다.“아파?”“당연하지. 네가 바바 안
“강하리, 오늘 웨딩 촬영하는 거 알고 있어?”강하리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입고 있던 잠옷을 끌어 올렸다.“잠시 후에 파운데이션으로 가릴 거야.”손연지는 눈을 굴리며 한숨을 쉬었다.“그래.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네.”강하리는 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곧 심예진이 도착했다.그녀와 함께 온 사람들은 천아름 메이크업 아티스트 스타일리스트 그리고 웨딩드레스를 들고 온 일행이었다.강하리는 심예진을 보자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숙모 왔어요?”심예진은 살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깜빡였다.“나 부르는 거야?”강하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심예진은 맑은 눈으로 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냥 이모라고 불러. 심준호 오빠랑 나는 그런 사이 아니야. 난 심호준 씨를 그냥 오빠라고 생각해.”강하리는 가볍게 웃었을 뿐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메이크업은 생각보다 빠르게 끝났다.강하리는 피부가 좋아서 가볍게 파우더만 발라도 충분했지만 목에 남은 흔적을 가리는 데에는 꽤 시간이 걸렸다.천아름은 강하리의 앞에 다가와서 혀를 차며 말했다.“진지하게 남편 바꿀 생각 없어요? 며칠 전엔 손목이더니 오늘은 목이네요. 너 남편 인성이 있긴 있어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옆에서 노연정과 놀고 있던 손연지도 피식 웃으며 거들었다.“가끔은 하리가 구승훈 씨에게 잡아먹히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예요.”강하리는 웃으며 말했다.“설마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손연지는 한숨을 쉬었다.“사람이 너무 외모에 홀리면 안 돼요. 그 나쁜 남자가 잘생기긴 했지만…”그녀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문 쪽에서 느긋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지만 나보다 잘생기진 않았겠죠?”손연지는 몸을 굳히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는 이미 문 앞에 서 있는 노민우가 있었다.그녀는 멍하니 노민우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동자가 흔들렸다.노민우는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왜? 보고 넋이라도 나간 거야?”그제야 정신이 든 듯 손연지는 시선을 피
구승훈은 휴대폰을 들고 침실을 나섰다.강하리는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좀처럼 잠이 들지 않았다.그녀는 단순히 시간을 확인하려고 휴대폰을 들었지만 한 시간 전에 걸려 온 낯선 번호의 부재중 전화가 눈에 들어왔다.강하리는 찌푸린 채 그 번호를 바라보다가 막 화면을 닫으려는 순간 새 메시지가 도착했다. [강하리 씨, 늦은 시간에 실례합니다. 하지만 구 대표님의 상태에 대해 꼭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 연락드립니다. 대표님께서는 며칠 전 결혼 준비로 바쁘다며 모든 치료를 중단하셨습니다. 지금이 가장 중요한 단계인데 이대로 멈추면 그동안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제발 구 대표님을 설득해 치료를 계속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강하리는 휴대폰을 손에 쥔 채 손가락을 힘주어 움켜쥐었다.메시지에 보낸 사람의 이름은 없었지만 강하리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금세 알 수 있었다. 임희주 외에는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없었다.그녀는 잠시 시선을 떨구고 메시지를 바라보았다.‘구승훈이 정말로 모든 치료를 중단한 건가?’강하리는 잠시 침묵을 지킨 후 임희주에게 문자를 보냈다.[구승훈 씨가 치료를 중단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예요. 임 선생님도 치료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고 했잖아요? 결혼식이 끝난 후 다시 시작해도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해요.]임희주의 답장이 곧바로 도착했다.[강하리 씨, 아직 저한테 화가 나신 건가요? 아니면 구 대표님이 치료를 거부하는 게 혹시 당신 때문인가요?]강하리는 메시지를 보자마자 휴대폰을 옆으로 던져 버렸고 더 이상 임희주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방금 말한 대로 구승훈을 믿었다.구승훈은 그녀와 노연정을 위해서라도 자신의 몸을 함부로 다루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서산 퍼스트 빌리지 전체가 유난히 조용했고 창밖에는 정원의 희미한 가로등 몇 개만이 어둠을 비추고 있었다.구승훈은 창가에 서 있었고 그의 눈빛은 깊은 밤보다 더 어두웠다.그때 전화기 너머에서 구승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형...큰어머님의 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