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무슨 일이죠?”미간을 잔뜩 찌푸린 강하리가 전화를 받았다.“핸드폰 주인 여자친구시죠? 남친분이 지금 많이 취하셔서 데리러 오셔야 할 것 같아요.”……어?멍해졌던 강하리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죄송한데 전화 잘못 거셨어요. 모르는 사람입니다.”“그럴 리가요. 연락처에 첫 번째로 저장된 번호인걸요. 게다가 손님분이 계속 이 이름을 부르고 계세요.”“연락처에 승재라고 저장된 번호에 전화해 보세요.”‘이 정도면 많이 도운 거다.’강하리는 바로 통화를 끊어버렸다.“구승훈?”주해찬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선배, 일찍 자요.”주해찬의 눈에 착잡함이 스쳐지났다.분위기 다 잡친 마당에 다시 키스를 시도할 수도 없었다.“그래. 하리 너도 일찍 자.”같은 시각, 어느 칵테일바.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바라보던 웨이터가 당황한 얼굴로 자리에 뻗은 남자를 돌아보았다.잔뜩 퍼마시긴 했지만, 구승훈은 아직 완전히 필름이 끊긴 건 아니었다.알코올로 그리움을 마비시켜 보려고 했지만 깔끔하게 실패한 상태.술기운에 제어가 잘 안 되는 머릿속에서 자꾸만 강하리의 모습이 새어나오는 바람에 오히려 더 괴로워졌다.남아있는 한 줌의 이성은 강하리에게 전화하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르기 바빴다.겨우 차단 해제했는데 또 차단당하면 영영 풀려날 것 같지 못해서.고달팠다. 눈가가 시큼해날 만큼.술자리가 끝난 밤, 전화하면 자다가도 데리러 오던 강하리는 오간데 없이 사라졌다.괴로워하는 자신만 밖에 덩그러니 남겨놓은 채.정신줄 다잡고 강하리 대신 부른 게 대리운전이었다.알코올 냄새 풀풀 풍기며 아파트에 돌아온 구승훈의 모습에 가정부 아줌마가 경악했다.“대, 대표님? 대체 얼마나 드신 거예요. 세상에! 이마에 상처는 또 뭐고요?”구승훈이 콧방귀를 풍 뀌었다.“하아리, 아가씨가 선물해준 거.”“네에? 두분 또 다투셨어요?’“그으럴 리가요. 내가아, 강하리 을마나 아끼는데에.”혀 꼬부라진 소리로 대답한 구승훈이 피식 웃는다.구승훈을 부축해 겨우 소
강하리가 경찰서에 도착해 보니 구승훈이 기다리고 있었다.한 쪽 바지춤에 손을 올리고 차에 기댄 채.이마에 붙인 밴드만 아니었다면 그야말로 순정만화 남주가 따로 없었다.강하리에게까지 그렇게 보인 건 아니었지만.무시한 채 곧장 경찰서로 들어서는 강하리를 구승훈이 몇 걸음에 따라잡았다.“저 후져 보이는 차는 뭐지? 주해찬이 사 준 건가?”그림 같은 입술에서 튀어나온 하찮기 그지없는 말투.그걸 귓등으로 흘려버리는 강하리의 손목이 또 덥석 잡혔다.“야. 묻고 있잖아. 귀 먹었어?”퍽!구승훈의 정강이에 강하리의 킥이 날아들었다.순식간에 얼굴이 구겨진 구승훈이 신음을 흘리며 강하리를 잡았던 손을 놓고 정강이를 부여잡았다.“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또 함부로 손 대면 더 윗쪽 차버릴 겁니다.”서늘한 강하리의 경고.“강하리 너……. 무슨 여자가 발길질이…….”이제 보니까 성격만 야생마인 줄 알았더니 발질질도 영낙없는 야생마다.투레질을 하는 야생마처럼 당당한 걸음으로 강하리가 경찰서에 들어섰다.“강찬수 씨가 진 거액의 빚을 받으러 온 일수꾼이라고 합니다. 빚재촉을 하려고 따라붙었다가 두분이 나타나는 바람에 숨어있었고, 두분이 간 다음 빚을 받으려가다 강찬수 씨가 칼을 들고 협박하는 바람에 실랑이를 벌이다가 실수로 죽였다네요.” 경찰의 진술을 들은 강하리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졌다.“증거는 확보했나요?”“강찬수 씨 손톱에서 나온 DNA와 용의자의 DNA가 일치해요. 용의자가 진술한 시간과 위치도 일치하고요. 다른 의문 있으십니까?”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있다고?바로 그 때, 구승훈이 입을 열었다.“골목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면, 왜 골목 바로 앞 CCTV에는 용의자가 전혀 찍히지 않은 걸까요? 그리고 피해자 몸에서 발견됐다는 그 DNA. 그게 용의자가 사건 발생 당시 남긴 DNA라는 증거는 있는 겁니까?”담당 경찰이 멍해졌다가 한참만에 겨우 입을 열었다.“용의자가 한 짓이 아니라면, 이유 없이 자수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이유가 왜 없어
무표정한 얼굴의 구승훈.하지만 왠지 칭찬해달라는 분위기가 풍겨오는 건 기분 탓일까?강하리는 구승훈에게서 눈깅을 돌려버렸다.모든 절차가 끝나고 경찰서에서 나오니 날이 어둑해져 있었다.구승훈이 또 강하리 앞을 막아섰다.정강이 로우킥이 효과(?)가 있었던지 그녀의 몸에 손을 대진 않았지만.“이번에는 뭔가요?”강하리의 얼굴은 어둡기만 했다.“강찬수에게 물어보려던 거, 그거 뭐야?”잠시 망설이던 강하리는 자신의 생각을 곧이곧대로 구승훈에게 털어놓았다.어찌 됐건 구승훈이 이 사건에 말려든 건 자신 몫도 있었으니까.“그러니까 네 생각엔, 누군가가 입막음을 했다 이거지?”구승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의심 가는 사람은 있고?”강하리는 대답이 없었다.하지만 구승훈을 바라보는 눈길은 그녀의 대답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었다.구승훈이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저도 모르게 송유라는 아니라고 튀어나올 뻔했다.그녀일 수가 없었다. 일거수일투족이 자신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핸드폰 등 통신기기통제는 물론, 지난 경험으로 화장실에 보낼 때에도 시간 제한을 두었다.허나 말해봤자 무슨 쓸모가 있을까. 강하리에게는 송유라를 두둔하는 변명거리로밖에 안 들릴 건데.강하리가 코웃음을 치고는 자신의 차에 다가가 차 키를 눌렀다.운전석 문이 열리는 순간.터엉!둔탁한 충돌음과 함께, 구승훈이 문을 도로 닫아버렸다.그리고는 길다란 두 팔을 쭉 내밀어 차를 짚었다.운전석 문 앞에 있던 강하리가 순식간에 구승훈의 품에 갇힌 자세가 되었다.“또 어쩌자는 건가요?”밉도록 익숙한 그 남자의 냄새가 훅 풍겨왔다. 강하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구승훈의 뜨거운 눈빛이 강하리의 입술에 박혔다. 목울대가 두 번 요동을 쳤다.정말이지, 못 본지 며칠이나 됐다고, 미치도록 보고싶었다.꼼짝 못 하고 자신의 품 속에 갇힌 강하리를 보니 억눌렀던 욕구가 쑴펑쑴펑 솟구쳤다.구승훈의 눈이 점점 더 깊어졌다. 길다란 손가락이 강하리의 입가를 스쳐 지나갔다.그러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강
운전대를 꽉 잡은 강하리의 손은 뼈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져 있었다.-우린 헤어졌다고! 그만 좀 하라고! 미친 놈아!-헤어져?방금 전, 광기로 차넘치던 구승훈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린다.-누구 맘대로?입가에 걸린 비릿한 미소도.그 인간에게서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그저, 안도감과 공포가 함께 밀려드는 기이한 체험을 하는 중이다.백미러에 뒤 차 헤드라이트가 번쩍일 때마다 심장이 한 박자씩 멈추는 느낌이다.뒤 차는 다름 아닌 구승훈의 차.겨우 마수에서 벗어난 강하리가 차에 올라 시동을 건 순간부터 착 달라붙어 지금껏 따라오고 있었다.강하리는 머릿속이 마구 엉클어졌고 가슴이 답답해왔다.주해찬과 연애하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면 언젠가는 치를 일이었다.하지만…….구승훈 저 미친 인간이 정말……그러기라도 한다면…….지끈거려 오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스읍, 하-. 스읍, 하-.”심호흡 몇 번에 겨우 되찾는 평정심.강하리는 로터스가든에 돌아가는 대신, 강찬수가 살던 오래된 아파트를 향해 질주했다.손연지네 아파트 앞에 멈춰서는 순간, 뒤의 남자가 유령처럼 들러붙어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일 게 뻔했다.‘감정의 끝물에서 의미 없는 시간 낭비를 하는 것보단 이게 백 번 나아.’라고 생각한 강하리였다. 그녀는 강찬수가 숨어지내던 아파트에서 단서가 될만 한 거라도 찾아볼 계획이었다.한 허름한 단독 아파트 앞에 강하리의 차가 멈춰서자, 구승훈의 차도 따라 멈춰섰다.몇 초 간격으로 차에서 내리는 두 사람.“하, 정말 지긋지긋하네요.”강하리가 어이없다는 듯 구승훈을 향해 한심한 눈빛을 보냈다.광기로 차넘치던 구승훈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하고 냉랭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왜. 나는 날 살인자로 내몰 뻔한 인간의 집에 단서 찾으러 오면 안돼?”‘말이나 못 하면.’강하리는 딱히 반박할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대로 구승훈을 무시한 채 아파트에 들어섰다.구식 아파트라 엘리베이터도 없었다. 조명마저 나갔는지
”남자친구는 있고?”임순자가 꼭 잡은 강하리의 손을 놓아주질 않았다.얼마나 반가우면 이러실까.강하리는 시큰해나는 콧등을 슥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아이고야, 요만하던 애가 다 커서 남자친구가 다 생기고. 어머니가 얼마나 좋아하셨을까.”엄마 얘기가 나오자 강하리가 애써 웃음을 지었다.강하리의 표정 변화를 눈치챈 임순자가 조심스레 물었다.“어머니는……잘 계시지?”“그냥 그래요. 그래도 더 나빠지지 않으신 게 어디예요.”“그래, 요즘은 의학도 빠르게 발전하니까 곧 좋아지실 거다. 남자친구 데리고 병문안도 자주 가고 해.”임순자가 짧은 한숨을 내 쉬었다.이 어린 것이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강하리가 어릴 때부터 봐온 임순자는 강하리네 집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다.틈틈이 강하리를 집에 불러 맛있는 밥도 차려주고, 가끔씩 용돈도 쥐어주곤 했던 임순자였다.“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곧 헤어질 거니까요.”그때 불쑥 끼어든 구승훈의 산통 깨는 한 마디.강하리가 구승훈을 째릿 노려보았다.“신경쓰지 마세요 아주머니. 심리적으로 좀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 경호도 오늘이 마지막이거든요.”그러자 구승훈을 바라보는 임순자의 눈빛이 착 가라앉는다.“아주머니, 혹시 강찬…… 우리 아빠가 평소에 어떤 사람들과 만나는지 아시나요?”강찬수 얘기가 나오자 임순자가 인상을 구기며 혀를 쯧쯧 차기 시작했다.“그러잖아도 내가 쓴소리 한 번 할라 그랬어. 하루가 멀다하게 옷차림 야시꾸리한 여자를 데려와서는 밤새도록 쿵쾅대는 통에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우리 손주가 무서워서 이 할미 집에 오지를 못해요. 그런 놈한테서 어찌 이리 착하고 싹싹한 딸내미가 나왔을꼬…….”봇물 터지듯 쏟아내는 임순자의 불만에 강하리가 급급히 말을 잘랐다.“저기, 아주머니, 혹시 좀 특이한 사람을 만난 적은 없었을까요?”“특이할 게 뭐가 있겠어. 딱 봐도 유흥업소에서 데려오는 사람들인데. 하리 너, 들어가서 지낼 거면 집 구석구석 깨끗이 청소하고 소독제 쳐야 한다? 괜히
강하리가 입을 떼기도 전, 사진이 구승훈 앞으로 끌려갔다.황급히 사진을 뺏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구승훈이 피했다.“내놔요!”강하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구승훈이 떠나기 바로 전, 엄마한테 졸라 찍은 자신의 사진이었다.사진을 주기도 전에 구승훈이 가 버린 탓에 결국 자신에게 남겨졌지만.다시 만났을 때, 생소하기 짝이 없던 구승훈이 생각났다.자신과 하늘과 땅 차이가 되어버린.저도 모르게 씁쓸함이 밀려왔다.다시 뻗은 강하리의 손을 구승훈이 또 피해버렸다.“왜? 내가 못 볼 거라도 있어?”구승훈의 입가가 얄밉게 위로 휘어진다.하지만 사진에 눈길이 간 순간, 구승훈은 웃을 수가 없게 되었다.사진 속, 꽃밭 속 소녀.눈 속에 반짝이는 빛까지 사진에 오롯이 담겨있었다.새하얀 도라지꽃이 만개한 꽃밭 속에서, 꽃보다도 더 환한 웃음을 짓고있었다.왜인지 눈에 익은 도라지 꽃밭.그리고 갑자기 먹먹해오는 가슴.“이거 어디서 찍은 거야?”“어릴 적 살던 집 앞에서요.”무표정으로 사진을 휙 낚아챈 강하리가 냉랭하게 대답했다.차가운 음성 속에 자신만이 알고있는 긴장감 한 가락이 감춰져 있었다.그랬다. 구승훈이 알아볼까 봐 긴장해졌다.우습게도.“집 앞에 도라지를 심었었어? 도라지꽃 좋아해?”긴강했던 게 무색할 만큼 허무한 구승훈의 한 마디.‘그래. 나 같은 건 진작 잊은 거야.’강하리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눈 앞에 떡하니 서 있는 사람도 못 알아보는데, 고작 어릴 적 사진 한 장으로 알아봤을 리가.“아니요. 자주 봐서 익숙한 것 뿐입니다.”“그럼 좋아하는 게 뭔데?”이 능구렁이 같은 남자가 또 은근슬쩍 수작질을 시작한다.“그쪽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거요.”구승훈이 흥, 콧방귀를 뀌고는, 다시 사진 속 강하리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이렇게 환하게 웃는 강하리를 본 적이 있던가.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사진 속 강하리의 얼굴을 슥 매만졌다.“인기 많았겠네. 이렇게 예뻐서.”“만지지 마요!”사진을 확 앗아가는 강하리.“야
연말을 앞두고 주해찬이 급작스레 바빠지기 시작했다.새해맞이 외빈 영접에 문지방이 닳도록 외교부에 들락거렸다.강하리 또한 만만치 않았다. 초창기인 데다가 연말이라 예상외로 많은 업무들이 손을 거쳐야 하다 보니 잠꼬대로 브리핑 자료를 외울 지경이었다.평일 주말 할것 없이 둘 다 일에 매진하는 통에 만나려고 해도 시간 조율이 도톻 되지 않았다.밤 늦은 시간에 영통이나 전화 통화를 하는 게 전부.이날도 늦은 퇴근을 마친 강하리에게 낯선 번호로 전화가 들어왔다.고객사 쪽에서 온 전화가 아닌가 싶어 냉큼 받았지만, 웬 낯선 여인의 부드러운 음성이었다.“하리 양 맞죠? 갑자기 전화해서 죄송한데, 좀 만나볼 수 있을까요?”고객사라 하기엔 너무나도 비즈니스 톤이 아닌 목소리.“아참, 제 소개를 깜빡했네요. 저는 해찬이 이모예요.”잠시 멍해졌던 강하리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위치 말씀해 주시면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여인이 알려준 한 카페에 도착하자, 검은 정장 차림의 건장한 사내 하나가 막아섰다.“강하리 씨 맞으시죠? 죄송하지만 핸드폰은 반입 안되십니다.”강하리의 미간을 살짝 찌푸려졌다.“왜죠?”“카페를 대절할 만큼 극비리에 진행될 거라서요. 핸드폰 외 기타 촬영 또는 녹음 가능한 기기도 가지고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남자는 깍듯하지만, 가차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강하리는 순순히 핸드폰을 내놓는 대신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제가 잘못 찾아온 것 같네요. 전 남자친구 가족분을 만나러 온 거지, 무슨 기밀회의 같은 데 참석하러 온 게 아니라서요.”“들어오라고 해요.”안쪽에서 여인의 담담한 음성이 들려오자 그제야 정장남이 비켜섰다.휑한 카페 안, 차분한 걸음으로 들어간 강하리는, 우아한 자태로 앉아 스푼으로 커피를 휘젓고 있는 한 여인의 맞은편에 멈춰섰다.“앉아요.”눈을 내리깐 채, 하인에게 분부하듯 고개만 까닥인 여인.강하리가 자리에 앉자, 그제야 여인의 눈길이 강하리를 위아래로 훑기 시작했다.
”우리 해찬이가 만나는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던 것 뿐이에요.”여인이 뻔뻔스럽게 대꾸했다.“그랬는데 웬걸, 굉장하더라고요. 해찬이와 연애한답시고 딴 남자와 별 짓을 다 하더군요. 하리 양 같은 여자를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여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창녀라고 하죠. 우리 해찬이 빛나는 인생에 먹칠하기 딱 좋은.”강하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 들어갔다.“우리 해찬이, 업무에 티끌만 한 실수 한 번 없던 애예요. 그랬던 애가 하리 양 때문에 가장 중요한 외교부 회의까지 결석했다고요!”날 선 여인의 음성이 이어졌다.“구승훈 대표 정부 노릇 하면서 익힌 수단들을 남김없이 쓴 모양인데, 인정할께요. 어떤 의미로는 하리 양 참 대단해요. 하지만 그게 다예요. 우리 주씨 집안은, 하리 양처럼 천박한 여자는 절대 용납 못 합니다!”“어이구야. 겨 뭍은 개 흉보는 똥 뭍은 개를 이렇게 직관하다니.”느닷없이 끼어든 남자의 서늘한 목소리.강하리의 낯빛이 확 바뀌었다.차갑고 고고한 기운을 뿜어내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한 남자.“준호네 집에서 본 이후로 처음 뵙네요, 전 여사님.”“아 네, 오랜만이네요 구 대표님.”심씨 가문 큰 사모님, 전미연이 차갑게 흥, 콧방귀를 뀌었다.“마침 잘 오셨어요. 이 파렴치한 여자가 얼마나 낯짝이 두꺼운지 봐 두세요. 괜히 또 속지 마시고요.”구승훈이 입가가 조소적으로 말려 올라갔다.“낯짝 두꺼운 걸로 치면 세컨드에서 정실 자리 꿰찬 전 여사님을 이길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요.”“뭐라고요?”전미연의 표정이 마구 일그러졌다.“맞잖아요. 심씨 가문 소실이 정실로 탈바꿈한 사건, 꽤 컸었는데. 설마 세월이 지나 싹 잊혀졌다고 여기신 건 아니죠?”“이보세요 구 대표님!”전미연의 악에 받친 음성이 카패에 울려퍼졌다.“아무리 그래도 제가 윗어른인데 그런 망발을-.”“아까부터 자꾸 윗어른을 들먹이시는데.”윗어른에 대한 존중 따윈 1도 없는 구승훈의 말이 가차없이 전미연의 말을 잘랐다.“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
강하리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후에야 구승훈은 다시 엘리베이터에 들어섰다.하지만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익살스러운 미소가 남아 있지 않았다.“여진 쪽은 어떻게 됐어?”그가 낮은 목소리로 묻자 준봉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출시일이 확정됐습니다. 에비뉴보다 하루 빠릅니다.”구승훈은 손에 불경스러운 듯 염주를 굴리며 냉소를 지었다.“승재와 천아름 쪽에 협조 잘하라고 전해.”“네.”준봉이 재빨리 대답했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대표님, 사실 이 일은 사모님께도 일부 알려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구승훈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조용히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준봉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구승훈은 항상 그랬다. 강하리를 도와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겉으로는 무심한 척했다.‘정말 답답해.’여진 주얼리는 지난 몇 년간 에비뉴와 계속해서 대립해 왔다.겉보기에는 구씨 가문이나 강하리와 아무 관련 없는 작은 회사처럼 보이지만 이런 작은 회사들이 대형 브랜드의 모조품을 내놓는 건 흔한 일이었다.하지만 여진 주얼리는 단순한 모조품에 만족하지 않았다.작년에 해외에서 에비뉴 주얼리의 표절 사건이 터졌을 때 그 배후에는 여진 주얼리가 있었다.그 사건으로 여진 주얼리는 큰 이득을 봤고 에비뉴는 큰 타격을 입었다.그 후 여진 주얼리는 더욱 탐욕스러워졌다.사람이란 달콤한 맛을 보면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마련이다.여진 주얼리는 에비뉴에게 항상 위험 요소였다.구승훈은 에비뉴를 강하리에게 넘긴 이상 그녀에게 어떤 위험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대표님, 상대방의 배후 세력도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대놓고 에비뉴를 도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구승훈은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그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서 뭐? 지금 내가 잃을 게 뭐가 있다고?”준봉은 놀라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고 한참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강하리가 때린 따귀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날아들었고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강렬했다.그러자 구승훈의 뺨에는 순식간에 선명한 손자국이 남았다.천아름은 그대로 얼어붙었지만 이내 강하리를 향해 천천히 엄지를 들어 올려 보였다. ‘잘했어.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은 맞아야 해. 제대로 한 대쯤은 맞아 봐야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알지. 이제라도 자기 잘못을 좀 깨달아야 해.’천아름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며 통쾌해했다.한편 구승훈은 손등으로 뺨을 한 번 스치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강하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그의 눈엔 고통이 어리어 있었다.“몸이 안 좋은 거야? 아니면...” 그는 목울대를 두 번 삼킨 뒤에야 겨우 말을 이었다. “아니면... 나를 봐서... 토한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지만 더는 이 남자 앞에서 눈물 흘리고 싶지 않아 애써 참고 있었다.“다신 제 앞에 나타나지 마요.” 강하리의 차디찬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런데 구승훈의 눈에는 오히려 그 말이 묘하게 따뜻하게 비쳤다.지금 이 순간 그는 마음속에... 이상하게도 만족감이 들었다.‘적어도 하리 마음속에 아직 내가 있긴 한 거잖아. 미움이든 혐오든... 감정이 있는 한 아직 끝은 아니겠지.’그는 수트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조심스레 강하리의 입가를 닦아주었고 긴 손가락이 그녀의 입가를 스치고는 가볍게 떠났다.구승훈은 고개를 숙인 채 쓸쓸하게 웃었다.“불쾌하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하리야, 미안하지만 다신 안 나타날 수는 없을 거 같아. 난 그건 못 해.”그 말과 함께 그는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내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천천히 화장실을 나갔다.순간, 화장실 안은 적막 속에 잠겼다.강하리는 다시금 구역질했고 천아름은 재빨리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밖에서 구승훈은 그녀의 헛구역질 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왔다.얼마 후, 급히 달려온 준봉의 목소리에 그가 정신을 차렸다.“대표님, 무슨 일 있었습니까?”
두 채의 30층이 넘는 오피스 빌딩 사이에는 다섯 층마다 하나씩 연결하는 공중 회랑이 있었다.회랑 위에는 각종 카페와 음식점이 입점해 있었고 그 주변에는 다양한 꽃들이 화사하게 장식되어 있었다.강하리는 사실 정안 타워에 자주 오지는 않았다.심지어 구승훈과 결혼을 앞두고 있던 그 시절에도 여기에는 발걸음을 거의 하지 않았다.솔직히 말해서 그녀보다 임희주가 더 자주 왔을지도 몰랐다.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그녀는 입꼬리를 삐죽이며 말했다.“구승훈이야 뭐 인간쓰레기지만 그래도 통 큰 건 인정해야겠네. 이렇게 큰 회사를 그냥 덜컥 넘겨주다니. 에비뉴 주얼리잖아? 보석 업계에선 꽤 이름 있는 브랜드인데. 이렇게 보면... 그 인간은 그렇게 나쁘진 않았던 것 같기도 하네. 그렇지?”강하리는 눈을 내리깔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불과 한 달 남짓한 그 짧은 시간 사이에 구승훈이라는 존재가 자신에게서 너무도 멀어진 것만 같았다.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입을 열었다.“오늘은 꼭 광고 모델 확정해야 해. 원래 계약하려던 사람이 며칠 전에 갑자기 마음을 바꿨어. 이유 알아봤어?”그러자 천아름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이유야 뻔하지. 뺏긴 거지 뭐. 거의 계약 직전까지 갔는데... 갑자기 말을 바꾸더라.”“누가 뺏어갔는데?”강하리가 조용히 물었다.천아름이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며칠 만에 마주친 구승훈이었다. 깔끔한 수트를 입고 있었지만 여전히 전해지는 그 특유의 냉기가 몸 전체에 감돌고 있었다.강하리는 구승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피했다.구승훈 역시 이 순간에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던지 평소 차가운 눈빛은 놀랍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그의 시선은 곧장 강하리에게 꽂혀 그 자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녀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얼굴빛은 생각보다 좋았다.홍조가 돌아 있었고 얼굴도 약간 도톰해진 듯했다.그는 기뻐해
항구에서 보경시로 돌아오자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구승훈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누군가의 사무실로 들어섰다.“어떻게 됐어?”그 말에 노진우는 고개도 들지 않고 리모컨부터 눌렀다. 그러자 벽에 걸려있던 TV가 켜지더니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화면 속에는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여초천이 이성을 잃은 채 날뛰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의 가구를 부수며 바닥에서 뒹굴기 시작하더니 그럼에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그는 벽에 머리를 쾅쾅 들이박았다.여초연의 이마는 이미 피범벅이 된 상태였다.그 모습을 본 구승훈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됐어. 그만해.”노진우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이렇게 끝내시겠다고요? 대표님께서 발작 났을 땐 이것보다 훨씬 심했어요. 제가 만든 약은 효과가 얼마 못 가거든요. 급하게 만든 거니까요. 하지만 대표님은 온 하루 동안 고통스러워하셨잖아요.”“게다가 대표님은 이 약 때문에 하리 씨 곁을 떠나야 했잖아요. 하리 씨가 그렇게 크게 다친 것도 다 이 약 때문인데 이제 와서 마음이 약해졌다고요?”구승훈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담배를 꺼내 거기에 불을 붙였다.“마음이 약해진 게 아니야. 저런 꼴을 보고 있으니까 그냥... 그때 내 모습이 떠올라서...”“생각할 때마다 너무 후회돼. 하리를 혼자 예식장에 두고 떠났던 거 말이야. 내가 어떻게 잡았는데 또다시 놓쳐버리다니...”“그런데 또 여초연이 저러고 있는 걸 보니까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때 내가 하리를 밀어내지 않았더라면 하리가 내 저런 모습을 봐야 했을 수도 있잖아.”노진우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사실 제 책임도 좀 있어요. 제 대학 동기인 데다가 능력도 괜찮아 보여서 추천했었는데 배경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으니까요.”구승훈은 씁쓸하게 웃었다.“임희주가 아니었어도 이렇게 되었을 거야. 여초연이 날 가만 내버려뒀을 리 없으니까.”노진우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하리 씨 쪽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