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수가 한 무리 사람들을 데리고 떠들썩하게 병원으로 쳐들어오고 있었다.강하리의 얼굴이 급 어두워졌다. 얼른 간병인 아줌마에게 병원 경비원들을 불러오라고 시켰다.아줌마가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실 앞이 소란스러워졌다.“강하리! 당장 나오지 못 해!”병실 문을 막아선 경호원들 사이로 강찬수가 고래고래 소리질렀다.“내가 누군지 알아? 안에 누워있는 저 여편네 남편이라고! 니들이 뭔데 날 막아!”경호원들이 꿈쩍도 않자 강찬수가 언성을 더 높였다.“강하리 네 이년! 당장 나오지 못할가! 병원 다 부수기 전에!”문이 벌컥 열렸다. 강하리가 차가운 얼굴로 나타났다.“어디 한 번 부숴 봐요! 그 똘끼 한 번 봅시다!”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이 병원은 노씨 가문 자산이었다.강찬수가 판을 키운다면 노씨 가문에서 강찬수를 가만둘 리가 없었다.그걸 모르는 강찬수는 제 계획에만 빠져있었다.일을 키워서 강하리가 굴복하게 만드는 것.빚 상환 마감일이라 빨리 돈을 받아내아만 했다. 장원영한테서든 강하리한테서든.“얼씨구, 간탱이가 부었네? 구승훈이 와서 도와주기라도 할 것 같아?”바로 따라온 사람들에게 손짓했다.콰앙!그중 하나가 들고있던 야구방망이로 복도에 놓인 화분 하나를 갈겼다.지나가던 사람들이 아우성을 지르며 뿔뿔이 흩어졌다.“봤지? 내가 못할 것 같아? 네 대갈통도 깨 줘?”강찬수가 표독스럽게 강하리를 노려보았다.강하리는 냉랭하게 엘리베이터 쪽을 바라볼 뿐.강찬수가 옆 사람 손에서 방망이를 빼앗아 다른 화분을 겨누는 순간.“당장 멈추지 못 해!”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노민우가 경비원들과 함께 우르르 나왔다.“넌 또 뭐야! 내가 내 마누라 보겠다는데 네 놈이 뭔데 끼어들어!”노민우를 쏘아보며 침 튀기던 강찬수가 단번에 경비원들에게 제압당했다.“야 이 새꺄 너 대체 뭐야! 아이고 사람 잡네!”발악하며 더욱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강찬수.“우리 집 병원에서 기물 파손을 한 양아치 잡으러 왔는데, 그렇다면 과연 나는 누굴까?”노민우
”노씨 가문 병원이란 건 왜 안 알려주신 겁니까!”병원에서 쫓겨난 강찬수가 바로 장원영에게 전화해 따지기 시작했다.마침 열이 날 대로 난 차에 강찬수의 질타를 듣자 장원영이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머저리세요? 여태 명인병원이 노씨 가문 거란 것도 몰랐어요? ”강찬수가 알 리가 있을까.탱자탱자 노름에만 빠져 세상 돌아가는 것도 잊은 인간인데.“아무튼! 정보를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은 건 여사님이시니까 2억은 수고비 및 손해배상비로 쳐 주셔야겠습니다! 저 경비원한테 매까지 맞았다고요!”그 많은 돈을 놓치기 싫은 강찬수가 억지를 쓰기 시작했다.“참나, 그깟 일 하나도 제대로 처리 못 하는 폐급이 무슨 낯짝으로!”“폐급이라니! 당신 말 다 했어? 진짜 확 다 털어버린다?”“맘대로 하세요! 누가 당신 같은 쓰레기 말을 믿는다고!”장원영이 전화를 끊어버렸다.“엄마, 강찬수는 절대 문제 없다며?”옆에서 통화를 다 들은 송유라의 얼굴이 새하얘졌다.“저 정도로 무용지물일 줄은 누가 알았겠니! 이제 다른 방법을 찾는 수밖에.”장원영이 이를 꽉 깨물었다.눈빛이 몇 번이고 바뀌던 송유라가 입을 열었다.“그 목걸이 찾아봐.”……구승훈이 술 마시러 나왔다.그럴 기분이 아니었지만, 친구들이 번갈아 전화하며 닥달을 부리는 통에 결국 나왔다.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무렵.”맞다, 구승훈. 송유라 수술 취소시켰다며.”안현우가 운을 뗐다.“왜? 불만 있으셔?”구승훈의 냉랭한 대답에 안현우가 쯧쯧, 혀를 찼다.“야, 아무리 그래도 연예인인데, 수술까지 취소시키면서 흉터 남기는 건 좀 아니지 않냐?”“소중한 걸 잃어 봐야 정신 차리는 법이지.”“아~ 그러니까, 유라가 다신 자해를 하지 않도록 교훈을 주는 거였다?”구승훈은 대답이 없었다.속으로는 ‘개뿔, 강하리를 위해 그런 거다 새꺄’를 외치고 있었지만, 입밖에 낼 수는 없었다.갑자기 안현우가 웃음을 터트렸다.“유라 씨, 다 들었죠? 내가 뭐랬어. 구승훈이 유라 씨한테 화난 게 아니라고 했죠?”송
송유라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심장이 끝없이 깊은 심연 속으로 곤두박질쳐 들어가는 느낌이었다.이 목걸이마저 소용이 없어졌어?강하리가 그 정도로 중요해졌다고?“오빠, 진짜 나 버릴 거예요?”눈물 범벅이 된 송유라를 보느라니 구승훈은 저도 모르게 바위에 누워있는 강하리의 모습이 떠올랐다.“나쁜 짓을 저질렀으면 대가는 치러야지. 더 말할 것도 없어.”“오빠! 어렸을 때 했던 약속은 다 잊은 거-.”“그 약속이 네가 저지른 죄까지 덮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송유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룸 안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 서로를 바라봤다.내막을 조금이나마 알고있는 안현우가 웃음을 지었다.“구승훈, 그만해. 우리 유라 씨 얼굴이 하얘진 거 안 보여?”“유라 씨, 걱정 마요. 구승훈 이 녀석이 유라 씨가 불이익 당하는 걸 보고만 있을 놈이 아니니까.”룸 안 모두가 한 시름 놓았다는 표정이 되었다.그러나 그것도 잠시, 구승훈의 냉소가 그걸 깨뜨렸다.“야 안현우. 유라 도울 거면 너 혼자 해. 나까지 끌어들이지 말고.”“구승훈, 진심이야?”안현우의 미간이 좁혀졌다.“강하리 때문이야?”강하리가 죽을 뻔한 게 송유라와 관련이 있단 걸 알고있는 안현우였다.눈살이 찌푸려지긴 했지만, 강하리 따위가 송유라와 견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었다.구승훈이 대답이 없자 안현우의 표정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강하리한테 마음이 생긴 거야? 사랑하는 마음이?”구승훈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사랑이고 자시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강하리는 내 여자고, 난 떠나려는 강하리를 잡아야 한다.그저 그게 다였다.“블랙리스트는 풀어줄게. 하지만 너 스스로 의사를 찾아. 난 도울 생각 없으니까.”송유라를 향해 한 마디를 던진 뒤, 구승훈이 일어나 나갔다.룸 안은 다시 괴랄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까드득!송유라가 이를 갈았다.“구승훈 저 녀석, 이번엔 진심인 모양인데.”“닥쳐!”송유라를 돌아보던 안현우에게 꽥 소리지른 송유라.안현우가 어깨를 으쓱이며
구승훈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기 시작했다.그의 인내심은 오직 강하리 한 사람에게만 열려있었다.“손연지, 강하리 친구면 내가 못 건드릴 줄 알아?”구승훈의 주위에 찬 기운이 서리기 시작했다.손연지가 흠칫했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하지만 이 인간쓰레기 앞에서 고개를 숙이긴 싫었다.“뭐 왜 뭐! 어떻게 건드릴 건데! 유산이라도 시켜 줄라고요? 아님 절벽에서 밀어버릴 건가? 하등 고생이란 고생은 다 시켜놓고 무슨 낯짝으로 자꾸 찾아오는 겁니까?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상도덕이 있다면, 다 털어내고 새로 시작하려는 사람은 건드리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원한 맺힌 귀신도 아니고 왜 지긋지긋하게 자꾸 찾아오는 건데! 당장 꺼져요! 훠이훠이!”속사포로 욕을 뱉어내고는 재빨리 현관으로 달려들어갔다.다행히 1층에 머물러있는 엘리베이터에 들어가 미친듯이 층수와 닫힘 버튼을 눌렀다.벌렁벌렁 나대는 가슴을 부여안고 집에 도착해 보니 강하리가 수저를 세팅하고 있었다.“뭐냐? 왜 그래? 귀신이라도 쫒아와?”“귀신보다 더 진절머리 나는 그 인간 쓰레기!”“……다음부턴 아예 무시해 버려. 멘탈이 정상은 아닌 것 같아. 그 사람.”“싫은데? 방금도 욕 한 바가지 퍼붓고 올라왔는데?”강하리가 웃으며 ‘소금이라도 들고 다녀야 하나’며 조미료 통을 뒤적이는 손연지를 뜯어말렸다.“나는 괜찮아. 그러니까 우리 언제 터질지 모르는 그 인간 폭탄은 건드리지 말자. 응?”“이젠 개나 소나 다 건드리네.”인간 폭탄, 아니 구승훈이 얼굴을 구긴 채 차 옆에 우두커니 서있었다.손연지가 사라진 쪽을 노려보며 한참을 서 있다가 차에 올랐다.막 시동을 걸려던 찰나.잠옷에 점퍼만 걸친 채 달려나오는 강하리가 눈에 확 들어왔다.환하게 웃는 얼굴. 바람에 살랑살랑 나부끼는 옆머리.너무나도 싱그럽고 활력이 넘치는 모습.구승훈은 잠시 넋을 놓았다. 목울대가 위아래로 사납게 요동쳤다.막 차에서 내리려는 순간.“하양아!”구승훈의 신형이 우뚝 멈췄다.저만치 주해찬이 걸어오고 있었
주해찬이 멍해졌다가,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상황 상, 강하리가 구승훈을 쳐내려고 급조한 말일 수도 있지만.그래도 뛸 듯이 기뻤다. “진짜? 나야 언제든지 오케이지.”강하리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강하리, 방금 뭐라고?”구승훈의 눈가가 삽시간에 붉어졌다. 강하리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왜 이러십니까. 제 여자친구 손목 놓으시죠.”주해찬이 구승훈의 손을 잡아당겼지만 꿈쩍도 없었다.구승훈의 머릿속은 온통 한 가지 생각 뿐이었다.강하리가 주해찬 것이 되었다.누군가에게 떠밀린 게 아닌, 제 발로 걸어서.내 것이었던 강하리가.“나 떠보려고 이러는 거지? 맞지?”내가 정말 송유라를 냅두려는 건지 확인하려고.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기를 선택하는가를 시험해 보려고.그런 거라고 말해줘. 제발.“아닌데요. 해찬 선배랑 사귀려고 이러는 건데요.”강하리가 눈썹을 찌푸렸다. 구승훈이 힘줘 잡은 손목이 아파왔다.“나 연애를 무슨 애들 소꿉놀이 하듯 하는 그런 여자 아니예요.”구승훈이 완전히 마음 접도록 쐐기를 박아두려는 것도 있겠지만.주해찬과 연애를 시작하는 것 역시 오랫동안 고민 끝에 내린 결정.모든 걸 털어내고, 내려놓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그러려고 노력을 쏟는 중이었고.당당하게 연애를 하고싶은 상대를 꼽으라면 단연 주해찬이 1순위였다.그 말들이 자극이 되었던지 구승훈이 다짜고짜 강하리를 품 속에 당겨 끌어안았다.“너 때문에 송유라까지 버렸는데 이제 와서 말이 바뀐다고?”강하리가 안간힘을 썼지만 도저히 구승훈의 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내가 강요한 게 아니잖아요! 왜 사람 말을 제멋대로 해석해요?”“아무튼 널 위해서 한 거니까 책임져.” 놓으면 영영 사라질 것처럼 강하리를 있는 힘껏 품 속에 가둔 구승훈.갑자기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주먹이 훅 들어왔다.본능적으로 피하다가 구승훈이 강하리를 얼결에 놓았고, 그 틈에 강하리가 빠져나왔다.공격을 날린 이는 주해찬이었다.평소 온화하고 예의바르던 모습은
이렇게 가 버렸다고?주해찬에게 잡혀서?구승훈의 눈에 핏발이 섰다.‘강하리, 정말 나 버린 거야?’엘리베이터 안.문이 닫히자마자 주해찬이 강하리을 잡은 손을 놓았다.“진짜 아닌 거 알아. 하지만 기뻤어. 네 바람막이라도 될 수 있었단 게.”“그런 거 아니에요 선배.”강하리가 주해찬을 빤히 올려다보았다.또 한 번 놀라는 주해찬.“정말 선배랑 사귀어보고 싶은 거예요. 어디까지 갈 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 보려고요.”주해찬이 벙찐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지금 이 순간이 꿈인 것만 같았다.“믿기지 않으면 꼬집어라도 보시든가요. 물론 나 말고 선배 스스로를요.”강하리가 미소를 지었다.“막 그러려던 참이었는데.”강하리의 미소에 주해찬의 입가가 따라 올라갔다.집에 들어서는 두 사람을 본 손연지는 살짝 놀란 표정이었다. 강하리에게 ‘어서 해명 좀’을 눈빛으로 마구 쏘아댔다.“내 남자친구 주해찬이야. 선배, 이쪽은 내 절친 손연지예요.”남자친구란 말에 손연지가 울컥하더니 눈시울을 붉혔다.바로 다가가 강하리의 손을 꼭 잡았다.“너무 잘됐다 하리야. 그동안 내가 정말 너 보면서 얼마나 안타깝고 속상했던지.”떨리는 목소리로 떠듬떠듬 말하는 연지를 보니 강하리도 콧등이 시큰해났다.“이런 날에는 술이지. 잠시만 기다려! 요 앞 편의점 가서 사 올 테니까.”분주히 외출복을 찾는 손연지.“내일 아침 비행기라 오늘은 좀 힘들 것 같고, 설 전에 내가 한 번 살게요.”주해찬이 웃으며 손연지를 말렸다.“진짜요? 그럼 일단 감사합니다.”넙죽 인사를 한 손연지가 갑자기 여우 눈이 되었다.“설날 얘기하니까 생각난 건데, 저 그믐날 내려가거든요. 설 연휴 동안 두 분이 여기서 오붓한 시간 보내기 딱이겠넹.”그러자 표정이 부자연스러워진 주해찬. 연신 헛기침을 해 댔다.그렇게 셋이 웃고 떠들며 해피 타임을 보내는 사이.아래 구승훈은 전에 없던 헬타임을 지새고 있었다.심란할 때마다 찾던 담배마저 잊은 채,
디링!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주해찬이 걸어나왔다. 얼굴에는 얼떨떨한 기색이 묻어있었다.방금 전 일어난 일이 환상처럼 믿기지가 않았다. 강하리 곁에 좀 더 있으면서 현실감을 좀 더 키우고 싶었지만, 손연지의 집이라 외간 남자가 늦게까지 있기엔 적합하지 않았다.현관을 가로질러 아파트를 나오던 주해찬이 우뚝 멈춰섰다.머리와 어깨에 눈을 소복이 뒤집어쓴 채, 정승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구승훈이 보였다.검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주해찬을 보는 순간 날카롭게 빛났다.“오, 화살받이 씨 나오셨어요?”싸늘하게 빈정이는 음성.구승훈의 화를 막아줄 화살받이라고 비꼬는 말투.주해찬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가, 다시 환한 웃음을 지었다.“질투는 면상을 일그러뜨리는 법이죠. 지금 참 못나 보이세요, 구 대표님.”구승훈은 대답이 없이 담배갑을 꺼냈다.“한 대 하실?”“저 담배 안 피웁니다. 하양이가 담배 냄새를 싫어하기도 하고요.”정중히 거절하는 주해찬의 말에 구승훈이 픽 웃었다.“첨 듣는 소리네. 내 옆에 있을 땐 싫은 소리 한 번 없던 강하리인데.”“싫다는 말을 안 한다고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잖습니까. 더군다나 하양이 호불호도 모르는 구 대표님이 하는 말이라면, 신뢰도가 더 떨어지지 않겠습니까?”구승훈이 말문이 꺽 막혔다. 장미꽃을 싫어한다며 자신을 한심하게 보던 강하리의 눈길이 뇌리를 때렸다.“내가 모르긴 뭘 몰라! 꼭 그쪽은 잘 아는 것처럼 말씀하시네. 이봐요. 강하리와 3년을 같이 산 사람은 나라고! 그쪽이 아니라!”일단 정곡을 찔린 티가 안 나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하지만 아랑곳 없이 웃기지도 않는단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주해찬.그들 둘 사이에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어느 정도는 알고있는 주해찬이었다.3년을 같이 산 게 아니라, 강하리가 당신을 3년이나 참아줬던 거겠지.이런 인간과 더 말을 섞어봐야 무쓸모.“그럼 이만.”씩씩대는 구승훈을 지나친 주해찬이 아파트단지 밖으로 유유히 사라졌다.“언제 강하리한테 차이는지 두 눈 똑바로 뜨고
한참이나 기다렸지만 말풍선 옆의 1은 요지부동이었다.구승훈은 핸드폰을 패대기치고 싶은 충동을 꾹 누르며 눈을 감았다.하, 이렇게 쉽사리 놓아주는 게 아니었는데.강하리가 이토록 통제를 벗어날 줄 알았더라면.후회가 밀려들면서 이성이 점차 제어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뼛속부터 피어오른 악랄한 기운이 이성을 잠식하기 시작했다.강하리가 단식투쟁을 하던 그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고 억지로라도 잡아둬야 했었다.강하리의 모든 몸부림을 옥죄어서라도, 철창 속에 가둬서라도 자신 곁에 남겨두고 싶었다.하지만 이내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이성이 그를 말렸다.안 된다고. 그러면 강하리를 점점 더 밀어내는 거라고.차에 다시 탄 구승훈이 운전대를 쾅 내리쳤다.시끄러운 경적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퍼졌다.갑자기 핸드폰 액정에 톡 하나가 떴다.강하리인 줄 알고 부리나케 집어든 구승훈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형, 송유라가 자살했어]승재가 보낸 톡이었다.회신을 하기도 전, 안현우의 전화가 들어왔다.“송유라가 너 가자마자 룸 화장실에서 손목 그었어. 지금 명인병원 응급실이야.”“알았어.”짧은 통화를 마쳤고, 구승훈이 명인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다.응급실 밖에는 룸에 있던 일동과 송동혁, 장진영 내외까지 있었다.장진영은 한바탕 울었던지 눈가가 벌개져 있었고, 송동혁은 어두운 얼굴로 입을 꾹 닫고 있었다.구승훈이 다가오자 모두가 일제히 그를 돌아보았다.“형, 송유라 위독하대.”승재가 다가왔다.구승훈의 관자놀이가 꿈틀했다.“이상한 낌새 같은 것도 없었고?”“화장실에 다녀오겠다길래 그러려니 했지. 우리가 따라가 지켜볼 수도 없고.”승재는 약간 강 건너 불구경을 하는 듯한 말투였다.자해까지 서슴지 않더니 자업자득이지 뭐, 라고 말하는 듯한.갑자기 장진영이 구승훈 앞에 털썩 꿇어앉았다.“구 대표님, 우리 유라 좀 살려주세요! 제발 좀 도와주세요 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죄는 아니잖아요. 제발……!”그 말에 승재가 눈을 희번덕였다.지금 저걸
여명주가 반박하려는 순간 강하리 뒤에서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그녀는 다른 사람이 아닌 이 작업실의 주인인 천아름이었다.천아름은 짙은 눈동자와 붉은 입술 크고 우아한 웨이브 헤어 거기에 하이힐까지 착용하고 있었다.강하리 옆에 멈춰 선 천아름이 먼저 입을 열었다.“강하리 씨, 오랜만이에요.”강하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사실 두 사람이 마주한 건 단 한 번뿐이었다.그때 경매장에서 스쳐 지나간 적은 있었지만 에비뉴를 인수하고 나서야 강하리는 그 두 개의 약혼반지가 사실 천아름의 작품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단지 ‘에비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을 뿐이었다.천아름은 조용히 강하리의 손목을 바라보다가 반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여전히 마음에 드세요?”강하리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감사합니다.”천아름은 그녀의 손을 살짝 들어 올려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반지가 예쁜 게 아니라 사실은 당신의 손이 예쁜 거예요. 구승훈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요.”그 순간 손연지가 눈을 반짝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구승훈 씨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을 거예요. 아니면 어떻게 하리를 사로잡을 수 있었겠어요?”천아름은 손연지를 향해 윙크하며 장난스레 말했다.“역시 미녀끼리는 생각도 비슷하네요.”셋은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고 여명주는 그들 사이에서 철저히 외면당한 채 서 있었다.그녀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이건 대놓고 날 무시하는 거잖아.’“천아름 씨, 이게 무슨 뜻이죠?”천아름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아직도 못 알아들었어요? 여명주 씨 B시에서는 당신네 가문이 모든 걸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정말 그렇게 대단하다면 노민우 씨를 붙잡아다 가문 재정을 끊고 강제로 결혼이라도 시키시지 그러세요? 그런데 왜...”천아름은 옆에 있던 손연지를 바라보며 물었다.“이쁜 아가씨,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소연지입니다.”“아. 맞아요. 소연지
강하리는 안에서 밖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고 구승훈은 그 모습을 보며 저절로 입꼬리를 올렸다.“떠나기 아쉽네.”그가 나지막이 말했다.노민준은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했지만 구승훈이 무엇을 아쉬워하는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정 안 되겠으면 강하리 씨에게 솔직하게 말해. 그러면 강하리 씨도 기꺼이 너와 함께 돌아갈 거야. 그리고 계속 숨기기만 하면 강하리 씨도 불편할 거잖아?”구승훈은 잠시 침묵한 뒤 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였고 한참이 지나고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그는 작업실 안에서 웃고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자신을 다잡았다.노민준은 더 할 말이 없었고 그때 서야 노민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구승훈, 손연지 씨 지금 어때?”구승훈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궁금해?”노민우는 급히 두 번 응답했다.“그러면 직접 와서 보면 되잖아?”“손연지 씨는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어.”구승훈은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그때 내가 나가라고 했을 때는 왜 안 나갔어?”노민우는 한 박자 늦게 말했다.“그것도 그렇네.”구승훈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곧장 준봉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임희주를 철저히 조사해 줘.]강하리는 마침내 손연지에게 어울리는 주얼리를 골랐다.손연지는 몸에 맞춰보며 환하게 웃었지만 강하리는 그 웃음이 예전처럼 맑고 순수하지만은 않다는 걸 느꼈다.감정의 상처는 결국 스스로 치유해야 했고 강하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손연지 곁을 지켜주는 것뿐이었다.주얼리를 고른 뒤 강하리는 손연지와 함께 의류 브랜드 매장으로 향했다.“곧 결혼식인데 다른 건 안 고를 거야?”손연지가 물었다.강하리는 가볍게 기침하며 말했다.“구승훈이 몇 벌 주문해 놨고 또 에비뉴에서 우리 결혼식에 맞는 주얼리 세트를 준비해 줬어.”손연지는 이를 갈며 말했다.“그놈의 자본주의.”강하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두 사람은 웃으며 의류
구승훈은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왜 갑자기 왔어?”강하리는 구승훈을 째려보며 말했다.“안 오면 당신이 예쁜 여자랑 데이트하는 거 못 볼 거 아냐?”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질투나?”“아니.”그렇다고 말은 했지만 강하리의 목소리에는 질투의 냄새를 숨길 수 없었다.그녀는 실제로 구승훈과 임희주 사이에 아무 일이 있을 거로 의심하지는 않았다.그저... 다른 여자가 어떤 면에서 그녀의 남편을 더 잘 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구승훈은 강하리의 손을 잡고 길게 뻗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목에 남은 자국을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럼 어쩌지? 오늘 밤 당신이 나를 침대에 묶어 두는 건 어때? 복수의 기회를 줄게.”강하리는 질색을 하며 손을 빼냈다.“염치를 좀 챙겨.”구승훈은 웃으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휴대폰이 옷 속에서 가볍게 진동했지만 그는 그것을 확인하지 않고 그저 눈빛이 깊어졌다.마침내 강하리는 차를 개인 작업실 앞에 세웠고 구승훈이 주문한 주얼리를 오늘 착용해 보려고 했다.마침 이틀 후 손연지의 생일이었고 강하리는 손연지가 휴식 중인 틈을 타 그녀를 불러냈다.강하리가 차에서 내리자 손연지는 작업실의 큰 창문 앞에 앉아 멍하니 앉아 있었다.그녀는 강하리를 보고서야 마치 살아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구승훈은 손연지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손연지 씨, 이렇게 한가해요?”손연지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구승훈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강하리를 따라 들어가자 직원이 다가왔다.“구승훈 씨, 주문하신 주얼리가 다 준비되었습니다.”구승훈은 대답하려던 찰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고 그는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나서 직원에게 말했다.“주얼리는 내 아내에게 전달하세요.”그러고는 강하리를 향해 말했다.“전화 받고 올게. 주얼리 먼저 착용해 보고 안 맞으면 다시 수정해 달라고 하면 돼.”강하리는 그의 휴대폰 화면을 흘끗 보았는데 화면에 나타난 이름은 노민준이었다.강하리는 본능적으로 손
‘심리 의사들은 원래 이렇게 강한 심장을 가진 걸까 아니면 이 임 선생이 유독 뻔뻔한 걸까? 만약 이 사람이 노민준 씨의 소개가 아니었다면 대표님은 진작 화를 냈을지도 몰라.’하지만 임희주는 분위기를 살피고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은 채 바로 다른 치료 방안을 구승훈에게 설명했다.“간단히 말하면 이전 치료 방안은 증상을 억제하는 방식이었어요. 예를 들어 노민준 씨가 처방한 약들도 증상을 완화하는 역할을 했죠. 하지만 이런 억제는 일시적인 효과에 불과해 약효가 떨어지면 증상이 더 심해질 위험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억제보다는 근본적인 해소를 목표로 하는 방향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해요. 약효를 완전히 끌어낸 뒤 점차 증상을 약화하는 과정이 필요하죠. 물론 한 번에 모든 약효를 없애는 건 아니고 몸과 신경이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하지만 이 방법은 다소 위험할 수도 있어요. 구승훈 씨가 신중히 고민한 후 결정하시면 좋겠습니다.”임희주가 말을 마치자 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준봉이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이 방법을 선택하면 어떤 위험이 따를까요?”임희주는 커피를 천천히 저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약효를 모두 끌어낼 경우 증상이 얼마나 심각해질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어요. 그렇기에 위험이 따를 가능성이 큽니다.”준봉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반면 구승훈은 여전히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구승훈이 평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이 방안을 만든 사람이 누구죠? 노민준인가요?”임희주는 여전히 잔잔한 미소를 유지하며 대답했다.“제가 만든 방안이지만 노민준 씨와도 논의했습니다. 그는 이 방법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어요.”구승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생각해 보겠습니다.”임희주는 한 발짝 다가서며 덧붙였다.“빠른 답변 부탁드려요.”구승훈은 대답 없이 조용히 카페
구동근은 방에서 밤새 소란을 피운 끝에 다음 날 아침 병원으로 실려 갔다.그는 병원에 가면 좀 나아질 줄 알았지만 도착한 후에도 구승훈의 철저한 감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휴대폰조차 사용할 수 없었다.그가 난동을 부린 탓에 병실은 엉망이었지만 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아직도 부수고 있네요? 그럼 내가 잠깐 밖에서 기다렸다 들어올까요?”구동근은 화가 나서 거의 기절할 뻔했다.“이미 말했잖아. 여초연 씨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구승훈은 대꾸하지 않은 채 보온병에서 밥을 퍼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모르는 건가요? 아니면 말할 수 없는 건가요?”구동근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확실히 몰라. 여초연 씨가 떠날 때 난 보내주기로 약속했고 그 이후로 여초연 씨의 일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했어. 물론 나중에 행방을 알아보려고 사람을 보냈지만 얻은 단서는 거의 없었고 여초연 씨는 아마도 M국에 있을 거야. 그 팔찌는 어제 아침 하인이 집 앞에서 발견한 거야. 안에는 쪽지가 한 장 들어 있었고 여초연 씨의 필체로 ‘너희 부인에게 주는 결혼 선물’이라고 적혀 있었어.”말을 마친 구동근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예전에는 여초연 씨가 다루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결국 내가 여초연 씨에게 휘둘리고 있었더라고. 만약 그때 여초연 씨가 너에게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면 넌 여전히 나를 미워하고 있었을까?”구동근은 말을 마친 뒤 묵묵히 구승훈을 바라보았다.그러나 구승훈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그때 너희가 여초연 씨에게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면 여초연 씨가 나에게 그렇게 했을까요?”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인 구동근을 내려다보았다.“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죠. 결국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예요.”구승훈은 말을 마치고 병실을 나섰다.밖으로 나온 구승훈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고 그 웃음 속에는 조롱이 가득했다.그가 조롱하는 대상이 다른 사
강하리는 구승훈이 그 팔찌를 봤을 때 느꼈던 감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아마 그 감정 속에는 분노가 섞여 있었을 것이다.이 시점에서 여초연이 팔찌를 보내는 것은 분명 도발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구승훈의 모습에서 오히려 더 큰 슬픔을 느꼈다.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내가 안아줄까?”구승훈은 억지로 웃으며 그녀의 목덜미를 가볍게 물었다.“그럼 강 부장님은 어떻게 나를 위로할 생각이에요?”강하리의 눈에 미소가 번졌다.“키스해 주고 안아주고 오빠라고 불러주면서 달래주면 되지 않을까?”구승훈은 순간 머리가 멍해졌고 그때 갑자기 머릿속에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하늘에서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그는 빗속을 얼마나 오랫동안 걸었는지 알지 못했고 그저 그때 그는 매우 슬펐고 심지어… 죽고 싶다고 느꼈다.구승훈이 강가에 서서 몸을 던지려는 순간 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스쳤다. “구승훈 오빠.”그가 돌아보자 한 어린 소녀가 비를 맞으며 구승훈에게 달려와 작은 분홍색 우산을 그의 손에 건네며 말했다.“구승훈 오빠, 슬퍼하지 말아요.”그 말이 끝나자 그녀는 젖은 옷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어 비가 내리는 중에 힘겹게 사탕 포장을 뜯고 그에게 사탕을 건네주었다.“달콤한 거 먹으면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빗속에서 소녀는 반달처럼 꺾인 눈으로 웃으며 물었다.“달콤해요?”구승훈은 그때 자신이 어떻게 대답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고 그저 그 장면이 떠오르자 가슴속에 있던 서글픈 감정이 점차 따뜻하게 변해갔다.그의 어린 시절은 아마도 온통 계산과 속임수로 가득했을 것이다. 심지어 어머니조차 그의 마음에 조금의 사랑도 주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잊힌 구석에서 어린 시절의 달콤함을 맛본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그것은 구승훈의 삶에 존재한 빛과 같았고 아주 달콤했다.강하리는 구승훈이 말하지 않자 여전히 그가 마음속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녀가 무언가를 말하려던 찰나 구승훈이 그녀의
구동근은 갑자기 침묵하더니 지팡이를 짚고 다소 힘겹게 걸으며 창문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하지만 구승훈은 그를 부축하지 않았고 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였지만 피우지 않고 손에 쥔 채 시선을 내리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바라보기만 했다.구동근은 말없이 창가에 서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구승훈도 다그치지 않으며 인내심을 가지고 구동근이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창밖으로 보이는 아래층 정원에서 기사가 가정부와 연정이를 데려다주었다.연정이는 진태형이 얼마 전 사준 작은 패딩에 토끼 목도리를 두르고 곱슬곱슬한 머리에 예쁜 머리핀 두 개를 하자 작고 하얀 얼굴에 까만 눈동자가 인형처럼 귀여웠다.차에서 내려와 강하리를 보자마자 아이는 신이 나서 가정부가 내려주기 바쁘게 뒤뚱거리며 강하리를 향해 달려가면서 깔깔 웃었다.강하리가 다가가 연정이를 안고 볼에 입 맞추었다. 정원의 조명은 그리 밝지 않았지만 이 장면은 유난히 선명하게 구동근의 눈에 각인되었다.희미한 눈동자에 잠시 복잡한 감정이 섬광처럼 번쩍이다가 알 수 없는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그가 말을 꺼냈다.“솔직히 나도 어디 있는지 몰라.”구승훈은 그의 대답에 놀라지 않은 듯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인 뒤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괜찮아요. 난 기다릴 수 있어요. 아시게 됐을 때 다시 물어볼게요.”말을 마친 구승훈은 뒤돌아 문을 나섰고 단호한 발걸음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구동근은 순간 불안한 마음에 주름진 노인의 얼굴엔 금세 화난 기색이 돌았다.“이 자식, 무슨 뜻이야? 날 가두는 거야?”구승훈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한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채 고개를 돌려 소위 할아버지라고 불리는 상대를 바라보았다.“그럴 리가요. 할아버지 안위가 걱정돼서요. 오늘 피까지 토하셨는데 제가 잘 챙겨드려야죠.”“이놈 자식이!”구동근이 지팡이를 내리쳤지만 구승훈은 이미 문을 닫고 나간 뒤 문 앞에 있던 사람에게 잘 지켜보라는 말만 남기고 떠났다.방을 나선 구승훈은 혼자 3층 테라스로 올라갔다.저녁 바람은
구동근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이 장면을 지켜보던 구민성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화가 났다.“구승훈! 할아버지에게 강요해서 무덤 앞에 무릎 꿇게 하고 이젠 억지로 결혼까지 밀어붙여? 우린 다 앞 못 보는 장님인 줄 알아? 네가 오늘 할아버지를 강요해 결혼을 진행해도 우린 인정하지 않아!”구승훈은 눈썹을 치켜들고 구동근을 내려다보았다.“할아버지, 제가 강요했어요?”구동근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구승훈을 노려보았다.손자 하나는 참 잘 키웠다.구승훈을 노려보던 그는 고개를 돌려 구씨 가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내가 원해서 결혼 허락받으러 온 거야. 심씨 가문에서 동의하면 앞으로 강하리는 구씨 가문의 당당한 며느리가 될 거야.”구동근의 말이 떨어지자 구씨 가문 사람들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한 겹 내려앉은 듯 어두운 표정이 역력했다.“아버지, 미쳤어요?” 구민성이 성큼성큼 다가왔지만 구동근은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그는 한숨을 쉬며 거실로 들어서면서 마음속으로는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뭐라고 해도 반대하지 말았을걸. 그러면 이 지경으로 되지도 않았고 구씨 가문도 망하지 않았을 텐데.구동근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려 백아영을 바라보았다.백아영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지만 구동근의 체면을 생각해 별다른 거친 말을 하지 않았다.구동근 역시 빙빙 돌리지 않고 자리에 앉은 뒤 곧장 입을 열었다.결혼 허락은 물론 예물까지 전부 준비할 생각이었다.SH그룹은 무너졌지만 구동근은 여전히 많은 개인 재산을 가지고 있고 그중 일부는 구승훈의 예비 신부를 위해 오래전부터 준비했던 선물이다. 연성 중심가에 있는 사무 빌딩, 그리고...원래 여초연의 손에 있던 팔찌까지.“승훈이 엄마가 며느리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보낸 겁니다.”구승훈의 눈매가 가늘어졌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고 말을 마친 구동근은 강하리에게 팔찌를 건넸다.하지만 강하리는 팔찌를 받을 생각이
강하리의 말에 진시연은 물론 이정숙도 당황했고 곧바로 이정숙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강하리, 주제넘게 굴지 마!”강하리가 웃었다.“앞으로 저한테 잘해준다는 게 이런 건가요?”이정숙의 말문이 막히자 진시연이 곧장 입을 열었다.“난 무릎은 꿇을 수 있지만 할머니는 그냥 두면 안 될까요? 연세가 있고 그쪽 할머니인데 아무리 그래도 어른은 존중해야죠.”또다시 강하리에게 잘못을 덮어씌우는 말에 강하리는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아주머니, 손님 내보내세요.”오영숙이 서둘러 달려왔다.“어르신, 진시연 씨, 나가시죠.”오영숙이 말을 마치자 진시연은 이를 악문 채 정말로 무릎을 꿇었다.“시연아!”소리를 지르며 이정숙은 진시연을 끌어당기려 했고 진시연의 몸도 늘어났다 줄어들기를 반복했다.“앞으로 다시는 건드리거나 성가신 일 만들지 않을게요. 강하리 씨, 제가 잘못했어요. 정말 잘못했어요.”강하리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진시연을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난 후 이렇게 말했다.“꺼져요. 앞으로 나랑 내 가족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말고.”진시연은 나지막이 고맙다고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이정숙과 함께 떠났고 거실에는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구씨 가문 사람들은 저마다 복잡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들 눈에 강하리는 줄곧 만만하고 연약한 상대였다.그게 아니면 구승훈이 아니라 바로 강하리의 회사로 찾아가지도 않았을 거다.그런데 지금 보니 구승훈이 만나는 여자가 진태형의 양딸과 어머니도 몰아붙일 만큼 독한 사람이고 거실에 있는 심씨 가문 사람 중 아무도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구씨 가문 사람들은 하나같이 복잡한 표정이었고 구동근은 더더욱 그러했다.그는 강하리가 구씨 가문의 안주인이 될 자격이 없다고 늘 생각해 왔다.출신이 비천한 데다 안주인이 될 만한 자질도 갖추지 못했다고 여겼다.시골 출신인 계집이 성격도 연약하고 소심해서 훌륭한 안주인이 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의 섣부른 판단이었다.거실에서 심준호는 눈썹을 치켜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