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남친이랑 헤어졌어요?”눈가가 벌개진 강하리에게 나이 지긋한 택시기사님이 물었다.대답이 없는 강하리.“어유, 헤어지면 어때! 세상에 아가씨를 기다리는 좋은 남자가 얼마나 많을 건데. 울어도 이렇게 예쁜 여자친구를 놓친 전 남친이 울어야지 아가씨가 왜 울어요.”짐짓 근엄하게 말씀하시는 기사님 덕에 강하리는 웃음이 터졌다.그래, 그깟 쓰레기 때문에 내가 왜 울어.손연지네 집에 짐을 옮겨놓은 후 병원으로 가던 강하리는 정양철의 전화를 받았다.“아들놈한테서 하리 양이 연성 지사 입사를 취소했다고 들었는데 사실인지요?”“네, 실망시켜 드려서 죄송합니다.”“하리 양, 괜찮다면 만나서 얘기 한 번 해요.”강하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응낙했다.정양철 앞에서 대차게 약속했던 총괄 자리라, 못 가게 된 사유도 만나서 상세하게 설명해 드리는 게 당연했다.연성지사 1층 커피숍에 정양철이 기다리고 있었다.“하리 양. 나는 그래도 하리 양이 여기 지사에 와 줬으면 좋겠어요.”강하리가 앉자마자 정양철이 본론부터 꺼냈다.“정말 소중한 기회고 저도 정말 고민 많이 해 봤는데, 대양은 제게는 아직 과분한 것 같네요.”정양철이 깊은 눈으로 아들 또래의, 하지만 정주현보다 많이 어른스러워 보이는 강하리를 주시했다.“외교부에 들어간다고 들었습니다만.”저도 모르게 정양철이 고개를 끄덕였다.“젊은 나이에 참 대단하네요.”“감사합니다.”강하리가 적당히 겸손한 자세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하지만.”정양철이 갑자기 말투가 바뀌었다.“외교부에 들어갔다고 대양에 못 오는 건 아니지 않아요?”“네에?”강하리가 적잖게 놀랐다.“대양 쪽은 총괄 직급만 걸어 두고 큰 건들 해결책이나 내 오면 되는 거고, 나머지 사소한 것들은 주현이한테 모두 맡기면 되잖아요. 외교부 업무에 영향 안 주도록.”어, 음…….그렇게 해도 되는 건가……?이건 뭐, 바지사장이 따로 없다.“저한테 이렇게 과분한 애정을 주시는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연성 지사, 주현이가 일떠세운
강찬수가 한 무리 사람들을 데리고 떠들썩하게 병원으로 쳐들어오고 있었다.강하리의 얼굴이 급 어두워졌다. 얼른 간병인 아줌마에게 병원 경비원들을 불러오라고 시켰다.아줌마가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실 앞이 소란스러워졌다.“강하리! 당장 나오지 못 해!”병실 문을 막아선 경호원들 사이로 강찬수가 고래고래 소리질렀다.“내가 누군지 알아? 안에 누워있는 저 여편네 남편이라고! 니들이 뭔데 날 막아!”경호원들이 꿈쩍도 않자 강찬수가 언성을 더 높였다.“강하리 네 이년! 당장 나오지 못할가! 병원 다 부수기 전에!”문이 벌컥 열렸다. 강하리가 차가운 얼굴로 나타났다.“어디 한 번 부숴 봐요! 그 똘끼 한 번 봅시다!”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이 병원은 노씨 가문 자산이었다.강찬수가 판을 키운다면 노씨 가문에서 강찬수를 가만둘 리가 없었다.그걸 모르는 강찬수는 제 계획에만 빠져있었다.일을 키워서 강하리가 굴복하게 만드는 것.빚 상환 마감일이라 빨리 돈을 받아내아만 했다. 장원영한테서든 강하리한테서든.“얼씨구, 간탱이가 부었네? 구승훈이 와서 도와주기라도 할 것 같아?”바로 따라온 사람들에게 손짓했다.콰앙!그중 하나가 들고있던 야구방망이로 복도에 놓인 화분 하나를 갈겼다.지나가던 사람들이 아우성을 지르며 뿔뿔이 흩어졌다.“봤지? 내가 못할 것 같아? 네 대갈통도 깨 줘?”강찬수가 표독스럽게 강하리를 노려보았다.강하리는 냉랭하게 엘리베이터 쪽을 바라볼 뿐.강찬수가 옆 사람 손에서 방망이를 빼앗아 다른 화분을 겨누는 순간.“당장 멈추지 못 해!”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노민우가 경비원들과 함께 우르르 나왔다.“넌 또 뭐야! 내가 내 마누라 보겠다는데 네 놈이 뭔데 끼어들어!”노민우를 쏘아보며 침 튀기던 강찬수가 단번에 경비원들에게 제압당했다.“야 이 새꺄 너 대체 뭐야! 아이고 사람 잡네!”발악하며 더욱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강찬수.“우리 집 병원에서 기물 파손을 한 양아치 잡으러 왔는데, 그렇다면 과연 나는 누굴까?”노민우
”노씨 가문 병원이란 건 왜 안 알려주신 겁니까!”병원에서 쫓겨난 강찬수가 바로 장원영에게 전화해 따지기 시작했다.마침 열이 날 대로 난 차에 강찬수의 질타를 듣자 장원영이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머저리세요? 여태 명인병원이 노씨 가문 거란 것도 몰랐어요? ”강찬수가 알 리가 있을까.탱자탱자 노름에만 빠져 세상 돌아가는 것도 잊은 인간인데.“아무튼! 정보를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은 건 여사님이시니까 2억은 수고비 및 손해배상비로 쳐 주셔야겠습니다! 저 경비원한테 매까지 맞았다고요!”그 많은 돈을 놓치기 싫은 강찬수가 억지를 쓰기 시작했다.“참나, 그깟 일 하나도 제대로 처리 못 하는 폐급이 무슨 낯짝으로!”“폐급이라니! 당신 말 다 했어? 진짜 확 다 털어버린다?”“맘대로 하세요! 누가 당신 같은 쓰레기 말을 믿는다고!”장원영이 전화를 끊어버렸다.“엄마, 강찬수는 절대 문제 없다며?”옆에서 통화를 다 들은 송유라의 얼굴이 새하얘졌다.“저 정도로 무용지물일 줄은 누가 알았겠니! 이제 다른 방법을 찾는 수밖에.”장원영이 이를 꽉 깨물었다.눈빛이 몇 번이고 바뀌던 송유라가 입을 열었다.“그 목걸이 찾아봐.”……구승훈이 술 마시러 나왔다.그럴 기분이 아니었지만, 친구들이 번갈아 전화하며 닥달을 부리는 통에 결국 나왔다.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무렵.”맞다, 구승훈. 송유라 수술 취소시켰다며.”안현우가 운을 뗐다.“왜? 불만 있으셔?”구승훈의 냉랭한 대답에 안현우가 쯧쯧, 혀를 찼다.“야, 아무리 그래도 연예인인데, 수술까지 취소시키면서 흉터 남기는 건 좀 아니지 않냐?”“소중한 걸 잃어 봐야 정신 차리는 법이지.”“아~ 그러니까, 유라가 다신 자해를 하지 않도록 교훈을 주는 거였다?”구승훈은 대답이 없었다.속으로는 ‘개뿔, 강하리를 위해 그런 거다 새꺄’를 외치고 있었지만, 입밖에 낼 수는 없었다.갑자기 안현우가 웃음을 터트렸다.“유라 씨, 다 들었죠? 내가 뭐랬어. 구승훈이 유라 씨한테 화난 게 아니라고 했죠?”송
송유라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심장이 끝없이 깊은 심연 속으로 곤두박질쳐 들어가는 느낌이었다.이 목걸이마저 소용이 없어졌어?강하리가 그 정도로 중요해졌다고?“오빠, 진짜 나 버릴 거예요?”눈물 범벅이 된 송유라를 보느라니 구승훈은 저도 모르게 바위에 누워있는 강하리의 모습이 떠올랐다.“나쁜 짓을 저질렀으면 대가는 치러야지. 더 말할 것도 없어.”“오빠! 어렸을 때 했던 약속은 다 잊은 거-.”“그 약속이 네가 저지른 죄까지 덮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송유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룸 안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 서로를 바라봤다.내막을 조금이나마 알고있는 안현우가 웃음을 지었다.“구승훈, 그만해. 우리 유라 씨 얼굴이 하얘진 거 안 보여?”“유라 씨, 걱정 마요. 구승훈 이 녀석이 유라 씨가 불이익 당하는 걸 보고만 있을 놈이 아니니까.”룸 안 모두가 한 시름 놓았다는 표정이 되었다.그러나 그것도 잠시, 구승훈의 냉소가 그걸 깨뜨렸다.“야 안현우. 유라 도울 거면 너 혼자 해. 나까지 끌어들이지 말고.”“구승훈, 진심이야?”안현우의 미간이 좁혀졌다.“강하리 때문이야?”강하리가 죽을 뻔한 게 송유라와 관련이 있단 걸 알고있는 안현우였다.눈살이 찌푸려지긴 했지만, 강하리 따위가 송유라와 견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었다.구승훈이 대답이 없자 안현우의 표정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강하리한테 마음이 생긴 거야? 사랑하는 마음이?”구승훈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사랑이고 자시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강하리는 내 여자고, 난 떠나려는 강하리를 잡아야 한다.그저 그게 다였다.“블랙리스트는 풀어줄게. 하지만 너 스스로 의사를 찾아. 난 도울 생각 없으니까.”송유라를 향해 한 마디를 던진 뒤, 구승훈이 일어나 나갔다.룸 안은 다시 괴랄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까드득!송유라가 이를 갈았다.“구승훈 저 녀석, 이번엔 진심인 모양인데.”“닥쳐!”송유라를 돌아보던 안현우에게 꽥 소리지른 송유라.안현우가 어깨를 으쓱이며
구승훈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기 시작했다.그의 인내심은 오직 강하리 한 사람에게만 열려있었다.“손연지, 강하리 친구면 내가 못 건드릴 줄 알아?”구승훈의 주위에 찬 기운이 서리기 시작했다.손연지가 흠칫했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하지만 이 인간쓰레기 앞에서 고개를 숙이긴 싫었다.“뭐 왜 뭐! 어떻게 건드릴 건데! 유산이라도 시켜 줄라고요? 아님 절벽에서 밀어버릴 건가? 하등 고생이란 고생은 다 시켜놓고 무슨 낯짝으로 자꾸 찾아오는 겁니까?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상도덕이 있다면, 다 털어내고 새로 시작하려는 사람은 건드리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원한 맺힌 귀신도 아니고 왜 지긋지긋하게 자꾸 찾아오는 건데! 당장 꺼져요! 훠이훠이!”속사포로 욕을 뱉어내고는 재빨리 현관으로 달려들어갔다.다행히 1층에 머물러있는 엘리베이터에 들어가 미친듯이 층수와 닫힘 버튼을 눌렀다.벌렁벌렁 나대는 가슴을 부여안고 집에 도착해 보니 강하리가 수저를 세팅하고 있었다.“뭐냐? 왜 그래? 귀신이라도 쫒아와?”“귀신보다 더 진절머리 나는 그 인간 쓰레기!”“……다음부턴 아예 무시해 버려. 멘탈이 정상은 아닌 것 같아. 그 사람.”“싫은데? 방금도 욕 한 바가지 퍼붓고 올라왔는데?”강하리가 웃으며 ‘소금이라도 들고 다녀야 하나’며 조미료 통을 뒤적이는 손연지를 뜯어말렸다.“나는 괜찮아. 그러니까 우리 언제 터질지 모르는 그 인간 폭탄은 건드리지 말자. 응?”“이젠 개나 소나 다 건드리네.”인간 폭탄, 아니 구승훈이 얼굴을 구긴 채 차 옆에 우두커니 서있었다.손연지가 사라진 쪽을 노려보며 한참을 서 있다가 차에 올랐다.막 시동을 걸려던 찰나.잠옷에 점퍼만 걸친 채 달려나오는 강하리가 눈에 확 들어왔다.환하게 웃는 얼굴. 바람에 살랑살랑 나부끼는 옆머리.너무나도 싱그럽고 활력이 넘치는 모습.구승훈은 잠시 넋을 놓았다. 목울대가 위아래로 사납게 요동쳤다.막 차에서 내리려는 순간.“하양아!”구승훈의 신형이 우뚝 멈췄다.저만치 주해찬이 걸어오고 있었
주해찬이 멍해졌다가,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상황 상, 강하리가 구승훈을 쳐내려고 급조한 말일 수도 있지만.그래도 뛸 듯이 기뻤다. “진짜? 나야 언제든지 오케이지.”강하리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강하리, 방금 뭐라고?”구승훈의 눈가가 삽시간에 붉어졌다. 강하리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왜 이러십니까. 제 여자친구 손목 놓으시죠.”주해찬이 구승훈의 손을 잡아당겼지만 꿈쩍도 없었다.구승훈의 머릿속은 온통 한 가지 생각 뿐이었다.강하리가 주해찬 것이 되었다.누군가에게 떠밀린 게 아닌, 제 발로 걸어서.내 것이었던 강하리가.“나 떠보려고 이러는 거지? 맞지?”내가 정말 송유라를 냅두려는 건지 확인하려고.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기를 선택하는가를 시험해 보려고.그런 거라고 말해줘. 제발.“아닌데요. 해찬 선배랑 사귀려고 이러는 건데요.”강하리가 눈썹을 찌푸렸다. 구승훈이 힘줘 잡은 손목이 아파왔다.“나 연애를 무슨 애들 소꿉놀이 하듯 하는 그런 여자 아니예요.”구승훈이 완전히 마음 접도록 쐐기를 박아두려는 것도 있겠지만.주해찬과 연애를 시작하는 것 역시 오랫동안 고민 끝에 내린 결정.모든 걸 털어내고, 내려놓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그러려고 노력을 쏟는 중이었고.당당하게 연애를 하고싶은 상대를 꼽으라면 단연 주해찬이 1순위였다.그 말들이 자극이 되었던지 구승훈이 다짜고짜 강하리를 품 속에 당겨 끌어안았다.“너 때문에 송유라까지 버렸는데 이제 와서 말이 바뀐다고?”강하리가 안간힘을 썼지만 도저히 구승훈의 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내가 강요한 게 아니잖아요! 왜 사람 말을 제멋대로 해석해요?”“아무튼 널 위해서 한 거니까 책임져.” 놓으면 영영 사라질 것처럼 강하리를 있는 힘껏 품 속에 가둔 구승훈.갑자기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주먹이 훅 들어왔다.본능적으로 피하다가 구승훈이 강하리를 얼결에 놓았고, 그 틈에 강하리가 빠져나왔다.공격을 날린 이는 주해찬이었다.평소 온화하고 예의바르던 모습은
이렇게 가 버렸다고?주해찬에게 잡혀서?구승훈의 눈에 핏발이 섰다.‘강하리, 정말 나 버린 거야?’엘리베이터 안.문이 닫히자마자 주해찬이 강하리을 잡은 손을 놓았다.“진짜 아닌 거 알아. 하지만 기뻤어. 네 바람막이라도 될 수 있었단 게.”“그런 거 아니에요 선배.”강하리가 주해찬을 빤히 올려다보았다.또 한 번 놀라는 주해찬.“정말 선배랑 사귀어보고 싶은 거예요. 어디까지 갈 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 보려고요.”주해찬이 벙찐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지금 이 순간이 꿈인 것만 같았다.“믿기지 않으면 꼬집어라도 보시든가요. 물론 나 말고 선배 스스로를요.”강하리가 미소를 지었다.“막 그러려던 참이었는데.”강하리의 미소에 주해찬의 입가가 따라 올라갔다.집에 들어서는 두 사람을 본 손연지는 살짝 놀란 표정이었다. 강하리에게 ‘어서 해명 좀’을 눈빛으로 마구 쏘아댔다.“내 남자친구 주해찬이야. 선배, 이쪽은 내 절친 손연지예요.”남자친구란 말에 손연지가 울컥하더니 눈시울을 붉혔다.바로 다가가 강하리의 손을 꼭 잡았다.“너무 잘됐다 하리야. 그동안 내가 정말 너 보면서 얼마나 안타깝고 속상했던지.”떨리는 목소리로 떠듬떠듬 말하는 연지를 보니 강하리도 콧등이 시큰해났다.“이런 날에는 술이지. 잠시만 기다려! 요 앞 편의점 가서 사 올 테니까.”분주히 외출복을 찾는 손연지.“내일 아침 비행기라 오늘은 좀 힘들 것 같고, 설 전에 내가 한 번 살게요.”주해찬이 웃으며 손연지를 말렸다.“진짜요? 그럼 일단 감사합니다.”넙죽 인사를 한 손연지가 갑자기 여우 눈이 되었다.“설날 얘기하니까 생각난 건데, 저 그믐날 내려가거든요. 설 연휴 동안 두 분이 여기서 오붓한 시간 보내기 딱이겠넹.”그러자 표정이 부자연스러워진 주해찬. 연신 헛기침을 해 댔다.그렇게 셋이 웃고 떠들며 해피 타임을 보내는 사이.아래 구승훈은 전에 없던 헬타임을 지새고 있었다.심란할 때마다 찾던 담배마저 잊은 채,
디링!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주해찬이 걸어나왔다. 얼굴에는 얼떨떨한 기색이 묻어있었다.방금 전 일어난 일이 환상처럼 믿기지가 않았다. 강하리 곁에 좀 더 있으면서 현실감을 좀 더 키우고 싶었지만, 손연지의 집이라 외간 남자가 늦게까지 있기엔 적합하지 않았다.현관을 가로질러 아파트를 나오던 주해찬이 우뚝 멈춰섰다.머리와 어깨에 눈을 소복이 뒤집어쓴 채, 정승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구승훈이 보였다.검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주해찬을 보는 순간 날카롭게 빛났다.“오, 화살받이 씨 나오셨어요?”싸늘하게 빈정이는 음성.구승훈의 화를 막아줄 화살받이라고 비꼬는 말투.주해찬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가, 다시 환한 웃음을 지었다.“질투는 면상을 일그러뜨리는 법이죠. 지금 참 못나 보이세요, 구 대표님.”구승훈은 대답이 없이 담배갑을 꺼냈다.“한 대 하실?”“저 담배 안 피웁니다. 하양이가 담배 냄새를 싫어하기도 하고요.”정중히 거절하는 주해찬의 말에 구승훈이 픽 웃었다.“첨 듣는 소리네. 내 옆에 있을 땐 싫은 소리 한 번 없던 강하리인데.”“싫다는 말을 안 한다고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잖습니까. 더군다나 하양이 호불호도 모르는 구 대표님이 하는 말이라면, 신뢰도가 더 떨어지지 않겠습니까?”구승훈이 말문이 꺽 막혔다. 장미꽃을 싫어한다며 자신을 한심하게 보던 강하리의 눈길이 뇌리를 때렸다.“내가 모르긴 뭘 몰라! 꼭 그쪽은 잘 아는 것처럼 말씀하시네. 이봐요. 강하리와 3년을 같이 산 사람은 나라고! 그쪽이 아니라!”일단 정곡을 찔린 티가 안 나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하지만 아랑곳 없이 웃기지도 않는단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주해찬.그들 둘 사이에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어느 정도는 알고있는 주해찬이었다.3년을 같이 산 게 아니라, 강하리가 당신을 3년이나 참아줬던 거겠지.이런 인간과 더 말을 섞어봐야 무쓸모.“그럼 이만.”씩씩대는 구승훈을 지나친 주해찬이 아파트단지 밖으로 유유히 사라졌다.“언제 강하리한테 차이는지 두 눈 똑바로 뜨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