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서둘러 회사 홈페이지를 열어 보았다.운영은 정상화됐지만 사이트 밑부분에는 여전히 송유라의 팬들이 형부를 부르고 있다."형부, 언제 우리 언니랑 결혼해요?”"형부, 너무 스윗해요.”"형부, 저 두 사람 깨 볶는 모습 구경하러 왔어요.”"매형, 빨리 저희 언니와의 열애 사실 인정해 주시죠.”"형부...”형부로 도배되어 있는 댓글들을 본 강하리는 머리가 어지러워 났다.회사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인원들이 있었지만, 이 댓글들은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 그대로 노출돼 있다.구승훈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하다.‘대표님의 마음이 어찌 넓었으면 상대 팬들도 다 옹호해 주는 건지.’강하리는 한숨을 내쉬고는 폰을 한쪽으로 던졌다.막 누우려고 하는데 누군가 병실 문을 똑똑 두드렸다."들어오세요."방문이 열리자, 강하리는 그대로 얼어버렸다.회사의 수석 변호사였다.구승훈은 과연 말한 대로 한다.그 남자는 단정한 양복 차림으로 엘리트 티를 내며 강하리 앞에 섰다."강 부장님, 이 시간에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강남은 쓴웃음을 지었다.“괜찮아요.”수석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여기 해약 협의서가 있으니 한번 보시고 문제가 없다고 생각되면 바로 서명하시면 됩니다.”강하리는 그 계약을 받아들고 곧바로 위약금에 눈을 돌렸다.100억원.강하리의 관자놀이는 펄떡펄떡 뛰고 있다.구승훈이 그녀를 순순히 떠나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었다.하지만 그가 이런 말도 안 되는 해약서를 꺼내 들 줄은 몰랐다."강 변호사님, 법을 공부하신 입장에서 이 계약서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강 부장님, 이 계약은 강 부장님께서 체결하신 근로계약에 따른 것입니다.”말하면서 강 변호사는 또 근로계약서를 하나 꺼냈다."강 부장님, 4번, 6번, 3번, 보세요.”강하리는 눈살을 찌푸렸다.강 변호사가 말한 그 항목이 번듯이 적혀 있다.「용역 계약 기간 중 을이 사직서를 제출한 경우 갑은 을에게 향후 계약 기간 동안 갑이 예상한
"대표님, 계약 해지 건에 관해 얘기 좀 하고 싶은데요.”구승훈은 차갑게 웃었다."강 부장, 합의서를 보지 못했어?”강하리는 입꼬리가 굳어났다."봤어요...”“봤는데 뭐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어?”강하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정상적인 퇴사를 하고 싶어요. 필요하시다면 후임을 찾아준 뒤 퇴사할 수도 있어요...”구승훈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 없었다. 강하리는 전화기를 사이에 두고도 구승훈이 불쾌해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강 부장, 우리 회사는 자선단체가 아니야. 애초에 그 근로계약서에 사인했으면 순순히 지켜줘야지.”강하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대표님, 회의실에서 분명히 제 퇴사에 동의하셨잖아요.”구승훈은 순간 당시 회의실에서 강하리가 안현우의 러브콜을 받은 일이 생각났다.구승훈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회의실은 무섭게 조용했다.회의실에 사람들은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구승훈은 탁 하고 손에 들고 있던 만년필을 탁자 위에 던졌다.회사의 임원들은 모두 가슴이 철렁거렸다.이어 맨 앞에 앉은 남자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강 부장, 내가 퇴사에 동의한 건 맞지만, 네가 마지막에 어떤 선택을 했는지 내가 알려줄까?”강하리는 순간 난감해졌다.강하리가 당시 그 2억 원 때문에 다시 구승훈을 찾았을 때, 그가 한 모든 말을 강하리는 기억하고 있었다.강하리는 이런 난처함을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아뇨, 기억나요.”"기억이 났으면 강 부장은 몸조리 잘하고 얌전히 출근해.”강하리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제가 어떻게 해야 그만둘 수 있는 거예요?”구승훈이 눈을 번쩍 뜨더니 말했다."강 부장, 여기는 모텔이 아니야. 백억을 내놓든지, 건강을 회복해서 출근하든지, 아니면 강 부장이 법정에서 나를 마주하고 싶으면 소원대로 해줄 수도 있어.”구승훈은 멈칫하더니 계속하여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백억원은 이미 내가 강 부장의 지난 3년 동안의 고생을 생각해서 싸게 쳐준 거니까
강하리는 멈칫했다."그 사건, 계속 다른 사람 못 찾았어요?”임정원은 피식 웃었다.“하리 씨가 허락해서 안 찾고 있었는데요. 설마 번복하고 싶은 거예요?”강하리는 문득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지난번에 임정원이 도움이 필요한 자료가 있다고 할 때, 강하리가 거절한 이후로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강하리는 임정원이 분명 다른 사람을 찾았을 거라고 생각했다.임정원이 계속 강하리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후에 번역할 게 있으면 메일로 바로 보내줘요. 제가 최대한 일에 방해 안 가게 빨리해서 보낼게요.”"그래요, 그렇게 하죠. 이번 일은 뭐예요?”"계약 해지에 관한 문서인데 메일로 보내드릴까요?”"아뇨, 점심인데 같이 밥이나 먹을까요?”임정원의 말이 제안에 강하리도 거절하기 힘들었다."좋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대답했다.임정원와 약속한 레스토랑은 병원 근처에 있었다.강하리가 도착했을 때 임정원은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얼굴색이 왜 이렇게 안 좋아요?"임정원이 물었다.강하리는 살짝 웃었다."요즘 제대로 쉬지 못했어요.”임정원은 강하리가 말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식사 자리는 그럭저럭 조용하고 온화했다.식사를 마치자, 강하리는 그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잠시 후 임정원은 심란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하리 씨, 무슨 생각으로 이런 계약을 했어요?”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해결하긴 힘들겠죠?”임정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인정하기 싫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강하리도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임정원은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강하리는 이미 그런 결과를 예상한 듯했다.어쨌든, 이건 SH그룹의 법무팀이 내놓은 협의이고 만약 허점을 찾을 수 있다면 구승훈이 이 사람들을 부양하는 데 그렇게 많은 돈을 쓰지는 않았을 거다."정말 구 대표님 곁을 떠날 생각이에요?" 임정원이 또 물었다.사실 이 말을 꺼내면 두 사람 모두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강하리는 이 남자가 무슨 꿍꿍이인지 도통 알길이 없었다. 그러나 구승훈이 화가 났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강하리는 구승훈한테 다가가지 않고 멀찍이 침대 옆에 섰다."무슨 일이예요. 그냥 말하세요”구승훈은 눈을 번쩍 뜨고는 강하리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강하리는 원래 힘이 없던 터라 끌어당기는 힘에 못 이겨 구승훈의 품속에 쏙 들어갔다. 구승훈은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홱 돌아서서 강하리를 창턱에 대었다."누구를 만나러 나갔어?"구승훈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강하리는 등뒤가 창턱에 배겨서 너무 아팠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강하리의 몸부림에 구승훈은 안색이 더욱 나빠졌다.구승훈이 힘을 더 보태자, 강하리는 등에 무딘 칼이 닿은 것처럼 더욱 아파왔다."어느 남자를 만나러 나갔었냐고!”"아파요! 승훈 씨!""아프게 해서 미안해.”구승훈은 말은 이렇게 했지만, 강하리를 놓아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강하리는 눈시울이 붉어지며 입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승훈 씨, 이게 무슨 미친 짓이에요! ”"내가 미쳤다고? 역시 강 부장이 좋고 나쁨을 모르네.”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저는 이제 다른 사람하고 밥 먹을 자유도 없는 거예요?”그녀와 임정원의 관계는 누가 봐도 결백했다. 그래서 구승훈이 임정원을 질투하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오히려 구승훈과 송유라는 누가 봐도 결백하지 않는 걸 알지만, 그는 보란듯이 계속 송유라을 데리고 와서 강하리 앞에서 자랑을 했다.구승훈은 차가운 미소를 짓더니 강하리를 놓아줬다.강하리는 갑자기 기침하기 시작했다.구승훈은 옆에서 그녀가 기침하는 것을 지켜보았다.그녀가 마침내 기침을 멈추자 비로소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이런 몸 상태에서도 나가서 같이 밥이나 먹겠다니, 임 변호사가 너한테 그 정도로 중요해? 너는 지금 네가 어떤 신분인지 몰라?”방금 기침으로 강하리의 눈가가 붉어 났다.그녀는 약간 붉어진 눈을 들어 쓴웃음을 지었다.
강하리가 뭔 대단한 짓을 한 것도 아니다.강하리는 그저 임정원과 간단히 식사한 것이 전부다.갑자기 강하리는 오늘 밥을 먹고 일어났을 때 그녀가 갑자기 현기증을 일으키자, 임정원이 자신을 부축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그게 오늘 임정원과의 유일한 스킨십이었다.하지만 구승훈이 고작 그 스킨쉽만으로 강하리와 임정원 사이를 의심한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강하리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구승훈을 바라봤다. "대표님 혹시 저한테 사람을 붙여 저를 감시했어요?”구승훈은 냉정하게 웃더니 말했다. "강 부장, 걱정하지 마. 나 아직 그 정도로 한가하지 않아. 하지만 오늘부터 너한테 사람을 붙이는 게 좋겠어. 그렇지 않으면 나몰래 바람피워도 모르겠어!”강하리의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강하리는 구승훈을 무섭게 노려봤다."도대체 무슨 뜻이에요?”구승훈은 강하리를 슬쩍 쳐다보고는 폰을 꺼내 그녀 앞에 내동댕이쳤다."강 부장, 네가 직접 봐.”강하리가 내동댕이쳐진 폰을 집어 들고 채팅 기록을 누르자 사진 한 장이 보였다.임정원의 부축을 받는 장면이 매우 교묘하게 찍혀있었다.마치 강하리가 일부러 임정원의 품에 안긴 것처럼 말이다.강하리의 손은 미세하게 떨렸다.도대체 누가 보낸 사진인지 보려고 더보기를 누르자 안현우가 바로 그 범인이었다. 게다가 구승훈의 친구 놈들의 채팅그룹에 보내져 있었다.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화면을 계속 밑으로 내려봤다. 이어 안현우가 보낸 톡이 보였다.「강 부장님 정말 예상 밖이네, 승훈이 몰래 밖에서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다니. 승훈아, 이런 나쁜 년도 좋다는 거야? 언제 임신하면 네 아이가 아닐지도 몰라.」강하리는 머리가 어지러워 났다. 그래서 입꼬리를 파르르 떨며 구승훈을 바라보았다. "이거 다 오해예요. 못 믿겠으면 레스토랑 CCTV를 가서 확인해 보세요. 임 변호사와 저는 정말 평범한 친구 사이일 뿐이에요. 아이에 대해서는......”강하리는 감정이 벅차올라 눈물이 예고 없이 뚝뚝 떨어졌다."대표님 아이가 아니라고 의
강하리는 구승훈의 비수같이 꽂히는 말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임정원의 부축을 받았다고 더러워하다니...'강하리는 구승훈을 훑고는 되물었다."대표님께서 송유라한테 안겼던 곳이 더 많지 않나요?”구승훈은 한쪽에 서서 가벼운 미소만 지었다."강 부장은 유라랑 나 둘 중 누가 갑인지 몰라? 만약 네가 날 책임질 능력이 있다면, 나도 다른 여자는 건드리지 않을 수 있어.”강하리는 구승훈한테 요구할 자격조차 없었기에 더 이상 그와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 강하리는 그들의 관계가 대등하지 않다는 것을 잠깐 잊고 있었다."저 샤워할 거니까 나가주세요.”구승훈은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얀 강하리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너 혼자 씻을 수 있겠어?”"네.”구승훈은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이고는 화장실에서 나왔다.화장실 문이 닫히는 순간 강하리는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그와중에 입술을 꽉 깨물며 울음소리가 새어 나가지 못하게 공제했다.한참 울고 나니 마음이 좀 편해졌는지 그재야 옷을 벗고 목욕을 했다.팔에 상처가 있어서 가능한 물에 닿지 않으려 조심했지만 결국은 거즈를 적셨다.방금 구승훈이 팔을 너무 세게 잡아당겨 상처가 다소 찢겼다. 거즈도 이미 붉게 변했다.강하리는 정신을 꼭 붙잡고 몸을 깨끗이 닦았다.누군가 화장실 문을 똑똑 두드렸다."다 씻었어?”구승훈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다 씻었어요.”대답을 들은 구승훈은 문을 열고 들어와 그녀에게 옷 한 벌을 건네주었다."이거 입어.”"네.”그때 강하리의 팔뚝에 이미 붉게 물든 거즈가 구승훈의 눈에 띄었다. "간호사 불러올게, 이따가 약도 바꾸자.”강하리의 시선은 땅으로 향한 채 감사하다 인사를 전했다.구승훈은 그런 강하리를 한 번 쳐다보고는 침착한 얼굴로 밖으로 나갔다.구승훈이 간호사를 불렀을 때 강하리는 이미 옷을 다 입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머리카락은 축축하게 젖어 아직도 물이 침대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간호사는 병실로 들어오자 미간을 찌푸렸다."
구승훈이 이렇게 묻는 것은 그저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다.강하리는 눈을 내리깔고 자신의 감정을 애써 숨겼다."괜찮아요.”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사람 시켜서 드라이기를 보내라고 했는데 뭐 또 부족한 거 있어? 내가 사람을 시킬게.”"괜찮아요. 내일이면 퇴원할 수 있을 거예요.”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화장실로 들어가 수건을 가지고 나왔다."이리 와, 내가 머리 말려줄게.”강하리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거절했다. "아니예요. 제가 직접 닦으면 돼요.”구승훈의 얼굴은 또 어두워졌다."내 말 못 알아듣겠어?”강하리가 구승훈을 쳐다보자, 그의 얼굴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구승훈이 간호사가 한 그 말 때문에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강하리는 알고 있었다.강하리도 더 이상 다투기 귀찮아서, 순순히 의자에 앉았다.구승훈은 머리를 부드러운 손길로 살살 닦았다. 마침내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떨어지지 않자 구승훈은 한마디 했다."미안해. 방금은 내가 심했어.”미안하다는 말이었지만 강하리는 그의 말에서 조금의 미안함도 느끼지 못했다. 예상과 벗어나지 않게 구승훈은 곧이어 한마디 했다."하지만 내 탓으로 넘기면 안 되지. 사진이 그렇게 나오면 누구나 오해할 수 있으니 어. 강 부장이라면 이해할 수 있지?”강하리는 조용히 웃었다."대표님이 저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이 있었다면 묻지도 않고 바로 의심하지 않았을 거예요.”구승훈은 할 말이 없었다. 그는 확실히 강하리를 믿지 못했다.강하리는 외모가 출중했다.하필이면 권력도 없고 배경도 없으니, 그들의 세상에서는 이런 여자는 그저 노리개에 불과하다.하지만 구승훈은 한 번도 강하리를 노리개로 생각한 적이 없다.그와 그녀의 거래는 줄곧 공평했다.이런 돈 거래 중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것은 그 계약뿐이다.그런데 하필 강하리가 거듭 계약을 위반하고 구승훈의 마지노선을 건드렸다."강 부장, 불평해도 소용없어. 이 모든 것은 네가 그 임 변호사를 만나러 가서 생긴 일이야. 네가
구승훈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뭐야? 안 믿어?”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나 자신만 믿어. 이런 대답이라면 강 부장 마음에 들어?”구승훈이 진지하게 생각하고는 말했다.강하리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구승훈의 말은 송유라 마저 믿지 않는다는 뜻이었다강하리는 저도 모르게 손을 꽉 쥐었다. "그럼 송유라는요?”구승훈은 눈빛이 어두워졌다.강하리는 구승훈을 빤히 쳐다봤다.구승훈이 입을 떼려 하자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전담비서는 밖에 서서 구승훈에게 봉지를 건네주었다.구승훈은 나가 물건을 받고는 강하리에게 물건을 건넸다. "이리 와, 머리 말리자.”강하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소파에 앉아 구승훈이 머리를 말리도록 내버려두었다.머리를 다 말리고 나서야 구승훈이 입을 뗐다."유라는 나에게 특별한 존재야. 싫은 소리 듣고 싶지 않으면 두 번 다시는 유라와 비교하지 마.”강하리는 잠시 뜸 들이다 머리를 끄덕였다.그때 구승훈의 폰도 울렸다.송유라 전용 벨소리였다.강하리는 순간 몸에 힘이 쭉 빠졌다. "대표님, 일이 있으시면 먼저 가셔도 돼요. 저는 좀 쉬어야겠어요.”구승훈은 강하리를 슬쩍 보더니 말했다. "유라가 약을 바꾸러 병원에 왔대, 내가 같이 있어 줘야겠어.”"네."강하리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 위로 푹 올려 썼다. 구승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이불을 끌어 내렸다."피곤하면 좀 자. 난 약 바꾸는 거 보고 올게.”강하리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사실 구승훈과 강하리는 서로에게 별 믿음이 없었다.지금 구승훈이 하는 말도 그녀는 믿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말썽을 부려봤자 자신을 더욱 난처하게 만들 뿐이었다.구승훈이 떠난 후 강하리는 오히려 잠이 오지 않았다.그녀는 병실 안이 몹시 답답하게 느껴졌다.결국 옷을 입고 밖에 나가 돌아다니려 했다.그런데 병실 문을 나서자, 강찬수가 병실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있었다.순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강하리가 몸을
가서 팔찌를 가지고 백아영의 생일을 보낸 후 출국할 생각이었고 그 외 일은 지금 당장 처리할 기분이 아니었다.구승훈이 무슨 말을 하려는데 손연지의 집 밑에 우산을 쓴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주해찬이었다.비 오는 밤, 가로등에 반사된 남자의 모습은 약간 서늘한 기운을 풍겼다.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무척 적극적이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렬한 불빛이 주해찬에게 비추자 뒤를 돌아본 그가 구승훈의 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강하리를 발견했다.구승훈은 보지 못한 듯 강하리를 향해 걸어가는 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검은 우산이 머리 위로 드리워지며 주해찬의 낮은 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걱정돼서 보러 왔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난 괜찮아요. 걱정시켜서 미안해요.”그때 주해찬이 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하리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구 대표님.”구승훈은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인 뒤 가벼운 웃음을 내뱉으며 주해찬을 향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주해찬 씨가 뭐라고 저한테 감사 인사를 하는 거죠?”주해찬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하리의 선배로서요.”그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시간도 늦었는데 일찍 집에 가서 쉬어.”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해찬이 우산을 들고 건물 쪽으로 따라나섰다.구승훈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굴에 서리가 낀 것 같은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헤드라이트가 두 사람의 실루엣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비를 맞으며 우산 아래서 두 사람의 어깨는 단단히 맞닿은 것 같았다.건물 입구에 다다랐을 때야 강하리가 나지막이 말했다.“선배, 나 혼자 올라가면 돼요.”주해찬의 시선이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입술이 어딘가 부딪힌 것처럼 살이 갈라져 있었다.갈 때는 괜찮았는데 돌아올 땐 입술이 찢어진 채로 왔다.구승훈에 대한 강하리의 쌀쌀맞은 태도는 다 지켜보고 있었다.“구승훈이 강요했어?”주해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강하리는 몸이 굳어지더
한편 여초연은 거실 소파에 앉아있고 도우미가 옆에서 옷을 걸쳐주었다.“사모님, 시간이 늦었는데 일찍 쉬세요.”여초연은 밖의 하늘을 바라보다가 옷을 두른 채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승훈이는 요즘 어떻게 지내요?”도우미는 얼굴을 찡그렸다.“잘 지내지 못해요. 강하리라는 여자가 우리 집안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보세요. 어르신까지 들여보냈는데 큰 도련님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여자한테 홀딱 넘어간 게 틀림없어요.”여초연은 밖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앞으로 그런 말 하지 마요. 승훈이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내 며느리니까.”도우미가 입술을 달싹였다.“그래도 구씨 집안이 그 여자 때문에 이 모양이 됐잖아요!”SH그룹이 합병되면서 구씨 집안은 뿌리 없는 나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도우미들의 일자리도 위협받는 상황에서 정작 여초연은 조금의 초조함도 보이지 않았다.“게다가 큰 도련님도 그 여자 때문에 사모님께 화를 냈잖아요.”여초연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우산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따라오지 마요.”그녀가 속삭이자 도우미는 즉시 발걸음을 멈췄다.비 내리는 어느 날 밤, 검은색 승용차가 구씨 집안 저택에서 시내 반대편 목란정원을 향해 유유히 달렸다.목란정원은 여초연이 소유한 정원인데 그녀는 때때로 며칠씩 이곳에 오곤 했다.구승재는 그녀를 따라 목란정원 입구까지 갔다가 차를 멈췄다.그는 목란정원의 출입구를 바라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그동안 형의 지시로 구씨 저택에 머물면서 집안사람들을 돌보고 있었지만 사실은 여초연을 감시하는 것이었다.여초연의 차가 목란정원에 들어가는 것을 본 구승재는 휴대폰을 꺼내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고요한 밤, 구승훈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의 입술은 그녀의 귀에 닿은 상태였다.“전화 좀 받고 올게.”구승훈이 떠난 후 강하리 휴대폰도 울렸다.주해찬의 전화였다.“하리야, 비행기표 샀으니까 내일 데리러 갈게.”“그래요.
구승훈은 상처받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었다.“하리야, 넌 늘 그렇듯 매정하네.”강하리가 뒤돌아 휴대폰으로 택시를 부르려는데 구승훈이 그녀의 휴대폰을 움켜잡았다.“딱 하룻밤만. 너 안 건드릴게, 응?”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하리야, 내 소원 들어주는 거라고 생각해. 네가 이 집에서 아이와 함께 지내는 모습을 몇 번이나 상상했는지 몰라. 여기가 우리 집이야.”강하리의 코끝이 시큰거렸지만 그래도 결국 구승훈의 손을 뿌리쳤다.너무도 분명한 그녀의 거절에 구승훈은 답답한 가슴에 고통이 밀려왔고 쓴웃음을 짓던 그는 더 그녀에게 강요하지 않았다.“샤워하고 나오면 다시 데려다줄게.”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화장실로 들어갔다.구승훈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데 강하리는 통화 중이었다.발걸음이 멈칫한 그는 통화 상대가 주해찬이란 것을 알아차렸다.“선배, 전 괜찮아요.”“알았어, 항공편 예약해. 나도 같이 갈게.”강하리가 전화를 끊는데 구승훈이 갑자기 다가와 그녀를 껴안고 고개를 숙여 입 맞추었다.“구승훈!” 강하리는 그의 키스에 깜짝 놀라 그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구승훈은 점점 더 꽉 그녀를 붙잡았다.그는 강하리의 턱을 잡고 깊숙이 파고들며 조금의 부드러움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마치 화풀이나 비난하듯 키스를 퍼부었다.강하리는 벽에 단단히 밀려서 몸부림을 치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그녀가 다리를 들어 그의 아랫도리를 가격하려는데 구승훈이 먼저 그녀의 다리를 붙들었다.강하리가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구승훈의 키스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힘의 격차로 인해 그녀는 반격할 방법이 없었다.강하리는 화가 나서 얼굴마저 하얗게 질렸고 구승훈은 실컷 헤집어놓은 뒤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강하리가 그의 뺨을 때렸고 이내 구승훈의 얼굴엔 손자국이 생겨났다.그러나 그의 손가락은 키스로 인해 부어오른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하리야, 나 생각이 바뀌었어.”강하리가 멈칫했다.“무
그리고는 강하리를 곧장 차에 밀어 넣었다.차는 빗속을 뚫고 달려 나갔다.구승훈의 차는 굉장히 빨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시내를 벗어나 한 별장 앞에 멈춰 섰다.구승훈은 주차가 끝나자마자 차에서 내려 강하리를 빌라 안으로 끌어당겼다.빌라는 강하리가 선호하는 스타일로 안팎을 의도적으로 꾸몄다.안으로 들어선 강하리는 몸이 굳어버렸다.“여긴 내가 준비한 신혼집이야.”구승훈이 문득 등 뒤에서 이렇게 말했다.“결혼하면 여기서 지내려고 했어. 하리야, 정말 이대로 날 버릴 거야?”강하리는 꾸며진 방을 둘러보며 마음이 씁쓸했지만 애써 두 눈에 담기는 감정을 감추었다.“구승훈, 내가 그렇게 고통받는 걸 어떻게 지켜보기만 했어?”말문이 막힌 구승훈은 갑자기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미안해.” 남자의 목소리는 죄책감으로 가득했다.“다 내 잘못이야.”강하리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애쓰며 낮은 웃음을 지었다.너무 지쳤다.한때 열정적이었던 사랑이 이제는 고문처럼 느껴졌다.그날 구승훈이 아직도 자기를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강하리는 답을 알 수 없었다.어쩌면 오랫동안 사랑했던 남자일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미워하는 마음이 더 컸다.강하리는 구승훈이 진심으로 미웠다.그의 무자비함과 강압적인 성격이 싫었다.둘 사이에서 그는 항상 그녀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행동했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그래, 어쩌면 그는 그녀를 위해, 아이를 위해 그랬을 수도 있다.하지만 자신이 해준 것들이 그녀가 진정 원하는 것인지 물어본 적은 없었다.강하리가 발버둥쳤지만 구승훈은 더 꽉 끌어안았다.“구승훈, 그만하자.”구승훈의 목소리가 잠겼다.“그만하자니, 무슨 말이야? 하리야, 우리 사이가 이대로 끝날 것 같아? 문씨 집안도, 구씨 집안도 망했고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다 사라졌는데 이제 와서 그만하자고?”“우리 아이가 죽었잖아!”뒤돌아선 강하리의 눈엔 온통 고통만이 가득한 채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구
“어떻게 알았어?”구승훈은 웃으며 눈을 내리깔고 테이블 아래 두 사람이 잡고 있는 손을 바라보았다.“이상해?”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하리야, 내가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당연히 네 일에 대해선 다 알고 있지.”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손을 빼냈다.“그럴 필요 없어.”유난히 침착한 그 말이 구승훈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필요한지 아닌지는 네가 결정하는 게 아니야. 강하리, 내가 뭘 하든 그건 내 일이야.”강하리가 비웃었다.“하지만 난 이제 당신이랑 더 엮이고 싶지 않아.”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몇 마디 말로 두 사람 사이는 또다시 교착 상태에 빠졌고 일어나서 밖으로 나온 강하리는 그제야 휴대폰을 꺼내 안예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그녀는 최소한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는 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구승훈이 옆에 앉아있자 마치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던 치유할 수 없는 상처, 두 사람의 목숨이 다시금 떠오르는 듯했다.그녀의 어머니와 아이...강하리가 가정에서 나오는데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멍하니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데 문득 연정이가 사고를 당한 날 밤도 비 오는 밤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그날 밤이 어땠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연정이가 이렇게 비 오는 밤에 춥고 무서워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강하리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비를 바라보다가 눈가에 차오르는 시큰함을 꾹 참고 빗속으로 걸어가는 순간 머리 위로 드리워진 우산이 그녀를 덮었다.고개를 들자 미소를 머금은 주해찬의 눈동자와 마주쳤다.“그렇게 비속우로 달려가면 감기 걸리잖아.”강하리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우산 챙기는 걸 깜빡해서.”“왜 전화 안 했어?”주해찬의 우산은 완전히 그녀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내가 마침 저녁을 먹으러 오지 않았으면 이대로 비를 맞으며 돌아가려고 했어?”주해찬의 눈에는 나무람과 관심이 가득했고 강하리는 웃으며 시선을 다른 곳
B시 대양그룹.정양철이 사무실로 들어가니 이미 비서가 대기하고 있었다.“강하리 검색어는 어떻게 된 거야?”비서는 잠시 머뭇거렸다.“사모님께서 대양그룹 명의로 매수한 것인데 아마도 회장님을 시험하려는 의도 같습니다.”정 회장이 강하리를 아낀다면 이 일을 거론할 것이고 신경 쓰지 않는다면 하든 말든 넘어가겠지.정양철의 얼굴에 알 수 없는 표정이 스쳤고 그가 말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주현이 통해 강하리에게 연락해서 대양그룹이 JM과 함께 일하고 싶다는 말을 전하라고 해.”말을 마친 그가 멈칫했다.“집사람이 물어보면 강하리에 대한 보상이라고 하고.”비서의 눈이 번뜩이더니 대답을 마치고 자리를 떠났다.강하리는 정주현의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다.지난번 구승훈과 함께 대양그룹 입찰을 뺏은 이후 정양철 측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하지만 이번에는 정양철이 무슨 꿍꿍이로 합작을 원하는 건지 모르겠다.지금은 정양철을 상대로 놀아줄 기분이 아니었다.“정주현 씨, 대양그룹에서 마음만 먹으면 파트너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겠죠?”정주현은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듣고는 다소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강하리 씨, 우리랑 같이 일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강하리가 함께 일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려던 찰나, 정주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B시에 언제 와요? 얼굴 보고 얘기할까요? 협업 안 해도 오랜만에 얼굴 한번 봐요. 우리 안 본 지 오래됐잖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알았어요, 그럼 가면 연락할게요.”정주현이 전화를 끊자 사무실 앞에 서 있는 연미숙의 모습이 보였다.“엄마, 여기서 뭐 해?”연미숙이 웃었다.“우리가 강하리랑 같이 일해?”정주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아빠가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구씨 집안에 매달리는 게 아니라 밖으로 사업을 넓히려는 것 같아.”연미숙은 인상을 찌푸렸다. “꼭 강하리여야만 대외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거야?”정주현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강하리가 왜?”연미숙은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
구승훈은 차갑게 웃으며 자신도 모르게 핸들을 꽉 움켜쥐었다.그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두 사람이 차 안에서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모르겠지만 강하리의 얼굴에 번진 미소가 전혀 억지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화사한 아침 햇살 같은 그 미소가 구승훈은 왠지 모르게 눈에 거슬렸다.강하리는 차에서 내려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된 구승훈의 차가 보였다.그녀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었지만 시선을 돌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강하리가 안으로 들어간 후 주해찬은 차에서 내려 구승훈의 차 쪽으로 걸어갔다.그가 창문을 살며시 두드리자 구승훈이 창문을 내렸다.“구 대표님 시간 있으세요? 얘기 좀 할까요?”구승훈은 가볍게 웃었다.“주해찬 씨는 남의 연애에 참견하는 걸 좋아하나 봐요?”구승훈의 가시 돋친 말에도 주해찬은 계속 웃기만 했다.“구승훈 씨, 당신과 하리가 잘 지낸다면 나도 굳이 끼어들고 싶진 않은데 당신은 하리를 행복하게 해준 적이 있긴 한가요?”그의 말에 구승훈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그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들이마신 후 말을 시작했다.“주해찬 씨, 행복하든 아니든 그건 다 나와 강하리 사이의 일이지 당신이랑은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주해찬은 조롱 섞인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웃었다. “구승훈 씨, 내가 하리 데려간다고 했죠. 이번엔 말한 대로 합니다.”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다시 차로 향했다.구승훈의 얼굴에서 미소가 조금씩 완전히 사라진 채 떠나는 차를 바라보았다.그는 한참 동안 손에 쥔 휴대폰을 내려다보면서 결국 강하리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했다.[그 자식이랑 떠날 거야?]강하리가 위층으로 올라가는데 전화벨이 울렸고 그녀는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가 그냥 대화창을 닫아버렸다.구승훈은 전송된 메시지에 답장이 오지 않자 가벼운 웃음을 터뜨리며 입안의 쓴맛을 삼키고 휴대폰을 치우려던 찰나, 구승재의 전화가 걸려 왔다.“형, 큰어머니가 그
“죽기 전엔 안 해.”심준호는 인상을 찌푸렸다. “극단적인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구승훈의 손가락이 한참을 굳어 있다가 말을 꺼냈다.“안 해.”하고 싶었지만 그게 그녀를 더 멀리 밀어낼까 봐 더 두려웠다.심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 문제의 핵심은 아이였기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곧바로 아이 문제로 말을 돌렸다.“아이는 어떻게 된 거야? 문연진이 어떻게 아이의 존재를 안 거야?”구승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구승재가 통화하는 걸 들었어.”심준호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정말 문연진이 아니야?”구승훈은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그 여자가 아니야.”문연진은 이미 연정이를 죽였다고 인정했는데 굳이 연정이를 차로 치어 산에서 떨어뜨렸다고 말할 필요는 없었다.그녀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단 한 가지, 도중에 가정부가 연정이와 함께 차에서 내린 사실을 모른다는 것.“그럼 문연진 말고 또 아는 사람이 있어?”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여초연, 문연진 말로는 그날 밤 그 말을 들었을 때 마침 여초연이 그 자리에 있었다고 했어.”멈칫한 심준호의 눈에서 차가움이 번뜩였다.여초연이란 사람은 솔직히 줄곧 속내를 알 수 없었다.전에는 여러 번이나 구승훈을 죽이려고 했다가 지금은 무척 다정하게 굴었다.그 여자는 지금까지도 끔찍한 존재로 느껴졌다.“설마 그 사람이?”심준호는 문득 구승훈이 안타까웠다.정말 여초연이라면 구승훈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아직 확인하고 있어.”심준호는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만 해.”구승훈은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심준호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고 이 문제가 해결되었기에 그도 떠났다.심준호를 배웅하고 차로 돌아온 구승훈의 휴대폰이 울렸다.“형, 어제 강하리 씨 인기 검색어가 대양그룹과 관련이 있어.”구승훈의 눈에 냉기가 감돌았다.“최근 정양철 측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었어?”“아니, 이 검색어 말고는 그동안 잠잠했
강하리의 입꼬리가 굳어지며 다시 말하기까지 한참이 걸렸다.“고맙다고 전해주세요.” 심준호는 인상을 찌푸리며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한 대의 자동차가 도로변에 멈춰 서는 것을 목격했다.주해찬이 차에서 내려 이쪽으로 걸어왔다.심준호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이렇게 말했다.“직접 만나서 고맙다고 말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말을 마친 그는 강하리에게 눈썹을 치켜세웠고 강하리는 길 건너편에 주차된 너무나도 낯익은 차를 보았다.검은색 마이바흐 창문은 반쯤 내려져 있고 차에 탄 남자는 담배를 손에 쥐고 있었다. 멀리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구승훈이 이쪽을 보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그쪽을 힐끗 쳐다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그러면 나중에 메시지 보낼게요.”심준호는 웃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해찬을 바라보기만 했다.“그러면 그동안 잘 돌봐주세요.”주해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말을 마친 그가 강하리를 이끌고 나가려는 순간 갑자기 강하리의 손목이 잡혔다.어느 틈엔가 구승훈이 길을 건너 이쪽으로 걸어왔고 주해찬이 얼굴을 찡그리며 막으려는데 심준호가 옆에서 말렸다.강하리의 손가락이 살짝 조여졌다.“구승훈 씨, 이거 놔요.”구승훈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웃었다.“하리야, 이제 고맙다는 말도 안 할 거야?”강하리의 몸이 굳어지고 입꼬리가 몇 번 움직이다가 말을 꺼냈다.“고마워요.”말을 마친 그녀는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이제 놔줄래요?”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놓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나한테 꼭 이래야겠어?”강하리가 시선을 피했다.“구승훈 씨,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잖아요.”그가 원망스러웠다.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그를 보면 연정이가 생각난다는 사실이었다.숨도 쉴 수 없을 것만 같은 고통은 더 이상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구승훈은 차갑게 웃었다.“나도 놔주지 않겠다고 했잖아. 하리야, 얘기 좀 하자.”강하리의 눈이 빨개지며 입을 열자 목소리까지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