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속보입니다. 인기 무용가 장유연 씨가 한 남자와 호텔을 드나드는 모습이 포착되었습니다. 현재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으로 열애설이 제기되고 있는데...]

이은하는 뉴스를 듣고 고개를 들어 TV 화면을 보았다. 딱 봐도 그녀는 사진 속 남자의 뒷모습이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바로 고윤호, 은하의 남편이었다.

'쓰읍...'

은하는 손가락 끝에 베인 상처를 보며 손가락을 입으로 '후' 불었다.

다른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할 수 있지만, 은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어릴 적부터 자신이 사랑해왔던 사람이기에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은하는 최근 며칠 동안 윤호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윤호와 유연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반면 은하는 할아버지의 위독한 병세 때문에 마음 놓고 잘 수조차 없었다.

이때, 병실 문이 열렸다.

은하가 고개를 돌리자, 보름 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던 윤호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윤호는 은하를 흘끗 본 뒤 담담한 눈빛으로 병상에 누워 의식을 잃은 이기환을 쳐다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외국에 의사교수님과 연락했어. 내일 도착할 거야.”

“고마워요.”

은하는 고개를 숙이며 낮은 소리로 대답하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윤호는 그녀의 침묵이 의외였는지 시선을 그녀에게로 옮겼다.

그때 병실 TV에서 다시 뉴스 소리가 흘러나왔다.

윤호는 화면을 보지 않았다. 이미 봤던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윤호는 은하의 살짝 숙인 얼굴을 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의 어두운 눈동자는 윤하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꿰뚫듯 바라보았다.

“화났어?”

은하는 미세하게 떨리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봤다. 며칠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그녀는 더욱 야위어 보였고 얼굴은 아주 창백하게 보였다. 게다가 고개를 들어 윤호를 바라보는 모습은 한층 더 연약하고 애처로워 보였다.

‘내가 화낼 자격이 있을까?’

그의 말에 대답하고 싶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아니요...”

윤호는 은하의 연약한 모습에 어두운 눈빛을 보이더니 그녀의 턱을 조금 더 들어 올리며 부드럽고 매끈한 얼굴을 가볍게 손가락으로 스쳤다.

윤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어딘가 비웃는 듯한 느낌이 스쳤다.

“아니면, 표정 왜 이래?”

은하는 윤호의 성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분명 기분이 안 좋아진 것이다.

결혼한 지 3년 동안 은하는 항상 조심스럽고 순종적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온화하고 자상하며 한 번도 윤호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덕분에 윤호는 늘 은하에게 만족했고 둘의 결혼은 3년을 유지될 수 있었다.

윤호는 그녀의 붉게 물든 입술을 가만히 응시했다. 창백한 피부 위에서 더욱 선명하게 빛나는 붉은 빛이 마치 그에게 무언의 유혹을 던지는 것 같았다. 고요한 숨결 속에서도 그 입술은 도드라져 그의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그의 시선은 점점 깊어졌다. 손끝이 은하의 피부 위를 느긋하게 스치며 힘을 더했다. 은하는 미세하게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윤호의 눈빛은 짙은 안개처럼 가늠하기 어려웠다.

은하는 그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윤호의 목을 감싸며 눈을 감고 조심스럽게 윤호의 입술에 맞추었다.

윤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은하의 허리를 끌어안아 자신 쪽으로 당겼다. 한 손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고정하고 다른 손으로는 허리를 감싸 안았다.

윤호의 키스는 그의 성격처럼 너무나도 강압적이었다.

은하는 숨이 가빠졌고 옷매무새는 엉망이 되었다. 윤호의 손이 움직이는 것을 느낀 은하는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여기 말고 다른 데로 가요, 네?”

윤호도 은하가 무엇을 신경 쓰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윤호는 은하의 말에 따르며 그녀를 안아 옆 병실로 들어갔다.

한 시간이 지난 뒤, 은하는 얇은 이불을 덮은 채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욕실에서 나오는 윤호를 바라봤다.

윤호는 약간 흐트러진 셔츠 매무새를 정리하며 평소와 다름없는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방금 전 있었던 일들을 모른척하는 눈치였다.

반면 은하는 몸 전체 완전히 흐트러진 상태였다.

윤호는 셔츠 소매를 정리하며 그녀를 보며 말했다.

“집에 갈 거지?”

은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말하고자 했던 중요한 이야기를 잊지 않았다.

“윤호 씨, 할 말이 있어요...”

말이 채 끝내기도 전에 윤호의 핸드폰벨을 울렸다. 그는 화면을 확인한 후 전화를 받았다.

몇 초 만에 윤호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전화를 끊으며 방을 나가려 했다.

은하는 그의 반응을 보자 누가 걸어온 전화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기야, 나...”

은하는 그를 불러세우고 싶었지만, 윤호는 벌써 병실 문을 열고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수표는 조금 있다가 줄게.”

은하는 더 이상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한 시간 뒤, 윤호의 비서가 병실로 들어와 은하에게 수표를 건넸다.

“사모님께서 요구하신 수표입니다.”

은하는 착잡한 마음으로 수표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분명 부부였지만, 윤호는 그녀를 안은 대가로 수표를 가져다주었다.

이때 TV에서 또 다른 뉴스가 흘러나왔다.

장유연의 남자친구가 GN그룹의 대표인 고윤호라는 사실이 공개된 것이다.

윤호가 공항으로 달려가 유연을 직접 마중하며 기자들 사이에 갇힌 그녀를 데리고 나오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임정민 역시 뉴스를 보고는 은하를 힐끔 바라봤다.

“사모님, 이 수표...”

은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수표를 건네받았다. 그 미소는 단정하고도 담담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스쳐 지나가는 서늘함이 느껴졌다.

“술집에서 몸을 파는 여자가 된 기분이네요.”

임정민은 그녀의 말에 당황한 모습이었다.

은하가 아무리 무시당한다 해도 윤호의 합법적인 아내인 건 사실이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사모님은 고 대표님의 합법적인 아내이십니다.”

“제가 고윤호의 아내인 걸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정민은 침묵했다.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그는 핑계를 대고 자리를 떠났다.

은하는 손에 쥔 수표를 꼭 쥐며 전화를 걸었다.

“언니, 돈은 마련했어.”

핸드폰 너머의 사람은 잠시 침묵한 뒤 말했다.

[은하야...]

“응?”

[너무 힘들고 못 버티겠다면 그 사람과 헤어져도 돼. 언니는 언제나 네 편이야.]

은하는 순간 울컥하며 코끝이 시큰해졌다.

“응, 알겠어.”

할아버지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할아버지 안심시키기 위해 은하는 또다시 윤호에게 연락을 했다.

대부분 연락을 받지 않는 그였지만 이번엔 운 좋게 전화가 연결됐다.

[무슨 일이야?]

은하는 병상 위에서 미소 짓고 있는 이기환을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할아버지가 깨어나셨는데 병원에 한 번 와줄 수 있어요?”

[윤호야, 이거 어때? 예뻐?]

은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전화가 끊기자 그녀는 핸드폰을 꼭 쥐었다.

“은하야, 윤호가 많이 바쁘겠지?”

은하는 고개를 저으며 이기환의 마른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내일 온다고 했어요.”

이기환이 잠자리에 든 후에도 은하는 전화할 용기가 나지 않았기에 대신 문자를 보냈다.

윤호한테 내일 병원에 와달라고 부탁을 했지만, 아침부터 밤까지 기다려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기환의 걱정 어린 눈빛을 보자 은하는 눈물이 쏟아질까 두려워 핑계를 대고 병실을 나왔다.

은하가 단 몇 분이라도 좋으니 와달라고 애원했으나 윤호는 끝내 오지 않았다.

조금 뒤, 하이힐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은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장유연이었다.

유연은 빨간 원피스를 입고, 살짝 웨이브 진 긴 머리를 흔들며 우아하게 걸어왔다.

은하는 핸드폰을 꼭 쥐었다. 그녀는 유연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아마 유연 역시 은하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저 여자가 왜 병원에 온 거지?’

유연은 은하 앞에 서서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은하 씨. 저는 장유연이라고 해요. 절 아시죠?”

은하는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도발적인 미소를 보자 어이가 없었지만 웃을 수 없었다.

‘뭐 하려는 거지?’

유연은 은하의 반응에 전혀 개의치 않고 그녀를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

“윤호가 바빠서 대신 제가 할아버님을 뵈러 왔어요.”

그 말을 들은 은하는 모욕감을 느꼈다.

‘자기 대신 내연녀를 보내온 거야?’

은하는 창백해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가, 천천히 눈을 감고 나서야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필요 없으니 돌아가세요.”

유연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솔직하게 말해요. 윤호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야. 당신과 결혼한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그러니까 은하 씨, 자신의 자리를 알아차리고 더 이상 우리를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 알겠죠?”

은하는 심장이 조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러나 대답하기도 전에 병실 안에서 이기환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하야, 얘가 말하는 거 사실이니?”

은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황급히 돌아서며 말했다.

“할아버지, 아니에요...”

그러나 이기환은 감정이 격해진 바람에 쓰러져 버렸다.

“할아버지!”

은하는 의료진이 이기환을 응급실로 옮기는 것을 지켜보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만약 할아버지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재가 어떻게 해야 하지?’

3년 전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은하는 더 이상 소중한 가족을 잃을 수 없었다.

은하는 돌아서서 당황한 유연을 바라보며 그에게 한 대 갈기고 싶었지만, 막히고 말았다. 누군가 그녀의 손을 잡았고 세게 바닥으로 밀어버렸다.

“윤호야!”

은하는 윤호가 다른 여자를 옹호하는 모습을 보고는 단 번에 고개를 돌렸다.

‘이 세상에 나보다 비참한 사람이 있을까?’

윤호는 방금 전 장면을 목격하고는 본능적으로 은하를 막았다. 그러나 은하가 자기 때문에 쓰러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바닥에 앉은 은하의 얼굴은 창백했고, 두 눈은 붉어져 있었다. 마치 한없이 약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윤호는 다가가려 했지만, 옆에 있던 유연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윤호야, 은하 씨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닐 거야. 너무 화내진 마.”

은하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는 응급실 앞의 불빛을 쳐다보며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아니, 일부러 그랬어요.”

유연은 웃음을 참으려 애썼고, 윤호는 차갑게 은하를 바라봤다.

은하는 비웃는 듯 웃었다. 그녀는 자신의 심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동안 당신이 기르는 개로서 충분히 말 잘 듣지 않았어요?”

윤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

은하는 오랫동안 사랑해왔던 남자를 바라보았다. 한때 뜨겁게 타올랐던 마음은 이제 차갑게 식어, 완전히 무뎌져 있었다.

지나온 시간 동안 너무도 아프고 지쳐버린 은하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그녀는 꽉 쥐고 있던 주먹을 천천히 풀며, 마음속의 마지막 결심을 내뱉었다.

“고윤호 씨, 우리... 이혼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