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은 방금 자신이 한 질문에 대한 답을 예상했는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대표님, 혹시 사모님께서 아주 오래전부터 대표님을 좋아하셨던 건가요?”정민의 물음은 의문형이었지만, 이미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은하는 오래전부터 윤호를 좋아했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 정민은 윤호가 아무 말 없이 그 사진들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 그의 속마음을 전혀 읽을 수 없었다. 몇 년간 그의 곁에서 일해왔지만, 지금 이 순간 윤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래서 정민은 조심스럽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대표님, 이건 고등학교 몇 학년 때 사진인가요? 혹시 기억나시나요?” 누가 봐도 이 사진들은 모두 몰래 찍은 것들이었다. 사진 속 당사자인 윤호는 이런 사진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다. 윤호는 그 사진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침 삼켰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깊었다. “고1.” 정민은 그 말을 듣고 숨을 들이쉬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오래된 건가요? 그럼 거의 10년 전 일이네요!”정민은 사진 아래 놓여 있던 먼지로 덮인 일기장을 발견하고 말했다. “대표님, 여기에 일기장도 있는데 한번 보시겠어요?”윤호는 천천히 다가가 일기장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비밀번호 잠금장치가 있는 낡은 일기장이었다. 그는 잠금을 풀어 보려다 잠시 멈추고 정민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정민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은하의 생일이 언제인지 알아?”정민은 말문이 막혔다. ‘자기 아내의 생일도 기억 못 해서 비서한테 묻다니. 이러니 사모님께서 이혼하겠다고 하신 거지!’ 윤호의 날카로운 시선 속에서 정민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3월 3일입니다.”윤호는 0303을 입력해 보았지만, 잠금장치는 풀리지 않았다. 그는 점점 눈살을 찌푸렸다. 정민은 머뭇거리며 힌트를 던졌다. “대표님 생일을 한번 입력해 보시죠.”‘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열리자 정민은 속
“결국 제가 틀렸어요. 전 고 대표님의 마음에 다른 사람이 있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은하의 무모한 행동을 내버려 두었죠.” “무모한 행동?”윤호는 낮은 소리로 웃으며 되물었다. 그의 표정은 복잡한 심경을 감추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말하실 필요는 없지 않나요?”은주는 미소를 지으며 차분하게 테이블에 놓인 리모컨을 들어 올렸다. 그녀가 켠 TV 화면에는 은하가 대학 시절 환하게 웃고 있는 영상이 담겨있었다. 영상 속 은하는 천진난만한 모습과 밝은 표정을 가진 소녀였다. 윤호는 말없이 화면 속의 그녀를 응시했다. “이게 당신과 결혼하기 전의 은하예요. 밝고 활발한 아이였죠. 그런데 지난 3년 동안 저는 은하의 눈빛이 점점 흐려지고, 웃음도 사라져 가는 걸 발견했어요. 그걸 보면서 제 결정이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죠.”“고 대표님, 이 결혼은 은하에게 상처와 고통만을 가져다주었어요. 은하는 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저는 은하의 눈에서 진실을 알 수 있었어요.”“우리 가족의 소중한 아이가 이렇게 변한 건 제 잘못이에요. 제가 언니로서, 보호자로서 실패했어요.”은주는 영상을 껐고, 진지한 눈빛으로 윤호를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고 대표님께서 은하 말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은하의 진심을 생각해서라도 은하를 놓아주시면 안 될까요?”윤호는 그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은주를 바라보았다. 윤호의 눈빛은 깊고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은하는 위층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서둘러 내려가지 못하고 계속 불안한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불안한 이유를 명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녀가 멍하니 서 있는 사이,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은하는 본능적으로 침대 옆에서 벌떡 일어났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윤호였다. 그는 문을 닫고 잠갔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은하는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윤호는 한 걸음 한 걸음 은하에게 다
7월 1일, 맑음. 입학 첫날, 그 사람을 만났지만 안타깝게도 그 사람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어. 그래도 괜찮아. 같은 학교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쁘니까. 개학 첫날부터 기분이 너무 좋네. 이번 학기가 너무 기대되네!7월 16일, 흐림. 오늘 또 그 사람을 봤어. 하지만 난 몰래 숨을 수밖에 없었어. 왜냐면 한 선배가 그 사람에게 고백하고 있었거든. 그 사람은 고백을 거절하는 모습마저 왜 저렇게 상냥한 거지! 나도 나중에 고백했다가 차이기라도 한다면 엄청 속상하겠지.그래, 결심했어. 수능이 끝나면 고백할 거야! 9월 3일, 맑음 뒤 흐림. 한 달 넘게 그 사람을 보지 못했어. 외국에 유학을 가버린 거라네. 천재들의 뇌 구조는 어떻게 생겼을까? 그 사람은 나처럼 돈 내고 이 학교에 들어온 학생을 좋아해 줄까? 하지만 우리도 꽤나 어울리는 한 쌍이 될 수 있을 거야!그 사람은 재능이 넘치고, 나는 얼굴이 예쁘잖아. 그럼 엄청 완벽한 조합 아닌가?“풉.” 윤호는 그 일기를 읽으며 코웃음을 쳤다. 그는 일기를 통해 그동안 알지 못했던 은하의 활발하고 유쾌한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기억 속 은하는 항상 조용하고 온순하며, 때로는 지나치게 순응적이었다. 그런 은하와 이 활발하고 사랑스러운 소녀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윤호는 자기도 모르게 은하의 일기를 밤새도록 읽었다. 그리고 마지막 몇 장만 남았다. 6월 29일, 맑음. 오늘 내 인생에서 가장 대담한 결정을 내렸어! 그 사람을 성공적으로 유혹하게 되다니! 정말 꿈만 같아. 이제 그 사람과 곧 결혼하게 될 거야. LM그룹은 이제 구제받을 수 있으니 아빠와 엄마는 이제 안심해도 돼. 난 언니와 함께 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갈 거야. 그리고 곧 결혼도 할 거야! 사랑하는 아빠, 엄마. 하늘나라에서 나를 축복해 줄 거지?7월 8일, 맑음. 나 원하던 대로 결혼했어. 이제 행복할 거야.2월 26일, 소낙비
정민은 머리가 어지러워진 기분이었다. “대표님, 저는 정말 사모님께 어떠한 사사로운 감정도 없습니다. 그저 사실만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계속 말해 봐.” 정민은 이번 고비를 넘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결국 대충 둘러대기 시작했다. “사모님은 집안이 출중하시고, 외모도 아름다우시며, 성격도 온화하시죠...” “고작 그깟 이유로 이은하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 거야?” 정민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속으로 생각했다.‘사모님이 나쁜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결혼을 하지 않았을 거잖아. 모두 잘 알고 있으면서 왜 나한테 묻는 거야.’정민은 오랜 시간 윤호의 비서로 일해왔기에 윤호의 마음을 잘 헤아릴 수 있었다. “그리고 대표님에 대한 사모님의 진심은 10년간 한결같았습니다. 이런 감정은 정말 드물고 귀한 것입니다.” 역시나 예상대로, 이 말을 들은 윤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창밖을 쳐다보았다. 정민은 그제야 긴장이 풀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음에는 입 조심해야겠어. 이런 말 다시는 하지 말아야지. 에휴!’다른 한편, 은하는 은주를 대신해 계약을 하나 따낼 예정이었다. 회사 밖으로 나오자마자 누군가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이은하?”가방 속에서 차 열쇠를 찾고 있었던 은하는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정말 너구나, 이은하!” 은하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다가, 곧 남자를 알아본 듯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준영 선배?” 배준영은 환하게 웃으며 은하에게 다가갔다. “그래, 나야. 후배님이 나를 기억해 주다니, 정말 영광인데?” 대학 시절, 준영이가 자신을 여러 번 도와주었기에 은하는 그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농담에 은하는 살짝 쑥스러워하며 귀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말했다. “선배, 지금 절 놀리시는 거죠?” 준영은 그녀 뒤의 LM그룹을 보며 싱긋 웃었다. “뭐 하고 있었던 거야?” “요즘 언니 따라 일을 배우고 있었
은하는 윤호의 말이 진심인지 농담인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가 그렇게 유치한 사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은하는 손을 들어 헝클어진 머리를 다시 정돈하며 말했다. “핀 돌려주세요.” “지금이 좋아. 나는 이게 더 마음에 들어.” 은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고개를 돌려 윤호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불편해요. 핀 돌려주세요.” 윤호는 재미있다는 듯 은하를 바라보며 웃었다. “넌 이제 나한테 사사건건 말대꾸하는 거야?” 은하는 잠깐 멈칫하더니 차분하게 말했다. “듣기 싫으시다면 안 들으시면 되죠.” ‘어차피 만나지 않으면 그만이잖아.’윤호는 가볍게 웃으며 창문을 내리더니, 은하의 핀을 바깥으로 던졌다.“그래, 안 들을 거야.” 은하는 순간 눈을 부릅떴다. 그의 엉뚱한 행동에 화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고윤호 씨, 도대체 뭐 하는 거예요? 그건 제 물건이에요! 왜 당신 마음대로 버리는 건데요?” 윤호는 창문을 다시 올리며 느긋하게 대답했다. “이젠 말대꾸뿐만 아니라 나한테 소리도 지르네?” 은하는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당신이 먼저 제 물건을 멋대로 버렸잖아요.” “방금 네 말을 안 들어도 된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화를 내?”“당신!” 은하는 화가 난 마음에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가방에서 머리끈을 꺼내더니 서둘러 머리를 낮게 묶었다. 윤호는 조용히 그녀의 모든 동작을 지켜봤다. 예전에는 그저 스쳐 지나가던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전혀 달랐다. 병원에서의 일이 떠오르며, 지난 며칠 동안 참아왔던 욕망이 다시 살아났다. 특히 은하의 가녀린 목덜미를 보자, 그날 밤의 기억이 또렷이 떠올랐다. 윤호는 입가를 살짝 손으로 가리며 표정을 숨긴 채 고개를 돌려 시선을 의도적으로 다른 곳으로 옮겼다. 은하는 윤호를 힐끗 바라보다가 눈길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녀는 차 안에 놓인 서류 봉투에 적힌 단어를 보았다. 이혼.은하는 깜짝 놀
은하는 화장실 세면대 앞에 서서 조심스레 립스틱을 고쳤다.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방금 차 안에서 있었던 키스를 떠올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이혼 서류까지 준비해놓고, 왜 이런 식으로 애매하게 굴지?’ ‘날 정말로 우습게 보고 있나 봐.’“참, 나 며칠 전에 장유연의 공연을 보기 위해 H시에 갔었어! 와, 진짜 너무 예쁘고 춤도 엄청 잘 추더라.” “근데 나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봤는데, 장유연의 남자친구가 우리 G시 사람이래!” “G시 사람? 누군데? 왜 난 몰랐던 거지?” “누군가가 장유연의 남자친구가 자기 회사 대표랑 닮았다고 말했어. 고윤호 알지?” “그 사람, GN그룹 대표잖아? 그 소문 진짜야?” “그런 얘기가 돌고 있긴 한데 진짜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설마 거짓말이겠어? 두 사람 진짜 잘 어울릴 것 같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은하는 세면대에서 물이 흘러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두 사람이 화장실을 떠난 뒤에야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봤다. 은하는 눈을 감고 고개를 저으며, 더 이상 이런 일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은하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VIP룸의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와 여자를 합쳐 대략 열댓 명쯤 되는 듯했다. 은하는 그중에서 오늘의 목표를 단번에 찾아낸 뒤 다가갔다. “왕 대표님 안녕하세요. 저는 이은하라고 합니다. 이번에 이은주 대표님의 비서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왕이준은 은하를 보고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혹시 이 대표님의 동생이신가요?” “맞습니다.” 왕이준은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고, 그 눈빛 속에는 관심이 담겨 있었다. 은하는 그의 의도를 눈치채면서도 일부러 모른 척했다. 자신의 신분을 알게 된 이상 함부로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은하가
은하는 고개를 흔들고 싶었지만, 머리를 조금만 움직여도 어지러움이 몰려왔다. 경수는 은하를 가볍게 안은 뒤 룸 안의 사람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그녀를 데리고 나가려 했다. “엄, 엄 대표님...” 왕이준은 머뭇거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경수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차가운 한마디를 남겼다. “왕 대표, 조심해야 할 거야.” 왕이준은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의자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룸 안의 다른 사람들 역시 겁에 질린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숨죽였다. 윤호는 도착하자마자 바로 그 장면을 목격했다. 술에 취해 정신을 잃은 은하를 안고 나가는 경수와, 창백한 얼굴로 쩔쩔매는 왕이준. 윤호의 표정은 이미 검은 먹구름이 잔뜩 드리운 상태였다. 특히 은하의 취한 모습을 보자 그의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나한테 넘겨.” 윤호의 목소리는 차갑고 명령하는 듯했다. 경수는 눈썹을 살짝 찡긋거리며 아무것도 모르는 은하를 내려다보며 흥미로운 듯 말했다. “난 너랑 뺏고 싶은 생각 없어.” 윤호는 경수의 품에서 은하를 받아 안은 뒤, 침울한 표정으로 은하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분노와 실망이 뒤엉켜 있었다. 마치 당장이라도 그녀를 집어삼킬 듯한 날카로운 기세였다.경수는 옆에 서서 흥미로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오늘 자세히 보니 은하 씨는 정말 예쁘신 것 같아. 이렇게 예쁜 여자라면 누구라도 탐낼 만하지.” 그 말에 윤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경수를 노려보며 차갑게 대꾸했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경수는 눈썹을 찡긋거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왜? 내가 너랑 경쟁이라도 할까 봐 겁나는 거야?” 윤호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그는 경고하듯 날카롭게 말했다. “내 사람한테 손대지 마. 한 번만 더 그런 식으로 말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경수는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간만에 재미를 느낀 듯 장난스럽게 말했다. “네 사람
은하는 거친 숨을 내쉬며 윤호의 손을 뿌리쳤다. “제 일에 상관하지 말고, 이거부터 놔요!” 그녀의 저항에 윤호의 시선은 그녀의 쇄골에 드러난 붉은 자국으로 옮겨졌다. 윤호의 얼굴은 즉시 얼음장처럼 차가워졌고 눈빛은 날카롭게 변했다. “왜? 사모님 역할이 지겨워져서 고통스러운 생활을 체험해보고 싶은 거야?” 윤호는 그녀의 턱을 세게 움켜쥐며 얼굴을 가까이 했다. “오늘 내가 엄경수에게 너를 구하라고 하지 않았다면, 네가 어떤 꼴이 됐을지 생각은 해봤어?” 은하는 그의 말을 듣고 이성을 되찾았다. 그녀도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인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강경한 태도로 말했다. “제가 어떻게 되든,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윤호는 그녀의 고집스러운 태도에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이은하,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지?” 은하는 분통이 터질 것 같았다. ‘도대체 누가 뻔뻔하단 거야?’그러나 윤호는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또다시 차가운 말로 은하를 공격했다.“정신 좀 차려. 오늘 그 엄경수가 마침 그곳에 있지 않았다면 내가 도착했을 때쯤 넌 이미 그 사람들 손에 농락되었을 거야. 이은하, G시에서 내가 널 지켜주지 않는다면 네가 안전할 수 있을 것 같아? 이제 정신이 좀 들어?” 은하는 오늘의 사건에 대해 반박할 수 없었다. 입을 다물고 눈을 감자,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눈물이 윤호의 손등에 떨어지자 그의 몸이 순간 굳어버렸다. 윤호는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으며 조용히 은하를 쳐다보았다. 윤호는 그녀가 우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의 이기환이 병상에 누워있을 때도, 은하는 꿋꿋하게 버텼다. 그러나 은하의 눈물이 윤호의 마음을 흔들었다. 손등 위의 차가운 눈물이 마치 뜨거운 불씨처럼 그의 피부를 태우는 것 같았다. 작은 소리로 흐느끼는 은하의 모습에 윤호는 마음이 약해져 한숨을 쉬며 그녀를 가볍게 안았다. 차가웠던 그의 목소리가 조금
은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잠시 후, 그녀는 손에 든 계약서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걸 꺼내신 거죠?” 윤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무덤덤하게 답했다. “안 될 건 없잖아?” 은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차분하게 말했다. “당신은 장유연 씨와 바람을 피우셨잖아요. 안 그래요?” 윤호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바람? 내가 말했을 텐데, 내 여자는 너 하나뿐이라고.” “좋아요, 설령 선은 지켰다고 쳐요. 하지만 정신적 외도도 외도예요. 안 그래요?” 윤호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이렇게 말하는 건 결국 이혼하고 싶다는 거지?” 은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도덕적 선을 지켰다 해도, 전 당신 마음에 다른 여자가 있는 걸 받아들일 수 없어요. 당신 마음에 다른 여자가 있다는 걸 알았다면, 전 절대 먼저 결혼하자고 하지 않았을 거예요.” 은하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윤호뿐만 아니라 은하도 자신만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제 원칙은 분명해요. 다른 여자를 마음에 품고 있는 남자는 절대 가까이하지 않는 거예요.” 윤호는 그녀의 결심이 확고한 표정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신경 쓰였으면서...” 윤호는 은하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기며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지난 3년 동안은 어떻게 참은 거야?” 은하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당당히 그의 눈을 마주쳤다. “당신 말이 맞아요. 제가 늘 참아왔었거든요. 하지만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어서 끝내려는 거예요. 이 정도면 이혼 사유가 됐나요?” 윤호는 그녀를 잠시 쳐다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계약이 있는 한, 내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넌 이혼할 수 없어. 이은하, 현실을 받아들이는 게 좋을 거야. 내일 밤, 이 집으로 돌아와야 할 거야. 안 그러면 내가 직접 이씨 저택에 찾으러 갈지도 몰라.” 은하는 손에 쥔 계약서를 꽉 움켜쥐었다. 과거엔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계약이
은하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소파에 앉아 있는 윤호를 발견했지만,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 “거기 서.” 은하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윤호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디 가려고?” 은하는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저녁 8시가 다 되어 밖은 매우 어두웠다. “집으로 돌아갈 거예요.” 윤호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여기가 네 집이야.” 윤호의 말을 들은 은하는 이 집을 한동안 둘러보았다. 그녀가 지난 3년 동안 애정을 쏟아 관리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은하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윤호를 보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때 저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아니라고?” 윤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은하에게 다가섰다. 그는 고개를 숙여 차분한 표정으로 은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이 집은 뭔데?” 은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담담히 말했다. “당신에겐 호텔, 그리고 나에겐 감옥.” 윤호는 그녀의 대답에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참, 잘도 비유를 하네.” “사실이니까요.” 은하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돌아서려 했지만, 윤호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다시 돌아와.” 은하는 그의 품에서 몇 번 몸을 비틀며 벗어나려다 포기하고, 그의 가슴에 반쯤 기댔다. “돌아오라고요? 계속 당신 집을 지키는 개라도 되라는 건가요?” 윤호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감싸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날 좀 그만 세우면 안 될까?” 은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안 돼요. 절 지키기 위한 것이니까요.” 윤호는 그녀를 몇 초간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은하는 잠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럼 저를 놓아주세요.” 윤호는 이번에 진짜로 그녀를 놓아주었다. “내일 당장 짐을 싸서 이사 와.” 은하는 미간을 찌푸리며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아직도 제 말을 이해 못
장옥순은 한참 동안 넥타이를 풀려고 애썼지만, 전혀 풀리지 않았다. “어머, 이거 참 이상하네요. 왜 이렇게 안 풀리는 거죠?” 은하는 점점 더 세게 조여오는 넥타이에 손목의 통증을 느낀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주머니, 그만하세요. 제 화장대에 눈썹칼이 있으니, 그걸로 잘라버리세요.” “네, 바로 가져올게요.” 장옥순은 눈썹칼을 가져와 넥타이를 조심스럽게 잘라냈다. 은하는 손목을 돌려가며 뭉친 근육을 풀고,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한편, 장옥순은 아무렇지 않은 듯 숙련된 손길로 침대 시트를 바꾸려했다. 매번 두 사람은 시트를 더 이상 쓸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번엔, 시트가 의외로 깨끗했다. 단지 약간의 구김만 있었을 뿐, 다른 흔적은 전혀 없었다. 장옥순은 의아한 마음에 눈을 깜빡이며 욕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 그 분위기로 봐선 꽤나 난리였을 텐데, 왜 이렇게 깨끗한 거지?’ 장옥순은 두 사람이 함께 한 시간을 떠올리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설마... 이렇게 빨리 끝난 건가?’ 장옥순은 순간적으로 무언가를 깨달은 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치 엄청난 비밀을 알아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장옥순은 얼른 새로운 시트를 다시 내려놓고, 사용했던 시트를 정리하는 데에 그쳤다. 욕실에서 나온 은하는 찢어진 옷을 보며 한숨을 쉬고, 옷장을 열어 아무 옷이나 꺼내 입었다. 옷을 갈아입은 그녀는 방 중앙에 놓인 3미터짜리 침대를 바라보았다. 그 침대를 보자, 과거 결혼 초기의 기억이 떠올랐다. 윤호는 신혼 첫날밤, 집에 없었지만 그 뒤로 한 달 동안은 매일 집에 돌아왔다. 은하는 나중에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방옥자가 내린 엄격한 지시 때문이었다. 방옥자는 신혼 첫날밤, 일을 핑계로 아내를 홀로 두고 떠난 윤호의 행동에 화가 잔뜩 났었다. 그래서 이런 지시를 내려 은하를 보상해주려 했다.고씨 가문에서는 윤호와 유연의 일에 대
“제가 거부하는 걸 강제로 하시는 건 강간이나 다름없어요. 고윤호 씨, 당장 이거 놓으라고요!” 은하에게 있어서 손목이 묶인 건 매우 모욕적이었다.그녀의 눈은 분노로 붉게 물들었고 당장이라도 윤호를 물어뜯을 기세였다.윤호는 그녀를 눌러 제압하며 비웃듯 말했다. “내가 보기에 말과 행동이 다른 것 같은데?” 은하의 얼굴은 붉어 오르더니 곧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늘 윤호의 이런 모습을 감당할 수 없었다.은하는 분노와 수치심에 휩싸여 소리쳤다. “닥쳐요!” 윤호의 미간에 잠시 짜증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낮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경고했다. “다치고 싶지 않으면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야.” 그의 말에 은하는 공포와 불안감이 들어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외쳤다. “싫어요! 당장 이거 놔요! 이거 놓으라고요!” 은하는 정말 겁을 먹게 되었다. 윤호가 자기를 때린다고 해도, 은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도저히 그를 이길 수 없었다. 은하는 입술을 깨물며 버텼다. 그러나 윤호의 손이 멈추더니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은하 또한 긴장한 채 몸을 굳혔다. 그녀는 뭔가를 발견하게 되었다. 결혼한 지 3년. 은하는 이제 더 이상 순수한 소녀가 아니었다. 방 안은 갑자기 적막으로 가득했다. 윤호의 표정은 차갑고 어두웠다. 그의 눈동자에 스쳐 지나가는 복잡한 감정들이 마치 그를 더욱 깊은 어둠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은하를 내려다보며 손길을 멈췄다. 은하는 움츠린 채 작은 동물처럼 떨고 있었다. 윤호는 그녀를 뒤집어 눕히며, 은하의 놀란 표정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녀의 놀란 표정은 윤호의 얼굴을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네...’은하의 생각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고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향했다. 윤호는 이 모든 것을 보자 화가 폭발하기 직전까지 치달았다. 그는 머리가 욱신거리며 터질 것만 같았다. 윤호는 은하의
은주는 윤호가 자신의 동생을 차에 태워 떠나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고개를 돌려 차갑게 장유연과 소녀들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형사님, 제 동생의 의사는 이미 명확히 전달되었습니다. 합의할 생각은 절대 없으니 법에 따라 잘 좀 처리해 주세요.”경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유연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고, 유나는 불안에 휩싸였다. “언니!” 유연은 답답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꺼내 윤호에게 전화를 걸려 했지만, 정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유연 씨, 지금은 전화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유연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하지만...” 정민은 한숨을 내쉬며 설명했다. “대표님께서 지금 화가 많이 나 계십니다. 자칫하면 불통이 튈 수도 있어요. 게다가 진짜 처벌을 받는다 해도, 대표님께 다른 방법이 있으실 겁니다. 대표님을 믿으세요.” 유나는 초조한 눈빛으로 윤호와 은하가 떠난 방향을 바라봤다. 당사자도 떠났으니 더 이상 합의는 불가능했다. 결국 유연은 유나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유나야, 걱정하지 마. 언니가 반드시 해결해 줄게.” “정말이에요?” “언니를 믿어.” ...윤호는 은하를 강제로 차에 태운 뒤 운전대를 잡았다. 그가 향한 곳은 은하도 이미 알고 있는 그들의 별장이었다. “멈춰요. 멈추라고 했잖아요, 내 말 안 들려요?” 은하는 분노와 절망이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윤호는 문과 창문을 모두 잠갔기에, 은하는 차에서 뛰어내릴 수조차 없었다. 그의 오른쪽 얼굴에는 선명한 손자국이 남아 있었고, 각진 턱선은 굳어 있었다. 그리고 드러난 손등의 힘줄은 그가 얼마나 분노에 차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은하가 뭐라 말하든 윤호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차를 몰았고, 마침내 별장에 도착했다. 윤호는 은하를 차에서 끌어내며 낮고 말했다. “그렇게 힘이 남아돌아? 그럼 이따가
유나는 당황한 듯 흔들리는 눈빛으로 유연을 바라봤다. “언니, 얘네들도 모두 언니의 팬들이야!” 유연은 그깟 몇 명 안 되는 팬들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아직 팬들의 지지가 필요했기에 이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만약 자신이 이 소녀들을 경찰서에 내버려뒀다는 소문이 퍼지기라도 한다면, 분명 많은 팬들이 돌아설 것이다. “윤호야, 이 아이들은...” 그러나 은하는 갑자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들으셨죠? 주모자가 밝혀졌으니, 공범들은 용서해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의 주모자에게는 반드시 책임을 물을 겁니다.” 유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이 멍청이들!’ “언니!” 유나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유연의 팔을 꽉 붙잡았다. 은하는 더 이상 경찰서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고윤호 씨, 이거 놓으세요. 전 더 이상 당신과 할 말이 없어요.” 윤호가 그녀를 막아섰던 순간부터... 아니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은하는 이혼을 결심하고 있었다.윤호는 그녀의 단호한 말투에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난 할 말이 있어. 대체 어디 가려는 거야?” “이거 놔요!” 은하는 윤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지만, 윤호는 이마에 핏줄을 세우며 그녀를 강제로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고 대표님, 당장 놔주세요! 은하가 싫다고 말했잖아요!” 은주는 얼굴이 새파래지며 소리쳤다. 윤호는 그녀를 차갑게 쳐다보며 경고했다. “이 대표님은 저를 적으로 둘 생각인가요?” 그 말은 분명 협박이었다. 은주는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절 협박하는 겁니까?” 바로 그때, 은하가 손을 들어 윤호의 뺨을 세게 때렸다. “은하야!” 예상지도 못 한 상황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정민조차 눈을 크게 뜨며 긴장된 표정으로 은하의 손을 쳐다보았다. 유연도 깜짝 놀라더니 곧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이은하 씨,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유연은 윤호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그가 차가운 목소리
은주가 차가운 표정으로 무언가를 말하려는 순간, 은하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고개를 돌려 은하를 바라보자, 은하는 차분한 태도로 자신의 사건을 책임 진 경찰에게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합의할 생각 없습니다.” 경찰은 은하의 말을 듣고 잠시 시선을 소녀들에게로 옮겼다. 원래는 합의 시키려고 했지만, 은하의 차가운 눈빛을 본 뒤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유연 언니, 제발 좀 도와주세요. 저희는 단지 언니를 위해 복수한 거였어요. 이 여자가 언니를 밀었으니까...” 그러나 은하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은주의 팔짱을 끼고 부드럽게 말했다. “진술은 끝났으니, 집에 가자.” 유연은 점점 초조해지며 윤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윤호야...” 윤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냥 법대로 처리해. 처벌도 그렇게 심각하진 않을 거야.” 이 말을 듣자 유연의 마음은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녀도 팬들이 신경 쓰인 것이 아니었다. ‘이은하를 위해 내 체면을 깎아내린 거야?’‘도대체 왜? 이번은 처음이 아니잖아!’은하가 정말로 떠나려 하자, 갑자기 한 소녀가 불안한 목소리로 외쳤다. “사촌 언니!” 유연은 그 소녀를 쳐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중에 그녀의 사촌 동생도 있었던 것이다.그렇다면...유연은 윤호의 팔을 붙잡으며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윤호야, 저 아이 이름은 장유나야. 사실 내 사촌동생이거든.” 예상대로 윤호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그의 시선은 유나의 겁에 질린 얼굴로 향했다.은하와 은주가 경찰서를 나서려던 순간, 윤호는 은하의 팔을 붙잡았다. 은하는 멈춰 서서 윤호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의 검은 눈동자 속에 담긴 차가운 기운에 은하의 심장이 잠시 움츠러드는 듯했다. 윤호는 그녀의 표정이 점점 더 냉랭해지는 것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한숨을 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만 그냥 넘어가주자.” 은주는 그 말을 듣자 얼굴이 순식간에 차가워지더니 쏘아
사실 정민이 가장 먼저 빨간색 BMW를 발견했지만,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윤호는 그 차를 몇 초간 쳐다보다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은하는 어느새 시선을 돌려 조용히 윤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윤호는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은하가 먼저 입을 뗐다. “놓아주세요.” 윤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왜 놓아야 하지?” 은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누가 보면 속상해할 테니까요.” 은하는 고개를 돌려 경찰서 입구를 바라봤고, 곧 계단 위에 서 있는 장유연을 발견했다. 유연은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은하는 윤호의 손을 세게 뿌리치며 놓아버렸다. 그러자 윤호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또...” “윤호야...” 유연이 입을 열자, 은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장유연과 스쳐 지나가면서도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장유연은 그녀에게 있어서 공기 같은 존재였다. 어디에나 있지만, 너무 흔해서 특별할 것도 없는 그런 존재였다. 유연은 은하가 자신을 무시한 것에 화가 났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며 윤호를 바라봤다. 윤호는 은하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다가, 은하에게 뿌리쳐진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장유연 쪽으로 걸어갔다. “윤호야, 두 사람이 왜...”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유연은 당황한 표정으로 윤호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을 반기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왜일까? ‘혹시 내가 저지른 일이라고 오해한 걸까?’“윤호야, 설마 내가 저지른 일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윤호는 그녀를 차갑게 쳐다보며 대답했다. “아니라는 거 알아.” 유연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그녀의 표정은 한층 부드러워졌다. “나도 방금 알게 된 일이야. 그래서 너한테 전화했는데, 네가 하도 안 받
그러나 은하가 전화를 끊자마자 윤호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번호를 확인한 뒤 전화를 받지 않고 주머니에 넣으려 했다. 그러나 마침 은하의 차가운 시선과 마주쳤다. 은하는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곧바로 고개를 돌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은하는 의자에서 일어나 말없이 문 쪽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윤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얼굴을 굳히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디 가려고?” 은하는 그를 담담히 쳐다보며, 그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힐끗 보고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당연히 경찰서죠. 같이 가실래요?” 윤호는 순간 멈칫했다. 오랜만에 본 그녀의 미소였다. 윤호는 그녀의 손목을 잡은 채 엄지로 천천히 그녀의 손목을 문질렀다. “내가 같이 가줬으면 좋겠어?” 은하는 입을 오므리며 담담한 말투로 대답했다. “마음대로 하세요.” 윤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고, 곧 그녀의 손목을 잡던 손을 놓고 깍지를 꼈다.“같이 가줄게.” 은하는 입술을 오므린 채 저항했다.“이거 놓으세요. 전 혼자 걸을 수 있어요.” “난 손을 잡고 있는 게 좋아.” 그의 이 말에 은하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윤호는 고개를 약간 숙이며 그녀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리고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왜 그래?” “예전엔 제 손을 잡는 걸 싫어했잖아요.” 윤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은하의 말처럼,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다녔던 기억은 거의 없었다. 윤호는 자기도 모르게 눈빛이 깊어졌다. “앞으로는 계속 잡을 거야.” 은하는 그의 말을 듣고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더는 상관없는 일이었다.예전에 언제나 은하가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그를 바라보았지만, 윤호는 단 한 번도 뒤돌아서서 은하를 본 적이 없었다. 만약 윤호가 한 번이라도 돌아보았다면, 어쩌면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윤호가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기에 은하의 마음이 완전히 식어버린 것이다. 윤호가 전과 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