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은하는 화장실 세면대 앞에 서서 조심스레 립스틱을 고쳤다.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방금 차 안에서 있었던 키스를 떠올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이혼 서류까지 준비해놓고, 왜 이런 식으로 애매하게 굴지?’

‘날 정말로 우습게 보고 있나 봐.’

“참, 나 며칠 전에 장유연의 공연을 보기 위해 H시에 갔었어! 와, 진짜 너무 예쁘고 춤도 엄청 잘 추더라.”

“근데 나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봤는데, 장유연의 남자친구가 우리 G시 사람이래!”

“G시 사람? 누군데? 왜 난 몰랐던 거지?”

“누군가가 장유연의 남자친구가 자기 회사 대표랑 닮았다고 말했어. 고윤호 알지?”

“그 사람, GN그룹 대표잖아? 그 소문 진짜야?”

“그런 얘기가 돌고 있긴 한데 진짜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설마 거짓말이겠어? 두 사람 진짜 잘 어울릴 것 같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은하는 세면대에서 물이 흘러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두 사람이 화장실을 떠난 뒤에야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봤다.

은하는 눈을 감고 고개를 저으며, 더 이상 이런 일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은하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VIP룸의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와 여자를 합쳐 대략 열댓 명쯤 되는 듯했다.

은하는 그중에서 오늘의 목표를 단번에 찾아낸 뒤 다가갔다.

“왕 대표님 안녕하세요. 저는 이은하라고 합니다. 이번에 이은주 대표님의 비서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왕이준은 은하를 보고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혹시 이 대표님의 동생이신가요?”

“맞습니다.”

왕이준은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고, 그 눈빛 속에는 관심이 담겨 있었다.

은하는 그의 의도를 눈치채면서도 일부러 모른 척했다. 자신의 신분을 알게 된 이상 함부로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은하가 일을 하기로 결정한 이상, 될수록 빨리 이런 업무에도 적응해야 했다. 그녀는 일을 빨리 끝내고 자리를 뜨고 싶었기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왕 대표님, 이것은 저희 회사와 재계약하실 계약서입니다.”

은하가 계약서를 내밀자 왕이준은 그것을 받아들고는 옆에 두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계약은 서두르지 마시죠. 이 비서님, 식사는 하셨나요? 안 하셨다면 여기 앉아서 같이 드시죠.”

왕이준은 옆 사람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고, 옆에 있던 여자가 즉시 자리를 비키며 은하를 강제로 자리에 앉혔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은하는 그제야 왕이준이 무엇을 노리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룸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의 속내를 모두 눈치챘다.

몇몇은 왕이준을 기쁘게 돕기 위해 술잔을 채워 은하에게 건넸다. 술에 취하면 일이 쉬워지기 때문이다.

“우리 예쁜 이 비서님, 비즈니스 자리에서 술을 안 하면 분위기가 깨지기 마련이죠. 자, 어서 한 잔 받으세요!”

은하는 술을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늘 보호받으며 살아왔기에 이런 자리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은하는 이런 자리에서 거절하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왕이준을 똑바로 쳐다보며 차분히 말했다.

“왕 대표님, 제가 이 술을 마시면 계약서에 서명해 주실 건가요?”

왕이준은 은하가 순수하고 술을 마셔본 적이 없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다.

지금의 LM그룹이 왕씨 가문보다 뒤떨어졌기에 그가 이렇게 거만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건 이 비서님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죠.”

그가 말을 마친 후, 옆에서 누군가가 술잔 두 잔을 더 채웠다.

은하는 세 잔의 술을 보며 불안한 마음에 잠시 머뭇거렸다.

‘술을 마시고 나면 어떻게 될지 몰라... 하지만 피할 수는 없겠지.’

은하는 한 손으로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다른 손으로 술잔을 들어 올렸다.

“좋아요.”

왕이준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쳤다.

“좋아요, 역시 이 대표님의 동생답게 대담하시네요!”

은하는 천천히 술을 마셨다. 술은 매우 독했기에 한 모금만 마셨을 뿐인데 그녀의 눈이 붉어졌다.

왕이준은 그녀가 술을 잘 못 마신다는 것을 눈치채며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천천히 드세요, 천천히.”

왕이준의 손이 은하의 등에 닿자 은하는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 그녀는 눈물이 날 듯한 쓰라림을 참으며 술잔을 비웠고, 두 번째 잔을 집어 들었다.

“왕 대표님, 제가 진심을 보여드렸으니 이제 계약서에 서명해 주실 거죠?”

술을 마시자 은하의 눈빛은 촉촉하게 빛났고, 붉어진 뺨은 룸 안의 모든 남성을 매료시켰다.

룸 안의 남자들은 은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누군가는 침을 삼켰다.

왕이준은 은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은하를 끌고 호텔로 가고 싶었다.

“좋아요, 좋아요. 서명할 테니 이 잔도 얼른 마셔요.”

은하는 그가 계약서에 서명하는 것을 직접 확인한 뒤, 재빨리 서류를 가방에 넣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메스꺼웠지만 이를 악물고 나머지 한 잔을 비웠다.

“술 다 마셨으니 전 이제 그만 가보겠습니다.”

은하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왕이준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 비서님, 어디 가시려는 거예요?”

“이거 놔요!”

왕이준은 은하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비웃듯 속삭였다.

“순진한 척은 이제 그만해. 아직도 LM그룹이 예전 같다고 생각해? 날 제대로 기분 좋게 만들어주면 원하는 건 뭐든...”

“짝!”

은하는 그의 뺨을 힘껏 때렸다. 룸 안의 사람들은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 비서님은 보기와는 달리 아주 화끈하시네요!”

왕이준은 어두운 표정으로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때리려 했으나 그녀의 예쁜 얼굴을 보며 손을 멈췄다. 그러나 왕이준은 곧 은하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감히 날 때려? 내가 널 가만둘 것 같아?”

왕이준은 은하를 의자에 앉혔다. 의도는 매우 분명했다. 룸 안은 순식간에 환호하는 소리로 가득 찼다.

“이거 놔요, 안 그러면 신고할 거예요! 당장 놔요!”

은하는 술기운이 올라 힘이 잔뜩 빠지고 말았다. 왕이준이 계속해서 그녀를 덮치려 하자 은하는 왕이준의 손목을 세게 깨물었다.

“아악!”

은하는 온 힘을 다해 그를 밀어내고는 휘청거리며 도망쳤다. 그러나 의자에 부딪히는 바람에 평형을 잃고 더 이상 일어나지 못했다.

“X발, 내가 이 년 옷을 모조리 벗겨버릴 거야!”

“왕 대표, 얼른 벗겨버려!”

바로 그때, 룸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왕이준은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아첨하는 표정을 보였다.

“엄 대표님께서 어쩐 일로 오신 거죠?”

엄경수는 룸 안을 둘러보더니 바닥에 쓰러진 은하를 발견했다.

곧 그의 눈빛이 차갑게 바뀌었다.

“네가 이 여자 건드렸어?”

왕이준은 당황한 마음에 허둥댔다.

“혹시 엄 대표님의 여자인가요?”

“아니.”

왕이준과 룸 안의 사람들이 안도하려는 찰나, 경수가 덧붙였다.

“왕 대표, 사람을 잘못 건드렸어.”

룸 안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경수는 몸을 숙인 뒤, 은하를 부드럽게 부축했다. 그는 은하가 술에 취했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은하 씨,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