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은주는 은하가 손에 몇 장의 종이를 꼭 쥐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집에 도착한 뒤, 은주는 그녀가 들고 있던 종이가 무엇인지 확인했다. 그것은 찢어진 이혼 협의서였다. 은주는 그 조각을 하나씩 맞추며 읽어 내려갔다. “은하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 이혼 협의서는 왜 이렇게 된 거야?” 은하는 거실 소파에 조용히 앉아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겠어.” 그리고 찢어진 협의서를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 나를 가지고 놀려던 거겠지.” 그러나 은주의 생각은 달랐다. 협의서의 내용을 읽어본 그녀는 그 조건들이 윤호가 직접 작성한 것임을 알아차렸다. 윤호가 이혼에 동의하지 않았다면 이런 조건을 넣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 협의서는 찢겨졌고, 사인도 하지 않았으니 다시 붙여도 쓸모가 없었다. “오늘 정말 많이 힘들었지?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푹 쉬어.” 은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계단을 오르기 전에 문득 멈춰 서서 물었다. “언니, 내가 정말 그렇게 못난 사람인가?” 은주는 그녀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니. 넌 누구보다 용감해.” 두 자매는 몇 초간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침대에 누운 은하는 뒤척이며 잠들지 못했다. 평소라면 윤호와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렸을 텐데,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결국 잠을 설치게 되었다.한편, 윤호는 밤늦게서야 일을 마쳤다. 그는 친구로부터 온 전화를 받고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안쪽에 앉아 있던 경수와 송유준이 그를 쳐다보았다. 유준은 경수 쪽으로 고개를 돌려 손바닥을 내밀었다. “내가 이겼으니 돈 내놔.” 경수는 눈썹을 찡긋거리더니 가방에서 카드를 꺼내 유준에게 건넸다. 윤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들을 바라봤다. “나를 가지고 내기를 한 거야?” 그는 소파에 앉아 술
다음 날 아침, 은하는 이씨 저택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은하가 무거운 표정으로 전화를 끊자 은주가 걱정스레 물었다. “네가 이혼하려는 걸 고씨 가문에서 알고 있는 건 아니지?” 은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직 몰라.”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인데?” 은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시어머니는 차가워 보이시지만 그렇게 나쁜 분은 아니셔. 그런데 할머니는 정말 잘해주셨어. 그래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은주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제안했다. “언니가 같이 가 줄까?” 은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 오늘 회의 두 개 있다고 하지 않았어? 혼자 가도 돼.” “그래, 알았어.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전화해.” “응, 알겠어.” ...점심 무렵, 은하는 고씨 저택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김미영이 그녀를 멀찍이서 바라보고 있었다. 은하는 조용히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어머님...” 김미영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눈썹을 찌푸렸다. “얼굴이 왜 이 모양이야?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은하는 자신의 상태가 나쁘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그렇게 몸이 약해서 어떻게 아기를 낳겠어? 주방더러 몸에 좋은 보양식을 준비하라고 할 테니 가져가.” 은하는 습관적으로 순종적인 태도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미영은 그녀의 나약한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은하야, 윤호의 마음을 붙잡으려면 아이부터 낳아야 해.” 이런 말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은하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집 안에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하야, 왔어? 어서 들어와.” 은하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네, 할머니. 저 왔어요.” 김미영은 그제야 은하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들어가 봐.” 방옥자는 은하를 반갑게 맞이하며 주방더러 그녀가 좋아하는 요리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윤호는 늘 가정에 무관심했
윤호의 얼굴은 그의 아버지 고성태의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올해 60세가 된 고성태는 여전히 미남으로 불릴 정도였다. 그러나 김미영은 그런 윤호를 보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넌 네 아빠 손톱만큼도 따라잡을 수 없어.” 윤호는 말문이 막혔다.G시에서는 고성태가 얼마나 유명한 애처가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예전에 김미영을 아내로 맞아들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소문까지 있을 정도였다. 이때 방옥자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러게 말이다. 우리 고씨 가문의 자식들은 왜 점점 못나지는 걸까!” 윤호는 웃으며 은하를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할머니, 이제 손주며느리가 있으니까 손자는 필요 없다는 거예요?” 방옥자는 은하의 손을 잡으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우리 손주며느리가 훨씬 낫지. 너랑 비교할 것도 없어!” 윤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보다 훨씬 낫죠.” 김미영은 윤호의 말을 듣고 약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 둘 사이에 무언가 일이 있었음을 직감했다. 방옥자는 윤호를 노려보며 한마디 했다. “지금 누구 앞에서 깝죽대는 거야?” 은하는 여전히 조용히 앉아 있었고 이상할 정도로 말이 없었다. 김미영은 은하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어디 아픈 거 아니니?” 그제야 은하는 그 말이 자신을 향한 것임을 깨닫고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니에요.” 방옥자는 은하를 보며 마음 아프다는 듯이 말했다. “왜 이렇게 말랐니, 은하야? 오랜만에 봤는데 얼굴이 반쪽이 됐네. 밥 꼭 잘 챙겨 먹어야 한다, 알겠지?” 은하는 방옥자의 따뜻한 말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할머니.” 윤호의 시선은 내내 은하를 향해 있었다. 그가 지나칠 정도로 뚫어지게 쳐다보자 은하는 불편함을 느끼고 그와의 시선을 피하려고 애썼다. 그 후, 윤호는 고성태를 만나러 서재
윤호는 물을 잠그고도 은하를 놓아주지 않았다. 은하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몸이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은하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고윤호 씨...” “쉿, 조용히 해.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모두에게 알리고 싶은 거야?” 은하는 고개를 돌리고 목을 움츠리며 말했다. “아니요. 그러니까 날 놔줘요.” “왜? 아직도 이혼하고 싶어?” 은하는 침묵했다. 하지만 때로는 침묵이 바로 대답이었다. 이에 윤호는 화를 내지 않고 가볍게 웃었다. “정말 끝까지 가봐야 적성이 풀리나 봐?” 은하는 입을 열지 않았지만, 그녀 자신도 알고 있었다. ‘마음이 식어버렸기에 이혼을 고집하는 거야.’“할머니가 너를 정말 아끼는 건 알지? 네 욕심 때문에 할머니가 마음 상하는 걸 보고 싶은 거야?” 은하는 그의 말에 움찔하며 말했다.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고요!” “그럼 방금 하려던 말은 뭐였는데?” “어머님과 할머니는 달라요. 난 단지 우리가 헤어지기로 했다면, 적어도 두 분에게 말씀드리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윤호는 그녀의 허리를 더 꽉 안았다. “마르긴 했네. 내가 널 먹여살려주겠다는 데 왜 스스로 고생하려고 해?” 은하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제 힘으로 스스로 살아남을 거예요.” 윤호는 콧방귀를 뀌며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이게 너 자신을 더 괴롭게 만드는 건 아닌지 생각해본 적 있어?” 은하는 그의 비꼬는 듯한 말을 듣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건 당신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에요. 이제 날 놔주세요!” 윤호는 그녀의 반항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좋아.” 은하는 당황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럼 어서 놔주세요.” “내 얼굴에 뽀뽀하면 놔줄게.” 은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당신, 정말 뻔뻔한 사람이네요!” “자기 아내에게 뽀뽀를 요구하는 게 왜 뻔뻔한 거지?” “당장 이거 놔요!”
“어떻게 이런 일이...” 방옥자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김미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은하를 바라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고성태 역시 윤호를 향해 약간의 불만이 섞인 시선을 보냈다. “너도 알고 있었어?” 고성태의 질문에 윤호는 은하를 계속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콧방귀를 뀌듯 낮게 웃었다. ‘뭐 때문에 웃는 거지?’은하는 고개를 숙인 채 끝내 침묵을 유지했다. 방옥자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기에, 결국 이런 핑계로 모든 것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이혼을 결심한 이상, 임신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상관없었다.“난 왜 네가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걸 몰랐던 거지?” 윤호가 마침내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은하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말하려고 했는데 기회가 없었어요.”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방옥자는 한숨을 내쉬며 은하의 손을 꼭 잡았다. “괜찮아, 은하야. 요즘 의학 기술이 얼마나 발달한데! 분명 방법이 있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은하는 방옥자의 예상치 못한 배려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할머니...” “은하야, 괜찮아.” 점심 식사를 마친 뒤, 방옥자는 은하를 방으로 데리고 가 따로 이야기를 나눴다. 김미영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윤호에게 다가가 물었다. “은하랑 싸웠니?” 윤호는 고개를 살짝 돌려 김미영을 바라보며 무심한 듯 대답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김미영은 냉소적인 웃음을 지으며 손끝으로 군자란을 만지작거렸다.“예전에 은하가 너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었어. 그런데 오늘은 너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더라. 네가 뭘 잘못했길래 그래?” 윤호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침묵하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눈썰미가 정말 대단하시네요.” 김미영은 그를 힐끗 쳐다보며 차분히 말했다. “나는 은하 성격이 너무 온화해서 널 제대로 감당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어. 하지만 지금 보니 상황이 좀 달라졌네.” 윤호
윤호는 웃음이 터질 뻔했다. 은하의 서투른 연기는 방옥자를 속일 수는 있어도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아이를 원하지 않는 건 저예요.” 고성태는 윤호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가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만약 윤호가 아이를 원했었다면, 결혼한 지 3년 동안 아이가 없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고성태는 담담하게 한마디를 건넸다. “네 할머니 연세가 적지 않으시잖아.” 윤호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손안의 라이터를 이리저리 돌리며 무심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한편, 방옥자는 방 안에서 준비해 두었던 보석을 은하의 손에 쥐어 주었다. 은하는 깜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할머니, 이건 너무 귀한 거라 받을 수 없어요.” 방옥자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은하야, 얼른 받아. 이건 원래부터 너에게 주려고 준비한 거란다. 사실 너희가 아이를 낳으면 줄 생각이었지만, 조금 일찍 줘도 상관없잖니. 내 마음이니 받아. 안 그러면 정말 섭섭할지도 몰라.” 은하는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고개를 숙여 상자를 받아들었다. ‘이걸 진짜 받을 수는 없어. 좀 이따 나간 뒤 고윤호한테 주면 그만이야.’ “감사합니다, 할머니.” “그래, 우리 착한 은하.” 방자옥은 두 사람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두 사람을 집으로 돌려보냈다.고씨 저택에 올 때 따로 왔다면, 갈 때는 함께 가는 것이 당연했다. 차에 올라탄 은하는 상자를 윤호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건 할머니께서 주신 건데, 너무 귀중해서 받을 수 없어요. 그러니 당신이 맡아주세요.” 윤호는 단번에 상자 속 물건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이건 할머니께서 손주며느리에게 준 물건이야.” 은하는 입술을 깨물며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곧 손주며느리가 아니게 될 거잖아요.” 윤호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받기 싫으면 왜 받은 거야? 겉으로는 아닌 척하면서 속으로는 기뻤나 보지?” 은
은하는 카페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은하는 자신이 이 자리에 나온 게 옳은 선택인지 의심되었지만, 장유연이 자신을 발견한 이상 물러날 수 없었다.은하는 한숨을 내쉰 뒤 유연에게 다가가 맞은편에 앉았다. “장유연 씨께서 무슨 일로 저를 찾으신 거죠?” 유연은 선글라스를 쓰고 검은 드레스를 입은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은하 씨, 뭘 마실래요?” 은하는 그녀가 자신을 ‘은하 씨’라고 부르는 순간 마음이 불쾌했지만 이를 드러내진 않았다. “됐으니, 절 따로 부른 이유를 말씀하시죠.” 유연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은하 씨...” 그러나 은하는 그녀의 말을 단번에 잘랐다. “유연 씨, 절 사모님이라고 불러 주시죠.” 그 말에 유연은 잠시 멍해졌다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사모님이라, 어차피 아무도 모르는 일이잖아요?”그녀의 얕잡아보는 듯한 말투에도 은하는 평온한 태도를 유지했다. 이전 같았으면 치욕과 분노로 상처받았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혼인관계증명서라도 보여드릴까요?” 유연은 그제야 조금 긴장한 듯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나 여전히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 “당신도 잘 알잖아요. 윤호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은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고윤호 씨는 저를 사랑하지 않지만 저랑 결혼을 했잖아요. 설마 고윤호 씨가 당신을 정말 사랑한다고 생각하세요?” 그 질문에 유연는 미소를 짓더니 추억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이죠. 윤호는 저를 엄청 아껴주거든요.” 은하는 손끝을 세게 누르며 조용히 되물었다. “그런데 왜 당신이 아니라 저랑 결혼을 한 거죠?” “당신...”유연은 눈살을 찌푸린 채 은하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예전에 윤호에게 은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슬쩍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윤호는 그저 온순하고 말을 잘 듣는 여자라고 말했다. 그래서 유연은 은하를 휘두르기 쉬운 꼭두각시 정도로
은하는 천천히 사진을 내려놓으며 장유연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죠?” 유연은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간청하듯 말했다. “은하 씨, 제발 이 삼각관계에서 물러나 주세요. 저랑 윤호는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요.”은하는 유연이 간절히 애원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너무나 우스웠다. “장유연 씨, 저희 부부 사이에 끼어든 사람은 당신이에요.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저더러 물러나라는 거죠?”유연은 표정이 굳어지더니 이를 악물며 대꾸했다. “사랑에는 순서가 있잖아요. 만약 은하 씨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지 않았다면, 윤호가 왜 당신과 결혼했겠어요?” 은하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전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적 없어요.” “전 그런 적 없어요.”은하는 그날을 떠올렸다. 처음 용기를 내어 윤호와 대화했을 때, 그녀는 분명히 물었다. “고윤호 씨, 여자친구가 있으신가요?” 그리고 윤호가 대답했다. “없다면?” 윤호의 대답은 명확했기에 은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은하는 깊은숨을 내쉬며 차분히 말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는 결혼하기 전에 고윤호 씨에게 여자친구가 있는지 확실하게 물어봤어요. 그리고 고윤호 씨는 없다고 대답했죠. 그래서 그 말을 믿고 결혼을 결심한 거예요. 그 대답만으로도 그 당시 두 분이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다는 건 분명하지 않나요? 아니었으면 고윤호 씨가 어떻게 저와 결혼했겠어요?”유연은 입술을 깨물며 은하의 시선을 피했다.“맞아요. 그때는 제가 해외 일로 자주 다니느라 윤호와 잠시 떨어져 있었어요. 그 사이에 오해가 생겨서 헤어진 것처럼 보였던 거예요. 그런데 당신이 그 틈을 타서 저희 사이에 끼어든 거죠. 윤호는 늘 제가 춤을 포기하고 돌아오길 원했어요. 윤호는 절 화나게 만들기 위해 당신과 결혼한 거예요!”“그렇다면 저한테 찾아올 것이 아니라, 고윤호 씨를 찾으러 가셨어야죠! 결혼을 결정한 건 고윤호 씨였으니까요.”유연은 은하
은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잠시 후, 그녀는 손에 든 계약서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걸 꺼내신 거죠?” 윤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무덤덤하게 답했다. “안 될 건 없잖아?” 은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차분하게 말했다. “당신은 장유연 씨와 바람을 피우셨잖아요. 안 그래요?” 윤호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바람? 내가 말했을 텐데, 내 여자는 너 하나뿐이라고.” “좋아요, 설령 선은 지켰다고 쳐요. 하지만 정신적 외도도 외도예요. 안 그래요?” 윤호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이렇게 말하는 건 결국 이혼하고 싶다는 거지?” 은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도덕적 선을 지켰다 해도, 전 당신 마음에 다른 여자가 있는 걸 받아들일 수 없어요. 당신 마음에 다른 여자가 있다는 걸 알았다면, 전 절대 먼저 결혼하자고 하지 않았을 거예요.” 은하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윤호뿐만 아니라 은하도 자신만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제 원칙은 분명해요. 다른 여자를 마음에 품고 있는 남자는 절대 가까이하지 않는 거예요.” 윤호는 그녀의 결심이 확고한 표정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신경 쓰였으면서...” 윤호는 은하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기며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지난 3년 동안은 어떻게 참은 거야?” 은하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당당히 그의 눈을 마주쳤다. “당신 말이 맞아요. 제가 늘 참아왔었거든요. 하지만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어서 끝내려는 거예요. 이 정도면 이혼 사유가 됐나요?” 윤호는 그녀를 잠시 쳐다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계약이 있는 한, 내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넌 이혼할 수 없어. 이은하, 현실을 받아들이는 게 좋을 거야. 내일 밤, 이 집으로 돌아와야 할 거야. 안 그러면 내가 직접 이씨 저택에 찾으러 갈지도 몰라.” 은하는 손에 쥔 계약서를 꽉 움켜쥐었다. 과거엔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계약이
은하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소파에 앉아 있는 윤호를 발견했지만,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 “거기 서.” 은하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윤호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디 가려고?” 은하는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저녁 8시가 다 되어 밖은 매우 어두웠다. “집으로 돌아갈 거예요.” 윤호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여기가 네 집이야.” 윤호의 말을 들은 은하는 이 집을 한동안 둘러보았다. 그녀가 지난 3년 동안 애정을 쏟아 관리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은하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윤호를 보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때 저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아니라고?” 윤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은하에게 다가섰다. 그는 고개를 숙여 차분한 표정으로 은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이 집은 뭔데?” 은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담담히 말했다. “당신에겐 호텔, 그리고 나에겐 감옥.” 윤호는 그녀의 대답에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참, 잘도 비유를 하네.” “사실이니까요.” 은하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돌아서려 했지만, 윤호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다시 돌아와.” 은하는 그의 품에서 몇 번 몸을 비틀며 벗어나려다 포기하고, 그의 가슴에 반쯤 기댔다. “돌아오라고요? 계속 당신 집을 지키는 개라도 되라는 건가요?” 윤호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감싸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날 좀 그만 세우면 안 될까?” 은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안 돼요. 절 지키기 위한 것이니까요.” 윤호는 그녀를 몇 초간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은하는 잠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럼 저를 놓아주세요.” 윤호는 이번에 진짜로 그녀를 놓아주었다. “내일 당장 짐을 싸서 이사 와.” 은하는 미간을 찌푸리며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아직도 제 말을 이해 못
장옥순은 한참 동안 넥타이를 풀려고 애썼지만, 전혀 풀리지 않았다. “어머, 이거 참 이상하네요. 왜 이렇게 안 풀리는 거죠?” 은하는 점점 더 세게 조여오는 넥타이에 손목의 통증을 느낀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주머니, 그만하세요. 제 화장대에 눈썹칼이 있으니, 그걸로 잘라버리세요.” “네, 바로 가져올게요.” 장옥순은 눈썹칼을 가져와 넥타이를 조심스럽게 잘라냈다. 은하는 손목을 돌려가며 뭉친 근육을 풀고,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한편, 장옥순은 아무렇지 않은 듯 숙련된 손길로 침대 시트를 바꾸려했다. 매번 두 사람은 시트를 더 이상 쓸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번엔, 시트가 의외로 깨끗했다. 단지 약간의 구김만 있었을 뿐, 다른 흔적은 전혀 없었다. 장옥순은 의아한 마음에 눈을 깜빡이며 욕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 그 분위기로 봐선 꽤나 난리였을 텐데, 왜 이렇게 깨끗한 거지?’ 장옥순은 두 사람이 함께 한 시간을 떠올리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설마... 이렇게 빨리 끝난 건가?’ 장옥순은 순간적으로 무언가를 깨달은 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치 엄청난 비밀을 알아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장옥순은 얼른 새로운 시트를 다시 내려놓고, 사용했던 시트를 정리하는 데에 그쳤다. 욕실에서 나온 은하는 찢어진 옷을 보며 한숨을 쉬고, 옷장을 열어 아무 옷이나 꺼내 입었다. 옷을 갈아입은 그녀는 방 중앙에 놓인 3미터짜리 침대를 바라보았다. 그 침대를 보자, 과거 결혼 초기의 기억이 떠올랐다. 윤호는 신혼 첫날밤, 집에 없었지만 그 뒤로 한 달 동안은 매일 집에 돌아왔다. 은하는 나중에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방옥자가 내린 엄격한 지시 때문이었다. 방옥자는 신혼 첫날밤, 일을 핑계로 아내를 홀로 두고 떠난 윤호의 행동에 화가 잔뜩 났었다. 그래서 이런 지시를 내려 은하를 보상해주려 했다.고씨 가문에서는 윤호와 유연의 일에 대
“제가 거부하는 걸 강제로 하시는 건 강간이나 다름없어요. 고윤호 씨, 당장 이거 놓으라고요!” 은하에게 있어서 손목이 묶인 건 매우 모욕적이었다.그녀의 눈은 분노로 붉게 물들었고 당장이라도 윤호를 물어뜯을 기세였다.윤호는 그녀를 눌러 제압하며 비웃듯 말했다. “내가 보기에 말과 행동이 다른 것 같은데?” 은하의 얼굴은 붉어 오르더니 곧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늘 윤호의 이런 모습을 감당할 수 없었다.은하는 분노와 수치심에 휩싸여 소리쳤다. “닥쳐요!” 윤호의 미간에 잠시 짜증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낮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경고했다. “다치고 싶지 않으면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야.” 그의 말에 은하는 공포와 불안감이 들어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외쳤다. “싫어요! 당장 이거 놔요! 이거 놓으라고요!” 은하는 정말 겁을 먹게 되었다. 윤호가 자기를 때린다고 해도, 은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도저히 그를 이길 수 없었다. 은하는 입술을 깨물며 버텼다. 그러나 윤호의 손이 멈추더니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은하 또한 긴장한 채 몸을 굳혔다. 그녀는 뭔가를 발견하게 되었다. 결혼한 지 3년. 은하는 이제 더 이상 순수한 소녀가 아니었다. 방 안은 갑자기 적막으로 가득했다. 윤호의 표정은 차갑고 어두웠다. 그의 눈동자에 스쳐 지나가는 복잡한 감정들이 마치 그를 더욱 깊은 어둠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은하를 내려다보며 손길을 멈췄다. 은하는 움츠린 채 작은 동물처럼 떨고 있었다. 윤호는 그녀를 뒤집어 눕히며, 은하의 놀란 표정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녀의 놀란 표정은 윤호의 얼굴을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네...’은하의 생각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고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향했다. 윤호는 이 모든 것을 보자 화가 폭발하기 직전까지 치달았다. 그는 머리가 욱신거리며 터질 것만 같았다. 윤호는 은하의
은주는 윤호가 자신의 동생을 차에 태워 떠나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고개를 돌려 차갑게 장유연과 소녀들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형사님, 제 동생의 의사는 이미 명확히 전달되었습니다. 합의할 생각은 절대 없으니 법에 따라 잘 좀 처리해 주세요.”경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유연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고, 유나는 불안에 휩싸였다. “언니!” 유연은 답답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꺼내 윤호에게 전화를 걸려 했지만, 정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유연 씨, 지금은 전화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유연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하지만...” 정민은 한숨을 내쉬며 설명했다. “대표님께서 지금 화가 많이 나 계십니다. 자칫하면 불통이 튈 수도 있어요. 게다가 진짜 처벌을 받는다 해도, 대표님께 다른 방법이 있으실 겁니다. 대표님을 믿으세요.” 유나는 초조한 눈빛으로 윤호와 은하가 떠난 방향을 바라봤다. 당사자도 떠났으니 더 이상 합의는 불가능했다. 결국 유연은 유나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유나야, 걱정하지 마. 언니가 반드시 해결해 줄게.” “정말이에요?” “언니를 믿어.” ...윤호는 은하를 강제로 차에 태운 뒤 운전대를 잡았다. 그가 향한 곳은 은하도 이미 알고 있는 그들의 별장이었다. “멈춰요. 멈추라고 했잖아요, 내 말 안 들려요?” 은하는 분노와 절망이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윤호는 문과 창문을 모두 잠갔기에, 은하는 차에서 뛰어내릴 수조차 없었다. 그의 오른쪽 얼굴에는 선명한 손자국이 남아 있었고, 각진 턱선은 굳어 있었다. 그리고 드러난 손등의 힘줄은 그가 얼마나 분노에 차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은하가 뭐라 말하든 윤호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차를 몰았고, 마침내 별장에 도착했다. 윤호는 은하를 차에서 끌어내며 낮고 말했다. “그렇게 힘이 남아돌아? 그럼 이따가
유나는 당황한 듯 흔들리는 눈빛으로 유연을 바라봤다. “언니, 얘네들도 모두 언니의 팬들이야!” 유연은 그깟 몇 명 안 되는 팬들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아직 팬들의 지지가 필요했기에 이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만약 자신이 이 소녀들을 경찰서에 내버려뒀다는 소문이 퍼지기라도 한다면, 분명 많은 팬들이 돌아설 것이다. “윤호야, 이 아이들은...” 그러나 은하는 갑자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들으셨죠? 주모자가 밝혀졌으니, 공범들은 용서해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의 주모자에게는 반드시 책임을 물을 겁니다.” 유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이 멍청이들!’ “언니!” 유나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유연의 팔을 꽉 붙잡았다. 은하는 더 이상 경찰서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고윤호 씨, 이거 놓으세요. 전 더 이상 당신과 할 말이 없어요.” 윤호가 그녀를 막아섰던 순간부터... 아니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은하는 이혼을 결심하고 있었다.윤호는 그녀의 단호한 말투에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난 할 말이 있어. 대체 어디 가려는 거야?” “이거 놔요!” 은하는 윤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지만, 윤호는 이마에 핏줄을 세우며 그녀를 강제로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고 대표님, 당장 놔주세요! 은하가 싫다고 말했잖아요!” 은주는 얼굴이 새파래지며 소리쳤다. 윤호는 그녀를 차갑게 쳐다보며 경고했다. “이 대표님은 저를 적으로 둘 생각인가요?” 그 말은 분명 협박이었다. 은주는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절 협박하는 겁니까?” 바로 그때, 은하가 손을 들어 윤호의 뺨을 세게 때렸다. “은하야!” 예상지도 못 한 상황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정민조차 눈을 크게 뜨며 긴장된 표정으로 은하의 손을 쳐다보았다. 유연도 깜짝 놀라더니 곧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이은하 씨,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유연은 윤호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그가 차가운 목소리
은주가 차가운 표정으로 무언가를 말하려는 순간, 은하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고개를 돌려 은하를 바라보자, 은하는 차분한 태도로 자신의 사건을 책임 진 경찰에게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합의할 생각 없습니다.” 경찰은 은하의 말을 듣고 잠시 시선을 소녀들에게로 옮겼다. 원래는 합의 시키려고 했지만, 은하의 차가운 눈빛을 본 뒤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유연 언니, 제발 좀 도와주세요. 저희는 단지 언니를 위해 복수한 거였어요. 이 여자가 언니를 밀었으니까...” 그러나 은하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은주의 팔짱을 끼고 부드럽게 말했다. “진술은 끝났으니, 집에 가자.” 유연은 점점 초조해지며 윤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윤호야...” 윤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냥 법대로 처리해. 처벌도 그렇게 심각하진 않을 거야.” 이 말을 듣자 유연의 마음은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녀도 팬들이 신경 쓰인 것이 아니었다. ‘이은하를 위해 내 체면을 깎아내린 거야?’‘도대체 왜? 이번은 처음이 아니잖아!’은하가 정말로 떠나려 하자, 갑자기 한 소녀가 불안한 목소리로 외쳤다. “사촌 언니!” 유연은 그 소녀를 쳐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중에 그녀의 사촌 동생도 있었던 것이다.그렇다면...유연은 윤호의 팔을 붙잡으며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윤호야, 저 아이 이름은 장유나야. 사실 내 사촌동생이거든.” 예상대로 윤호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그의 시선은 유나의 겁에 질린 얼굴로 향했다.은하와 은주가 경찰서를 나서려던 순간, 윤호는 은하의 팔을 붙잡았다. 은하는 멈춰 서서 윤호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의 검은 눈동자 속에 담긴 차가운 기운에 은하의 심장이 잠시 움츠러드는 듯했다. 윤호는 그녀의 표정이 점점 더 냉랭해지는 것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한숨을 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만 그냥 넘어가주자.” 은주는 그 말을 듣자 얼굴이 순식간에 차가워지더니 쏘아
사실 정민이 가장 먼저 빨간색 BMW를 발견했지만,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윤호는 그 차를 몇 초간 쳐다보다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은하는 어느새 시선을 돌려 조용히 윤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윤호는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은하가 먼저 입을 뗐다. “놓아주세요.” 윤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왜 놓아야 하지?” 은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누가 보면 속상해할 테니까요.” 은하는 고개를 돌려 경찰서 입구를 바라봤고, 곧 계단 위에 서 있는 장유연을 발견했다. 유연은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은하는 윤호의 손을 세게 뿌리치며 놓아버렸다. 그러자 윤호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또...” “윤호야...” 유연이 입을 열자, 은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장유연과 스쳐 지나가면서도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장유연은 그녀에게 있어서 공기 같은 존재였다. 어디에나 있지만, 너무 흔해서 특별할 것도 없는 그런 존재였다. 유연은 은하가 자신을 무시한 것에 화가 났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며 윤호를 바라봤다. 윤호는 은하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다가, 은하에게 뿌리쳐진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장유연 쪽으로 걸어갔다. “윤호야, 두 사람이 왜...”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유연은 당황한 표정으로 윤호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을 반기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왜일까? ‘혹시 내가 저지른 일이라고 오해한 걸까?’“윤호야, 설마 내가 저지른 일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윤호는 그녀를 차갑게 쳐다보며 대답했다. “아니라는 거 알아.” 유연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그녀의 표정은 한층 부드러워졌다. “나도 방금 알게 된 일이야. 그래서 너한테 전화했는데, 네가 하도 안 받
그러나 은하가 전화를 끊자마자 윤호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번호를 확인한 뒤 전화를 받지 않고 주머니에 넣으려 했다. 그러나 마침 은하의 차가운 시선과 마주쳤다. 은하는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곧바로 고개를 돌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은하는 의자에서 일어나 말없이 문 쪽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윤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얼굴을 굳히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디 가려고?” 은하는 그를 담담히 쳐다보며, 그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힐끗 보고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당연히 경찰서죠. 같이 가실래요?” 윤호는 순간 멈칫했다. 오랜만에 본 그녀의 미소였다. 윤호는 그녀의 손목을 잡은 채 엄지로 천천히 그녀의 손목을 문질렀다. “내가 같이 가줬으면 좋겠어?” 은하는 입을 오므리며 담담한 말투로 대답했다. “마음대로 하세요.” 윤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고, 곧 그녀의 손목을 잡던 손을 놓고 깍지를 꼈다.“같이 가줄게.” 은하는 입술을 오므린 채 저항했다.“이거 놓으세요. 전 혼자 걸을 수 있어요.” “난 손을 잡고 있는 게 좋아.” 그의 이 말에 은하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윤호는 고개를 약간 숙이며 그녀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리고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왜 그래?” “예전엔 제 손을 잡는 걸 싫어했잖아요.” 윤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은하의 말처럼,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다녔던 기억은 거의 없었다. 윤호는 자기도 모르게 눈빛이 깊어졌다. “앞으로는 계속 잡을 거야.” 은하는 그의 말을 듣고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더는 상관없는 일이었다.예전에 언제나 은하가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그를 바라보았지만, 윤호는 단 한 번도 뒤돌아서서 은하를 본 적이 없었다. 만약 윤호가 한 번이라도 돌아보았다면, 어쩌면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윤호가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기에 은하의 마음이 완전히 식어버린 것이다. 윤호가 전과 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