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저항은 무의미했다. 은하는 윤호에게 또 한 번 당하고 말았다. 모든 것이 끝난 후, 은하는 처참하게 망가진 채로 누워 있었다. 창백했던 그녀의 얼굴에는 붉은 기운이 감돌았고, 눈꼬리는 마치 화장을 한 듯 붉게 물들어 있었다. 게다가 떨리는 속눈썹은 보는 사람의 심장을 간질이는 듯했다. 윤호는 그런 그녀를 보다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의 손이 은하의 축축한 머리카락을 걷어냈다. 은하는 윤호가 가볍게 손끝으로 건드리는 행동에도 두려워 몸을 떨었다. 그러나 더는 거부할 수 없었다. 그녀가 싫다고 말을 할 때마다 윤호가 더욱 강하게 나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윤호는 아직 더 원하고 있었지만 은하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매우 만족스러워 보였다. 평소와 같은 형식적인 행위가 아닌, 오늘처럼 뜨거운 시간을 보내는 게 오히려 적성에 맞았던 것이다. 윤호는 은하가 부뜨럽고 약하기 때문에 늘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건 정반대였다. “배고프지 않아? 뭐 먹고 싶어?” 윤호가 담담하게 물었지만 은하는 그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더 이상 그의 심기를 건드리기 싫었던 것이다.윤호는 그녀가 겁을 먹은 걸 알고 있었고 그 모습에 오히려 마음이 약해졌다. 윤호는 은하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집안의 아주머니에게 연락해 음식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그는 옷을 정리하고 나온 뒤 은하를 욕실로 데려가 씻겨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때 전화가 울렸다. 윤호는 전화를 받고 난 후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알겠어.” 전화를 끊은 윤호는 침대에 등을 돌리고 있는 은하를 보았다. 이번에는 평소와 달리 바로 나가버리지 않고 말했다. “급한 일이 생겨서 잠깐 갔다 올게. 아주머니가 올 거야.” 은하는 그의 말에 살짝 눈을 깜빡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윤호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결국 문을 열고 나갔다. ‘아무리 화가 나도 시간이 지나면 진정하겠지.’윤호는 은하가
은하의 입에서 또다시 이혼이라는 말을 듣게 된 윤호는, 예전처럼 감정이 폭발하지 않았다. 그는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은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은하의 진지한 표정을 본 윤호는 비웃듯이 말했다.“진짜 이혼하고 싶은 거야?”은하는 손에 든 물건을 꼭 쥔 채 대답했다. 그녀는 이 결혼을 조용히 끝내고 싶었다. 모욕을 당하는 것도 상관없었다. 지난 3년 동안 그녀는 자존심을 버리고 매사에 조심하며 살아왔다. 이제 와서 마지막 한 번 더 구겨진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고개를 살짝 숙인 은하는 자신을 한껏 낮춘 듯한 모습으로 말했다. “그냥 이런 식으로 결혼을 유지하는 건 아무 의미 없잖아요.”윤호의 눈빛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마치 석양이 지고 나서 어둠이 깔리는 하늘처럼. “아무 의미 없다고?”은하는 몸을 숙여 손목시계를 윤호의 앞에 놓인 테이블 위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묘한 차가움이 스며 있었다. “처음부터 절 좋아하지 않으셨잖아요. 그러니 3년이 지나도 당신의 공허한 마음을 채워줄 수 없었겠죠.”윤호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인 뒤 라이터를 테이블 위에 던졌다.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집안은 적막했다. 모두 각자의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장옥순도 거실에 없었다. 마치 이 넓은 저택에 두 사람만 남은 듯했다. 은하는 대답을 듣지 못하자 고개를 들어 윤호를 바라봤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줄곧 은하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윤호는 담배 연기를 천천히 뿜어내며 미소를 지었다. 길고 날렵한 손가락 끝으로 담배를 가볍게 두드리며, 그 움직임 속에 어딘가 쓸쓸한 기운이 배어 있었다.그리고 마침내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부터 널 결혼 상대로 고른 건 내 몸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지금 내 마음을 묻는 거야?”윤호는 소파에서 일어나 은하 앞에 다가섰다. 담배를 든 손으로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
바닷가로 가는 길은 꽤 멀었다. 정민은 백미러로 은하가 품에 안고 있는 파일을 힐끗 보았다. 윤호가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였기에, 혹시라도 말려들지 않으려면 은하에게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사모님, 설마 또 이혼 서류인 건 아니겠죠?”‘또요?’ 은하는 백미러를 통해 정민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어제 이혼 서류를 확인했어요?”정민은 헛기침을 했다. “사모님, 대표님께서 어제 받은 서류 때문에 기분이 별로 안 좋으셨어요. 그러니...”은하는 그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은하는 품에 안은 파일을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건 아니에요. 걱정 마세요.”정민은 그 말을 듣고 안도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대표님께서 오늘 사모님과 요트를 타기 위해 일부러 회의를 앞당겨 밤늦게까지 일하셨습니다. 분명 사모님의 기분을 풀어드리려는 겁니다. 그러니 대표님도 분명 사모님을 마음에 두고 계실 겁니다.”정민의 말에는 약간의 아첨이 섞여 있었다. 대표의 기분이 좋아야 직원인 그도 편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로 신경 쓰지 않는다면, 시간을 일부러 내는 일조차 없었을 테니까. 은하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정말인가요?”정민은 자신이 준비한 깜짝 이벤트를 떠올리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이죠!”...한 시간이 지나서야 두 사람은 바닷가에 도착했다. 은하는 생각에 잠긴 채 요트에 올랐기에 그 요트가 얼마나 특별한지 알아채지 못했다. 그리고 정민이 전화를 하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요트는 크고 화려했다. 은하가 안으로 들어서자 듣기 좋은 음악이 흘러나왔다. 소리를 따라가던 은하는 자신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연주팀이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사모님, 반갑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대표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은하는 품에 든 파일을 꼭 쥐며 시선을 돌려 고개를 끄덕였다. 선원의 안내를 따라 간 곳은 식
은하는 그의 말에 얼굴이 화끈거리며 화를 냈다. “고윤호!” 윤호는 긴 손가락 끝으로 은하의 뺨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은하의 불안과 두려움을 느낀 그는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에 말했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난 싫다고 했잖아. 벌써 잊은 거야?”윤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조각같이 잘생긴 외모였지만, 은하는 오늘에서야 명문가 출신의 윤호가 이렇게 방탕한 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지 마세요. 말로 좋게 끝내면 되잖아요.”윤호는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며 냉혹한 표정 대신 어딘가 음산한 기운을 띤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좋아. 그럼 일단은 내가 지난 3년간 LM그룹에 투자한 것과 LM그룹이 내 이름을 빌린 건 잠시 제외해 두지. 내가 3년간 너를 먹여 살리고 입혀주고 병원비까지 다 대주었는데, 이건 왜 빼먹은 거야?”은하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 “맞아요. 그건 따로 계산하지 않았어요. 우리가 결혼한 3년 동안 제가 당신의 아내로서 해야 할 의무는 다했다고 생각하는 데요?”윤호는 비웃듯 웃었다. “그래서 네 말은, 이 모든 걸 받는 게 당연하다는 거야?”은하는 그렇게 뻔뻔하게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거 아니에요?”3년 동안 은하는 한없이 조심스러웠다. 항상 윤호의 눈치를 보고, 조금의 실수라도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전전긍긍하며 살았다. 윤호가 그녀를 원할 때는 순순히 윤호의 곁에 있어야 했고, 필요 없을 때는 공기처럼 조용히 있어야 했다. 고윤호의 아내이긴 했지만, 사실 필요 없으면 버려지는 애완동물과 다름없었다. 윤호의 얼굴은 이미 어둠에 휩싸였다. 은하는 그가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을 처음 보았기에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그러나 윤호는 갑자기 말했다. “보아하니 나한테 꽤나 불만이 있는 것 같은데,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지금 다 해 봐.”은하는 입술을 꽉 깨물며 그의 옆을 스치듯 바라보다가 시선을 테이블
정민은 고개를 숙인 채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무대에서 사고가 있었다고 합니다. 다리를 다쳤다고 하는데, 자세한 상황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다리를 다쳤다고?” 윤호의 목소리는 차갑고 서늘했다. “네, 그래서...” 정민은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두 사람을 방해할 수밖에 없었다.윤호는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더니 잠시 멈춰 섰다. “너는 여기 남아.”정민은 그와 함께 따라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말을 듣고는 멍해졌다. “네?”윤호는 방을 잠깐 쳐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네가 데려다줘.”정민은 속으로 원망을 했다. ‘대표님, 이렇게 저만 이 폭풍 속에 남겨두시는 건 너무 하잖아요!’윤호가 나가자 은하는 방에서 나왔다. 그러나 정민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다.“사모님, 제가 댁까지 모셔다드릴까요?”은하는 옆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 모든 준비, 임 비서님이 하신 거죠?”“그게...”정민은 부정하지 않았다. 윤호가 직접 준비했다고 해도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실 장유연 쪽 준비도 다 자신이 한 것이고, 예외는 없었다. “장유연 씨가 망고를 아주 좋아했나 봐요?”정민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지만 당황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은하의 표정은 이미 모든 걸 알아차렸다는 듯 미소를 띠었다. “아쉽네요. 제가 망고 알레르기가 없었다면, 어떤 맛인지 한번 맛보고 싶었을 텐데요.”정민은 속으로 절규했다. ‘큰일 났어!’그는 은하가 자기 옆을 지나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뒤따르며 말을 걸었다. “사모님,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필요 없어요.”“하지만 여긴 택시 잡기가 어렵습니다.”그제야 은하는 걸음을 멈추고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다. 이곳은 바다 위였다. 또다시 혼자 남겨진 것이다. “그래요. 그럼 부탁드리죠.”정민은 급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정민은 자신이 잘못된
은하는 아무것도 챙기지 않은 채 그대로 이씨 저택으로 돌아갔다. 별장에 있던 그녀의 옷과 보석들은 그대로 별장에 남겨져 있었다.은하의 전화를 받은 장옥순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리고 윤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전화는 아무리 걸어도 연결되지 않았기에, 장옥순은 화를 참지 못하고 혼잣말로 투덜댔다. “그러니까 아내가 도망가는 거지. 자업자득이야!”은하는 이씨 저택으로 돌아간 다음 날, 곧바로 회사로 출근했다. 은주는 긴급회의를 열어 직원들에게 은하를 소개하며 그녀를 자신의 비서로 임명했다. 배워야 할 게 많으니 은주의 곁에서부터 시작하라는 의미였다. 회사의 모든 직원은 은주에게 친자매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은하가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모두 처음 은하를 보게 된 것이다.윤호가 결혼 당시 원했던 조건 중 하나가 바로 그녀가 ‘완벽한 아내'의 역할만 하길 바라는 것이었다. 윤호는 은하가 외부에 얼굴을 비추는 걸 원하지 않았다. 3일 후, 윤호는 드디어 별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집안 곳곳을 둘러보아도 은하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의 얼굴은 금세 굳어졌다. “이은하는 어디 있지?” 장옥순은 몰래 눈을 홉떴지만 고개를 숙이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사모님께서는 집에 안 계십니다.”“어디 갔는데?”장옥순은 슬쩍 고개를 들어 윤호의 표정을 살피며 사실대로 말했다. “3일 전에 이씨 저택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윤호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평소 나른하던 그의 눈빛은 차가운 냉기로 가득 찼다. 장억순의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리고 윤호가 먼저 물어보기 전에 급히 덧붙였다. “제가 그날 대표님께 전화드렸지만, 제 전화를 받지 않으셨습니다.”‘왜 날 노려보고 난리야? 아주 날 잡아먹기라도 하겠어!’윤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입술을 세게 깨물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간도 크네.”장옥순은 다시 고개를 숙이며 침묵했다
정민은 방금 자신이 한 질문에 대한 답을 예상했는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대표님, 혹시 사모님께서 아주 오래전부터 대표님을 좋아하셨던 건가요?”정민의 물음은 의문형이었지만, 이미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은하는 오래전부터 윤호를 좋아했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 정민은 윤호가 아무 말 없이 그 사진들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 그의 속마음을 전혀 읽을 수 없었다. 몇 년간 그의 곁에서 일해왔지만, 지금 이 순간 윤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래서 정민은 조심스럽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대표님, 이건 고등학교 몇 학년 때 사진인가요? 혹시 기억나시나요?” 누가 봐도 이 사진들은 모두 몰래 찍은 것들이었다. 사진 속 당사자인 윤호는 이런 사진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다. 윤호는 그 사진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침 삼켰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깊었다. “고1.” 정민은 그 말을 듣고 숨을 들이쉬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오래된 건가요? 그럼 거의 10년 전 일이네요!”정민은 사진 아래 놓여 있던 먼지로 덮인 일기장을 발견하고 말했다. “대표님, 여기에 일기장도 있는데 한번 보시겠어요?”윤호는 천천히 다가가 일기장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비밀번호 잠금장치가 있는 낡은 일기장이었다. 그는 잠금을 풀어 보려다 잠시 멈추고 정민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정민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은하의 생일이 언제인지 알아?”정민은 말문이 막혔다. ‘자기 아내의 생일도 기억 못 해서 비서한테 묻다니. 이러니 사모님께서 이혼하겠다고 하신 거지!’ 윤호의 날카로운 시선 속에서 정민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3월 3일입니다.”윤호는 0303을 입력해 보았지만, 잠금장치는 풀리지 않았다. 그는 점점 눈살을 찌푸렸다. 정민은 머뭇거리며 힌트를 던졌다. “대표님 생일을 한번 입력해 보시죠.”‘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열리자 정민은 속
“결국 제가 틀렸어요. 전 고 대표님의 마음에 다른 사람이 있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은하의 무모한 행동을 내버려 두었죠.” “무모한 행동?”윤호는 낮은 소리로 웃으며 되물었다. 그의 표정은 복잡한 심경을 감추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말하실 필요는 없지 않나요?”은주는 미소를 지으며 차분하게 테이블에 놓인 리모컨을 들어 올렸다. 그녀가 켠 TV 화면에는 은하가 대학 시절 환하게 웃고 있는 영상이 담겨있었다. 영상 속 은하는 천진난만한 모습과 밝은 표정을 가진 소녀였다. 윤호는 말없이 화면 속의 그녀를 응시했다. “이게 당신과 결혼하기 전의 은하예요. 밝고 활발한 아이였죠. 그런데 지난 3년 동안 저는 은하의 눈빛이 점점 흐려지고, 웃음도 사라져 가는 걸 발견했어요. 그걸 보면서 제 결정이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죠.”“고 대표님, 이 결혼은 은하에게 상처와 고통만을 가져다주었어요. 은하는 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저는 은하의 눈에서 진실을 알 수 있었어요.”“우리 가족의 소중한 아이가 이렇게 변한 건 제 잘못이에요. 제가 언니로서, 보호자로서 실패했어요.”은주는 영상을 껐고, 진지한 눈빛으로 윤호를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고 대표님께서 은하 말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은하의 진심을 생각해서라도 은하를 놓아주시면 안 될까요?”윤호는 그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은주를 바라보았다. 윤호의 눈빛은 깊고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은하는 위층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서둘러 내려가지 못하고 계속 불안한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불안한 이유를 명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녀가 멍하니 서 있는 사이,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은하는 본능적으로 침대 옆에서 벌떡 일어났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윤호였다. 그는 문을 닫고 잠갔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은하는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윤호는 한 걸음 한 걸음 은하에게 다
은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잠시 후, 그녀는 손에 든 계약서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걸 꺼내신 거죠?” 윤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무덤덤하게 답했다. “안 될 건 없잖아?” 은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차분하게 말했다. “당신은 장유연 씨와 바람을 피우셨잖아요. 안 그래요?” 윤호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바람? 내가 말했을 텐데, 내 여자는 너 하나뿐이라고.” “좋아요, 설령 선은 지켰다고 쳐요. 하지만 정신적 외도도 외도예요. 안 그래요?” 윤호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이렇게 말하는 건 결국 이혼하고 싶다는 거지?” 은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도덕적 선을 지켰다 해도, 전 당신 마음에 다른 여자가 있는 걸 받아들일 수 없어요. 당신 마음에 다른 여자가 있다는 걸 알았다면, 전 절대 먼저 결혼하자고 하지 않았을 거예요.” 은하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윤호뿐만 아니라 은하도 자신만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제 원칙은 분명해요. 다른 여자를 마음에 품고 있는 남자는 절대 가까이하지 않는 거예요.” 윤호는 그녀의 결심이 확고한 표정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신경 쓰였으면서...” 윤호는 은하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기며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지난 3년 동안은 어떻게 참은 거야?” 은하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당당히 그의 눈을 마주쳤다. “당신 말이 맞아요. 제가 늘 참아왔었거든요. 하지만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어서 끝내려는 거예요. 이 정도면 이혼 사유가 됐나요?” 윤호는 그녀를 잠시 쳐다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계약이 있는 한, 내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넌 이혼할 수 없어. 이은하, 현실을 받아들이는 게 좋을 거야. 내일 밤, 이 집으로 돌아와야 할 거야. 안 그러면 내가 직접 이씨 저택에 찾으러 갈지도 몰라.” 은하는 손에 쥔 계약서를 꽉 움켜쥐었다. 과거엔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계약이
은하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소파에 앉아 있는 윤호를 발견했지만,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 “거기 서.” 은하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윤호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디 가려고?” 은하는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저녁 8시가 다 되어 밖은 매우 어두웠다. “집으로 돌아갈 거예요.” 윤호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여기가 네 집이야.” 윤호의 말을 들은 은하는 이 집을 한동안 둘러보았다. 그녀가 지난 3년 동안 애정을 쏟아 관리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은하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윤호를 보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때 저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아니라고?” 윤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은하에게 다가섰다. 그는 고개를 숙여 차분한 표정으로 은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이 집은 뭔데?” 은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담담히 말했다. “당신에겐 호텔, 그리고 나에겐 감옥.” 윤호는 그녀의 대답에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참, 잘도 비유를 하네.” “사실이니까요.” 은하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돌아서려 했지만, 윤호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다시 돌아와.” 은하는 그의 품에서 몇 번 몸을 비틀며 벗어나려다 포기하고, 그의 가슴에 반쯤 기댔다. “돌아오라고요? 계속 당신 집을 지키는 개라도 되라는 건가요?” 윤호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감싸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날 좀 그만 세우면 안 될까?” 은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안 돼요. 절 지키기 위한 것이니까요.” 윤호는 그녀를 몇 초간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은하는 잠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럼 저를 놓아주세요.” 윤호는 이번에 진짜로 그녀를 놓아주었다. “내일 당장 짐을 싸서 이사 와.” 은하는 미간을 찌푸리며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아직도 제 말을 이해 못
장옥순은 한참 동안 넥타이를 풀려고 애썼지만, 전혀 풀리지 않았다. “어머, 이거 참 이상하네요. 왜 이렇게 안 풀리는 거죠?” 은하는 점점 더 세게 조여오는 넥타이에 손목의 통증을 느낀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주머니, 그만하세요. 제 화장대에 눈썹칼이 있으니, 그걸로 잘라버리세요.” “네, 바로 가져올게요.” 장옥순은 눈썹칼을 가져와 넥타이를 조심스럽게 잘라냈다. 은하는 손목을 돌려가며 뭉친 근육을 풀고,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한편, 장옥순은 아무렇지 않은 듯 숙련된 손길로 침대 시트를 바꾸려했다. 매번 두 사람은 시트를 더 이상 쓸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번엔, 시트가 의외로 깨끗했다. 단지 약간의 구김만 있었을 뿐, 다른 흔적은 전혀 없었다. 장옥순은 의아한 마음에 눈을 깜빡이며 욕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 그 분위기로 봐선 꽤나 난리였을 텐데, 왜 이렇게 깨끗한 거지?’ 장옥순은 두 사람이 함께 한 시간을 떠올리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설마... 이렇게 빨리 끝난 건가?’ 장옥순은 순간적으로 무언가를 깨달은 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치 엄청난 비밀을 알아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장옥순은 얼른 새로운 시트를 다시 내려놓고, 사용했던 시트를 정리하는 데에 그쳤다. 욕실에서 나온 은하는 찢어진 옷을 보며 한숨을 쉬고, 옷장을 열어 아무 옷이나 꺼내 입었다. 옷을 갈아입은 그녀는 방 중앙에 놓인 3미터짜리 침대를 바라보았다. 그 침대를 보자, 과거 결혼 초기의 기억이 떠올랐다. 윤호는 신혼 첫날밤, 집에 없었지만 그 뒤로 한 달 동안은 매일 집에 돌아왔다. 은하는 나중에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방옥자가 내린 엄격한 지시 때문이었다. 방옥자는 신혼 첫날밤, 일을 핑계로 아내를 홀로 두고 떠난 윤호의 행동에 화가 잔뜩 났었다. 그래서 이런 지시를 내려 은하를 보상해주려 했다.고씨 가문에서는 윤호와 유연의 일에 대
“제가 거부하는 걸 강제로 하시는 건 강간이나 다름없어요. 고윤호 씨, 당장 이거 놓으라고요!” 은하에게 있어서 손목이 묶인 건 매우 모욕적이었다.그녀의 눈은 분노로 붉게 물들었고 당장이라도 윤호를 물어뜯을 기세였다.윤호는 그녀를 눌러 제압하며 비웃듯 말했다. “내가 보기에 말과 행동이 다른 것 같은데?” 은하의 얼굴은 붉어 오르더니 곧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늘 윤호의 이런 모습을 감당할 수 없었다.은하는 분노와 수치심에 휩싸여 소리쳤다. “닥쳐요!” 윤호의 미간에 잠시 짜증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낮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경고했다. “다치고 싶지 않으면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야.” 그의 말에 은하는 공포와 불안감이 들어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외쳤다. “싫어요! 당장 이거 놔요! 이거 놓으라고요!” 은하는 정말 겁을 먹게 되었다. 윤호가 자기를 때린다고 해도, 은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도저히 그를 이길 수 없었다. 은하는 입술을 깨물며 버텼다. 그러나 윤호의 손이 멈추더니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은하 또한 긴장한 채 몸을 굳혔다. 그녀는 뭔가를 발견하게 되었다. 결혼한 지 3년. 은하는 이제 더 이상 순수한 소녀가 아니었다. 방 안은 갑자기 적막으로 가득했다. 윤호의 표정은 차갑고 어두웠다. 그의 눈동자에 스쳐 지나가는 복잡한 감정들이 마치 그를 더욱 깊은 어둠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은하를 내려다보며 손길을 멈췄다. 은하는 움츠린 채 작은 동물처럼 떨고 있었다. 윤호는 그녀를 뒤집어 눕히며, 은하의 놀란 표정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녀의 놀란 표정은 윤호의 얼굴을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네...’은하의 생각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고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향했다. 윤호는 이 모든 것을 보자 화가 폭발하기 직전까지 치달았다. 그는 머리가 욱신거리며 터질 것만 같았다. 윤호는 은하의
은주는 윤호가 자신의 동생을 차에 태워 떠나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고개를 돌려 차갑게 장유연과 소녀들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형사님, 제 동생의 의사는 이미 명확히 전달되었습니다. 합의할 생각은 절대 없으니 법에 따라 잘 좀 처리해 주세요.”경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유연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고, 유나는 불안에 휩싸였다. “언니!” 유연은 답답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꺼내 윤호에게 전화를 걸려 했지만, 정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유연 씨, 지금은 전화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유연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하지만...” 정민은 한숨을 내쉬며 설명했다. “대표님께서 지금 화가 많이 나 계십니다. 자칫하면 불통이 튈 수도 있어요. 게다가 진짜 처벌을 받는다 해도, 대표님께 다른 방법이 있으실 겁니다. 대표님을 믿으세요.” 유나는 초조한 눈빛으로 윤호와 은하가 떠난 방향을 바라봤다. 당사자도 떠났으니 더 이상 합의는 불가능했다. 결국 유연은 유나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유나야, 걱정하지 마. 언니가 반드시 해결해 줄게.” “정말이에요?” “언니를 믿어.” ...윤호는 은하를 강제로 차에 태운 뒤 운전대를 잡았다. 그가 향한 곳은 은하도 이미 알고 있는 그들의 별장이었다. “멈춰요. 멈추라고 했잖아요, 내 말 안 들려요?” 은하는 분노와 절망이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윤호는 문과 창문을 모두 잠갔기에, 은하는 차에서 뛰어내릴 수조차 없었다. 그의 오른쪽 얼굴에는 선명한 손자국이 남아 있었고, 각진 턱선은 굳어 있었다. 그리고 드러난 손등의 힘줄은 그가 얼마나 분노에 차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은하가 뭐라 말하든 윤호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차를 몰았고, 마침내 별장에 도착했다. 윤호는 은하를 차에서 끌어내며 낮고 말했다. “그렇게 힘이 남아돌아? 그럼 이따가
유나는 당황한 듯 흔들리는 눈빛으로 유연을 바라봤다. “언니, 얘네들도 모두 언니의 팬들이야!” 유연은 그깟 몇 명 안 되는 팬들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아직 팬들의 지지가 필요했기에 이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만약 자신이 이 소녀들을 경찰서에 내버려뒀다는 소문이 퍼지기라도 한다면, 분명 많은 팬들이 돌아설 것이다. “윤호야, 이 아이들은...” 그러나 은하는 갑자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들으셨죠? 주모자가 밝혀졌으니, 공범들은 용서해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의 주모자에게는 반드시 책임을 물을 겁니다.” 유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이 멍청이들!’ “언니!” 유나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유연의 팔을 꽉 붙잡았다. 은하는 더 이상 경찰서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고윤호 씨, 이거 놓으세요. 전 더 이상 당신과 할 말이 없어요.” 윤호가 그녀를 막아섰던 순간부터... 아니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은하는 이혼을 결심하고 있었다.윤호는 그녀의 단호한 말투에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난 할 말이 있어. 대체 어디 가려는 거야?” “이거 놔요!” 은하는 윤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지만, 윤호는 이마에 핏줄을 세우며 그녀를 강제로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고 대표님, 당장 놔주세요! 은하가 싫다고 말했잖아요!” 은주는 얼굴이 새파래지며 소리쳤다. 윤호는 그녀를 차갑게 쳐다보며 경고했다. “이 대표님은 저를 적으로 둘 생각인가요?” 그 말은 분명 협박이었다. 은주는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절 협박하는 겁니까?” 바로 그때, 은하가 손을 들어 윤호의 뺨을 세게 때렸다. “은하야!” 예상지도 못 한 상황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정민조차 눈을 크게 뜨며 긴장된 표정으로 은하의 손을 쳐다보았다. 유연도 깜짝 놀라더니 곧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이은하 씨,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유연은 윤호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그가 차가운 목소리
은주가 차가운 표정으로 무언가를 말하려는 순간, 은하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고개를 돌려 은하를 바라보자, 은하는 차분한 태도로 자신의 사건을 책임 진 경찰에게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합의할 생각 없습니다.” 경찰은 은하의 말을 듣고 잠시 시선을 소녀들에게로 옮겼다. 원래는 합의 시키려고 했지만, 은하의 차가운 눈빛을 본 뒤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유연 언니, 제발 좀 도와주세요. 저희는 단지 언니를 위해 복수한 거였어요. 이 여자가 언니를 밀었으니까...” 그러나 은하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은주의 팔짱을 끼고 부드럽게 말했다. “진술은 끝났으니, 집에 가자.” 유연은 점점 초조해지며 윤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윤호야...” 윤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냥 법대로 처리해. 처벌도 그렇게 심각하진 않을 거야.” 이 말을 듣자 유연의 마음은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녀도 팬들이 신경 쓰인 것이 아니었다. ‘이은하를 위해 내 체면을 깎아내린 거야?’‘도대체 왜? 이번은 처음이 아니잖아!’은하가 정말로 떠나려 하자, 갑자기 한 소녀가 불안한 목소리로 외쳤다. “사촌 언니!” 유연은 그 소녀를 쳐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중에 그녀의 사촌 동생도 있었던 것이다.그렇다면...유연은 윤호의 팔을 붙잡으며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윤호야, 저 아이 이름은 장유나야. 사실 내 사촌동생이거든.” 예상대로 윤호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그의 시선은 유나의 겁에 질린 얼굴로 향했다.은하와 은주가 경찰서를 나서려던 순간, 윤호는 은하의 팔을 붙잡았다. 은하는 멈춰 서서 윤호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의 검은 눈동자 속에 담긴 차가운 기운에 은하의 심장이 잠시 움츠러드는 듯했다. 윤호는 그녀의 표정이 점점 더 냉랭해지는 것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한숨을 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만 그냥 넘어가주자.” 은주는 그 말을 듣자 얼굴이 순식간에 차가워지더니 쏘아
사실 정민이 가장 먼저 빨간색 BMW를 발견했지만,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윤호는 그 차를 몇 초간 쳐다보다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은하는 어느새 시선을 돌려 조용히 윤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윤호는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은하가 먼저 입을 뗐다. “놓아주세요.” 윤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왜 놓아야 하지?” 은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누가 보면 속상해할 테니까요.” 은하는 고개를 돌려 경찰서 입구를 바라봤고, 곧 계단 위에 서 있는 장유연을 발견했다. 유연은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은하는 윤호의 손을 세게 뿌리치며 놓아버렸다. 그러자 윤호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또...” “윤호야...” 유연이 입을 열자, 은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장유연과 스쳐 지나가면서도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장유연은 그녀에게 있어서 공기 같은 존재였다. 어디에나 있지만, 너무 흔해서 특별할 것도 없는 그런 존재였다. 유연은 은하가 자신을 무시한 것에 화가 났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며 윤호를 바라봤다. 윤호는 은하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다가, 은하에게 뿌리쳐진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장유연 쪽으로 걸어갔다. “윤호야, 두 사람이 왜...”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유연은 당황한 표정으로 윤호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을 반기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왜일까? ‘혹시 내가 저지른 일이라고 오해한 걸까?’“윤호야, 설마 내가 저지른 일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윤호는 그녀를 차갑게 쳐다보며 대답했다. “아니라는 거 알아.” 유연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그녀의 표정은 한층 부드러워졌다. “나도 방금 알게 된 일이야. 그래서 너한테 전화했는데, 네가 하도 안 받
그러나 은하가 전화를 끊자마자 윤호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번호를 확인한 뒤 전화를 받지 않고 주머니에 넣으려 했다. 그러나 마침 은하의 차가운 시선과 마주쳤다. 은하는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곧바로 고개를 돌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은하는 의자에서 일어나 말없이 문 쪽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윤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얼굴을 굳히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디 가려고?” 은하는 그를 담담히 쳐다보며, 그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힐끗 보고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당연히 경찰서죠. 같이 가실래요?” 윤호는 순간 멈칫했다. 오랜만에 본 그녀의 미소였다. 윤호는 그녀의 손목을 잡은 채 엄지로 천천히 그녀의 손목을 문질렀다. “내가 같이 가줬으면 좋겠어?” 은하는 입을 오므리며 담담한 말투로 대답했다. “마음대로 하세요.” 윤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고, 곧 그녀의 손목을 잡던 손을 놓고 깍지를 꼈다.“같이 가줄게.” 은하는 입술을 오므린 채 저항했다.“이거 놓으세요. 전 혼자 걸을 수 있어요.” “난 손을 잡고 있는 게 좋아.” 그의 이 말에 은하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윤호는 고개를 약간 숙이며 그녀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리고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왜 그래?” “예전엔 제 손을 잡는 걸 싫어했잖아요.” 윤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은하의 말처럼,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다녔던 기억은 거의 없었다. 윤호는 자기도 모르게 눈빛이 깊어졌다. “앞으로는 계속 잡을 거야.” 은하는 그의 말을 듣고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더는 상관없는 일이었다.예전에 언제나 은하가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그를 바라보았지만, 윤호는 단 한 번도 뒤돌아서서 은하를 본 적이 없었다. 만약 윤호가 한 번이라도 돌아보았다면, 어쩌면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윤호가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기에 은하의 마음이 완전히 식어버린 것이다. 윤호가 전과 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