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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작가: 구름위에
last update 최신 업데이트: 2024-12-02 16:23:42
이 편지는 결혼하기 직전에 배정빈이 서달희에게 쓴 것일까?

그리고 다른 한 통은 서달희가 배정빈에게 보내온 답장이었다.

[네가 보낸 편지, 내 편지봉투 안에 넣어 함께 돌려보낸다.]

[정빈아, 나 지금 정말 행복하게 잘살고 있으니, 나를 축복해 주길 바라.]

[그리고 앞으로 나에게 연락하지 말아줘. 내 남편이 오해할까 봐 두려워.]

이 두 통의 편지를 읽고 나니, 그동안 계속 풀리지 않았던 모든 의문이 하나로 수렴했다.

서달희는 분명 배정빈의 ‘첫사랑’, 그의 마음속 깊이 각인된 첫사랑이었다.

그런데 배정빈은 무슨 이유로 그렇게 서달희를 증오했던 걸까?

나는 무의식적으로 청소하던 손에 쥔 대걸레를 더 꽉 움켜쥐었다.

알고 보니, 그것은 서달희가 한때 배정빈을 배신했기 때문이다.

배정빈은 서달희가 과거에 저질렀던 실수에 애써 눈감고, 그녀가 자신에게 남긴 상처를 외면하며, 그저 그녀가 다시 자신의 곁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서달희는 배정빈을 다시 한번 냉정히 거절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결혼식장에서 배정빈의 친구들이 서달희를 언급했을 때, 남편의 반응이 왜 그렇게 격렬했는지.

그러면 지금은?

이제 와서 이 편지들을 다시 꺼내놓은 이유는 뭘까?

혹시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걸까?

“이제는 서달희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고, 차가운 거절을 받아들이며 앞으로는 아내와의 삶에 집중하자.”

아니면, 뭔가 두려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내를 버렸다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서달희에게 달려간다고 해도, 서달희는 결국 그를 받아주지 않을 거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걸까?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갈등하고 있는 걸까?

미련과 두려움, 그리고 후회라는 감정의 무게가 나를 눌러오자 눈을 꼭 감았다.

가슴이 너무 아파서, 이 고통 때문에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아마도 은찬이 말대로일 것이다.

배정빈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서달희뿐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배정빈은 서달희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며, 그 어리석은 선택이 나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가 될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띵동-

멍하니 서재 가운데에 선 채 시간이 지나갔다.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 속에서,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그러다 갑자기 핸드폰 벨소리가 침묵을 깼다.

그 순간, 돌덩이처럼 무감각했던 마음이 비로소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배정빈은 평소보다 더 매력적인 중저음의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그는 여전히 다정했다.

[뭐 하고 있어?]

배정빈은 언제나 내 앞에서 이런 식이었다.

사려 깊고, 너그러우며, 낯선 도시에서 혼자 지내는 내가 불안해할까 봐 늘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

그는 어떤 순간에도 나를 감싸주었고, 심지어 나에게 말을 걸 때 단 한 번도 강한 어조를 쓴 적이 없었다.

남편이 이렇게 친절하다면, 나도 그에게 만족하는 게 맞을 텐데...

하지만 이제는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불같은 사랑에 빠졌던 내가 먼 길을 달려 이 남자가 사는 도시로 찾아와 그와 결혼이라는 문턱에 다다르길 기대하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하지만 나의 마음 반대편에서 배정빈은 첫사랑에게 돌아와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지나정이 찾아오지만 않았더라면, 달희와 화해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텐데...”

배정빈이 그런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내 가슴 한편이 깊이 내려앉았다.

[왜 대답을 안 해?]

내 대답이 늦어지자, 배정빈은 조금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의 말투는 평소처럼 부드러웠지만, 나는 그 안에 숨은 미묘한 긴장감을 놓치지 않았다.

더 이상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답은 침묵이 아니었다.

나는 탁자 위에 놓인 사진과 편지를 바라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바닥을 닦고 있어.”

[내가 전화한 이유는, 자기에게 꼭 알려 주고 싶어서...]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 조심스럽게 이어갔다.

[책상 위에 중요한 기밀문서가 있으니까 서재는 치우지 않아도 돼. 저녁에 집에 돌아가서 내가 직접 정리할게.]

예전 같았으면 나는 웃으며 장난스럽게 받아쳤을 것이다.

“나도 보면 안 되는 거야?”

배정빈의 당황하는 얼굴을 상상하며 웃음 지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이 남자의 한마디 한마디가 더 이상 편안하게 들리지 않았다.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알겠어.”

배정빈은 전화를 끊었다.

나는 걸레를 들고 그의 서재에서 천천히 빠져나왔다.

‘배정빈이 내가 그 두 통의 편지를 보지 않길 바라는 이유가 뭘까?’

‘설마 그 편지를 내가 보면 나와 결혼할 때 자신이 진심이 아니었던 것을 나에게 들킬까 봐... 내가 알아버릴까 봐 겁나서?’

‘아니면, 자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사람이 서달희라는 걸... 내가 알게 될까 봐?’

‘혹은... 이미 나를 버리고 서달희와 아이들과 함께 진정한 가족을 이루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걸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수록, 내 가슴속 깊은 곳은 서늘해졌다.

이렇게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온 부부의 사랑도, 결국 신기루에 불과할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딩동-

문 벨 소리가 울리자,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벽에 걸린 시계를 흘깃 보니, 어느새 배정빈의 퇴근 시간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지만, 은찬이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의아한 마음에 물었다.

“아들은?”

“아직 삐쳐서 집에 오기 싫대.”

배정빈이 자연스럽게 다가와 나를 안으며 말했다.

“우리 둘이 오랜만에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냥 어머니댁으로 보냈어.”

나를 안으며 턱을 내 어깨 위에 기대는 그의 목소리에는 장난스러우면서도 애교가 섞여 있었다.

“여보.”

나는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도대체 이 남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의심이라는 씨앗은 한 번 심어지면,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는 잡초 같다.

결혼 초, 배정빈은 나밖에 모르는 대단한 사랑꾼 남편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에도, 그는 여전히 서달희를 마음에 숨기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남자는 나에게 깊은 애정을 가진 척 연기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세상 다정한 남편이지만, 그의 진심이 어디에 있는지는 너무도 분명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의문이 멈추지 않았다.

배정빈이 지금 정말로 나를 사랑하는 걸까, 아니면 여전히 그런 척하는 걸까?

그는 손을 내려 내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응?”

배정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 아이 하나 더 낳을까?”

나는 놀라며 멈칫했다.

“갑자기 왜?”

“오늘 회사에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

그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예전에 나는 서달희를 정말 좋아했는데 그 사람이 돌아와서 다시 만나본 뒤로는...”

“역시 당신과 함께하는 시간에 내가 가장 행복하다는 걸 알았어.”

나는 무의식적으로 배정빈을 돌아보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 남자의 표정은 진지했고,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는 망설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마음 다잡고 나랑 제대로 살아봐.”

배정빈은 양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고 미소를 지으며 내 입술에 키스했다.

“아까 은찬이랑 얘기했어. 우리 아들도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너도 알잖아, 내 꿈은 아이가 둘이라는 거.”

“그러니까 여보...”

“내 부탁 들어주면 안 될까?”

그의 눈빛은 너무도 진지하고 간절해서 나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

이미 아들이 하나 있는데, 딸을 하나 더 낳는다면, 배정빈이 마음을 다잡고 나와 행복하게 살 수 있겠지. 은찬이도 동생이 생기면 오빠로서 더 책임감을 느끼며 의젓해질 것이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것 같은 그런 꿈 같은 미래에 마음이 흔들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배정빈은 내가 동의한 것을 보고는 한 손으로 내 허리를 감싸고, 다른 손으로 내 머리를 감쌌다. 그리고 거부할 수 없는 깊은 키스가 이어졌다.

나는 눈을 감고 그를 받아들이며 속으로 다짐했다.

‘이 사람이 어쨌든 실제로 외도를 한 건 아니니까...’

‘그리고 이제 서달희와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하겠지.’

‘은찬이 문제는 내가 조금 더 인내하며 천천히 가르치면 될 것 같고.’

‘앞으로 우리는 평범한 가족으로 살아갈 수 있을 거야.’

띵띵띵!

이때, 맑고 경쾌한 핸드폰 벨 소리가 분위기를 깨뜨렸다.

배정빈은 누구에게서 온 전화인지 보지도 않고 핸드폰을 끄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온몸의 피가 순간 차갑게 식었다.

나는 배정빈을 세게 밀치며 말했다.

“서달희!”

‘분명 서달희와의 모든 연락을 끊겠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어떻게 서달희가 여전히 이 사람에게 연락하는 거지?’

내 머릿속은 복잡한 의문들로 어지러웠지만, 배정빈은 내 눈치를 살필 겨를도 없이 급히 핸드폰을 들었다.

[정빈아, 어떡해! 은찬이 배탈이 나서 지금 병원에 데리고 왔어!]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서달희의 목소리는 떨리고 다급했다.

그 순간, 나는 배정빈의 굳어진 표정을 보며 말문이 막혔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서둘러 변명하려는 그의 모습을 보고, 이 남자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더 이상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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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의 봄날처럼   제11화

    배정빈은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그럴 수는 없어!” “요새 일이 좀 많았잖아.”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처음엔 은찬이가 서달희와 잘 지내고 싶다고 고집부렸잖아...” 평소 침착하고 냉정한 배정빈이었지만, 지금 그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그건 아이가 철이 없어서 그래. 여보, 나는 단 한 번도 선을 넘은 적이 없어.” “당신이 은찬이를 원망하든 나를 미워하든 상관없어...” “하지만 제발 날 떠나지 마.” 그는 말을 마치며 거의 애원하듯 말했다. 그러나 배정빈은 여전히 책임을 은찬이에게 떠넘기고 있었다.내가 겪은 모든 고통은 모두 배정빈이 묵인하고 방조해온 자신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임을 그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그는 몰랐겠지만, 이 남자에게 품었던 나의 깊고 짙은 사랑은 어제 계단에서 떨어지던 그 순간 모두 사라져 버렸다.“그리고, 배정빈 씨!! 당신은 분명 나에게 서달희와 더 이상 연락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면서도... 여전히 그 여자와의 관계를 끊지 않았잖아.” 배정빈의 입이 벌어졌다가 다시 닫혔다. 내가 그의 은밀한 행동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그는 주먹을 쥐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때 나는 차라리 이혼하고 너희 둘이 사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은찬이가 마음에 걸렸어.” “서달희와 접촉한 이후로 아이의 위장은 망가지고, 이제는 자해까지 배우게 되었으니까...” “정말로 아이가 원하는 대로 서달희가 은찬이 엄마가 된다면, 아이의 삶이 얼마나 더 비참해질지 안 봐도 뻔하잖아.” 배정빈은 내가 마음을 돌릴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여보. 그러니까 우리는 이혼할 수 없어.” 나는 배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만나지 못한 그 아이를 떠올리자 억눌렀던 감정이 삐져나왔다. “그리고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아이를 위해서라도, 나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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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의 봄날처럼   제12화

    마지막으로 어떻게 할지 잠시 망설이던 배정빈은 결국 은찬이를 데리고 병실을 나갔다. ... 두 부자가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간호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직 형체를 갖추지 못하고 유산된 그 불쌍한 아이를 어떻게 처리할지 묻는 내용이었다. 간호사는 내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나를 자극하지 않으려 먼저 내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나에게 연락한 것이라며, 언제쯤 서류에 서명하고 절차를 진행할 수 있는지 물었다. 나는 현재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조금 움직이는 것도 무리였다. 하지만, 그 아이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나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늦게 간다면 아이가 서운해할 것 같았다. “지금 가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답하고 병실 문을 나섰다. 절차를 밟은 후, 누군가가 작은 상자를 내게 건넸다. 나는 그 상자를 조심스럽게 들고 혼자 택시를 타고 묘지로 향했다. 만나지 못했던 내 불쌍한 아이를 위해 묘지를 하나 샀고, 그곳에 아이를 안장했다. 모든 절차를 마치고 나서도, 나는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나는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묘지 옆에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 그동안의 여러 충격적인 일들로 이미 모든 감정이 마비되어 버린 줄만 알았다. 그러나 가슴 깊은 곳에서 둔탁한 통증이 계속 전해져 왔다. ‘아가야, 안심해... 엄마는 너를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두지는 않을 거야.’ ... 병실로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병상 앞에 서 있는 배정빈이었다. 그는 내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나를 보더니, 곧바로 내 앞으로 다가와 내 팔을 꽉 잡았다. “어디 갔었어?” 나는 너무 지쳐버렸다. 계단에서 굴러 유산한 탓에 몸은 약해질 대로 약해져 천근만근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하루 종일 이름도 없이 떠난 아이의 뒤처리를 위해 뛰어다니느라 심신이 모두 지쳐 있었다.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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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 챕터

  • 당신의 봄날처럼   제30화

    배정빈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나는 발신인을 확인하고, 아직 배정빈을 차단하기 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면 어쩌겠어?” 내 태연한 대답에, 그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당신이 은찬이를 데리러 가지 않아서 아이가 유치원 앞에서 밤 9시까지 혼자 기다렸다가 결국 9시가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는 걸 알기나 해?” 나는 평온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건 나한테 따질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배 대표님.” “지금은 서달희가 은찬이 엄마잖아. 그리고 나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발코니로 나가 멀리 바라보았다. 검푸른 밤하늘, 반짝이는 별빛과 저 멀리 펼쳐진 가로등 불빛이 보였다. “그냥 낯선 사람일 뿐이고.” 내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배정빈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말했다. [아직도 우리를 원망하고 있는 거야?] “아니.” 나는 느릿느릿 대답했다. “전 그냥 새 삶을 살고 있어... 굳이 과거의 사람들과 얽히고 싶지 않아.” “그쪽 생각은 어때?” 나는 더 이상 배정빈에게 대답할 기회를 주지 않고 전화를 끊은 뒤, 바로 그를 차단했다. 똑똑똑-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곧장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기쁨이 긴 귀를 가진 토끼 인형을 안고 서 있었다. 아이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뒤에는 하지훈이 조금 곤란해하는 얼굴로 서 있었다. “기쁨이가 단 걸 먹어서 밤에는 꼭 양치질해야 해요. 그래서 깨웠는데...” 그는 이마를 문지르며 덧붙였다. “엄마랑 같이 양치하고 싶다면서 고집을 부리네요.” 기쁨은 조금 민망한 듯 작게 말했다. “우리 반 친구들은 다 엄마랑 같이 양치한다고 했어요. 근데 내 엄마는... 같이 해준 적 없어요.” 아이의 소박한 바람을 내가 들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럼 기쁨이는 엄마 방에서 양치하고 싶어, 아니면 네 방에서 하고 싶어?” 기쁨의 두 눈이 금세 반짝였다. “엄마 방에

  • 당신의 봄날처럼   제29화

    기쁨이는 하지훈 옆자리에 앉더니 옆에 있는 자리를 톡톡 손으로 두드렸다. “엄마, 여기 앉아요!” 나는 아이의 요청에 따라 옆에 앉았다. 기쁨이는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 소원 빌어봐요!” 흔들리는 촛불을 바라보며 나는 눈을 감고 조용히 속으로 소원을 빌었다. ‘기쁨이가 점점 더 건강해지길... 그리고 우리가 오래도록 행복하기를...’ 눈을 뜬 뒤, 나는 힘껏 촛불을 불어 껐다. 기쁨이는 즉시 내 옆으로 다가와 작은 몸을 내게 바싹 붙이며 물었다. “엄마, 무슨 소원 빌었어요?” 내가 대답하려던 찰나, 하지훈이 먼저 나 대신 말을 꺼냈다. “기쁨아, 소원은 입 밖으로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거야.” 기쁨이는 마음속에 담긴 궁금증을 숨기지 못하고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그렇구나.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어린아이가 입술을 삐쭉 내밀며 아쉬워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나는 케이크 한 조각을 잘라 아이에게 건넸다. “그럼 먼저 케이크 좀 먹자.” 기쁨은 두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근데 아빠가 밤에 단 거 먹으면 안 된대요. 이가 상한다나 뭐라나.” 기쁨이는 마치 하지훈을 고발이라도 하듯 말을 덧붙이며 동시에 자신이 케이크를 먹을 수 없는 이유를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하지훈을 바라보았다. 하지훈은 어색하게 기침을 두 번 하더니 말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조금 먹어도 돼.” “야호!” 하지훈의 허락을 받자마자, 기쁨은 행복에 가득 찬 표정으로 작은 포크로 케이크를 크게 한 덩어리 떼어 입안에 넣었다. 그녀의 큰 눈이 기쁨으로 반짝이며 말했다. “케이크 진짜 맛있다!” 기쁨이가 케이크를 먹는 동안, 나는 하지훈에게도 한 조각을 잘라 주고 마지막으로 내 몫을 잘랐다. 기쁨이가 케이크를 들고 목소리를 높였다. “건배!” 하지훈과 나는 아이의 천진난만한 외침에 맞춰 케이크를 들고 가볍게 부딪쳤다. 기쁨은 매

  • 당신의 봄날처럼   제28화

    상대방은 내가 은찬이의 보호자인지 물으면서도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배은찬 어린이의 담임교사입니다. 지금 수업이 끝났는데, 가족분이 아직 아이를 데리러 오지 않으셨습니다. 혹시 집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여쭤보려고 연락드렸습니다.] 선생님은 예의 있게 상황을 물었다. ‘이혼 전까지만 해도... 서달희가 매일 은찬이를 적극적으로 데리러 다니지 않았나?’‘이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서달희는 벌써 아이를 내팽개쳤단 말이야?’ 예상치 못한 상황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어차피 이제 그 가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니, 나도 굳이 나설 이유가 없었다. “선생님, 저는 같은 반에 다니는 하기쁨 엄마이고, 배은찬과는 관계없어요.” 나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마 선생님이 전화를 잘못 거신 것 같네요.” 선생님은 급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번거롭게 해드렸네요.]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나는 담담히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내 핸드폰 벨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배정빈의 전화였다. 나는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죠?” 배정빈은 불편한 목소리로 물었다. [은찬이를 좀 데리러 가줄 수 있을까?] 엘리베이터 벽에 비친 내 모습은... 조금 전까지 미소로 가득했던 얼굴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안 돼.” 나의 부드럽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갑게 굳었다. “배 대표님, 혹시 잊었나? 이제 이혼한 사이잖아.” “특별히 급한 일이 아니면, 다시는 나에게 연락하지 마.” 배정빈은 다급하게 말했다. [지금 달희와 쇼핑 중이라...] “그런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아.” 나는 차갑게 말을 끊었다. “굳이 나에게 보고하지 말고.” [하지만 아이가 아직 유치원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아무도 데리러 가지 않아서.] 배정빈은 내가 전화를 끊을까 봐, 한꺼번에 말을 쏟아냈다. [나는 지금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어. 나정아, 제발 부탁이야

  • 당신의 봄날처럼   제27화

    ‘나에게 사랑스럽고 속 깊은 딸이 생겼구나...’ ‘그리고 내 딸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 줄 거고...’ 그렇게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훈은 시선을 거둔 뒤 다시 일에 몰두하며 말했다. “방 정리는 아직 못 한 것 같네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바로 정리할게요.” ... 내 방은 2층 동쪽 끝에 있었다.방은 넓었고, 별도의 드레스룸도 있었다. 채광이 아주 좋았고, 넓은 발코니까지 있었다. 지금은 커튼이 열려 있어, 햇살이 침대 위로 듬뿍 쏟아져 아늑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나는 바로 정리하지 않고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고요함과 마음의 평온을 한참 만끽했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평생 이렇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충분히 쉰 뒤, 나는 옷걸이에 옷을 걸기 위해 여행용 가방을 드레스룸으로 끌고 갔다. 그러나 옷장을 열자마자, 이미 옷으로 옷장 안은 가득 차 있었다. 드레스, 티셔츠... 다양한 스타일과 디자인의 옷들이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다.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나는 다시 가방을 닫고 1층으로 내려갔다. 마침 외출 준비를 하던 하지훈에게 말했다. “대표님, 저에게 배정해 주신 방, 누가 이미 쓰고 있는 것 같아요.” 하지훈은 태연히 대답했다. “아니에요. 그 방은 나정 씨를 위해 준비한 방이에요.” 나는 내 방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드레스룸 안의 많은 옷들은 분명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그런데 드레스룸에 옷이 많던데요?” “아.” 하지훈은 전혀 놀라지 않은 듯 말했다. “기쁨이가 나정 씨 온다는 얘길 듣고 엄청나게 신났었어요. 그래서 저를 졸라 같이 쇼핑하러 가서, 나정 씨에게 드릴 옷을 골랐죠.”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거실에서 나에게 필요한 물건을 묻던 하지훈의 말은 단순히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해

  • 당신의 봄날처럼   제26화

    입원 병동에는 환자들이 많았다. 병실이 부족해 복도에까지 환자들이 머무르는 경우도 허다했다. 환자들의 상태는 대체로 심각했고, 여기에 장기 입원하는 경우도 많았다. 내가 입원했을 때는 이미 있던 환자들이 대부분이었고, 내가 퇴원할 때도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 나는 병동을 걷다가 금세 몇몇 익숙한 얼굴들과 마주쳤다. 연세 지긋한 할아버지가 나를 보고 물었다. “아니, 퇴원한 줄 알았는데 어쩐 일이야? 병원에 또 온 거야?” “며칠 전에, 제가 계단에서 떨어졌거든요.” 나는 숨기지 않고 말했다. 왜냐하면 혹시라도 이 사람들이 뭔가를 봤거나, 그 사건을 촬영한 사람이 있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정보를 이 사람들에게 밝히고 싶진 않아서 바로 대충 설명했다. “그때 계단이 너무 미끄러웠어요. 마치 누군가 고의로 저에게 무슨 짓을 한 것 같아서요.” “그래서 혹시 근처에 CCTV가 있는지 확인하려고요. 여기 CCTV가 있다면,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기록됐을지도 모르니까요.” 할아버지는 매우 친절하게 말했다. “CCTV라면, 복도에 다 있어. 보안실에 가면 CCTV 화면을 볼 수 있을 거야.” “네, 알겠습니다.” ‘CCTV가 있다니, 이거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겠지.’ 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바로 확인하러 가볼게요!” ... 병동의 비상계단은 거의 사람이 출입하지 않아서 조용한 곳이었다. 내가 떨어졌던 그곳은 이미 청소가 돼서 피의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바로 내 머리 위에 CCTV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내가 떨어졌던 지점 바로 위에도 또 다른 CCTV가 설치돼 있었다. 즉, 이 병원의 CCTV는 매우 촘촘히 배치돼 있었고, 심지어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비상계단에도 설치되어 있었다.이 사실을 확인하자 마음이 놓여서 나는 바로 보안실로 달려갔다. 나는

  • 당신의 봄날처럼   제25화

    유치원 선생님이 다가와 은찬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은찬아, 이분은 기쁨이 어머니이셔. 오늘 기쁨이를 데려다주신 거니까 오해하지 마.” “그럴 리가 없어요!” 은찬이는 생각할 틈도 없이 반박했다. “이 아줌마는 분명히 제 엄마예요!” 나는 차갑게 은찬을 끊었다. “친구야, 가족관계를 함부로 아무렇게나 말하지 마. 난 너 같은 아들을 둔 적 없으니까.” 은찬이는 놀라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옆에 있던 선생님도 은찬이를 타일렀다. “지난번에 그분이 널 데리러 왔을 땐, 네가 모른다고 하지 않았니? 그런데 오늘은 갑자기 자기 엄마라고 하다니, 정말 이상하구나.” 은찬이는 내가 차에 올라타고 아무 미련 없이 떠나는 뒷모습을 보고, 속으로 기뻐했다. ‘엄마가 정말로 나를 버렸어! 이제부터는 마음껏 달희 엄마와 행복하게 살 수 있겠지!’ 은찬이의 얼굴에는 처음 나를 보았을 때의 불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기쁨으로 가득 차서 교실로 뛰어갔다. 기쁨이는 그런 은찬이의 뒷모습을 보며 불만스럽게 코웃음을 쳤다. ‘바보 같은 녀석. 자기가 얼마나 좋은 엄마를 놓쳤는지도 모르고 말이야!’ ... 차가 달리고 있었다. 하지훈과 나는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하지훈은 나를 바라보며 뭔가 캐내려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나는 그 시선을 느끼고 문득 불편해졌다. “대표님, 제가 왜 은찬이에게 그렇게 냉정하게 대했는지 궁금하신 건가요?” 하지훈은 부정하지 않았다. “네, 그 아이... 그래도 나정 씨의 친아들이잖아요.” 나는 그제야 하지훈이 내가 계단에서 떨어진 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이었고, 따라서 당시 사건의 전말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마치 영원히 녹지 않는 얼음덩어리 같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서달희가 계단에 미리 손을 써 놨어요. 그런데 제 친아들인 은찬이는 제가 떨어지는 걸 보고도 모르는 척 지나쳤어요.” “그 이유는 단 하나, 제가 자기 아빠랑 이혼해서 서달희랑

  • 당신의 봄날처럼   제24화

    나는 하지훈을 바라보자 하지훈이 덧붙였다. “게다가 둘은 같은 반이에요.” 기쁨은 뭔가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기쁘게 말했다. “저는 우리 반에서 모든 친구를 다 관찰했는데, 은찬이가 가장 잘 돌봄을 받고 있어요!” “그때 저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은찬이 엄마가 내 엄마가 되어주면 정말 좋겠다고요!” 기쁨이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지금 제 꿈이 이루어졌어요.” ‘기쁨이는 어떻게 이렇게 예쁘고 귀여울 수 있지?’ 아이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차가웠던 내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나는 기쁨이의 동그란 얼굴을 미소 지으며 바라보았다. “축하해.” 기쁨은 멍청히 웃으며 다시 식사를 이어갔다. “하 대표님, 제가 이미 기쁨이 엄마가 되기로 했으니, 진짜 엄마처럼 기쁨이를 책임지고 유치원에 등원시켜야 하지 않겠어요?” 나는 하지훈을 바라보며 말했다. “유치원에 누가 있든 상관없어요. 제가 기쁨이 등·하원 다 시킬 거예요.” 하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부탁이라니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 기쁨이가 나와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만 봐도, 아이가 많이 회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집에 있는 다른 어느 누가 말을 걸어도, 기쁨이는 여전히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심지어 하지훈이 무슨 말을 해도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는 의사표시를 하는 정도였다. 나는 차 안에서 옆에 앉아 있는 기쁨을 보며 깨달았다. ‘하 대표님이 왜 굳이 나를 기쁨이 엄마로 고용하고 싶어 했는지... 이제 알겠어.’ ‘내가 아니었다면, 이 아이의 상태는 더 나빠질 수도 있었을 거야.’ 차가 유치원 앞에 도착했다. 나는 기쁨이의 손을 잡고 유치원으로 향했다. 유치원 선생님들은 지난번 사건 이후로 나를 알아본 듯했다. 선생님들은 모두 경계심을 품고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훈은 선생님들의 표정을 보고

  • 당신의 봄날처럼   제23화

    기쁨이의 방은 매우 넓었고, 마치 애니메이션 속 공주님의 방처럼 정교하고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기쁨이는 겹겹이 레이스를 쌓아 올린 공주 드레스를 입고, 긴 귀를 가진 토끼 인형을 품에 안고 있었다. 그녀는 문을 등지고 카펫 위에 앉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하지훈은 서둘러 기쁨이를 달래려 애썼다. “기쁨아, 누가 왔는지 보렴.” 기쁨은 고개만 돌렸을 뿐, 하지훈을 보지도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훈은 나를 향해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물론, 이건 내 일이긴 하지만, 나는 늘 딸을 갖고 싶었다. 기쁨이는 정말로 마치 작은 공주 인형 같았다. 이 아이는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기쁨이에게 애정이 생겼다. 나는 일부러 고민하는 척하며 말했다. “아, 기쁨이는 엄마를 환영하지 않는구나.” 기쁨이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고개를 돌렸다. 내 얼굴을 보고는 벌떡 일어나 작은 발걸음으로 나에게 달려왔다. 기쁨이는 기뻐서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아이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왜 엄마랑 말하지 않아? 혹시 엄마가 싫어서 그러는 거야?” 기쁨은 다시 고개를 저으려다, 자칫 내가 오해할까 두려웠는지 결국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아니에요, 저는 엄마 엄청나게 좋아해요.” “엄마도 기쁨이 좋아해.” 나는 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말했다. “그리고 기쁨이 목소리 듣는 것도 좋아. 그러니까 기쁨이가 엄마랑 더 많이 이야기할 수 있겠니?” 기쁨이는 작은 어른처럼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요, 알겠어요.” 기쁨은 오랜 시간 입을 닫고 지냈기 때문에, 갑자기 누군가와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 분명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이를 천천히 이끌며 물었다. “들었는데, 요즘 기쁨이 밥 잘 먹지 않는다며? 지금 배고프지 않아?” 기쁨은 고개를 숙이고, 작은 손으로 배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응!”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우리 밥 먹으러 갈까?” 기쁨은 처음에

  • 당신의 봄날처럼   제22화

    내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배정빈의 눈빛은 복잡했다. “나정아... 돌아왔구나. 그 사람이... 당신을 해치진 않았지?” ‘허! 정말 가증스럽군!’ 이제 와서 내가 다른 남자와 무슨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니, 가식적으로라도 ‘여보’라고 부르지도 않는군! “아, 그 사람은 나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그냥 앉아서 잠깐 대화만 나눴어.”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진실을 말했다. “미안하다... 나정아,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배정빈은 여전히 믿지 못하는 얼굴로 가식적인 사과를 늘어놓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가 믿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조현석은 앞으로 서달희의 악행을 폭로하는 데 중요한 증인이 될지도 모르기에, 굳이 배정빈에게 더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배정빈을 무시하고 나는 옆에 있는 창고에서 내 여행 캐리어를 꺼내왔다. “가자.” 이혼 후에도 나는 계속해서 증거를 모을 것이다. 배정빈 부자가 이 가짜 행복에 취해 있는 동안, 그 모든 진실을 한순간에 드러내고 말 것이다.‘배정빈 부자가 그때도 과연 지금의 이런 ‘행복한 가족’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지 참 궁금하군.’ ... 이번에는 배정빈이 매우 협조적으로 나와서 순조롭게 협의이혼 절차를 진행할 수 있었다. 여행용 가방을 들고 떠나려 했지만, 배정빈은 내 뒤를 따라왔다.“나정아, 어쨌든 내 잘못이야. 하지만 당신이 나랑 이혼하고 아무것도 받지 않았잖아. 게다가 당신은 직장에서 일해 본 경험도 없으니, 밖에서 일을 구하기 어려울 거야.” “내 생각인데, 우리 집에 와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건 어때? 내가 월급 줄게.” ‘뭐? 너희 네 식구를 위해 일하면서 눈치까지 보며 살라고?’ ‘내가 그렇게 비참해 보이니? 네 맘대로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존재야?’ 나는 배정빈은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배정빈, 참 뻔뻔하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배정빈은 자신의 호의를 무시당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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