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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작가: 구름위에
last update 최신 업데이트: 2024-12-02 16:23:42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말 때문에 나는 한참 동안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 잠시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것 같은 상태였다.

나는 놀란 눈으로 배정빈을 바라보았다.

‘분명 아까는 은찬이를 시어머니댁에 데려다줬다고 하지 않았어?’

‘어머니는 은찬이 건강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데, 절대로 아이에게 함부로 음식을 주실 분이 아니야. 그런데 왜 은찬이가 병원에 갔다는 거지?’

머릿속에 의문이 꼬리를 물며 끝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서달희는 대체 어떻게 은찬이 상태를 알고 있는 거야?’

다시 한번 간담이 서늘해졌다.

마치 모든 퍼즐 조각이 하나둘씩 맞춰지며, 뭔가 다른 이야기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어느 병원이야?”

배정빈은 황급히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들며 물었다.

서달희는 전화 너머로 울먹이며 병원의 이름을 말했다.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을수록, 내 마음은 더욱 복잡해졌다.

무엇보다 아이에 대한 걱정이 내 모든 감정을 삼켜버렸다.

나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배정빈을 따라나섰다.

그제야 배정빈은 내 존재를 알아챘다.

내 안색이 좋지 않다는걸, 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 내가 폭발하기 직전의 상태처럼 보였겠지만, 그는 끝내 참고 침묵을 유지했다.

배정빈은 차 문을 열고 재빨리 운전석에 앉았다.

나도 조용히 조수석에 올라탔다.

가는 내내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차 안은 무겁고 답답한 침묵으로 숨이 막혀왔다.

하지만 그 20여 분 동안, 내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뒤덮고 있던 퍼즐 조각들이 점차 정리되기 시작했다.

결국,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배정빈은 분명 아이를 데리고 나와 서달희와의 연락을 끊겠다고 약속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내 눈을 피해 은찬을 서달희에게 맡겼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눈치채지 않도록, 심지어 나와 둘째 아이를 갖자는 핑계를 내세워 내 경계를 허물어뜨리려 했을 것이다.

그의 이중적인 태도가 너무도 명확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알고 보니, 이 집에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 사람은 나 혼자였다.

배정빈과 은찬의 마음속 저울은 이미 오래전에 서달희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곧장 수액실로 달려갔다.

넓은 공간 한쪽, 은찬이는 고개를 벽에 기대고 혼자 잠들어 있었다.

나는 은찬이 곁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잠든 아이의 작은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천진난만하게 잠든 모습이 나를 안타깝게도, 화나게도 했다.

안타까운 것은, 은찬이는 아직 어려서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제대로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른들은, 아이의 약한 장 상태를 알면서도 어째서 이렇게 방치해 병원까지 오게 했을까?

화나는 것은, 은찬이를 병원에 오게 만든 장본인이 아이를 여기에 혼자 두고 떠나버렸고, 아이의 두려움 따위에는 안중에도 없었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차분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리고 은찬의 곁에 앉아, 아이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아들의 작은 머리를 내 품에 기대게 했다.

“지나정, 집에서 전업주부로 아이를 잘 돌보라고 했더니, 이게 뭐야?”

문밖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시어머니 안추자 여사가 서 있었다.

방금 막 도착한 안 여사는 자신의 책임을 숨기기 위해 먼저 나를 몰아붙였다.

“네가 그토록 정성껏 돌보는 아이가 장이 약해서 겨우 이 꼴이냐?”

‘지금 책임을 내게 전가하는 건가?’

지금까지 나는 배정빈의 가족들과 갈등이 생길 때면, 배정빈을 난처하게 만들까 봐 대부분 참고 넘겨왔다.

하지만 이번 은찬이 문제만큼은 다르다.

은찬이는 내가 양보할 수 없는 최후의 보루였고, 아이 문제만큼은 절대 물러설 수 없었다.

나는 자고 있는 은찬이를 깨울까 봐 일부러 목소리를 낮췄지만, 분노는 감춰지지 않았다.

“어머니, 은찬이의 장을 약하게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어머니가 더 잘 아시잖아요.”

안 여사는 비웃으며 대꾸했다.

“그야 당연히 잘 알지! 지나정, 은찬이를 가장 오래 돌본 건 너야. 네가 정말 정성껏 돌봤다면, 내 손자가 이렇게까지 약골이 되지는 않았겠지.”

나는 고개를 들고 안 여사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참고 있던 화가 결국 폭발하며 나는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제가 은찬이를 돌볼 때는, 은찬이 장이 탈이 나서 병원에 입원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내 논리적인 반박에 안 여사는 말문이 막혔다.

“너...!”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어머니께서 은찬이 보고 싶다고 해서, 정빈 씨에게 퇴근 후 아이를 데려오게 하신 이후부터...”

“은찬이 배탈이 더 자주 생겼어요.”

“그래서 제가 몇 번이나 부탁드렸잖아요, 아이에게 아무거나 먹이지 말라고...”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어떻게 하셨죠?”

나도 시댁 식구들에 대한 불만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예전에는 늘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게다가 시어머니도 은찬이를 사랑하시니, 몇 마디만 하면 다음엔 주의할 거라 믿었다.

그런데 현실은 달랐다.

시어머니를 너무 좋게만 본 내 잘못이다.

“어머니도 제가 했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을 뿐 아니라, 아이를 서달희에게 보냈잖아요!”

“제 아이를, 우리 부부 사이에 끼어들려는 서달희와 친해지게 만들다니요! 오늘도 마찬가지고요!”

“정빈 씨는 집에 와서 아이를 어머니댁에 데려다줬다고 했어요.”

“그런데 몇 시간 뒤, 아이는 서달희의 집에서 뭔가를 잘못 먹고 토하고 설사하며 병원에 실려 왔죠!”

“그리고 그다음은요?”

나는 조금 전 병원에 처음 도착했을 때 봤던 장면이 떠올라 마음이 울컥했다.

“서달희는 그냥 떠나버렸잖아요. 은찬이를 병원에 혼자 남겨둔 채 말이에요.”

안 여사는 입을 열려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머니.”

나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어머니가 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신다는 거 잘 알아요.”

“어머니가 진정으로 인정하는 며느리는 서달희 한 명뿐이라는 것도요...”

“하지만 어머니가 저를 싫어하시고, 저를 괴롭히고 싶으시다면, 그건 저한테만 하세요!”

“은찬이는 어머니의 친손자잖아요. 아직 어린데... 이런 일을 겪게 하시면 안 되죠!”

평소에는 조용하고 순종적이었던 내가 반박하자, 시어머니도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잠시 후, 안 여사는 나를 꾸짖으려고 입을 열었지만, 그 말을 끊은 건 다급히 뛰어온 배정빈이었다.

“어머니, 이제 그만하시죠.”

배정빈은 차갑게 말하며 내 옆에 섰다.

내가 시댁과 충돌할 때면, 배정빈은 항상 무조건 내 편에 섰다.

이것이 내가 이 남자를 믿고 사랑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안 여사는 아들의 말에 더 화가 난 듯했다.

“네 이 못된 자식아! 네 아내가 방금 나에게 어떻게 말했는지 못 들었니?”

배정빈은 여전히 냉랭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정이가 틀린 말 했어요?”

안 여사는 말문이 막혔다.

배정빈은 이어서 말했다.

“어머니,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앞으로 서달희와 연락하지 않을 거라고. 그런데도 어머니는 여전히 저 몰래 아이를 서달희에게 보냈죠. 이 일 때문에 우리 부부 사이에 문제가 생기고 있어요.”

나는 이 말을 듣고 놀라서 배정빈을 쳐다보았다.

‘이 사람도 몰랐던 것일까?’

안 여사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지만, 결국 말을 멈추고 나를 매섭게 노려볼 뿐이었다.

나는 온 신경을 은찬에게 쏟고 있었기에 시어머니를 상대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뭐라고 말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차분히 이야기했다.

“어머니, 앞으로는 은찬이는 어머니댁에 보내지 않을 겁니다.”

서달희가 언제부터 내 아들과 접촉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오늘부터는 둘 사이에 어떤 접촉도 없길 바랐다.

그리고 나는 시간을 더 내어 은찬이와 함께하며 아들을 더 잘 키우면 은찬이도 다시 예전처럼 건강하고 착한 아이로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안 여사는 단번에 반대하며 외쳤다.

“그건 안 돼!”

하지만 나는 단지 시어머니에게 단지 통보했을 뿐이고, 시어머니가 반대하든 찬성하든 내 결정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안 여사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배정빈을 쳐다보았다.

배정빈은 단호히 말했다.

“저는 나정이 결정을 따를 겁니다.”

“너희들!”

안 여사는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우리가 타협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자 분해하며 결국 자리를 떠났다.

넓은 수액실에 이제 우리 세 식구만 덩그러니 남았다.

나는 은찬이를 안고 있었고, 배정빈은 내 옆에 앉아 있었다.

은찬이는 단잠을 자다가 주삿바늘을 뺄 때 갑자기 눈을 떴다.

아이는 흐릿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은찬이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리며 조용히 말했다.

“우리 아가, 괜찮아. 엄마 여기 있잖아.”

은찬이는 입을 삐죽거리며 약간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다 엄마 때문이잖아요! 엄마가 왜 병원에 있어요?”

엄마 마음이란 게 이런 걸까. 토라져서 나에게 화를 내는 은찬이의 모습이 귀엽기만 했다.

“엄마가 안 왔으면 좋겠어?”

“그럼요!”

은찬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엄마가 안 왔으면, 달희 이모가 분명 나랑 여기 있어 줬을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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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의 봄날처럼   제12화

    마지막으로 어떻게 할지 잠시 망설이던 배정빈은 결국 은찬이를 데리고 병실을 나갔다. ... 두 부자가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간호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직 형체를 갖추지 못하고 유산된 그 불쌍한 아이를 어떻게 처리할지 묻는 내용이었다. 간호사는 내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나를 자극하지 않으려 먼저 내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나에게 연락한 것이라며, 언제쯤 서류에 서명하고 절차를 진행할 수 있는지 물었다. 나는 현재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조금 움직이는 것도 무리였다. 하지만, 그 아이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나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늦게 간다면 아이가 서운해할 것 같았다. “지금 가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답하고 병실 문을 나섰다. 절차를 밟은 후, 누군가가 작은 상자를 내게 건넸다. 나는 그 상자를 조심스럽게 들고 혼자 택시를 타고 묘지로 향했다. 만나지 못했던 내 불쌍한 아이를 위해 묘지를 하나 샀고, 그곳에 아이를 안장했다. 모든 절차를 마치고 나서도, 나는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나는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묘지 옆에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 그동안의 여러 충격적인 일들로 이미 모든 감정이 마비되어 버린 줄만 알았다. 그러나 가슴 깊은 곳에서 둔탁한 통증이 계속 전해져 왔다. ‘아가야, 안심해... 엄마는 너를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두지는 않을 거야.’ ... 병실로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병상 앞에 서 있는 배정빈이었다. 그는 내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나를 보더니, 곧바로 내 앞으로 다가와 내 팔을 꽉 잡았다. “어디 갔었어?” 나는 너무 지쳐버렸다. 계단에서 굴러 유산한 탓에 몸은 약해질 대로 약해져 천근만근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하루 종일 이름도 없이 떠난 아이의 뒤처리를 위해 뛰어다니느라 심신이 모두 지쳐 있었다.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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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의 봄날처럼   제13화

    배정빈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보, 정말 괜찮은 거지? 그래도 되지?” “오, 당신 아내가 계단에서 굴러 유산했는데도, 전남편에게 맞을 서달희 걱정을 한다고?”나는 냉소적인 웃음을 지었다. “당신, 참 호탕한 대인배네.” “여보!” 배정빈은 화가 난 듯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나도 아이를 잃은 게 얼마나 큰 아픔인지 알아! 하지만 당신도 알건 알아야지! 은찬이가 당신을 계단으로 부른 건 사실이지만, 당신이 발을 헛디뎌 넘어진 거잖아. 달희와는 아무 상관없어!” “그리고 같은 여자로서, 달희의 생명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인데, 당신이 동정은커녕 이렇게 비꼬고 있다니! 내가 사람 잘못 봤네!” “어차피 당신이 동의하든 하지 않든... 달희는 우리 집에 들어올 거야.” 배정빈은 말을 마치고 분노에 차 병실을 떠났다. 그렇다! 이게 바로 배정빈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받고 괴롭힘을 당해도, 내가 반격 한번 못하고 하소연 몇 마디 하는 것조차 그는 나를 탓했다.과거에는 내가 이 남자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의 말에 수긍하고 인정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절대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차가운 시선을 거두고 병실 침대에 조용히 누워, 희끄무레한 천장을 바라보았다. 병원에 남기로 한 이유는 단 하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들 은찬이도, 배정빈도 더 이상 꼴도 보기 싫었다. 하지만 배정빈은 매일같이 나를 보러 병실을 찾아왔다. 그 뻔뻔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참으로 역겨웠다. ... 그 다음 날, 나는 아침 일찍 친정엄마 집으로 갔다. 멀리 시집간 이후로 자주 찾아뵙지 못했는데, 엄마가 나를 보고 싶은 마음에 이 도시로 이사하셨다. 엄마 집에 있으면 마음이 한결 편해질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나를 보는 엄마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웬일이야? 네가 집에 다 오고?” 나는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엄마에게 다가가 안겼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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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 챕터

  • 당신의 봄날처럼   제30화

    배정빈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나는 발신인을 확인하고, 아직 배정빈을 차단하기 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면 어쩌겠어?” 내 태연한 대답에, 그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당신이 은찬이를 데리러 가지 않아서 아이가 유치원 앞에서 밤 9시까지 혼자 기다렸다가 결국 9시가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는 걸 알기나 해?” 나는 평온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건 나한테 따질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배 대표님.” “지금은 서달희가 은찬이 엄마잖아. 그리고 나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발코니로 나가 멀리 바라보았다. 검푸른 밤하늘, 반짝이는 별빛과 저 멀리 펼쳐진 가로등 불빛이 보였다. “그냥 낯선 사람일 뿐이고.” 내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배정빈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말했다. [아직도 우리를 원망하고 있는 거야?] “아니.” 나는 느릿느릿 대답했다. “전 그냥 새 삶을 살고 있어... 굳이 과거의 사람들과 얽히고 싶지 않아.” “그쪽 생각은 어때?” 나는 더 이상 배정빈에게 대답할 기회를 주지 않고 전화를 끊은 뒤, 바로 그를 차단했다. 똑똑똑-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곧장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기쁨이 긴 귀를 가진 토끼 인형을 안고 서 있었다. 아이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뒤에는 하지훈이 조금 곤란해하는 얼굴로 서 있었다. “기쁨이가 단 걸 먹어서 밤에는 꼭 양치질해야 해요. 그래서 깨웠는데...” 그는 이마를 문지르며 덧붙였다. “엄마랑 같이 양치하고 싶다면서 고집을 부리네요.” 기쁨은 조금 민망한 듯 작게 말했다. “우리 반 친구들은 다 엄마랑 같이 양치한다고 했어요. 근데 내 엄마는... 같이 해준 적 없어요.” 아이의 소박한 바람을 내가 들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럼 기쁨이는 엄마 방에서 양치하고 싶어, 아니면 네 방에서 하고 싶어?” 기쁨의 두 눈이 금세 반짝였다. “엄마 방에

  • 당신의 봄날처럼   제29화

    기쁨이는 하지훈 옆자리에 앉더니 옆에 있는 자리를 톡톡 손으로 두드렸다. “엄마, 여기 앉아요!” 나는 아이의 요청에 따라 옆에 앉았다. 기쁨이는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 소원 빌어봐요!” 흔들리는 촛불을 바라보며 나는 눈을 감고 조용히 속으로 소원을 빌었다. ‘기쁨이가 점점 더 건강해지길... 그리고 우리가 오래도록 행복하기를...’ 눈을 뜬 뒤, 나는 힘껏 촛불을 불어 껐다. 기쁨이는 즉시 내 옆으로 다가와 작은 몸을 내게 바싹 붙이며 물었다. “엄마, 무슨 소원 빌었어요?” 내가 대답하려던 찰나, 하지훈이 먼저 나 대신 말을 꺼냈다. “기쁨아, 소원은 입 밖으로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거야.” 기쁨이는 마음속에 담긴 궁금증을 숨기지 못하고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그렇구나.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어린아이가 입술을 삐쭉 내밀며 아쉬워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나는 케이크 한 조각을 잘라 아이에게 건넸다. “그럼 먼저 케이크 좀 먹자.” 기쁨은 두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근데 아빠가 밤에 단 거 먹으면 안 된대요. 이가 상한다나 뭐라나.” 기쁨이는 마치 하지훈을 고발이라도 하듯 말을 덧붙이며 동시에 자신이 케이크를 먹을 수 없는 이유를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하지훈을 바라보았다. 하지훈은 어색하게 기침을 두 번 하더니 말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조금 먹어도 돼.” “야호!” 하지훈의 허락을 받자마자, 기쁨은 행복에 가득 찬 표정으로 작은 포크로 케이크를 크게 한 덩어리 떼어 입안에 넣었다. 그녀의 큰 눈이 기쁨으로 반짝이며 말했다. “케이크 진짜 맛있다!” 기쁨이가 케이크를 먹는 동안, 나는 하지훈에게도 한 조각을 잘라 주고 마지막으로 내 몫을 잘랐다. 기쁨이가 케이크를 들고 목소리를 높였다. “건배!” 하지훈과 나는 아이의 천진난만한 외침에 맞춰 케이크를 들고 가볍게 부딪쳤다. 기쁨은 매

  • 당신의 봄날처럼   제28화

    상대방은 내가 은찬이의 보호자인지 물으면서도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배은찬 어린이의 담임교사입니다. 지금 수업이 끝났는데, 가족분이 아직 아이를 데리러 오지 않으셨습니다. 혹시 집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여쭤보려고 연락드렸습니다.] 선생님은 예의 있게 상황을 물었다. ‘이혼 전까지만 해도... 서달희가 매일 은찬이를 적극적으로 데리러 다니지 않았나?’‘이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서달희는 벌써 아이를 내팽개쳤단 말이야?’ 예상치 못한 상황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어차피 이제 그 가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니, 나도 굳이 나설 이유가 없었다. “선생님, 저는 같은 반에 다니는 하기쁨 엄마이고, 배은찬과는 관계없어요.” 나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마 선생님이 전화를 잘못 거신 것 같네요.” 선생님은 급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번거롭게 해드렸네요.]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나는 담담히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내 핸드폰 벨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배정빈의 전화였다. 나는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죠?” 배정빈은 불편한 목소리로 물었다. [은찬이를 좀 데리러 가줄 수 있을까?] 엘리베이터 벽에 비친 내 모습은... 조금 전까지 미소로 가득했던 얼굴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안 돼.” 나의 부드럽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갑게 굳었다. “배 대표님, 혹시 잊었나? 이제 이혼한 사이잖아.” “특별히 급한 일이 아니면, 다시는 나에게 연락하지 마.” 배정빈은 다급하게 말했다. [지금 달희와 쇼핑 중이라...] “그런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아.” 나는 차갑게 말을 끊었다. “굳이 나에게 보고하지 말고.” [하지만 아이가 아직 유치원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아무도 데리러 가지 않아서.] 배정빈은 내가 전화를 끊을까 봐, 한꺼번에 말을 쏟아냈다. [나는 지금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어. 나정아, 제발 부탁이야

  • 당신의 봄날처럼   제27화

    ‘나에게 사랑스럽고 속 깊은 딸이 생겼구나...’ ‘그리고 내 딸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 줄 거고...’ 그렇게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훈은 시선을 거둔 뒤 다시 일에 몰두하며 말했다. “방 정리는 아직 못 한 것 같네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바로 정리할게요.” ... 내 방은 2층 동쪽 끝에 있었다.방은 넓었고, 별도의 드레스룸도 있었다. 채광이 아주 좋았고, 넓은 발코니까지 있었다. 지금은 커튼이 열려 있어, 햇살이 침대 위로 듬뿍 쏟아져 아늑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나는 바로 정리하지 않고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고요함과 마음의 평온을 한참 만끽했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평생 이렇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충분히 쉰 뒤, 나는 옷걸이에 옷을 걸기 위해 여행용 가방을 드레스룸으로 끌고 갔다. 그러나 옷장을 열자마자, 이미 옷으로 옷장 안은 가득 차 있었다. 드레스, 티셔츠... 다양한 스타일과 디자인의 옷들이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다.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나는 다시 가방을 닫고 1층으로 내려갔다. 마침 외출 준비를 하던 하지훈에게 말했다. “대표님, 저에게 배정해 주신 방, 누가 이미 쓰고 있는 것 같아요.” 하지훈은 태연히 대답했다. “아니에요. 그 방은 나정 씨를 위해 준비한 방이에요.” 나는 내 방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드레스룸 안의 많은 옷들은 분명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그런데 드레스룸에 옷이 많던데요?” “아.” 하지훈은 전혀 놀라지 않은 듯 말했다. “기쁨이가 나정 씨 온다는 얘길 듣고 엄청나게 신났었어요. 그래서 저를 졸라 같이 쇼핑하러 가서, 나정 씨에게 드릴 옷을 골랐죠.”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거실에서 나에게 필요한 물건을 묻던 하지훈의 말은 단순히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해

  • 당신의 봄날처럼   제26화

    입원 병동에는 환자들이 많았다. 병실이 부족해 복도에까지 환자들이 머무르는 경우도 허다했다. 환자들의 상태는 대체로 심각했고, 여기에 장기 입원하는 경우도 많았다. 내가 입원했을 때는 이미 있던 환자들이 대부분이었고, 내가 퇴원할 때도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 나는 병동을 걷다가 금세 몇몇 익숙한 얼굴들과 마주쳤다. 연세 지긋한 할아버지가 나를 보고 물었다. “아니, 퇴원한 줄 알았는데 어쩐 일이야? 병원에 또 온 거야?” “며칠 전에, 제가 계단에서 떨어졌거든요.” 나는 숨기지 않고 말했다. 왜냐하면 혹시라도 이 사람들이 뭔가를 봤거나, 그 사건을 촬영한 사람이 있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정보를 이 사람들에게 밝히고 싶진 않아서 바로 대충 설명했다. “그때 계단이 너무 미끄러웠어요. 마치 누군가 고의로 저에게 무슨 짓을 한 것 같아서요.” “그래서 혹시 근처에 CCTV가 있는지 확인하려고요. 여기 CCTV가 있다면,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기록됐을지도 모르니까요.” 할아버지는 매우 친절하게 말했다. “CCTV라면, 복도에 다 있어. 보안실에 가면 CCTV 화면을 볼 수 있을 거야.” “네, 알겠습니다.” ‘CCTV가 있다니, 이거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겠지.’ 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바로 확인하러 가볼게요!” ... 병동의 비상계단은 거의 사람이 출입하지 않아서 조용한 곳이었다. 내가 떨어졌던 그곳은 이미 청소가 돼서 피의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바로 내 머리 위에 CCTV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내가 떨어졌던 지점 바로 위에도 또 다른 CCTV가 설치돼 있었다. 즉, 이 병원의 CCTV는 매우 촘촘히 배치돼 있었고, 심지어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비상계단에도 설치되어 있었다.이 사실을 확인하자 마음이 놓여서 나는 바로 보안실로 달려갔다. 나는

  • 당신의 봄날처럼   제25화

    유치원 선생님이 다가와 은찬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은찬아, 이분은 기쁨이 어머니이셔. 오늘 기쁨이를 데려다주신 거니까 오해하지 마.” “그럴 리가 없어요!” 은찬이는 생각할 틈도 없이 반박했다. “이 아줌마는 분명히 제 엄마예요!” 나는 차갑게 은찬을 끊었다. “친구야, 가족관계를 함부로 아무렇게나 말하지 마. 난 너 같은 아들을 둔 적 없으니까.” 은찬이는 놀라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옆에 있던 선생님도 은찬이를 타일렀다. “지난번에 그분이 널 데리러 왔을 땐, 네가 모른다고 하지 않았니? 그런데 오늘은 갑자기 자기 엄마라고 하다니, 정말 이상하구나.” 은찬이는 내가 차에 올라타고 아무 미련 없이 떠나는 뒷모습을 보고, 속으로 기뻐했다. ‘엄마가 정말로 나를 버렸어! 이제부터는 마음껏 달희 엄마와 행복하게 살 수 있겠지!’ 은찬이의 얼굴에는 처음 나를 보았을 때의 불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기쁨으로 가득 차서 교실로 뛰어갔다. 기쁨이는 그런 은찬이의 뒷모습을 보며 불만스럽게 코웃음을 쳤다. ‘바보 같은 녀석. 자기가 얼마나 좋은 엄마를 놓쳤는지도 모르고 말이야!’ ... 차가 달리고 있었다. 하지훈과 나는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하지훈은 나를 바라보며 뭔가 캐내려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나는 그 시선을 느끼고 문득 불편해졌다. “대표님, 제가 왜 은찬이에게 그렇게 냉정하게 대했는지 궁금하신 건가요?” 하지훈은 부정하지 않았다. “네, 그 아이... 그래도 나정 씨의 친아들이잖아요.” 나는 그제야 하지훈이 내가 계단에서 떨어진 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이었고, 따라서 당시 사건의 전말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마치 영원히 녹지 않는 얼음덩어리 같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서달희가 계단에 미리 손을 써 놨어요. 그런데 제 친아들인 은찬이는 제가 떨어지는 걸 보고도 모르는 척 지나쳤어요.” “그 이유는 단 하나, 제가 자기 아빠랑 이혼해서 서달희랑

  • 당신의 봄날처럼   제24화

    나는 하지훈을 바라보자 하지훈이 덧붙였다. “게다가 둘은 같은 반이에요.” 기쁨은 뭔가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기쁘게 말했다. “저는 우리 반에서 모든 친구를 다 관찰했는데, 은찬이가 가장 잘 돌봄을 받고 있어요!” “그때 저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은찬이 엄마가 내 엄마가 되어주면 정말 좋겠다고요!” 기쁨이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지금 제 꿈이 이루어졌어요.” ‘기쁨이는 어떻게 이렇게 예쁘고 귀여울 수 있지?’ 아이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차가웠던 내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나는 기쁨이의 동그란 얼굴을 미소 지으며 바라보았다. “축하해.” 기쁨은 멍청히 웃으며 다시 식사를 이어갔다. “하 대표님, 제가 이미 기쁨이 엄마가 되기로 했으니, 진짜 엄마처럼 기쁨이를 책임지고 유치원에 등원시켜야 하지 않겠어요?” 나는 하지훈을 바라보며 말했다. “유치원에 누가 있든 상관없어요. 제가 기쁨이 등·하원 다 시킬 거예요.” 하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부탁이라니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 기쁨이가 나와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만 봐도, 아이가 많이 회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집에 있는 다른 어느 누가 말을 걸어도, 기쁨이는 여전히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심지어 하지훈이 무슨 말을 해도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는 의사표시를 하는 정도였다. 나는 차 안에서 옆에 앉아 있는 기쁨을 보며 깨달았다. ‘하 대표님이 왜 굳이 나를 기쁨이 엄마로 고용하고 싶어 했는지... 이제 알겠어.’ ‘내가 아니었다면, 이 아이의 상태는 더 나빠질 수도 있었을 거야.’ 차가 유치원 앞에 도착했다. 나는 기쁨이의 손을 잡고 유치원으로 향했다. 유치원 선생님들은 지난번 사건 이후로 나를 알아본 듯했다. 선생님들은 모두 경계심을 품고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훈은 선생님들의 표정을 보고

  • 당신의 봄날처럼   제23화

    기쁨이의 방은 매우 넓었고, 마치 애니메이션 속 공주님의 방처럼 정교하고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기쁨이는 겹겹이 레이스를 쌓아 올린 공주 드레스를 입고, 긴 귀를 가진 토끼 인형을 품에 안고 있었다. 그녀는 문을 등지고 카펫 위에 앉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하지훈은 서둘러 기쁨이를 달래려 애썼다. “기쁨아, 누가 왔는지 보렴.” 기쁨은 고개만 돌렸을 뿐, 하지훈을 보지도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훈은 나를 향해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물론, 이건 내 일이긴 하지만, 나는 늘 딸을 갖고 싶었다. 기쁨이는 정말로 마치 작은 공주 인형 같았다. 이 아이는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기쁨이에게 애정이 생겼다. 나는 일부러 고민하는 척하며 말했다. “아, 기쁨이는 엄마를 환영하지 않는구나.” 기쁨이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고개를 돌렸다. 내 얼굴을 보고는 벌떡 일어나 작은 발걸음으로 나에게 달려왔다. 기쁨이는 기뻐서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아이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왜 엄마랑 말하지 않아? 혹시 엄마가 싫어서 그러는 거야?” 기쁨은 다시 고개를 저으려다, 자칫 내가 오해할까 두려웠는지 결국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아니에요, 저는 엄마 엄청나게 좋아해요.” “엄마도 기쁨이 좋아해.” 나는 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말했다. “그리고 기쁨이 목소리 듣는 것도 좋아. 그러니까 기쁨이가 엄마랑 더 많이 이야기할 수 있겠니?” 기쁨이는 작은 어른처럼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요, 알겠어요.” 기쁨은 오랜 시간 입을 닫고 지냈기 때문에, 갑자기 누군가와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 분명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이를 천천히 이끌며 물었다. “들었는데, 요즘 기쁨이 밥 잘 먹지 않는다며? 지금 배고프지 않아?” 기쁨은 고개를 숙이고, 작은 손으로 배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응!”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우리 밥 먹으러 갈까?” 기쁨은 처음에

  • 당신의 봄날처럼   제22화

    내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배정빈의 눈빛은 복잡했다. “나정아... 돌아왔구나. 그 사람이... 당신을 해치진 않았지?” ‘허! 정말 가증스럽군!’ 이제 와서 내가 다른 남자와 무슨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니, 가식적으로라도 ‘여보’라고 부르지도 않는군! “아, 그 사람은 나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그냥 앉아서 잠깐 대화만 나눴어.”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진실을 말했다. “미안하다... 나정아,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배정빈은 여전히 믿지 못하는 얼굴로 가식적인 사과를 늘어놓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가 믿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조현석은 앞으로 서달희의 악행을 폭로하는 데 중요한 증인이 될지도 모르기에, 굳이 배정빈에게 더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배정빈을 무시하고 나는 옆에 있는 창고에서 내 여행 캐리어를 꺼내왔다. “가자.” 이혼 후에도 나는 계속해서 증거를 모을 것이다. 배정빈 부자가 이 가짜 행복에 취해 있는 동안, 그 모든 진실을 한순간에 드러내고 말 것이다.‘배정빈 부자가 그때도 과연 지금의 이런 ‘행복한 가족’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지 참 궁금하군.’ ... 이번에는 배정빈이 매우 협조적으로 나와서 순조롭게 협의이혼 절차를 진행할 수 있었다. 여행용 가방을 들고 떠나려 했지만, 배정빈은 내 뒤를 따라왔다.“나정아, 어쨌든 내 잘못이야. 하지만 당신이 나랑 이혼하고 아무것도 받지 않았잖아. 게다가 당신은 직장에서 일해 본 경험도 없으니, 밖에서 일을 구하기 어려울 거야.” “내 생각인데, 우리 집에 와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건 어때? 내가 월급 줄게.” ‘뭐? 너희 네 식구를 위해 일하면서 눈치까지 보며 살라고?’ ‘내가 그렇게 비참해 보이니? 네 맘대로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존재야?’ 나는 배정빈은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배정빈, 참 뻔뻔하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배정빈은 자신의 호의를 무시당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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