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가 대답했다.“네, 오늘 기사님께서 아가씨 데리러 가셨을 때 아가씨가 학교에서 나오지 않으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가씨가 평소에 다니시는 학원에도 연락을 다 돌려봤는데 역시 가지 않으셨대요. 방금 경찰서에 신고하긴 했는데... 어떡하죠, 연우도련님? 아가씨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죠?”연우가 한편으로는 통화를, 다른 한편으로는 운전하며 말했다.“아마 괜찮을 겁니다. 조금 전에 소월이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제가 받지 못했었거든요. 우선... 제가 먼저 소월이가 자주 가는 곳에 가서 찾아볼게요. 찾으면 그때 다시 연락 드릴게요.”“좋아요, 알겠습니다!”아줌마가 먼저 통화를 끊자, 연우도 그제야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곁에서 통화 소리를 엿들은 윤서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얌전하고 말 잘 듣는 소월이가 갑자기 사라져요? 정말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긴 거 아니에요?”“아마 사람들 몰래 어디 놀러 나간 걸 거야. 걱정하지 마, 일단 너 먼저 데려다줄게.”“나도 오빠가 소월이 찾는 거 도와줄게요!”연우는 고개를 저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거절했다.“아니, 괜찮아. 걔가 어디 있는지 내가 알 것 같거든.”소월은 늘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습관이 되어있는 제멋대로인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갑자기 사라진 이유가, 자신의 전화를 받지 않은 연우에게 삐졌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배제할 수 없다.소월이 이런 적은 한두번이 아니었다. 연우는 소월의 그런 행동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런데도 연우는 매번 강하게 나서지 못했다.하지만 그는 이런 일들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고, 현재 그녀의 갑작스러운 실종이 자신에게 있어서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깊은 밤, 자동차가 천천히 시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고급 단독주택구 대문 앞에 들어섰다. 연우는 쇼핑백을 들고 내려 자동차 보닛을 빙 돌아 조수석 문을 열었다.키 크고 늘씬한 몸매에 파란 꽃잎들이 수 놓인 치마를 입고, 긴 머리를 어깨 뒤로 축 늘어뜨린 백윤서가 가로등 아래에 서서 말했다.“얼른
소월은 연우의 메시지를 보지 못했다. 그녀는 전신 중 어느 한 곳 안 아픈 데가 없었는데, 아프다 못해 뼛속 안이 아플 지경이었다.귓가에 희미하게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때에 오셔서 다행이지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골절되었던 갈비뼈는 다시 붙고 있으니, 이곳에 며칠 입원해 상황을 지켜보면서 당분간 환자가 침대에서 내리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게 좋을겁니다. ““...”“그리고 음식은 되도록 담백한 것 위주로 드리시고요.”“네네, 감사합니다, 의사 선생님.”의사가 나간 후, 정장을 입은, 경호원으로 보이는 남자의 손에서 벨 소리가 울리자, 그는 재깍 전화를 받았다.“네, 도련님.”“사람은... 좀 어때?”전화기 너머 남자의 목소리는 몹시 차가웠다.경호원은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장소월의 상황을 전부 그에게 보고했다.“...대체적인 상황은 이러하고 현재 아가씨께서는 위험을 벗어나셨습니다.”“가서 조사해 봐, 들키지 않게 조심하고. 3일 안에 반드시 찾아내... 그게 누구든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하고 말 거니까.”“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입니까 도련님?”“걱정하지 마, 심하게는 안 할 테니.”“네, 도련님!”통화가 끝나고, 장소월은 어렴풋이 강영수의 목소리를 들었다.하지만 얼마 안 지나, 그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깨어난 지 얼마 안 돼, 장소월은 다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장소월이 다시금 눈을 뜬 건, 3일이 훌쩍 지나고였다.그녀는 갈비뼈 몇 대가 모두 골절되는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발견될 당시, 손목에 난 큰 상처로 인해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고 머리 역시 심한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거의 쇼크 상태였다. 사람에게 제때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소월은 과다출혈로 사망했을 것이다. 밤 10시쯤, 몽롱해 있던 그녀의 귀에 별안간 곁에서 누군가 우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불쌍한 우리 아가씨...”손가락을 조금씩 살짝 움직이자, 희미했던 눈앞이 갑자기 선명해졌고 소월은 입을 떼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진통제 두 알을 먹고 나서야 소월은 잠에 들었다.새벽 세 시쯤, 불현듯 잠에서 깬 소월의 이마에는 식은땀은 송골송골 맺혀있었고 숨이 차 호흡이 가빠 보였다. 침대에서 끙끙 앓는듯한 소리가 들리자, 연우는 손에 들고 있던 노트북을 내려놓고 소월에게 다가가 그녀의 이마와 볼에 슬며시 손을 올려놓았다.“차가워진 걸 보니 열이 이 정도면 많이 내린 것 같네.”물을 담으러 갔던 아줌마가 돌아오며 이 광경을 보았다.“이제 제가 아가씨 볼게요! 내일 출근하셔야 하는데 얼른 돌아가서 일찍 쉬세요, 도련님!”연우는 기어코 병원에 왔다. 그가 이런 좋은 마음을 베푸는 건 결코 이성적으로 그녀에게 관심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닌 그저 좋은 동생으로 여기고 한다는 걸, 소월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괜찮습니다. 진통제는 먹었나요?”“네, 10시쯤에 드셨어요.”“이 약은 많이 먹으면 안 돼요.”연우는 세숫대야에 담긴 수건을 쭉 짜서 그녀의 얼굴에 맺힌 식은땀들을 닦아주었다.“인제 그만 쉬세요, 아줌마! 저 오늘 반차 냈거든요.”아줌마는 침대에 누워있는 소월을 한번, 또 연우를 한번 보고는 대답했다.“그... 그래요 그럼...”“안되요...”침대에서 나지막이 힘없는 소리가 들려왔다.“아줌마... 아줌마랑 있고 싶어요... 가지마요...”사실 소월은 일찍 깨어있었지만, 연우의 목소리를 듣자 그와 마주치기 싫어 자는 척 하고 있었던 것이다.그 모습이 마음이 아파 아줌마는 얼른 다가가 손을 잡아주었다.“안가요... 저 어디 안 가요 아가씨.”그러고는 연우를 보며 말했다.“도련님, 아가씨가 저와 떨어지는 걸 원치 않으시니 아무래도 오늘은 제가 돌보는 게 좋겠습니다.”“알겠습니다. 옆 칸에 있을 테니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알려주세요.”“네, 도련님.”몸을 돌려 서자 연우는 다시금 예전의 차가운 표정을 하고 병실 문을 조용히 닫고는밖으로 나갔다.소월은 천천히 눈을 떴다. 연우의 그림자가 문틈 사이로 전부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서야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
장소월은 종래로 손해를 본 적이 없는 안하무인에 제멋대로인 성격이라, 언젠가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걸 연우는 일찌감치 예상하였다.장해진은 향을 다 피운 다음 휙 돌아섰다.“소월이가 도대체 어쩌다 사고를 당했는지 조사는 다 해왔나?”장해진은 비행기가 도착하자마자 급히 오는 바람에 옷조차 미처 갈아입지 못했다.그는 아주 크고 다부진 체격의 소유자였다. 손목에는 염주를 끼고 있었고 눈빛이 매서운 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젊은 시절 장해진은 적지 않은 나쁜 짓을 도맡아 했는데, 한눈에 봐도 흉악한 생김새는 아니었다. 가만히 있으면 오히려 사람들에게 푸근하고 자상한 인상을 주었지만, 그의 잔인한 수법으로 인해 사람들은 장해진을 두려워했다.일찍이 손에 피를 많이 묻힌 탓이었을까, 조금이나마 죄를 덜고자 장해진은 서재에 불상을 세워놓았고 매년 절에 적지 않은 기부를 해왔다.“조사 다 끝냈습니다. 그런데 강가네 사람들 역시 이 일을 조사하는 중이랍니다. 그리고 어제... 제가 사람을 시켜 범인을 잡으려 했는데 강가네 쪽 사람들이 한 발 더 빨리 그 사람을 데려갔습니다.”“강가네?”장해진은 실눈을 뜨며 말했다.“네.”강가네라... 이 서울바닥에 그만한 힘을 가진 강가네가 그 집안 빼고 또 누가 있을까!서울 4대 재벌세가 중에서도 손으로 꼽히고, 서울의 상업경제명맥을 주름잡고 있는 강가네는 그야말로 재벌가 중의 재벌가, 진정한 상류사회의 사람들이라 볼 수 있다. 장가네는 그들에 비하면 발밑의 발판에 지나지 않았다. “소월이가 언제 강가네 사람들하고 내통한 거지? 강용인가?”“아닙니다, 다른 사람인 것 같습니다. 강용이 사람을 시켜 소월이를 다치게 한거라면 그들이 소월이를 위해 나서는 일도 없겠죠.”강용은 강가네 집안의 사생아였다. 강용이 강가네 집안에 들어가기 한참 전에, 그는 장가네와 인연이 있었다.이렇게 소월의 일에 나설 수 있는 사람은, 강가네에서는 강용밖에 없었다.오랫동안 큰일 없이 평화로운 삶을 지내다 보니 까
“도련님, 차가 다 준비되었습니다. 정말 강가네로 가실 생각입니까?”“왜, 내가 가면 안 되는 곳이기라도 한가?”반듯한 셔츠에 외투를 걸친 남성이 범상치 않은 기운을 뽐내며 휠체어에 앉아 있다. 옷소매 아래로는 푸르스름한 문신이 보였는데 그 때문인지 그에게서는 어두운 기운이 뿜어져 남들이 선뜻 다가서지 못하게 했다.“하지만 부인께서...”강영수는 눈을 치켜뜨고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이건 내 일이지, 그 사람이 관여할 게 아니야!””죄송합니다, 도련님. 제가 말실수를 했습니다. 지금 바로 차로 모시겠습니다.”강영수가 집 밖에 나와 햇빛을 볼 수 있기까지는 수년의 시간이 걸렸다. 바깥세상은 그녀가 말한 것과 같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강영수는 곁눈질로 담 너머의 대추나무를 힐끗 보았다. 그곳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유유히 흔들고 눈을 찡긋하며 은은한 미소를 보내는 그녀의 그림자가 보이는 듯 했다.정작 눈을 돌려 그곳을 바라보니, 그 따뜻함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차가운 공기만이 감돌뿐이었다.한 시간 후, 그를 태운 차가 호화로운 별장에 도착했다. 문 입구에는 수십 명의 하인들이 두줄로 나란히 서있었다. 검은색 카니발이 천천히 대문에 들어서자, 경호원들이 앞으로 재빨리 다가와 조수석 뒷편의 문을 열어주었다.하인이 휠체어를 밀고와 강용수를 그곳에 앉혔다. 줄 서 있던 하인들이 일제히 큰 소리로 말했다.“집에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도련님!”강영수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강가네 고택을 얼마 만에 와보는 것인지 그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아이고 우리 수 왔구나~”불현듯 멀지 않은 곳에서 걸걸한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환갑을 넘긴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강병준이 다급히 말했다.“어머니, 천천히 하세요.”강영수는 노인이 다가오는 것을 보자 창백한 입술을 천천히 뗐다.“할머니.”그러자 할머니는 눈물을 보이셨다.“네가 드디어 할미를 보러 오는구나.”영수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뒤에 서 있는 중년남
“괜찮습니다. 이곳에 제 자리는 없는 것 같아요. 돌아오면 누군가의 눈에 거슬리는 존재가 될까 두렵기도 하고요.”조금은 냉랭한 말투였다.그 말을 들은 할머니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가워지셨다.“누가 그러더냐? 우리 강가네 손자라고는 오직 너밖에 없단다. 너는 커서 가업을 물려받아야 한다. 네가 이곳 사람이 아니면, 누가 이곳 사람이란 말이냐?”강영수는 모르고 있었다. 강병준이 심유를 아내로 맞이한 다음, 강용은 강가네 고택에 한 발자국도 들이지 못했고 강가네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 받지 못했다는 것을.“영수야, 말하는 태도에 신경을 써줬으면 좋겠구나. 그 사람이 여태 너를 이렇게 가르쳤니?”“저를 어떻게 교육해왔는지... 아버지가 관여할 수 있는 게 아니예요!”손안의 젓가락을 꽉 움켜쥔 영수의 손등에는 핏줄이 선명히 돋아나 있었다. “오랜만에 와서 할머니에게 불편을 끼쳐드릴 전혀 생각은 없었어요. 죄송해요, 할머니.”영수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할머니는 피골이 상접한 손으로 그의 손등에 살며시 얹으며 물었다.“수야, 무슨 일이냐 도대체? 누가 너를 괴롭히고 있는 거냐? 이 할미에게 다 말하렴... 내가 도와줄 수 있단다!”“그럴 필요 없으세요.”영수는 젓가락을 놓고는 티슈를 뽑아 입 주변을 닦고는 옆에 있는 사람에게 눈길을 보냈다.“사람은 도착했는가?”집사가 말했다.“이미 문밖에 계십니다.”영수는 손을 안쪽으로 휘휘 저었다.그 손짓을 본 집사는 문밖에 신호를 보냈고 뒤이어 두 명의 경호원들이 검은색 티셔츠를 입은, 온몸에 상처를 입은 사람을 끌고 와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강병준은 바닥에 있는 사람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강용?”그의 얼굴 곳곳에는 멍이 들어있었고 두 손은 부러져 이상한 모양으로 구부린채 엎드려 거의 반혼수 상태로 꼼짝도 하지 못했지만, 눈빛은 여전히 매서운 기운을 뿜고 있었다.할머니는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재수 없는 놈. 수야, 이놈은 왜 데리고 왔느냐?”강병준은 당
병원에 입원한 지 보름 만에 퇴원했다. 이 시간 동안, 장소월은 마냥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몸을 회복하는 동시에 시험지도 잊지 않고 몇 세트 풀었다.그 사이 전연우는 아무리 바빠도 꼭꼭 와서 장소월이 풀었던 시험지를 봐주곤 하였는데 틀린 곳을 발견하면 제때 알려줬고 차근차근 설명도 해주었다.쉬는 시간, 전연우는 평소에 장소월이 시간을 느긋하게 보낼 수 있게 하려고 그녀의 핸드폰에 몇몇 자신의 회사에서 새로 개발한 심심풀이용 게임을 다운로드해주었다.하지만 장소월은 게임을 거의 하지 않았고 대부분 시간을 공부에 투자하였는데 몇 개월 남지 않은 중간고사가 장소월이 장가네를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에 열심히 해야만 했었다.‘전연우와 장해진의 싸움에서 멀어져야 해...'전연우는 장소월의 퇴원 절차를 도와주었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통증은 가시지 않았지만, 전보다 많이 좋아졌고 몸의 상처도 겉의 딱지가 거의 모두 벗겨지고 그 위에 새로운 피부가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가려운 건 어쩔 수 없었다.이번에 전연우가 장소월한테 그나마 시간을 투자한 것은 단지 장해진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밖에서 모두가 말하기를 전연우는 그저 장해진이 옆에서 키운 개에 불과하다고 한다.하지만 장소월만이 알고 있었다. 사실 전연우는 한 마리의 호시탐탐 목표물을 노리고 있는, 어둠 속에서 배회하고 있는 야생 늑대라는 것을.언제든지 사람을 눈 깜빡 안 하고 죽일 수 있는 짐승이라는 것을 말이다.그는 무엇을 하든지, 그가 하는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다 철저히 계산된 행동이었다.그의 친절은 여태껏 헛되이 준 적이 없다.장소월은 전연우의 뒤를 따라 아우디 차 앞으로 갔다.이미 조수석 뒷좌석에 앉아 있는 백윤서를 보자마자 장소월은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도 백윤서에게서 흘러나오는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차 앞으로 돌아 운전석 문 앞에 서서 장소월을 바라보던 전연우는 무엇을 발견했는지 대뜸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늘 네가 퇴원했잖아. 마침 윤이도 같이 데리고 가서
“소월아.”장소월은 비몽사몽 해서 눈을 떴다. 그녀의 눈에 전연우의 예리하고도 어딘가 음침한 눈동자가 들어왔다. 장소월은 아직 잠에서 덜 깬 듯, 몇 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반응이 다소 과하게 몸을 뒤로 젖혔다. “오빠... 왜... 왜 그래요?”전연우는 그녀를 차갑게 보면서 말했다. “집에 도착했어. 어서 내려.”“아... 네...” 전연우는 곧바로 차에서 나왔고 장소월이 안전벨트를 풀려던 찰나, 차 위에 붙어있는 스티커를 보고는 곧바로 뜯어버렸다.그리고 차 위에 놓인 물건들, 냄새를 제거하는 향수까지 모조리 깨끗이 치웠다.장소월이 차에서 내리자, 전연우는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물건을 보았지만 모두 각자의 침묵을 지키며 서로 입을 열지 않았다.괜히 어떤 말을 꺼냈다가 자칫하면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더 멀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였다.장소월이 현관문에 들어서자, 아줌마가 반겨주셨다. “오늘 집에 손님이 오셨어요. 일단 먼저 손부터 씻고 나서 밥 드세요.”장소월은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손님? 누구요?”“아가씨 담임 선생님이라던데요.”‘강만옥?’장소월은 순간 가슴이 꽉 막힌 것만 같았다. ‘강만옥이 어떻게 여기에 왔지?’‘일부러 장해진인데 접근하려고 왔나?’‘아니면 전연우와의 계획이 앞당겨졌나?’장소월은 손이 덜덜 떨렸고 눈 밑에 어두운 빛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지만 너무나도 빨라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였다.“그럼 강 선생님은요?”그녀는 지금 서재에서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듣자니 네가 학교에 있었던 그 일 때문이라고 한다.전생에 장소월에게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가 다시 태어나면서 원래의 운명이 흘러가야 하는 방향을 바꾸었기 때문에 지금의 어떤 일도 함께 바뀐 것 같았다.전연우는 그녀를 지나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백윤서의 곁으로 갔다.그때 위층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님,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소월에 관한 일은, 이후에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습
장소월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강용, 말조심해. 애 앞에서 그게 무슨 말이야.” 강용이 말했다.“안 그래도 수상쩍었어. 자기 자식도 제대로 보지 않는 아버지가 어디 있어.” “게다가 사방팔방 아무 데나 뛰어다니게 놔두고... 보자마자 엄마라고 부르잖아.”“아가씨, 수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장소월이 말했다. “강용, 몇 번이나 확인했잖아. 그 사람은 전연우가 아니야.” “별이도 아니야. 내가 별이를 못 알아볼 리가 없잖아. 저번에 살펴봤는데 팔에 검은 몽고반점도 없었어. 강용, 네가 나 걱정하는 건 알지만, 그냥 어린아이일 뿐이야.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어.” 지금 장소월의 눈에는 오직 아이만 보이는 듯했다. 그녀는 아이의 작은 얼굴을 꼬집으며 물었다. “밥 먹었어? 월아?” “아!” 아이가 소리쳤다. 장소월의 입꼬리가 흐뭇하게 올라갔다. 만약... 그녀에게도 아이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소현아는 밥 먹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이 어색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했다. “강용, 왜 안 먹어! 내 배 속 아기는 벌써 많이 먹었지롱. 안 먹으면 나 혼자 다 먹어버릴 거야.” 강용은 한숨을 푹 쉬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배불러. 입맛 없어.” “강용!” 장소월이 그를 불렀다. 소현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강용 왜 저래?”장소월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감추며 말했다.“괜찮아, 이따가 내가 강용한테 밥 가져다줄게. 현아는 먼저 먹어.” “괜찮아, 내가 하면 돼.” 소현아는 밥을 몇 숟가락 급하게 퍼먹고 그릇을 깨끗하게 비운 뒤 강용의 그릇에 밥과 반찬을 가득 담았다. “강용 이 속 좁은 놈, 내가 닭 다리 뺏어 먹을까 봐 심통이 났나 보네. 닭 다리 먹고 싶으면 말하면 되지.”장소월이 당부했다. “조심해서 올라가, 넘어지지 않게. 이따가 내가 다시 보러 갈게.” 소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소현아가 그릇을 들고 올라가는 동안 장소월의 시선은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늘 덜렁거리기만 하는
장소월은 근심 걱정 없이 투덕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나는 서울에서 벗어나...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사람들 없이... 계속 이렇게 지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장소월에겐 너무나도 얻기 힘든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녀는... 그들과 함께하는 모든 순간을 더없이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다. “됐어. 우선 밥부터 먹자. 이따가 놀러 가기로 했잖아.” 소현아는 잔뜩 신이 나 팔짝팔짝 뛰며 손뼉을 쳤다. “좋아! 그럼 얼른 밥 먹자. 아니... 누가 먼저 다 먹는지 시합할까?” 강용은 장소월 옆에 앉아 그녀에게 국을 떠주었다. “너 시끄러운 거 싫어한다는 거 알아.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 “날씨가 너무 더워서 네가 힘들어할까 봐 걱정돼.” 장소월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 몸 그렇게까지 허약하지 않아.” 그때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문밖으로 향했다. 어린아이 한 명이 손에 빵 조각을 들고 배시시 웃으며 장소월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다가 장소월의 다리를 잡고 철퍼덕 바닥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엄마...” “여긴 어떻게 왔어?” “월아, 네 아빠는 어디 계셔? 왜 같이 안 왔어?” 장소월은 한 손으로 아이를 힘겹게 안아 올려 무릎에 앉혔다. 월이는 침을 질질 흘리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강용은 바닥에 떨어진 빵 조각을 주워 쓰레기통에 버렸다.“세상에, 어떻게 여기까지 뛰어온 거야. 아빠는 뭐 하는 거야, 아이도 제대로 보지 않고.” 강용은 일어나 아이를 안아 들려 했다. “내가 데려다주고 올게.” 장소월은 망설이다 말했다. “나는 이 아이가 마음에 들어. 볼살도 통통하니 귀엽고, 현아 어렸을 때랑 많이 닮았어. 머리 예쁘게 땋고 나비 머리핀도 꽂았네.” 이 아이를 볼 때마다 머릿속에 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난날 그녀가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였다면, 전연우는 그녀를 남원 별장에 가두는 족쇄로 별이를 이
그녀는... 여전히 과거를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전연우는 불이 꺼진 어두운 방에 외로이 홀로 서 있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수면제 덕분인지 점심 12시가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오늘의 거리는 평소와는 달리 조용했다. 매일 길가에서 채소를 팔던 노점상들도 오늘은 어쩐 일인지 거의 나오지 않았다. 장소월이 세수를 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강용은 국을 들고 부엌에서 나오고 있었다. 소현아는 숟가락을 입에 물고 강용을 졸졸 따라다니며 뜨거울 텐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릇 아래에 손을 대고 있었다. 강용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바보야! 국 쏟아지면 어쩌려고 그래. 저리 비켜, 귀찮게 하지 말고.”소현아는 훌쩍거리며 말했다. “네가 넘어질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국 몸에 쏟으면 엄청 뜨겁단 말이야.” 그녀는 계속하여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을 향해 부채질을 했다. “조심해! 국 쏟으면 안 돼. 빨리 내려놔.”강용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못마땅한 듯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지만, 결국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계단 위에 서 있는 장소월을 발견한 강용이 앞치마를 풀며 말했다. “깼어? 웬일로 늦잠까지 잤네. 내려와서 내가 만든 생선국 먹어봐.” 장소월은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수고했어. 오늘 딱히 할 일 없으니까 이따가 오아시스에 놀러 가자.” 소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좋아, 좋아!” 강용이 장소월에게 그릇과 젓가락을 건네주자 소현아는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내 거는? 강용, 내 것도 줘.” “너 손 없어? 임신한 거지, 손발이 잘린 건 아니잖아. 직접 가져와.”장소월이 말했다. “내가 가져다줄게.” 장소월이 일어나려 하자 강용은 그녀를 눌러 앉혔다. “됐어, 둘 다 아주 상전이시구먼. 노비인 내가 모셔야지 어쩌겠어!” “그게 아니라... 다음에는 내가 가져다줄게.” 소현아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장소월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현아야, 강용은 철없는 어린아
거리에는 아직 적잖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때 밤 열두 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장소월에게는 마치 죽음의 문턱을 넘는 것과 같은 소리였다. 전생에서 그녀는 이 종소리와 함께 병상에서 죽음을 맞이했었다. 시곗바늘이 자정을 지나는 순간, ‘펑’ 한 줄기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어 연이어 폭죽들이 터지며 찬란하게 하늘을 수놓았다. 깜빡 잊고 있었다. 오늘은 불꽃 축제를 하는 날이라는 걸. 보아하니 오늘도 잠 못 이루는 밤이 될 것 같았다. 복도에서 잔뜩 들뜬 소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월아, 소월아, 빨리 봐, 불꽃 놀이한다.” “정말 예뻐!” “와, 강용, 빨리 봐. 여기 불꽃놀이 서울에서 하던 거랑 비슷하게 예뻐.” “우리 밖에 나가서 놀면 안 돼?” 강용은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문틈으로는 불빛이 새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잠들었나? 장소월은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친 뒤 욕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 그리고는 침대에 앉아 탁자 위에 놓인 수면제를 바라보다가 결국 집어 들었다. 평소에는 두 알을 먹었지만, 지금은 네 알을 먹어야 한다. 이미 내성이 생겨 두 알로는 효과를 볼 수 없었으니 말이다. 약을 삼키자 금세 졸음이 밀려왔다. 얇은 커튼 밖으로 불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밤새도록 이어질 줄 알았던 불꽃놀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끝이 났다. 그렇게 거리는 이전의 평온함을 되찾았다. 소현아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왜 이렇게 빨리 끝나는 거야. 하나도 안 예뻤어. 이제 잘 거야.” “강용, 잘 자.” 강용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바보.” 이어 그는 팔짱을 낀 채 차가운 표정으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냉담한 태도에도 소현아는 신나는 듯 폴짝폴짝 뛰며 방으로 돌아갔다. 조금 전 강용이 그녀에게 웃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를 싫어하지 않는 게 분명하다. 소현아는 천진난만한 눈으로 임신 4개월 된 둥그런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가, 태어나면 아빠랑 만날 수 있을 거야. 엄마는 두 명이나 있어
별이는 몸을 기울여 장소월에게 팔을 뻗으며 옹알거렸다.“엄마... 안아...”“저 아이 참 신기해요. 낯도 안 가리고 저한테 엄마라고 부르네요”가짜 손이준 행세를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전연우였다. 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어렸을 때 병을 앓아서 뇌 손상이 좀 있었어요. 신경 쓰지 말아요.” 장소월은 가슴이 저릿해졌다. 그녀는 손을 뻗어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고는 휴지로 입가에 묻은 기름을 닦아주었다. “다시 엄마를 찾아줄 생각은 안 해봤어요? 지금은 너무 어려서 보살펴줄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그래야 아빠도 덜 힘들 텐데요.” “그 사람 돌아올 겁니다.” 국수를 먹고 있던 강용은 그 말에 사레가 들려 연이어 재채기를 했다. 장소월이 그의 등을 토닥여주자 소현아도 그녀를 따라 강용의 등을 두드렸다. 장소월이 말했다. “천천히 먹어.” 소현아도 똑같이 말했다. “천천히 먹어.” 강용은 그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대단한 사랑이네요.”장소월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강용.”“알았어. 입 다물게.” 장소월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 먹었지? 시간이 늦었어. 이만 돌아가자.” “만둣국 잘 먹었습니다. 강용, 식삿값 드려.” 다른 두 사람도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강용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돈을 더 얹어 주었다. “힘내세요, 형님.” 그들이 떠난 후, 전연우는 아이를 내려놓았다. 조금 전까지 신이 나 방긋방긋 웃던 별이는 곧바로 서러운 표정으로 울어대기 시작했다. “엄마...” 전연우가 말했다. “엄마는 곧 우리 곁으로 돌아올 거야.” 그녀는 국수엔 거의 손대지 않고 만두만 모두 비웠다. 전연우는 그녀가 남긴 국수를 남김없이 모두 먹어치웠다. 장소월은 집에 돌아온 뒤 두 사람에게 말했다. “강용, 차표 예매해. 여긴 안전하지 않은 것 같아. 더 이상 머물러서는 안 돼.” 소현아는 졸린 듯 눈을 비볐다.“우리 가는 거야? 어디로 가는데?” 장소월이 대답했다. “난 어디든 좋아.
“와, 이 아이 정말 귀여워. 소월아, 빨리 봐봐. 나도 나중에 딸 낳고 싶어. 매일 예쁘게 꾸며주고... 우리 세 명이서 같이 쇼핑도 다니자. 강용은 아빠, 나는 엄마, 소월이도 아기 엄마가 되는 거야.” 거의 정리가 끝나갈 무렵, 강용이 손을 툭툭 털며 말했다. “꿈이 아주 야무지네.” 장소월은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우는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가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자 그녀는 아이를 달래주고 싶은 마음에 팔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이 아직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녀를 막아서며 소리쳤다. “만지지 말아요.” 장소월은 깜짝 놀라 재빨리 손을 움츠렸다. 그가 부엌에서 국수 네 그릇을 들고 나와 탁자 위에 놓았다. “애가 낯을 많이 가려서요.” 소현아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왠지 소월이를 좋아하는 것 같았어요! 엄마라고 부르기까지 하던데.” “참, 아저씨, 이름이 뭐예요?” 그가 대답했다. “손이준이에요.” 강용이 물었다. “한국인이에요?” “사정이 있어 한국을 떠나 이곳에 정착했어요.” 소현아가 또 물었다. “그럼 아기 엄마는 어디 갔어요?” 고개를 젓는 장소월을 본 소현아는 맹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씹으며 중얼거렸다. “소월아, 왜 그래? 아, 알겠다. 이런 걸 물어보면 안 된다는 거지!” “아저씨, 대답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예의가 없었어요.” 강용이 손을 들어 소현아의 머리를 가볍게 톡 쳤다. “너 정말 바보구나.” 그는 아이를 안아 올리고 숨김없이 대답했다. “아내가 돈 들고 도망갔어요.” 강용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소현아는 동정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저씨, 정말 딱하시네요!” “아기도 너무 불쌍해요. 이렇게 어린 나이에 엄마를 여의다니.” 손이준이 말했다. “미안함의 의미로 국수를 끓였어요.” 장소월이 바로 말했다.“괜찮습니다.”하지만 소현아는 잔뜩 들뜬 얼굴로 손뼉을 쳤다. “좋아요, 좋아요.” 강용이 삐딱하게 물었다. “그렇게 좋아?
강용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태연하게 서 있는 남자를 쳐다보며 물었다. “당신은 이런 상황에서 별로 놀라지도 않는 것 같네요!” “손님들 여기 온 지 얼마 안 되죠? 아까 싸움을 벌였던 놈들은 이 지역 갱단이에요. 그놈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부정당한 수단으로 돈을 벌어놓고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싸움이 벌어진 거더라고요. 이곳 밤은 위험하니까 함부로 나오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장소월은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연고를 꺼내 등에 나 있는 상처에 바르고 있었다. 강용이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귀로 들었죠.” 그의 등에는 커다란 화상 자국 두 군데가 더 있었다. 장소월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제가 도와드릴까요? 아까는 제가 신세를 졌어요.” 그는 차갑게 거절했다. “됐어요. 당신들 같은 외지인들은 알아서 몸조심이나 하세요.”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복을 입은 경찰들이었다. 조금 전 난동을 부린 사람들은 이미 경찰차에 태워져 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나가 경찰들과 현지 방언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현아는 무서움에 딸꾹질을 하며 장소월의 뒤에 몸을 숨겼다. “소월아, 저 사람들 뭐라고 하는 거야?” 장소월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리가 무슨 잘못을 저지르진 않았는지 묻는 것 같아. 저 사람이 우리를 대신해 설명해 주고 있어.” 바깥에 있던 가게 사장도 구급차에 실려 갔다. 시끄러움이 가라앉은 뒤 문밖에 나가보니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엔 핏자국이 흥건했고, 아까 총을 맞은 사람의 허연 뇌수까지 흩뿌려져 있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는 광경이었다. 경찰들이 떠나자 그가 몸을 돌려 말했다. “이제 돌아가도 돼요.” 이어 그는 부엌에서 양동이를 들고 밖으로 나가 핏자국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장소월은 그의 분주한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그녀의 느낌이 틀린 걸까? 그래. 오만하기 그지없는 전연우가 어떻게 저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에게는
분명 그녀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정말로 전연우라면 저토록 자신의 격을 떨어뜨리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을 테니까. 밤 8시 30분, 강용은 갑자기 확인하려는 충동이 생겼는지 야식을 먹으러 건너편 국숫집으로 향했다. 이 시간대에는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꽤 많았다. 사막 근처라 일교차가 커서 낮에는 반팔을 입고 다녔지만, 밤에는 목도리를 둘러야 했다. 장소월은 니트 롱스커트와 옅은 색 코트 차림에, 목에 두른 목도리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었다. 이곳으로 여행 온 한국인들도 꽤 있었지만, 대부분은 반년 이상 머무른 주민들이었다. 가게 밖에선 손님들이 작고 낮은 의자에 앉아 야식을 즐기고 있었고, 그 옆에선 사장이 기타를 들고 이곳 민요를 부르고 있었다. 장소월은 거의 6개월 동안 이곳에 머물렀기 때문에 간신히 조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공기 중에는 꼬치구이를 만들 때 피어오른 짙은 연기가 매캐하게 떠다니고 있었다. 소현아는 임신 중이라 이런 음식을 많이 먹는 것은 몸에 해롭기 때문에 따로 국수 한 그릇을 주문해 주었다. 장소월은 또다시 낮에 주문했던 만둣국을 시켰다. 가게에는 종업원이 한 명, 요리사가 두 명 있었다. 만둣국이 나오자 장소월은 만두를 한 입 먹어 보았다. 착각일 수도 있지만, 왠지 모르게 익숙한 맛이 느껴졌다. 강용이 물었다. “왜 그래? 맛이 없어?” 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그럼 말해 봐. 내가 만든 거랑 이것 중에 뭐가 더 맛있어? 말 잘해. 아니면 다신 안 해줄 거야.” 장소월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가 만든 게 더 맛있어.” “그래야지.” “다 못 먹겠으면 나한테 줘. 먹던 거라도 상관없어.” 이 만두의 맛, 그리고 안에 들어간 속 재료까지, 전생에 그녀가 만들었던 만두와 너무나도 똑같았다. 거의 다 먹어갈 때쯤, 갑자기 앞 테이블에 있던 술 취한 남자 두 명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 주먹까지 오가기 시작하자 사장이 재빨리 달려가 말렸다. 결국 두 사람 싸움은 패싸움으로 번졌고,
장소월이 말했다. “고마워.” 그녀는 간단히 대답을 마치고 차갑게 몸을 돌렸다. 강용이 탁자 위에 국수를 올려놓았다. 장소월은 젓가락을 들었다가, 국수 위에 떠 있는 파를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강용은 재빨리 그릇과 젓가락을 가져와 그녀 옆에 앉았다. “너 많이 못 먹잖아. 남은 건 내가 처리해줄게.” 소현아가 어느새 냄새를 맡았는지 위층에서 내려와 킁킁거리며 말했다.“음! 맛있는 냄새! 소월아, 뭐 먹고 있어? 나도 먹을래.” “바보야, 정신 차려! 겨우 국수 한 그릇인데, 세 명이서 나눠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소현아가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나는 조금만 먹을게.” 소현아는 얼른 달려가 젓가락을 가져왔고, 그렇게 두 사람 모두 장소월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강용이 말했다. “국물만 좀 남겨줘.” 소현아가 말했다. “나도 국물.” “파 싫으면 나한테 줘.” “파 싫으면 나한테 줘.” “바보야, 남의 말은 왜 따라해!” 소현아는 입술을 삐죽이며 장소월에게 일렀다. “소월아, 얘 나한테 욕했어. 그러니까 얘한테 면 좀 조금만 주고 나한테 많이 줘.”장소월이 말했다. “그래. 내 국수 나눠줄게.” “역시 소월이가 최고야!” 건너편 국숫집 안, 남자가 아이를 안고 있었다. 별이는 긴 머리 가발을 쓰고 여자아이 변장을 하고 있어 본래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그 사람이 딸을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앞으로 넌 계속 이런 모습으로 지내.” 별이는 손으로 유리를 긁으며 작은 얼굴 전체를 유리에 바짝 붙인 채 조용히 맞은편 집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어눌한 발음으로 옹알거리고 있었다. “엄마...”“괜찮아, 곧 만나게 될 거야.” “소월아...” 장소월은 등 뒤에서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줄곧 지워지지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만 있을 뿐 다른 특별한 점은 전혀 없었다. 최근 예민함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 걸까. 세 사람은 국수 한 그릇을 2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