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가 대답했다.“네, 오늘 기사님께서 아가씨 데리러 가셨을 때 아가씨가 학교에서 나오지 않으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가씨가 평소에 다니시는 학원에도 연락을 다 돌려봤는데 역시 가지 않으셨대요. 방금 경찰서에 신고하긴 했는데... 어떡하죠, 연우도련님? 아가씨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죠?”연우가 한편으로는 통화를, 다른 한편으로는 운전하며 말했다.“아마 괜찮을 겁니다. 조금 전에 소월이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제가 받지 못했었거든요. 우선... 제가 먼저 소월이가 자주 가는 곳에 가서 찾아볼게요. 찾으면 그때 다시 연락 드릴게요.”“좋아요, 알겠습니다!”아줌마가 먼저 통화를 끊자, 연우도 그제야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곁에서 통화 소리를 엿들은 윤서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얌전하고 말 잘 듣는 소월이가 갑자기 사라져요? 정말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긴 거 아니에요?”“아마 사람들 몰래 어디 놀러 나간 걸 거야. 걱정하지 마, 일단 너 먼저 데려다줄게.”“나도 오빠가 소월이 찾는 거 도와줄게요!”연우는 고개를 저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거절했다.“아니, 괜찮아. 걔가 어디 있는지 내가 알 것 같거든.”소월은 늘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습관이 되어있는 제멋대로인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갑자기 사라진 이유가, 자신의 전화를 받지 않은 연우에게 삐졌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배제할 수 없다.소월이 이런 적은 한두번이 아니었다. 연우는 소월의 그런 행동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런데도 연우는 매번 강하게 나서지 못했다.하지만 그는 이런 일들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고, 현재 그녀의 갑작스러운 실종이 자신에게 있어서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깊은 밤, 자동차가 천천히 시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고급 단독주택구 대문 앞에 들어섰다. 연우는 쇼핑백을 들고 내려 자동차 보닛을 빙 돌아 조수석 문을 열었다.키 크고 늘씬한 몸매에 파란 꽃잎들이 수 놓인 치마를 입고, 긴 머리를 어깨 뒤로 축 늘어뜨린 백윤서가 가로등 아래에 서서 말했다.“얼른
소월은 연우의 메시지를 보지 못했다. 그녀는 전신 중 어느 한 곳 안 아픈 데가 없었는데, 아프다 못해 뼛속 안이 아플 지경이었다.귓가에 희미하게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때에 오셔서 다행이지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골절되었던 갈비뼈는 다시 붙고 있으니, 이곳에 며칠 입원해 상황을 지켜보면서 당분간 환자가 침대에서 내리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게 좋을겁니다. ““...”“그리고 음식은 되도록 담백한 것 위주로 드리시고요.”“네네, 감사합니다, 의사 선생님.”의사가 나간 후, 정장을 입은, 경호원으로 보이는 남자의 손에서 벨 소리가 울리자, 그는 재깍 전화를 받았다.“네, 도련님.”“사람은... 좀 어때?”전화기 너머 남자의 목소리는 몹시 차가웠다.경호원은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장소월의 상황을 전부 그에게 보고했다.“...대체적인 상황은 이러하고 현재 아가씨께서는 위험을 벗어나셨습니다.”“가서 조사해 봐, 들키지 않게 조심하고. 3일 안에 반드시 찾아내... 그게 누구든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하고 말 거니까.”“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입니까 도련님?”“걱정하지 마, 심하게는 안 할 테니.”“네, 도련님!”통화가 끝나고, 장소월은 어렴풋이 강영수의 목소리를 들었다.하지만 얼마 안 지나, 그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깨어난 지 얼마 안 돼, 장소월은 다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장소월이 다시금 눈을 뜬 건, 3일이 훌쩍 지나고였다.그녀는 갈비뼈 몇 대가 모두 골절되는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발견될 당시, 손목에 난 큰 상처로 인해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고 머리 역시 심한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거의 쇼크 상태였다. 사람에게 제때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소월은 과다출혈로 사망했을 것이다. 밤 10시쯤, 몽롱해 있던 그녀의 귀에 별안간 곁에서 누군가 우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불쌍한 우리 아가씨...”손가락을 조금씩 살짝 움직이자, 희미했던 눈앞이 갑자기 선명해졌고 소월은 입을 떼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진통제 두 알을 먹고 나서야 소월은 잠에 들었다.새벽 세 시쯤, 불현듯 잠에서 깬 소월의 이마에는 식은땀은 송골송골 맺혀있었고 숨이 차 호흡이 가빠 보였다. 침대에서 끙끙 앓는듯한 소리가 들리자, 연우는 손에 들고 있던 노트북을 내려놓고 소월에게 다가가 그녀의 이마와 볼에 슬며시 손을 올려놓았다.“차가워진 걸 보니 열이 이 정도면 많이 내린 것 같네.”물을 담으러 갔던 아줌마가 돌아오며 이 광경을 보았다.“이제 제가 아가씨 볼게요! 내일 출근하셔야 하는데 얼른 돌아가서 일찍 쉬세요, 도련님!”연우는 기어코 병원에 왔다. 그가 이런 좋은 마음을 베푸는 건 결코 이성적으로 그녀에게 관심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닌 그저 좋은 동생으로 여기고 한다는 걸, 소월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괜찮습니다. 진통제는 먹었나요?”“네, 10시쯤에 드셨어요.”“이 약은 많이 먹으면 안 돼요.”연우는 세숫대야에 담긴 수건을 쭉 짜서 그녀의 얼굴에 맺힌 식은땀들을 닦아주었다.“인제 그만 쉬세요, 아줌마! 저 오늘 반차 냈거든요.”아줌마는 침대에 누워있는 소월을 한번, 또 연우를 한번 보고는 대답했다.“그... 그래요 그럼...”“안되요...”침대에서 나지막이 힘없는 소리가 들려왔다.“아줌마... 아줌마랑 있고 싶어요... 가지마요...”사실 소월은 일찍 깨어있었지만, 연우의 목소리를 듣자 그와 마주치기 싫어 자는 척 하고 있었던 것이다.그 모습이 마음이 아파 아줌마는 얼른 다가가 손을 잡아주었다.“안가요... 저 어디 안 가요 아가씨.”그러고는 연우를 보며 말했다.“도련님, 아가씨가 저와 떨어지는 걸 원치 않으시니 아무래도 오늘은 제가 돌보는 게 좋겠습니다.”“알겠습니다. 옆 칸에 있을 테니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알려주세요.”“네, 도련님.”몸을 돌려 서자 연우는 다시금 예전의 차가운 표정을 하고 병실 문을 조용히 닫고는밖으로 나갔다.소월은 천천히 눈을 떴다. 연우의 그림자가 문틈 사이로 전부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서야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
장소월은 종래로 손해를 본 적이 없는 안하무인에 제멋대로인 성격이라, 언젠가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걸 연우는 일찌감치 예상하였다.장해진은 향을 다 피운 다음 휙 돌아섰다.“소월이가 도대체 어쩌다 사고를 당했는지 조사는 다 해왔나?”장해진은 비행기가 도착하자마자 급히 오는 바람에 옷조차 미처 갈아입지 못했다.그는 아주 크고 다부진 체격의 소유자였다. 손목에는 염주를 끼고 있었고 눈빛이 매서운 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젊은 시절 장해진은 적지 않은 나쁜 짓을 도맡아 했는데, 한눈에 봐도 흉악한 생김새는 아니었다. 가만히 있으면 오히려 사람들에게 푸근하고 자상한 인상을 주었지만, 그의 잔인한 수법으로 인해 사람들은 장해진을 두려워했다.일찍이 손에 피를 많이 묻힌 탓이었을까, 조금이나마 죄를 덜고자 장해진은 서재에 불상을 세워놓았고 매년 절에 적지 않은 기부를 해왔다.“조사 다 끝냈습니다. 그런데 강가네 사람들 역시 이 일을 조사하는 중이랍니다. 그리고 어제... 제가 사람을 시켜 범인을 잡으려 했는데 강가네 쪽 사람들이 한 발 더 빨리 그 사람을 데려갔습니다.”“강가네?”장해진은 실눈을 뜨며 말했다.“네.”강가네라... 이 서울바닥에 그만한 힘을 가진 강가네가 그 집안 빼고 또 누가 있을까!서울 4대 재벌세가 중에서도 손으로 꼽히고, 서울의 상업경제명맥을 주름잡고 있는 강가네는 그야말로 재벌가 중의 재벌가, 진정한 상류사회의 사람들이라 볼 수 있다. 장가네는 그들에 비하면 발밑의 발판에 지나지 않았다. “소월이가 언제 강가네 사람들하고 내통한 거지? 강용인가?”“아닙니다, 다른 사람인 것 같습니다. 강용이 사람을 시켜 소월이를 다치게 한거라면 그들이 소월이를 위해 나서는 일도 없겠죠.”강용은 강가네 집안의 사생아였다. 강용이 강가네 집안에 들어가기 한참 전에, 그는 장가네와 인연이 있었다.이렇게 소월의 일에 나설 수 있는 사람은, 강가네에서는 강용밖에 없었다.오랫동안 큰일 없이 평화로운 삶을 지내다 보니 까
“도련님, 차가 다 준비되었습니다. 정말 강가네로 가실 생각입니까?”“왜, 내가 가면 안 되는 곳이기라도 한가?”반듯한 셔츠에 외투를 걸친 남성이 범상치 않은 기운을 뽐내며 휠체어에 앉아 있다. 옷소매 아래로는 푸르스름한 문신이 보였는데 그 때문인지 그에게서는 어두운 기운이 뿜어져 남들이 선뜻 다가서지 못하게 했다.“하지만 부인께서...”강영수는 눈을 치켜뜨고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이건 내 일이지, 그 사람이 관여할 게 아니야!””죄송합니다, 도련님. 제가 말실수를 했습니다. 지금 바로 차로 모시겠습니다.”강영수가 집 밖에 나와 햇빛을 볼 수 있기까지는 수년의 시간이 걸렸다. 바깥세상은 그녀가 말한 것과 같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강영수는 곁눈질로 담 너머의 대추나무를 힐끗 보았다. 그곳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유유히 흔들고 눈을 찡긋하며 은은한 미소를 보내는 그녀의 그림자가 보이는 듯 했다.정작 눈을 돌려 그곳을 바라보니, 그 따뜻함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차가운 공기만이 감돌뿐이었다.한 시간 후, 그를 태운 차가 호화로운 별장에 도착했다. 문 입구에는 수십 명의 하인들이 두줄로 나란히 서있었다. 검은색 카니발이 천천히 대문에 들어서자, 경호원들이 앞으로 재빨리 다가와 조수석 뒷편의 문을 열어주었다.하인이 휠체어를 밀고와 강용수를 그곳에 앉혔다. 줄 서 있던 하인들이 일제히 큰 소리로 말했다.“집에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도련님!”강영수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강가네 고택을 얼마 만에 와보는 것인지 그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아이고 우리 수 왔구나~”불현듯 멀지 않은 곳에서 걸걸한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환갑을 넘긴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강병준이 다급히 말했다.“어머니, 천천히 하세요.”강영수는 노인이 다가오는 것을 보자 창백한 입술을 천천히 뗐다.“할머니.”그러자 할머니는 눈물을 보이셨다.“네가 드디어 할미를 보러 오는구나.”영수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뒤에 서 있는 중년남
“괜찮습니다. 이곳에 제 자리는 없는 것 같아요. 돌아오면 누군가의 눈에 거슬리는 존재가 될까 두렵기도 하고요.”조금은 냉랭한 말투였다.그 말을 들은 할머니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가워지셨다.“누가 그러더냐? 우리 강가네 손자라고는 오직 너밖에 없단다. 너는 커서 가업을 물려받아야 한다. 네가 이곳 사람이 아니면, 누가 이곳 사람이란 말이냐?”강영수는 모르고 있었다. 강병준이 심유를 아내로 맞이한 다음, 강용은 강가네 고택에 한 발자국도 들이지 못했고 강가네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 받지 못했다는 것을.“영수야, 말하는 태도에 신경을 써줬으면 좋겠구나. 그 사람이 여태 너를 이렇게 가르쳤니?”“저를 어떻게 교육해왔는지... 아버지가 관여할 수 있는 게 아니예요!”손안의 젓가락을 꽉 움켜쥔 영수의 손등에는 핏줄이 선명히 돋아나 있었다. “오랜만에 와서 할머니에게 불편을 끼쳐드릴 전혀 생각은 없었어요. 죄송해요, 할머니.”영수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할머니는 피골이 상접한 손으로 그의 손등에 살며시 얹으며 물었다.“수야, 무슨 일이냐 도대체? 누가 너를 괴롭히고 있는 거냐? 이 할미에게 다 말하렴... 내가 도와줄 수 있단다!”“그럴 필요 없으세요.”영수는 젓가락을 놓고는 티슈를 뽑아 입 주변을 닦고는 옆에 있는 사람에게 눈길을 보냈다.“사람은 도착했는가?”집사가 말했다.“이미 문밖에 계십니다.”영수는 손을 안쪽으로 휘휘 저었다.그 손짓을 본 집사는 문밖에 신호를 보냈고 뒤이어 두 명의 경호원들이 검은색 티셔츠를 입은, 온몸에 상처를 입은 사람을 끌고 와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강병준은 바닥에 있는 사람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강용?”그의 얼굴 곳곳에는 멍이 들어있었고 두 손은 부러져 이상한 모양으로 구부린채 엎드려 거의 반혼수 상태로 꼼짝도 하지 못했지만, 눈빛은 여전히 매서운 기운을 뿜고 있었다.할머니는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재수 없는 놈. 수야, 이놈은 왜 데리고 왔느냐?”강병준은 당
병원에 입원한 지 보름 만에 퇴원했다. 이 시간 동안, 장소월은 마냥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몸을 회복하는 동시에 시험지도 잊지 않고 몇 세트 풀었다.그 사이 전연우는 아무리 바빠도 꼭꼭 와서 장소월이 풀었던 시험지를 봐주곤 하였는데 틀린 곳을 발견하면 제때 알려줬고 차근차근 설명도 해주었다.쉬는 시간, 전연우는 평소에 장소월이 시간을 느긋하게 보낼 수 있게 하려고 그녀의 핸드폰에 몇몇 자신의 회사에서 새로 개발한 심심풀이용 게임을 다운로드해주었다.하지만 장소월은 게임을 거의 하지 않았고 대부분 시간을 공부에 투자하였는데 몇 개월 남지 않은 중간고사가 장소월이 장가네를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에 열심히 해야만 했었다.‘전연우와 장해진의 싸움에서 멀어져야 해...'전연우는 장소월의 퇴원 절차를 도와주었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통증은 가시지 않았지만, 전보다 많이 좋아졌고 몸의 상처도 겉의 딱지가 거의 모두 벗겨지고 그 위에 새로운 피부가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가려운 건 어쩔 수 없었다.이번에 전연우가 장소월한테 그나마 시간을 투자한 것은 단지 장해진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밖에서 모두가 말하기를 전연우는 그저 장해진이 옆에서 키운 개에 불과하다고 한다.하지만 장소월만이 알고 있었다. 사실 전연우는 한 마리의 호시탐탐 목표물을 노리고 있는, 어둠 속에서 배회하고 있는 야생 늑대라는 것을.언제든지 사람을 눈 깜빡 안 하고 죽일 수 있는 짐승이라는 것을 말이다.그는 무엇을 하든지, 그가 하는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다 철저히 계산된 행동이었다.그의 친절은 여태껏 헛되이 준 적이 없다.장소월은 전연우의 뒤를 따라 아우디 차 앞으로 갔다.이미 조수석 뒷좌석에 앉아 있는 백윤서를 보자마자 장소월은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도 백윤서에게서 흘러나오는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차 앞으로 돌아 운전석 문 앞에 서서 장소월을 바라보던 전연우는 무엇을 발견했는지 대뜸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늘 네가 퇴원했잖아. 마침 윤이도 같이 데리고 가서
“소월아.”장소월은 비몽사몽 해서 눈을 떴다. 그녀의 눈에 전연우의 예리하고도 어딘가 음침한 눈동자가 들어왔다. 장소월은 아직 잠에서 덜 깬 듯, 몇 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반응이 다소 과하게 몸을 뒤로 젖혔다. “오빠... 왜... 왜 그래요?”전연우는 그녀를 차갑게 보면서 말했다. “집에 도착했어. 어서 내려.”“아... 네...” 전연우는 곧바로 차에서 나왔고 장소월이 안전벨트를 풀려던 찰나, 차 위에 붙어있는 스티커를 보고는 곧바로 뜯어버렸다.그리고 차 위에 놓인 물건들, 냄새를 제거하는 향수까지 모조리 깨끗이 치웠다.장소월이 차에서 내리자, 전연우는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물건을 보았지만 모두 각자의 침묵을 지키며 서로 입을 열지 않았다.괜히 어떤 말을 꺼냈다가 자칫하면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더 멀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였다.장소월이 현관문에 들어서자, 아줌마가 반겨주셨다. “오늘 집에 손님이 오셨어요. 일단 먼저 손부터 씻고 나서 밥 드세요.”장소월은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손님? 누구요?”“아가씨 담임 선생님이라던데요.”‘강만옥?’장소월은 순간 가슴이 꽉 막힌 것만 같았다. ‘강만옥이 어떻게 여기에 왔지?’‘일부러 장해진인데 접근하려고 왔나?’‘아니면 전연우와의 계획이 앞당겨졌나?’장소월은 손이 덜덜 떨렸고 눈 밑에 어두운 빛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지만 너무나도 빨라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였다.“그럼 강 선생님은요?”그녀는 지금 서재에서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듣자니 네가 학교에 있었던 그 일 때문이라고 한다.전생에 장소월에게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가 다시 태어나면서 원래의 운명이 흘러가야 하는 방향을 바꾸었기 때문에 지금의 어떤 일도 함께 바뀐 것 같았다.전연우는 그녀를 지나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백윤서의 곁으로 갔다.그때 위층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님,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소월에 관한 일은, 이후에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습
“괜찮아요. 나도 민아 씨를 도울 다른 방법 찾아볼게요. 나와 결혼하겠다고 한다면 기꺼이 해줄 거예요... 오늘 백화점에 갔을 때 반지도 하나 봤어요. 민아 씨가 좋아할지 모르겠네요.”신이랑이 호주머니에서 검은색 실크 상자 하나를 꺼냈다. 뚜껑을 여니 반짝반짝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소민아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고요한 방 안엔 그녀의 고른 호흡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신이랑이 소파에서 일어나 그녀 앞에 무릎 한쪽을 꿇고 앉았다. 그는 조용히 반지를 꺼낸 뒤 진심 어린 눈빛으로 소민아를 바라보았다.“내가 좀 성급하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더는 못 기다리겠어요. 민아 씨...”“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민아 씨가 쉽게 나한테 이혼을 요구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어요.”이건 신이랑의 욕심이다. 그렇다... 소민아가 처음으로 결혼을 입에 올린 그 순간부터 그는 단 한 번도 이혼을 고려해본 적이 없다.신이랑은 소파에 기대어 앉아있는 여자를 안아 침실에 눕히고는 신발을 벗기고 이불을 덮어주었다...소민아는 이불 속에 들어가 꼼지락거리며 편한 자세를 취했다.다음 날 날이 밝아올 때까지 여자는 깊이 꿈나라에 빠졌다.몽롱한 정신으로 눈을 떴을 때, 옆에 누워있는 남자를 본 순간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이랑이라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놀란 마음이 천천히 진정되었다. 그녀는 이마를 찌푸리고 침대에서 내려와 신발을 신고는 머리카락을 잡고 거실로 걸어 나왔다.소민아는 목이 말라 컵에 물을 따르고는 몇 모금 마셨다. 그녀가 창가에 서서 잠을 깨고 있을 때,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뒤돌아보니 신이랑이 줄무늬 잠옷을 입고 다가오고 있었다. 사이즈가 맞는 듯했지만 자세히 보면 조금 헐렁했다. 소민아가 기성은이 이 집에 왔을 때를 대비해 준비한 잠옷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기성은은 한 번도 입지 못했다. 그리고 신이랑이 신고 있는 슬리퍼까지...소민아는 시선을 거두고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인사했다.“좋은 아침이에
송시아가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 송시아의 약점.소민아는 송시아의 약점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사람 사이엔 상성이 있는 법이다. 전연우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송시아를 통제할 수 없다.소민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히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감사합니다, 서 선생님.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아요.”서철용은 침대 옆으로 걸어가 잠이 깰 기미를 보이는 여자를 품에 안고 다독였다.소민아가 물었다.“왜 그래요?”서철용이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가요.”밝게 빛나는 조명을 쳐다보고 있으니 눈앞이 흐릿해졌다.‘전연우, 난 네가 네 퇴로를 만들어놓았다는 거 알고 있어. 사실 넌 이 모든 걸 예상했잖아. 송시아, 장소월 모두 네 계획 중 일부였던 거야. 아니면 내가 왜 널 천년 묵은 구미호라고 하겠어.’‘기성은은 계획 중 일부인 동시에 네 장기 말이기도 해. 하지만 이번엔... 전부 소민아에게 걸었던 거야. 소민아야말로 네 제일 중요한 장기 말 맞지?’‘결혼식을 준비하면서부터 넌 이럴 작정이었던 거야.’전연우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서철용 역시 소민아와 송시아의 관계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전연우는 대체 어떻게 두 사람이 자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걸까.‘전연우... 넌 정말 무시무시한 놈이야!’‘모든 사람을 꿰뚫어 보고, 이번엔 자신까지 장기판 위에 올려놓았어.’‘이번 도박이 맞아떨어지길 바랄게...’소민아는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던 도중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다름 아닌... 신이랑이었다.이 깊은 밤에 왜 이곳에 나타났단 말인가? 이 추운 날 뭘 하려고!소민아는 얼른 차를 세우고 뛰어내렸다.“이랑 씨, 지금이 몇 시인데 여기에 있어요!”신이랑이 몇 번 기침을 하고는 말했다.“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왔어요. 얘기는 잘 됐어요?”그녀는 신이랑에게 전부 말해주고 싶지 않아 화제를 돌렸다.“곧 비가 쏟아질 것 같아요. 우리 얼른 돌아가요
서철용은 고개만 끄덕일 뿐 더는 말하지 않았다.전연우는 반평생 지독한 악인으로 살아왔지만, 결국엔 이 길을 선택했다.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장소월의 마음을 돌리려 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그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장소월은 결코 그의 목숨 때문에 뒤돌아보지 않았다...전연우 본인이 쌓은 업보이니 그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그 누구도 절대 끼어들 수 없다.전연우와 장소월... 두 사람 사이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선이 존재한다...어찌 됐든 성세 그룹은 서철용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또한 송시아 역시 전연우가 선택한 사람이다.조금 전 소민아는 송시아가 장소월의 위치를 찾아냈다고 했지만, 절대 그럴 리가 없다.어느 날 장소월이 제 발로 걸어 나와 전연우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아무도 그녀를 찾을 수 없다.누구에게나 아쉬움은 남는 법이다...소민아는 차를 몰고 나가 한참을 달려서야 배은란이 말한 만두 가게에 도착했다.그녀가 돌아와 말했다.“식어서 맛이 떨어질 테니까 지금 가서 데워올게요. 양념장은 사장님께서 이미 만들어주셨어요.”배은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아가씨, 부탁할게요.”“괜찮아요. 당연히 해야죠.”배은란은 소민아가 가져다준 만두를 먹고 잠이 들었다. 그때 시간은 어느덧 저녁 12시였다. 그녀는 문 앞 으슥한 곳에 앉아 덜덜 떨며 쪽잠을 잤다.그녀가 고개를 떨구었을 때, 눈앞에 남자의 가죽구두가 나타났다.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어 자리에서 일어섰다.“서 선생님, 주무시려고요? 5분만 내어주실 수 있으세요? 서 선생님한테 할 얘기가 있어서요.”서철용이 시간을 확인하고는 말했다.“이제 4분 30초 남았어요.”“저와 송시아는 어린 시절 헤어졌던 자매였어요. 제 원래 이름은 송화영이고요. 송시아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신씨 가문과 손을 잡고 신군회를 시장 자리에 앉히려 하고 있어요. 지금은 소월 언니 목숨으로 절 협박하며 신씨 집안 아들과 결혼하라며 강요하고 있고요.”“오늘 서 선생님을 찾아온 목적은 두 가
복도 끝 조명이 희미하게 켜졌다가 꺼졌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소민아는 서철용과 함께 병원 복도 벤치에 앉아있었다.“다 사실대로 털어놓으면 저 도와주실 거예요?”간호사가 분만실에서 다급히 걸어 나왔다.“서 선생님, 사모님께서 진통을 시작하셨어요. 아마 새벽 다섯 시쯤이면 아기가 태어날 거예요.”서철용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수고해 주세요.”간호사가 간단히 설명했다. 군병원 사람들 중 서철용이 의료계 유명한 실력자라는 걸 모르는 이가 없다. 의사라면 누구든 그와 같은 비범한 능력을 갖고 싶어하기 마련이다.간호사의 등장에 두 사람의 대화는 끊어져 버렸다. 서철용이 안으로 들어가니 그녀는 혼자 문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서철용은 침대에 누워있는 아내를 부드럽게 다독이고 있었다.그때, 소민아는 그 여자가 누구인지 선명히 떠올랐다.그녀는 서씨 가문 후계자인 서민용의 부인이었다. 서민용은 그녀가 본 사람들 중 가장 차분하고 온화한 드넓은 호수 같은 사람이었다. 몇 년 전 파티에서 처음 봤을 때, 아무리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져도 그의 옆에만 가면 순식간에 조용히 가라앉는 느낌을 받았다.서민용, 서울 내 얼마나 많은 여자들의 꿈에 그리는 남자였는지 모른다.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젊은 나이에 결혼해 여자들의 마음에 대못을 박았다.서철용... 고민해보니 대개 어떤 관계인지 유추할 수 있었다...하지만 서씨 가문에 대체 무슨 변고가 일어났길래 배은란이 시동생과 함께 다닌단 말인가?배은란은 진통의 고통 때문에 온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은 채 창백한 얼굴로 서철용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 순간, 소민아는 그녀 입에서 서민용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똑똑히 들었다.“민용 씨, 바쁘면 가봐. 나 이제 괜찮아. 우리 아기 얌전해서 전혀 안 아파.”소민아는 문 앞에서 배은란을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서철용은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배은란에게 말했다.“나 안 바빠. 너랑 같이 있을 거야.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체력을
어떻게...그녀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예전 파티에 참석해 치마가 어질러졌을 때 배은란의 치마를 빌렸었다. 시간이 3년이 넘게 흘렀으니 배은란은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소민아가 말했다.“서 선생님, 지금 어디에 가시는 거예요? 저 마침 차 몰고 왔는데 모셔다드릴게요.”배은란은 뭐라 말하려 했지만 서철용의 손에 끌려 방향을 바꾸어 걸어갔다. 서철용은 그녀에게 관심을 줄 조금의 생각도 없어 보였다.“민용 씨 찾아온 거 같은데 용건이 뭔지 물어볼까?”배은란은 그 말을 내뱉은 순간... 배에서 끔찍한 통증이 밀려왔다.“으악, 내 배...”“아기가 곧 나올 것 같아.”“배가 너무 아파.”서철용의 눈에 배은란의 다리 사이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들어왔다. 그가 당황스러운 마음에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소민아가 차를 몰고 다가왔다.“서 선생님, 얼른 차에 타요. 병원에 모셔다드릴게요.”서철용은 어쩔 수 없이 양수가 터진 여자를 안아 차에 앉혔다. 임산부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소민아는 부드러운 음악을 틀었다.“서 선생님, 어느 병원으로 갈까요?”서철용은 바로 병원 이름을 말했다.“군병원이요.”군병원은 규모는 작았지만 각종 설비들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이곳에선 군인 가족이나 특수 인원들에게만 의료 서비스를 제공했다. 서철용은 연구원 대리 원장이었기에 이곳에 들어갈 자격이 있었다.소민아는 길눈이 밝아 막히는 도로를 피해 빠르게 지름길로 통과해 30분도 채 되지 않아 군병원에 도착했다.그녀는 처음으로 군병원이라는 곳에 발을 들였다. 경계가 삼엄해 특수한 통행증이 없으면 아무도 들이지 않았다.소민아는 서철용의 뒤를 따라 최대한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의사가 빠르게 배은란을 분만실로 데려갔다.간호사까지 따라 들어가고 문밖에 서철용과 소민아만 남아 있었다.소민아가 더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서 선생님, 소월 언니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왔어요.”서철용은 두 손을 허리에 올리고 기다리고 있었다.“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소민아는 인맥을 동원해 백방으로 알아본 뒤에야 소월 언니를 데려간 그 사람의 정체를 알아냈다.그녀는 신이랑에게 말하고 난 뒤 주소에 따라 한 연구소에 도착했다. 신이랑이 함께 오겠다고 했으나 그녀는 완곡히 거절했다.문 앞에선 경비원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내부 인원이 아니라면 절대 들어갈 수 없는 시스템이었다. 소민아는 명함 한 장을 경비원에게 건네주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엄숙한 얼굴로 그녀에게 경고했다.“여기엔 아가씨가 찾는 사람 없어요. 경고하는데 지금 당장 돌아가요. 아니면 업무 방해죄로 신고할 거예요.”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일정한 신분을 갖고 있다.소민아 역시 더는 억지로 들어갈 수 없어 발걸음을 돌렸다. 물밀듯 밀려오는 후회에 그녀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이마를 두드렸다.“소민아, 너 바보야? 이랑 씨는 시장님의 아들이잖아. 전화 한 통이면 해결될 일인데 왜 같이 오겠다는 거 거절했어. 평소엔 머리 좋은 거 같더니 이럴 때 보면 정말 멍청해.”경비원은 그녀가 돌아가지 않자 연구원으로 전화를 걸었다.“서 선생님, 누가 찾아왔어요.”서철용은 마스크를 벗고 연구실 바깥으로 나와 복도 끝에 걸어가고는 호주머니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물고 불을 붙였다.“어떻게 생겼어요?”“나이는 이십 대 초중반, 그리 많아 보이지 않고 검은색 유니폼을 입고 왔습니다. 이름은 소민아랍니다. 장소월의 친구이고, 언니가 소현아라고도 했습니다. 사람을 찾으러 온 것 같습니다.”“알겠어요.”서철용은 전화를 끊고 얼마 피우지 않은 담배를 끄고는 쓰레기통에 버렸다.소민아는 신이랑에게 전화를 걸려 한 순간, 아무도 믿지 말라던 기성은의 말이 떠올라 바로 끊어버렸다.그녀는 차 안에서 조금 기다리기로 했다. 점심부터 오후, 오후부터 저녁까지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그녀는 자꾸만 졸음이 몰려와 얼마나 많은 커피를 시켰는지 모른다.시간을 확인해보니 어느덧 저녁 여덟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핸드폰도 배터리가 다 떨어져 전원이 꺼져버렸다.그녀는 흐릿한 정신을 가다듬
신이랑은 너무 성급했다. 이 청첩장을 그 짧은 시간 안에 어떻게 만들었는지 그녀 역시 알지 못했다....다음 날 성세 그룹 대표 사무실.소민아는 신이랑과 교제를 시작했다고 송시아에게 말했다.그 말을 들은 송시아는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그녀는 소민아가 하루빨리 신씨 집안 며느리가 되기를 바랐다. 그럼 걱정 없이 신군회를 시장 자리에 올릴 수 있고, 신이랑도 비서실장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당신 말대로 이랑 씨와 사귀고 있어요. 그럼 당신도 약속대로 소월 언니 해치지 않는 거 맞죠?”송시아가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당연하지. 장소월이 서울시에 나타나지만 않으면 돼. 그럼 예전 일은 눈감아줄 수 있어. 너도 장소월이 영원히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기를 기도하는 게 좋을 거야.”“그러니까 여전히 소월 언니를 해칠 생각을 갖고 있다는 거잖아요. 송시아 씨, 역시 당신은 믿을 사람이 못 되네요.”송시아가 두 손으로 책상을 짚으며 벌떡 일어났다.“난 이미 최대한 양보했어. 더 이상 어떻게 하길 바라? 민아야... 내 동생이라는 방패로 너무 과분한 걸 요구하진 마... 내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거든.”“난 네 언니야. 다른 사람보다 이 언니를 먼저 생각해야 해. 장소월이 대체 너랑 전연우한테 무슨 약을 먹였길래 하나같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거야. 대체 장소월이 어디가 그렇게 좋은데.”“그냥 인정해요, 소월 언니를 질투하고 있다고. 당신 미모는 소월 언니의 만분의 일도 채 안 돼요. 심지어 인품은 비교할 바도 못 되죠. 소월 언니는 아무한테도 해를 끼친 적 없지만, 당신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나요?”그 말을 끝으로 소민아는 홱 뒤돌아 대표 사무실을 나섰다. 송시아는 분노에 차올라 책상 위 모든 물건을 집어 던져 버렸다...소민아 역시 장소월이 어디에 있을지 몇 번이고 생각해 보았다.당시 장소월을 데리고 떠난 사람을 본 건 소민아 한 명뿐이다. 여자처럼 예쁘장하게 생긴 남자였는데 그날 결혼식에서 하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그녀도 송시아가
중식 레스토랑 안, 신이랑과 소민아는 일찌감치 도착해 음식 주문을 마쳤다. 맞은편엔 아주머니가 열한 살 남짓한 남자아이와 함께 앉아있었는데, 아이는 장난기가 많아 젓가락으로 그릇 안 음식을 마구 헤집어 놓았다. 아주머니가 부드럽게 한마디 했지만, 아이는 전혀 개의치 않고 흥 콧방귀를 뀌고는 계속 장난을 치고 있었다. 이후 아주머니도 어쩔 수 없이 더는 아이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진미령의 아름다운 미모는 무용단 단원이었던 예전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세월도 미인은 피해 가는 모양이다. 얼굴에 주름은 조금 패어 있었지만, 예전 얼마나 출중한 외모를 갖고 있었는지 한눈에 보아낼 수 있었다. 그녀는 빨간색 코트 차림에 목엔 진주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하지만 아주머니의 얼굴엔 약간의 짜증이 드러났다.“우리 현빈이 내일 학원 가야 해. 내가 오늘 이렇게 나온 거 애 아빠는 몰라. 할 얘기 있으면 얼른 해.”두 모자는 한자리 띄워 앉았고, 소민아는 그 옆에 있었다. 신이랑이 말했다.“저 곧 결혼할 것 같아요. 결혼식 날 어머니께서... 와주셨으면 좋겠어요.”진미령은 소민아의 얼굴을 대충 훑어보고는 말했다.“네가 건강하게 자란 것만으로도 난 만족해. 네가 지금 결혼하고 애를 낳는다고 해도 난 이제 너한테 해줄 게 없어. 저번에 네가 나한테 보낸 돈은 다시 돌려보냈어... 금액이 차이나지 않는지 확인해봐. 네 양육권을 가진 뒤로 난 최선을 다해 널 성인으로 키워냈어. 이젠 너도 혼자 살아갈 능력 있잖아. 지금 내가 꾸리고 있는 이 가정과 거리를 유지해줬으면 좋겠어.”신이랑의 올라갔던 입꼬리가 점차 경직되었다. 밥상 아래 꽉 쥐어지는 주먹까지 소민아는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신이랑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고스란히 느껴졌다.신이랑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슬픔은 가감 없이 몸에서 풍겨 나오고 있었다.“돈이 아무리 많아도 함부로 쓰면 안 돼. 아가씨 예쁘네. 행복하게 잘 살아.”진미령은 그 한마디만 남겨놓고 아들 손을 잡고 나가버
“우리 남원 별장에 있는 아이를 몰래 데리고 나올까요? 장소월은 전연우의 죽음은 개의치 않아 할 수 있어도 아이까지 외면하지는 못할 거예요.”송시아가 남자의 품에 기대어 말했다.“계속 찾고 있는데 어디에 숨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서철용도 연구원에 들어가 버렸어요. 우리의 사람들은 출입금지라 장소월에 대해 묻고 싶은데 방법이 없네요.”한의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품속 여자를 바라보았다.“남원 별장은 지금 강지훈이 책임지고 지키고 있어. 또한 전연우가 떠나기 전 최고 레벨의 방어 시스템을 구축해 놓기도 했고. 일반 사람들은 절대 들어가지 못해. 설사 들어간다고 해도 살아 돌아오지 못할 거야.”송시아는 도리어 흥분하며 말했다.“그럼 주위에 폭탄을 심어놓고 터뜨리는 건 어때요? 통로를 하나 파서 그 속에 묻어두면 되잖아요. 그럼 쉽겠네요.”“넌 정말 지독한 여자야.”송시아가 배시시 웃어 보였다.“내 이런 모습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몇 분 뒤, 사무실에 야한 공기가 가득 찼다. 그 소리만 들어도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를 정도였다....소민아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돌연 가슴에서 불편함이 느껴졌다. 이런 경우는 드물었던지라 뭔가 큰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그때, 신이랑이 통화를 마치고 바깥에서 걸어들어왔다.“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소민아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전화는 했어요?”“네. 저녁에 레스토랑 예약해뒀어요. 진짜 결혼이든 가짜 결혼이든 난 민아 씨가 어머니한테 인사드렸으면 좋겠어요.”“어머니도 민아 씨 보면 엄청 기뻐하실 거예요.”소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어머니한테 드릴 선물 준비해야겠어요. 빈손으로 가면 안 되잖아요.”“그래요. 민아 씨 뜻대로 해요.”신이랑은 정말 그녀를 진심으로 아껴주고 있는 것 같았다.신이랑의 어머니에 관해선 그에게 들은 바가 있다. 아주 자애롭고 친절한 분이시라고 했다. 예전 무용단에 있을 때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