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수의 사랑에 갇히다의 모든 챕터: 챕터 1 - 챕터 10

30 챕터

제1화

늦은 밤, 호텔의 스위트룸.남자는 한 손으로 여자의 잘록한 허리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 다리를 들어 올려 통유리창 앞에 밀어붙였다.“아! 아파...”심지유의 등이 유리에 쿵 하고 부딪혔다.창문 밖은 영하의 날씨였지만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안팎의 극명한 대조와 남자의 적극적인 공세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른해진 그녀는 두 팔로 간신히 굵직한 목덜미를 끌어안았다.평소에 차갑기만 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칠흑 같은 눈동자에 욕망이 일렁거렸다.호흡이 점점 거칠어지며 허리에 있던 손이 위로 향하던 찰나...“그만!”이내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남자는 마치 익숙한 상황인 듯 당황하기는커녕 무덤덤하게 말했다.“꼭 지금 초를 쳐야 하겠어?”그러고 나서 심지유를 한 바퀴 뒤집더니 유리창에 바짝 엎드리게 했다.“아니. 이번엔 진짜야.”남자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 내보내며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에 달라붙은 앞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겨주었다.“또 누구 때문에 심기가 뒤틀렸지? 임 비서? 강수민?”다른 여자의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심지유는 심장이 따끔거렸다.그는 역시나 한결같이 대수롭지 않았고, 이내 옅은 미소를 지었다.“나 곧 결혼해.”곧이어 후끈 달아오른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얼어붙었다. 욕망으로 가득했던 남자의 눈동자는 싸늘하게 식어갔고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누구랑?”따뜻한 온기가 멀어져 가자 왠지 모르게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심지유는 남자를 흘긋 쳐다보고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섬주섬 껴입기 시작했다.기다리다가 짜증 나는지 쌀쌀맞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누구랑 결혼하는데?”옷매무새를 정리하던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말투에 애교가 가득했다.“알아서 뭐 하게?”눈을 가늘게 뜬 남자의 모습은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며 깊이를 알 수 없는 새까만 눈동자는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독수리처럼 날카롭게 번뜩였다.“어차피 나랑 결혼할 생각이 없잖아.”심지유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다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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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안수희는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여자를 바라보며 입만 벙긋할 뿐 끝내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이 상황에서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그녀가 떠나면 일자리를 잃을 게 뻔했지만 설령 본인이 잘리더라도 그동안 힘들어하던 모습을 지켜봐 온 장본인으로서 심지유가 더는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다.이때 이삿짐센터 직원이 다가와서 말했다.“사모님이 말씀하신 짐은 다 실었어요.”“고생했어요. 아침 댓바람부터 불러서 죄송해요.”직원이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시급이 무려 세 배나 되는데 시간이 대수겠어요? 새벽에 부르시더라도 당장 출동해야죠.”“그럼 물건은 제가 보내준 주소로 옮겨주세요.”직원들이 하나둘씩 집을 나섰다.심지유는 안수희를 힐끗 쳐다보았다.“아줌마, 전 이만 가볼게요. 이거는 돌려드릴게요.”그리고 가방에서 은하수 별장의 키를 꺼내 건네주었다.안수희는 키를 받아 들고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만감이 교차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지유 씨라면 분명 더 좋은 남자를 만날 거예요.”이 말을 듣는 순간 심지유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가더니 앞으로 다가가 그녀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러고 나서 어깨에 살포시 기대어 나지막이 속삭였다.“혹시라도 나중에 일자리를 잃게 되면 저한테 연락해요.”안수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지유 씨, 잘 지내요.”“네.”5년이라는 세월은 마치 일장춘몽처럼 꿈속에서 잠시나마 행복을 누렸지만 현실을 직시해야 할 때가 왔다. 허강준과 그녀는 접점이 없는 평행선 같았고 이제는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야만 했다.별장을 나서자 하늘에서 눈이 펑펑 내렸다.가방에서 목도리를 꺼내 칭칭 감자 보이는 거라고는 커다란 눈동자밖에 없었다. 이내 휴대폰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누군가의 번호를 지우고 차단까지 했다.이미 헤어지기로 한 이상 굳이 연연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그리고 고개를 숙여 쪼그리고 앉아 옆에 있는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지니야, 앞으로 같이 잘살아 보자. 이만 갈까?”곧이어 둘은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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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은하수 별장.허강준이 거실로 들어서자 가정부가 마중 나와 외투를 건네받았다. 그러고 나서 나긋한 목소리로 오늘의 날씨, 실내 온도와 습도, 이모가 만들어놓은 반찬까지 일일이 보고했다.지금까지 특이 사항은 없었다.그러나 2층으로 올라가 손을 씻으려고 화장실에 들어가는 순간 텅텅 빈 선반을 발견했다.예를 들면 평소에 손을 씻을 때 자주 사용하던 핸드워시는 심지유가 사다 놓은 솔향이 나는 제품인데 워낙 좋아하서 무조건 써야 한다며 강요까지 했다.하지만 지금은 감쪽같이 사라졌다.핸드워시 뿐만 아니라 헤어, 바디 케어 제품으로 가득했던 선반도 휑했고 남성용 바디워시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커다란 몸집의 남자는 우두커니 서서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화장실에서 나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제야 집에 있던 심지유의 물건이 전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상황을 인지하고 나서 그는 안수희를 불러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안수희는 조마조마한 얼굴로 대답했다.“지유 씨가 자기 물건은 다 챙기고 집을 나갔어요.”허강준의 입이 한일자로 닫혀 있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언제요?”“일주일 전이요.”바로 호텔에서 실랑이를 벌였던 다음 날이지 않은가?다시 말해서 그날 밤에 강동시로 돌아와 짐을 쌌다는 뜻인데...간덩이가 부었을뿐더러 이제 겁도 상실한 건가?꿈쩍도 안 하고 아무 말 없이 싸늘한 기운만 내뿜는 남자를 보며 안수희는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허강준은 휴대폰을 꺼내 힐긋 쳐다보았고 지금까지 단 한 통의 연락도 못 받았다.그동안 일주일 넘게 토라진 적도 있어서 사실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이번에는 화가 단단히 난 듯싶었다.방황하던 손가락이 화면에 뜬 누군가의 이름에서 우뚝 멈췄다.안수희는 몰래 허강준의 안색을 살피며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대표님, 지유 씨한테 연락해서 좀 달래주는 건 어떠세요?”비록 기분을 풀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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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그나마 하은비가 편을 들어줘서 다행이었다. 게다가 다들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금세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심지유는 간식이 별로 땡기지 않아 임경수와 함께 진료실로 향했다.발을 들이는 순간 임경수는 그제야 주머니에서 재스민 차를 꺼내 건네주었다.“자, 지유 씨가 좋아하는 차에요.”생각지도 못한 서프라이즈에 어리둥절하던 그녀는 피식 웃으면서 받아 들었다.“고마워요.”그리고 기대로 가득 찬 임경수의 시선 속에서 한 모금 마시고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카페 드림 거네요?”“네. 지유 씨 최애잖아요. 마침 여유가 있어서 일부러 차를 타고 다녀왔죠.”“괜히 폐를 끼쳤네요.”임경수는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아니에요. 지유 씨를 위해서라면 당연한 일이죠.”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왠지 모르게 어색한 느낌에 심지유는 손에 든 재스민 차만 홀짝거렸다.정확히 말하면 단둘이 있을 때마다 분위기가 서먹서먹해졌다. 임경수가 그녀를 좋아하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고, 지난 두 달 동안 쏟아부은 정성이 이를 증명해주기도 했다.물론 상대방의 마음을 받아주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아직까지 효과는 미미했다.“방금 동료분이 몇 년 동안 숨겨왔다고 했던 남자 친구가 전에 지유 씨한테서 들었던 그 사람 맞죠?”임경수는 그녀의 집에서 결혼 상대로 지목한 약혼자였다.허강준과 사귀었을 때만 하더라도 거절할 명분이 있었고, 가족들에게 더 좋은 남자를 만날 거라고 호언장담했다.하지만 약속을 지키는 데 실패했고 그동안 허강준을 소개해 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게다가 마지막 결혼 요청마저 외면당했다.결국 그녀는 최후통첩을 받게 되었다.“이번에도 맞선 제안을 거절하면 평생 네 어머니 볼 생각하지 마.”심지유는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다행히 맞선남은 겸손하고 예의가 바른 편이며 은근히 낯도 가렸다. 매너는 물론 기본적으로 배려가 깔려 있다.더욱이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은 누가 봐도 호감이 가득했다.그래서 굳이 거짓말하고 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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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거실은 침묵이 흘렀다.심태진은 고민하는 중이었고, 이선경은 화를 삭이고 있었다.딸 앞에서 체면은 구겨졌지만 임경수가 심지유에게 호감을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따라서 과유불급은 금물이기에 마지못해 한발 물러섰다.“그렇다면 일단 관두지 마. 다만 발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직장이라 미리 다른 곳으로 알아봐.”심지유는 묵묵부답했다.오로지 이익만 중요시하는 가족에게 굳이 생명을 살리는 직업이라고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말해봤자 비웃음만 사고 악담을 늘어놓을 게 뻔했다.“참, 임씨 가문에서 다음 주에 모임이 있다고 하더라. 초대장은 이미 보냈어.”드디어 기다리던 순간이 다가오자 고개를 번쩍 들었다.“채린을 데려가면 마음도 든든할 테니까 같이 가. 그리고 연회에 입을 드레스는 명숙 아줌마가 미리 준비해놓을 거야.”심지유는 심채린을 힐긋 쳐다보았다.아마도 속셈이 있는 듯 눈이 마주치자 입꼬리를 올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이내 시선을 돌리고 대답하는 대신 화제를 바꾸었다.“가족 모임이면 저만 초대받지 않았나요?”곧이어 이선경과 심채린의 안색이 돌변했다.“무슨 소리야? 같이 가기 싫다는 거야? 채린은 네 동생이잖아!”“임씨 가문에서 저만 초대했는데 제멋대로 다른 사람을 데려갔다가 미운털 박히면 어떡해요? 더욱이 약혼이 파투 날 지도 모르는데.”딸의 남편감을 물색하는 데 혈안이 된 이선경은 당연히 귀에 들리지 않았고 딱 잘라 부인했다.“그럴 리가? 채린이가 남도 아니고 설마 속 좁게 그러겠어?”심지유가 피식 웃었다.“설령 데려간다고 한들 임씨 가문에서 무슨 의도인지 단번에 간파하겠죠.”말로는 든든한 지원군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그녀를 발판 삼아 이 틈을 타서 신분 상승을 꾀하려는 게 분명했다.임경수의 어머니가 집에 초대장을 보냈다는 소리를 전해 듣는 순간 이기적인 모녀가 절호의 기회를 절대로 놓칠 리가 없다고 예상했다.‘역시.’물론 주는 만큼 돌려받아야 하는 법이다.심지유는 더는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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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전화를 끊고 나자 심지유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아버지가 단호하고 유능한 사람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다면 어머니도 내연녀 취급을 안 받고 자신도 혼외자가 되지 않았을 텐데.지난 몇 년간 모녀가 처했던 상황을 떠올리며 심지유는 몸을 돌려 반듯하게 누워 눈을 감았다.절대로 어머니와 같은 삶은 살 수 없다. 아니면 본인뿐만 아니라 자식마저 봉변당할지도 모른다.그나마 허강준과 만나는 동안 피임에 신경 써서 다행이었다.물론 상대방도 예외는 아니었다.남자인데도 여자보다 경계심이 훨씬 더 강했고, 콘돔이 없으면 아무리 흥분해도 이성을 붙잡고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헤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책임감이 돋보이는 행위라고 여겼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단지 불상사를 막으려는 조치에 불과한 듯싶었다.아이가 없는데도 결혼하려고 안달 났으니 만약 임신까지 하면 자식을 빌미로 무조건 결혼을 강요했을 거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컸다.심지유는 가소롭게 느껴졌다.어차피 헤어진 이상 억측해봤자 무용지물이었다.이내 잡념을 떨쳐버리고 눈을 감고 금세 꿈속으로 빠져들었다....일주일 후.임가네 가족 모임.임경수는 심지유를 픽업하기 위해 미리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그녀는 며칠 전에 임경수가 사람을 시켜 보낸 모 명품 브랜드의 F/W 하이엔드 컬렉션 드레스로 갈아입었다.메인 컬러는 로맨틱한 분위기의 핑크와 퍼플로 이루어졌고 디자인 면에서 달을 포함한 다양한 요소를 활용했다.몸에 걸치자마자 뽀얀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했으며 마치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났다.원래는 눈에 띄지 않으려고 무난한 컬러의 드레스를 선택했었다.하지만 임씨 가문에서 친히 드레스까지 보낼 줄은 몰랐기에 어쩔 수 없이 갈아입었다.방을 나서자 초조한 얼굴로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심채린을 발견했다. 오늘따라 스타일링이 유난히 과했는데 눈길을 사로잡는 빨간색 민소매 드레스, 그리고 목에 걸친 물방울 모양의 펜던트는 가슴까지 길게 늘어져 섹시미를 물씬 풍겼다.굵은 웨이브 펌과 촉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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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의혹이 가득한 그녀의 표정을 보자 임경수가 서둘러 설명했다.“우리 외외종 할아버지 댁인데 오늘 이곳에서 모이기로 했어요.”외외종 할아버지라니?심지유는 어리둥절했다. 정략결혼을 언급할 때만 하더라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단지 임씨 가문이 대단하다고만 전해 들었을 뿐 허씨 가문과 연관이 있으리라 꿈에도 몰랐다.설마 그녀가 생각하는 그 허씨 가문은 아니겠지?“할아버지께서...”그리고 자세하게 물어보려는 순간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밖에서 기다리던 사람이 다가왔다.임경수가 말했다.“일단 내리죠.”조수석에 따로 앉은 심채린이 재빨리 차 문을 열고 내렸고, 상황을 보아하니 이미 되돌리기에 늦었는지라 심지유도 마지못해 움직였다.일반 가족 모임과 달리 허씨 가문은 형제자매가 많은데다 나이가 좀 있는 사람은 이미 가정까지 이뤘기에 손님들로 바글바글했다.전체적인 인테리어는 격식 있고 품위가 넘쳤으며, 천장에 매달린 유럽풍 크리스털 샹들리에 덕분에 주변이 대낮처럼 밝았다. 유니폼 차림의 도우미들이 서빙하느라 바쁘게 움직였고, 화려한 옷을 입은 손님들이 삼삼오오 모여 술잔을 기울이며 담소를 나누었다.거실은 마치 작은 연회장을 방불케 했다.눈앞의 장면에 심지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현재 상황으로 볼 때 아마도 그녀가 생각한 허씨 가문이 맞을 것이다. 강동시에서 이 정도 영향력을 지닌 집안은 딱 한 곳뿐이다.다만 사람이 워낙 많아서 그 남자를 마주칠 일은 희박하다고 여겼다.그렇다고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법이다.임경수가 심지유와 함께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기품 있는 옷차림으로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귀부인이 여유롭게 걸어왔다.“경수야.”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임경수는 미소를 활짝 지었다.“이모.”귀부인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심지유는 왠지 모르게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곧이어 그녀는 세 사람 앞에 멈춰서서 부드러운 눈빛으로 심지유를 훑어보더니 심채린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러고 나서 옅은 미소와 함께 다시 심지유에게 물었다.“네가 경수의 약혼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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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만감이 교차하는 남동생의 표정에 허미진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곧바로 미소를 살짝 지었다.“강준아, 오늘 안 오는 줄 알았어.”갑작스러운 인기척에 허강준은 주의력을 빼앗긴 나머지 시선을 돌리고 고개를 까닥했다.“누나.”누나라니?그렇다면 이 귀부인이 바로 위에 있는 누나란 말인가? 어쩐지 이목구비가 닮았다고 했다.허씨 가문의 넷째 딸이 허강준의 누나라면 허강준이 임경수의 외삼촌이라는 뜻인데...관계를 파악하고 나니 심지유는 후회막급했다.이럴 줄 알았더라면 정략결혼에 동의하지 않았을 텐데.다만 어머니가 인질로 잡혀있는 이상 그녀에게 선택권은 없었다.“얼굴 한번 보기 참 힘들구나. 경수도 네가 온 걸 알았더라면 정말 기뻐했을 거야.”허강준의 표정은 시종일관 진지했고 감정이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내 무심하게 말했다.“경수가 약혼했다는데 삼촌으로서 당연히 참석해야죠.”말이 끝나자마자 허미진은 싱글벙글 웃었다.“그래. 비록 경수랑 나이 차이는 얼마 안 나지만 그래도 조카는 끔찍하게 챙길 줄 아네.”누나와 대화를 이어가는 와중에도 허강준은 심지유에 관해 먼저 물어볼 생각이 없는 듯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허미진은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듯 심지유의 팔을 살며시 끌어당겼다.“참, 강준아. 이 분을 소개해줄게.”그제야 칠흑 같은 눈동자가 당당하게 그녀를 향했다.“이름은 심지유, 경수의 약혼녀야.”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종일관 무심하던 잘생긴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언뜻 스쳐 지나갔고, 눈이 점점 가늘어지더니 끔찍한 기운을 내뿜었다.“경수의 약혼녀라...”허강준이 이를 바득바득 갈며 한 글자씩 내뱉었다.처음부터 끝까지 수수방관하던 심지유는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만큼 눈빛과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하는지 자연스럽게 유추할 수 있었다.아까만 해도 결혼 약속을 받기 위해 집까지 찾아왔으리라 확신했을 텐데 임경수의 약혼녀라는 소리를 듣자 전혀 예상치 못한 게 분명했다.어쨌거나 귀찮게 구는 사람이 사라졌으니 기쁜 건 둘째치고 드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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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이 자식이!”허미진은 남동생에게 오늘 도대체 왜 이러는지 묻고 싶었다. 평소와 전혀 다른 모습은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이내 낮은 목소리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강준이가 오늘 집에 오기 전에 어디 갔는지, 혹시 회사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이따가 알아보고 알려줘.”남자는 잽싸게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나서 허미진은 다시 손님을 접대하러 갔다....심지유는 허미진의 비서 정선아를 따라 2층 객실로 향했다.“지유 씨, 잠깐 쉬고 계시면 갈아입을 옷을 챙겨올게요.”“감사합니다.”이내 그녀를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정선아가 나가자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객실이라서 그런지 보일러가 꺼져 있었고, 술에 젖어 축축해진 드레스가 몸에 달라붙어 한기가 느껴졌을뿐더러 끈적거리는 느낌마저 들었다.결코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심지유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욕실로 걸어가서 수도꼭지를 틀었다.그러고 나서 따뜻한 물로 몸의 이물질을 닦아냈다. 게다가 술이 튄 부위가 마침 상반신이라서 속옷도 젖은 것 같았다.만약 물기를 제거하지 않으면 나중에 새 옷으로 갈아입어도 축축해질 게 뻔했다.이에 욕실 문을 잠근 다음 드레스를 벗고 수습하려고 했다. 하지만 수도꼭지를 돌리고 잠금장치를 누르려는 순간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벌써 돌아왔나?’그리고 문을 열자 뜻밖의 사람이 밖에 서 있었다.새까만 눈동자로 빤히 쳐다보는 남자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섬뜩했다.단지 시선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심지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네가 여긴 웬일이야?”그녀는 옷을 가지러 갔던 정선아가 돌아온 줄 알았다.곧이어 허강준의 눈빛이 싸늘해지더니 입술을 달싹거렸다.“왜? 누군 줄 알았는데?”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마디 보탰다.“아니면 기다리던 사람이라도 있었나? 혹시 약혼남?”비아냥거리는 말투에 심지유는 1층 거실에서 겪었던 수모를 다시금 떠올리게 되었고, 이내 고개를 돌리고는 쌀쌀맞은 말투로 받아쳤다.“네 알 바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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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욕실 내 온도가 급상승했고 그의 손길에 몸이 반응하는 느낌이 들었다.알 수 없는 기분에 심지유는 왠지 모르게 원망이 차올랐다.이미 헤어진 상황에서 그녀와 결혼할 생각도 없는데 대체 왜 이제 와서 집적거린단 말인가?정녕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존재인 줄 아는 건가?더욱이 솔직하게 반응하는 몸 때문에 짜증이 났다.아니나 다를까 남자는 거침없는 손놀림을 멈추고 이죽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입보다 몸이 훨씬 더 정직하네.”이 상황에서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래봤자 변명하는 것밖에 더 보이지 않을 것이다.결국 아랫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돌리고 입을 꾹 닫았다.자신을 무시하는 상황이 못마땅한 듯 남자는 가녀린 턱을 움켜쥐고 정면을 바라보게 한 다음 키스하기 직전에 싸늘하게 명령했다.“날 봐.”입맞춤할 때마다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정성껏 대응하는 그녀의 모습이 좋았다.하지만 지금은...고개가 꺾이자마자 심지유는 눈을 질끈 감았다.반항적인 모습에 허강준은 금세 흥미를 잃고 쌀쌀맞게 말했다.“대체 언제까지 토라질 거야?”지금 이 상황에서도 단지 그녀가 홧김에 저지른 행동이라고 생각하다니?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지? 고작 남자 하나 때문에 결혼까지 포기하고, 심지어 화를 돋우려고 다른 사람과 약혼까지 강행했다고 여기는 건가?심지유는 눈을 번쩍 뜨고 남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러나 입을 열기도 전에 허강준이 한마디 보탰다.“저녁에 집에 가. 수희 아줌마가 별장에서 기다리고 계셔.”이내 흥분을 가라앉힌 뒤 다시 말을 이어갔다.“물건이 많으면 임 비서를 보내서 같이 옮기도록 할게. 참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 더는 자극하지 마.”그러고 나서 시선을 돌리고 뒤로 물러났다. 옷매무새를 정리할 때 흠뻑 젖은 소매를 발견했는데 조금 전 심지유가 남긴 흔적이었다.이를 본 심지유는 괜스레 민망했다. 곧이어 허강준은 외투를 벗어 팔에 걸쳤다.그리고 욕실을 나서기 전에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최대한 빨리 돌아가.”그제야 욕실을 유유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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