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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화 피는 계절의 모든 챕터: 챕터 1 - 챕터 10

20 챕터

제1화

“선배, 저 이미 결정했어요.”나는 거울 앞에 서서 안색이 창백하고 말라서 앙상해진 나 자신을 보며 말했다.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을 지금에야 알게 되었다.“해화야... 정말로 내 프러포즈를 받아주는 거야?”전화기 너머로 강윤우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는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눈물이 한 방울 떨어지려고 할 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결혼해요. 우리.”“해화야, 그거 알아? 대학교 때부터 난 계속 이 순간만 바라왔어.”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엔 어느샌가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보름만 기다려줘요. 보름 사이에 이쪽을 정리하고 선배가 있는 곳으로 갈게요.”“그래, 해화야. 기다리고 있을게.”통화는 종료되었다. 이때 누군가 내 방 문을 힘차게 열었다.“해화야.”아빠는 어색한 헛기침을 지으며 나를 불렀다.“지아가 몸이 안 좋은 거 너도 알지? 네 방은 햇볕이 잘 들어오니까 며칠만이라도 지아랑 바꿔 지내는 게 어떻겠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돌려 아빠 등 뒤로 서 있는 의붓어머니 장희은과 의붓동생 손지아를 보았다.이때 의붓어머니가 입을 열었다.“석민 씨, 해화한테 번거롭게 바꿔 달라고 할 필요 없어요.”손지아도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보탰다.“맞아요, 아빠. 전 괜찮아요. 저 때문에 언니 기분이 나빠지면 어떡해요.”“번거로울 게 뭐가 있어. 너도 내 딸인데.”말을 마친 아빠는 엄숙한 얼굴로 다시 나를 보았다.“해화야, 넌 언니니까 동생한테 양보할 줄도 알아야지.”나는 그저 가만히 눈앞에 있는 아빠를 보았다.나는 내가 슬프거나 서러운 감정을 느끼며 눈물을 흘릴 줄 알았다.나의 친아빠는 친딸인 나보다 피도 섞이지 않은 손지아를 더 아꼈다.하지만 나의 눈에선 눈물 한 방울조차 떨어지지 않았다.심지어 웃으며 그들을 향해 고를 끄덕였다.“네, 그럴게요.”어차피 보름만 지나면 난 이곳을 영원히 떠날 것이었으니까.어느 방을 쓰던 중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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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아빠는 내가 철이 들었다면서 아주 기뻐했다.의붓어머니도 만족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두 사람이 나갔는데도 손지아는 나가지 않았다.“언니, 내가 짐 정리 도와줄게.”손지아는 얌전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방 안을 두리번대며 둘러보던 손지아는 이내 기쁨이 가득한 눈길로 구경했다.“난 아빠가 언니랑 방 바꿔주게 할 줄은 몰랐어. 언니, 혹시 화가 난 건 아니지? 어쨌든 내가 도진 오빠도 빼앗고 언니가 10년 넘게 살고 있던 방까지 빼앗은 거잖아.”나는 무시한 채 몸을 돌려 짐을 정리했다.그러더니 손지아는 갑자기 아픈 소리를 내며 바닥에 세게 넘어졌다.“꺄악, 언니...”넘어지면서 팔이 마침 테이블에 부딪혀 빨갛게 부어올랐다.“이해화! 지금 뭐 하는 거야!”언제 도착했는지 모를 최도진이 마침 넘어진 손지아를 발견하고 말했다.그는 잔뜩 굳어진 얼굴로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와 조심스럽게 손지아를 안아 올렸다.“도진 오빠, 난 괜찮아요. 언니도 고의가 아니었을 거예요.”손지아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이내 통증을 참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정말이에요. 난 괜찮아요, 오빠.”“빨갛게 부어버렸는데, 이래도 괜찮다고?”최도진은 손지아의 하얀 팔에 난 상처를 보며 너무도 속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다시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을 땐 얼음장처럼 차갑기 그지없었다.“이해화, 불만이 있으면 나한테 해. 자꾸 애꿎은 지아한테 화풀이하지 말고. 지아는 이미 충분히 힘들게 살아왔다고. 너처럼 태어나자마자 금수저 물고 태어난 사람들은 인생이 고달프다는 말이 뭔지도 모르잖아.”나는 이제 더 이상 그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절대 더 이상 최도진 때문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거로 생각했으나 나도 결국은 어쩔 수 없는 여자였다.나는 마음이 강철처럼 단단한 사람이 아니었다.최고 지는 나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온 소꿉친구기도 했고 나와 3년 동안 연애를 했던, 한때 사랑했던 사람이기도 했다.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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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손지아는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도진 오빠, 나 때문에 언니랑 싸우지 말아요. 난 괜찮아요. 언니가 나 때문에 화가 난 건 당연한 거예요...”손지아는 눈물을 훌쩍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엄청난 서러움을 당한 사람처럼 말이다.최도진은 다시 나를 보았다. 흔들리던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싸늘함만 남았다.“너 지금 질투하는 거냐? 내가 지아한테 잘해줘서, 모든 사람들이 지아한테만 관심을 줘서 질투하는 거냐고. 이해화, 너 왜 이렇게 변한 거냐? 지금의 넌 예전이랑 변해도 너무 변했어. 너도 느껴지지 않아?”말을 마친 그는 손지아를 안은 채 나가버렸다.나는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빤히 보았다.그 순간 참고 있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차라리 이러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며칠 동안 나는 최도진 때문에 눈물샘이 마를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그리고 이번에 흘릴 눈물이 그를 위해 흘리는 마지막 눈물이라고 생각했다. 더는 최도진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이다.저녁이 되자 친구들이 모여있는 단톡방이 시끌벅적해졌다.최도진이 물었다.[갑자기 결혼하고 싶네, 어쩌면 좋냐?]그의 한 마디에 단톡방은 바로 난리가 났다.[도진이 형, 드디어 해화랑 결혼하려고?][아, 이젠 형수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가?]단톡방에 있는 사람들은 이내 나를 부르며 축하해주었다.[축하해, 형수님. 형수님이 됐는데 기프티콘이라도 쏴야 하는 거 아니야?][도진이 형, 결혼식은 언제 해? 나도 오랜만에 결혼식 뷔페 맛 좀 보고 싶은데.]단톡방에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문자를 보내며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내가 그들에게 형수님이 아니라고, 최도진이 결혼하고 싶다는 상대가 내가 아니라고 밝히려던 때 최도진이 한발 빠르게 문자를 보냈다.[다들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난 이해화랑 결혼하겠다고 한 적 없어.]말을 마친 그는 손지아를 단톡방으로 초대했다.그리곤 다시 그들에게 말했다.[잘 봐. 얘가 너희들의 형수님이 될 사람이니까.]시끌벅적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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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단톡방을 나가자마자 최도진이 전화를 걸어왔다.“이해화, 지금 만나자.”“어디서?”“우리가 늘 가던 곳에서 기다릴게. 지아한테 사과해.”“내가 왜 사과해야 하는데?”“네가 방금 갑작스럽게 단톡방을 나갔잖아. 네가 그러면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이 지아를 어떻게 생각하겠어?”최도진의 어투는 딱딱하면서도 강압적이었다.“난 다른 사람들이 지아를 오해하는 건 싫어. 내가 먼저 지아를 좋아한 거야. 그래서 결혼하려는 거고. 지아는 아무 잘못 없어. 네 충동적이고 어리석은 행동으로 지아가 불륜녀라는 오명이 남게 되었잖아.”나는 그가 이런 말을 해도 더는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 이상하게도 화가 나면서 가슴이 답답해졌다.핸드폰을 든 손은 어느새 덜덜 떨리고 있었다.입을 열자 목소리도 함께 떨리고 있었다.“최도진, 너무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네가 뭔데 날 이딴 식으로 괴롭히는데?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 내가 너한테 해가 갈 짓을 했는지 말이야. 난 심지어 너랑 손지아를 축하해줬다고. 그걸로는 모자라는 거야?”나는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꾹 참았다.그럼에도 목소리에는 떨림이 남아 있었다.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이어졌다.“이해화, 이번은 그냥 넘어가 줄게. 하지만 그것만 알아둬. 지아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거. 그러니까 지아를 해칠 궁리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전화는 끊겨버렸다. 최도진은 일방적으로 끊은 것이다.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침대 머리맡엔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엄마의 사진이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사진 속 엄마의 눈빛이 유난히도 온화하고 다정하게 느껴졌다.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나는 얼른 그 기어가 그 사진을 품에 끌어안았다.차가운 액자 유리가 몸에 닿았고 얼굴을 사진 속 엄마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하염없이 내리는 눈물에 사진 속 인자한 엄마의 모습도 어딘가 슬퍼 보였다. 마치 지금 내 모습에 속상하기라도 한 듯 말이다.나는 더는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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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손지아는 내 방으로 짐을 옮겼다.그리고 나는 손지아의 방으로 가지 않았다.대충 빈방을 정리해 그곳에 짐을 풀어두었다.집안 도우미가 나를 위해 준비한 이불은 차갑고도 축축했기에 나는 내 옷을 입고 잠을 잤다.어차피 이 집에서 지낼 날이 며칠 남지 않았으니까.며칠만 버티면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그러나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거실 한구석에 있던 엄마의 영정 사진과 제사 음식을 차려놓은 테이블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엄마의 사진은 누군가가 일부러 던진 듯 깨져있었고 사진 위엔 얼마나 많이 밟아서 생겼는지 모를 발자국이 있었다.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던 엄마의 얼굴은 지금 이 순간 고통에 울부짖는 것 같았다.제사 음식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손지아의 애완견이 그 음식을 주워 먹고 있었다.손지아는 옆에 서서 구경하며 칭찬을 해댔다.그 모습을 본 나는 순간 피가 머리끝까지 거꾸로 솟는 기분이 들었다.남아 있던 이성은 결국 손지아의 모습에 증발하고 없었다.나는 미친 사람처럼 꽃병을 들어 손지아의 애완견을 향해 던졌다.손지아의 애완견은 놀라 도망쳐 버렸고 손지아는 소리를 질렀다. 꽃병이 깨지면서 튄 파편이 손지아의 팔을 긁어버렸다.“이해화! 지금 뭐 하는 거야! 어떻게 동생한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아빠의 목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손지아는 이미 눈물을 흘리며 아빠의 품으로 안겼다.“아빠, 살려주세요. 언니가 절 죽이려고 해요...”“이해화, 점점 선을 넘는구나!”“아빠는 안 보이시는 거예요? 쟤가 엄마 제사상을 전부 던져버렸어요. 엄마 사진까지 망가뜨렸다고요...”나의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깨져버린 엄마의 사진을 보니 눈물이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너무도 속상하고 화가 났다.하지만 아빠는 무심하게 난장판이 된 바닥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그래도 동생한테 그러면 안 되지!”“아빠...”“해화, 네 엄마는 이미 죽은 지 오래됐어. 죽은 사람이 산 사람보다 중요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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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밤이 되자 나는 갑자기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눈을 뜨게 되었다.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마자 방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장희은이 울면서 쳐들어오더니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내게 뺨을 연달아 갈구었다.“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니? 낮에 지아를 다치게 한 거로 모자란 거니? 그래서 죽이려고 한 거니?”장희은은 아빠의 품으로 달려가 통곡했다.“분명 우리 지아가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다는 거 알면서 일부러 복숭아즙을 침대 머리맡에 놓은 걸 거예요. 내 딸을, 아니, 우리 딸을 죽이려고 했다고요.”“됐어, 그만 울어. 다행히 지아가 약을 먹어서 괜찮아졌잖아.”아빠는 그런 장희은을 다정한 목소리로 달래주고 있었다. 그리곤 혐오하는 눈길로 나를 보았다.“이해화, 정말 실망이구나. 내일 당장 이 집에서 나가거라. 네가 이 집안에 계속 남아 있으면 우리 가족이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것 같으니까.”장희은의 울음소리가 멈추었다.나는 눈앞에 서 있는 아빠를 보았다. 아빠는 세상에 내게 남은 유일한 가족이었다.한때 나를 한없이 아껴준 사람이기도 했다. 내가 세상에 남은 유일한 딸이었으니까.매일매일 애지중지 나를 키워주었다.그런데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나는 소설 속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걸 빼앗겨 버린 비운의 여주인공처럼 점차 모른 걸 잃게 되었다.처음엔 이해가 가지 않아 매일 울기도 했고 난동을 피우기도 했으며 다시 빼앗아 오려고 노력도 했었다.하지만 정신을 차린 지금은 나와 아빠의 인연은 여기까지라는 것을 완전히 깨닫게 되었다.결국 나는 집을 나오게 되었다.그리고 그날 아빠가 내게 말했다.“네 엄마 제사가 끝나면 아빠가 다시 데리러 갈게.”나는 대답하지 않았다.다만 그들이 떠난 후 그동안 최도진과 찍은 사진, 그리고 아빠와 찍은 사진을 전부 가위로 잘라버려 불에 태웠다.마지막으로 나는 3년 전에 산 웨딩드레스도 갈라지 찢어버렸다.이 드레스는 최도진이 내게 고백한 후 몰래 산 것이었다.아무것도 모르던 때의 나는 매일 기대하며 상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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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남은 건 3년간 최도진이 내게 준 선물들이었다.신기한 장난감도 있었고 비싼 목걸이 세트도 있었다.나는 그중에서 비싼 것만 골라 절친한 친구에게 맡길 생각이었다.내가 혜민시를 떠난 후 나 대신 최도진에게 돌려줄 수 있게 말이다.그러면 나는 최도진에게 빚진 것도 없게 된다.돈이 되지도 않는, 그저 내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산 잡동사니들은 망설임도 없이 모아 전부 버릴 준비를 햤다.예전의 나는 그가 준 작은 키링마저도 보물인 것처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버리려고 할 때 그 키링을 보아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모든 걸 모아둔 뒤 나는 엄마의 영정 사진을 꼼꼼하게 포장한 후 캐리어에 조심스럽게 넣었다.그렇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10년 넘게 산 집에서 나왔다.대문을 나올 때 최도진의 차가 마침 다가오고 있었다.나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차는 내 앞에서 멈춰 섰다.뒷좌석 창문이 스르륵 열리더니 최도진의 얼굴이 드러났다.나는 그저 담담하게 힐끗 본 뒤 계속 내 갈 길을 갔다.“이해화.”최도진은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어디 가는 거지?”나는 두 개의 큰 캐리어를 끌고 있었기에 원래부터 걷는 게 조금 불편했다.그의 말에도 나는 걸음을 멈춰서 대화하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다.내가 무시하고 갈 길을 가자 최도진은 갑자기 차에서 내렸다.“기사님한테 데려다주라고 할까?”“아니, 괜찮아.”나는 그의 손길을 피하며 계속 갈 길을 갔다.그러나 최도진은 내 손목을 확 잡았다.“이해화, 이번은 왜 또 고집을 부리는 거야? 예전처럼 나한테 울면서 매달리면 내가 마음 약해져 도와줄지도 모르잖아.”나는 있는 힘껏 그의 손을 쳐내고 담담하게 보았다.“최도진, 난 그딴 거 이제 필요 없어.”더는 울 필요도 없고 그의 선심도 필요 없었다.지금의 나는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그래, 그럼. 마음대로 해.”최도진은 코웃음을 쳤다. 내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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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여하간에 예전의 나는 아무리 속상해도 할 수 있는 건 그저 묵묵히 그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이었으니까.최도진도 이미 습관이 되어버렸다.그는 항상 사람들에게 내가 영원히 자신을 떠날 리가 없다며 말하고 다녔다.지금도 믿지 않는 이유도 이 이유였다.나는 캐리어를 끌며 계속 갈 길을 가려 했으나 손지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도진 오빠, 왔어요?”손지아는 그대로 최도진의 품으로 달려가 안기며 팔짱을 끼더니 몸을 찰싹 붙였다.“알레르기는 좀 괜찮아?”최도진은 손지아의 머리칼을 쓸어넘겨 주며 꼼꼼히 살펴보았다.“네, 괜찮아요.”손지아는 고개를 들며 활짝 웃었다.“오빠, 언니한테 화내지 말아요.”말을 하면서 품에 껴안은 최도진의 팔을 흔들었다.“사실 내 탓도 있어요. 내 몸이 약해서 아빠가 언니랑 방을 바꾸라고 했었거든요. 그래서 언니한테 미움을 사게 된 걸 거예요...”“그게 왜 네 탓이야. 다 속 좁은 이해화 탓이지.”최도진은 나를 보며 일부러 손지아를 품에 더 꽉 끌어안았다.“우린 들어가자. 알레르기 나아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해.”“네.”나는 서로에게 찰싹 붙어 집 안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꼭 태어날 때부터 서로 함께였던 것처럼 친밀해 보였다.두 사람의 모습을 봐도 나는 더는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엄마의 기일이 지난 후 아빠는 나를 데리러 오지 않았다.시간이 빠르게 흘러 최도진의 생일이 되었다.예전이었다면 나는 이미 최도진의 생일 선물을 준비하고도 남았을 거고 비싼 호텔을 빌려 예쁘게 꾸몄을 것이다.하지만 이번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더는 그의 생일을 축하해줄 이유가 없었다.오후 다섯 시가 되자 나는 공항으로 출발하는 차에 올라탔다.핸드폰이 계속 울리며 문자가 왔다.아빠도 나를 재촉하고 있었다.[왜 아직도 안 온 것이냐. 나랑 네 새엄마, 그리고 지아도 다 왔단다. 해화야, 속 좁게 굴지 마. 도진이는 우리 가족이 될 사람이야. 네가 안 오면 다른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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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이미 일곱 시가 되었지만 최도진의 생일 파티는 아직도 시작하지 못했다.그는 소파에 앉아 라이터를 빙글빙글 돌리며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최도진은 자꾸만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그러더니 잠겨버린 핸드폰을 보았다.“도진 오빠.”손지아가 입술을 틀어 물며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시간도 늦었고 다들 배가 고픈 것 같은데...”최도진은 그녀를 힐끗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배고프지?”그는 손을 들어 손지아의 볼을 쭈물거리며 웃었다.“뱃가죽이 등가죽에 붙을 것 같아요. 저 케이크 얼마나 먹고 싶었는데요.”손지아는 그대로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최도진은 은은하면서도 익숙하게 나는 향기에 멍한 표정을 짓더니 나직하게 물었다.“향수 뭐 뿌려?”“그냥 집 안 화장대에 있던 걸 아무거나 뿌려봤어요.”손지아는 다소 의아했다.“왜요, 오빠? 냄새가 이상해요?”최도진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좋아.”그 향수는 이해화가 자주 뿌리던 향수였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갑자기 어느 브랜드의 향수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다들 웃으며 케이크를 자르려고 할 때 최도진은 담배를 들고 베란다로 갔다.핸드폰은 여전히 잠잠했다. 아무런 문자도 오지 않았다.그는 이해화가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의 생일을 절대 놓치지 않고 전부 챙겨주겠다고 했었다.그런데 이해화는 이렇게 빨리 그 약속을 어기고 말았다.최도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입가엔 차가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이해화, 어디 가서 죽기라도 한 거야? 왜 답장을 안 해.]그는 전송 버튼을 눌렀다.하지만 이 문자는 상대에게 전송되지 않았다. 상대가 그를 차단했음을 알리는 빨간 표시가 대신 나타났고 눈에 거슬렸다.그는 차단당했다.최도진은 망설임도 없이 바로 이해화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연결되지 않았다.베란다에 서 있던 그는 눈빛이 어두운 밤하늘보다 더 어둡게 가라앉았다. 가슴 속엔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답답함과 분노가 퍼지고 있었다.이해화를 버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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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새로운 도시로 온 뒤 나는 바로 강윤우에게 연락하지 않았다.먼저 대학교 시절 아주 친했던 친구 윤세희를 만났다.나는 윤세희와 그간 있었던 일을 털어놓고 싶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전에 아직 어떻게 입을 떼야 할지 생각해 두지 않았다.그런데 윤세희가 파티를 마련해준 곳에서 강윤우를 만나게 되었다.그는 검은색 정장을 입은 채 룸 앞에 서 있었다.팔에는 같은 색의 코트를 들고 있었다.그의 등 뒤로 복도에 걸린 아름답고 화려한 그림에 불빛이 비치며 휘황찬란한 빛을 냈다.그런 그림 앞에 강윤우가 서 있으니, 마치 그를 위한 후광 같았다.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강윤우는 대학교 시절 때보다 더 잘생기고 점잖아진 것 같았다.게다가 그는 이젠 나의 약혼자가 되었다.나의 볼이 저도 모르게 붉게 물들었다.조금 긴장한 나는 시선을 떨구며 치맛자락을 잡고 꼼지락거렸다.등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윤세희는 어느새 기쁜 얼굴로 입을 열었다.“선배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저녁에 이 근처에서 거래처 사장님이랑 만나기로 했는데 우연히 익숙한 사람들이 보여서 따라왔어요.”강윤우는 말하면서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몇 초간 침묵하던 그는 다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저도 껴서 함께 식사해도 돼요?”“물론이죠!”그들은 기쁜 얼굴로 열정적으로 강윤우를 반겼다.“윤우 선배님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에요!”강윤우는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들어왔다.“그럼 실례할게요.”그는 마침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친구들은 그를 향해 인사를 하며 근황을 물었다.유독 나만 고개를 푹 숙인 채 그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하지만 강윤우는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해화야,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자꾸 고개만 숙이고 있을 거야?”갑자기 불린 이름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웃음기를 머금은 강윤우의 두 눈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그 순간 얼굴이 더 붉게 달아오르더니 뒤통수마저 화끈해졌다.한참 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술잔을 건넸다.“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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