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지아는 내 방으로 짐을 옮겼다.그리고 나는 손지아의 방으로 가지 않았다.대충 빈방을 정리해 그곳에 짐을 풀어두었다.집안 도우미가 나를 위해 준비한 이불은 차갑고도 축축했기에 나는 내 옷을 입고 잠을 잤다.어차피 이 집에서 지낼 날이 며칠 남지 않았으니까.며칠만 버티면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그러나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거실 한구석에 있던 엄마의 영정 사진과 제사 음식을 차려놓은 테이블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엄마의 사진은 누군가가 일부러 던진 듯 깨져있었고 사진 위엔 얼마나 많이 밟아서 생겼는지 모를 발자국이 있었다.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던 엄마의 얼굴은 지금 이 순간 고통에 울부짖는 것 같았다.제사 음식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손지아의 애완견이 그 음식을 주워 먹고 있었다.손지아는 옆에 서서 구경하며 칭찬을 해댔다.그 모습을 본 나는 순간 피가 머리끝까지 거꾸로 솟는 기분이 들었다.남아 있던 이성은 결국 손지아의 모습에 증발하고 없었다.나는 미친 사람처럼 꽃병을 들어 손지아의 애완견을 향해 던졌다.손지아의 애완견은 놀라 도망쳐 버렸고 손지아는 소리를 질렀다. 꽃병이 깨지면서 튄 파편이 손지아의 팔을 긁어버렸다.“이해화! 지금 뭐 하는 거야! 어떻게 동생한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아빠의 목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손지아는 이미 눈물을 흘리며 아빠의 품으로 안겼다.“아빠, 살려주세요. 언니가 절 죽이려고 해요...”“이해화, 점점 선을 넘는구나!”“아빠는 안 보이시는 거예요? 쟤가 엄마 제사상을 전부 던져버렸어요. 엄마 사진까지 망가뜨렸다고요...”나의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깨져버린 엄마의 사진을 보니 눈물이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너무도 속상하고 화가 났다.하지만 아빠는 무심하게 난장판이 된 바닥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그래도 동생한테 그러면 안 되지!”“아빠...”“해화, 네 엄마는 이미 죽은 지 오래됐어. 죽은 사람이 산 사람보다 중요하겠니?”
밤이 되자 나는 갑자기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눈을 뜨게 되었다.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마자 방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장희은이 울면서 쳐들어오더니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내게 뺨을 연달아 갈구었다.“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니? 낮에 지아를 다치게 한 거로 모자란 거니? 그래서 죽이려고 한 거니?”장희은은 아빠의 품으로 달려가 통곡했다.“분명 우리 지아가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다는 거 알면서 일부러 복숭아즙을 침대 머리맡에 놓은 걸 거예요. 내 딸을, 아니, 우리 딸을 죽이려고 했다고요.”“됐어, 그만 울어. 다행히 지아가 약을 먹어서 괜찮아졌잖아.”아빠는 그런 장희은을 다정한 목소리로 달래주고 있었다. 그리곤 혐오하는 눈길로 나를 보았다.“이해화, 정말 실망이구나. 내일 당장 이 집에서 나가거라. 네가 이 집안에 계속 남아 있으면 우리 가족이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것 같으니까.”장희은의 울음소리가 멈추었다.나는 눈앞에 서 있는 아빠를 보았다. 아빠는 세상에 내게 남은 유일한 가족이었다.한때 나를 한없이 아껴준 사람이기도 했다. 내가 세상에 남은 유일한 딸이었으니까.매일매일 애지중지 나를 키워주었다.그런데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나는 소설 속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걸 빼앗겨 버린 비운의 여주인공처럼 점차 모른 걸 잃게 되었다.처음엔 이해가 가지 않아 매일 울기도 했고 난동을 피우기도 했으며 다시 빼앗아 오려고 노력도 했었다.하지만 정신을 차린 지금은 나와 아빠의 인연은 여기까지라는 것을 완전히 깨닫게 되었다.결국 나는 집을 나오게 되었다.그리고 그날 아빠가 내게 말했다.“네 엄마 제사가 끝나면 아빠가 다시 데리러 갈게.”나는 대답하지 않았다.다만 그들이 떠난 후 그동안 최도진과 찍은 사진, 그리고 아빠와 찍은 사진을 전부 가위로 잘라버려 불에 태웠다.마지막으로 나는 3년 전에 산 웨딩드레스도 갈라지 찢어버렸다.이 드레스는 최도진이 내게 고백한 후 몰래 산 것이었다.아무것도 모르던 때의 나는 매일 기대하며 상상했었다.
남은 건 3년간 최도진이 내게 준 선물들이었다.신기한 장난감도 있었고 비싼 목걸이 세트도 있었다.나는 그중에서 비싼 것만 골라 절친한 친구에게 맡길 생각이었다.내가 혜민시를 떠난 후 나 대신 최도진에게 돌려줄 수 있게 말이다.그러면 나는 최도진에게 빚진 것도 없게 된다.돈이 되지도 않는, 그저 내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산 잡동사니들은 망설임도 없이 모아 전부 버릴 준비를 햤다.예전의 나는 그가 준 작은 키링마저도 보물인 것처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버리려고 할 때 그 키링을 보아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모든 걸 모아둔 뒤 나는 엄마의 영정 사진을 꼼꼼하게 포장한 후 캐리어에 조심스럽게 넣었다.그렇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10년 넘게 산 집에서 나왔다.대문을 나올 때 최도진의 차가 마침 다가오고 있었다.나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차는 내 앞에서 멈춰 섰다.뒷좌석 창문이 스르륵 열리더니 최도진의 얼굴이 드러났다.나는 그저 담담하게 힐끗 본 뒤 계속 내 갈 길을 갔다.“이해화.”최도진은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어디 가는 거지?”나는 두 개의 큰 캐리어를 끌고 있었기에 원래부터 걷는 게 조금 불편했다.그의 말에도 나는 걸음을 멈춰서 대화하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다.내가 무시하고 갈 길을 가자 최도진은 갑자기 차에서 내렸다.“기사님한테 데려다주라고 할까?”“아니, 괜찮아.”나는 그의 손길을 피하며 계속 갈 길을 갔다.그러나 최도진은 내 손목을 확 잡았다.“이해화, 이번은 왜 또 고집을 부리는 거야? 예전처럼 나한테 울면서 매달리면 내가 마음 약해져 도와줄지도 모르잖아.”나는 있는 힘껏 그의 손을 쳐내고 담담하게 보았다.“최도진, 난 그딴 거 이제 필요 없어.”더는 울 필요도 없고 그의 선심도 필요 없었다.지금의 나는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그래, 그럼. 마음대로 해.”최도진은 코웃음을 쳤다. 내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여하간에 예전의 나는 아무리 속상해도 할 수 있는 건 그저 묵묵히 그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이었으니까.최도진도 이미 습관이 되어버렸다.그는 항상 사람들에게 내가 영원히 자신을 떠날 리가 없다며 말하고 다녔다.지금도 믿지 않는 이유도 이 이유였다.나는 캐리어를 끌며 계속 갈 길을 가려 했으나 손지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도진 오빠, 왔어요?”손지아는 그대로 최도진의 품으로 달려가 안기며 팔짱을 끼더니 몸을 찰싹 붙였다.“알레르기는 좀 괜찮아?”최도진은 손지아의 머리칼을 쓸어넘겨 주며 꼼꼼히 살펴보았다.“네, 괜찮아요.”손지아는 고개를 들며 활짝 웃었다.“오빠, 언니한테 화내지 말아요.”말을 하면서 품에 껴안은 최도진의 팔을 흔들었다.“사실 내 탓도 있어요. 내 몸이 약해서 아빠가 언니랑 방을 바꾸라고 했었거든요. 그래서 언니한테 미움을 사게 된 걸 거예요...”“그게 왜 네 탓이야. 다 속 좁은 이해화 탓이지.”최도진은 나를 보며 일부러 손지아를 품에 더 꽉 끌어안았다.“우린 들어가자. 알레르기 나아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해.”“네.”나는 서로에게 찰싹 붙어 집 안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꼭 태어날 때부터 서로 함께였던 것처럼 친밀해 보였다.두 사람의 모습을 봐도 나는 더는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엄마의 기일이 지난 후 아빠는 나를 데리러 오지 않았다.시간이 빠르게 흘러 최도진의 생일이 되었다.예전이었다면 나는 이미 최도진의 생일 선물을 준비하고도 남았을 거고 비싼 호텔을 빌려 예쁘게 꾸몄을 것이다.하지만 이번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더는 그의 생일을 축하해줄 이유가 없었다.오후 다섯 시가 되자 나는 공항으로 출발하는 차에 올라탔다.핸드폰이 계속 울리며 문자가 왔다.아빠도 나를 재촉하고 있었다.[왜 아직도 안 온 것이냐. 나랑 네 새엄마, 그리고 지아도 다 왔단다. 해화야, 속 좁게 굴지 마. 도진이는 우리 가족이 될 사람이야. 네가 안 오면 다른 사람들이
이미 일곱 시가 되었지만 최도진의 생일 파티는 아직도 시작하지 못했다.그는 소파에 앉아 라이터를 빙글빙글 돌리며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최도진은 자꾸만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그러더니 잠겨버린 핸드폰을 보았다.“도진 오빠.”손지아가 입술을 틀어 물며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시간도 늦었고 다들 배가 고픈 것 같은데...”최도진은 그녀를 힐끗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배고프지?”그는 손을 들어 손지아의 볼을 쭈물거리며 웃었다.“뱃가죽이 등가죽에 붙을 것 같아요. 저 케이크 얼마나 먹고 싶었는데요.”손지아는 그대로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최도진은 은은하면서도 익숙하게 나는 향기에 멍한 표정을 짓더니 나직하게 물었다.“향수 뭐 뿌려?”“그냥 집 안 화장대에 있던 걸 아무거나 뿌려봤어요.”손지아는 다소 의아했다.“왜요, 오빠? 냄새가 이상해요?”최도진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좋아.”그 향수는 이해화가 자주 뿌리던 향수였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갑자기 어느 브랜드의 향수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다들 웃으며 케이크를 자르려고 할 때 최도진은 담배를 들고 베란다로 갔다.핸드폰은 여전히 잠잠했다. 아무런 문자도 오지 않았다.그는 이해화가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의 생일을 절대 놓치지 않고 전부 챙겨주겠다고 했었다.그런데 이해화는 이렇게 빨리 그 약속을 어기고 말았다.최도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입가엔 차가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이해화, 어디 가서 죽기라도 한 거야? 왜 답장을 안 해.]그는 전송 버튼을 눌렀다.하지만 이 문자는 상대에게 전송되지 않았다. 상대가 그를 차단했음을 알리는 빨간 표시가 대신 나타났고 눈에 거슬렸다.그는 차단당했다.최도진은 망설임도 없이 바로 이해화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연결되지 않았다.베란다에 서 있던 그는 눈빛이 어두운 밤하늘보다 더 어둡게 가라앉았다. 가슴 속엔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답답함과 분노가 퍼지고 있었다.이해화를 버린 것
새로운 도시로 온 뒤 나는 바로 강윤우에게 연락하지 않았다.먼저 대학교 시절 아주 친했던 친구 윤세희를 만났다.나는 윤세희와 그간 있었던 일을 털어놓고 싶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전에 아직 어떻게 입을 떼야 할지 생각해 두지 않았다.그런데 윤세희가 파티를 마련해준 곳에서 강윤우를 만나게 되었다.그는 검은색 정장을 입은 채 룸 앞에 서 있었다.팔에는 같은 색의 코트를 들고 있었다.그의 등 뒤로 복도에 걸린 아름답고 화려한 그림에 불빛이 비치며 휘황찬란한 빛을 냈다.그런 그림 앞에 강윤우가 서 있으니, 마치 그를 위한 후광 같았다.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강윤우는 대학교 시절 때보다 더 잘생기고 점잖아진 것 같았다.게다가 그는 이젠 나의 약혼자가 되었다.나의 볼이 저도 모르게 붉게 물들었다.조금 긴장한 나는 시선을 떨구며 치맛자락을 잡고 꼼지락거렸다.등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윤세희는 어느새 기쁜 얼굴로 입을 열었다.“선배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저녁에 이 근처에서 거래처 사장님이랑 만나기로 했는데 우연히 익숙한 사람들이 보여서 따라왔어요.”강윤우는 말하면서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몇 초간 침묵하던 그는 다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저도 껴서 함께 식사해도 돼요?”“물론이죠!”그들은 기쁜 얼굴로 열정적으로 강윤우를 반겼다.“윤우 선배님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에요!”강윤우는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들어왔다.“그럼 실례할게요.”그는 마침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친구들은 그를 향해 인사를 하며 근황을 물었다.유독 나만 고개를 푹 숙인 채 그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하지만 강윤우는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해화야,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자꾸 고개만 숙이고 있을 거야?”갑자기 불린 이름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웃음기를 머금은 강윤우의 두 눈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그 순간 얼굴이 더 붉게 달아오르더니 뒤통수마저 화끈해졌다.한참 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술잔을 건넸다.“선배,
“해화야, 오랜만이야.”강윤우는 그윽한 눈길로 나를 보더니 내가 내민 술잔에 자신의 술잔을 부딪쳤다.나는 쓴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자리에 앉았다.그러자 윤세희가 내 옷깃을 잡아당기며 나한테 눈빛을 보냈다.“뭐야, 뭐야. 둘 사이 심상치 않은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뭐, 뭐가?”“윤우 선배님이 들어올 때부터 너한테서 눈을 뗀 적 없었다고!”“네가 잘못 본 거겠지.”“에이, 무슨 소리. 이 윤세희 님은 연애에서 눈치 100단이라고! 내가 두 눈 부릅뜨고 봤는데 잘 못 봤을 리가 있겠어? 내 눈은 속일 수 없다고.”나는 입술을 틀어 물었다. 심장이 요란하게 쿵쾅쿵쾅 뛰었다.졸업 후 나는 최도진을 따라 혜민시로 돌아갔다.그 뒤로 강윤우와 만난 적 없었다.그저 가끔 명절이나 생일에 문자를 주고받을 뿐 그 외에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얼마 전 최도진이 내 앞에서 대놓고 손지아에게 마음을 표현하기 전까지 말이다.강윤우는 그때 나에게 연락해왔다.그래도 지금까지 몇 번 전화 통화한 게 전부였다.그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난 후 이번이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분명 손도 잡아본 적 없었으나 윤세희는 이미 나와 강윤우 사이가 갈 데까지 간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참, 선배님. 여자친구는 있으세요? 제게 친척 여동생이 있거든요. 아주 예뻐요. 선배님께 소개해 드리고 싶은데 어떠세요?”이때 어떤 한 여동창이 갑자기 입을 열었고 순식간에 흥미진진한 분위기로 바뀌었다.윤세희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윤우 선배님, 혹시 솔로라면 우리 해화는 어떠세요? 우리 해화는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고, 성격도 착하고, 선배님과 같은 명문대를 졸업했잖아요. 전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하는데, 안 그래요?”윤세희의 말에 나는 괜스레 민망해져 얼굴이 더 빨갛게 익어버렸다.다들 웃고 떠들고 있을 때 강윤우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세희 씨, 해화로 장난치지 말아요. 해화는 이런 거에 약하니까 놀리는 건 그만 해요.”윤세희는 바로 그를 향해 익살스러운 표정
파티가 끝나고 나는 로비에서 강윤우를 기다렸다.이때 혜민시에서 알고 지내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해화야, 요즘 뭐 하고 지내? 우리 오랫동안 안 만난 것 같아.”“아, 조금 일이 있어서.”“그럼 이따가 우리 다 모일 건데, 너도 올래?”나는 웃으며 답했다.“아니야. 너희들끼리 놀아.”“어어, 해화야. 잠깐만 끊지 말아봐. 사실 그게...하, 그냥 솔직하게 말할게. 도진이 때문에 연락한 거야. 도진이가 오늘 기분이 안 좋은지 술을 잔뜩 먹었거든. 우리가 아무리 말려도 말을 듣지 않아. 혹시 시간 되면 와서 데리고 가줄 수 있어? 계속 술만 먹다간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그래.”“그럼 손지아한테 연락해.”“해화야, 손지아가 방금 왔었어. 그런데 도진이가 쫓아냈어. 우리 눈에도 보여. 도진이한테 너밖에 없다는 거. 도진이도 지금 후회하고 있어.”“됐어, 조은혁. 그만 말해. 나랑 최도진은 이미 끝난 사이니까.”나는 핸드폰을 움켜쥐며 담담하게 말했다.“앞으로 최도진 일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야. 너희들도 이젠 나한테 연락하지 마.”말을 마치자마자 전화기 너머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누군가 조은혁의 핸드폰을 빼앗아간 듯했다.나는 무시하고 끊으려던 순간 최도진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이해화, 얘네들이 멋대로 너한테 연락한 거야. 난 아무 말도 안 했다고.”여전히 거만한 목소리였다.“어, 그래. 그럼 끊을게.”“이해화...”최도진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서 그가 얼마나 취했는지 알 수 있었다.만약 예전이었다면 나는 분명 걱정해하며 술 그만 먹으라고 잔소리를 해댔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그의 모든 것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었다.나는 전화를 끊어버렸다.곰곰이 생각한 후 최도진의 친구 연락처들도 전부 차단해버렸다.그들과 친해진 것도 전부 최도진 때문이었다.이젠 헤어졌으니 당연히 그들과 친하게 지낼 이유도 없었다.“해화야.”화려한 로비의 불빛 아래 강윤우의 모습이 멀지 않은 곳에서
결혼식은 아주 호화로웠지만 아주 로맨틱하게 끝났다.최도진과 이석민은 결혼식장에 발도 들이지 못했다.그럼에도 두 사람은 떠나지 않았다.다만 이석민이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버티지 못했을 뿐이다.갑작스러운 심장 마비에 급하게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가게 되었다. 다행히 죽을 고비는 넘겼으나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는 상태였다.하지만 최도진은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밖에 서 있었다.왜인지 모르겠으나 이해화의 친구인 윤세희는 그의 연락처를 차단하지 않았다.이해화가 결혼한다는 것도 윤세희가 SNS에 올린 사진을 보고 알게 되고 찾아온 것이었다.최도진은 결혼 전날에 알게 되었다. 이해화의 신랑이 강윤우라는 것을.강윤우는 이해화가 대학교 시절 자주 대단한 선배라며 칭찬하던 사람이었다.그때의 그와 이해화는 썸을 타던 시기였기에 이 일로 질투를 하게 되었고 이해화는 그 뒤로 더는 강윤우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러 강윤우를 피해 다니기도 했었다.그런데 결국 돌고 돌아 이해화가 강윤우와 결혼하게 될 줄은 몰랐다.같은 남자로서 최도진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강윤우가 이해화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다.강윤우의 SNS에 올라온 사진과 영상엔 이해화가 빠지지 않았고 이해화를 보는 그의 눈빛에선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최도진은 그런 강윤우의 모습에서 예전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도 예전엔 그렇듯 이해화를 사랑하고 있었다.하지만 어느샌가 질렸다는 이유로 이해화보다 어린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며 바람을 피웠다.그러다가 결국 이해화가 그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다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을 땐 한참 늦은 후였다.후회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강윤우와 이해화는 차를 타고 떠났다.‘둘만의 신혼집으로 가는 걸까?'최도진은 형언할 수 없는 씁쓸함과 질투를 느끼게 되었다.그는 강윤우와 이해화의 신혼집 마당에도 커다란 해당화 나무가 가득 심겨 있다는 것을 들었었다.마침 지금은 해당화가 필 계절이었으니 아마 예쁘게 활짝 피었을 것이다.최도진은
나와 강윤우의 결혼식은 이듬해 봄에 진행하게 되었다.절친한 친구 윤세희는 어렸을 때 했던 약속대로 나의 유일한 들러리가 되어주었다.나는 청첩장을 혜민시에 있는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돌리지 않았다.그런데도 어떻게 소식을 알게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결혼식 당일 아빠와 최도진이 제때 찾아왔다.두 사람을 만난 강윤우는 먼저 나의 의견을 물었다.메이크업을 받고 있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려 거울을 통해 곧 내 남편이 될 사람을 보았다.신부 화장은 조금 진했기에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평소의 내 모습과 조금 달랐다.마치 신혼집에 강윤우가 특별히 날 위해 심어둔 서부 해당화 같기도 했다.수줍게 핀 꽃처럼 아름답고 산뜻한 미소가 지어지게 했다.검은 턱시도를 입고 있는 강윤우는 평소보다 더 멋있고 잘생겨 보였다.우리는 거울로 서로를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절로 웃음을 짓게 되었다.“두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아요.”강윤우는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그럼 내가 지금 돌려보낼게.”“네.”과거의 일과 과거의 인연은 더는 돌이키고 싶지도 않았고 만나고 싶지 않았다.가슴에 짙게 남은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옅어지게 될 것이다.어차피 인생은 짧았고 한번 사는 인생 힘들게 상처받으며 살고 싶지 않았다.모든 준비를 마친 나는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손에는 부케를 든 채로 버진로드를 걸었다.강윤우는 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내게 손을 내밀었다. 얼른 내 손을 잡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내게도 느껴졌다.그래서 나도 손을 뻗어 잡았다.사람들의 축복과 환호를 받으며 우리는 손을 꽉 마주 잡았다.강윤우는 고개를 숙여 내게 키스했다. 둘만의 세상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길고 끈적한 키스에 나는 점점 숨이 찼다. 강윤우는 그제야 입술을 뗐다.“해화야.”강윤우는 반지를 꺼내 내 손가락에 끼워주면서 귓가에 대고 나직하게 말했다.“사랑해, 해화야. 아주 오래전부터 사랑했고, 앞으로 아주 오랫동안 사랑할 거야.”나는 고개
평소에 손지아를 그렇게 아껴주던 ‘아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차가운 이석민만 남아 있었다.그는 손을 휘저으며 파리를 쫓듯 경호원에게 두 사람을 내쫓으라고 사인을 보냈다.대문까지 왔을 때도 손지아는 포기하지 않았다.대문 기둥을 붙잡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최도진...감히 날 이딴 식으로 대해?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지! 나 임신했어. 내 배 속에 있는 아기가 네 아기라고! 네가 책임져!”손지아는 점차 광기 어린 모습으로 소리를 질렀다.“도진아?”이석민이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최도진은 그런 손지아가 너무도 역겨웠다. 웃고 싶었으나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애당초 자신이 왜 저런 여자에게 빠졌는지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아저씨.”최도진은 듬성듬성 백발이 자라난 이석민에게 다가가 말했다.“전 손지아와 잔 적 없어요. 맹세할 수 있어요. 전 단 한 번도 밤을 보낸 적 없어요.”“그럼 됐어.”이석민은 긴 한숨을 내쉰 뒤 다시 손을 휘휘 저었다.경호원은 계속 두 사람을 끌고 나갔다. 시끄럽게 울부짖는 소리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하늘에 뉘엿뉘엿 진 노을이 커다란 저택을 감싸고 있었다.두 사람은 쓸쓸한 눈빛으로 이미 져버린 해당화 나무를 보았다.해당화는 이미 동면에 접어들었다. 언제 다시 꽃이 필지는 몰랐다.이 해당화 나무는 이해화의 엄마가 생전 아주 아꼈던 나무였다.이해화의 엄마가 세상을 뜬 후에도 이해화가 직접 가꾸었다.그러나 이해화가 집을 나가고 나니 해당화도 그걸 아는지 활짝 피어야 할 시기인데도 시들어 꽃을 피우고 있지 않았다.이석민은 눈물을 닦았다.“미안하구나, 해화야.”“해화 엄마한테도 미안하고 해화한테도 미안하구나. 도진아, 내가 그동안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었어. 해화 엄마한테도 분명 해화를 잘 키우겠다고 약속했는데, 사랑을 아낌없이 듬뿍 주겠다고 했는데, 내가 약속을 어겼어. 도진아, 그래서 내가 지금 벌 받는 걸까? 해화가 그동안 얼마나 서럽고 속상하고 힘들었겠어. 해화 엄마 영정 사진도 이미 복구
그러다가 소음으로 피해를 본 이웃 주민들이 경비실에 민원을 넣게 되었다.최도진은 그제야 알게 되었다. 이해화가 이미 이사를 했다는 것을. 그리고 이 아파트는 경비에게 맡겨 내놓은 상태였다.‘어디로 이사한 거지? 혜민시에는 있는 건가? 돌아오겠지? 언제 돌아오는 거지?'최도진은 아무것도 몰랐다.그랬기에 더 불안하고 두려웠다.가슴 속 피어오르는 불안은 점차 커다란 괴수가 되어 그의 마음을 잡아먹고 있었다.그는 이해화를 잃게 되었다.어쩌면 영원히, 완전히 잃게 되었을지도 모른다.손지아 모녀의 모함으로 이해화는 그간 많은 누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그들은 이제야 알게 되었다.심지어 이씨 가문의 고용인들도 두 모녀가 그간 이해화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전부 고발했다.그날 손지아 모녀는 이씨 가문에서 처참한 모습으로 쫓겨나게 되었다.물에 빠진 생쥐처럼 온몸이 쫄딱 젖었을 뿐 아니라 두 사람 얼굴이 전부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최도진은 정원에 서서 시들어버린 해당화 나무를 보았다.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해당화는 시들면 다시 필 수 있었다.하지만 이미 떠나간 사람은 다시 돌아올 리가 없었다.그동안 이석민도 어떻게든 이해화에게 연락해 보려고 시도했으나 들려오는 건 차가운 기계음뿐이었다. 게다가 겨우 연결이 되어도 이해화는 그저 침묵만 지키다가 전화를 끊어버렸다.이해화는 혜민시를 떠날 때 엄마의 유품 하나만 들고 떠났다.그리고 엄마가 남겨준 재산도 챙겼다.지금 이씨 가문은 아무도 남지 않아 공허한 분위기만 맴돌았다.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해화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멀지 않은 곳에선 여자와 딸이 울며불며 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영원할 줄 알았던 부잣집 생활의 꿈이 와장창 깨졌으니 손지아 모녀는 그제야 추악한 본모습을 드러냈다.“캐리어를 열어. 사람 불러와서 억지로 열기 전에.”이석민은 계단 위에 서서 말했다. 그의 모습은 다소 초췌해 보였다.최도진은 며칠 사이에 초췌해진 이석민을 보았다. 그는 유난히도 자신
“나 복숭아 알레르기 있는 거 맞아요. 아빠도 아시는걸요. 이해화가 집안 도우미한테 시켜서 복숭아즙을 내 침대 머리맡에 놓은 것도 아빠가 전부 알아내신 거예요.”손지아는 얼굴을 감싸며 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직도 거짓말을 해?!”최도진은 갑자기 한 걸음 훅 다가가더니 손지아의 멱살을 잡았다.그의 키는 꽤나 컸다. 그가 멱살을 잡자 손지아의 발이 지면에서 떨어지게 되었다.“도진 오빠... 이거 놔줘요. 숨쉬기 힘들단 말이에요.”최도진은 시선을 내리깔며 그녀를 보았다. 잘생겼던 얼굴이 지금 보기 흉하게 구겨져 있었다.“손지아, 잊은 거야? 네가 뿌린 향수는 해화가 제일 좋아하던 향수야. 내가 몇 번이고 같은 걸 선물한 적 있는 향수라고. 그러다가 내가 잠깐 잊고 있었지...”최도진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가 잠깐 잊고 있었던 것이 많아도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그는 이해화가 그동안 자신을 얼마나 좋아하고 사랑했는지를, 이해화와 3년을 사귀며 그녀가 뭘 바라고 있었는지를, 헤어지자고 할 때 이해화가 그의 앞에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묵묵히 받아들이던 모습을, 자신에게 온 마음을 다 보여주며 사랑하던 모습을, 착하고 다정하던 그녀의 모습을 잊고 있었다.그녀가 주는 사랑은 한없이 귀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행복을 모르고 항상 상처만 주었기에 지금 이렇게 벌을 받는 것이다.“이 향수 미들 향에 복숭아와 치자 향이 들어가 있어. 넌 그런데 복숭아 알레르기라면서 매일 뿌리고 다니잖아. 그런데 왜 멀쩡한 거지?”손지아는 눈이 커졌다. 안색이 창백해지며 변명거리를 생각해내려고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온몸이 덜덜 떨리기도 했다.“그러니까 넌 처음부터 끝까지 나한테 거짓말하고 있었던 거네. 일부러 이해화를 함정에 밀어 넣고 날 속이고 아저씨도 속이고. 손지아, 난 대체 왜 너처럼 속에 검은 꾀가 많은 여자를 좋아했던 거지? 내가 진짜 눈이 멀어도 단단히 멀었나 보군.”최도진은 손을 내리더니 힘껏 그녀를 밀쳤다.손지아는 휘청이며 넘어졌다. 다시 변명
최도진의 머릿속엔 온통 이해화가 떠나던 날 자신을 보던 그 눈빛으로 가득했다.아무런 파동도,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담담한 눈빛이었다.마치 낯선 사람을 보듯 한 눈빛이기도 했다. 그녀에게 그는 그저 인생을 살면서 만난 지나가는 사람에 불과한 것 같았다.최도진은 소파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고 했으나 손지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도진 오빠.”손지아는 여전히 가련한 모습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커다란 두 눈엔 항상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어 언제든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이런 모습은 손쉽게 누군가 손지아를 괴롭혔다고 착각하게 했다.“오늘은 왜 또 이렇게 술을 마신 거예요. 그러다가 내일 숙취로 괴로워할 거잖아요.”손지아가 다가가 그의 팔에 팔짱을 끼며 한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최도진이 입을 열려던 순간 또 익숙한 향기가 그의 코끝에 맴돌았다.그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손지아를 밀어내려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냄새가 좋네?”갑자기 다정해진 최도진의 목소리에 손지아의 볼이 불그스레 해지며 기뻐했다.“지난번에 뿌리던 그 향수야?”웃음을 짓던 손지아는 멈칫하더니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네, 지난번이랑 같은 향수예요.”손지아는 겉으로는 기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분노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그녀가 뿌린 향수는 이해화의 화장대에서 가져온 것이었다.원래는 전부 버리고 싶었다. 비록 명품이고 개봉도 하지 않은 향수였지만 최도진은 이 향기를 아주 좋아했다.그래서 그녀는 같은 브랜드의 다른 향을 사서 뿌려보기도 했지만 최도진은 거슬리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결국 하는 수 없이 억지로 이해화가 뿌리던 향수를 뿌리게 되었다.“오빠가 좋아하면 나도 좋아요. 앞으로 매일 뿌리고 다닐게요...”손지아는 고개를 들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바로 유혹에 넘어갔을 눈빛이었다.하지만 최도진은 갑자기 정색해버렸다.이내 손을 들어 힘껏 그녀를 밀어냈다.“오빠?”손지아는 당황한 얼굴로 최도진을
“도진아, 더 마시면 안 된다니까? 너 그러다가 죽어! 다들 요즘 너만 걱정하고 있는 거 알아?”이때 친구 한 명이 최도진이 들고 있던 술병을 빼앗으며 말렸다.“방금 손지아한테 연락했으니까 곧 데리러 올 거야. 그러니까 그만 마셔, 어?”최도진은 순간 손지아 이름을 듣자마자 혐오가 밀려왔다.그는 친구를 밀어내고 술병을 바닥에 세게 던졌다.“누가 걔한테 전화하라고 했는데? 아니면 걔가 오겠대?”“그거야 당연히 네 여자친구니까 연락할 거잖아.”“누가 내 여자친구인데?”최도진은 차갑게 비웃었다.“내 여자친구가 누구인지 너희들 몰라서 그래?”친구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도진아, 너 잊은 거야? 네가 해화랑 헤어졌다고 그랬잖아...”“그래, 네가 직접 단톡방에서 우리더러 손지아를 형수님이라고 부르라고 했잖아. 해화는 단톡방을 나가기 전에 심지어 너희 둘을 축하해줬다고.”“맞아, 이미 손지아랑 약혼까지 한 거 아니었어?”“아니야.”최도진은 다시 새 술병을 가져와 뚜껑을 열었다.“도진아, 그만 마셔...”“하, 너희들이 말린다고 내가 그만 마실 것 같아?”“그래, 너는 우리 말을 듣지 않겠지. 넌 예전부터 항상 해화 말만 들었으니까. 해화가 있었다면 넌 이미 얌전히 집으로 갔을 거야. 병 X처럼 술 처먹고 병원에 입원하는 일도 없었을 거라고.”최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부정하지도 않았다.친구는 이내 핸드폰을 꺼냈다.“내가 지금 해화한테 연락해 볼게. 네가 해화 말도 안 듣는다면 그럼 우리도 더는 널 말릴 방법이 없어.”그러나 그들은 이해화에게 연락이 닿지 않을 거라곤 몰랐다.연락이 닿지 않자 룸 안에 있던 모두가 한 번씩 걸어보았다.그들의 번호는 이해화가 이미 전부 차단해 버린 상태였다.룸 안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소파에 앉아 있던 최도진의 눈빛도 싸늘해졌다.“해화가 화 많이 났나 보네.”“그러게. 어쨌든 도진이가 맘대로 이별을 선언하고 해화 의붓동생이랑 사귀게 된 거니까 당연한 거지. 나였어도 화가
“선배...”“나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 아니지? 내가 안고 있는 사람이 해화, 이해화 맞는 거지?”강윤우는 말을 하면서 갑자기 내 얼굴을 감싸 쥐었다.너무도 가까워진 거리에 숨소리마저 귓가에 크게 들려왔다.술기운으로 가득한 그의 두 눈은 몽롱하면서도 어리둥절해 보였다.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씁쓸해 보이기도 했다.그런 그의 눈빛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프면서도 시큰거렸다.“선배, 이건 꿈이 아니에요. 저 맞아요. 선배 앞에 있는 사람 저 이해화가...”말을 마치기도 전에 입술에 따듯하고 물컹한 것이 닿았다.아주 조심스럽고도 부드러운 키스였다.내가 정신을 차리고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강윤우는 이미 나를 품에서 놓아주었다.아마도 당황스럽고 불안한 내 표정을 읽은 듯했다.그는 내 손을 꽉 잡더니 끌어당겨 자신의 옆에 앉혔다.차는 이미 출발했고 강윤우는 차 안 칸막이를 내렸다.밀폐된 공간에 나는 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강윤우는 잡았던 내 손을 놓아주었다.“괜찮아, 해화야. 무서워하지 마. 난 이런 곳에서 널 어떻게 할 생각 없어.”그는 손을 들어 흐트러진 내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다.“해화야, 난 우리가 신혼 첫날밤을 보낼 때까지 참고 있을 거야.”나는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빨갛게 익어버렸기 때문이다. 한참 지나서야 진정된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며 대답할 수 있었다.“네.”최도진은 또 술을 진탕 마시게 되었다.친구들이 아무리 말려도 그는 듣지 않았다.며칠 동안 기분이 안 좋은 이유가 뭔지 알 수 없었다.어쩌면 손지아에게 질렸을 수도 있었다. 이미 손지아에게 질려버린 최도진은 손지아도 다른 여자랑 다를 바 없다고 느껴졌다.어쩌면 이미 묵묵히 자신을 기다려주던 다정한 이해화가 그리워졌을지도 모른다.지난번 조은혁이 이해화에게 전화를 건다고 했을 때 그는 사실 일부러 내버려 두고 있었다.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이해화의 거절에 이상하게도 화가 치밀었고 전화기를 확 빼앗아 홧김에 몇 마디 해버렸다.그러나 이해화
파티가 끝나고 나는 로비에서 강윤우를 기다렸다.이때 혜민시에서 알고 지내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해화야, 요즘 뭐 하고 지내? 우리 오랫동안 안 만난 것 같아.”“아, 조금 일이 있어서.”“그럼 이따가 우리 다 모일 건데, 너도 올래?”나는 웃으며 답했다.“아니야. 너희들끼리 놀아.”“어어, 해화야. 잠깐만 끊지 말아봐. 사실 그게...하, 그냥 솔직하게 말할게. 도진이 때문에 연락한 거야. 도진이가 오늘 기분이 안 좋은지 술을 잔뜩 먹었거든. 우리가 아무리 말려도 말을 듣지 않아. 혹시 시간 되면 와서 데리고 가줄 수 있어? 계속 술만 먹다간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그래.”“그럼 손지아한테 연락해.”“해화야, 손지아가 방금 왔었어. 그런데 도진이가 쫓아냈어. 우리 눈에도 보여. 도진이한테 너밖에 없다는 거. 도진이도 지금 후회하고 있어.”“됐어, 조은혁. 그만 말해. 나랑 최도진은 이미 끝난 사이니까.”나는 핸드폰을 움켜쥐며 담담하게 말했다.“앞으로 최도진 일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야. 너희들도 이젠 나한테 연락하지 마.”말을 마치자마자 전화기 너머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누군가 조은혁의 핸드폰을 빼앗아간 듯했다.나는 무시하고 끊으려던 순간 최도진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이해화, 얘네들이 멋대로 너한테 연락한 거야. 난 아무 말도 안 했다고.”여전히 거만한 목소리였다.“어, 그래. 그럼 끊을게.”“이해화...”최도진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서 그가 얼마나 취했는지 알 수 있었다.만약 예전이었다면 나는 분명 걱정해하며 술 그만 먹으라고 잔소리를 해댔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그의 모든 것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었다.나는 전화를 끊어버렸다.곰곰이 생각한 후 최도진의 친구 연락처들도 전부 차단해버렸다.그들과 친해진 것도 전부 최도진 때문이었다.이젠 헤어졌으니 당연히 그들과 친하게 지낼 이유도 없었다.“해화야.”화려한 로비의 불빛 아래 강윤우의 모습이 멀지 않은 곳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