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눈밭에 남겨진 그녀의 모든 챕터: 챕터 1 - 챕터 10

23 챕터

제1화

그 조촐하고 누추한 수술대에 누워있을 때까지만 해도 내 몸에는 온기가 남아있었다. 하지만 신경 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진성준은 수술칼을 꺼내 천천히, 그리고 꼼꼼하게 나의 배를 갈랐다.“뭐야? 신장이 왜 하나밖에 없어?”그는 잠깐 멈칫하다가 이내 다시 하던 것을 이어갔다. 손꼽히는 외과 의사라 그런지 동작이 물 흐르듯 깔끔하고 빨랐다.잠시 후 피범벅인 신장 하나를 꺼내 특수 의기에 담았다.“병원에 가져가서 당장 채은이 신장 이식 수술 준비해.”“그럼 이 여자 시신은 어떡해? 신장 하나밖에 없는 게 이상하긴 한데... 경찰에 신고할 거야?”진성준의 친구 정경호가 수술대에 누워있는 시신을 보면서 갑자기 말했다.진성준은 시신을 더는 거들떠보지 않고 손에 묻은 피를 씻었다. 말투는 여전히 무덤덤하기만 했다.“혹시 모르니까 없애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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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그런데 시신을 소각하던 그때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 여자 시신이 임신한 상황이었던 것이었다. 게다가 복부에 화장 자국이 있었다.그동안 진성준이 아무리 나의 역겨운 얼굴을 마주하기 싫어서 불을 끄고 잠자리했다고 하더라도 내 몸은 충분히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의 복부에는 아버지가 담배꽁초로 지진 화상 자국이 있었다.진성준은 침대 위에서 그 화상 자국에 뽀뽀하길 좋아했다. 매화꽃처럼 예쁘다면서 하늘이 나에게 준 마크라고 했었다.그런데 그 익숙한 매화 자국을 보면서도 진성준은 잠깐 멈칫하기만 했을 뿐 나를 가차 없이 황산 욕조에 던져버렸다.내가 죽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황산이 내 몸을 부식할 때 타들어 가는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특히 진성준의 차가운 눈빛을 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오빠, 이 사람이 나란 걸 알고 있어? 아니면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거야?’“대체 뉘 집 딸이길래 임신까지 했는데도 이런 일을 당했는지, 참.”뒤에 있던 정경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진성준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크게 웃었다.“암시장에 팔려온 걸 보면 가족도 친구도 없는 여자겠지.”가족도 친구도 없다... 단 한마디로 나의 무기력한 인생을 단정 지었다.‘오빠 눈에 난 이런 사람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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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돌아가는 길, 진성준은 피곤한지 미간을 어루만졌다.큰일을 해서 그런지 왠지 모르게 마음이 뒤숭숭하고 편치 않았다.그러다가 문득 뭔가 떠올라 카톡을 열어보았다. 기다란 손가락이 나와 진성준의 대화창에 머물렀다. 그와 내가 싸웠던 기록이 그대로 남아있었다.한 달 전에 진성준은 갑자기 나와 결혼하겠다고 했다.사실 내가 성인이 됐을 때 우리 둘은 이미 잠자리를 가졌다. 하지만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진성준은 내가 여자 친구라는 걸 인정하지 않았고 남들에게 여동생이라고만 소개했다. 그러니 결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그런데 그가 갑자기 나와 결혼하겠다고 했다. 그땐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지만 곧바로 이어진 진성준의 말에 난 절망에 빠졌다.“근데 조건이 있어. 신장 하나를 떼서 채은이한테 줘.”정채은은 그가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는 여자였다. 그때 내가 뭐라 손짓했었던지 기억조차 나질 않았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거절한 상황이었다.그리고 진성준이 분노를 터트렸고 우리는 심하게 싸웠다.“강샛별, 너 언제부터 이렇게 이기적인 사람이 됐어? 채은이한테 맞는 신장이 너 하나뿐이야. 나 이쪽에서는 가장 잘하는 의사니까 걱정하지 말고 믿어. 절대 아무 일도 없을 거야.”나는 절대 신장을 줄 수 없다고 손짓했다. 그러자 진성준이 실망한 얼굴로 나를 밀쳤다.“강샛별, 정말 너무 실망이야. 넌 그저 신장 하나를 잃을 뿐이지만 채은이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넌 네 그 양심 없는 아버지랑 똑같아. 역겨워 죽겠어. 차라리 그냥 죽지 그래?”진성준이 매정하게 돌아섰다. 내가 뒤에서 계속 손짓해도 거들떠보지 않았기에 전하려 했던 뜻도 당연히 보지 못했다.사실 난 그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주기 싫어서 안 주는 게 아니라 신장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다.아직 진성준의 옆에 더 있고 싶은데... 죽을 때까지...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진성준이 알았더라도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았다.왜냐하면 내가 그의 어머니를 죽인 원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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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나와 진성준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이웃이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읜 나는 알코올 중독인 아버지의 밑에서 자랐다.진성준의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그는 친절하고 다정한 어머니와 함께 우리 옆집에서 살게 되었다.날 무척이나 예뻐했던 진성준의 어머니는 가끔 날 안으면서 나중에 진성준과 결혼하지 않겠냐고 물었었다. 그럴 때마다 진성준은 싫은 티를 팍팍 냈다.“누가 얘 같은 벙어리랑 결혼해요.”그러나 말은 그렇게 해도 밖에서는 늘 지켜줬었다.친구들이 나에게 돌을 던지거나, 개를 풀어 물게 하거나, 또 물건을 빼앗을 때면 항상 맨 앞에 나서서 그들과 싸웠었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끝까지 감싸주었다.그는 벙어리는 싫다고 했지만 그만의 별이는 영원히 지켜주겠다고 했었다.그러다가 아버지가 거액의 빚을 지게 된 그해, 벙어리인 내가 쓸모없다면서 남에게 팔려고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진성준의 어머니가 나를 구해줬다. 그런데 그때 술에 취한 아버지에게 칼 13방 찔리면서 다신 깨어나지 못했다.내가 병실에서 깨어났을 때 나를 보던 진성준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건 절망과 끝이 보이지 않는 원한이 담긴 눈빛이었다.“강샛별, 차라리 네가 죽을 거지. 널 평생 원망할 거야.”짝.진성준은 홧김에 나의 뺨을 후려갈겼다. 순간 머리가 윙 해졌고 그 후로 왼쪽 청력을 잃게 되었다.하지만 그 뺨으로 인해 진성준을 내 옆에 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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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진성준은 나를 미워했지만 동시에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그날 저녁 진성준과 나는 모두 가족을 잃었다.벙어리인 데다가 귀까지 먹었고 또 진성준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별이는 내가 지킨 귀한 아이’라는 한마디 때문에 진성준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되레 오빠처럼 챙겨주면서 나를 키웠다.하지만 여전히 나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매년 진성준의 어머니 기일이 되면 항상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취해서 혼자 어머니를 뵈러 갔었다.예전에 내가 한 번 따라간 적이 있었는데 술에 취한 그에게 매정하게 걷어차이고 말았다. 그는 나의 목을 조르면서 흉악하게 말했다.“강샛별, 넌 우리 어머니한테 절을 할 자격도 없어.”하지만 정신을 차린 다음에는 내 목에 생긴 멍 자국을 어루만지면서 연신 사과했다.“별아, 미안해. 나도 내가... 왜 이리 모순적인지 모르겠어.”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나와 잠자리할 때도 내 얼굴을 가리곤 했었다.그리고 나도 모순적인 건 마찬가지였다. 진성준이 평생 오빠로서 내 옆에 있어 주길 바랐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어디 생각처럼 되는가? 20년 동안 알고 지냈는데도 나는 여전히 그를 미친 듯이 사랑했다.진성준이 나를 평생 사랑할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나와 결혼하겠다고 한 것도 사실은 첫사랑에게 신장 이식 수술을 해주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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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차 안, 정경호가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혹시 너희 집 벙어리 생각해?”“아니. 걔 생각 왜 해?”진성준은 휴대전화를 던지고 차갑게 말했다.“좋아하지 않으면 그냥 솔직하게 얘기해. 말도 못 하는 걔가 불쌍하지도 않아?”“불쌍하다고?”진성준은 괜히 짜증이 밀려와 넥타이를 잡아당겼다.“걔가 뭐가 불쌍해? 좋은 거 먹이고 입히면서 지금까지 키웠어. 근데 결과가 어때? 내가 아주 배은망덕한 애를 키웠어. 몇 마디 좀 했다고 나랑 냉전이나 하고. 많이 컸어, 아주.”“그래도 어릴 적부터 같이 자랐으니까 사랑은 없어도 가족의 정은 있겠지. 전화해서 화해라도 할래?”“아니.”진성준은 휴대전화를 힐끗 보더니 말투가 더 차가워졌다.“어디서 나쁜 것만 배워서는.”하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잠시 후 다시 휴대전화를 챙겨 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문자 내용은 간단했다.“저녁은 집에서 먹을 거야.”이렇듯 화해 신청도 미안해하는 기색이라곤 없었고 나의 기분 따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성준은 몰랐다. 앞으로 다시는 나의 기분 같은 건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왜냐하면 난 더는 느낄 수 없으니까.그때 차 안에서 띵 하고 카톡 알림음이 울렸다. 진성준은 이상하다는 듯 두 눈을 떴다.“경호야, 방금 무슨 벨 소리 소리 못 들었어?”“못 들었는데? 차에 너랑 나밖에 없는데 벨 소리라니? 요 며칠 너무 피곤해서 환각이 보인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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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그런가?”진성준은 미간을 어루만지고는 다시 두 눈을 감았다.나도 영영 눈을 감았다.만약 진성준이 나에게 전화만 했더라도, 설령 영원히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고 해도 나의 휴대전화가 울렸을 텐데. 바로 이 차의 트렁크에서...하지만 그는 전화하지 않았다. 예전이든 지금이든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더더욱 하지 않을 것이다.나의 신장 덕에 정채은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진성준은 긴장한 얼굴로 정채은의 옆을 지켰다. 그녀가 깨어나기 전까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정채은이 깨고 나서야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오빠, 살려줘서 고마워.”“고맙긴. 우린 친구잖아. 그리고 너도 예전에 내 목숨 구해준 적이 있었고.”정채은은 억지로 웃기만 할 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성준은 그녀가 수술받은 후라 말할 맥이 없는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켕기는 게 있어서 말을 못 했다는 것을. 왜냐하면 그때 진성준을 구한 사람이 정채은이 아니라 나였으니까.그러나 진성준에게는 생명의 은인이 누구든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정채은이라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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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정채은이 우리 앞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건 진성준이 대학교를 다니던 그때였다.언제부턴가 진성준은 정채은이라는 이름을 자주 꺼냈다.나는 몰래 학교로 가서 정채은을 본 적이 있었는데 얼굴이 예쁘고 집안도 좋은 도도한 백조였다.말도 못 하는 벙어리인 데다가 귀까지 먹은 나와는 그야말로 천지 차이였다.그러다가 나중에 진성준이 정채은과 함께 등산하러 갔는데 나는 두 사람을 몰래 따라갔다.그때 나는 진성준의 환한 미소를 보았다. 내 앞에서는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편안한 미소였다.그 순간 나는 진성준을 잃을까 봐 무척이나 겁이 났었다.나는 계속 숨어서 두 사람을 따라갔다. 그러다가 두 사람이 싸우면서 헤어지는 걸 보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그때 그 싸움으로 진성준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발을 헛디딘 바람에 그만 낭떠러지에 떨어진 것이었다.진성준을 어떻게 찾았는지, 50kg도 안 되는 몸으로 70kg이 넘는 그를 업고 어떻게 길거리로 걸어나왔는지조차 기억이 나질 않았다.단지 그날 밤 달빛이 참 부드러웠던 것만 기억이 났다.진성준은 계속 나의 귀에 대고 중얼거렸다.“안 돼. 이대로 죽으면 안 돼. 별이가 집에서 날 기다리고 있단 말이야... 내가 없으면... 다른 애들이 별이 괴롭혀.”그 순간 나의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오빤 항상 이래. 항상... 이러니 내가 오빠를 어떻게 포기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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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정채은의 상태가 안정된 걸 확인하고 나서야 진성준은 시름 놓고 집으로 돌아갔다.그는 저녁에 집에서 밥을 먹겠다고 나에게 카톡을 보냈었다.집으로 들어오면 앞치마를 두른 내가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놓고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면서 기다릴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앞에 마주한 건 조용하고 싸늘한 집이었다.방을 다 뒤졌지만 나의 흔적이라곤 보이지 않자 휴대전화를 꺼내 드디어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내가 죽은 뒤 사흘째 되는 날, 휴대전화 너머로 전화기가 꺼졌다는 기계음이 들려왔다.진성준은 노발대발하며 휴대전화를 던져버렸다.“강샛별, 보자 보자 하니까 점점 더 말을 안 듣네? 그래. 평생 이렇게 사나 두고 보겠어.”그는 다시 휴대전화를 들어 기다란 손가락으로 문자를 작성했다.[강샛별, 오늘 저녁에도 들어오지 않으면 평생 들어올 생각 하지 마.]휴대전화를 소파 위에 던졌다가 다시 들고 또 문자를 보냈다.[오늘 12시 전까지 답장 없으면 결혼도 없던 거로 해.]나는 허공에 뜬 채 자포자기하며 넥타이를 잡아당기는 진성준을 보면서 씁쓸하게 웃었다.‘오빠, 나 오늘 저녁에 못 와. 앞으로도 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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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그날 저녁 진성준은 밤새 자지도 않고 휴대전화만 들여다보았다. 심지어 침대에 눕지도 않고 소파에 앉아서 기다렸다.마치 그동안 내가 기다렸던 것처럼 말이다.그렇게 해가 떠서야 핏발이 선 두 눈을 떴다.“그래, 강샛별. 아주 잘했어. 널 찾으면 절대 가만 안 둬.”‘근데 오빤 이미 날 가만두지 않았어.’나는 한숨을 내쉬었다.여전히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커튼만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진성준은 밤을 꼴딱 새웠다. 나에게 전화를 해도 받질 않자 그제야 내 작업실이 문득 떠올랐다.그런데 작업실에 가기도 전에 병원의 전화를 받았다. 정채은이 몸이 불편하다고 아주 소란을 피우고 있다는 연락이었다.진성준은 잠깐 망설이다가 바로 운전하여 병원으로 달려갔다.나의 마음은 더 이상 차분할 수 없을 정도로 차분했다.그렇다. 진성준이 정채은 때문에 나를 버린 게 처음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번이 마지막도 아니었다.진성준이 대학교에 다닐 때 우리 집 형편이 별로 좋지 않았다.그의 아버지가 찾아오기 전이라 생활비와 학비를 스스로 벌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조각학과에 다니는 날 먹여 살려야 했다.전에 진성준에게 이렇게 비싼 전공을 배우지 않겠다고 수화로 말한 적이 있었다.심지어 학교에 다니지 않고 식당에서 설거지하거나 장사를 해도 된다고 했었다. 진성준만 편하게 살 수 있다면 나는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었다.물론 직접 행동으로 옮기기도 했었다. 호텔에서 벨걸을 한 적이 있었는데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에 짧은 스커트를 입고 칼바람을 맞으면서 부들부들 떨었었다.마침 친구들과 식사하러 나온 진성준이 나의 그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때 진성준의 그 눈빛을 무슨 말로 형용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매우 창피해하는 것 같았다.그날 그는 식사도 하지 않고 나를 끌고 집으로 갔었다.“누가 이렇게 입고 이런 일 하라고 했어? 강샛별, 내가 밥이라도 굶겼어? 왜 스스로 타락하는 건데?”나는 진성준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서 일을 하는 것이라고 손짓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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