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소미는 이유영이 백산 별장을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도록 했다. 심지어 반산월로 돌아가는 것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결국 이유영은 무력감 속에 남겨질 수밖에 없었다.서재에서 정국진은 이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네 두 눈은 지금...”정국진의 목소리에는 멈춘 말 속에 깊은 안타까움이 묻어났고, 이유영은 그 감정을 생생히 느꼈다.“아빠...”“수술은 빨리 받는 게 좋겠다. 그래야 네 엄마도 마음이 놓일 테니까.”“하지만 저는...”“걱정할 필요 없다. 네게 가장 뛰어난 의사를 붙여줄 테니.”정국진은 이유영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이유영을 달래며 말했다.사실 정국진과 임소미는 누구보다도 긴장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수술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모든 준비를 더 철저하게 하고 있었다.“아빠...”“응?”“아빠... 저, 너무 무서워요.”그동안 가족들이 자신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 이유영은 두려움을 참지 못하고 가족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이유영은 정말로 무서웠다.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그 고통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지금까지 그토록 자신의 두 눈을 지켜 왔건만 결국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마음속에서 숨 막히는 듯한 답답함이 밀려왔다.전생에서 눈을 떴을 때, 이유영을 감싼 건 끝없는 어둠뿐이었다. 그 공포와 혼란은 그녀를 미치게 할 지경이었다.지난 생에서 이유영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어둠 속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이번 생은 달랐다. 한순간에 어둠 속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서히 시야가 어두워져 가는 과정을 느껴야 했다.그 느린 과정이 그녀에게는 더욱 고통스러웠다.“무서워하지 마라. 우리 모두 네 곁에서 함께할 거야.”“네...”이유영은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주르르 떨어졌다.그래, 두려워하지 말자. 이번 생은 전생과는 다르니까. 비록 전생의 운명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더라도 이번에는 가족들이 곁에 있어.전생에는 어둠 속에서 이유영 곁에는 강이한
이유영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고 그대로 넘어질 것만 같았다. 그 순간, 허리에 전해진 강한 힘이 이유영을 단단히 붙잡아주었다.익숙한 기운이 스며들며 이유영을 감싸안았다.중심을 되찾는 순간, 이유영은 본능적으로 그를 밀쳐냈다. 그 사람은... 바로 강이한이었다. 자신이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남자.“와아아...”멀지 않은 곳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순간, 이유영의 차가운 눈빛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이유영은 당황한 듯한 모습으로 서둘러 아이에게 달려갔다.“월이야, 월이야.”이유영은 아이를 품에 꼭 안았다.“엄마, 무서워요!”“괜찮아. 엄마가 여기 있잖아.”“나쁜 사람! 나쁜 사람이에요...”작은 아이는 두려운 목소리로 강이한을 보고 외쳤다.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강이한은 아이의 입에서 '나쁜 사람'이라는 말이 터져 나오는 순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나쁜 사람... 이의 기억 속 자신은 그저 그런 존재일 뿐이었다.그래, 이게 바로 그가 아이에게 남긴 흔적이었다.이것이 바로 그의 존재가 남긴 기억이었다.“그래, 맞아.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 하지만 괜찮아. 엄마가 있으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어떤 나쁜 사람도 월이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다치지 않게 막아낼 수 있었다.이유영은 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강이한은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며, 그 고요한 광경이 가슴을 날카롭게 찢어놓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이 밀려왔다. 그때, 소란을 들은 하인들과 집사들이 급히 현장으로 달려왔다. 그들 역시 강이한을 보자 긴장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이내 임소미와 정국진도 급히 현장에 도착했다.임소미는 강이한을 보자마자 적대감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쏘아붙였다.“여긴 왜 온 거야?”임소미의 말투는 한 치의 호의도 담겨 있지 않았다.“유영이를 좀 봐.”정국진이 임소미에게 말했다.임소미는 강이한에 대한 불만이 아무리 많아도 이유영의 이름이 언급되자 그 감정을
강이한은 눈썹을 찌푸린 채, 여전히 이유영과 임소미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그만 쳐다봐!”정국진이 말했다.정국진의 목소리는 예전보다 훨씬 날카롭고 단호했다. 외조카와 친딸의 무게는 결코 같을 수 없었다.많은 일이 있었다. 비록 이유영이 서주에서 돌아온 후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더라도 정국진은 여진우를 통해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다.그렇기에 지금 정국진의 태도는 과거와는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강이한은 정국진을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다.“방금...”“네가 본 대로다. 유영이의 시력은 급격히 악화했고 의사 말로는 수술하지 않으면 시력을 잃는 건 시간문제라고 하더군.”정국진의 차가운 말이 강이한을 가로막았다.강이한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숨 막히는 답답함에 사로잡혔다.이유영이...“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유영이 엄마 말로는, 박연준이 유영이를 알프산으로 데려갔다더군.”알프산? 강이한의 표정이 굳었다.“...”박연준이 이유영을 알프산으로 데려갔다는 사실을 들은 순간, 강이한의 마음은 불안과 긴장으로 가득했었다.이유영의 몸 상태로는 그런 추운 지역이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예상하지 못했다. 문제가 단순히 추위뿐만 아니라 두 눈까지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는.“눈부신 설원과 강한 햇빛이 유영이의 눈에 치명적인 자극과 손상을 남겼어. 지금 시력이 이렇게 된 것도 그 탓이지.”정국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강이한은 이미 느끼고 있던 가슴속 고통이 정국진의 이 말로 인해 더욱 심해졌다.결국... 박연준이 이유영을 알프산으로 데려간 탓에 그녀의 시력이 이렇게 빠르게 악화한 것인가? 이 사실을 깨달은 순간, 강이한은 마치 폭풍우가 휘몰아치듯 혼란스러웠다. 얼어붙은 광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정국진은 강이한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다시 찾아오지 마라.”기회는 이미 넘칠 만큼 주어졌다. 강이한은 그 소중한 기회를 스스로 놓치고 말았을
“정 선생임...”강이한은 믿기 어렵다는 듯 정국진을 바라보았다.강이한이 정국진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정국진은 냉정하게 말했다.“설마 또 ‘그저 아이일 뿐’이라는 말을 꺼내려는 건 아니겠지?”과거에.강이한은 이유영 앞에서 여러 차례 그저 아이일 뿐이라는 말을 강조해 왔다.그저 아이일 뿐이니까 이유영이 모든 걸 감당해야 한다는 뜻인가? 월이가 희생해도 괜찮다는 의미였던 걸까?그 순간.정국진의 한 마디 한 마디는 강이한의 가슴에 무거운 돌처럼 내려앉았고,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의 마음을 깊이 찔러 들어왔다.누구나 이성적으로는 옳고 그름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기 일이 되면 감정은 편애를 피할 수 없다.그리고 강이한의 편애는 분명히 한지음과 한지음의 딸에게 쏠려 있었다.그는 당시 상황에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자기 입장에서만 내린 판단이었을 뿐이었다. 이유영과 아이에게는 그의 모든 행동이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강이한, 이번이 마지막이다.”정국진은 강경하고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장 여기서 떠나!”그의 말투에는 명백한 경고와 위협이 담겨 있었다.정국진은 말을 마치고 자리를 떠났다.강이한은 그 자리에서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정국진이 이렇게 많은 말을 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긴 대화 속에서 드러난 결론은 단 하나였다.강이한에게 소중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이유영과 월이가 그들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처음부터 끝까지.한지음도, 한지음의 딸도 그저 강이한에게 중요한 존재일 뿐이었다.월이와 이유영은 어떤 의무도 없었고 받아들일 이유도 없었다.하지만 강이한은?그는 도대체 왜 그랬던 걸까? 강이한과 이유영의 관계는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백산 별장.임소미는 아이를 안고 집 안을 천천히 걸으며 달래고 있었다. 아이의 감정은 이제서야 조금씩 진정되고 있었다.월이는 강이한의 딸이었다. 그러나 그를 본
여진우가 돌아왔을 때, 강이한은 여전히 정원 한가운데 서 있었고 떠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여진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무심코 집 안쪽을 힐끗 보았다.여진우는 주먹을 가볍게 쥔 채 천천히 강이한에게 걸어갔다. 두 사람이 마주 선 순간, 공기는 팽팽하게 얼어붙었다.“지금 상황에 여기까지 올 여유가 있다니, 놀라운 일이군.”여진우가 말했다.서주의 상황은 어떠한가? 정국진이 발을 뗀 이후 이유영은 서주와 거리를 두었지만 여진우만큼은 그곳의 변화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지금 서주는 강이한과 박연준에게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서주의 혼란 속에서도 강이한은 이곳까지 올 결심을 한 것이다.강이한은 여진우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이유영을 떠올리게 할 만큼 닮아 있었다. 그 얼굴을 보며 강이한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전생에, 강이한은 이유영과 여진우가 남매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사실 조금만 더 주의 깊게 봤더라면 그들의 닮은 점을 쉽게 알아차렸을 것이다.그랬다면 서주에서 여진우를 만났을 때 이유영이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바로 알았을지도 모른다.“널 과소평가했어. 이렇게 빠져나올 줄이야!”강이한은 서주를 언급하며 말했다.여진우가 만약 능력이 없었다면, 이번 서주 사태는 여진우에게도 큰 위기가 되었을 것이다.하지만... 여진우는 담담히 말했다.“인생은 많은 선택지로 이루어져 있지만 때로는 중요한 것 중 일부를 포기해야 해!”여진우의 말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강이한은 여진우의 말을 곱씹으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중요한데 포기한다고?여진우는 강이한이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이어갔다.“하지만 너한텐 포기라는 건 없어 보이네.”“...”“예를 들면, 이온유...”이온유. 그렇다.강이한과 이유영 사이의 핵심 갈등은 연서였고 그 문제를 가로막는 가장 큰 존재는 바로 이온유였다.강이한은 여진우를 바라보며 입술을 다물었다.여진우는 더는 말을 덧붙이지 않고 등을 돌려 집 안으로 걸어가며 조용히 말했다.“서주로
남자의 따뜻한 손끝이 이유영의 눈가를 살며시 스쳤다.아주 조심스럽게...이유영은 마치 그 온기가 자신을 태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무거웠다.여진우가 부드럽게 말했다.“의사 말로는 상황이 심각하대. 이번엔 제발 말 좀 들어줘, 응?”“응.”그동안 가족들은 계속해서 이유영이 빨리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유영은 전생에 겪었던 어둠 속에서의 공포가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어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이유영은 다시 과거의 어둠 속으로 빠지기 싫었기에 항상 핑계를 대며 수술을 미뤘다.사실은... 두려움 때문이었다.눈 수술은 본래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다. 실패라도 한다면 이유영에게 남는 것은 끝없는 어둠뿐이었다.그 고통은 전생에 이미 충분히 겪었다.그렇기에 이유영은 다시는 그런 어둠 속에서 단 한 순간도 살고 싶지 않았다.그 어둠은.마치 악마의 동굴과 같았다. 그곳에서는 어떤 출구도 찾을 수 없었다. 그 고통이 얼마나 깊은지, 그것은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일이었다.“유영아.”“응?”“수술 전까지는 최대한 마음을 가볍게 가져봐. 그러면 수술에도 좋을 거야.”여진우의 말은 단호하고도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그는 마치 곧 기증자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말투였다.여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이유영이 갑자기 그의 손을 붙잡았다.“왜?”여진우가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이유영이 조용히 말했다.“모든 건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기자, 알겠지?”이유영의 목소리는 단호했다.여진우는 잠시 멈칫하며 이유영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유영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정씨 가문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최상의 수술 환경을 준비하는 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하지만 이유영이 지금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이유영은 너무 많은 고난을 겪었다.강이한, 한지음, 이온유... 이들은 모두 이유영의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유영은 이런 고
서주가 이런 상황인데도 강이한은 굳이 파리로 찾아갔다.이유영 때문만은 아니었다. 또 다른 이유는 아마도 아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난번 사건 이후, 아이의 마음속에서 강이한은 어떤 존재로 비치고 있을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이정은 깊게 숨을 고르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아가씨를 보셨습니까?”소월이...강이한의 머릿속에는 자신을 보자마자 이유영 품으로 달려갔던 작은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월이는 두려움에 가득 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강이한의 가슴은 답답함으로 꽉 찼다.아무리 숨을 고르려 해도 가슴 깊은 곳의 통증은 가라앉지 않았다.소파에 몸을 기댄 채 담배를 하나 피워 물며 무겁게 말했다.“그 사람... 소식은 들었어?”강이한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그 사람에 관해 묻기 시작하자 이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강이한 가까이 다가가서 말했다.“염 선생님은 지금 우천에 머물고 있습니다.”“우천?”“네, 주소는 이미 알아냈습니다. 몇 년간 그곳에서 은거하며 지내고 계셨습니다.”염 선생님은 명망 높은 의학자였다. 그는 70세에 서주 국제병원에서 은퇴한 후 행방을 감추었는데 그의 진료는 항상 예약이 어려웠으며 그의 손을 거친 환자는 어떤 이유로 실명을 겪더라도 결국 시력을 회복했다는 소문이 있었다.강이한은 이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그는 한지음을 데려가려 했었다. 하지만 그때는 염 선생님이 이미 은퇴한 후라,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드디어 찾아내게 되었다. 강이한은 이유영과 함께 전생을 경험했기에, 이유영이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유영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어둠이었다. 수술을 계속 미뤄왔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차라리 흐릿하게나마 보이는 것을 선택했다.수술이 실패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무서웠기 때문이다. 만약 수술이 실패한다면, 평생 어둠 속에 갇히게 될 터였다.이유영은 이미 한 번 어둠 속에서 그 모든 고통과 무력함을
이정은 그제야 깨달았다. 강이한이 내리는 모든 결정이 결코 그에게도 쉽지 않았다는 사실을.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선택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적어도 이유영은 끝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이번에 우천으로 간다면, 최소 반년은 걸립니다.”이정은 무거운 목소리로 강이한에게 말했다.반년.평소라면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지금처럼 서주가 긴박한 상황에서는 반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현재 상황을 고려할 때, 이정은 강하게 반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하지만 강이한의 태도를 보니 이미 마음을 굳힌 듯했다.여진우의 말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중요한 것, 그리고 포기.삶에는 지켜야 할 것이 많지만, 때로는 과감히 선택하고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강이한은 이유영에게 너무 많은 것을 빚지고 있었다. 전생에서도, 그리고 이번 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유영이 지금 이 상황에 처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결국 자신 때문이었다.“알겠습니다.”이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강이한의 눈빛은 단호했다. 이 순간, 이정이 강이한에 대한 모든 의문과 흔들림이 경외심으로 바뀌었다.이 남자는 냉혹한 사람이 아니었다.강이한의 삶에는 지키고자 하는 소중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주위 사람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결코 눈을 감고 지나칠 수 없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한편.서주의 상황은 점점 더 긴박해지고 있었다. 엔데스 가문 역시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엔데스 명우가 서주에 나타났다. 최근 들어 그는 반산월을 드나드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소은지.”남자는 커피잔을 우아하게 들어 올리는 여자를 바라보았다.엔데스 명우의 눈빛은 깊고 차가웠다.하지만 소은지는 그를 비웃듯 바라보며 그의 이가 갈릴 정도로 억눌린 분노를 아무렇지 않게 감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 여자, 곧 죽어?”소은지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남자의 차가운 기운은
한지음은 강이한에게 너무도 중요한 존재였다. 만약 강이한에게 또다시 기회가 주어졌다면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건 오직 이유영과 아이뿐이었을 것이다.“유영아...”강이한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피가 흐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그는 정말 아무런 자격도 없었다. 심지어 고통받을 자격조차 없었다.아이와 함께 성장하며 곁을 지킬 권리도 자격도 없었고 이유영의 말처럼, 강이한은 정말 아무런 자격도 없었다.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강이한이 이유영의 곁에서 겪었던 내적 변화를.이유영을 바라볼 때마다 강이한의 가슴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로 도려내는 듯한 고통으로 아팠다. 그 고통은 뼛속까지 쓰라리고 깊게 파고들었다....점심이 되자 또다시 쓰디쓴 약이 준비되었다.그때 박연준이 찾아왔다.박연준은 강이한과 서재에서 두 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눴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이 서재에서 나왔을 때의 무거운 분위기가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서주 쪽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우현 씨.”“네, 아가씨.”우현이 이유영의 부름에 공손히 다가왔다.“국물 맛있네요. 한 그릇 더 줘요.”두 사람의 무거운 분위기가 이유영의 마음속에 묘한 위안을 주는 듯 이유영의 말투는 가벼웠다.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이유영과 강이한, 그리고 박연준 사이의 관계였다.두 사람이 고통 속에 있을 때만 이유영의 마음은 잠시나마 가벼워지는 듯했다.강이한과 박연준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모두 상대의 눈에서 무겁고 복잡한 감정을 읽어냈다.이유영은 두 사람을 원망하고 있었다.이번 생에서 두 사람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막상 그들을 미워하며 마주할 때마다 이유영의 마음도 무겁게 가라앉았다.이건 인과응보와도 같았다.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이용하지 말라는 말이 떠올랐다. 결국, 모든 것은 자신들에게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과거의 강이한과 박연준은 이런 말을 믿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아가씨.”우현은 조심
모두가 아이가 건강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온 힘을 다했다.왜냐하면 아이가 건강해져야 이유영도 비로소 괜찮아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이유영의 차분한 말이 이어질수록 강이한의 가슴은 점점 더 답답하게 조여 왔다.“그 아이는 나뿐만 아니라 우리 부모님까지 목숨을 걸고 지켜낸 아이야.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그 아이를 데려가 다른 사람을 구하겠다는 거야?”이유영은 이런 이야기를 지금껏 단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었다.그러나 지금, 강이한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왜 이유영이 월이를 이용해 이온유를 구하지 못하게 막았는지를.그 아이는 이유영에게 보물 같은 존재였다. 언제라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며 간절히 붙잡고 있었던 아이였으니, 이유영이 그걸 허락할 리 없었다.“강이한, 너 알아? 난 한 번도 너를 이렇게까지 미워해 본 적이 없었어.”“알아, 나도 알아.”강이한은 이유영을 끌어안으며 팔에 더 힘을 주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왜 이유영이 자신을 그렇게 미워하게 되었는지를.이유영은 단지 아이와 함께 평온하게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이유영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겠다는 단순한 바람이 전부였다. 그럴 수만 있다면 모든 원한을 다 내려놓을 수 있었다.하지만 그 단순한 바람마저 결국 강이한의 손으로 모두 부숴버렸다. 그래서 이유영은 더 이상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그렇게 두려움 속에 갇혀버렸다.그렇게 이유영은 강이한과의 싸움을 이어가며 아이와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미안해. 내가 잘못했어...”강이한은 더 이상 이유영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그가 직접 겪은 일은 아니었지만 그 이야기는 너무나 생생하고 가슴을 찌르는 고통이었다.어디에도 즐거운 기억은 없었다. 그 아이가 자라는 동안 심장은 항상 불타고 있었다.그 누구도, 월이를 어떻게 키웠는지 알지 못했다.“그만해.”“이게 네가 듣고 싶어 하던 이야기 아니었어?”“...”“이게 바로 그 아이를 키우며 우리가 겪어야 했던 모든 일
“그때 소군리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아이를 낳지 말라고 했어.”그때 이유영의 주변 사람들은 이유영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하나같이 그렇게 말하며 설득하려 했다.하지만 아무리 주변에서 말려도 이유영은 끝까지 버텨냈다.“화상이 심했던 부위는 살을 도려내야 했어. 지금 내 몸에 남아 있는 움푹 패인 흉터들은 그때 생긴 상처를 치료하면서 생긴 거야.”“...”“마취를 할 수도 없었어.”마취를 할 수 없었다는 이 말 한마디는 강이한처럼 강인한 사람마저 몸을 떨게 했다.강이한은 이유영의 몸에 남아 있는 흉터들을 이미 본 적이 있었다. 상처의 넓은 면적을 직접 본 그는 이유영이 겪었을 고통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취 없이 그 모든 과정을 견뎌야 했다면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유영아...”강이한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사람들이 그러더라. 아이는 여자가 목숨을 걸고 지켜내는 존재라고. 전엔 그 말이 와닿지 않았는데 월이를 통해 그 뜻을 알게 됐어.”그때 이유영은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해 있었지만 배 속의 아이를 지키겠다는 결심만큼은 굳건했다.이유영이 마음 깊은 곳에서 감당해야 했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는 가늠조차 어려웠다.“아무리 조심해서 약을 써도 내 몸 상태 탓에 결국 월이는 조산하게 됐어.”이유영은 마치 별일 아닌 듯 담담하게 말했다.하지만 그 말을 들은 강이한은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유영이 겪은 모든 과정이 너무도 무겁고 가혹하게 느껴졌다.“유영아...”강이한은 입술을 움직이며 무언가 말하려 하다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목구멍은 점점 더 조여 오는 듯했고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알고 있어? 월이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거.”아이가 태어났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던 건 착각이었다. 그 순간부터 새로운 고통과 불안이 시작되었다.건강한 아이를 키우는 것만으로도 많은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하물며 조산아를 키우는 데는 그보다 훨씬
그러나 그 세 글자는 아무것도 메울 수 없었다.이유영은 아무 말 없이 약을 단숨에 삼켰다.쓰디쓴 약이 목을 타고 내려가며 온몸을 떨리게 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약이 이유영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표정과 떨리는 몸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강이한은 이유영이 약을 삼킬 때마다 점점 더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처마 아래 놓인 흔들의자는 이유영이 특히 애착을 가지는 자리였다.강이한이 말했다.“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들어가자.”“대나무 향이 나.”은은하고 차분한 대나무 향기가 이유영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넌 지금 감기에 걸리면 안 돼.”강이한의 목소리는 여전히 온화하고 인내심이 담겨 있었다.“비는 언제쯤 그칠까?”비록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우천시에 대한 기억은 끝없이 내리는 비로 가득 차 있었다. 이곳에 온 후로 비가 그친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았다.“날씨 예보에 따르면 다음 주 내내 비가 온대.”“...”참으로 기묘한 날씨였다. 어떻게 이토록 비가 쉴 새 없이 내릴 수 있을까?우천시 사람들은 모두 이 기후에 익숙해졌을지 이유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우지 씨에게 수건 잘 말리라고 전해줘. 아침에 보니 수건에서 냄새가 나더라고.”사실 매일 수건을 잘 말리려 했지만 이곳의 습한 기후는 번번이 우지를 난처하게 했다.우지는 매일 정성을 다해 수건을 세탁하고 말렸지만 밤새 뽀송했던 수건도 아침이면 눅눅해지고 냄새가 배어 있었다.결국 매번 건조기에 넣어야 했지만 그마저도 온전히 뽀송하지는 않았다.“알겠어.”강이한은 이유영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살며시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따뜻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강이한은 이유영이 결벽증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홍문동에 있었을 때도 이유영은 항상 완벽한 청결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유영아.”“응?”“그 아이가 자라면서 있었던 재미있는 일 좀 이야기해 줘.”아이를 생각할 때마다 강이한의 가슴은 미어졌다.“네가 그걸 알 자격이
“기다려야 해!”강이한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고 강경했다.“...”이유영은 잠시 말이 없었다.이유영의 머릿속에서 '기다림'이라는 단어가 맴돌며 무겁게 울려 퍼졌다.강이한은 이어 말했다.“엔데스 회장이 세상을 떠났어. 지금은 우천시에 머무는 게 더 안전해.”그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분명했다. 이유영은 이전에 엔데스 명우와 얽혔던 적이 있었고 강이한은 이유영이 다시 위험에 휘말릴까 걱정하고 있었다.지금 정씨 가문은 겉으론 평온해 보였지만 그 이면에 어떤 현실이 숨겨져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이런 시점에서 강이한이 이유영을 위험 속으로 돌려보낼 리 없었다.이유영은 낮게 읊조리듯 물었다.“돌아가셨어?”이유영도 대충 파리 쪽 상황이 어떤지 알 수 있었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대체로 그 문서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이 좋은 일이 아님은 분명했다. 엔데스 가문은 오래전부터 그 문제에 깊이 휘말려 있었고 지금도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유영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그렇다면 우리 집은...”“네 아버지는 신중한 분이니까 누군가에게 쉽게 휘둘리진 않을 거야.”강이한의 말을 듣고 이유영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지금 이유영이 얼마나 가족을 걱정하고 있는지는 강이한도 잘 알고 있었다.강이한은 잠시 이유영의 얼굴을 살폈다.“그럼, 소은지는?”이유영이 가장 걱정하는 사람이 소은지였다. 소은지는 엔데스 명우와 얽힌 원한뿐만 아니라 엔데스 현우와의 관계에서도 깊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엔데스 회장의 죽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지만, 상황은 오히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워질 줄은 몰랐다. 엔데스 가문은 이제 완전히 갈라진 듯했고 그 속에서 이유영이 가장 걱정하는 사람은 바로 소은지였다.강이한은 미소를 가장한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너는 정말 모든 사람을 걱정하는구나.”이유영은 언제나 타인에겐 따뜻했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무척 냉정했다.“...”이유영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
끝없는 어둠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유영의 마음은 서서히 조여 들었다.이유영을 기다리고 있는 건 길고 막막한 나날들이었다.어둠에 갇힌 사람에게 허락된 일은 너무나도 적었다.들려오는 소리를 듣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둠을 마주하는 데에는 누구에게나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이유영은 지금 그 말을 절실히 실감하고 있었다. 이 어둠을 마주할 용기가 자신에게 부족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나를 파리로 돌려보내 줘.”이유영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담담히 말했다.강이한의 마음은 이미 어둠에 억눌린 상태였는데 이유영의 요구를 듣고 나니 더욱 숨이 막혀왔다.“유영아...”“염 선생님은 훌륭한 의사잖아. 그런데 약을 먹어도 전혀 좋아지는 기미가 없어.”이유영의 머릿속에는 수술밖에 떠오르지 않았다.나아질 기미조차 없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두려웠다.이유영의 말은 그녀의 상황이 얼마나 막막한지 그대로 드러냈다.강이한은 이유영의 말을 들으며 눈에 깊은 고통과 상처가 서렸다.“수술... 생각해 본 적 있어?”만약 정말 수술을 하게 된다면...수술이 성공한다면 다행이지만, 실패한다면?눈 수술은 다른 수술과 달랐다. 한 번 실패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염 선생의 도움을 받으면 어쩌면 최소한의 희망은 있었다. 일말의 희망도 보이지 않을 때 다시 수술을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이었다.지금 당장 수술을 하면 시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강이한은 두려웠다. 강이한에게도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일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유영과 관련된 일이었다.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강이한은 그걸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유영아, 나는 두려워.”강이한은 잠시 망설이다가 무겁게 말했다.그가 두려운 것은 이유영의 수술이 실패로 끝나는 일이었다.만약 수술이 실패한다면 이유영은 평생 어둠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은 도저히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강이한은 그 끔찍한 결과를 감당할 자신이
현우는 송연미가 소은지를 괴롭혀 왔다고 믿고 있는 걸까?현우는 틀렸다. 소은지는 현우를 바라보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소은지는 깊은숨을 고르고 나서 천천히 말을 꺼냈다.“송연미와 넷째 도련님의 관계는 이제 정말로 끝난 건가요?”송연미는 이전에 말했다. 넷째 도련님과의 관계는 이미 완전히 무너졌다고. 왜 그랬을까? 단순히 감정의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송연미는 이런 방식으로 송씨 가문과 넷째 도련님 사이의 연을 끊으려 했다.분명한 사실은, 송연미는 강압적인 수단으로 넷째 도련님을 완전히 끊어내면서 넷째 도련님을 심각하게 적으로 돌렸다. 송씨 가문과 넷째 도련님의 관계는 파탄에 이른 상황에서 지금 현우가 송씨 가문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면, 결과는 자명했다. 모든 일이 훨씬 수월해질 테니 말이다.그러나 상황은 달랐다.지금은 과거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때는 모든 희망을 회장님의 죽음에 걸었었다.그러나 회장님이 떠난 후, 상황은 더욱 복잡하고 무거워졌다.송연미와 넷째 도련님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현우는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조용히 말했다.“그건 그 사람들의 문제예요.”그 사람들의 문제라고? 현우는 이미 마음속으로 그렇게 결론 내린 것일까?아니면 과거에 소은지가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었던 걸까? 그래서 현우가 송연미와 엔데스 운빈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갖게 된 걸까?만약 아무런 일이 없었다면, 현우가 지금처럼 냉담한 태도를 보일 리가 없었다.소은지는 혼란스러웠다. 현우의 생각을 읽어낼 수 없었다.“그럼, 여섯째 도련님 쪽은 어떻게...”소은지가 엔데스 명우를 언급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소은지의 온몸이 긴장으로 굳어졌다.엔데스 명우가 소은지에게 남긴 심리적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가 보였다.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소은지의 마음속 깊이 자리한 두려움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걱정하지 마요. 소은지 씨는 반산월에 잘 머물기만 하면 돼요. 알겠죠?”현우는 소은지에게 더 이상 많은 걸 알려줄 생각이 없어 보
하지만 소은지는 알고 있었다. 이 세상에는 정말 귀하고도 소중한 감정이 존재한다는 것을.소은지는 한 걸음 다가서서 현우의 넥타이를 정성껏 매만졌다. 그녀의 숨은 막히듯 답답했고 가슴은 아팠다. 이런 불편함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저는 여전히 예전의 삶이 더 좋아요.”그때의 삶은 엔데스 명우에게 망가지기 전의 삶이었다.그때의 소은지는 자유로웠고 거침없었다.소은지는 스스로에게 자부심이었고 어떠한 방해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이 깊은 나락 속에서 이런 절망을 경험하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소은지 씨!”“엔데스 가문 자체가 심연과 같은 존재예요. 그리고 이 파리도 제게는 심연과 같아요.”소은지는 단호하게 말했다.소은지가 이렇게까지 파멸에 이른 건 파리 땅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였다.아프냐고?너무 아팠다.숨이 막히냐고?너무도 답답했다. 예전의 소은지는 한 번도 인생에 이렇게까지 기복이 심할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소은지는 조심스레 현우의 넥타이를 정리한 뒤 말했다.“유영이의 세계는 이미 너무 흔들리고 있어요. 유영이를 더 힘들게 하지 마세요.”“...”현우는 침묵했고 눈빛은 더욱 깊어졌다.소은지가 보기에 이유영은 정말 불쌍했다. 이유영은 강이한을 떠나려고 애쓰고 박연준을 떨쳐내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하지만, 이 두 사람은 끊임없이 이유영을 얽어맸고 심지어 터무니없는 이유로 이유영의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렸다.만약 강이한과 박연준이 없었다면, 이유영도 자신의 커리어를 쌓으며 당당하게 살아갔을 것이다. 높은 위치에서 자신의 삶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강이한과 박연준 때문에 이유영의 모든 것이 무너졌다.지금은 어둠 속에서 발버둥 치고 있는 이유영이 안타까울 뿐이었다.“소은지 씨!”현우의 목소리가 더욱 단호해졌다. 소은지를 바로 보는 현우의 눈빛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러니까 현우가 소은지를 지키는 이유가 이유영 때문이라는 건가?“파리를 떠나고 싶어요.”현우의 표정은 굳어졌고 목소리는
결국 송연미는 사람들에 의해 떠나야 했다. 마지막으로 뒤돌아본 송연미의 눈빛은 무거움과 아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모습에 소은지의 마음도 잠시 흔들리고 말았다.그 순간 소은지는 문득 깨달았다. 이 모든 시간 동안 송연미가 차갑고 냉정한 가면 뒤에 감춰 두었던 것이 무엇인지를.억지로 맺어진 인연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처음부터 원치 않았던 것은 시간이 지나도 마음에 닿지 않는 법이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바뀔 수 없는 진실이었다.여자의 운명은 때로는 지나치게 가혹하다. 특히 자신의 미래조차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다.현우는 묵묵히 소은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이혼 합의서를 집어 들었다. 소은지를 놓아주던 현우의 손등에 힘줄이 도드라졌다.현우가 서류를 찢으려는 찰나, 소은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잠깐만요.”“...”현우는 동작을 멈추고 소은지를 바라보았다. 소은지는 조용히 다가가 서류를 천천히 빼앗으며 말했다.“어차피 서명해야 할 서류잖아요.”“소은지 씨!”“엔데스 가문의 상황이 어떨지는 제가 잘 모르지만, 회장님의 죽음조차 이 싸움의 끝을 맺지 못했다는 걸 보면 일이 간단치 않다는 건 분명해요.”소은지는 현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힘주어 말했다.그 말을 내뱉으면서도 소은지의 가슴은 짓눌린 듯 아려왔다.현우는 소은지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당신...”“엔데스 명우가 지금 당신과 맞서고 있는 거잖아요, 맞죠?”그 말이 떨어지자, 현우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소은지는 그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방금 송연미가 소은지에게 했던 말이 모두 사실이었다는 것을.애초의 계획대로라면, 엔데스 가문의 회장이 세상을 떠나면서 모든 일이 마무리되어야 했다.그리고 소은지는 그로 인해 자유를 완전히 되찾을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엔데스 회장은 끝내 어떤 결론도 남기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그렇게 가문은 단번에 분열되었고 문서는 핵심적인 요소가 되어버렸다. 전기봉은 행방불명 상태였고 나머지 서류의 절반은 강이한의 손에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