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함에 박연준의 목젖이 꿈틀거렸다.너무 평온했다.이유영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평온했다.박연준은 평온한 이유영의 옆모습을 보며 가슴이 더욱 답답해져 갔다. "유영아.""안 되는 거야?"이유영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는 오히려 박연준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그녀의 눈빛은 마치 차가운 칼날 같았다.박연준은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며 조용히 말했다."연서... 라고 해.""연서, 참 좋은 이름이네."하지만 그 이름은 이유영의 신경을 건드렸다.박연준은 입술을 움직이며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 순간에는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결국, 그는 간신히 한마디를 던졌다."유영아, 감정 문제에서는 너무 총명하면 좋지 않아. 적당히 멍청해야 해."좋지 않다고?이유영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대꾸하지 않았다.그녀의 냉소는 박연준의 가슴을 더욱 조여왔다....서주.강이한은 이유영을 찾느라 거의 미쳐가고 있었다.박연준이 갔을 법한 곳은 전부 뒤집어 놓은 상태였다.결국 그는 박연준이 이유영과 함께 알프산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가려고 했다.그러나 이시욱이 말했다."이미 돌아오는 중입니다."강이한은 그 말을 듣고 미간을 움찔하며 물었다."장혜주는 지금 어디에 있어?"그래, 장혜주.이유영이 돌아오면, 장혜주는 기어코 이 소식을 그녀에게 전달할 게 분명했다.이시욱은 말했다."사실 여진우 씨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결국 이 일은 숨길 수 없는 문제였다. 강이한은 며칠 동안 초조함에 시달리며 정신이 망가져갔다. 이시욱의 말을 들은 강이한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박연준이 이유영을 데려갔을 때부터, 그는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그리고 이제야 그녀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지금…강이한은 돌아온 이유영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하며, 몇 번이나 깊은숨을 들이쉬었지만 가슴이 답답한 것은 여전했다....비행기 안.이유영은 창가에 앉아 조용히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박연준은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다가가려고
진짜라고?박연준이 강이한을 위해 입 밖으로 꺼낸 그 두 글자를 들은 순간, 이유영은 웃었다.그 웃음은 차갑고, 동시에 비웃음에 가까웠다.“너희가 내게 한 것 중에, 대체 어떤 것들이 진심이었는데?”진심?대체 진심이란 게 뭔데?거짓말을 오래 하면 자신조차 그걸 믿게 된다더니.박연준과 강이한이 딱 그 꼴이다.진심이라고?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질 지경이다.“너희 셋은 도대체 어떤 관계였던 거야?”“...”이유영의 목소리는 한층 더 차갑고 날카로워졌다.박연준은 말을 잃은 채 침묵했다.'어떤 관계였냐'는 물음에, 그의 눈에 깊은 고통이 스쳤다.그러나 그 감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곧 평정을 되찾았다.“됐어. 말하지 마. 내가 하나씩 전부 밝혀낼 거니까.”반복되는 그녀의 말 속엔 증오와 단호함이 느껴졌다.듣는 이의 심장을 옥죄는 그런 말이었다.박연준은 이유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속엔 공허함이 더 크게 자리 잡았다.그녀는 정말… 박연준과 강이한이 아무리 서로를 증오하는 원수라고 해도, 같이 힘을 합쳐 이유영에게 그 일을 숨기고 싶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서로를 협박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두 사람은 그 일이 그녀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줄지 알고 있었다.그렇기에 아무리 서로를 증오해도 그 사건만큼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서주.결국 이유영은 서주로 돌아왔다.박연준은 휴대폰을 그녀에게 내밀었다.그 순간, 그의 눈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그러나 이유영은 망설임 없이 휴대폰을 잡아채 갔다.“...”이유영은 그의 앞에서 휴대폰을 들고, 바로 장혜주에게 전화를 걸었다.벨이 울리는 사이, 박연준이 먼저 말했다.“장혜주는 지금 서주에 없어.”“네 정보는 참 빠르네.”그녀의 말에는 뼈가 담겨 있었다.박연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언제부터였을까.그녀와 관련된 모든 정보는 항상 그의 귀에 가장 먼저 들어왔다.전화가 연결되었다.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것은 장혜주의 공손한 목소리였다.“무
묵직한 힘이 이유영을 짓눌렀다. 바로 그때 박연준은 확실히 이유영의 몸에서 나는 온도가 너무나도 차갑다는 걸 느꼈고 그 한기는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온도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기운까지도 싸늘했다.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하지만 그 순간 완전히 남처럼 멀어진 느낌이었다.이런 거리감은 박연준이 예전에 느꼈던 것보다 더 멀었고 그녀는 이제 영영 멀어졌다. 이런 기분은 박연준에게 정말 견디기 힘들었고 그래서 강이한과 어떤 원한이 있어도 연서의 일은 절대 말하지 않았다. 10년의 복수였다.이 복수가 언제부터 달라졌는지 박연준도 알 수 없었다. 원래는 계획에 있었던 일이었다. 이유영이 가장 행복할 때 강이한에게 결정타를 주려고 했다. 하지만 강이한의 세계에 한지음이란 예상치 못한 존재가 나타났다. 그들의 사이가 금이 가기 시작했고 이유영이 그 감정 속에서 괴로워하는 걸 보며 원래 계획도 변해버렸다. 이유영의 몸 안에서는 마치 사나운 사자가 날뛰는 것처럼 그녀의 신경이 완전히 곤두섰다. 차갑게 남자의 품에 안겨있으면서도 말 한마디 없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 일은 이미 다 지나갔고 그 사람은 이제 많이 달라졌어.” “다 그 여자 때문이야.” 박연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유영이 싸늘하게 자르듯 말했다. 모든 게 그 사람으로 인해 시작됐다. 지금 이 순간 이유영의 머릿속에는 강이한과의 추억들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박연준이 그녀에게 했던 일들도. 청하에서 남자는 늘 그녀를 위기에서 구해주었다.강이한과는 좋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토록 좋았던 감정도 결국 한지음 앞에서는 맥없이 무너졌다. 그가 사랑했던 건 결국 그녀가 아니었던 거다. 그저 그녀를 통해 다른 사람을 바라본 거였고 그런 감정은 당연히 오래갈 수 없었다. 박연준도 그녀의 이 얼굴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유영 씨.”이유영의 이런 싸늘한 말투에 박연준의 마음은 결국 흔들리고 말았다. 그와 강이한 모두 알고 있었다. 이유영이 모든 걸 알게 되면
한지음의 딸과 자기 딸 사이에서도 그는 전혀 망설임 없이 곧바로 한지음의 딸을 선택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아닌 건 영원히 아닌 거였다. 그래서 선택해야만 할 때도 주저 없이 바로 다른 쪽으로 기울었다. 박연준은 이유영을 안은 팔에 더욱 세게 힘을 주었다. “유영 씨, 그게 아니라 사실은.”“자신을 위한 변명인지 아니면 강이한 씨를 위한 변명인지 궁금해. 두 분의 관계가 정말 특별한 것같아.” 남자의 말은 다시 이유영의 날카로운 비아냥에 끊겼다. 강이한을 위해 변명한다고? 그래 지금 박연준이 하는 이런 행동들이 이유영 눈에는 전부 강이한을 위한 변명으로 보였다.겉으로는 멀어진 것 같아도 중요한 순간에는 서로를 위해서였다 “유영 씨.”“여자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됐는데 그만한 가치가 있어?” “당신!”“당연한 일이지. 연서는 절대 용납 못 할 존재였으니까.” 이유영이 살기등등하게 박연준을 쳐다봤다. 박연준의 몸이 순간 경직됐다. 이유영의 원래도 표독한 말투가 더욱 독해졌다. “잘 죽었어.” “유영 씨.” 순간 박연준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이유영이 내뱉었다. “죽어 마땅해.”남자의 말투에서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자 그녀는 비아냥거리며 웃었다. 연서가 과연 특별한 존재였나 보다. 박연준은 그 자료에 얼마나 자세한 내용이 담겼는지 몰랐지만 이유영이 30분이나 볼 정도면 분명 그 안에서 이유영은 알아야 할 모든 걸 알게 됐을 것이다. 그리고 연서는 대체 어떤 존재였을까. 이 세월 동안 박연준과 강이한의 세계에서 말만 해도 가시처럼 아픈 존재였다.박연준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리자 이런 모습을 보며 이유영의 조소와 광기는 점점 더 강해졌다. 박연준은 순간 정신을 차렸다. 무거운 기색이 눈에 비치며 뭐라고 말하려는데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유영의 폰이 울렸다. 임소미한테서 전화가 왔다.연거푸 깊은숨을 쉰 다음에야 이유영은 답답한 가슴을 완전히 가라앉힐 수 있었다. 한쪽으로 걸어가 전화를 받았다.“엄마.” “
박연준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이러니까 그녀가 알아선 안 되는 거였다. 알게 되면 모든 게 통제 불능이 될 게 뻔했다. 지금처럼 말이다. 완전히 꼬여버렸다. 이유영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십 년 동안 쌓아온 감정이 마음속에서 완전히 무너졌는데 설상가상으로 강이한이 은별이를 데리러 간다는 것까지 알게 됐다.귀를 찢는 듯한 뺨따귀 소리와 함께 그의 뺨에 새빨간 손자국이 새겨졌다. 이유영의 손톱은 그의 살갗을 파고들어 피를 냈다. 주변 공기마저 얼어붙은 듯했다. 박연준은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이유영이 이미 그곳을 떠난 후였다.강이한은 이유영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창백한 안색으로 인형을 꼭 끌어안고 있는 이온유를 보며 생각했다. ‘퇴원했나 보네.’수술은 잘 끝났지만 큰 병을 앓은 탓인지 아이의 작은 얼굴은 파리했다. 강이한은 아이를 내려다보며 불렀다. “온유야.”“네, 아빠.”“이번 일만 마무리되면 아빠랑 여행 가자. 응?” 이 일을 겪으며 강이한은 아이의 학업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한지 실감했다. 아이 숙제만 봐도 머리가 아팠다. 겨우 이 나이에 그런 짐을 지게 하다니.온유의 눈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한없이 다정했다. 아이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역시 아이는 아이였다. 노는 게 천성인지라 나간다는 말에 기뻐하는 모습이 보는 사람까지 흐뭇하게 만들었다.강이한의 얼굴에 걸려있던 부드러운 웃음기가 싹 가시더니 이온유를 보며 말했다. “온유야, 언니들이랑 잠깐 놀고 있을래?” “네.” 애는 참 착하기도 하지. 고개를 끄덕이곤 바로 따라 나갔다. “다들 어디 갔어?” “꽃밭 쪽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집사가 말했다.집사가 공손하게 말했다. 사실 강이한이 파리에서 이유영과 아이 때문에 언쟁을 벌였던 일을 이시욱이도 알고 있었기에 이유영이 방문할 때면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미리 살펴보도록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지금도
이유영의 손에 있던 커피가 강이한의 얼굴에 그대로 쏟아졌다. 쨍그랑!컵이 책상에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온녕의 차분한 표정이 일그러졌다. 몰골이 말이 아닌 강이한을 보면서도 이유영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격돌했다. 남자의 눈동자에는 폭풍우가 치는 듯했다. “이제 만족해?” 이유영이 물었다. 강이한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놀아? 이제 그 가식적인 연기 그만해.”강이한이 이유영을 쳐다봤다. 그의 눈빛 깊은 곳에서 무언가 산산이 조각나는 듯했다. 가슴은 더욱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알아버린 거다. 그녀가 모든 걸 알게 됐다. 전에 장혜주가 백남 저택에 갔을 때 박연준이 그녀를 데려갔었다. 사실 그때 강이한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가 결국엔 알게 될 거라는 걸. 박연준과 함께 있으면 모든 게 불확실했으니까. 그리고 서주에서 그녀는 그 일을 알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다 그녀를 서주라는 곳에 휘말리게 한 탓이었다.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강이한의 정신이 조금씩 돌아왔다. 그는 이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유영 씨.”“정말 닮은 것 같지 않아?”이유영은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질린 남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마음속의 폭풍을 억누르려 애썼다. 십 년이란 시간 그 모든 감정이 그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소중히 여겼던 거였다니.강이한은 입을 떼려 했지만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 속에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본 이유영의 입가에 냉소가 떠올랐다.“나도 그렇게 보여?”하는 이유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이한은 이미 속이 울렁거렸는데 그녀의 말에 숨이 턱 막혔다. 변명하고 싶었다. 오해라고 사실은 전혀 다르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차갑고 비웃는 듯한 눈빛이 그의 심장을 찔렀다. 결국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은 삼켜야만 했다.더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으니 설명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강이한의
이런 상황에서 그 말은 너무나 공허하고 힘없었다. 그녀의 생각과 다르다고? 이유영은 차갑게 웃었다.자리에서 일어선 이유영은 차갑게 말했다. “신경 쓰든 말든 상관없어. 강이한, 네가 감히 또 은별이를 해치거나 나를 해치면 반드시.”그녀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강초한의 가슴은 텅 비어버린 듯했다.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이유영은 말을 이었다. “당신을 산 채로 껍질을 벗길 거야.”그 말을 내뱉고 이유영은 차갑게 돌아서서 나가버렸다.강이한은 등의자에 앉아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녀가 알았다. 모든 걸 알아버렸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언제부터 자신이 이렇게 그녀가 연서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던 걸까. 결국 그녀는 알아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모든 상황이 완전히 통제 불능 상태가 되었다. 그의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무너진 적은 없었다.맞다.이유영을 알게 된 순간부터 강이한은 확신했다. 이유영은 그의 운명이라고, 다시 시작된 인연을 반드시 지켜내겠다고.그런데 지금 왜? 어째서 이렇게 된 거지? 박연준이가 왔을 때 강이한은 여전히 등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제 만족해요?”익숙한 기운을 느끼자 예전처럼 히스테리컬한 반응은 없었다. 이 순간 강이한은 마치 힘이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의 목소리는 슬프고 무거웠다. 박연준의 말을 듣자 그의 분위기도 순간 무거워졌고 눈빛에는 전에 없던 복잡한 감정이 어렸다. 하지만 이런 복잡함 속에서도 그들 사이에는 수년 만에 처음으로 평온함이 감돌았다. “갔나요?” 결국 박연준이 입을 열어 물었다.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강이한의 눈빛이 쏘아보듯 박연준에게 향했다. 그의 눈동자는 차가운 냉기로 가득했다. “박연준 씨, 그 여자는 연서가 아니에요.” 마침내 오랜 세월이 흘러 강이한은 박연준 앞에서 직접 연서라는 이름을 꺼냈다. 그동안 누구도 감히 강이한과 박연준 사이에서 연서를 언급하지 못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조차 금기시된 이름이었다.그 인간
한편으로 이유영은 크리스탈 별장을 나와 곧장 공항으로 갔다. 모든 진실이 밝혀진 이상 여기 더 머물 이유가 없었다.벨 소리와 함께 핸드폰에서 여자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짜 독한 여자네. 정말 포기할 수 있어요?” 액정에 뜬 이름은 신지수였다. ‘독하다고? 포기한다고?’ 신지수의 날카로운 물음에 이유영의 심장은 얼어붙는 듯했다. 깊은 한숨과 함께 솟구치는 감정을 억누르며 이유영은 말했다. “전에는 아마도.”그녀의 말은 결국 끝맺지 못했다. 그래. 예전에는 아마도 포기할 수 없었을 거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도 원래부터 이렇게 무정했던 건 아니었다. 대체 왜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걸까? 이유영은 마음속 답을 알고 있었다. “일단 끊어요. 마음대로 하세요.” 이유영의 말투는 담담했다.이유영의 냉정한 태도에 전화 속 여자는 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모질게 나오면 나도 껍데기만 남기고 싹 발라먹어 주겠어요.”신지수의 마지막 말에는 섬뜩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이유영이 신지수에게 무슨 패를 쥐여준 건지 서주에서 감히 누구도 범접하지 못했던 강이한, 박연준, 여진우까지… 그런데 이제 와서 이제 와서 강이한과 엮였다니 믿기 힘들었다.무정하다고? 차갑다고? 강이한이 전에 이유영에게 했던 일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귓가의 휴대폰이 누군가에게 순간 빼앗기자 이유영은 본능적으로 돌아봤다. 박연준이 깊이 있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박연준을 보는 순간 이유영의 차가워진 눈빛은 더욱 서늘하게 변했다. 분명했다. 그녀는 박연준이 쫓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손목에 힘이 느껴졌다. 남자는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그녀의 손목을 쥐었다. “너.”이유영은 그런 박연준를 보며 숨이 턱 막혔다. “당신을 서주에 끌어들일 생각은 없었지만 이왕 온 이상 여기 있어.” 박연준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의 말에 속아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
임소미는 혈압이 치솟았고 화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내 말이 틀렸나요?”“틀렸냐고? 제대로 된 일을 한 적은 있고? 당신만 제대로 된 선택을 했더라면 유영이와 강이한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임소미는 참았던 감정을 폭발시키며 격렬히 외쳤다.진영숙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임소미의 말이 맞았다. 진영숙은 두 사람 관계에서 많은 잘못을 했다.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달라졌다.강이한은 사라졌고 강서희도 여전히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남은 건 오직 월이 뿐이었다.오늘 이곳에 와서 월이를 보게 된 순간, 월이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자리 잡았다.“사람 불러!”임소미가 크게 외치자 집사들과 도우미들이 급히 달려왔다.“이 여자를 당장 내쫓아!”“당신이 감히 그럴 수 있을까?”“뭐라고?”임소미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이 여자는 지금 도대체 뭐 하려는 걸까?’조금 전 아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을 보며 아이에게 조금의 정이라도 남아 있는 줄 알았다.하지만 모든 것은 착각에 불과했다.결국 그녀는 후회라는 감정을 모르는 인간이었다.진영숙이 오늘 여기 온 것도, 월이에게 다정하게 굴었던 것도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한 마지막 발악이었다.그녀의 말은 그저 그럴싸한 포장일 뿐 사실은 월이를 자신의 곁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그리고 뻔뻔하게도 무례하기까지 했다.진영숙은 임소미의 눈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따뜻함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매서운 날카로움뿐이었다.그녀는 침착하게 말했다.“우리 아들이 왜 서주를 떠났는지 내가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임소미, 당신들은 정말 단 한치의 양심 가책도 못 느꼈어?”왜 강이한이 서주를 떠났는지 시간대와 상황을 조합해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추측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특히 떠나기 전, 시윤이 건넨 말이 결정적이었다. 이유영이 용성시에서 수술을 받았던 그 시기에 강이한은 서주에
강이한은 그렇게 어둠 속에서 절망의 고통을 몸소 겪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괴로워도 수술을 받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한때 이유영이 어둠 속에서 얼마나 무섭고 무력했는지를 그는 이제서야 조금씩 체감하고 있었다....파리에서 진영숙은 다시 백산 별장을 찾았다. 여전히 강이한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고 시윤은 강이한이 이정과 신시욱을 데리고 떠났다고 말했다.그 두 사람의 능력을 생각하면 강이한이 스스로 나타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진영숙은 어머니로서 절망에 가까운 마음으로 그를 수소문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그리고 알면 알수록 그녀의 마음은 점점 더 불편해졌다.“정말이지, 당신은...”백산 별정까지 찾아온 진영숙의 뻔뻔함에 임소미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굳은 표정으로 응수했다.진영숙은 한때 유능한 여성이었고 그런 그녀에게 감히 저런 얼굴을 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그녀에겐 익숙하지 않은 대우였다.“저는 아무것도 없어요. 저 좀 봐주세요.”그녀의 목소리에는 전에는 없던 고통이 서려 있었다.그렇다. 지금의 진영숙에겐 주변에 기댈 친척도 함께할 가족도 없었다. 그녀의 앞에 있는 건 손녀인 월이 뿐이었다.오늘도 그녀는 월이를 위해 여러 장난감을 준비해 왔지만 임소미는 그 모든 행동이 불쾌하게만 느껴졌다.“당신도 어머니였잖아요. 제 마음이 얼마나 불편한지 알잖아요.”임소미는 차가운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봐준다고? 당신이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이유영이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 진영숙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심지어 뱃속의 아이조차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이토록 헌신적인 할머니 행세를 하니 임소미는 화가 났다.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극으로밖에 안 보였다.진영숙의 눈엔 고통이 어렸다.“저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어요.”임소미의 말에 그녀는 도무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아무리 자존심 강한 진영숙이라 해도 진실을 알게 된 지금, 과거
그녀는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강이한을 떠난 뒤 어둠 속에서의 삶을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고 있었다.신시욱과 이정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침묵에 잠겼다. 그 질문은 그들 사이에서도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이 그때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렇게 보냈는지, 사실 그들조차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또렷하게 남아 있는 건 그녀가 깊은 괴로움 속에 잠겨 있었다는 사실뿐이었다.그리고 그녀가 괴로워할수록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의 고독이 얼마나 잔혹한 감정인지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그녀는 깊은 절망 속에 빠져 있었다.그리고 지금의 강이한은 어쩌면 그때의 이유영보다 더한 심연 속에서 절망을 겪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벌하고 있었다. 그녀가 겪었던 고통을 똑같이 겪기 위해 같은 어둠 속에 몸을 던졌다.“선생님. 각막 이식 수술 관련 소식이 들어왔습니다.”신시욱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천시에 머무는 동안, 신시욱과 이정은 한 번도 수술 신청을 멈춘 적이 없었다.그들은 강이한을 잘 알고 있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이유영이 원하지 않는 일이라면 그도 절대 강행하지 않았다.이유영이 시력을 잃었을 때, 그녀는 가족들이 몰래 준비했던 이식 수술조차 그녀는 단호히 거절했었다.그리고 지금의 강이한도 마찬가지였다.오랫동안 기다려 온 기회 앞에서 강이한은 조용히 거절했다.“필요 없어. 다른 사람에게 양보해.”두 사람은 말문이 막혔다.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두 사람은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필요 없다고? 그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선생님.”신시욱의 목소리는 긴장감에 더욱 떨려왔다.그 어떤 강인한 남자라고 해도 이 순간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떨림을 억누를 수 없었을 것이다.최근 며칠간 그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두 사람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강이한은 자신을 벌하며 살고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정말 이미 충분했다.‘받아야 할 벌은 다 받았는데 왜 여전히 자신을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어둠 속에서 지낸 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어둠 속에서 사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새들의 지저귐이 더 또렷하게 들리고 사소한 바람 소리 하나에도 감각이 예민해졌다.강이한은 우천시에 있는 주택 마당에 놓인 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우천시에 오늘같이 이렇게 따스한 햇살이 비추던 때가 언제였던가?이정이 조심스레 다가와 담요를 덮어주며 말했다.“햇살은 있어도 아직은 쌀쌀하네요.”말은 없었지만 강이한은 이정의 발걸음 소리와 숨소리로 그가 신시욱이 아님을 알아차렸다.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그때의 이유영도 지금처럼 감각이 예민했을까?“이정.”“네.”“유영이는 이 마당이 어떤 모습인지 전혀 보지 못했겠지?”“네.” 이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이유영은 이곳에서 몇 개월을 머물렀지만 실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이 마당은 끝내 그녀에게 낯선 곳으로 남게 되었다.지금 그녀를 우천시로 다시 데려온다 한들 스스로 길을 찾아올 수도 없을 것이다.강이한은 낮게 중얼거렸다.“하지만 유영이는 이 마당에 뭐가 있는지는 알고 있었어.”그렇다. 보지 못했어도 그녀는 감각으로 모든 것을 구분했다. 마치 지금의 강이한처럼.이정이 조심스레 물었다.“이럴 가치가 있었습니까?”그가 이곳에 온 이후, 누군가가 처음으로 던진 질문이었다. 그는 말할 수 없이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가치가 있었는지는 사람이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야.”그것은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다.그리고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유영에게 진 빚은 결코 눈 한 쌍으로는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이건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다.예전에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던 이유영의 손짓을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졌다. 지금 자신이 어둠 속에서 겪고 있는 공포는 당시 그녀가 느낀 감정에 닿을 수조차 없었다.점심 식사 시간.“쨍그랑.”강이한이 손을 뻗는 순간, 접시와 그릇이 떨어지며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기는 순간 얼어붙었다
이유영은 자신의 몸에 강이한과 관련된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을 것이다.그녀는 남은 인생에서도 강이한과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얽히는 일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월이의 일로 인해 그녀는 너무도 깊은 상처를 입었고 강이한을 평생 용서할 수 없었다.그런 사람의 눈을 자신이 기증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리고 강이한 역시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는 수술 전에 모든 철수 준비를 마친 것이고 이유영에게는 아무것도 알리지 말라고 지시했다.이미 많은 상처를 준 이후, 아무리 많은 것을 베푼다 해도 이유영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자신과 이유영 사이에는 어떠한 선택지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래서 과감하게 그녀의 손을 놓은 것이다.‘이렇게 되면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 빚진 것이 없게 되는 걸까?’하지만 단순히 눈을 기증했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유영아, 왜 강이한에 관해 묻는 거야? 혹시...”소은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결국 그녀는 언제나 이유영 편이었다.특히 수술 전, 마지막으로 강이한을 마주했을 때 그가 남긴 말을 들은 후로 그녀조차도 강이한을 용서할 수 없다고 느꼈다.“나랑 장난해?”소은지의 말에 이유영의 표정은 단숨에 싸늘해졌다.그 차가운 기색을 확인한 소은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래, 그렇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소은지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나는 그냥 권력에 그토록 집착했던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서주를 내려놓았는지 궁금했을 뿐이야.”“음모일지도 모르지.”소은지는 잠시 생각하다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화제를 서둘러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 했다.“...”‘음모’라는 단어에 이유영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소은지는 그녀의 웃음을 보고 또 한 번 안도했다.“ 월이 보러 왔을 때,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뭐라고 했는데?”“일어날 일은 언제든지 다시
강이한은 서주에서의 모든 일을 철수하고 사라졌다. 그와 함께하던 사람들도 함께 자취를 감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그저 강이한의 또 다른 속임수일 거라고 생각했다.강이한과 박연준, 두 사람은 누군가를 철저하게 속이는 데에 능숙한 사람들이었다.박연준은 진짜로 서주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었고 진영숙은 파리에서 집요하게 강이한의 행방을 묻고 다녔다. 그걸 보며 이유영은 강이한이 정말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무슨 생각해?”반산월에서 소은지는 이유영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 조심스레 물었다.이유영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은지야.”“응?”“어떻게 된 거라고 생각해?”서주의 현 상황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부분이 많았지만 최근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며 이유영은 점점 확신에 가까워졌다.강이한은 정말 그의 사람들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그는 마치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진 듯했다.권력을 중시하던 인물이었기에 은둔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강이한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로 조용히 지낼 성격이 아니었다.“뭐라고?”소은지는 이유영의 갑작스러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듯 되물었다.이유영은 소은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강이한이... 정말 사라졌어.”“그래. 그 얘기 예전에도 했었잖아.”이유영이 이제서야 이 사실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소은지는 알아챌 수 있었다.예전엔 믿지 않았던 이유영의 모습이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녀는 강이한의 실종을 인정하고 있었다.강이한과 박연준은 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그리 좋은 사람들이 아니었다.연서의 사건이 터진 이후, 그녀는 두 사람을 음모로 가득 찬 사람들로 생각했고 그래서 처음 강이한이 사라졌다고 했을 때도 이유영은 그것을 단순한 음모의 연장이라 여겼다.두 사람은 늘 서로 무관한 척 행동했지만 그 뒤에는 누구도 상상 못 할 거대한 연관성이 있었던 것이다.신지수는 여러 번 전화를 걸어왔다.강이한이 서주를 떠난 후, 신씨 가문도 연쇄적으로 피해를 보았고 그녀는 그 일을 처리하면서
시윤이 직접 가져온 소식이었기에 진영숙은 이 사실에 대해 더욱 부정할 수 없었다.너무도 큰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에 가슴은 내내 울렁거렸다.“도련님이 이번엔 너무하셨어요.”시윤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지만 깊은 울림이 있었다.그 또한 믿기 어려운 사실 앞에서 한동안 말을 잃었다. 이건 강이한이 이유영에게 저지른 이 일은 지금껏 사람들이 믿고 있던 모든 인식을 뒤흔드는 일이었다.“한지음의 딸이라고?”“네, 그 아이는 분명히 한지음 씨가 남기고 간 아이입니다.”진영숙의 심장은 계속해서 빠르게 뛰었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사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강이한과 이유영의 관계가 끝난 것은 자신의 방해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을.만약 그녀가 정말로 그들의 사랑을 막았다면 그때 결혼식장 문턱조차 밟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그들의 사랑을 무너뜨린 진짜 원인은 한지음이었다.시작도 끝도 모두 그 여자 때문이었고 이유영이 보여준 그 차가움도 한지음의 딸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이건 재앙이야.”진영숙은 한지음과 이온유를 묘사할 마땅한 단어를 찾을 수 없었다. 이건 그야말로 재앙이었다.“그래서 이 일은...”시윤이 말을 이어가지 않았지만 진영숙은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왜 이유영이 강이한에게 그렇게 냉담했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여자라면 알 수 있다. 이유영이 감당한 고통과 아이가 겪었을 고통이 어떤 것인지.이유영이 강이한을 미워한다면 그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진심 어린 증오일 것이다.지금의 이 미움은 다시는 돌아보지 않고 영원히 등을 돌리겠다는 의미였다.“배준석은 왔어?”“배준석 도련님은 지금 해외에 나가 있어서 파리에 없습니다.”진영숙은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눈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이 무슨 의미인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너무도 사랑스러웠던 그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어떻게 그토록 냉정할 수 있었단 말인가?’너무 갑작스러운 진실 앞에서 진영숙은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아이의 존재는
임소미는 풍산 그룹에서 돌아오는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착한 이유영을 바라보는 임소미의 눈에는 많은 걱정이 담겨 있었다.“풍산 그룹에 다녀온 거야?”“네.”“진영숙을 만났어?”임소미는 진영숙이 풍산 그룹에 있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정말이지 귀신처럼 따라붙는 여자였다.강이한이 이유영의 인생에서 간신히 사라진 지금, 진영숙은 파리에 머물며 떠날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다.강이한이 이유영을 위해 희생하지만 않았다면 진영숙은 이미 파리에서 쫓겨났을 것이다.“네.”진영숙의 이름이 언급되자 이유영의 얼굴은 금세 아무런 온기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차가워졌다.“앞으로는 만나지 마.”임소미의 말에는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이유영이 강씨 가문의 모든 사람과 더 이상 얽히지 않길 바랐다.과거를 떠올리면 더 이상 얽힐 이유도 없었다.“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하지만 저도 더 이상 그 사람들 때문에 상처받는 일은 없을 거예요.”“내가 걱정하는 거 알면 됐어.”임소미의 목소리에는 묵직한 아픔이 깃들어 있었다.이유영이 겪어야 했던 시간을 떠올리자 가슴이 아려왔다. 그 많은 고통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정말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진영숙은 너무나도 잔혹했다.“오늘 그 여자가 월이를 만나러 왔다는 얘기를 듣고...”임소미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아이 이야기만 나오면 두 사람 모두 가슴 깊은 상처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한때 이유영은 강씨 가문에 있으면서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하지만 정작 그녀를 비난하던 사람들은 이유영이 실제로 임신했고 그 아이가 강이한의 아이였다는 사실조차 몰랐다.그리고 그 소문을 퍼뜨린 장본인은 바로 진영숙이었다. 그녀는 직접 이유영의 뱃속 아이의 생명을 끊었고 이유영을 향한 악의적인 말들을 세상에 퍼뜨렸다.그 모든 사실을 생각하면 임소미는 도무지 진영숙을 용서할 수 없었다.그녀는 너무나도 악의적이고 혐오스러웠다.“그러게요.”진영숙이 아이를 만나러 왔다는 말에 이유영과 임소미는 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