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이 안 좋을 때 더 까다로워질 텐데….’유영은 이런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서류를 펼쳤다.“요청하신 대로 수정한 방안입니다. 한번 확인해 보세요.”박연준은 서류를 펼치고 대충 훑어보았다.그 모습을 보고 있는 유영은 긴장한 얼굴로 침을 삼켰다.뭔가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남자에게서 풍기는 강렬한 카리스마 때문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퇴짜를 맞으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유영은 혼란스러웠다.“감기 걸렸어요?”갑작스러운 질문에 유영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네?”예상치 못했던 질문에 잠시 당황한 그녀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찬바람을 맞았더니 그런 것 같네요.”남자는 말없이 다시 시선을 서류로 돌리고 한 장씩 뒤로 넘겼다.오기 전까지 자신만만했던 유영이었지만 점점 어두워지는 그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불길한 예감부터 들었다.박연준에게 퇴짜를 맞게 된다면 아마 입찰 때 심사도 통과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이대로 진행하죠. 잘했어요.”유영이 당황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이대로 통과한 건가?“토… 통과인가요?”“또 수정하고 싶어요?”“아… 아니요!”더 이상의 수정은 사양하고 있었다.이미 며칠 사이에 십 년은 늙어버린 기분이었다. 남자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아까까지 표정이 어둡던 남자가 웃고 있으니 유영은 더 불안했다.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큰 키 때문에 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가요.”“어디를요?”어딜 같이 간다는 거지?“병원에 가요.”남자가 먼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유영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같이 일을 했지만 아직 남자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그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그가 강성건설 대표라는 것과 성이 박씨라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그런데 이름도 모르는 거래 업체 대표가 그녀를 병원에 데려다준다고?“상태가 많이 심각해 보이네요. 주사라도 맞지 않으면 오후에 있을 최종 심사에 참여하지 못할 것 같은데 이런 기회를
유영은 차에 오른 뒤로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 병원에 거의 도착할 때쯤에는 온몸에 한기가 돌면서 떨렸다.옷을 두껍게 입었는데도 한기가 느껴질 정도면 전형적인 고열 증상이었다.“추워요?”귓가에 남자의 사무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유영은 피곤한 듯, 눈을 잠깐 뜨고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녀는 당장이라도 이불 속으로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더니 남자가 겉옷을 벗어 그녀의 몸에 덮어주고 있었다.유영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잠들어 버렸다.병원에 도착한 뒤, 문 비서는 초조한 기색으로 박연준의 눈치를 살폈다.“대표님, 제가 할게요.”박연준이 소매를 걷어올리고 유영을 안으려 하자 문 비서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했다.남자는 싸늘한 눈빛으로 자신의 비서를 힐끗 바라보았다.문 비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요즘 이유영 씨에 대한 여론이 뜨겁습니다. 오해가 생길만한 상황은 피하시는 게….”“문 비서가 안고 들어가면 이상한 소문이 안 생길 것 같아?”문 비서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사실 유영이 지금 누구와 함께 있든 그건 걸어다니는 화제거리였다.물론 상대가 박연준이라면 오히려 그의 눈치를 봐서 기사를 안 낼 수도 있었다.청하시에서 박연준은 저승사자로 유명했다. 강이한이 대외적으로 부드러운 이미지라면 박연준은 냉철하고 강직한 이미지였다.유영은 고열에 이미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 아마 박연준을 찾아왔을 때도 억지로 버텼던 것 같았다.박연준은 그녀를 안고 응급실로 들어갔다.마침 병원을 나오던 강이한은 그 모습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박연준의 품에 안긴 여자를 노려보았다.반면 박연준은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박연준!”강이한이 이를 갈며 으르렁거렸다.그는 현재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해외의 로열 글로벌 회장과 잠잠하나 싶더니 이번에는 강성의 박연준이 나타났다.대체 아내의 주변에는 왜 이렇게 남자가 꼬이는 걸까?한참이 지난 뒤, 유영은 추위에 잠
그녀의 무덤덤한 반응은 남자의 분노만 더 자극했다.강이한의 준수한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이유영, 당신 이렇게 방탕한 여자였어? 해외에서 돌아온지 얼마나 됐다고 또 남자를 후리고 다니는 거야? 박연준은 대체 이런 여자를 뭐가 좋다고 따라다니는지 몰라!”“그건 잘 모르겠고 내가 좋나 보지.”유영은 이제 그에게 해명하는 것조차 귀찮았다.그런 태도가 강이한에게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졌다.사실 유영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병실에서 눈을 뜨고 옆에 강이한이 있다는 걸 발견했을 때, 전생에 끌려가듯 수술대에 오르던 기억이 되살아난 것이다.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고 두 사람은 누구도 지지 않으려고 서로를 노려보았다.“참 할 말 없게 만드는구나, 당신은! 이러면서 이혼할 때 재산분할까지 해달라고?”“잘못을 해도 당신이 먼저 했는데 위자료를 요구하는 건 당연하잖아?”유영이 당연하다는 듯이 반문했다.결국 분을 못 이긴 강이한은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유영은 침대에 머리를 기댄 채, 씁쓸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수액이 끝난 뒤, 유영은 조민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조민정은 시간이 좀 남았다면서 같이 밥을 먹고 강성건설로 가서 박연준과 만나기로 했다.오후에는 박연준과 함께 최종 입찰 심사 현장으로 가기로 했다.차에 오른 유영은 바깥을 바라보며 조민정에게 물었다.“밥은 어디서 먹어요?”어쩐지 점점 더 시내와 멀어지는 느낌이었다.조민정은 그녀를 힐끗 보고는 대답했다.“순정동 별장으로 갈 거예요. 바로 거주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해뒀거든요.”“순정동이요?”유영이 화들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순정동은 청하에서도 유명한 부자 동네였다. 5백만 평의 넓은 부지에 별장 단지 세 곳이 전부였고 거기 사는 입주민은 신분이 알려지지 않은 신비의 인물들이라고 들었다.그런데 순정동으로 간다고?조민정이 말했다.“회장님 지시예요. 소은지 씨네 집에 계속 있으면 이상한 사람들 때문에 서로 안 좋은 영향만 받으니까 순정동에 거처를 마련하라
순정동.전에 말로만 들었을 때는 막연하게 호화 단지라고만 생각했는데 직접 와보니 왜 그렇게 많은 부자들이 이곳으로 오길 희망하는지 알 것 같았다.별장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유영이 보기에 이곳은 단단한 성채에 가까웠다.여왕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은 상상해 봤을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외삼촌은 언제 여길 구매했대요?”유영이 물었다.그때는 청하 시민 중에 구매자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해외에 거주 중인 외삼촌이 이곳을 소유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회장님은 세계 각지의 가치 있는 부동산에 투자를 많이 하셨습니다. 사실 잊고 있었던 곳인데 유영 씨가 거주할 곳이 필요하다고 하니까 집사가 생각해 낸 곳이 이곳이에요.”유영은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조민정을 바라보았다.“고용인들도 어제 모집했어요. 급하게 치우느라 미흡한 점도 많을 텐데 그건 이해해 주세요.”부자들은 다 이럴까?이렇게 좋은 땅과 집을 소유했으면서 존재조차 잊고 있었다니.유영은 저절로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여기 오기 전까지 외삼촌한테 이렇게 귀한 선물을 받아도 되나 고민했던 그녀였는데 지금 얘기를 들어보니 걱정할 것 하나 없었다. 기억도 못했던 곳을 갑자기 내어주었다는 건 그만큼 중요도가 떨어진다는 얘기였다.“미흡한 점이라뇨. 나한테는 아주 감지덕지죠.”유영이 말했다.홍문동으로 돌아가지만 않는다면 어디든 좋았다.식사가 끝난 뒤, 유영은 옷을 갈아입으러 옷 방으로 들어갔다.옷장을 열자 신세계가 펼쳐졌다. 물론 강이한도 그녀에게 사치품을 많이 설명했지만 이곳에는 세계 각지의 명품을 다 모아놓은 백화점을 떠올리게 하는 스케일이었다.“유영 씨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시즌 상품마다 한 벌씩 구매했대요. 앞으로 좋아하는 스타일 있으면 꼭 말해달라고 하시더군요.”“다 좋아요!”유영이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싫을 리가 없었다.예쁜 옷을 싫어할 여자가 어디 있을까!“외숙모랑 유라는 소박하게 입고 다녔던 거 같은데 외삼촌이 이번에 신경을 많이 썼네요.”유영이 감개무량한
정유라가 갑자기 자원봉사를 간다고 아프리카행을 선포한 뒤, 외삼촌은 모든 애정을 유영에게 쏟아부었다. 그녀를 데리고 각종 중요한 자리에 참석했고 온갖 보석과 액세서리를 사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유영은 세강 일가에게 아직은 자신과 정국진의 관계를 밝히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이런 명품 차를 끌고 다니는 걸 강이한이 안다면 미심쩍게 생각하고 조사에 착수할 게 분명했다.물론, 강이한은 이미 정국진을 조사하고 있다는 것을 유영은 모르고 있었다.그는 오해로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자신과 10년을 동고동락한 여자가 갑자기 변심하고 다른 남자에게 간다는데 이유도 모르고 당할 사람이 아니었다.결국 유영은 조민정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조민정은 회장님 지시라고 딱 잘라 말했다. 유영은 그제야 조민정은 정국진의 말을 가장 우선으로 따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입찰 현장.유영은 박연준과 함께 자리했다. 박연준의 반대쪽에는 강이한과 조형욱이 자리했다.분위기는 좀 삭막했다.강이한은 조형욱에게 눈길을 보냈지만 조형욱은 고개를 푹 숙이고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다.유영이 박연준과 함께 입찰 현장에 나타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강이한을 포함해서 조형욱마저도 그녀가 박연준의 까다로운 심사를 통과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강이한은 분노에 치를 떠는 반면, 유영은 덤덤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베이지 톤의 깔끔한 정장은 그녀의 유려한 이목구비와 차분한 분위기를 더욱 매력적으로 돋보이게 했다.몇몇 회사들에서 설계 도면을 제출했지만 모두가 심사 탈락이었다.그만큼 정부에서 동교 신도실 개발을 중시하고 있다는 뜻이었다.잠시 후, 박연준과 강이한이 설계 도면을 가지고 단상으로 올라갔다. 유영은 긴장한 얼굴로 박연준을 바라보았다.반면 박연준은 차분한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핸드폰에서 문자 알림이 뜨면서 유영의 집중력을 분산싴켰다.확인해 보니 강이한에게서 온 문자였다.“나가서 얘기 좀 해!”유영은 박연준 옆으로 고개를 살짝 틀고 싸늘한 시선으로
강이한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무조건 이기는 싸움이라고 생각했는데 실패한 것이다. 결과가 나온 순간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바닥에 던졌다.두 달이나 열심히 준비했고 모든 디자인 인력을 동원했다. 심지어 해외에서 엘리트 디자이너를 고용하기까지 했는데 결과는 참패였다.박연준에게 패한 게 아니라 전혀 승패에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아내 유영에게 패배했다.박연준이 제출한 설계 도면은 유영의 작업실에서 제출한 원본이었다.“대표님!”조형욱이 다급히 그를 불렀다.유영은 기분 좋게 박연준과 악수하고 있었다.강이한이 씩씩거리며 회장을 떠나던 순간 그녀는 주체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남은 작업은 문 비서와 상의해서 진행하면 됩니다.”박연준이 부드럽게 말했다.“감사합니다!”이건 그녀가 따낸 첫 번째 큰 거래였고 보란 듯이 성공하면서 자신감도 붙었다.“같이 식사할래요?”“좋죠.”유영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앞으로 대 고객이 되실 분인데 밥 정도는 당연히 같이 먹을 수 있었다.강이한의 강요로 전업주부로 전락했던 여자가 그를 딛고 일어선 첫걸음이기도 했다.강이한은 주차장으로 걸어가며 어떻게 하면 이 괘씸한 여자를 응징할까 생각했다.그런데 박연준과 함께 나와 그의 차에 타는 모습을 본 순간, 이성의 끈이 툭 하고 끊어져 버렸다.뒤를 따르던 조형욱은 멀어지는 박연준의 차를 보며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쫓아가.”강이한이 차갑게 명령했다.준수하던 얼굴은 보기 흉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한편, 박연준의 차에 탄 유영은 공손한 말투로 그에게 물었다.“좋아하는 레스토랑 있어요? 저는 외식을 많이 하지 않아서 어디로 가야 할지 종잡을 수 없네요.”전에 강이한과 사이가 좋았을 때도 외식할 때면 전부 그의 취향에 맞췄다.지금 생각해 보면 참 씁쓸한 기억이었다.전에는 시댁의 갑질에 그와 밖에 나올 수 있다는 것 자체로도 좋았고 어디를 가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그래서 외식해서 뭘 먹었는지 맛은 어땠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이
유영은 죄책감에 얼른 사과했다.“죄송해요.”“유영 씨 잘못은 아니죠.”박연준의 말투도 싸늘했다.강이한은 이미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유영은 지금 안 내리면 그가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어쩔 수 없이 말했다.“밥은 제가 나중에 사드릴게요.”그 말을 끝으로 유영도 차에서 내렸다.폭발 직전인 강이한에 비해 박연준은 시종일관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유영이 내리자마자 문 비서는 재빨리 근처에서 다른 차를 불러왔다.차에 오르기 전, 박연준이 물었다.“그냥 이 차 타고 갈래요?”유영은 화들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이런 관심은 별로 원하던 바가 아니었다.어느새 그녀의 뒤로 다가온 강이한이 팔짱을 끼고 주도권을 주장하고 있었다.반면 박연준은 비웃음을 가득 머금은 얼굴로 강이한을 바라보며 말했다.“너도 참 많이 변했구나.”강이한이 버럭 화를 내기 전에 박연준은 차를 타고 멀리 떠나버렸다.고개를 돌린 유영은 차가운 눈빛으로 남자를 쏘아보았다.하지만 그와 싸우기는 싫었기에 가볍게 그를 지나치려는데 남자가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았다.“거기 서!”그는 유영이 최소한의 해명은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한편 뒤늦게 나온 조민정이 현장을 보고 다급히 유영에게로 다가왔다.“집에 갈까요?”“네.”모른 척 뒤돌아서려고 하는데 손목에서 강한 힘이 느껴졌다.유영은 담담한 눈빛으로 강이한을 바라보며 말했다.“이거 좀 놔줄래?”그녀의 덤덤함에 강이한은 더 큰 분노가 치솟았다.그는 그녀를 이끌고 자신의 차에 억지로 태웠다.“출발해!”“당신은 정말 미쳤어!”그 말을 끝으로 남자가 다가와서 그녀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유영이 분노와 수치심에 몸서리치며 손을 번쩍 든 찰나, 남자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물었다.“둘이 차에서 뭐 했어?”“그게 무슨 상관이야! 읏….”갑작스러운 키스에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익숙한 느낌이었다.예전에는 참 좋아했었는데 이 입술로 다른 여자를 애무했다고 생각하니 구역질이 올라왔다.하지만 남자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
그들은 절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이렇게 부드럽게 달래주는 것도 결국은 한지음에게 시망막을 기증하게 하기 위한 연기일 뿐이었다.저울은 이미 한지음에게로 기울어져 있었다.그렇게 비난했던 여자를 부드러운 말로 달랠 만큼 중요했던 거겠지.물론 그런 거라면 유영은 사양이었다.식탁은 유영이 좋아하는 음식들로 풍성하게 차려졌다.“왜 안 먹어?”강이한이 물었다.그의 눈에서 선명한 짜증이 보였다.“독을 풀었을지 어떻게 알고 먹어?”유영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들이받았다.지난 생이 떠올랐다. 그때도 그와 함께 저녁을 먹고 다신 눈을 떴을 때 수술실에 누워 있었다.그러니 어찌 편한 마음으로 그와 밥을 먹을 수 있을까?강이한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야?”그는 자신이 인내심이 강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유영의 매몰찬 행위가 점점 더 그를 극한으로 몰아갔다.유영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내가 왜 이런다고 생각해?”저쪽에서 온갖 술수를 부려가며 공격해 오는데 가만히 당하고만 있으란 말인가!남자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마사지하며 뭐라고 하려던 순간, 문밖에서 진영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난 네가 다음 달에나 돌아올 줄 알았어.”“할머니 생신이신데 당연히 와야죠.”“아이고 착해라.”평소의 진영숙답지 않게 부드러운 목소리였다.예전에도 한번 경험해 본 적 있었는데 다른 여자의 목소리는 그녀가 못 들어본 목소리였다.하지만 강이한은 상대를 아는 눈치였다.그는 조심스럽게 유영의 눈치를 살피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밖에서 그 여자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제가 여기 오는 건 좀 경우에 어긋나지 않아요?”유영은 진영숙이 어떤 인물을 데려왔는지 그 인물의 인성을 알 것 같기도 했다.다 왔으면서 경우에 어긋난다니! 정말 전형적인 여우들이 쓰는 멘트 아닌가?그녀는 비꼬는 듯한 눈빛으로 강이한을 바라보았다.진영숙의 목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걔 요즘 나가서 살아. 걱정 마.
엔데스 명우는 떠났다.소은지는 주위 공기가 묘하게 달라진 것을 느끼며 자신을 감싸안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소은지는 마음 깊숙이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봐요?”소은지의 말투엔 불만이 희미하게 묻어나왔다.소은지는 누구에게도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자기 일에만 충실하며 조용히 살아가길 바랐다.심지어 이유영이 주위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를 보며 결혼에 대한 생각도 없었다.그런 소은지가 아무런 잘못 없이 이런 소용돌이에 휘말렸으니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현우는 소은지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쥐며 조용히 말했다.“당분간 그 사람은 만나지 마요. 설유나의 상태가 심각해요.”현우의 말투에는 묵직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엔터스 가문은 지금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하지만 현우는 여전히 엔데스 명우의 주변에 모든 일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특히 그것이 소은지와 연관된 문제라면, 그 관심은 배가 되었다.설유나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은 소은지 역시 알고 있었다. 설유나가 엔데스 명우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그렇기에 현우의 경고가 더 깊게 와닿았다.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명우가 강압적으로 나설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현우의 말에 담긴 경고를 느낀 소은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현우는 바빴다.엔데스 명우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우도 반산월을 떠나야 했다. 현우는 소은지 곁에 한 사람을 남겨두고 갔다.“추민기!”현우는 늘 곁을 지키던 추민기를 소은지의 보호자로 남겨두었다.그것은 명우로부터 소은지를 보호하려는 현우의 세심한 배려였다.떠나기 전, 현우는 추민기에게 분명히 당부했다. 소은지가 어디를 가든 한 발짝도 떨어지지 말고 따라가라고....벽산 별장.이유영은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겉으론 평온해 보였지만, 그 이면에서는 여전히 복잡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었다.장혜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그제서야
그때 엔데스 명우는 그렇게 말했다.하지만 그가 말했던 ‘결혼’이란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소은지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었다.“소은지!”엔데스 명우의 눈빛에는 위험한 기운이 번뜩였다.소은지는 담담히 말했다.“윤아를 구하는 건 내겐 어렵지 않은 일이야.”“조건은?”소은지가 입을 떼려는 순간, 명우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소은지는 그 짧은 눈빛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설유나의 상황은 이제 더는 미룰 수 없을 만큼 절박해졌다.소은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부탁해 봐.”주변의 공기가 순간 멎어버린 듯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소은지의 말을 듣고 숨을 멈췄다.배천명은 소은지를 바라보며 더욱 위험한 기운을 드러냈다.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소은지가 미쳤다고 생각했다.아니고서야, 파리의 엔데스 가문 여섯째 도련님에게 이런 무모한 요구를 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한 걸까? 이건 너무도 위험한 도전이었다. 그 순간, 엔데스 여섯째 도련님의 눈빛에는 위험을 넘어선 야수 같은 날카로움이 담겼다.당장이라도 소은지를 산산이 조각낼 기세였다.하지만 소은지에게선 위협의 기색조차 엿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도발적인 눈빛으로 명우를 직시하며 여유롭게 비웃었다.긴 시간이 흘렀다.모두가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할 무렵, 드디어 명우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정말 뻔뻔하군.”“뻔뻔한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지. 여섯째 도련님, 그래서 내 요구를 들어줄 수 있어?”여섯째 도련님의 ‘무릎’은,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그의 자존심 그 자체였다. 그러나 명우가 과거에 자신에게 저지른 일을 떠올리면 무릎을 꿇는다고 해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물론 소은지도 알고 있었다. 그가 소은지의 요구를 받아들일 리가 없다는 것을.설유나가 그의 마음속에서 아무리 소중한 존재라 해도 무릎을 꿇는 일만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이곳 파리에서 엔데스 명우가 그런 굴욕을 당한다는
일이 여기까지 진행된 마당에 강이한은 이유영이 전기봉을 찾아낸 후 자신이나 박연준에게 넘기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지금의 이유영은 자신과 박연준에게 끝없는 증오를 품고 있었다.“나가봐!”강이한의 눈빛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이 문제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이유영은 ‘연서’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된 순간부터 감정이 완전히 폭발해 버렸다. 박연준과 자신의 사이에 어떻든 간에, 이제 이유영은 더 이상 둘 중 누구도 믿지 않았다.신시욱이 나갔다.서재에 홀로 남겨진 강이한은 연거푸 담배를 피워 물었다. 반 갑 넘게 태웠지만 마음속 불안과 짜증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이유영...”강이한은 이유영의 이름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목소리에는 깊은 상처가 묻어 있었다.이유영을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가슴속 공허함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이유영이 남긴 모든 말은 이미 충분히 명확했다.이유영은 말했다.지난 생 마지막 순간 무슨 일이 있었든, 설령 한지음이 모든 대가를 치렀더라도 그것은 당연한 결과라고.한지음이 이유영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해도 이유영에게는 여전히 용서란 존재하지 않았다.이유영은 전혀 주저 없이 용서하지 않을 것임을 명확히 보여주었다.과거에 자신이 이유영에게 준 상처만큼 지금의 이유영은 잔인했다. 이 또한 당연했다.잔인함...사실 따지고 보면 이유영을 탓할 자격도 없었다. 강이현 역시 과거 이유영에게 품었던 증오 이상을 느꼈으니까.하지만 적어도 이유영의 눈엔 잔인함으로 비췄다.그러나 이유영이 본 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이제 이유영은 무슨 말을 들어도 더는 믿지 않을 것이었다.이유영은 이제 강이현을 자신의 세계에서 철저히 끊어내 버렸다.그야말로 냉정하고 단호하게.어두운 서재에서 강이한의 눈에는 깊은 상처가 가득했다....파리의 상황 역시 심상치 않았다.이유영은 뒤에 정씨 가문이 있었기에, 이유영은 돌아온 후 비교적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반면 소은지 쪽은... 엔데스 명우가 다시 반산월
전기봉.지금은 아주 중요한 때다.‘전기봉’이라는 이름이 언급될 때, 이유영의 눈빛에 살벌한 차가움이 서려 있었다.그 차가움은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낼 듯 날카로웠고 그 서늘한 기운은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전기봉.서주에 있을 때, 이유영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지금 박연준의 손에 있지 않다는 것을.이유영이 박연준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전기봉이 박연준의 손에 있었다면 지금쯤 강이한을 상대로 이미 어떤 행동을 취했을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서주에 머물렀던 그 시간 동안, 박연준은 강이한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이는 전기봉이 아직 그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전기봉은 결정적인 인물이 분명했다. 이유영은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모든 것이 뒤엉켜 버렸다.완전히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서주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유영은 지금 백산 별장에 머물고 있었지만, 결코 한가롭게 있을 수가 없었다.특히 엔데스 가문의 사람들 모두가 문서의 절반이 강이한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로는 더욱 그랬다.엔데스 명우와 엔데스 현우뿐만 아니라 엔데스 가문의 다른 몇몇 주요 인물들, 예를 들어 엔데스 운빈조차도 강이한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박연준은 아직 전기봉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박연준은 전기봉을 찾는 와중에도 강이한과 엔데스 가문을 예의주시해야 했다.강이한도 마찬가지였다. 이유영이 신지수에게 대체 무엇을 줬길래 강이한 곁에 있기도 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강이한은 문서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와중에 신씨 가문까지 경계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서주 전체가 떠들썩했다.신씨 가문의 아가씨가 곧 강이한과 결혼할 거라고.크리스탈 별장의 서재.신시욱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강이한을 바라보며 말했다.“전기봉을 찾으려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찾더라도...”신시욱은 말을 차마 끝마치지 못했다. 하지만 강이한은 그 의미를 충
월이는 정말 사랑스럽고 얌전한 아이였다.임소미는 월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집안의 보물인 월이는 집안 사람들과도 무척 친하게 지냈고 말투까지 귀엽기 그지없어 가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아침 식사 후.여진우는 이유영을 서재로 데려갔다.두 사람 사이에는 평소와는 다른 긴장감이 감돌았다.“앞으로 무슨 계획이야?”여진우가 입을 열었다.계획. 그 한마디에 이유영은 고요히 숨을 고르며 생각에 잠겼다. 이 모든 일은 이미 일어났고 이유영은 눈앞의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이유영의 마음도 변화하기 시작했다.변화라는 단어로는 설명이 부족했다. 이유영의 인식 전체가 송두리째 뒤흔들렸기 때문이다.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이유영이 차분히 여진우의 물음에 답했다.“난 계획이 있어.”이 일은 이유영이 직접 처리하고 싶었다.그게 박연준의 일이든, 아니면 강이한의 일이든.여진우의 얼굴에 순간 심각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이유영은 지나치게 차분했다. 그 차분함 속에는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듯했다.“오빠.”“응?”“오빠는... 이미 다 알고 있었지?”강이한은 예전에 이유영에게 경고했었다. 박연준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정씨 집안으로 돌아오고 여진우는 또다시 한번 이유영에게 경고했었다. 강이한도 좋은 사람이 못 된다고.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두 사람이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이유영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경고 뒤에 이렇게 거대한 비밀과 음모가 숨겨져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10년... 그 오랜 시간 동안 도대체 어떻게 그런 치밀한 계획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이유영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여진우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그 사람들이 한 여자 때문에 그런 일을 벌였을 줄은 나도 몰랐어.”여진우는 담담히 사실을 말했다.사실, 모두가 서주에서 지내고 있었지만 서로 마주친 적은 없었다. 만약 한 번이라도 만났었다면 박연준과 강이한의 정체는 의심받았을 거고 두 사람에 대한 이유영의 믿음 또한 계속 유
“네, 유영이가 전한 바로는 그래요.”“...”그렇다면 지금 이유영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할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과거에는 알 수 없던 진실이 눈앞에 명확히 드러난 지금, 그 혼란스러움이 어찌 가슴을 뒤흔들지 않을 수 있을까? 소은지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강이한과 백연준, 이유영에게 정말 너무한 것 같아요.”그 10년 동안 소은지는 늘 궁금했다. 강이한이 이유영을 그렇게 좋아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왜 그의 곁에 있을 때 이유영은 늘 그렇게 힘들어 보였는지.당시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이 상황을 이제야 모두 알게 되었을 때, 소은지의 마음 또한 고통스러웠다.강이한은 왜 그런 선택을 했던 걸까?“10년이라는 세월은 단지 한 사람만을 위해 흘러간 게 아니었을 거야.”현우는 의중을 알 수 없는 어조로 답했다.“아니라고요?”“그러기엔 10년은 너무 긴 시간이에요.”만약 단지 대체품으로 삼으려는 목적이었다면 그 긴 세월 동안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소은지는 아마 지금과 다른 상황을 목격했을 것이다.강이한은 한지음을 위해 이유영에게 상처 줬고 박연준은 이유영에게 잘해줬지만, 이유영과 결혼할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그렇다.정말로 사랑했다면 어떻게든 이유영과 결혼하려고 했을 것이다. 몇 년간 파리에 머물렀던 동안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결혼하려고 했을 것이다.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박연준은 결혼을 강행하려 하지 않았다.백연준은 이유영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진실을 알고 나니 모든 의미가 변했다.이제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어떤 행동을 취하든 아무 의미도 없었다.단지 이유영을 대체품으로 여겼기에 박연준은 누구보다도 이성적일 수 있었다. 그는 이유영이 연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유영과 결혼하려하지 않은 것이었다.“맞아요, 10년은 너무 긴 시간이죠. 그동안 분명히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그래서 강이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유영이한테 상처를 줄 수 있었던 거예요.”한지음을 위해서, 한
전화기를 내려놓은 후.배천명은 불안한 눈길로 엔데스 명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음울하게 빛나며 더없이 어두웠다.스피커폰으로 통화하며 권수미의 말을 모두 들은 것이 분명했다.“여섯째 도련님!”남자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얼음처럼 차갑고 위협적이었다. 그는 손에 담배를 물고 연달아 깊은 연기를 내뿜었다. 설유나의 상태는 이미 위험한 상태에 다다랐지만, 소은지를 제외하고는 이식할 수 있는 사람을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었다.상황은 이제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소은지는 차를 몰아 반산월의 반대편으로 향했다. 엔데스 현우의 차는 넓은 마당에 주차되어 있었다. 소은지는 차 문을 힘차게 닫고 밖으로 내려섰다.집 안으로 들어가자, 엔데스 현우가 잠이 덜 깬 듯한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어젯밤부터 줄곧 집에 있었던 모양이었다.소은지가 돌아온 것을 보고는 얼굴에 드리웠던 표정을 조금 거둬들이며 말했다.“왔어요?”“네.”“아침은 먹었어요?”“아직이에요.”소은지는 고개를 흔들며 엔데스 현우 쪽으로 걸어갔다.자연스레 현우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집사들은 서둘러 소은지 앞에 식기를 차려냈다. 풍성하게 차려진 아침 식사를 바라보던 소은지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자신이 없더라도 이곳 사람들은 이미 습관적으로 소은지가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해 두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엔데스 현우는 조용히 식사를 이어 나갔다.현우가 아무리 그렇게 엄숙한 분위기를 풍겨도 소은지는 그에게 겁을 내지 않았다. 엔데스 명우와는 달랐다.2년간 엔데스 명우와 대립하며 소은지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자연스럽게 그를 향한 두려움이 자리 잡았다.그렇다고 하더라도 소은지는 단 한 번도 엔데스 명우 앞에서 그 두려움을 내비치지 않았다.그래서 매번 엔데스 명우가 소은지를 보며 이를 갈아도 결국 실패로 끝나곤 했다.소은지가 엔데스 명우를 미워하는 만큼 마찬가지로 엔데스 명우도 소은지를 증오하고 있는 게 아닐까?“설유나는 어때요?”남자가 무심하게 물었다.소은지는
“...”“뭐, 그래도 괜찮아. 마지막 순간을 평온하게 보낼 수 있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을 테니까.”“넌 정말 잔인한 여자야!”명우의 목소리는 더 이상 억누를 수 없는 분노로 차 있었다.이것이 바로 엔데스 명우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소은지의 모습이었다. 더없이 잔인한 여자였다. 과거엔 설선비에게, 그리고 지금은 설유나에게...“그래, 나 잔인해.”소은지가 담담히 인정했다.그렇다면 엔데스 명우는 어떤가? 엔터스 가문에서 태어나 모든 것을 누리며 자랐고 가문의 권력을 가지지 않아도 평생 풍족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스스로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쟁취해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 건지 알 리가 없었다.그가 망쳐버린 건 단순히 누군가의 사업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소은지가 잃어버린 건 자신이 온 마음을 쏟아 쟁취해낸 그녀의 삶 그 자체였다.“그러니까 앞으로 조심해. 알겠어?”소은지가 가볍게 경고했다.“꺼져!”“...”소은지는 차분한 표정으로 명우를 바라보더니 옷을 단정히 여미고 차에서 내리려 했다. 내리기 직전, 소은지는 엔데스 명우를 돌아보며 말했다.“설유나를 잘 숨겨.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 순간조차 내가 고통스럽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엔데스 명우의 눈빛은 폭풍이 일었다.하지만 소은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빨리 차에서 내려 사라졌다.좁은 차 안에 차가운 기운이 짙게 드리워졌다. 소은지... 좋아. 이렇게 나오겠다는 거지?...소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배천명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소은지는 옷의 주름을 정리하며 배천명에게 위태로운 미소를 던졌다.그리고 자신의 차로 걸음을 옮겼다.뒤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은 마치 불태우려는 듯 강렬했다.차 안.배천명은 잠시 엔데스 명우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여섯째 도련님.”“설유나는 어때?”엔데스 명우는 설유나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소은지의 말처럼 엔데스 명우는 어쩔 수 없이 설유나를 파리 밖으로 내보내 숨길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사람이 바
이번 일로 인해 엔터스 회장님이 엔데스 명우를 혐오하게 되더라도 소은지 또한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간신히 얻어낸 기회마저 허무하게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그러나 이 남자의 차가운 위협에도 소은지는 여전히 태연하고 당당했다. 소은지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난 전혀 상관없어!”“...”데스 명우는 소은지의 뻔뻔한 태도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내가 왜 이렇게까지 살아가는지 알아? 잘살아 보겠다고? 우스운 소리 하지 마.”그랬다.‘잘살아 본다’는 말은 소은지의 세계에서는 그저 우스운 농담일 뿐이었다.소은지는 느릿하게 손톱을 살피며 남자의 날카로운 얼굴선을 손끝으로 천천히 훑었다.“예전에 말하지 않은 건 내 실수였어.”“...”“엔데스 명우, 넌 내 인생에서 너무 많은 걸 망가뜨렸어! 네 곁에 있으면서 깨달은 게 있어. 네가 있는 한, 난 한순간도 평온할 수 없어. 내가 죽는다 해도 네 가죽 한 겹은 벗기고 갈 거야!”소은지의 말이 이어질수록 명우의 눈빛은 점점 얼음처럼 차가워졌다.남자의 손아귀는 점점 강해졌고 소은지는 숨이 막힐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소은지는 목이 조여오는 고통 속에서도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지금 당장 날 죽여봐. 장담하건대, 내일이면 넌 파리에서 쫓겨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야.”지금은 엔터스 가문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그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파리를 떠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이다.남자의 손에 더 강한 힘이 실렸고 눈빛은 더욱 잔혹해졌다.소은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엔데스 명우를 바라보았다. 눈빛에는 도발적인 웃음이 가득했고 그 도발은 처음 조은지를 곁에 둔 순간부터 계속되어 왔다.무엇이 소은지를 이렇게 끈질기고 강인한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엔데스 명우는 소은지를 길들이기 위해 수많은 방법을 동원했지만, 그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어떤 방법을 써도 무용지물이었다. 소은지가 질식으로 정신을 잃어가던 순간, 명우는 소은지를 세게 밀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