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전화 반대편에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응했다.그리고 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강이한이 사진을 보내왔다.이유영은 핸드폰을 루이스에게 건네며 말했다.“이 사진을 한번 감정해 주세요!”‘그렇지. 진짜인지 가짜인지 감정해 보면 알겠네.’루이스는 이유영의 핸드폰을 건네받아 힐끔 한번 보았다. 한 번이었지만 남자인 루이스도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동공이 축소되고 심장이 바짝 쪼여왔다.너무 잔인했다.“이건?”“설명하기 어려워.”소은지라고 말하기에는 이유영은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이유영은 소은지가 정말 이런 처지에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차라리 이 사진이 가짜이기를 바랐다.하지만 정국진 곁에 오랜 시간 있었던 루이스한테는 이런 사진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루이스는 입을 열었다.“이 사진은 진짜입니다.”이유영은 깜짝 놀랐다.‘진짜라고?’이유영이 말을 하기 전에 루이스는 엄숙한 말투로 계속 말을 이었다.“사진을 보아하니 찍은 지 얼마 안 된 사진인 것 같습니다.”“그런 것도 알아볼 수 있어요?”“그래도 믿음이 안 가시면 제가 전문적인 곳에 감정을 맡기겠습니다.”“그렇게 해주세요!”이유영은 가슴이 턱턱 막혔다.이유영은 비록 루이스를 항상 믿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루이스가 그렇게까지 말했다고 해도 여전히 요행을 품고 있었다.이번만큼은 진짜가 아니길 빌고 또 빌었다.그리고 루이스가 조금 다른 결과를 가져오기를 바랐다.만약 진짜라면… 소은지 지금의 상황은 도대체 어떤지?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이유영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이었다.“네. 알겠습니다.”온 오전 이유영은 넋이 나가 있었다.회의 진행 중에 조민정은 이유영 컨디션이 안 좋은 것을 보고 그녀가 회의가 끝나고 처리할 수 있게 열심히 회의 내용을 기록했다.하지만 이유영은 사무실에서도 좀처럼 주의력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소은지가 이유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그 누구도
비록 눈이 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시력에 엄청난 손상을 입혔다.이것 때문에 이유영이 회사로 복귀하기 전, 외삼촌은 회사의 모든 등을 다 눈에 자극을 적게 주는 어두운 빛으로 바꾸게 했다.회사뿐만 아니라 백산 별장도 마찬가지였다.하지만 그래도 이유영은 대다수 시간에 빛을 가리는 안경을 써야 했다. 지금까지도 이유영은 자주 운전할 수 없었다. 특히 저녁에는 더했다.왜냐하면 저녁에는 잘 안 보이기 때문이다.“설마 제가 안경을 썼나 안 썼나 감시하러 오신 건 아니죠?”이유영은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소군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니죠. 저도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니에요. 그리고 유영 씨 곁에 사람이 그렇게 많은 데 제가 신경 쓸 필요는 없죠.”이건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지금 이유영 곁에는 일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챙겨주는 사람도 전문적인 사람이 지켜보고 있었다.조금이라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다른 건 몰라도 임소미의 잔소리는 이유영을 머리 터지게 할 것이다.“제가 성형 수술을 잘하는, 의술이 아주 뛰어난 의사를 한 분 아는데 유영 씨한테 추천해 드릴까요?”이유영은 말이 없었다.“피부 회복 분야에서 성공한 사례가 아주 많은 분이세요. 한번 해보지 않을래요?”피부 회복이라, 이유영 몸에는 확실히 아직 손 봐야 할 흉터들이 많았다.이 흉터들의 회복 가능성이 아주 높은 건 다 눈앞의 소군리 선생님의 치료 덕분이었다.하지만 이분은 외과 전공이었다. 당시에 피부 회복 이런 정형외과 쪽에는 더 나은 선생님이 안 계셔서 바로 수술을 하지는 않았다.지금 소군리가 추천한 사람은 의술 면에서는 당연히 믿음직스러웠다.하지만 이유영은 답했다.“괜찮아요!”“쯧, 설마 유영 씨 정말 이런 화상투성이인 몸으로 박 대표님께 시집가려는 건 아니겠죠?”“…”“유영 씨는 그 흉터들로 자신에게 청하시에서 입은 상처들을 기억하게 하려는 거예요? 아니면 박 대표님더러 기억하게 하려는 거예요?”소군리의 직설적인 말에 이유영은 마음이 철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내가 입은 상처
사람들의 생각이 그랬지만 이유영의 생각은?박연준 본인의 생각은?“너무 오지랖이 넓으시네요!”이유영은 상냥하지 않은 말투로 소군리에게 말했다.“저는 지금 오지랖을 부리는 게 아니라 유영 씨를 걱정하는 거예요!”소군리의 말투는 전례 없는 엄숙한 말투였다.이유영은 그저 침묵을 지켰다.이유영은 이런 말에 뭐라 답해야 할지 전혀 몰랐다.소군리는 이유영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강이한이 나타날 줄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어요. 지금 상황이 조금 복잡해졌지만, 유영 씨 마음속에는 저울을 지녀야 해요.”뭐는 할 수 있고 뭐는 할 수 없는지를 가늠하는 그런 저울.소군리의 귀띔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음이 철컹하였다. 이유영은 그제야 강이한의 출현, 소은지 사건의 연루, 그리고 외삼촌과 박연준 사이의 이상한 변화, 이 모든 것들로 하여 자기가 도대체 어떤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는지 정확히 감을 잡았다.소군리가 떠나자, 루이스가 돌아왔다.얼굴색이 안 좋은 루이스를 보고 이유영은 그가 아무 말하지 않아도 대충 일의 결과를 짐작할 수 있었다.“진짜예요?”비록 대충 짐작은 했지만, 이유영은 그래도 참지 못하고 물어보았다.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이었다.“네! 합성이 아닙니다.”이유영은 제자리에 굳어버렸다.원래 얼굴색이 안 좋은 이유영은 루이스의 말을 듣고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이건 이유영에게 어마어마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었다.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소은지, 강이한! 이 두 이름은 지금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연결은 이유영과 박연준 사이를 부단히 갈라놓고 있다.이유영은 깊게 한숨을 들이쉬고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래도 눈 밑에 드리운 복잡한 심경을 감출 수 없었다.한참 지나서야 이유영은 다시 눈을 떴다.“루이스.”“네.”“정말 방법이 없나요?”소은지의 소식에 관해 물은 것이었다.‘강이한 쪽은 이렇게 쉽게 은지 소식을 얻었는데 정말 우리 쪽에는 아무런 방법이 없는 걸까?’루이스는 이유영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두 가지 가능
점심 식사 시간이 되었다.우지가 가져온 시커먼 약을 보고 이유영은 저도 모르게 온몸 신경이 다 팽팽해졌다. 아주 쓴 맛이었다.“아가씨.”우지는 약을 이유영에게 건네주었다.“안 먹으면 안 돼요?”이유영이 아무리 견강한 사람이라도 해도 이 시각 오랫동안 먹은 쓰디쓴 약을 보고 내적 거부를 참을 수 없었다.우지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안색을 하고 말했다.“사모님께서 아가씨 몸의 흉터들 다 없어지는 날까지 이 약들은 반드시 드셔야 한다고 하셨습니다.”“흉터들과 상관이 있어요?”“네, 당연합니다. 사모님께서 걱정이 많으십니다.”“...”“매번 아가씨 몸의 흉터들을 볼 때마다 사모님께서는 몰래 눈물을 흘리십니다.”마치 그 상처들은 자기 몸에 난처럼 임소미는 슬퍼했다.2년 전 이유영이 돌아왔을 때, 임소미는 한동안 감정을 이기지 못했다. 매번 이유영이 힘들어하는 것을 볼 때마다 임소미는 아주 슬프게 울었다.지금 이유영은 샤워할 때마다 임소미를 피해 다녀서 임소미는 흉터들을 본 차수가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임소미는 여전히 그녀의 흉터들을 관심하고 있었다.외숙모가 자기를 걱정하고 관심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우지의 입에서 외숙모가 눈물도 흘린다고 들으니, 이유영도 따라서 마음이 아팠다.“고마워요. 우지 씨.”“사모님은 아가씨가 건강하게 잘 지내길 바랍니다.”우지는 말을 보충했다.이유영은 가슴이 조여왔다.눈이 그윽해진 그녀는 우지가 마저 말을 하기도 전에 약을 받아 고개를 들며 한꺼번에 다 먹었다. 여전히… 아주 썼다!하지만 지금 입보다 더 쓴 것은 그녀의 마음이었다. 입안의 그 쓴맛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이번에는 손쉽게 약을 다 먹은 이유영을 보고 우지도 한시름 놓았다.“먼저 돌아가세요.”이유영은 약그릇을 다시 우지에게 돌려주었다.우지는 그릇을 건네받고 고개를 끄덕이었다.우지가 떠난 후 사무실에는 이유영 혼자만 남았다. 그녀의 미간에는 진한 심중함이 스쳤다.‘지잉’ 핸드폰이 진동했다.전화번호를 보는 순간 이
그래서 이유영은 박연준에 대해 어느 정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지금 안 만나주면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점심 식사 시간, 음식은 여전히 박연준이 갖고 온 것이었고 다 이유영이 좋아하는 음식들이었다.하지만 오늘따라 이유영이 무미건조하게 먹는 걸 박연준은 알아차렸다.“왜요? 음식이 입에 안 맞아요?”“아니에요.”“그럼 무슨 일이에요?”박연준은 이유영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회사에 문제가 조금 생겼어요. 그 일 생각하고 있었어요. 죄송해요.”이유영의 말이 끝나자, 박연준은 얼굴빛이 심각해졌다.“최근 로열 글로벌에서 연속 여러 개의 큰 프로젝트를 따냈다면서요. 참 수고 많았어요. 근데 유영 씨 그래도 쉬어가면서 일 해요.”이유영이 로열 글로벌 본사에 돌아온 이후부터 그녀는 프로젝트마다 다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한다는 걸 박연준도 알고 있었다.그리고 그녀의 노력은 짧은 2년 동안에 회사 전체 직원들의 인정을 받았다.심지어 이유영 곁에 있는 사람들도 다 느꼈다.이유영은 고의로 자기를 이렇게 바쁘게 만들었다. 사람이 바빠지면 잡생각 할 시간조차 없었다. 지금의 이유영이 바로 그렇다.“알겠어요.”이유영은 덤덤한 말투로 답했다.박연준은 이유영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왜 한숨을 쉬어요?”“난 지금 엄청 심각한 문제를 생각하고 있어요.”“무슨 문제를 생각하는데요?”갑자기 엄숙해진 박연준을 보고 이유영도 덩달아 마음이 조여들었다.두 사람 눈이 마주치는 순간, 박연준의 눈은 한없이 그윽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도대체 유영 씨가 언제쯤 한번 주동적으로 저한테 찾아와 줄지 생각 중이었어요.”‘주동적으로 박연준을 찾아간다고?’이 말을 들은 이유영은 순간 표정이 굳어졌다.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제야 생각이 났다… 이 2년 동안 이유영은 정말 쉴 새 없이 바삐 돌아쳤다. 이유영이 바쁜 이유로 매번 박연준이 그녀를 찾으러 왔었다.그리고 바쁜 나머지 그녀는 심지어 박연준의 사무실에 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저는…”
비서는 표정이 안 좋은 이유영을 보고 순식간에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그리고 다음 순간, 바로 이유영의 말소리가 들렸다.“그 꽃 버려주세요.”“네, 네! 알겠습니다.”“그리고…”이유영은 비서를 한눈 보더니 눈빛에는 까다로움이 스쳐 지나갔다.“인사팀에 가서 석 달 치 급여 정산하세요.”“대표님 지금 저 해고당하는 건가요?”비서는 이유영의 말을 듣고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이유영은 찡해 나는 미간을 문지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몸에는 차가운 기운을 뿜었다.비서는 이런 이유영을 보고 더 뭐라 해야 할지 몰랐다. 비록 억울했지만 그래도 고분고분 꽃을 들고 나갔다.근 2년 동안, 이유영은 항상 일 처리에 있어서 매정했다, 특히 주변 사람들의 업무태도에 대해서는 무척 엄격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조민정이 들어왔다.“대표님.”“무슨 일이에요?”“무엇 때문에 갑자기 그렇게 화가 나셨습니까? 유 비서 방금 대표님 때문에 엄청 겁을 먹었습니다.”“그 애 강이한 쪽 사람과 만났어요. 조 비서도 모르고 있었어요?”이유영의 말투는 매우 엄숙했다.조민정은 깜짝 놀랐다.이유영한테 있어서 강이한은 그녀의 신경 줄을 부서지게 하는 그런 존재였다. 그래서 강이한 곁의 사람에 대해 이유영은 소식조차 전해 듣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아까 그 비서는 이시욱이 준 라벤더꽃을 받았다. 이건 틀림없이 이유영의 마지노선을 건드렸다.“죄송합니다. 제가 아랫사람한테 제대로 얘기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유비서도 억울합니다. 그 애 집에 할머니도 계시는데 대표님께서…”“됐어요. 다음엔 절대로 봐주지 않아요.”“네.”조민정은 이 대답을 듣고서야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사실 이유영 곁에 있는 사람들은 그녀가 아무리 변했다고 해도 절대로 그렇게 매정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아까 그 비서를 해고한다고 한 것도 그저 화가 나서 한 말이었다.온 오후… 이유영은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이유영은 애써 강이한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하지만 소
“그래.”강이한과의 전화를 끊은 이유영은 마치 얼음 저장고에 있는 것 같았다.머릿속에는 온통 강이한이 물어 본 ‘만약 소은지가 없었더라면 당신은 평생 먼저 나한테 보자는 얘기를 하지 않을 거야?’ 이 말만 떠올랐다.강이한의 말이 맞았다.소은지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평생 강이한을 다시 상대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그리고 지금 이유영의 심리적인 문제를 만든 게 누군데?십 분 뒤, 강이한이 왔다.이시욱이 이유영을 모시러 올라왔다. 아까 그 유비서는 라벤더 사건의 영향을 받아 도통 이시욱을 들여보낼 엄두가 안 났다.“제발 저희를 곤란하게 하지 마십시오. 저희 대표님은 그쪽을 절대 만나주지 않을 겁니다.”유 비서는 난감한 상황 때문에 거의 울 지경이었다.조민정 비서가 도와준 덕분에 겨우 붙잡은 직장인데 유 비서는 이 타이밍에 다시 이유영의 마지노선을 터치하고 싶지 않았다.이시욱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유영에게 전화를 걸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이유영이 걸어 나왔다.얼굴색이 별로 좋지 않은 이유영을 보고 유 비서는 이시욱 때문에 불쾌하신 줄 알고 말했다.“대표님, 이 사람이 계속 대표님을 만나겠다고 하십니다. 저도…”“마저 일 보세요.”유 비서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이유영은 차갑게 비서의 말을 끊었다. 이유영의 말은 유 비서에게 상이나 다름이 없었다.엘리베이터 안에서 이시욱은 이유영의 유니크한 안경을 힐끔 보았다.그러고는 차 키를 이유영에게 건넸다.“뭐에요?”“도련님 지금 술을 조금 드셨습니다.”그래서 지금 강이한이 운전을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그리고 두 사람이 만나는 자리에 이시욱은 당연히 함부로 낄 수가 없었다.이유영은 이마를 찌푸리며 결국은 차 키를 넘겨받았다.지하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이유영은 시각 효과가 선명하게 떨어진 것을 느꼈다. 2년 전 몸을 회복한 후, 이유영은 이런 지하 주차장에 오는 걸 제일 안 좋아했다.너무 어두웠다.지금 이유영의 삶에는 확실히 불편한 점들이 많았다. 너무 강한 불빛은 이유영의 시력에 상
이유영은 미간을 찌푸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아니면 우리 그냥 여기서 얘기해!”“싫어!”이유영은 가슴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가슴은 벌렁벌렁했고 홧김은 온몸에서 불타올랐다. 진짜 소은지가 아니었다면 이유영이 이렇게 인내심 있게 강이한을 상대할 일이 전혀 없었다.차는 지하 주차장에서 빠져나왔다.나오고서야 이유영은 밖에 지금 비가 내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심지어 비가 적지 않았다. 원래 시력이 안 좋은 이유영이 지금 이런 날씨에서 운전한다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었다.차는 아주 늦은 속도로 내 달렸다. 심지어 미등, 전조등까지 다 켰다.“나 속이 좀 불편한데 좀 더 빨리 가줘.”뒷좌석에 앉은 강이한은 이런 느릿느릿한 거북이 속도가 매우 마음에 안 들었다.하지만 강이한의 속이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 술을 먹은 후라서 이유영의 운전은 그를 멀미 나게 했다.원래 표정이 안 좋은 이유영의 얼굴은 강이한의 불평불만을 듣고 더 안 좋아졌다.“그럼, 당신이 운전할래?”“당신 나랑 같이 콩밥 먹고 싶구나?”음주 운전해서 걸리면 엄청나게 처벌을 받아야 했다.이유영은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모든 집중력을 다 앞의 도로에 집중시켰다.비는 점점 더 세졌다.차 안의 내비게이션은 계속해서 앞쪽의 도로를 안내했고 와이퍼는 끊임없이 차창을 닦고 있었다.이유영은 바짝 긴장하며 운전하고 있었다. 특히 옆으로 차량이 ‘휭’ 하고 빠르게 지지 갈 때마다 이유영은 핸들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꽉 주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이유영의 등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이유영은 도원산 별장까지 어떻게 운전해 왔는지 모를 정도였다.차에서 내릴 때 그녀의 다리는 후들후들 떨렸다. 오늘과 같은 날씨에 운전하는 게 이유영에게 얼마나 큰 심적 충격이 되었는지 안 봐도 뻔했다.그리고 이럴 때 면은 이유영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강이한의 별장은 독채였다. 다른 별장들과 꽤 멀리 떨어져 있었고 인테리어는 고풍스러웠고 좀 옛날 시대감이 있었다.
소은지의 냉정한 태도와 엔데스 명우의 거칠고 격렬한 분노는 극명한 대조를 보였다. 소은지는 지나칠 정도로 차분하고 무관심해 보였다.엔데스 가문의 일원으로 수많은 일들을 경험해 온 엔데스 명우조차도 지금 소은지가 풍기는 차가움에 섬뜩해질 정도였다.“정말 냉정한 사람이네.”남자는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내뱉으며 목소리에는 위험이 가득했다.소은지는 차분히 답했다.“미안하지만,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나 일에 대해선 공감이 잘 안돼.”일이 직접 자신의 삶에 닥치지 않는 한, 그 감정을 완벽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이건 냉정함이나 무관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소은지는 설선비, 설유나와 특별한 관계도 없었다.그들 사이에 관계가 있다고 해도 결코 유쾌한 사이는 아니었다.그러니 설선비와 설유나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소은지는 그저 냉정했을 뿐이다.더군다나, 소은지와 엔데스 명우 사이에 있었던 수많은 일들을 생각하면, 설선비와 설유나가 겪은 일에 어떠한 연민이나 슬픔도 느낄 수 없었다.그 순간, 갑자기 목덜미에 강렬한 힘이 느껴졌다. 엔데스 명우의 손은 마치 소은지의 목을 으스러뜨릴 듯 강하게 조였다.분명한 건, 엔데스 명우는 설선비와 설유나의 죽음이 모두 소은지의 탓이라고 믿고 있었다.설선비는 소은지의 고소로 궁지에 몰려 죽게 된 것이었고 설유나는 소은지의 외면으로 죽음을 맞이했다고 생각했다.“소은지, 너 같은 여자는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도 없어!”남자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잔혹했다.팍!뺨을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듯 공간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엔데스 명우가 손을 놓는 순간, 소은지는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앉았다.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소은지는 흔들림 없는 고요한 기운을 유지하고 있었다. 소은지에게는 조금의 동요도, 당황스러움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숨을 삼켰다. 현장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엔데스 명우의 사람들에게 통제당한 상태였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존재가 되었을 때, 그 사람에 대한 소식이 진짜든 가짜든 간에 상대방은 긴장하기 마련이다.의심할 여지가 없었다.박연준의 사람들은 이온유가 강이한에게 있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고 있었다. 만약 강이한이 이 소식을 접하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아마도 강이한은 그의 사람들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의심을 지우지 못할 것이다. 박연준은 강이한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강이한이 가진 가장 큰 약점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이런 식으로 소식을 흘리기로 결심한 것이었다.“명심하겠습니다!”문기원은 고개를 깊이 숙이며 대답했다.박연준은 낮고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유영이를 강이한의 곁에 둘 순 없다.”강이한을 찾을 수 없다면, 그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도록 만들어야만 했다.그동안 서주가 강이한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박연준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이유영을 서주의 소용돌이에 더 깊이 휘말리게 할 수는 없었다. 이미 이유영을 그곳으로 끌어들인 것만으로도 박연준은 마음 깊이 후회하고 있었기에 더 이상 이유영을 위험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다.강이한의 주변은 결코 안전하지 않을 것이다.“알겠습니다.”문기원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박연준의 의도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비록 박연준은 말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문기원은 오랜 세월 박연준의 곁에서 함께하며 박연준이 이유영을 끌어들인 일을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사람은 종종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 처하고 나서야 자신의 마음을 깨닫게 된다.박연준 역시 그랬다.그리고 강이한 또한 마찬가지였다....현재 서주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정체된 상태였다. 많은 이들이 강이한을 찾고 있었지만, 그는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듯 보였다.한편, 파리에서도 큰 사건이 벌어졌다.설유나는 엔데스 명우가 적합한 기증자를 찾기도 전에 결국 세상을 떠났다.반산월.남자는 핏발 선 눈으로 소은지를 노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이유영의 곁에 머물러 있겠다고?이것은 이유영이 도저히 믿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강이한은 자기 말이 진심임을 결국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이 지나고 심지어 보름이 지나도 강이한은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저 말없이 이유영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강이한의 존재는 너무나 자연스러워졌다. 하지만 이유영은 여전히 파리에 있는 가족들에게 연락조차 할 수 없었고 서주의 상황도 여전히 알 수 없었다.강이한은 매일 외출했지만, 소문으로만 듣던 그 의사는 고집이 워낙 세서 끝내 마음을 열지 않았다.우천시에서 보름이 지나도록 이유영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다른 의사들로부터 상태를 유지하는 데 그쳤다.강이한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의사를 데려오겠다는 각오로 노력하고 있었다....한편, 서주에서 박연준이 강이한이 이유영을 데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지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그리고 이유영의 두 눈이 완전히 실명했을 수도 있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다.정국진 쪽에서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그 원인은 알프산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라고 했다.“아직도 소식이 없니?”서재 안, 박연준의 목소리에는 날카로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문기원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아직 없습니다.”이유영의 소식은 단 한 마디도 들려오지 않았다. 강이한이 이렇게까지 할 줄이야. 박연준은 예상하지 못했다. 서주가 이렇게 혼란스러운 와중에 강이한이 이유영을 데리고 사라질 줄은.게다가 벌써 보름 가까이 아무 소식도 없이 사라졌다.“대체 어디로 데려간 걸까?”박연준은 미간을 짙게 찌푸리며 중얼거렸다.이 소식을 들은 일주일 동안, 박연준은 밤마다 뒤척이며 이유영의 걱정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이유영의 시력이 원래부터 좋지 않았다. 만약 알프산의 사건으로 인해 시력이 급격히 더 나빠진 것이라면...박연준은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점점 조여 왔다.“찾아볼 곳은 다 뒤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습니다.”박
강이한은 알아챘다. 이유영이 일부러 강이한을 자극하고 있다는 걸.강이한의 불같은 성격을 알기에 일부러 화를 돋워 강이한을 떠나보내려는 의도였다.이유영은 더 이상 강이한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리고 싶었다.“네가 무슨 말을 하든 난 절대 떠나지 않을 거야.”“...”강이한이 설마 다 알아챈 건가?“10년이란 세월이야.”강이한은 10년이라는 시간 속에서는 어떤 관계도 서로를 모를 수 없다고 말했다.10년이었다.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시작됐든 강이한은 이유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이유영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점심 식사.무거운 침묵 속에서 점심시간이 흘렀다. 이유영이 가장 좋아하던 우천시의 지역 요리였지만 강이한과 함께 있다는 이유로 모든 음식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졌다.말을 너무 많이 했던 걸까? 이유영은 오후 내내 강이한과 대화하려 하지 않았다. 강이한이 무슨 말을 해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이유영은 철저히 강이한을 무시하고 있었다.강이한은 우천시에서 가장 유명한 간식거리들을 사왔다. 우천시에 오면 꼭 먹어야 한다며 음식을 내밀었지만, 이유영은 한 입도 손대지 않았다.“유영아.”강이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유영을 바라보며 가슴이 점점 더 답답해졌다.강이한도 알고 있었다.이유영과 얽힌 수많은 일들만으로도 이유영에게 용서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게다가 지금은 연서의 사건까지 얽혀 있으니...이유영의 마음속 상처는 단시간에 치유될 수 없을 만큼 깊었다.“좋은 기분을 유지하지 않으면 눈도 빨리 낫지 않을 거야. 그러면 내 곁에서 빨리 벗어나지도 못할 거야. 잘 생각해 봐.”“...”강이한은 말하면서 싸늘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강이한과 잘 지내지 않으면 강이한을 떠날 수 없다는 뜻인 건가?아니면 이유영의 눈이 다 나을 때까지 계속 곁에 있겠다는 뜻인 건가?“흥!”이유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비웃는 듯한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그럴 시간이 있긴
이 정도도 못 견디겠다는 건가? 그렇다면 이유영은? 이유영은 이전에 강이한의 곁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견디고 참아내야 했던가? 강이한은 그런 기억조차 없는 것처럼 보였다.이유영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손 놔!”“네 상태가 나아지기만 하면, 네가 뭘 말하든 다 받아들일게!”강이한은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모든 것은 이유영의 눈이 나아진 뒤로 미루어야 했다. 지금 이유영의 감정이 더 격해지면 안 됐다. 강이한은 진심으로 이유영이 걱정되었다.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강이한은 답답했다. 이유영을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이 손 놓으라고!”이유영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랭했다.강이한은 이유영의 완강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두 눈이 보이지 않아도 이유영의 단호하고 강한 의지는 뚜렷이 드러나 있었다.가장 진실된 이유영의 모습이었다. 그 순간, 강이한의 머릿속에 지난 생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두 사람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기 시작한 건 아마 이유영이 실명한 이후였던 것 같았다.실명하기 전까지는 어떤 상황에서도 강이한을 믿었다. 그때를 떠올릴수록 강이한의 마음은 점점 더 쓸쓸해졌다. 이유영이 말했듯 이유영은 강이한에게 정말 많은 기회를 주었었다. 하지만 강이한은 이유영이 준 기회들을 한 번도 소중하게 여겼던 적이 없었다.강이한 스스로가 그 기회를 놓친 것이다. 이유영을 조금도 탓할 수 없었다.“유영아!”강이한은 무언가 말하려 입술을 떼었지만,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이유영은 강이한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그러나 이유영이 다칠까 봐 강이한은 결국 손을 놓고 말았다.이유영은 더듬거리며 숟가락을 잡으려 했다.우지와 우현이 이유영을 돕기 위해 다가가려 했지만, 이유영은 냉랭하게 말했다.“모두 나가줘.”“아가씨!”“나 혼자 할 수 있어요.”이유영의 목소리는 약간 떨렸지만, 여전히 차가웠다. 우지와 우현은 더 이상 다가갈 수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존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영아.”강이한은 따스하면서도 아린 눈빛으로 온전히 자신을 밀어내려는 이유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유영을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졌다.두 사람의 과거는 차마 떠올릴 수도 없을 만큼 뼈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더욱이 말로 꺼낼 수도 없는 상처였다.입 밖으로 꺼낼 때마다, 이미 아물어가는 흉터를 억지로 다시 뜯어내는 기분이었다. 칼에 찔리는 듯한 고통이 다시 스며들 뿐이었다.하지만 피할 수 없었고 그저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네 눈이 나으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강이한은 무언가를 말하려다 결국 삼켜버렸다.그 목소리엔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이유영은 강이한의 말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게다가 당장 의사를 만날 수도 없었다. 강이한의 말처럼, 그 의사는 정말 괴짜일지도 몰랐다.결국 오늘도 헛걸음이었던 건가?점심 식사 자리에서.“도와줄게.”이유영이 손을 뻗으려는 순간, 강이한이 이유영의 손목을 붙잡았다.그러나 이미 늦었다. 이유영 앞에 있던 컵이 손이 닿자마자 뒤집혀 버렸고 컵 안의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우지와 우현이 서둘러 다가와 물잔을 정리했다.그 사이, 강이한은 이유영을 안아 들어 올렸다. 덕분에 이유영은 물이 쏟아지는 불상사를 피할 수 있었다.강이한은 이유영을 안은 순간, 이유영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똑똑히 느꼈다. 강이한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던 말은 거짓말이 분명했다.어떻게 신경 쓰이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유영아.”이유영은 여전히 어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지난 생에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데 익숙해졌던 이유영도 여전히 어둠은 공포였다.사실, 어둠 속의 삶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찬란한 햇빛 아래서 살아가길 원하니까.다양한 색채를 보고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면서 말이다. 이유영 역시 그런 것들을 소중히 여겼던 사람이었다.하지만 지금은...강이한의 기억 속엔 지난 생 이유영이 어둠 속에서 느꼈던 절망이 여전히 선명히 남아 있었다.그때의 강이한은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차
강이한은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소문으로만 듣던 ‘염 선생’을 만나러 간 것이다.그 시간 동안 우지와 우현은 휴대전화를 빌리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찾아다녔지만, 아무 소득도 없었다. 강이한답게 이미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아침에 나갈 때부터 강 선생님의 사람들이 우리를 감시했어요. 외부 사람들과 연락할 기회가 전혀 없었어요.”우지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강이한이 이유영을 둘러싼 모든 외부 연락을 완벽히 차단하려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이유영은 어둠 속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눈앞이 캄캄한 데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우지가 이유영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아가씨.”“네?”“적어도 부인께는 아가씨 소식을 전해드려야 하지 않을까요?”임소미를 말하는 것이었다.우지와 우현은 임소미가 이유영을 얼마나 아끼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누구보다도 가장 애타게 이유영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 확실했다.아이를 잃은 뒤로, 임소미는 긴 세월을 고통 속에서 보냈다.그리고 현재 이런 상황까지 겹쳤으니, 임소미의 심정이 얼마나 초조하고 불안할지는 뻔한 일이었다.이유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네.”이유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강이한에게 할 말은 이미 다 했지만, 그 남자는 끝내 뜻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밖에 비가 아직도 오고 있나요?”“네.”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지만, 우지의 대답을 듣고 나니 우천시의 비가 얼마나 지독한지 새삼 실감이 났다.이유영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빗소리는 복잡하고 어지러웠던 마음마저 차분히 가라앉히는 힘이 있었다.강이한이 돌아왔을 때, 이유영은 처마 아래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우지가 걸쳐준 망토를 두른 채, 조용히 비가 오는 풍경과 녹아든 모습이었다.강이한의 몸에서는 축축한 빗물 냄새가 났다.강이한이 다가오자마자 이유영은 그 냄새를 감지했고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하지만 이런 자신의 반응이 너무 싫
이곳이 싫어진 이유가 강이한과 함께 있기 때문일까? 한때는 이런 곳에서 강이한과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게 꿈이었던 적도 있었다.“우지를 불러줘!”이유영은 강이한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을 이제는 견딜 수 없었다.이유영은 이 모든 것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강이한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아까 말했잖아. 우지랑 우현은 네가 좋아하는 음식을 사러 나갔어. 여기 지역은 아침으로 특산 요리가 많거든, 그래서 주방에는 따로 요청하지 않았어.”“...”이유영은 잠시 말을 잃었다.그리고 그저 조용히 앉아 있었다.하지만 이유영의 이 침묵과 순응은 강이한이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이유영은 차라리 말없이 기다리는 쪽을 택했고 절대로 강이한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예전에 아무리 바쁜 아침을 보냈어도 강이한은 이유영이 아침에 어떤 루틴을 따르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내가 화장실까지 데려다줄게.”“필요 없어.”이유영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이러면 몸에 좋지 않아. 그냥 가자.”이유영은 더 이상 강이한과 실랑이를 벌이기 싫어 화제를 돌렸다.“네가 우지 씨와 우현 씨의 핸드폰을 가져갔지, 그렇지?”강이한은 잠시 멈칫했지만 솔직하게 대답했다.“그래.”“부모님께 내가 어디 있는지는 알려드리는 게 맞지 않아?”이유영의 마음속에는 이미 분노가 쌓여 있었다. 어젯밤 우지가 했던 말을 떠올리자, 감정은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을 정도로 터질 것 같았다.강이한은 여전했다. 여전히 타인의 감정은 조금도 배려하지 않았다. 한지음을 위해 이유영에게 어떤 짓까지 했는지, 그 기억은 이제 이유영에게 있어서 더 이상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고통이 되었다.하지만 강이한은 태연하게 말했다.“이미 쪽지를 남겼어. 네가 눈 치료를 받으러 갔다는 건 부모님도 알고 계실 거야.”“...”“치료가 끝나면 집으로 데려다 줄 거야.”이유영은 강이한의 말을 듣고 차갑게 숨을 몰아쉬었다.“그러니까 지금 우리의 모든 행방을 전부 숨겼다는 거잖아?”이유영의 목소리는 분노로 가득
다음 날 아침, 이유영은 지붕 위에서 여전히 똑똑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밤새 내리던 비는 아직 멈추지 않았다.옆에서 느껴지던 온기 역시 그대로였다. 이유영이 움직이는 기척을 느낀 강이한이 살짝 안으며 말했다.“깼어?”“당장 떨어져!”어젯밤, 도저히 피할 수 없어 잠들었지만, 이 남자는 대체 어디서 이런 뻔뻔함이 나오는 걸까? 이유영이 몸을 움직이려 하자 강이한의 큰 손이 이유영의 손을 단단히 감싸며 태연하게 말했다.“움직이지 마. 춥잖아.”이불 밖으로 팔을 뻗자 싸늘한 한기가 순간적으로 스며들었다.우천시는 여름에 오면 굉장히 쾌적하다고 한다. 전통 가옥은 단열 효과가 뛰어나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했다.강이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있어.”이유영의 짜증과는 반대로 강이한의 목소리에는 묘하게 부드러운 인내심이 배어 있었다.강이한은 마치 오랜 시간 이런 순간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이 시간을 매우 소중히 여기는 것 같았다.하지만 이유영은 속에서 화가 치밀었다.“일어날래? 내가 옷 입는 거 도와줄게!”“우지 씨를 불러.”시야를 잃은 이유영의 성격은 예전보다 한층 더 예민해져 있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여전히 자기 멋대로 행동하고 있었으니, 이유영의 화가 터질 수밖에 없었다.강이한은 태연히 대답했다.“우지와 우현은 나갔어.”나갔다고? 말도 안 돼!우지는 이유영이 강이한과 단둘이 있기를 꺼린다는 걸 잘 알았기에, 늘 둘 중 한 명은 곁에 남아 있으려 했다.“강이한!”그러나 강이한은 이유영의 화난 기색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듯 여유롭게 말했다.“일어나기 싫으면 그냥 나랑 조금 더 누워 있어.”“...”이유영은 비록 자신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강이한의 농담 섞인 말에 자신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은 강이한이 옷을 입혀주는 것을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갑작스러운 상황 같았지만 강이한은 의외로 철저히 준비해 온 듯했다.강이한은 이곳의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