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녀들이 말하던 사람이 갑자기 앞에 나타날지 알았겠나, 소만영과 전예의 웃음소리는 순간 없어지고, 똑같이 못생긴 두 얼굴엔 당황한 기색을 띠며 문으로 들어온 소만리를 쳐다봤다.“너, 여기가 어디라고 와! 너 여태 얼마나 문 앞에 서 있었던 거야. 뭘 엿 들었어!”전예는 말을 하며 일어나, 소만리를 가리키며 고래고래 소리쳤다.소만영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두 눈 크게 뜨고 주의하며 소만리를 쳐다봤다.소만리가 눈썹을 치켜 올리고 웃으며 말했다.“왜? 방금 무슨 하면 안 되는 말을 했길래, 제가 들었을까 봐 두려워요?”“......” 전예는 안색이 변했다.“너....”“제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당신은 분명 소만영의 양어머니죠? 쯧쯧, 그쪽 딸의 성격은 완전 그쪽한테 옮았나 보네. 모 씨 부인처럼 고귀한 여자가 어떻게 소만영 같은 미천한 딸을 낳겠어요. ”“.....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전예는 부끄러움에 화를 못 이겨 소만리에게 손을 쓰려 했다.소만리는 손을 뻗어 전예의 손목을 잡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쳐다봤다.“역시 이 인간들은 하는 짓이 똑같네, 너네는 몰라, 아직도 너희가 친 모녀인 줄 알지! ”이 말을 듣자, 소만영과 전예는 안색이 크게 변했다.“천미랍! 당장 닥치지 못해! ”소만영은 참지 못하고 위협하며 소리 질렀다.주변에 아무도 없자 그녀는 그녀의 험악하고 더러운 본성을 드러냈다.그녀는 이불을 치우고 침대에서 일어나 말했다.“천미랍, 나랑 여기서 이럴 시간에 인터넷에서 난리 난 일부터 처리하는게 좋을걸!”소만영은 의기양양하게 두 손으로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내가 말했지, 나를 상대해봤자 좋을 거 없다고! 네가 그렇게까지 내 남자를 뺏으려 한다면, 인터넷의 모든 사람이 너를 욕하게 만들 거야!”“짝!”소만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만리가 깔끔하게 소만영의 뺨을 때렸다.“꺅!”소만영은 아파서 비명을 지르며 얻어맞은 볼을 만졌다.전예가 잠깐 당황해하더니 곧바로 욕을 하려고 하자 소만리가
“천미랍 네가 감히 날 농락해!”소만영은 완전히 폭발했고, 영상 속에 있던 가냘픈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그녀는 이를 갈며 침구 위에 있던 과도를 들어 소만리의 얼굴로 향했고, 전예는 옆에서 말리지 않을뿐더러 소만영이 앞에 있는 그녀에게 본때를 보여줄 거란 기대를 가졌다.칼이 떨어지기 직전, 소만리는 그녀가 이전에 소만영에 의해 얼굴에 베인 칼자국을 떠올리자 어두운 악몽이 되살아 났다.그녀는 어렴풋이 정신을 차리고 칼끝을 보고는 급히 옆으로 피했다.“어딜 피해!”소만영은 화가 잔뜩 나 다시 한번 과도를 휘두르며 말했다.“천미랍, 내가 경고하는데 그 당시 소만리도 이렇게 얼굴을 망가뜨렸지. 네가 감히 날 건드리다니, 곧 소만리랑 똑같은 고통을 맛보게 해줄게!”소만리는 급히 몸을 피했지만, 전예가 달려와 그녀를 붙잡았다.소만영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피를 보면 미치는 마녀와 같이 얼굴이 흉악스럽게 변하더니 칼을 소만리에게 휘둘렀다.“조심해!”일촉즉발의 순간, 소만리의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기모진이 쏜살같이 달려와 소만리를 품에 꼭 안으며, 한 손으로는 그녀를 보호하고, 한 손으로는 소만영이 들고 있던 과도를 붙들었다.“이게 뭐 하는 짓이야!”그가 이전에 없었던 매서운 말투로 그녀에게 소리쳤다.소만영은 순간 얼었고, 전예도 기모진이 이때 나타날 줄은 생각도 못 했다.“모, 모진아?!”소만영이 말을 더듬으며 설명을 하려는 순간 기모진이 그녀의 손목을 거세게 내리쳤다.그러자 그녀는 중심을 잃고 뒤로 쓰러졌다.뒤에 있는 옷장에 부딪히기 싫었던 그녀는 손에 과도를 들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무의식적으로 벽을 짚으려다가 날카로운 칼날이 그녀의 뺨을 스치고 떨어졌다.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고, 기모진의 품에 안긴 소만리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설마, 어떻게 이럴 수가!분명 내가 착각한 걸 거야, 절대 이럴 리 없어!모진이 가장 싫어하는 게 저렇게 소만리와 똑같이 생긴 얼굴인데!
소만영이 당황해하며 자신의 얼굴을 만지자, 뜨뜻미지근한 액체가 만져졌고, 깜짝 놀라 말했다.“피! 내 얼굴이 피투성이야!”피 묻은 손바닥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소만리는 소만영의 오른쪽 뺨에 칼자국이 나 있는 것을 보자 조금은 경악했지만 이내 속으로 비웃었다.소만영의 얼굴이 망가지는 날이 오다니, 인과응보인 것이다.“만영아, 만영아 무서워하지 마. 모진이 여기 있으니까, 너한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할 거야!”전예가 황급히 그녀를 위로하며 기모진을 언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모진아, 어서 만영이를 의사한테 데려가, 안 그러면 만영이 얼굴에 흉터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전예는 다급한 말투로 말하며 소만영을 기모진의 옆으로 밀었다.소만영은 눈물 맺힌 눈을 들어 여전히 소만리를 안고 있는 기모진을 보며 말했다.“모진아, 내 얼굴, 나 지금 엄청 못생겼지......”“모진아, 왜 아직도 만영이를 데려가서 치료하지 않는 거야? 만영이 이렇게 계속 피를 흘리면 죽을 지도 몰라!”전예는 과장하여 말했다.소만리가 기모진을 쳐다보자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머뭇거리는 것 같았다.하지만 잠시 뒤, 그는 그녀를 껴안고 있던 손을 천천히 떼며 소만영 쪽으로 가려고 하는 듯했다.“하.”소만리가 답답하다는 듯 소리를 내었다.그러자 기모진은 소만영에게로 향했던 눈을 또다시 소만리에게로 돌렸다.“왜 그래요?”“모진씨는 저 신경 쓰지 마세요. 그저 발이 조금 삐어서 그래요. 모진씨는 저 귀한 소만영씨가 피 흘려 죽기 전에 데려가세요.”소만리는 비꼬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고, 전예와 소만영은 매섭게 그녀를 노려보았지만 소만리를 다시 대응하는 게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모진아, 만영이 안색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어, 어서......”“먼저 소만영을 데려가세요.”기모진은 싸늘한 말투로 전예의 말을 끊었고, 몸을 돌려 소만리의 손을 잡고 말했다.“가죠, 정형외과로 데려다줄게요.”“......”소만영과 전예가 놀랬다.소만리는 난처
하지만 너는 단 한 번도 나에게 따스함을 느끼게 해 준 적이 없었어.한 사람의 마음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게 얼마나 그 사람을 아프게 하는지 너는 모르겠지......기모진이 소만리을 데리고 의사를 보러 갔고, 그녀가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는 비로소 안심하는 듯했다.소만리가 아무리 괜찮다고 말을 해도 기모진은 그녀를 집으로 데려다주었다.기묵비가 집에 없는 것을 보자, 기모진은 다소 여유로워 보였다.그는 소만리를 부축해 방으로 들여보낸 뒤 주변을 한 번 훑어보았다.기모진이 무슨 낌새를 눈치 챌 까 걱정했던 소만리가 말을 건넸다.“모진씨, 빨리 병원으로 돌아가서 약혼녀를 돌보세요.”“내가 말했잖아요. 그 사람은 이미 내 약혼녀가 아니라고.”그가 냉담하게 대답했고, 미묘한 시선으로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다음번에 만나면, 모진씨라고 하지 말고 좀 더 친근하게 불러 줄래요.”소만리는 뜻밖이라는 듯 그를 쳐다보며 말을 하려는 순간, 그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그가 휴대폰을 꺼내 보자 순간 얼굴이 경직됐다.그가 전화를 끊은 뒤, 몇 초가 지나지 않아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이번에 그가 전화를 받았는데, 방이 아주 조용해서 소만리는 휴대폰 너머로 한 여자가 다급한 어조로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그녀는 전예의 전화인 것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제가 갈게요. 다시 전화하지 마세요.”기모진은 냉담하게 말한 뒤 전화를 바로 끊었다.그가 침대에 기대 쉬고 있는 소만리를 보며 말했다.“편히 쉬세요, 다시 연락할게요.”그러자 소만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곧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네요.”기모진은 석양 아래 아름다운 얼굴을 몇 초 동안 멍하니 바라보다 비로소 몸을 돌렸다.그는 방을 나와 의식적으로 옆 객실을 둘러봤다.잠시 생각을 하다 그는 천천히 객실 방문을 돌렸고, 문이 잠겨 있지 않은 것을 발견하자 기모진은 방에 들어가지 않고 그저 안을 한 번 둘러보았다.한참을 보다가 발아래에 한 줄기 빛이 들어오는 것을
무슨!기모진의 말에 소만영은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다리에 힘이 풀려 뒷걸음질 쳤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다름 아닌 과거 자신이 천미랍에게 했던 경고와 협박의 말들이었다.“천미랍, 그때 소만리 얼굴을 망가트렸던 사람이 바로 나야. 감히 나한테 대든다면 너도 그와 똑같은 고통을 맛보게 해 줄 거라고!”소만영은 아까보다 얼굴이 더 희게 질려있었고 얼마나 긴장한 건지 심장은 쿵쿵대며 뛰고 있었다. 조금 전 그 말들은 정말 홧김에 내뱉은 말들이었다. 천미랍에게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던 차에 자신의 본모습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자신이 했던 일들을 전부 불어버린 것이었다.기모진은 소만영의 안색과 눈빛의 변화를 살펴보더니 실망 가득한 얼굴로 얘기했다.“너 나한테 그랬었잖아. 만리의 얼굴이 그렇게 된 건 네 아빠인 모현이 사람을 시켜서 그런 거라고.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그런 짓을 한 건 바로 너였던 거야.”“아,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소만영은 기모진의 팔뚝에 매달리면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고개를 내저으며 부정했다.“난 진짜 만리를 다치게 한 적이 없어. 난 진짜 아니야… 난 피만 봐도 기겁을 하는데 어떻게 칼을 들고 만리를 해치겠어? 만리가 군군을 다치게 하는 바람에 아빠가 화가 나서 걔 혼쭐을 내주겠다고 그런 거야. 그 일은 정말 나랑은 상관없어. 모진아, 나 믿어줘. 천리 좀 믿어줘…”천리의 이름이 나오자 그때 그 시절 그 감정이 떠올라 모진은 치밀어오르는 노기를 천천히 가라앉혔다. 그가 내뿜던 싸늘한 냉기가 조금 가시자 소만영은 억울하다는 듯한 어투로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모진아, 날 믿어줘. 날 자꾸 몰아붙여서 어쩔 수 없었어. 내가 그런 몹쓸 짓을 할 이유가 없잖아. 아까는 내가 실수한 거야. 천미랍이 자꾸 날 괴롭히길래 걔 겁주려고 그런 거지. 내가 진짜 그 사람을 해칠 리가 없잖아, 모진아…”소만영은 이 틈에 기모진의 동정을 사려 시도했지만 기모진은 차가운 얼굴로 그녀의 손을 쳐냈다. 사람을 홀릴 듯이 아름다운
전예는 기모진과 소만영의 대화를 다 듣고 있었고, 그녀도 일이 이렇게 탄로가 날 줄은 몰랐다. 그러나 그녀는 애써 소만영을 위로하며 말했다.“만영아, 너 지금 와서 포기하면 안 돼. 기씨 집안 사모님 자리는 네가 가져야지. 이건 단지 지위를 상징하는 의미만 있는 게 아니라 끝도 없는 부를 가져다주는 거라고!”탐욕으로 번들거리는 전예의 눈동자에서 독기가 흘렀다.“천미랍은 엄마한테 맡겨!”소만영은 한동안 분풀이를 하다가 자신의 얼굴 위에 난 상처를 매만지며 말했다.“내가 이렇게 물러날 것 같아? 감히 내 남자를 빼앗으려 하다니, 죽여버리겠어!”그녀의 눈동자는 독기로 가득 차 있었고,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에서 보이는 건 음흉하고 악랄한 간계였다.“흥, 천미랍은 엄마가 손 봐야지. 하지만 엄마가 아니라 사화정이야 해.”……기모진은 병원에서 나와 차를 끌고 어딘가로 향했다. 가는 길 내내 그는 마치 감각과 사고를 전부 잃어버린 꼭두각시 인형처럼 무감각하게 운전하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소만영이 했던 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소만리의 얼굴을 그렇게 만든 이가 소만영이었다니. 하. 기모진은 겉으로는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속으로는 차게 웃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리미티드 에디션인 스포츠카가 한 낡은 아파트 아래에 멈춰 세워졌다. 기모진은 매우 익숙하게 아파트 계단을 올라가서 어느 집 문 앞에 섰다. 그곳은 소만리가 생전에 지내던 곳으로 기모진은 그곳을 두 배의 가격으로 사들였다. 이미 3년이나 지났으니 그녀의 숨결은 남아있지 않지만 기모진은 병적인 수준으로 이곳의 모든 것에 집착했다. 소만리가 그리워질 때마다 그는 묘원으로 가 그녀의 비석 앞에서 혼잣말을 하거나, 그게 아니면 여기로 향했다. 그 모든 게 전부 쓸모없는 짓임을 알면서도, 이미 너무 늦어버렸단 걸 알면서도 말이다,텅 비어버린 집 안. 그가 처음 소만리의 얼굴 위에 칼로 두 번 그어진 흉터를 보게 된 곳이 이곳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녀는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바닥에 쓰러진 채로
본가로 돌아가는 길에 기모진의 머릿속은 조금 전 어머니가 했던 얘기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속도를 높였고, 십여 분 정도 지나 본가에 도착한 그는 차고에 차를 주차해두었다. 차에서 내린 뒤 그는 곧바로 거실로 향했고 입구에 도착해보니 그의 시야에 들어온 건 그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발걸음이 멈췄고, 심장이 두근댔다. 소만리가 고개를 들어 기모진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 그녀는 그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는 마치 유리구슬처럼 맑고 깨끗했다.“전 묵비 씨께서 오신 줄 알았는데, 기모진 씨였군요.”소만리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쿵쾅대던 기모진의 심장은 다시 평온함을 되찾았고,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기묵비 씨를 기다렸나요?”“묵비 씨랑 저랑 여기 같이 오려고 했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하길래 제가 먼저 왔죠.”소만리는 느긋하게 설명했다.“모진씨 때마침 잘 오셨네요. 저랑 묵비씨가 따로 얘기를 전할 필요는 없겠네요.”“무슨 얘기요?”기모진은 소만리의 앞에 서며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고, 기모진의 탐구심 가득한 눈동자를 그녀는 태연하게 마주하며 얘기했다.“저랑 묵비씨 결혼하는 거요.”부드러운 그녀의 말이 기모진의 귓가에 닿고, 심장에 닿았다. 그는 그 말이 이상하게도 굉장히 무겁게 느껴졌다. 순간 호흡이 멈추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기모진 씨는 저랑 묵비씨 축하해 주실 거죠? 어쨌든 묵비씨가 삼촌인데.”순간 굳어진 기모진의 얼굴을 보며 소만리는 환히 웃고 있었다.“사랑하지도 않는 남자랑 결혼하는데, 앞으로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기모진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 게 소만리는 꽤 의외라고 생각됐지만 그녀는 담담히 웃어 보였다.“그럼 기모진 씨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꼭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그녀의 역질문에 기모진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고, 소만리의 웃음은 더욱더 짙어졌다.“제가 알기론 기모진씨 전처인 소
기모진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기묵비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걸 볼 수 있었다. 소만리가 그의 곁을 지날 때 그녀의 단아한 향기가 그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 향은 무척이나 달고 특별한 것이었다.“모진아.”기묵비는 기모진을 보고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한결같이 우아하면서도 여유가 넘쳤고 그가 하는 행동들은 무척이나 신사다웠다. 기모진은 자신의 앞에서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을 차가운 눈빛으로 스쳐 가듯 쳐다보았고, 소만리는 그런 기모진을 힐긋 보고는 고개를 돌려 기묵비를 보며 생긋 미소 지어 보였다.“묵비씨, 저희 들어가요.”“응.”기묵비는 부드러운 얼굴로 미소 짓고는 소만리의 손을 잡고 거실로 향했다. 기모진의 어머니는 통화 중인지 전화를 들고 있었고 소만리와 기묵비가 손을 잡고 다정히 들어오는 모습에 불쾌한 얼굴로 눈을 흘기고는 전화를 끊었다.“어, 묵비씨, 왔어요?”기모진의 어머니는 의미심장한 어투로 말하면서 소만리를 힐긋 쳐다봤다.“정말 이 여자랑 결혼하려고요?”기묵비는 신사답게 미소 지으면서 예의 있게 대답했다.“어른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세요. 이 여자라뇨, 제 약혼녀예요.”“흥.”기모진의 어머니는 우습다는 듯이 냉소를 흘렸고 기모진이 돌아온 걸 보고는 얼른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모진아, 너 들었니? 너도 봤지? 네 삼촌이 네 전처랑 똑같이 생긴 여자랑 결혼한단다! 정말 재밌네.”그녀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고, 막 계단에서 내려오려던 기모진의 할아버지도 그 소리를 들었다.“묵비 씨, 그때 본가로 돌아왔을 때 그렇게 소만리를 챙기던 게 다 이유가 있었네요. 그때 이미 마음에 둔 거죠? 소만리가 죽고 나니 이젠 소만리랑 똑같이 생긴 여자를 어디서 찾아와선 그 여자를 대신하려고, 묵비 씨도 참 대단하네요.”어머니의 말에 기모진은 그때 그날 밤 일이 문득 떠올랐다. 그때 소만리는 기묵비와 가까이 지냈었고 그 모습에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하고 눈에 거슬렸던 게.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은 질투였다. 소만리가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