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갑자기 입을 연 기모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수려한 얼굴에는 서리가 낀 듯했고 눈빛 역시 싸늘하고 날카로웠다.“모진아, 나랑 미랍이는 꼭 결혼할 거야.”기묵비는 태연한 얼굴로 말했지만 그의 말투는 절대적이었다.“전 두 사람 결혼하게 놔두지 않을 거예요.”기모진은 단호한 태도로 바로 대답했고 그의 어투는 기묵비보다 훨씬 더 결연했다. 소만리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미간을 구겼다.“기모진 씨, 지금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쪽이 뭔데 저랑 묵비씨 결혼을 반대한다는 거죠?”기모진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차가운 눈빛으로 소만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지독히도 공격적이었다.“그 얼굴이요, 전 절대 당신이 제 숙모가 되는 걸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그는 단호히 얘기했고 표정은 결연했다. 그에 소만리는 피식 웃었다.“제가 전처분이랑 닮았다고 해서 제가 묵비씨랑 결혼할 수 없다고요? 그럼 기모진씨는 제가 그쪽이랑 똑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하고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기모진은 그녀의 질문을 듣고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둘의 시선이 얽히고 둘 사이에 어떤 미묘한 스파크가 튄 것 같기도 했다.“우리 모진이랑 결혼하려는 생각이야? 꿈 깨!”기모진의 어머니는 굉장히 거만한 태도로 그녀를 비웃으며 말했다.“전국에 우리 모진이한테 어울릴 만한 사람은 모씨 집안의 딸 소만영 뿐이야! 이제 둘은 곧 있으면 결혼할 거야. 너? 흥! 소만리 그 천한 것이랑 똑같게 생겨서는 안 봐도 뻔하지!”기모진은 어머니가 소만리를 모욕하자 불쾌한 듯 미간을 좁히면서 냉랭한 어투로 말했다.“제가 몇 번을 얘기해야 알아들으시겠어요? 모씨 집안하고 결혼 취소했다고요, 전 소만영이랑 결혼 안 해요!”기세등등해져 있던 기모진의 어머니는 자기 아들에게 그 말을 부정당하고는 머쓱한지 얼굴을 붉히면서 그를 설득했다.“모진아, 너랑 만영이 사이에 오해가 있었다는 거 나도 알아. 너도 성질 그만 부려. 만영이가 애까지 낳아줬는데 어떻게 결혼을
소만리는 홀로 소만영이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그녀가 도착했을 때 병원은 사람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모두 고개를 들어 위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소만리 역시 위를 살펴보니 흰옷을 입은 누군가가 난간 위에 앉아있는 게 보였고 그건 소만영이 확실했다.소만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으로 향했다. 그녀는 기모진이 이미 도착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기모진의 모습은 그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그때 심각한 얼굴을 해 보이더니 소만영을 걱정한 게 아니었나? 그렇다면 그는 급하게 어디로 간 거지? 그런 의문들이 이어질 때쯤 그녀의 앞에서 사화정이 통곡하는 소리가 들려왔다.“만영아, 이러지 마. 엄마가 부탁할게. 일단 거기서 내려와!”사화정은 우느라 목소리가 쉬어있었다. 진짜 소만영을 걱정하는 것 같아 보였다. 소만리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쥐면서 앞을 바라보았고, 거기에는 자신의 친부인 모현도 있었다. 그는 가슴이 찢어지게 대성통곡하는 사화정을 붙잡고 한편으로는 소만영을 설득하고 있었다. 말끝마다 우리 아가라고 부르면서 소만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와 사화정 모두 소만영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들이 소중히 생각하는, 친딸이라고 여기는 그녀를.“모진이, 모진이는 아직 안 왔어요?”그때 소만영이 입을 열었다. 작은 목소리, 연약한 모습으로. 그러나 소만리는 그것이 연기임을 알 수 있었다.“모진이 금방 올 거야! 만영아, 꼭 모진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해. 절대 바보 같은 짓 하지 마!”사화정은 울면서 그녀를 설득했다. 당장이라도 소만영에게 다가가 그녀를 끌어내리고 싶은데 혹시 그녀를 자극하게 될까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러나 소만리는 소만영이 차라리 누군가 그녀를 끌어내려 줬으면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연기일 뿐이니까. 그리고 옆에 서 있던 전예는 더 과장스레 울부짖었다.“만영아, 만영아! 너 왜 이리 바보 같아! 왜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에 자신을 벌하는 거야. 그때 너랑 모진이가 결혼하지 못한 건 소만리 때문인데,
소만리가 그 말을 내뱉고 나서 주변의 공기는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오로지 옥상에 부는 가을바람이 얼굴 위를 스쳐 갈 뿐이었다. 사화정은 갑자기 안색을 바꾸면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소만리를 바라보며 얘기했다.“뭐, 뭐라고? 방금 뭐라고 했어!”모현 역시 큰 걸음으로 사화정의 옆에 걸어가서 똑같이 추궁하는 눈빛으로 소만리를 노려보고 있었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내 딸은 여기 잘 살아있는데 3년 전에 죽었다고 저주를 하다니!”소만리는 냉소를 흘리며 사화정의 손을 놓아줬다.“당신 딸 저주한 거 아니에요. 사실을 얘기한 것뿐이지.”그녀는 차분히 말하면서 전예를 가리켰다.“저 여자가 얘기하는 걸 제가 직접 들은 거거든요. 당신들 친딸은 이미 3년 전에 죽었다고.”“뭐라고?”사화정과 모현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빛을 주고받더니 전예를 바라보았다.“헛소리예요!”전예는 얼른 부인했다. 솔직히 당황해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모현 씨, 사화정 씨. 절대 저 여자 말에 속아 넘어가지 마세요. 전 그런 얘기 한 적 없어요.”“천미랍, 도대체 무슨 목적이 있길래 날 키워주신 엄마를 모함하는 거야? 너 설마 내가 우리 엄마 아빠 친딸이 아니란 얘길 하고 싶어서 그래? 그래서 내가 죽는 꼴을 보고 싶단 거지?”소만영은 격분해서 말했고, 전예는 초조한 듯 말하면서 그녀의 연기에 어울려주었다.“만영아, 일단 화내지 말고, 거기서 내려와. 너한테 진짜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너희 엄마 아빠가 얼마나 속상하겠니.”사화정과 모현은 그 말에 다시 걱정스러운 듯 시선을 소만영에게로 옮겼다. 그러나 소만영은 실망한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엄마, 아빠. 저 여자가 한 말 믿는 거야? 내가 정말 엄마, 아빠 친딸이 아니란 말을? 그럼 이젠 내가 죽든 살든 상관없겠네. 그래, 그래…”그녀는 미련 없다는 듯이 쓰게 웃어 보였다.“모진이도 나한테 관심 없고 엄마, 아빠도 이젠 나 신경 안 쓰는데, 내가 더 살아서 뭐 해…”소만영은
“소만리가 악독한 년이면, 그럼 당신 딸 소만영은 뭐죠?”소만리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사람들 시켜서 자기 아들 납치시키고 소만리한테 덮어씌운 건 잊었나 봐요? 기모진이 소만리를 싫어하기를 바라며 다른 사람 팔찌 훔쳐서 소만리한테 덮어씌운 거는요? 사화정 씨, 잘 생각해보세요. 누가 진짜 악독한 년인지.”“너…”사화정은 순간 반박하지 못했다.“내가 안 그랬어요. 난 그런 적 없어…”소만영은 울면서 부정했고 억울하다는 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 모습은 주위 사람들의 동정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천미랍, 도대체 왜 날 모함하는 거야? 나랑 모진이 사이 이간질하고, 내 얼굴 망가뜨리고, 정말 내가 죽어야 만족하겠어? 그래, 네가 바라는 거 내가 해줄게. 지금 당장 여기서 뛰어내린다고!”“안돼, 만영아!”“만영아!”사화정과 모현은 조급했지만 소만리는 우습다는 듯이 냉소를 흘렸다.“그래, 얼른 뛰어. 쓸데없는 얘기는 그만하고.”소만리는 미묘하게 변한 소만영의 안색을 보고 웃었다.“소만영, 뛰라니까. 왜 아직 안 뛰어?”“너…”“내가 저 사람들처럼 멍청해 보였나 봐? 네가 연기하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네가 네 자신을 다치게 할 리가 없지. 너 이러는 거 기모진이 나타나면 네가 원하는 거 얘기하려고 그러는 거잖아.”“…”소만리가 자신의 속내를 전부 파악하고 있자 소만영은 안색이 휙휙 바뀌면서 입꼬리가 떨렸다. 사화정과 모현은 그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소만리를 옆으로 밀쳤다.“천미랍, 너 감히 만영이를 자극해? 너 정말 인성이 바닥이구나!”모현은 화가 나서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르며 손을 들어 소만리를 때리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소만리는 소만영과 전예가 눈빛을 주고받는 걸 보았고, 소만영은 흐느끼는 목소리로 얘기하기 시작했다.“아빠, 엄마. 불효녀라 미안해요. 다음 생에 다시 만나요.”“만영아!”바로 다음 순간, 하늘을 찢을 듯이 날카로운 전예의 목소리가 울렸다. 모현의 손이 내려가기도 전에 그는 사화정과 동시
“만영아! 만영아! 내 소중한 아가!”사화정은 히스테릭하게 울부짖다가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모현의 품 안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 모습에 소만리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미어졌다. 사화정이 자신의 친모였으니까 말이다. 비록 그녀가 자신을 살갑게 대해 준 적이 없더라도 소만리는 사화정과 모현이 잘 지냈으면 했다. 하지만 그 둘은 지금 소만영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그에 소만리는 쓰게 웃었고 이내 생각을 정리했다. 소만리는 기모진이 조금 전 소만영이 뛰어내린 곳에 다다른 것을 발견했다. 기모진은 심각한 얼굴로 건물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곧 몸을 돌려 다시 걸어왔다.“아래층에 있는 베란다 쪽에 떨어졌던데, 크게 다친 것 같진 않네요.”기모진은 덤덤한 어투로 말했지만 소만리는 그의 눈에서 그가 한숨 돌렸음을 읽을 수 있었다. 역시나 그는 소만영을 걱정하고 있었다. 혹시나 그녀가 죽을까 말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소만리의 예상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았다. 소만영은 미리 다 계획해 놓은 거였다. 먼저 지형을 파악하고 뛰어도 안전하겠다 싶으니까 대담하게 “투신”한 거다. 그런데도 소만영은 응급실로 실려 갔고, 사화정도 그때쯤에 깨어나 소만영이 이십여 층에서 떨어진 게 아니란 걸 전해 듣고는 다행이라며 눈물을 보였다. 기모진이 뒤늦게 도착한 걸 보고 사화정은 분노한 얼굴로 그의 앞에 가서 그를 원망했다. “기모진, 너 도대체 우리 딸 언제까지 괴롭힐 작정이니? 걔가 널 위해서 자기 청춘까지 다 받쳤는데, 저런 악독한 년 때문에 우리 만영이를 다치게 해? 소만리 하나로는 부족해서 이제는 천미랍이야? 만영이가 진짜 목숨을 잃기라도 했으면 평생 발 뻗고 잠이나 잘 수 있겠어?”기모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사화정의 질책을 받아내고 있었다. 발 뻗고 잠을 잔다고? 소만리가 떠난 그 날부터 그는 한 번도 편히 잠에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잠시 후 기모진은 의미심장하게 얘기했다.“이제 더는 그녀를 괴롭히고 싶지 않으니까 따님하고 결혼 취소하겠습니다.”“뭐라고? 정말 만
다음 순간, 기모진이 압도적인 기세를 내뿜으며 차에서 내렸다. 차디찬 얼굴을 한 그는 양손이 붙잡혀있는 소만리를 보고는 미간을 좁혔고, 소만리를 경찰들의 손에서 구출해내 자신의 옆에 세워두었다.“소만영이 건물에서 뛰어내린 건 사고였죠. 천미랍씨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제대로 조사하고 사람 잡으셔야죠.”냉랭한 말투와 압도적인 기세였다. 그는 소만리의 어깨를 끌어당기고는 조수석의 문을 열면서 얘기했다.“타요.”지금 이 순간만큼은 기모진의 차가 경찰차보다 나았다. 기모진은 곧 스포츠카를 몰아 그녀를 인적 드문 교외로 데려갔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소만리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쪽이 가장 사랑하는 여자가 저 때문에 건물에서 뛰어내렸는데, 왜 절 도와주는 거죠?”기모진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제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요? 제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가 누군지 알아요?”“저만 아는 게 아니라 경도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다 아는 사실이죠. 그쪽이 가장 사랑하는 여자는 소만영이고 가장 미워하는 여자는 그쪽 전처라는 거.”소만리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기모진은 그녀의 대답에 미간을 구기더니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침묵에 소만리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아까 도와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그쪽도 이젠 사랑하는 여자 곁에 가야죠. 아마 평생 그쪽 없이는 살지 못할 텐데.”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손목이 끌어당겨 졌다. 차가운 체온이 피부를 통해 침투해왔고 그녀의 심장을 감쌌다. 기모진은 소만리의 손목을 붙잡고 그녀의 뒤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그날 저한테 물었었죠? 그쪽이 제 전처랑 똑같게 생겼으니, 저랑 똑같이 생긴 남자랑 결혼해야 하는 거냐고. 지금 대답할게요, 네.”“…”소만리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돌렸고 그의 진지하면서도 알쏭달쏭한 눈빛과 마주쳤다.“하지만 이 세상에 저랑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을 리가 없으니, 당신이랑 결
“풉.”소만리는 실소했다.“가장 사랑한다는 분이 전처인 소만리 씨라고요? 기모진 씨, 농담치고는 정말 하나도 안 웃긴데요.”소만리는 웃고 있었지만 가슴엔 익숙한 고통이 찾아왔다. 잊을 수 없는, 과거 피로 범벅이 된 상처가 다시 떠올랐고 그 모든 기억은 전부 피와 눈물로 가득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뭐라고? 사랑한다고? 사랑의 이면이 미움이라면 그는 정말 그녀를 사랑했었다. 그것도 죽을 만큼! 소만리의 얼굴에 비웃음 섞인 미소가 떠오르자 기모진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맞는 말이에요. 농담 맞아요.”그는 자조했다. 그러나 심장을 도려낸 것처럼 아팠다. 그건 정말 우스운 얘기였다. 그 자신조차 믿을 수 없을 만큼 웃긴 얘기. 그러나 그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그럼 농담도 하셨으니 전 이만 가볼게요.”소만리는 차가운 어투로 말하면서 깔끔하게 기모진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냈다. 그러나 그녀가 몸을 돌린 순간, 기모진이 그녀의 앞을 막아 나섰다.“저한테 뭐 더 할 얘기 있으세요?”소만리가 덤덤히 물었다.“제가 얘기했죠. 다시 만났을 때 제 이름 불러줬으면 좋겠다고.”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얘기했다.“아까 한 얘기, 돌아가서 잘 생각해보세요.”그와 결혼하는 일 말이다. 소만리는 그를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기모진 씨, 저랑 결혼해서 뭐하게요? 제 얼굴 보면 그렇게 미워하던 소만리 씨가 떠오르지 않겠어요? 그럼 싫거나 짜증 나야 하지 않을까요? 뭐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취미라도 있으세요?”기모진은 눈꼬리를 살짝 접으면서 얘기했다.“그럼 제가 자해하는 취미가 있다고 생각하세요.”그는 말을 하면서 조수석 문을 열었다.“여긴 너무 한적하니까 제가 데려다줄게요.”소만리는 눈앞의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차에 올랐다. 누구도 없는 아파트로 돌아온 소만리는 인터넷에서 6년 전 자신과 기모진이 결혼했을 때 찍었던 사진을 검색해봤다. 그때 찍었던 결혼사진을 바라보면서 생각
하지만 기란군과 함께 있었기에 사화정은 어쩔 수 없이 화를 억눌렀다.“미랍 누나.”기란군은 고개를 들어 소만리를 보았고, 그의 희고 깨끗한 앙증맞은 얼굴 위로 드물게 미소가 걸려있었다. 소만리도 기란군에게 미소로 대답했다..“란군아, 잘 지냈어?”“란군아, 너 방금 이 사람 뭐라고 불렀니? 이 사람 알아? 네가 어떻게 이런 나쁜 사람을 아는 거야?”“미랍 누나는 나쁜 사람 아니에요.”기란군은 짙은 눈썹을 잔뜩 구겼다. 아이는 화를 내진 않았지만 얼굴에서 미소가 점점 사라지더니 다시 침울해졌다. “나쁜 사람이야! 이 여자 때문에 지금 너희 엄마 병원에 누워있다고!”사화정은 강경한 어투로 말하면서 눈을 부릅뜨고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소만리를 쳐다보았다.“천미랍, 우리 가족한테서 떨어져. 네가 만영이한테 진 빚, 내가 꼭 갚게 해 줄 테니까.”“예쁜 할머니, 왜 저희 엄마 혼내세요?”염염의 앳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사화정은 그제야 소만리의 옆에 두어 살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서 있다는 걸 발견했다. 소만리를 계속 혼내려 했는데 염염이의 동그랗고 큰 눈을 보자 그녀는 순간 멍해졌다.닮았다. 자신이 소만영을 낳았을 때, 그때 그 아이의 얼굴이랑 닮아있었다.“사화정씨, 뭐 보세요?”소만리가 싱긋 웃으며 얘기하자 사화정은 문득 정신이 들어 염염이를 가리키며 의뭉스레 물었다.“딸이야?”소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맞는데요, 무슨 문제 있어요?”“…”사화정의 눈빛이 변하면서 그녀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소만리의 얼굴을 훑어보고는 냉소를 흘렸다.“흥, 천미랍. 너도 딸 있는 입장인데, 자기 딸이 다른 사람한테 괴롭힘 당하면 얼마나 마음이 아플지 생각은 해봤어? 진짜 내 딸이 엄마 없는 애인 줄 알아?”결국은 또 소만영이 소중하다는 소리였다. 소만리는 싱긋 웃었다.“전 다른 사람이 제 딸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 그런데 사화정씨, 정말 당신이 자기 딸을 제대로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무슨 뜻이야!”사화정은 불만스레 답했다.“또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