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영아! 만영아! 내 소중한 아가!”사화정은 히스테릭하게 울부짖다가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모현의 품 안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 모습에 소만리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미어졌다. 사화정이 자신의 친모였으니까 말이다. 비록 그녀가 자신을 살갑게 대해 준 적이 없더라도 소만리는 사화정과 모현이 잘 지냈으면 했다. 하지만 그 둘은 지금 소만영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그에 소만리는 쓰게 웃었고 이내 생각을 정리했다. 소만리는 기모진이 조금 전 소만영이 뛰어내린 곳에 다다른 것을 발견했다. 기모진은 심각한 얼굴로 건물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곧 몸을 돌려 다시 걸어왔다.“아래층에 있는 베란다 쪽에 떨어졌던데, 크게 다친 것 같진 않네요.”기모진은 덤덤한 어투로 말했지만 소만리는 그의 눈에서 그가 한숨 돌렸음을 읽을 수 있었다. 역시나 그는 소만영을 걱정하고 있었다. 혹시나 그녀가 죽을까 말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소만리의 예상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았다. 소만영은 미리 다 계획해 놓은 거였다. 먼저 지형을 파악하고 뛰어도 안전하겠다 싶으니까 대담하게 “투신”한 거다. 그런데도 소만영은 응급실로 실려 갔고, 사화정도 그때쯤에 깨어나 소만영이 이십여 층에서 떨어진 게 아니란 걸 전해 듣고는 다행이라며 눈물을 보였다. 기모진이 뒤늦게 도착한 걸 보고 사화정은 분노한 얼굴로 그의 앞에 가서 그를 원망했다. “기모진, 너 도대체 우리 딸 언제까지 괴롭힐 작정이니? 걔가 널 위해서 자기 청춘까지 다 받쳤는데, 저런 악독한 년 때문에 우리 만영이를 다치게 해? 소만리 하나로는 부족해서 이제는 천미랍이야? 만영이가 진짜 목숨을 잃기라도 했으면 평생 발 뻗고 잠이나 잘 수 있겠어?”기모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사화정의 질책을 받아내고 있었다. 발 뻗고 잠을 잔다고? 소만리가 떠난 그 날부터 그는 한 번도 편히 잠에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잠시 후 기모진은 의미심장하게 얘기했다.“이제 더는 그녀를 괴롭히고 싶지 않으니까 따님하고 결혼 취소하겠습니다.”“뭐라고? 정말 만
다음 순간, 기모진이 압도적인 기세를 내뿜으며 차에서 내렸다. 차디찬 얼굴을 한 그는 양손이 붙잡혀있는 소만리를 보고는 미간을 좁혔고, 소만리를 경찰들의 손에서 구출해내 자신의 옆에 세워두었다.“소만영이 건물에서 뛰어내린 건 사고였죠. 천미랍씨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제대로 조사하고 사람 잡으셔야죠.”냉랭한 말투와 압도적인 기세였다. 그는 소만리의 어깨를 끌어당기고는 조수석의 문을 열면서 얘기했다.“타요.”지금 이 순간만큼은 기모진의 차가 경찰차보다 나았다. 기모진은 곧 스포츠카를 몰아 그녀를 인적 드문 교외로 데려갔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소만리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쪽이 가장 사랑하는 여자가 저 때문에 건물에서 뛰어내렸는데, 왜 절 도와주는 거죠?”기모진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제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요? 제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가 누군지 알아요?”“저만 아는 게 아니라 경도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다 아는 사실이죠. 그쪽이 가장 사랑하는 여자는 소만영이고 가장 미워하는 여자는 그쪽 전처라는 거.”소만리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기모진은 그녀의 대답에 미간을 구기더니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침묵에 소만리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아까 도와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그쪽도 이젠 사랑하는 여자 곁에 가야죠. 아마 평생 그쪽 없이는 살지 못할 텐데.”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손목이 끌어당겨 졌다. 차가운 체온이 피부를 통해 침투해왔고 그녀의 심장을 감쌌다. 기모진은 소만리의 손목을 붙잡고 그녀의 뒤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그날 저한테 물었었죠? 그쪽이 제 전처랑 똑같게 생겼으니, 저랑 똑같이 생긴 남자랑 결혼해야 하는 거냐고. 지금 대답할게요, 네.”“…”소만리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돌렸고 그의 진지하면서도 알쏭달쏭한 눈빛과 마주쳤다.“하지만 이 세상에 저랑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을 리가 없으니, 당신이랑 결
“풉.”소만리는 실소했다.“가장 사랑한다는 분이 전처인 소만리 씨라고요? 기모진 씨, 농담치고는 정말 하나도 안 웃긴데요.”소만리는 웃고 있었지만 가슴엔 익숙한 고통이 찾아왔다. 잊을 수 없는, 과거 피로 범벅이 된 상처가 다시 떠올랐고 그 모든 기억은 전부 피와 눈물로 가득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뭐라고? 사랑한다고? 사랑의 이면이 미움이라면 그는 정말 그녀를 사랑했었다. 그것도 죽을 만큼! 소만리의 얼굴에 비웃음 섞인 미소가 떠오르자 기모진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맞는 말이에요. 농담 맞아요.”그는 자조했다. 그러나 심장을 도려낸 것처럼 아팠다. 그건 정말 우스운 얘기였다. 그 자신조차 믿을 수 없을 만큼 웃긴 얘기. 그러나 그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그럼 농담도 하셨으니 전 이만 가볼게요.”소만리는 차가운 어투로 말하면서 깔끔하게 기모진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냈다. 그러나 그녀가 몸을 돌린 순간, 기모진이 그녀의 앞을 막아 나섰다.“저한테 뭐 더 할 얘기 있으세요?”소만리가 덤덤히 물었다.“제가 얘기했죠. 다시 만났을 때 제 이름 불러줬으면 좋겠다고.”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얘기했다.“아까 한 얘기, 돌아가서 잘 생각해보세요.”그와 결혼하는 일 말이다. 소만리는 그를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기모진 씨, 저랑 결혼해서 뭐하게요? 제 얼굴 보면 그렇게 미워하던 소만리 씨가 떠오르지 않겠어요? 그럼 싫거나 짜증 나야 하지 않을까요? 뭐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취미라도 있으세요?”기모진은 눈꼬리를 살짝 접으면서 얘기했다.“그럼 제가 자해하는 취미가 있다고 생각하세요.”그는 말을 하면서 조수석 문을 열었다.“여긴 너무 한적하니까 제가 데려다줄게요.”소만리는 눈앞의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차에 올랐다. 누구도 없는 아파트로 돌아온 소만리는 인터넷에서 6년 전 자신과 기모진이 결혼했을 때 찍었던 사진을 검색해봤다. 그때 찍었던 결혼사진을 바라보면서 생각
하지만 기란군과 함께 있었기에 사화정은 어쩔 수 없이 화를 억눌렀다.“미랍 누나.”기란군은 고개를 들어 소만리를 보았고, 그의 희고 깨끗한 앙증맞은 얼굴 위로 드물게 미소가 걸려있었다. 소만리도 기란군에게 미소로 대답했다..“란군아, 잘 지냈어?”“란군아, 너 방금 이 사람 뭐라고 불렀니? 이 사람 알아? 네가 어떻게 이런 나쁜 사람을 아는 거야?”“미랍 누나는 나쁜 사람 아니에요.”기란군은 짙은 눈썹을 잔뜩 구겼다. 아이는 화를 내진 않았지만 얼굴에서 미소가 점점 사라지더니 다시 침울해졌다. “나쁜 사람이야! 이 여자 때문에 지금 너희 엄마 병원에 누워있다고!”사화정은 강경한 어투로 말하면서 눈을 부릅뜨고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소만리를 쳐다보았다.“천미랍, 우리 가족한테서 떨어져. 네가 만영이한테 진 빚, 내가 꼭 갚게 해 줄 테니까.”“예쁜 할머니, 왜 저희 엄마 혼내세요?”염염의 앳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사화정은 그제야 소만리의 옆에 두어 살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서 있다는 걸 발견했다. 소만리를 계속 혼내려 했는데 염염이의 동그랗고 큰 눈을 보자 그녀는 순간 멍해졌다.닮았다. 자신이 소만영을 낳았을 때, 그때 그 아이의 얼굴이랑 닮아있었다.“사화정씨, 뭐 보세요?”소만리가 싱긋 웃으며 얘기하자 사화정은 문득 정신이 들어 염염이를 가리키며 의뭉스레 물었다.“딸이야?”소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맞는데요, 무슨 문제 있어요?”“…”사화정의 눈빛이 변하면서 그녀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소만리의 얼굴을 훑어보고는 냉소를 흘렸다.“흥, 천미랍. 너도 딸 있는 입장인데, 자기 딸이 다른 사람한테 괴롭힘 당하면 얼마나 마음이 아플지 생각은 해봤어? 진짜 내 딸이 엄마 없는 애인 줄 알아?”결국은 또 소만영이 소중하다는 소리였다. 소만리는 싱긋 웃었다.“전 다른 사람이 제 딸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 그런데 사화정씨, 정말 당신이 자기 딸을 제대로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무슨 뜻이야!”사화정은 불만스레 답했다.“또
소군연은 소만리가 지금 지내고 있는 곳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바로 그곳으로 가 소만리의 상황을 살펴보려 했다. 그리고 지금 그의 눈앞에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만리야!”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면서 다른 건 신경 쓸 새도 없이 액셀을 밟아 소만리를 데려간 검은색 차량을 뒤쫓았다. 그러나 그 차량은 굉장히 험하게 운전을 했고 신호등을 전부 무시했다. 소군연은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그도 신호를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갑자기 교복을 입은 학생 두 명이 앞에 나타나는 바람에 바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사고는 막았지만 차를 놓쳐버렸다. 소만리가 앞으로 어떤 일을 당할지 몰라 그는 얼른 전화로 신고를 했고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 감시카메라 영상을 확보했다. 3년 전 이미 한 번 그녀를 잃었는데 또다시 그녀를 잃을 수는 없었다.만리야, 넌 괜찮을 거야. 내가 꼭 널 무사히 구해줄게.…병원.소만영은 두 다리를 고정한 채로 붕대를 두껍게 감고 있었지만 굉장히 자유로운 움직임으로 화장실에서 나왔다. 전예는 병실 밖을 힐끔 보고는 바로 문을 닫았다.“만영아, 아까 그 사람 나한테 연락 왔었어. 네 지시대로 했대.”그녀는 목소리를 잔뜩 낮추면서 말했고, 일이 잘 풀린 건지 얼굴에 걸린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소만영은 도도하게 냉소를 흘리더니 여유롭게 침대에 몸을 기대면서 말했다.“천미랍, 얼마나 대단한가 했더니 결국엔 내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게 생겼네.”“그럼, 그딴 걸 어떻게 우리 딸하고 비교해!”전예는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경계하듯 병실 밖을 힐끔거렸다. 혹시 누군가 들어오기라도 할까 봐.“만영아,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거야?”소만영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눈꼬리를 접었다.“엄마는 여자한테 어떤 형벌이 가장 잔혹하다고 생각해?”“그거야 당연히…”전예는 말을 반쯤 하다 말고는 소만영과 똑같은 비열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그래야지! 그 남자들 보고 죽을 만큼 고통스럽게 괴롭히라고 해! 감히 널 못살게 굴다니!”“흥, 내가 그년 온갖 모
“일단 나가 계세요.”기모진은 전예의 말허리를 잘랐고, 그녀는 아무 말 없는 소만영을 흘긋 보고는 눈물을 닦으면서 얘기했다.“그럼 만영이 곁에 좀 있어 줘. 절대 자극하지 말고.”그녀는 몸을 돌려 나가면서 문을 닫았다. 기모진은 병상 위에서 아무 말 없이 누워있는 소만영을 보면서 그녀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소만영은 슬픈 얼굴로 눈을 감고 그를 보지 않겠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이 바닥에서 가장 유능하다는 의사 불러서 치료하라고 했으니까 네 다리 곧 나을 거야.”그는 평온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내 얼굴 보기 싫은 거면 지금 갈게.”그 말에 소만영은 머리를 휙 돌리더니 팔을 뻗어 기모진의 손을 꽉 잡았다.“모진아, 가지 마!”그녀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미리 준비해뒀던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모진아, 이젠 나 싫어졌어? 내 얼굴 전혀 보고 싶지 않아?”연약한 목소리에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그녀를 더욱 초췌해 보이게 했다.“모진아, 그거 알아? 난 내 전부를 잃는다고 해도,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난 너 절대 못 잃어. 네가 없으면 난 정말 죽을 거야!”그녀는 처량한 표정으로 소리 내 통곡하기 시작했고 남들이 보기엔 충분히 가슴 아플 광경이었지만, 기모진은 마치 그것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그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소만영은 훌쩍거렸고 눈물은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었다.“모진아, 내가 잘못해서 너 실망시킨 거 알아. 그런데 우리 알고 지낸 지가 몇 년인데,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안 돼?”“기회?”기모진은 그 말에 드디어 반응했다. 그는 피식 웃으면서 냉랭한 어투로 얘기했다.“그럼 소만리한테는 기회를 줬었어?”“…”기모진의 역질문을 생각하지 못한 그녀는 당황했다. 소만영은 발갛게 물든 눈으로 기모진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았고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래서, 진짜 나 버리겠다고?”소만영은 억울하다는 듯이 입술을 짓씹다가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얘기
기모진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좁혔다.“무슨 소리죠?”“기모진, 꼭 만리를 그렇게 괴롭혀야 직성이 풀리겠어? 그 애는 널 사랑하는 것뿐인데 그게 그렇게 용서 못 할 일이야? 얼른 말해, 도대체 만리를 어디로 데려간 건지!”소군연은 다급한 음성으로 추궁했고,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근심이 묻어나왔다. 소만리는 이미 죽었는데 그는 아직도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모진은 바로 천미랍이 떠올랐다. 소군연이 소만리가 아직 살아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이유는 천미랍 때문일 것이다. 천미랍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가?기모진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불안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더 생각할 새도 없이 그는 얼른 소만영의 손을 뿌리치고 몸을 돌려 나갔고, 소만영은 경악한 표정으로 잠시 경직돼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땐 기모진은 이미 병실을 떠난 뒤였다.“모진아, 모진아! 너 어디가!”그녀가 급히 물었지만 기모진은 고개를 돌리기는커녕 그녀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그리고 문밖에 서 있던 전예는 기모진이 떠나는 모습을 보고는 얼른 문을 열고 들어왔다. 병실 안으로 들어가자 소만영은 얼굴을 잔뜩 굳힌 채로 화가 난 듯이 병상 위에 놓인 물컵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전예는 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만영아, 어때? 아까 모진이랑 어떻게 됐어?”“흥, 어떻긴?”소만영은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눈엔 노기와 불만이 가득했다.“나한테 여태껏 좋아한 사람이 소만리라고 하다니, 소만리 그 천한 것을 좋아한다고?”“…”전예는 잠깐 멈칫했다가 조심스레 얘기했다.“그러니까 모진이가 좋아하는 사람이 걔가 어릴 때 만났던 소만리라는 얘기야? 그게 무슨 상관이야? 모진이는 그 애가 너인 줄 알잖아!”전예의 위로의 말은 소만영의 화를 억누르지 못했고 도리어 불 난 집에 부채질한 격이었다. 기모진이 아까 한 말을 그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기모진이 줄곧 좋아한 건 소만리였다. 좋아하다 못해 이
"그렇다면 당신은 그렇게 말 할 자격이 있나? 그때 당신은 내 아내를 데려가서는 길가에서 꽁냥대며 마라탕을 드시던데..? 그리고 당신은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었지. 그리고… 대낮에 그녀에게 키스까지 했던 건… 다.. 지워버린 건가?"기모진이 질문을 하는 동안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 대신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의 오싹한 기운만이 느껴졌다."소군연.. 내가 너에게 말하는데, 소만리는 손끝에서 발끝까지 내 여자야… 비록.. 그녀는 세상을 떠났지만, 남아있는 그녀의 재까지 모두 내 소유라고. 그런데 넌 뭐지? 넌 유부녀를 빼앗으려는 망상에 갇힌 불륜남일 뿐이야. 정신차리라고."기모진의 말이 끝나자 소군연은 살짝 웃음지었다."불륜남이라.. 그런 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럼 그거 알아? 바로 네가 소만영이라는 불륜녀를 내버려두지만 않았어도 만리는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을 거야. 너는 그저 그녀의 죽음을 방관한 협잡꾼에 불과하다고!"기모진의 평온했던 표정에 갑자기 파란이 일기 시작했다.그는 소만리가 하나씩 입어가던 상처를 만든 가해자 역할에 가담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녀의 몸에 있는 상처, 흐르던 피.. 그 절반은 그가 직접 만든 것들이었다.기모진은 눈살을 찌푸렸다."소군연.. 내가 지금 너와 이런 것들을 따지려고 한 게 아닐 텐데.."소군연도 그제서야 비로소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새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의심스럽게 기모진을 바라보았다."정말 네가 사람을 써서 만리를 납치하라고 한 것이 아니야?""그녀는 만리가 아니야."기모진은 거듭 강조했다."아직도 나에게 거짓말을 하려는 건가?"소군연은 계속 자신의 판단이 맞다고 생각했다."난 세상에 그렇게 똑같은 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아. 만리는 분명 너에게 세뇌된 거야!""하."기모진은 낮은 소리로 나지막이 웃었다. 그의 눈빛은 순간 끝을 모를 쓸쓸함에 휩싸였다."네가 말한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