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모진의 시선은 이상하게 깊었고 복잡해 보였다. 소만리의 가느다란 손목을 잡아 차츰차츰 조여왔다.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겠다는 듯.다시는 이 손을 놓지 않으리라, 다시는……그러나 의혹에 찬 기모진의 시선을 받는 소만리는 사뭇 차분해 보였다.입 꼬리가 올라가더니 언짢은 듯 입을 열었다.“다시는 나를 죽은 전처로 오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던 것 같은데요.”그녀의 대답을 듣고는 기모진의 눈에서 기대가 훅 빠져나갔다. 그녀를 잡고 있던 손도 서서히 풀어졌다.소만리는 손목을 빼내며 샴페인을 한 모금 삼켰다.“사실 말이지 번번이 이렇게 죽은 사람 취급 받는 거 정말 기분 별로라고요. 아프지만 않다면 성형수술이라도 해버리고 싶다니까.”기모진이 갑자기 고개를 휙 들었다.“수술하지 말아요.”“네?”소만리의 눈썹이 가볍게 위로 들려 올라갔다.기모진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미안해요.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겁니다.”그는 약속했다.“수술은 하지 말아요. 그대로도 예쁘니까.”예쁘다고 칭찬하는 말 같았지만 사실은 지금의 얼굴이 소만리와 똑같으니 그대로 두라는 소리였다.그는 천천히 돌아서서 밤이 깔린 도시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한 눈에 도시를 다 내려다 볼 수 있었다.네온 사인과 번쩍이는 불빛도 그의 미간에 드리워진 어둠을 밝게 비추지 못하는 것 같았다.“나랑 한 잔 하겠습니까?”감정을 담지 않은 건조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의 뒷모습이 어쩐지 쓸쓸해 보인다.그녀는 술잔을 들고 그의 곁으로 가서 흘끗 곁눈질을 했다.“사람들이 자꾸 날 죽은 사람으로 착각하는 것에 거부감이 들기는 하지만 오늘 어쩌다 보니 당신 전처의 억울함은 풀어준 것 같네요. 아마도 사실 그렇게 뻔뻔하고 독한 여자는 아니었나 봐요.”그녀는 농담처럼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던 마음 속 억울함과 무력함을 털어놓았다. 이제야 결백을 밝히게 되어 마음이 씁쓸했다.이 말이 끝나자 기모진의 미간에 힘이 잔뜩 들어가는 게 보였다.그는 도시에 깔린 어둠을 내려다 보다
소만영은 기가그룹 50주년 기념행사를 이용해 언론의 힘을 빌어 신분과 지위를 공고히 하려고 했었는데 육정과 천미립이 나타나 계획을 다 망쳐버린 것이다!게다가 인터넷에는 그녀와 관련된 부정적인 검색어가 올라오고 있었다.소만영는 사화정의 도움을 받아 겨우 그런 검색어는 없애버릴 수 있었다.그런 여론은 겨우 잠재웠지만 기모진 쪽은 여전히 안심이 되지 않았다.그날 이후로 기모진을 본 적이 없었다. 전화를 걸어봐도 계속 통화 중이었다. 기모진에게 차단을 당한 게 아닌가 싶었다.기모진이 육정의 말을 믿을까 봐 걱정됐다. 소만영은 새벽부터 기모진의 별장으로 가서 기다렸다.방해가 될까 봐 들어가지는 않고 그저 입구에서 기다리기만 했다.기모진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소만리가 한 줌 재로 돌아간 날부터 그는 제대로 자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사람을 시켜 특별한 향이 담긴 향초를 주문해 준 다음에야 잠을 잘 수 있었다.그런데 어젯밤에는 그 향을 피웠는데도 도저히 잠이 안 왔다.밤새 몸을 뒤척이다가 한 번이라도 믿어줄까 싶은 간절한 기대를 가지고 자신을 바라보던 소만리의 눈빛을 떠올렸다.그는 그런데도 그녀를 믿지 않았다.육정이 그녀와 자신이 부적절한 관계라고 모함하는 말을 마디마디 믿었다. 그녀가 돈을 위해 아무 남자와 어울린다고 믿었다.그렇게나 잔인하게 그녀의 희망을 하나하나 파괴하다가 결국 그녀가 한 줌 재로 돌아가게 만들었다…….마음이 아프지만 이미 너무 늦어 버린 것이다.기모진의 눈시울이 벌겋게 되었다. 세수를 했다. 아래로 내려갔더니 아주머니가 소만영이 밖에서 벌써 한 시간이 넘게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그는 아무 말 없이 같이 아침을 먹을 수 있게 란군을 깨워서 씻기라고 했다.자신이 어렸을 때와 똑 같은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확 거부감이 들었다.아내가 낳은 아이는 재가 되었는데 다른 여자가 낳은 아이에게는 풍족하게 먹이고 입히다니.기모진은 입맛이 뚝 떨어졌다.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갔다.란군은 맑은 눈을 들어서 자신에게 줄
소만영은 간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뭐든 다 사실대로 대답할게.”“좋아.”기모진은 검은 눈으로 소만영을 들여다 보았다.“정말로 육정 그 건달 놈하고 소만리가 사귀었어?”“그럼!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소만영은 즉각 대답했다.기모진의 검은 눈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그 눈에서 싸늘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분위기가 이상하게 가라앉는 걸 느끼고 소만영은 당황했다. 그러나 여전히 또박또박 대답했다. “진짜야! 자기야, 날 믿어줘……”“믿어달라……”그 말을 내뱉는 기모진의 눈에 조롱하는 빛이 떠올랐다.“만리도 나에게 그랬었지. 믿어달라고.”“……뭐라고?”소만영은 당황해서 비웃음을 띠고 있는 기모진을 쳐다봤다.“자기야……”“난 기회를 줬어.”얇은 입술에서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는 쌩 하니 몸을 돌렸다.그녀를 믿지 않는다는 뜻이었다!소만영은 발을 삔 척하고 있었던 것도 잊고 벌떡 일어나 기모진을 따라갔다. 뒤에서 그를 꽉 끌어안았다.“모진 씨!”그녀는 기모진의 등에 얼굴을 꼭 붙였다.“자기를 몇 년을 따라다녔는데 아직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 내가 어떻게 거짓말을 해! 내가 하는 말은 다 사실이야. 만리는 정말 육정이랑 사귀었다고! 육정뿐인가, 소군년도 있고! 그리고 그 기묵비도! 만리는 그 남자들하고 다 얽혀서……”“됐어!”기모진은 화가 나서 말을 끊었다. 싸늘한 얼굴에는 화난 기색이 만연했다.소만영은 놀라서 입을 확 다물었다.분위기가 다시 얼어붙었다. 소만영은 불안에 몸을 떨었다.더욱 힘주어 기모진을 껴안았으나 갑자기 기모진의 입에서 명령이 흘러나왔다.“놔!”소만영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렇게 자신을 거부하는 기모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싫어! 못 놔! 사랑해. 난 자기하고 영원히 함께 있을 거야. 아무 것도 아닌 사람 때문에 우리가 왜 이래야 돼?”소만영은 울먹이며 더욱 세게 기모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그러나 다음 순간 기모진이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냈다. 곧 그녀의 품에
“날 믿어! 그 미친 놈의 헛소리를 듣고 날 판단하면 안 돼! 바닷가에서의 그 날을 잊었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순수하고 제일 착한 애라고 했잖아. 영원히 함께 하자고, 날 신부로 삼겠다고 했잖아. 날 지켜주겠다고, 영원히 믿어주겠다고 했잖아. 모진 씨, 모진 씨!”기모진이 자신을 이렇게까지 무시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멀어져 가는 스포츠카를 보며 소만영은 그 자리에서 발을 구를 뿐이었다.“소만리 년! 죽어서도 날 가만 두지 않다니!”그녀는 화가 나서 별장으로 들어갔다. 기란군이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서려는 게 보였다. 소만영은 아주머니더러 시장에 다녀오라며 내보냈다. 이제 집에는 그녀와 기란군만 남게 되었다.소만영을 보는 까만 눈동자에 방어와 거부의 빛이 떠올랐다. 작은 손은 책가방 끈을 꼭 쥐었다.‘정말이지 볼수록 더 꼴 보기 싫어!’소만영은 짜증이 극에 달해 두어 번 노려보더니 갑자기 기란군의 작은 어깨를 와락 움켜쥐었다.기란군은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몸은 벌써 반항하고 있었다. 그러나 겨우 다섯 살 짜리가 어른의 힘을 당해내기는 역부족이었다.소만영은 그를 창고방으로 끌고가 설명도 없이 그를 밀어 넣더니 문을 잠궜다. “쾅쾅쾅!”기란군은 힘껏 문을 두드렸다.소만영은 발로 문을 쾅 찼다.“닥쳐! 이 짜증나는 녀석아! 넌 소만리의 뱃속에 있을 때 죽었어야 해!”화가 나서 욕을 하며 분노를 기란군에게 퍼부었다.기란군은 도와달라며 몸부림을 치다가 결국 컴컴한 방 구석에서 제 몸을 꼭 끌어안았다.미랍 누나……”어둠 속에서 이 이름을 불러야 빛을 찾을 수 있는 듯 나직이 읊조렸다.소만영은 예전 납치 사건은 절대로 기모진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안 그랬다가는 기 씨 가문 작은 사모님이 될 수 없을뿐더러 기모진이 어떤 벌을 내릴지 알 수 없었다.생각해 보면 그때의 진상을 아는 것은 육정뿐이다.소만리는 이미 죽었고,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그러니 이제 육정만 해결하면 된다!어쨌든 무슨 수를 쓰던 다시는 육정이
소만리는 앞에 있는 그윽한 눈동자를 보며 호기심을 드러냈다.“무슨 일이에요?”“진상을 조사해 주셨으면 합니다.”가만히 이 말을 하는 기무진의 눈빛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기대가 담겨 있었다.소만리는 도와야 할 구체적인 내용을 듣고는 놀랐다.잠시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도와드리겠어요.”“고맙습니다.”기모진이 인사했다.그 순간 기모진의 눈에 기쁨의 웃음이 스치고 지나가는 듯 했으나 금방 사라져 버렸다.소만리는 다시 자신으로 돌아가게 될 줄은 몰랐다.기모진은 그녀를 데리고 헤어샵을 갔다. 기모진이 헤어 디자이너에게 사진을 한 장 보여주자 그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소만리는 기모진이 헤어 디자이너에게 무슨 사진을 보여주었는지 몰랐다. 1시간 뒤 그녀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았다.검고 윤기 나는 긴 머리가 단아해 보였다. 뭔가 완전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그리고 나서 기모진은 소만리를 자신의 별장으로 데리고 갔다.한 때는 자신들의 신혼 집이었던 별장에 들어서자 마음이 복잡했다. 입가에 자조적인 웃음이 떠올랐다.그녀는 기모진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3년이 흘렀다.다시 이 방을 들어오게 될 지 몰랐다. 그와 공유했던 이 침실을.방에 들어서자 옅지만 독특한 향이 났다. 익숙한 향이었다. 그녀가 직접 조향한 배합이었기 때문이었다.‘부활’한 뒤로 그녀는 자신의 후각이 특별히 예민하다는 것을 알았다. 디자인을 하다가 답답할 때면 향료를 공부했다. 그렇게 새로운 지식을 쌓고 창조력의 저변을 넓혀갔다.더 이상은 예전처럼 그저 맹목적으로 사랑을 쫓는 바보이고 싶지 않았다.기모진은 그녀를 옷장 앞으로 데리고 갔다. 그가 옷장을 열자 가지런히 정리된 원피스가 보였다. 소만리는 적잖이 놀랐다.방금 침실을 들어서면서 방 배치가 하나도 안 변한 것을 보고도 좀 뜻밖이었는데, 3년 전 자신의 옷이 모두 있는 걸 보고는 더 놀랐다. “미립 씨 적당한 걸로 골라 입어요.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기모진은 말을 마치고 걸어나
‘결국 그녀는 아니라고.’ “잘 됐네요.”소만리는 만족스럽게 웃었다.“기모진 씨는 소만리 씨를 굉장히 싫어했다던데 죽은 지 3년이 지났는데도 집에 아직도 옷을 다 가지고 있네요?”그 말을 듣더니 기모진의 시선이 소만리의 얼굴에 고정되었다.“그게 전처의 옷이란 걸 어떻게 알았습니까?”소만리는 미소를 띠었다.“그런 건 누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다 알겠죠, 안 그래요?”그 말을 듣고 기모진도 웃었다.“그도 그렇네요.”이때 소만영은 병원에서 나오는 육정에게 연락을 했다.육정은 어젯밤 재미나 보려고 갔다가 갑자기 나타난 귀신에 놀란데다가 기모진에게 맞아 이까지 부러졌으니 이만저만 손해가 아니었다.치아를 새로 해 넣는데 수백만 원 이라는 얘기를 듣고 병원에서 나왔다.육정 같은 건달이 어디 그렇게 큰 돈이 있겠는가. 이런 참에 소만영의 전화를 받았다. 기회가 온 것이다.소만영은 신중을 기하기 위해 육정에게 계좌이체를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기모진에게 흔적을 들킬 수도 있는 것이다.그녀는 가발에 선글라스를 끼고 전혀 다른 스타일로 차려 입고 구석진 커피숍에서 만날 약속을 잡았다.만나자마자 소만영은 2천만 원을 현금으로 턱 내놓았다.큰 돈을 보고 육정은 두 눈을 번뜩이더니 대뜸 제 따귀를 철썩철썩 올려 붙였다.“우리 사업 하루 이틀도 아닌데 다 나한테 맡겨만 두셔!”“아오, 어젯밤에는 내가 너무 취해서 그랬지. 그렇지만 거 뭐시기? 그 뭐 천……”“천미랍”소만영이 짜증난다는 듯 뱉었다.“잊지 마! 소만리가 아니라고! 소만리 그년은 3년 전에 죽었어. 요즘 같은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냐? 그게 진짜 귀신이라고 해도 내가 처리해 버릴 수 있어!”귀신이란 소리를 듣자 육정은 은근히 움츠러들었다.양심에 거리끼는 짓을 너무 하다 보니 당당할 수 없었다.“이 돈은 받아 둬. 그 납치 건에 대해서 입만 꾹 다물고 있으면 평생 먹고 사는 걱정은 없게 해 줄게!”“걱정 마셔.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내가 잘 안다니까.”육정은 연신 대답했다. 그
와락 달라드는 육정을 보면서 소만리는 그에게 맞았던 기억을 떠올렸다.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반격하려고 했다. 이때 뒤에서 휙 하고 바람이 불어왔다.기모진의 따스한 손이 그녀의 어깨를 안아서 한 쪽으로 비키도록 했다.소만리는 일순 익숙하고도 낯선 온기에 둘러 싸였다. 미처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육정이 붕 날아 나무에 부딪히더니 곧바로 기모진의 손이 그의 팔을 비틀었다.육정이 ‘으어으어’ 소리를 질러댔지만 기모진은 전혀 풀어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육정의 무릎을 차 꿇어 앉히더니 한 방 시원하게 걷어찼다.소만리는 기모진이 이어서 육정을 두드려 팰 줄 알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더 없이 걱정스러운 듯 그녀를 감싸 안았다.“두려워 말아요. 내가 있으니까. 다시는 누구도 당신을 괴롭히지 못하게 해주겠습니다.”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감겨왔다. 비현실적으로 따스하면서도 긴장한 것이 그녀가 어딜 다치기라도 했을까 봐 진짜로 걱정하는 것 같았다.소만리는 멍하니 눈을 뜨고 점점 더 꽉 안아 드는 기모진을 느끼고 있었다.주룩주룩 내리는 비가 여름 끝의 밤바람과 만나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그러나 바짝 붙은 그의 가슴에서 체온이 전해졌다. 얇은 옷을 뚫고 그녀의 피부에 닿는 그 체온은 뜨거웠다.너무나 가까워서 그녀는 지금 두근대는 것이 자신의 심장인지 기모진의 심장인지도 알 수 없었다. 심장이 두근댈 때마다 생각이 흩어졌다.거의 정신을 잃기 직전에야 보이지 않는 상처에서 전해지는 날카로운 아픔이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기모진 씨, 한 번만 더 이러시면 화낼 거예요.”가볍지만 분명한 거절의 뜻이 담겨 있었다..기모진의 시선이 움찔하더니 그제서야 꿈에서 깨어나는 듯 했다.“아, 미안합니다.”그는 그녀의 귓가에 이렇게 가만히 속삭이고는 그녀를 풀어주었다.그는 도망치려던 육정을 잡아채 나무 옆으로 밀어붙였다. 검은 눈은 날카로운 칼 마냥 육정에게 꽂혔다.“잘 들어.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기모진의 얇은 입술에서 싸늘한 말이 흘러 나왔
분명 소만영이 그를 찾아간 거겠지.소만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기모진은 잘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그는 내내 소만영을 무한정 믿어 주었다.그리고 번번이 제멋대로 구는 소만영을 내버려 두어 그녀에게 그렇게나 깊은 고통을 준 것이다.그러나 그가 정말로 소만영을 감싸려고 든다면왜 쓸데없이 자신에게 소만리로 꾸미고 가서 육정을 만나달라고 했을까?기모진이 그대로 갈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소만리의 아파트까지 따라왔다.“잠깐 들어가도 됩니까?”기모진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살짝 부탁하는 듯한 느낌이었다.밤 늦은 시간이라 거절할 생각이었으나 아직도 피가 줄줄 흐르는 손을 보고는 문을 열었다.“들어오세요.”다친 것이 마음 아파서 그런 게 아니라 그에게서 뭔가 정보를 얻어내려는 것이었다.소만리는 구급상자를 가져와 소파에 앉은 무표정한 남자를 보았다.기모진은 손을 늘어뜨리고 푹신한 소파에 힘없이 앉아 있었다. 깊은 시름에 잠겨 의기소침해 있었다.소만리는 아무 말 없이 알코올솜을 꺼내 기모진 손등의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살살 감았다.“한 번도 그녀를 믿어주지 않았습니다.”기모진이 대뜸 한 마디 했다.소만리는 붕대를 감던 손을 멈췄다. 이어서 그녀는 태연히 웃으며 물었다.“누굴 말씀하시는 거예요?”기모진은 대답 없이 그저 가볍게 훗 하고 웃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정말 그런 짓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내내 너무나 그 여자를 믿었어요.”소만리는 앞서 말한 것은 예전의 자신이고, 나중에 이른 것은 소만영이라는 것을 알았다.‘그렇지만 기모진 당신이 생각도 못한 건 그것뿐이 아니야. 당신이 본 건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고!’소만리는 다 알면서도 천연덕스럽게 물었다.“기모진 씨 말씀은 전처가 아들을 납치한 사건이 사실은 누가 한 건지는 아는데 믿고 싶지 않다는 말씀인가요?그의 섹시한 눈이 갑자기 몽롱해지는 듯 하더니 묵직한 시선이 복잡한 심정으로 자신의 앞에 있는 맑은 눈을 바라봤다.기모진은 한참 만에야 천천히 손을 들었다. 체온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