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만영은 할아버지의 의견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기모진의 생각이 중요했다.그녀는 애처로운 눈빛을 하고 싸늘한 남자를 쳐다보았다.“날 믿어 줄 거지, 응?”소만영은 가녀린 목소리로 말하며 기모진의 손을 잡아 감정을 호소해 보려 했다.그러나 기모진은 차가운 눈으로 흘끗 볼 뿐이었다. 의혹에 찬 시선이 소만영의 얼굴을 한 번 스쳐갔을 뿐 아무런 대답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저기, 저……”소만영은 상처받은 듯 멀어지는 기모진의 등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눈물이 흘러 내렸다.사화정은 급히 위로했다.“만영아, 괜찮다. 모진이는 똑똑한 사람이니 속아 넘어가진 않았을 거야!”소만영은 끄덕이며 눈물을 닦았다.“가서 모진 씨를 좀 보고 올게요.”“만영아”괴로운 듯 딸을 부르던 사화정은 소만리가 시선에 들어오자 불만스럽다는 듯 노려봤다.소만리는 증오를 띤 사화정의 시선에는 아랑곳 않고 웃는 얼굴로 다가갔다.“제 기억이 맞다면 사모님께서는 분명 소만리가 후안무치하고 악독한 여자라는 걸 직접 봤다고 하셨죠. 지금 보니 댁의 따님이 그런 사람인 것 같네요.”“하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어요!”“고소는 소만리가 해야겠는데요. 댁의 귀한 따님이 다른 사람과 짜고 결백한 그녀를 중상모략 해서 납치했다는 죄명을 씌웠잖아요!”“이게……”소만리는 사화정이 소만영을 싸고돌며 울분을 터트리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진상이 이렇게 명확한데도 사화정은 소만영을 감쌌다.이치를 따져야 한다지만 때로 감정이라는 것은 이기적이어서 시비조차 제대로 가릴 수 없게 만드는 법이었다.소만리는 엷은 쓴웃음을 띠고는 와인 잔을 들고 자리를 떴다.밤이 깊어졌다. 여름 끝의 바람이 불어와 소만리의 뺨을 스치고 갔다.복도를 지나서 그 끝에 있는 야외 테라스까지 갔다가 낯익은 모습을 보게 되었다.기모진의 훤칠한 몸이 유리 난간에 기대어 오른손에 와인잔을 들고 있었다. 그 옆의 테이블에는 와인이 한 병 놓여있었다.가만히 잔을 들어 와인을 단숨에 꿀꺽 삼켰다.
기모진의 시선은 이상하게 깊었고 복잡해 보였다. 소만리의 가느다란 손목을 잡아 차츰차츰 조여왔다.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겠다는 듯.다시는 이 손을 놓지 않으리라, 다시는……그러나 의혹에 찬 기모진의 시선을 받는 소만리는 사뭇 차분해 보였다.입 꼬리가 올라가더니 언짢은 듯 입을 열었다.“다시는 나를 죽은 전처로 오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던 것 같은데요.”그녀의 대답을 듣고는 기모진의 눈에서 기대가 훅 빠져나갔다. 그녀를 잡고 있던 손도 서서히 풀어졌다.소만리는 손목을 빼내며 샴페인을 한 모금 삼켰다.“사실 말이지 번번이 이렇게 죽은 사람 취급 받는 거 정말 기분 별로라고요. 아프지만 않다면 성형수술이라도 해버리고 싶다니까.”기모진이 갑자기 고개를 휙 들었다.“수술하지 말아요.”“네?”소만리의 눈썹이 가볍게 위로 들려 올라갔다.기모진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미안해요.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겁니다.”그는 약속했다.“수술은 하지 말아요. 그대로도 예쁘니까.”예쁘다고 칭찬하는 말 같았지만 사실은 지금의 얼굴이 소만리와 똑같으니 그대로 두라는 소리였다.그는 천천히 돌아서서 밤이 깔린 도시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한 눈에 도시를 다 내려다 볼 수 있었다.네온 사인과 번쩍이는 불빛도 그의 미간에 드리워진 어둠을 밝게 비추지 못하는 것 같았다.“나랑 한 잔 하겠습니까?”감정을 담지 않은 건조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의 뒷모습이 어쩐지 쓸쓸해 보인다.그녀는 술잔을 들고 그의 곁으로 가서 흘끗 곁눈질을 했다.“사람들이 자꾸 날 죽은 사람으로 착각하는 것에 거부감이 들기는 하지만 오늘 어쩌다 보니 당신 전처의 억울함은 풀어준 것 같네요. 아마도 사실 그렇게 뻔뻔하고 독한 여자는 아니었나 봐요.”그녀는 농담처럼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던 마음 속 억울함과 무력함을 털어놓았다. 이제야 결백을 밝히게 되어 마음이 씁쓸했다.이 말이 끝나자 기모진의 미간에 힘이 잔뜩 들어가는 게 보였다.그는 도시에 깔린 어둠을 내려다 보다
소만영은 기가그룹 50주년 기념행사를 이용해 언론의 힘을 빌어 신분과 지위를 공고히 하려고 했었는데 육정과 천미립이 나타나 계획을 다 망쳐버린 것이다!게다가 인터넷에는 그녀와 관련된 부정적인 검색어가 올라오고 있었다.소만영는 사화정의 도움을 받아 겨우 그런 검색어는 없애버릴 수 있었다.그런 여론은 겨우 잠재웠지만 기모진 쪽은 여전히 안심이 되지 않았다.그날 이후로 기모진을 본 적이 없었다. 전화를 걸어봐도 계속 통화 중이었다. 기모진에게 차단을 당한 게 아닌가 싶었다.기모진이 육정의 말을 믿을까 봐 걱정됐다. 소만영은 새벽부터 기모진의 별장으로 가서 기다렸다.방해가 될까 봐 들어가지는 않고 그저 입구에서 기다리기만 했다.기모진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소만리가 한 줌 재로 돌아간 날부터 그는 제대로 자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사람을 시켜 특별한 향이 담긴 향초를 주문해 준 다음에야 잠을 잘 수 있었다.그런데 어젯밤에는 그 향을 피웠는데도 도저히 잠이 안 왔다.밤새 몸을 뒤척이다가 한 번이라도 믿어줄까 싶은 간절한 기대를 가지고 자신을 바라보던 소만리의 눈빛을 떠올렸다.그는 그런데도 그녀를 믿지 않았다.육정이 그녀와 자신이 부적절한 관계라고 모함하는 말을 마디마디 믿었다. 그녀가 돈을 위해 아무 남자와 어울린다고 믿었다.그렇게나 잔인하게 그녀의 희망을 하나하나 파괴하다가 결국 그녀가 한 줌 재로 돌아가게 만들었다…….마음이 아프지만 이미 너무 늦어 버린 것이다.기모진의 눈시울이 벌겋게 되었다. 세수를 했다. 아래로 내려갔더니 아주머니가 소만영이 밖에서 벌써 한 시간이 넘게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그는 아무 말 없이 같이 아침을 먹을 수 있게 란군을 깨워서 씻기라고 했다.자신이 어렸을 때와 똑 같은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확 거부감이 들었다.아내가 낳은 아이는 재가 되었는데 다른 여자가 낳은 아이에게는 풍족하게 먹이고 입히다니.기모진은 입맛이 뚝 떨어졌다.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갔다.란군은 맑은 눈을 들어서 자신에게 줄
소만영은 간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뭐든 다 사실대로 대답할게.”“좋아.”기모진은 검은 눈으로 소만영을 들여다 보았다.“정말로 육정 그 건달 놈하고 소만리가 사귀었어?”“그럼!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소만영은 즉각 대답했다.기모진의 검은 눈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그 눈에서 싸늘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분위기가 이상하게 가라앉는 걸 느끼고 소만영은 당황했다. 그러나 여전히 또박또박 대답했다. “진짜야! 자기야, 날 믿어줘……”“믿어달라……”그 말을 내뱉는 기모진의 눈에 조롱하는 빛이 떠올랐다.“만리도 나에게 그랬었지. 믿어달라고.”“……뭐라고?”소만영은 당황해서 비웃음을 띠고 있는 기모진을 쳐다봤다.“자기야……”“난 기회를 줬어.”얇은 입술에서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는 쌩 하니 몸을 돌렸다.그녀를 믿지 않는다는 뜻이었다!소만영은 발을 삔 척하고 있었던 것도 잊고 벌떡 일어나 기모진을 따라갔다. 뒤에서 그를 꽉 끌어안았다.“모진 씨!”그녀는 기모진의 등에 얼굴을 꼭 붙였다.“자기를 몇 년을 따라다녔는데 아직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 내가 어떻게 거짓말을 해! 내가 하는 말은 다 사실이야. 만리는 정말 육정이랑 사귀었다고! 육정뿐인가, 소군년도 있고! 그리고 그 기묵비도! 만리는 그 남자들하고 다 얽혀서……”“됐어!”기모진은 화가 나서 말을 끊었다. 싸늘한 얼굴에는 화난 기색이 만연했다.소만영은 놀라서 입을 확 다물었다.분위기가 다시 얼어붙었다. 소만영은 불안에 몸을 떨었다.더욱 힘주어 기모진을 껴안았으나 갑자기 기모진의 입에서 명령이 흘러나왔다.“놔!”소만영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렇게 자신을 거부하는 기모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싫어! 못 놔! 사랑해. 난 자기하고 영원히 함께 있을 거야. 아무 것도 아닌 사람 때문에 우리가 왜 이래야 돼?”소만영은 울먹이며 더욱 세게 기모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그러나 다음 순간 기모진이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냈다. 곧 그녀의 품에
“날 믿어! 그 미친 놈의 헛소리를 듣고 날 판단하면 안 돼! 바닷가에서의 그 날을 잊었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순수하고 제일 착한 애라고 했잖아. 영원히 함께 하자고, 날 신부로 삼겠다고 했잖아. 날 지켜주겠다고, 영원히 믿어주겠다고 했잖아. 모진 씨, 모진 씨!”기모진이 자신을 이렇게까지 무시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멀어져 가는 스포츠카를 보며 소만영은 그 자리에서 발을 구를 뿐이었다.“소만리 년! 죽어서도 날 가만 두지 않다니!”그녀는 화가 나서 별장으로 들어갔다. 기란군이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서려는 게 보였다. 소만영은 아주머니더러 시장에 다녀오라며 내보냈다. 이제 집에는 그녀와 기란군만 남게 되었다.소만영을 보는 까만 눈동자에 방어와 거부의 빛이 떠올랐다. 작은 손은 책가방 끈을 꼭 쥐었다.‘정말이지 볼수록 더 꼴 보기 싫어!’소만영은 짜증이 극에 달해 두어 번 노려보더니 갑자기 기란군의 작은 어깨를 와락 움켜쥐었다.기란군은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몸은 벌써 반항하고 있었다. 그러나 겨우 다섯 살 짜리가 어른의 힘을 당해내기는 역부족이었다.소만영은 그를 창고방으로 끌고가 설명도 없이 그를 밀어 넣더니 문을 잠궜다. “쾅쾅쾅!”기란군은 힘껏 문을 두드렸다.소만영은 발로 문을 쾅 찼다.“닥쳐! 이 짜증나는 녀석아! 넌 소만리의 뱃속에 있을 때 죽었어야 해!”화가 나서 욕을 하며 분노를 기란군에게 퍼부었다.기란군은 도와달라며 몸부림을 치다가 결국 컴컴한 방 구석에서 제 몸을 꼭 끌어안았다.미랍 누나……”어둠 속에서 이 이름을 불러야 빛을 찾을 수 있는 듯 나직이 읊조렸다.소만영은 예전 납치 사건은 절대로 기모진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안 그랬다가는 기 씨 가문 작은 사모님이 될 수 없을뿐더러 기모진이 어떤 벌을 내릴지 알 수 없었다.생각해 보면 그때의 진상을 아는 것은 육정뿐이다.소만리는 이미 죽었고,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그러니 이제 육정만 해결하면 된다!어쨌든 무슨 수를 쓰던 다시는 육정이
소만리는 앞에 있는 그윽한 눈동자를 보며 호기심을 드러냈다.“무슨 일이에요?”“진상을 조사해 주셨으면 합니다.”가만히 이 말을 하는 기무진의 눈빛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기대가 담겨 있었다.소만리는 도와야 할 구체적인 내용을 듣고는 놀랐다.잠시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도와드리겠어요.”“고맙습니다.”기모진이 인사했다.그 순간 기모진의 눈에 기쁨의 웃음이 스치고 지나가는 듯 했으나 금방 사라져 버렸다.소만리는 다시 자신으로 돌아가게 될 줄은 몰랐다.기모진은 그녀를 데리고 헤어샵을 갔다. 기모진이 헤어 디자이너에게 사진을 한 장 보여주자 그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소만리는 기모진이 헤어 디자이너에게 무슨 사진을 보여주었는지 몰랐다. 1시간 뒤 그녀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았다.검고 윤기 나는 긴 머리가 단아해 보였다. 뭔가 완전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그리고 나서 기모진은 소만리를 자신의 별장으로 데리고 갔다.한 때는 자신들의 신혼 집이었던 별장에 들어서자 마음이 복잡했다. 입가에 자조적인 웃음이 떠올랐다.그녀는 기모진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3년이 흘렀다.다시 이 방을 들어오게 될 지 몰랐다. 그와 공유했던 이 침실을.방에 들어서자 옅지만 독특한 향이 났다. 익숙한 향이었다. 그녀가 직접 조향한 배합이었기 때문이었다.‘부활’한 뒤로 그녀는 자신의 후각이 특별히 예민하다는 것을 알았다. 디자인을 하다가 답답할 때면 향료를 공부했다. 그렇게 새로운 지식을 쌓고 창조력의 저변을 넓혀갔다.더 이상은 예전처럼 그저 맹목적으로 사랑을 쫓는 바보이고 싶지 않았다.기모진은 그녀를 옷장 앞으로 데리고 갔다. 그가 옷장을 열자 가지런히 정리된 원피스가 보였다. 소만리는 적잖이 놀랐다.방금 침실을 들어서면서 방 배치가 하나도 안 변한 것을 보고도 좀 뜻밖이었는데, 3년 전 자신의 옷이 모두 있는 걸 보고는 더 놀랐다. “미립 씨 적당한 걸로 골라 입어요.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기모진은 말을 마치고 걸어나
‘결국 그녀는 아니라고.’ “잘 됐네요.”소만리는 만족스럽게 웃었다.“기모진 씨는 소만리 씨를 굉장히 싫어했다던데 죽은 지 3년이 지났는데도 집에 아직도 옷을 다 가지고 있네요?”그 말을 듣더니 기모진의 시선이 소만리의 얼굴에 고정되었다.“그게 전처의 옷이란 걸 어떻게 알았습니까?”소만리는 미소를 띠었다.“그런 건 누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다 알겠죠, 안 그래요?”그 말을 듣고 기모진도 웃었다.“그도 그렇네요.”이때 소만영은 병원에서 나오는 육정에게 연락을 했다.육정은 어젯밤 재미나 보려고 갔다가 갑자기 나타난 귀신에 놀란데다가 기모진에게 맞아 이까지 부러졌으니 이만저만 손해가 아니었다.치아를 새로 해 넣는데 수백만 원 이라는 얘기를 듣고 병원에서 나왔다.육정 같은 건달이 어디 그렇게 큰 돈이 있겠는가. 이런 참에 소만영의 전화를 받았다. 기회가 온 것이다.소만영은 신중을 기하기 위해 육정에게 계좌이체를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기모진에게 흔적을 들킬 수도 있는 것이다.그녀는 가발에 선글라스를 끼고 전혀 다른 스타일로 차려 입고 구석진 커피숍에서 만날 약속을 잡았다.만나자마자 소만영은 2천만 원을 현금으로 턱 내놓았다.큰 돈을 보고 육정은 두 눈을 번뜩이더니 대뜸 제 따귀를 철썩철썩 올려 붙였다.“우리 사업 하루 이틀도 아닌데 다 나한테 맡겨만 두셔!”“아오, 어젯밤에는 내가 너무 취해서 그랬지. 그렇지만 거 뭐시기? 그 뭐 천……”“천미랍”소만영이 짜증난다는 듯 뱉었다.“잊지 마! 소만리가 아니라고! 소만리 그년은 3년 전에 죽었어. 요즘 같은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냐? 그게 진짜 귀신이라고 해도 내가 처리해 버릴 수 있어!”귀신이란 소리를 듣자 육정은 은근히 움츠러들었다.양심에 거리끼는 짓을 너무 하다 보니 당당할 수 없었다.“이 돈은 받아 둬. 그 납치 건에 대해서 입만 꾹 다물고 있으면 평생 먹고 사는 걱정은 없게 해 줄게!”“걱정 마셔.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내가 잘 안다니까.”육정은 연신 대답했다. 그
와락 달라드는 육정을 보면서 소만리는 그에게 맞았던 기억을 떠올렸다.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반격하려고 했다. 이때 뒤에서 휙 하고 바람이 불어왔다.기모진의 따스한 손이 그녀의 어깨를 안아서 한 쪽으로 비키도록 했다.소만리는 일순 익숙하고도 낯선 온기에 둘러 싸였다. 미처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육정이 붕 날아 나무에 부딪히더니 곧바로 기모진의 손이 그의 팔을 비틀었다.육정이 ‘으어으어’ 소리를 질러댔지만 기모진은 전혀 풀어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육정의 무릎을 차 꿇어 앉히더니 한 방 시원하게 걷어찼다.소만리는 기모진이 이어서 육정을 두드려 팰 줄 알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더 없이 걱정스러운 듯 그녀를 감싸 안았다.“두려워 말아요. 내가 있으니까. 다시는 누구도 당신을 괴롭히지 못하게 해주겠습니다.”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감겨왔다. 비현실적으로 따스하면서도 긴장한 것이 그녀가 어딜 다치기라도 했을까 봐 진짜로 걱정하는 것 같았다.소만리는 멍하니 눈을 뜨고 점점 더 꽉 안아 드는 기모진을 느끼고 있었다.주룩주룩 내리는 비가 여름 끝의 밤바람과 만나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그러나 바짝 붙은 그의 가슴에서 체온이 전해졌다. 얇은 옷을 뚫고 그녀의 피부에 닿는 그 체온은 뜨거웠다.너무나 가까워서 그녀는 지금 두근대는 것이 자신의 심장인지 기모진의 심장인지도 알 수 없었다. 심장이 두근댈 때마다 생각이 흩어졌다.거의 정신을 잃기 직전에야 보이지 않는 상처에서 전해지는 날카로운 아픔이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기모진 씨, 한 번만 더 이러시면 화낼 거예요.”가볍지만 분명한 거절의 뜻이 담겨 있었다..기모진의 시선이 움찔하더니 그제서야 꿈에서 깨어나는 듯 했다.“아, 미안합니다.”그는 그녀의 귓가에 이렇게 가만히 속삭이고는 그녀를 풀어주었다.그는 도망치려던 육정을 잡아채 나무 옆으로 밀어붙였다. 검은 눈은 날카로운 칼 마냥 육정에게 꽂혔다.“잘 들어.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기모진의 얇은 입술에서 싸늘한 말이 흘러 나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