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겸, 당신이 졌어.”이 말이 고승겸의 고막을 울렸다.지금껏 소만리의 목소리는 분명 듣기 좋았는데 지금 고승겸에게는 그 목소리가 매우 귀에 거슬리고 쓰라렸다.그의 눈동자에 갑자기 한 줄기 차가운 빛이 스쳐 지나갔지만 소만리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고승겸, 생각지도 못했지? 내 최면이 다시 풀릴 거라곤.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최면계의 대가라고 불렀고 스스로도 뛰어난 최면술을 가졌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당신도 이 정도에 지나지 않아.”소만리는 약간 비꼬는 듯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아마도 당신이 왕실 계승권 자리를 놓고 경쟁하느라 최면 능력이 떨어졌을 수도 있어.”“...”소만리의 말에 고승겸은 눈썹도 까딱하지 않았다.잠시 동안 그는 소만리가 한 말을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지만 오래 침묵하지는 않았다.고승겸은 낮은 소리로 웃기 시작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소만리, 당신 아직도 나한테 화났지? 여기 이렇게 하객들도 많고 할아버지도 계시니 쓸데없는 소란 피우지 마.”고승겸은 비위를 맞추는 듯한 눈빛으로 소만리가 방금 한 말을 거두어 주기를 암시했지만 소만리는 고승겸의 눈빛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무시했다.“고승겸, 더 이상 누구를 우롱할 생각하지 마. 비록 당신은 총명하고 능력도 뛰어나지만 당신 같은 사람을 산비아 차기 군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산비아 시민들의 슬픔이야.”소만리는 인정사정없이 고승겸에게 일침을 가했다.고승겸은 잠자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객들이 수군수군거리며 귓속말로 속삭이기 시작했고 그 말이 고승겸의 귀에 그대로 미끄러져 들어와 그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지금 가장 기쁜 사람은 고승근의 엄마였다.지금의 이런 상황은 고승겸에게 매우 불리하게 돌아갔고 이는 곧 고승근에게 상당히 유리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엄마로서 당연히 기뻐할 일이었다.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고승겸의 할아버지는 잠자코 입을
남연풍을 아는 이들 외에 남연풍을 모르는 이들도 이 장면을 보고 상당히 놀라는 표정이었다.“저 여자 누구야?”“뭔가 고승겸을 폭로하러 온 것 같은데.”“쉿, 말 함부로 하지 마. 어쨌든 산비아의 자작 공자야. 확실한 걸 알기 전에는 함부로 죄를 뒤집어 씌우지 마.”이 말을 듣고 홀의 분위기는 다시 조용해졌다.고승겸의 할아버지도 남연풍에 대해 깊은 인상이 남아 있어서 남연풍을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몇 년 전 고승겸은 남연풍과 결혼할 뻔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남연풍은 고 씨 일가를 떠났고 이후 아예 산비아를 떠나 버렸다.할아버지는 지금 이런 모습의 남연풍을 보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할아버지, 저 모르지 않으시죠?”남연풍은 담담한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저를 기억하신다면 지금 제가 하는 말도 믿으실 수 있지 않을까요?”할아버지는 입술을 오므린 뒤 잠시 생각한 듯 고개를 숙였다가 입을 열었다.“말해 보거라.”남연풍은 이 말을 듣고 휠체어를 돌려 얼굴이 잿빛으로 변해가는 고승겸의 얼굴에 시선을 던졌다.“소만리가 한 말은 전부 사실이에요. 고승겸은 처음부터 소만리의 배경을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소만리에게 접근했어요. 소만리에 대해선 남녀 간의 정을 느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남연풍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고승겸, 당신 설마 잊었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나라고 말한 거 말이야. 당신이 소만리와 결혼하는 건 단지 왕실 계승권을 위해서라고 말한 거. 그리고 왕실 계승권을 쟁취하게 되면 소만리와의 관계는 정리하고 당신은 나의 남자가 되어 우리의 이루지 못한 인연을 다시 이어가자고 말했지, 기억나?”고승겸은 할 말을 잃은 듯했고 웃음을 머금고 있는 남연풍을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남연풍은 고의로 폭로한 것이다.그녀는 일부러 여러 사람들 앞에서 이런 말을 했고 그의 모든 계획을 망치려고 작정하고 한 행동이었다.고승겸의 가슴속에 불덩이가 점점 커지고 있었고
남연풍의 말을 들은 고승겸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떻게 그럴 수가?절대 그럴 수가 없다.고승겸은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부인했지만 남연풍의 굳은 눈빛이 그녀의 말이 사실임을 말해주었다.남연풍은 고승겸과 잠시 서로의 눈을 마주 보다가 차갑게 눈을 떼고 할아버지에게 간곡하고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제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에요. 만약 할아버지가 못 믿으시겠다면 다른 사람을 찾아서 충분히 확인시켜드릴 수 있어요. 할아버지가 능력이 없으신 분도 아니고 더 알고 싶은 게 있으시다면 반드시 눈으로 직접 확인하실 수 있어요.”남연풍은 마지막으로 고승겸을 힐끔 쳐다보며 가차없이 비아냥거리는 눈빛을 던졌다.“저는 고승겸이 산비아의 왕좌를 차지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여기 계신 모든 분들께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고승겸은 지금 이 순간 그의 마음을 형용할 길이 없었다.이미 분노는 끓어오를 대로 끓어올라 일촉즉발의 상태가 되었다.그러나 앞에 있는 이 사람은 다름 아닌 남연풍이다.남연풍.모든 일에 그녀 자신보다 고승겸을 우선시하던 그녀였다.고승겸 앞에서는 말조차 함부로 하지 못하고 항상 조심스러워하던 여인이 이제는 그를 가차없이 초라하게 만들고 심지어 그가 죽기를 바라고 있다.고승겸은 할 말이 없었고 그저 남연풍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그러자 고승근의 엄마가 냉소를 날리며 끼어들었다.“아버님, 남연풍까지 고승겸의 사람됨을 이렇게 폭로하는데 어떻게 이런 사람이 미래의 산비아 후계자가 될 수 있겠어요?”“할아버지, 저도 산비아 왕좌를 쟁취하고 싶지만 저런 비열한 수단을 써서는 안 되죠. 고승겸의 저런 행동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어요. 모든 일은 정정당당해야 해요.”고승근은 차가운 눈빛으로 말을 하다가 갑자기 눈을 들어 공손하게 소만리에게 물었다.“소만리, 이미 두 분 사이가 가짜로 판명이 났으니 말인데 임신 같은 건 아예 없던 일인 거죠, 그렇죠?”소만리는 입꼬리를 말아올
남연풍은 순간 고승겸의 불만이 극도로 끓어오르는 것을 눈치채고 그가 어떤 행동을 보일지 직감했다.고승겸을 두려워하고 그의 지위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을 테지만 그녀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승겸, 당신이 지금 몹시 불만스럽고 불쾌한 심정이라는 거 알아. 하지만 뭐가 그렇게 불쾌한 거야? 지금까지 당신이 걸어온 길은 당신 스스로 선택한 거야.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한 일에 스스로가 책임을 지는 거야. 내가 AXT69를 개발한 죄로 내 아이를 잃은 것처럼 당신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구.”남연풍의 마지막 말이 고승겸을 격하게 자극했다.그의 두 눈은 마치 매서운 칼바람을 집어삼킨 것 같았고 순식간에 주홍빛으로 물들었다.그는 자신을 높은 곳에서 끌어내리겠다는 결심을 굳힌 여인을 보며 침울하고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가 갑자기 비웃음 가득한 얼굴이 되어 아무 말없이 돌아섰다.고승겸은 그냥 훌쩍 걸어갔다.앞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그에게 길을 열어 주었다.고승겸은 아무 반박도 변명도 없이 혼자 인파를 헤치고 금빛 찬란한 궁전에서 사라졌다.남연풍은 휠체어를 돌려 고승겸이 떠나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그녀의 가슴에서 피눈물이 나는 것 같은 아픔이 느껴졌다.그녀는 고승겸이 평생 그가 바라던 욕망에 닿지 못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가 마지막까지 꿈꾸던 꿈, 그가 갈망하던 삶은 여기서 종지부를 찍었다.하지만 남연풍은 후회하지 않았다.그때 조용한 분위기를 깨고 여자의 웃음소리가 울렸다.고승근의 엄마가 입을 가리고 웃고 있는 것이었다.고승겸이 이렇게 고꾸라졌으니 이제 왕위 자리를 넘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의 아들뿐이었다!소만리는 궁전에 더 머물 생각이 없었고 어서 빨리 기모진을 찾으러 가고 싶었다.그녀는 대기실로 가서 미리 준비해 놓은 옷으로 갈아입고 문을 나섰다.그러나 뜻밖에도 남연풍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일부러 기다린 거예요?”소만리가 물었다. 남연풍이 고개를 가로저었다가 이내 고개
이 사람은 다름 아닌 결혼식이 시작되기 전에 기모진과 함께 있었던 그 시중이었다.소만리는 기모진을 찾고 있었고 이 시중이 기모진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을 것 같아서 소만리는 한걸음에 달려갔다.소만리는 이 시중의 이름이 무엇인지 몰라 부르기도 어려웠고 해서 얼른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소만리가 시중을 향해 달려가는데 갑자기 시중이 돌아섰다.시중은 소만리를 보지 못한 듯 곧장 어떤 방 앞으로 가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문을 밀고 들어갔다.소만리는 뭔가 수상한 느낌이 들어서 재빨리 뒤쫓았다.방 문이 닫히려는 찰나에 소만리는 얼른 손을 넣어 문을 밀고 들어섰다.그녀가 막 방에 들어서자마자 안에서 시중의 가냘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원래는 그냥 가려고 했는데 막상 가려니 아쉬워서 다시 왔어요. 그런데 기 선생님이 이렇게 깨어나셨을 줄은 몰랐네요.”소만리는 시중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고 잠시 그 자리에 멈추었다가 바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순간 소만리는 상반신을 벗고 침대에 앉아 있는 기모진을 보고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정신이 아득해졌다.기모진은 의식이 아직 제대로 깨어나지 않은 듯 가늘고 긴 손가락을 관자놀이에 대고 눌렀다.그의 짙은 눈썹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고 안색도 몹시 나빠 보였다.소만리는 심호흡을 하며 자신의 감정을 추스렸다.“모진.”기모진이 소리를 듣고 관자놀이를 누르던 손짓을 멈췄고 침대 옆에 서 있던 시중과 함께 고개를 돌려 소만리 쪽을 보았다.소만리가 눈앞에 보이자 그는 깜짝 놀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아가씨, 어떻게 아가씨가 여길?”시중은 소만리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되물었다.“아가씨는 겸이 도련님과 결혼식을 올리고 있지 않았어요? 왜 여기 나타났어요?”시중은 의아한 듯 물었고 소만리는 덤덤한 표정으로 시중을 쳐다보다가 곧장 기모진에게 시선을 옮겼다.그녀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옷을 주워 들고 손으로 깨끗이 정돈한 후 기모진의 몸에 걸쳐 주었다.“아가씨, 뭐 하
소만리.시중은 똑똑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소만리는 이 시중이 얼마나 도도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게다가 기 선생님과 저는 방금 남녀 사이의 관계를 맺었단 말이에요. 그러니 나야말로 기 선생님을 돌볼 자격이 있는 사람이죠.”시중의 말이 소만리의 귓가에서 맴돌았다.소만리의 목구멍에 갑자기 뭔가가 걸린 것처럼 그녀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그러나 소만리는 바로 정신을 다잡았고 그녀가 기모진을 뒤돌아보려고 하던 순간 기모진이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았다.소만리의 갈색 눈동자가 번쩍였고 그대로 기모진의 부드러운 눈빛에 부딪혔다.그러나 따뜻하던 그의 눈빛은 이내 날카로운 매의 눈빛이 되어 옆에 서 있던 시중에게 향했다.“내 가까이 있어야 할 사람 중에 내 여자 소만리보다 더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어. 요 며칠 동안 날 돌보게 해 준 걸로 난 너한테 충분히 체면을 세워줬다고 생각해. 그렇지만 만약 소만리에게 이런 식으로 대항한다면 난 너와 목숨 걸고 싸울 거야.”“내, 내 여자 소만리?!”시중은 경악하며 눈알이 휘둥그레졌다.“기 선생님, 지금 내 여자 소만리라고 했어요?”기모진은 시중을 쳐다보기조차 귀찮다는 듯 바지를 챙겨 들고 욕실로 천천히 들어갔다.방 안에 있던 소만리는 침대에서 내려와 얼굴에 짙은 어둠이 드리워진 시중을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내가 진작에 당신한테 말했었지. 기모진한테는 이미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고. 내가 당신한테 충고해 줬잖아.”소만리는 옷차림이 단정하지 못한 채 서 있는 시중을 돌아보며 한마디 더 덧붙였다.“당신이 지금 스스로에게 한 짓은 누구도 원망할 수 없어.”“...”시중은 얼굴이 붉어졌고 목을 길게 빼고 머쓱해했다.“소만리, 그게 무슨 뜻이에요? 당신은 기 선생님에게 어떤 사람이에요?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은 분명 겸이 도련님의 아내인데 왜 자꾸 기 선생님과 이렇게 가까이 지내는 거예요? 기 선생님은 또 왜 당신을 내 여자라고
시중은 정신이 멍해졌다. 지금 자신이 들은 것을 믿을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그녀는 방금 일어난 일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무슨 뜻이죠?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이냐구요?”시중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멍하니 소만리와 기모진을 바라보았다.그들이 부부라니?그렇다면 소만리는 왜 겸이 도련님과 결혼하려고 했을까?도저히 그녀의 머리로는 답을 생각할 수 없었다.고승겸은 왜 시중인 자신과 기모진을 엮어주려고 했던 것일까?“소만리, 당신한테 할 말이 있어.”기모진은 미안한 마음을 품은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당신이 나한테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 여기는 말하기 좀 그러니까. 우리 우선 여길 떠나자. 내가 이미 내일 아침 비행기 티켓 예약해 뒀어. 우리는 내일 집에 가는 거야.”기모진은 의아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고승겸이 당신을 괴롭히지 않을까?”소만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고승겸은 지금 자기자신도 지키기 버거울 걸.”기모진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의아해하다가 이내 다정하게 웃으며 소만리의 손을 잡았다.시중은 돌아서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언짢은 얼굴을 하고 그들 앞으로 달려갔다.“기 선생님, 설마 그냥 가시는 거예요? 난 그게 처음이었는데 이렇게 무책임한 사람이었어요?!”소만리와 기모진은 발걸음을 멈췄고 시중의 말에 기모진의 얼굴에는 갑자기 언짢은 기색이 떠올랐다.그는 서둘러 해명하려 하지 않았고 그저 미안한 눈빛으로 소만리를 바라보았다.시중은 더욱 슬픈 표정을 하면서 이번에는 눈에 눈물까지 그렁그렁한 채 기모진을 주시했다.그녀의 눈에는 억울함과 쓸쓸함이 가득해 보였다.“기 선생님, 난 진심으로 선생님을 좋아해요. 방금 일어난 일은 내가 스스로 원해서 한 거예요. 그래서 전 너무 기뻐요. 그러니 제가 당신과 같이 가게 해 주세요. 앞으로도 기 선생님을 잘 돌볼게요.”“절대, 절대 그럴 가능성은 없어.”기모진은 단호하
시중은 극도로 화가 나서 주먹을 불끈 쥐며 이를 악물고 소만리를 노려보았다.“소만리, 당신 완전히 미쳤군요!”시중은 화가 나서 욕설을 퍼부었고 마음속에는 질투심이 활활 끓어올랐다.“좋아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었다고 하는데도 그렇게 담담하게 웃다니. 완전 미친 여자야!”소만리는 대수롭지 않은 듯 웃으며 말했다.“뭐, 남자는 기회가 생기면 마다하지 않는 것이 정상인 것이지. 다시 말하지만 당신도 기쁘다고 했잖아? 생각해 봐. 당신이 원해서 한 일에 대해 누구를 원망할 수 있겠어? 안 그래?”“...”시중은 입을 다물었다.더 이상 소만리에게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저 소만리를 노려보고만 있었다.그러나 소만리는 시중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전혀 개의치 않았고 핸드폰을 거두어들이며 기모진의 팔을 잡고 다정하게 웃었다.“모진, 이제 가자. 내가 이미 택시 불렀어. 우선 호텔로 먼저 가자.”기모진은 소만리와 시중이 입씨름을 하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때도 소만리의 말을 잠자코 들을 뿐 아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만리의 손을 잡고 산비아 궁전을 떠났다.택시 안에서 소만리는 기모진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그녀는 기모진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대었다.눈을 지그시 감으니 한없이 편안한 안정감이 밀려드는 것 같았다.기모진은 그의 넓은 어깨를 소만리에게 내어주며 그녀를 감싸 안았다.그녀의 편안한 미소를 내려다보았다. 왠지 모르게 그의 마음속에는 그녀에 대한 미안함이 물씬 피어올랐다.“소만리, 언제 최면에서 깨어난 거야?”기모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어제.”소만리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남연풍이 내 최면을 풀어줬어. 그녀는 정말 똑똑한 사람이야.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좋은 머리를 가지고 대부분의 시간을 잘못된 곳에 써 버렸지 뭐야.”그녀는 남연풍의 처지를 생각하다 안타까운 듯 한숨을 내쉬었고 예쁜 눈을 들어 기모진의 촉촉한 눈을 바라보았다.“그 여자 당신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