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만리는 미소를 지으며 몸을 구부렸다.사화정과 눈높이를 맞춘 다음 참을성 있게 물었다.사화정은 곁에서 가식적인 웃음을 짓고 있는 양이응을 바라보며 소만리의 손을 꼭 잡았다.“나, 너한테 비밀 하나 말해줄게.”“비밀?”소만리는 궁금해하며 물었고 양이응을 바라보는 사화정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여사님, 저한테 무슨 비밀 알려주시려고요?”“저 여자, 저 여자는 내 딸이 아니야.”사화정의 이 말은 또렷하게 소만리의 귓가에 떨어졌다.소만리는 깜짝 놀랐다.정신도 온전치 않은 사화정이 양이응이 가짜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진짜야. 내가 말한 거 정말이라니까.”사화정은 여전히 진지한 표정으로 강조했다.소만리는 당연히 사화정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어떤 대응도 할 수 없었다.고승겸에 대한 정체도 아직 파악하지 못한 데다 한편으로 걱정거리였던 양이응에 대한 정체는 정확히 파악했지만 중요한 건 아직 소만리가 기모진을 대면할 용기가 없다는 것이었다.소만리는 마스크를 벗은 모습으로 그와 눈을 마주칠 엄두가 나지 않았다.양이응은 사화정이 소만리에게 무슨 귓속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했다.그러나 양이응은 그것에 대해 자세히 캐묻지는 않았다.소만리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사화정을 돌보며 아침 식사를 마쳤다.두 아이가 유치원에 간 뒤 막내아들은 위청재가 돌보았기 때문에 소만리는 안심하고 사화정과 함께 주변 공원을 산책했다.소만리는 사화정의 정신 상태가 예전에 비해 확실히 좋아졌다는 걸 느꼈다.이제 사화정은 완벽하게 문장을 말할 수도 있게 되었다.소만리는 사화정을 태운 휠체어를 어제 왔었던 그 나무 아래 세웠다.어제의 일을 떠올리니 그녀는 약간의 두려움이 느껴졌지만 아이가 무사하다는 걸 생각하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느껴졌다.소만리는 가만히 그동안의 일을 생각해 보았다.마치 하늘이 그녀의 가족을
그녀가 소만리인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소만리는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저 깊은 곳에서 뭉클함이 솟아올랐다.이 모습을 보고 사화정도 뭔가 느꼈을지도 모른다.소만리는 천천히 사화정 앞에 자세를 낮춰 몸을 웅크렸고 손을 들어 사화정의 손을 잡았다.소만리의 손에 전해지는 사화정의 온기가 곧바로 심장으로 전달되는 것 같았다.그 온기만으로도 소만리의 가슴속에 맺혔던 억울함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엄마, 나 소만리야.”소만리는 나직이 읊조렸다. 더 이상 사화정 앞에서 가면을 쓰고 있을 수는 없었다.사화정은 아직 완전히 몸이 회복된 건 아니어서 소만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그러나 이렇게라도 하니 소만리의 마음속 응어리는 확실히 풀리는 것 같았다.이 말을 들은 사화정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그 눈빛은 마치 한순간에 더 많은 사랑과 애틋함을 담은 모성애가 솟구쳐올라 소만리를 따스하게 감싸주는 것 같았다.소만리는 말할 수 없는 뭉클한 감정을 느꼈고 마음 한구석에 쌓여 있던 울분과 진실을 거침없이 토해내었다.“엄마, 나랑 얼굴 똑같이 생긴 그 사람은 예전에 경연의 여자친구였던 여자야. 그날 내가 마트에 가서 케이크 만들 재료를 사러 갔다가 주차장에서 날 음해하고 정신을 잃게 만들었어.”“그리고 경연이 날 끌고 어느 작은 섬으로 데려갔지. 그는 매일 나를 보러 오면서도 특별히 괴롭히지는 않았어. 단지 그 사람의 마지막 한 달 남은 인생을 함께 보냈으면 좋겠다고 했어. 왜냐하면 한 달 후면 법원에서 그 사람한테 사형 선고를 내릴 거였거든.”“그런데 나중에 경연이 나한테 내기를 하자고 했어. 내가 이기면 거기서 풀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내가 이기니까 말을 바꿔 버렸어. 난 그 사람한테서 벗어나기 위해 요트에서 바다로 뛰어내렸지. 경연이 뒤에서 요트를 타고 쫓아왔는데 갑자기 요트에서 기름이 새서 요트에 불이 붙었고 결국 요트는 폭발했어...”그때를 다시 떠올리자 소만리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또 웅웅거리는 소리가
양이응의 음흉한 미소를 보는 순간 소만리는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사실 양이응은 소만리를 적절히 견제할 방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왜냐하면 가족을 끔찍이 생각하는 소만리에겐 가족 그 자체가 약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양이응은 이 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양이응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갑자기 발을 들어 사화정의 휠체어를 등 뒤에서 세게 걷어찼다.휠체어의 다리에 잠금장치를 해놓았지만 양이응이 워낙 세게 발로 차서 바퀴가 미끄러졌고 휠체어가 통제력을 잃고 앞으로 미끄러져 나갔다.“엄마!”소만리가 얼굴이 사색이 되어 달려갔다.휠체어가 미끄러져 내려가는 곳 바로 앞은 호숫가였다.만약 사화정이 호수에 빠지기라도 한다면 소만리는 정말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그녀는 쏜살같이 뛰어가 휠체어의 손잡이를 잡아당겨 있는 힘껏 휠체어를 뒤로 잡아 끌었다.다행히 사화정은 호숫가로 떨어지지 않았지만 소만리는 갑자기 등 뒤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이 느껴졌다.뒤따라오던 양이응이 소만리가 무방비 상태인 틈을 타 손을 들어 소만리를 호수로 힘껏 밀어 버렸다.소만리는 갑자기 중심을 잃고 호수로 풍덩 빨려 들어갔다.“흥.”양이응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호수에서 발버둥 치는 소만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소만리가 수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아무도 구해주지 않는다면 소만리는 곧 익사할 것이다.휠체어에서 미끄러져 넘어진 사화정이 이 모습을 보고 순간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소만리!”양이응은 사화정의 고함 소리를 듣고 본인이 잘못 들은 줄 알고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사화정이 땅바닥에서 일어나려고 발버둥쳤고 양이응이 그 모습을 보고 걸어와 사화정을 발로 차 주저앉혔다.“아유, 호수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이 당신 귀한 딸 소만리인 줄은 아는 모양이지? 완전 바보는 아닌가 보군.”양이응은 한껏 비아냥거리다가 소리를 듣고 몰려오는 행인들을 보
”이미 틀려먹은 것 같아.”“아마 익사했을 거야.”“어이구, 어떡해. 쯧쯧.”구경하던 사람들이 저마다 안타까운 듯 한 마디씩 했다.그런 말들이 양이응의 귀에도 들어갔고 양이응은 그 말을 듣고 너무나 흡족했다.소만리, 죽었다니 정말 잘 됐어.네가 경연을 죽인 업보야!그녀는 마음속으로 한껏 저주의 말들을 퍼부으며 분풀이를 했다.그러나 그녀가 득의양양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 순간 뜻밖에 호수 한가운데 잔물결이 일렁이기 시작했다.곧이어 호수 표면에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보였다.온몸이 흠뻑 젖은 소만리가 손을 들어 이마를 덮고 있던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얼굴을 내밀었다.소만리의 이런 모습에 모든 사람들은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소만리는 얼굴을 돌렸다.젖은 마스크가 얼굴에 달라붙어 아무도 소만리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맑고 날카로운 눈매는 보는 이들을 압도하고도 남았다.소만리는 호숫가에 모여든 사람들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고 날카로운 시선을 들어 그 많은 군중을 뚫고 정확히 양이응에게 시선을 떨구었다.소만리는 유유히 헤엄쳐 호숫가 가장자리로 갔다.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었다.양이응은 어안이 벙벙했다. 소만리가 언제 수영을 배웠는지 그녀로서는 전혀 알 길이 없었다.양이응은 소만리의 과거 모든 자료와 이력을 살펴보았었다.그 안에는 소만리가 수영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히 적혀 있었다.소만리에 관한 모든 것을 숙지한 후 충분히 준비했는데 뜻밖에 이런 복병이 생기다니 생각할수록 양이응은 분통했다.사람의 마음이 이렇게도 간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소만리는 오늘 양이응을 보고 또 한 번 깨달았다.이 여자가 이렇게 사악할 줄은 몰랐다.넋을 잃고 멍해 있는 양이응에게 소만리가 조용히 다가가고 있었는데 주변에서 구경꾼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와, 아까 물속에서 나오는 장면 내가 찍었는데 정말 멋있어요.”“눈이 이렇게 아름다운 걸 보니 역시 얼굴도 예쁠 것 같아.”“흠
이 말을 들은 소만리는 앞으로 양이응이 무슨 짓을 할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한 손으로 사화정의 손을 잡았다.사화정의 손을 뿌리치는 그 어떤 제스처도 하고 싶지 않았다.소만리는 양이응의 얼굴을 피해 가려고 했는데 양이응이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와 속삭이는 척하다가 그녀의 얼굴에서 마스크를 확 떼어냈다.젖은 마스크에 아름다운 눈매가 도드라져 사람들을 감탄하게 했던 소만리의 얼굴에 사람들의 시선이 확 쏠렸다.화상으로 인해 울퉁불퉁 뺨에 난 흉측한 흉터가 사람들의 눈에 들어왔다.“어머! 사람 얼굴이 왜 저래!”“그래서 마스크를 쓰고 있었구나.”“너무 흉측해. 어쩌다 얼굴이 저 지경이 된 거야. 화상 당했나 봐.”“쯧쯧, 놀래라. 정말 못 봐주겠어.”사람들은 저마다 괴성을 지르며 놀란 반응을 보였고 일부는 고개를 돌려 다시는 소만리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는 듯 진저리를 쳤다.그중에는 동영상으로 이 광경을 찍어 인터넷에 올린 사람들도 있었다.양이응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고는 감출 수 없는 기쁨에 입꼬리가 저절로 말려 올라갔다.“어때? 사람들한테 놀림당하는 느낌이?”양이응은 낮은 목소리로 비꼬았다.“흥, 소만리. 네가 소만리라고 하면 기모진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지금 이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잖아. 아마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거야. 그때가 되어 기모진이 너를 싫어하게 되면 너는 지금보다 몇 배는 더 괴로울 테니까!”소만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양이응의 도발적인 말 한마디 한마디를 듣는 와중에도 주변 사람들이 못생겼다느니 얼굴이 추악하다느니 하는 말들이 끊임없이 들려왔다.소만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걸음을 옮겨 사화정의 뒤로 다가가 휠체어를 밀었다.지나가는 사람들의 따가운 눈초리 속에서도 소만리는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갔다.양이응은 소만리의 당당한 뒷모습을 보며 득의양양하게 웃었다.소만리, 네가 지금 억지로 버티고 있다는 거
그녀는 갑자기 마음이 움츠러들었다.그러다 양이응이 오만하고 우쭐해하면서 한 말이 떠올랐다.자신이 기모진에게 솔직하게 말할 용기가 없다는 걸 확신하는 도도하고 자신만만한 양이응의 눈빛을 생각하니 정말로 견딜 수가 없었다.소만리는 다시 주먹을 불끈 쥐고 심호흡을 했다.스스로에게 냉정해져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문을 걸었다.하지만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면 도저히 그런 침착함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뒤돌아섰다. 다시는 보러 가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그녀는 이렇게 오랫동안 거울을 등지고 서서 얼굴에서 밀려오는 따끔따끔한 통증을 참았다.갑자기 어두움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어쩌면 가서 시도라도 해봐야 할 것 같았다.소만리는 옷을 갈아입고 마스크를 썼다.막 나가려고 할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소만리가 다가가 문을 열자 기모진이 눈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두 눈이 마주치자 소만리는 약간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아 말했다.“사장님, 무슨 일로 오셨어요?”소만리는 기모진이 왜 집으로 돌아왔는지 이상하게 여겼다.기모진은 아이들을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회사로 갔어야 되는데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그리고 소만리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모진이 소만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뭔가 평소와 달랐다.“괜찮아?”잠시 동안 소만리를 지그시 바라보던 기모진이 드디어 입을 열어 물었다.괜찮냐고?소만리는 영문을 몰라 눈망울을 굴렸고 이내 조금 전 공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사장님도 알고 계셨어요? 방금 일어난 일?”“그래.”기모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지금 괜찮아?”“네,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전 괜찮아요.”소만리는 아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죄송한데요, 사장님. 제가 잠시 외출할 일이 좀 있는데 휴가 좀 쓸 수 있을까요?”“지금 나가게? 내가 데려다줄게.”“...”소만리는 기모진이 예전에 이렇게 다정하고 살갑게 대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소만리가 마스크를 벗는 순간 남사택과 이유심은 동시에 놀란 기색을 보였다.남사택은 더욱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얼굴이, 목소리는 또 어떻게 하다가? 아니, 그러니까 오늘 아침 당신 기 씨 본가 근처 공원 호수에서 누군가 물에 빠진 사건, 그 얼굴이 혹시 당신...”이 말을 듣고 소만리도 순간 깨달았다.아침에 일어난 일을 누군가가 동영상으로 찍어서 인터넷에 퍼트렸고 분명 그 동영상에는 양이응의 모습도 있었을 것이다.현재 양이응의 모습은 바로 자신의 얼굴이었다.그녀의 얼굴이 카메라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났을 것이다.놀란 남사택의 모습에 소만리도 더 이상 빙빙 돌리지 않고 말했다.“당신이 본 그 얼굴은 내가 아니에요. 내 얼굴을 하고 있는 그 여자는 양이응이예요.”“양이응?”남사택은 문득 Y국에 있을 때 양이응도 경연을 따라 Y국에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경연이 양이응에게 은밀히 뭔가를 지시하는 것을 분명히 목격했었다.알고 보니 양이응이 성형 수술을 하도록 지시하고 뭔가 계략을 꾸민 모양이었다.하지만 남사택은 지금 눈앞의 소만리의 얼굴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눈 외에는 예전의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이마에 난 상처는 차치하고라도 뺨에 도드라진 흉터는 정말 차마 똑바로 눈 뜨고 쳐다볼 수가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어떻게 하다가 얼굴이 이렇게 상했어요? 왜 이렇게 심각하게 다친 거예요? 그리고 당신 목소리, 당신 목소리라고는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기모진은 당신이 지금 이렇게 된 것을 몰라요?”소만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소 쓸쓸한 듯 눈을 내리깔았다.“그 사람은 몰라요.”“말 안 했어요? 당신이 이런 모습으로 변한 걸 알면 싫어할까 봐?”남사택은 소만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이 정확하게 추측했다.“너무 많이 걱정하지 마세요. 기모진은 당신을 싫어하거나 버릴 사람이 아니에요.”소만리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도 내 이런 모습이 싫은데 어떻게 내 아이에게 지
”그럼 저 두 아이는 사실 당신과 초요의 아이가 아닌 건가요?”이 말을 듣고 있던 남사택의 눈썹에 오히려 긴장감이 풀린 모습이었다.그는 아이들을 데리고 놀고 있는 이유심을 향해 몸을 돌려 말했다.“유심, 내가 환자를 데리고 사무실에 가야 할 것 같아. 답답하면 애들 먼저 데리고 나가도 돼. 식당 쪽은 내가 이미 예약해 뒀어.”이유심이 남사택의 말을 듣고 돌아보았고 소만리를 흘끔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당신 바쁜 일 보세요. 전 여기서 기다릴게요.”“그래.”남사택은 따뜻한 미소로 화답했고 사무실을 가리키며 소만리를 안내했다.“이쪽으로 따라오세요.”소만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갔다.지난번에 이곳에 와서 기모진의 몸 상태에게 대해 이것저것 검사했던 기억이 떠올랐다.그랬던 곳에 이번엔 자신이 환자가 되어 찾아올 줄은 미처 몰랐다.남사택은 두 아이에 대한 소만리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소만리의 얼굴에 난 상처를 세심하게 검사하는 데 몰두했다.검사를 마친 후 그는 진지하게 결과서들을 살펴보았다.“남사택, 솔직하게 얘기해 줘요. 내 얼굴, 정말 고칠 수 없는 건가요?”소만리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의사의 임무가 뭔지 아세요?”“그야 사람을 구하는 일이죠.”소만리가 망설이지 않고 단번에 대답했다.남사택은 옅은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나에게는 사람을 살리는 것뿐만 아니라 남들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의학적 난제들을 풀어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커요.”그는 소만리를 바라보았다. 그의 차분하고 검은 눈동자에서 아주 밝은 빛이 감돌았다.“예전에 당신이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무사히 아들을 낳을 수 있었던 것이 최근 몇 년 동안 내가 해낸 일 중 가장 완벽하게 난제를 푼 일이었어요. 그래서 오늘에 이르렀고 이번에도 난 당신을 예전처럼 똑같이 도울 거예요. 당신도 내가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많이 도와주세요.”이 말을 들은 소만리의 눈에는 순식간에 희망의 빛이 피어올랐다.그녀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