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야?”그녀가 물었다.“내가 약속했잖아. 선을 넘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절대로. 당신은 집에 얌전히 날 기다리고 있어. 응?”남자는 그녀의 머리를 사랑스럽게 만지작거리다가 멋있게 돌아섰다.“모진.”소만리가 그를 불렀다. 남자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그녀에게 가만히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걱정 마.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소만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차를 몰고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녀도 곧 따라나와 실험실로 향했다.기 씨 그룹으로 가는 길에 기모진은 두 통의 전화를 걸었다.두 번째 전화는 경연에게 거는 것이었다. 경연은 바로 전화를 받았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이 시간에 어쩐 일로 나한테 전화할 시간이 있었어? 인터넷에 올라온 거 다 봤겠지? 어때? 어떻게 처리할 생각인가?”기모진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어젯밤의 일은 인정하는 거로군. 다 당신이 계획한 거지?”경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말했다.“기모진, 자고로 남자에게는 통과하기 어려운 두 개의 관문이 있는데 하나는 여자이고 다른 하나는 권력과 영광이지.”“당신은 전자를 선택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당신의 약점이 되었어.”경연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기모진, 사실 난 당신과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 마지막까지 함께 갈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었지만 당신은 이미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경연은 마치 이미 기모진을 다 이긴 듯 말하고 난 후 전화를 끊었다.기모진은 블루투스 이어폰을 뺀 채 깊은 눈빛으로 앞을 바라보다가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번뜩 스쳐 지나갔다.그는 기 씨 그룹을 향해 차를 몰았다.입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많은 사람들, 기자들, 그리고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기모진이 왔다!”누군가가 갑자기 외쳤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차에 앉아 있는 기모진을 향했고 하나 둘 그에게 달려왔다.기모진의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소만리를 보고 기모진은 놀랐다.“소만리, 당신 여기 어떻게 왔어?”소만리는 곧장 기모진에게 다가가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당신이 말했듯이 난 당신 아내야. 우리가 부부인 이상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 난 본래부터 당신과 함께 있었어야 해.”그녀는 기모진의 손을 잡고 한 마디 한 마디 단호하게 말했고 눈빛은 더욱 날카로워져 그 기자를 쳐다보았다.“잘 들으세요. 내 남편은 경연이 아니에요. 기모진이라구요!”“...”그 기자는 소만리가 이렇게 기세등등하게 나올 줄 몰라서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서 있다가 몇 초 후에야 입을 열고 비꼬며 말했다.“소만리, 당신은 경연의 합법적인 아니에요. 그런데 당신은 지금 공공연히 기모진과 한 편에 서 있고 기모진이 당신 남편이라고 주장하고 있어요. 이렇게 되면 당신에게 경연은 뭐예요?”그 기자는 더욱 경멸하는 표정과 비꼬는 말투로 말을 덧붙였다.“당신은 어쨌든 경도의 유명한 집 딸인데 이런 말을 하고 또 이런 부도덕한 일을 하고도 어찌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거예요?”그 기자는 구구절절 소만리의 말을 맞받아쳤지만 소만리는 놀라지 않고 담담하게 응수했다.“맞아요. 난 정말 당당하고 떳떳하게 생각해요. 한 평생 이렇게 완벽하고 훌륭하며 나에게 모든 사랑을 주는 남자가 있다는 것은 정말 영광이에요!”“헛...”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소만리의 말을 듣고 모두 비난했다.“소만리, 당신 이 대낮에 그런 말을 하는 게 스스로 낯 뜨겁지 않습니까?”“그러게, 뻔뻔스럽군!”“당신은 어쨌든 모 씨 집 귀한 자식이었는데 어떻게 돌아가신 당신 부모님은 당신한테 예의와 염치를 가르치지 않으셨죠?”“모두 입 다물어!”기모진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고 소만리를 공격하던 사람들은 갑자기 두려움에 떨고 몸서리를 치며 한 마디도 더 말하지 못했다.기모진은 차가운 기운을 가득 담아 도발적인 발언을 쏟아내던 그 기자를 바라보았다.그 기자는
이때 소만리는 기모진이 전화를 받는 모습을 보았고 동시에 주변에서 핸드폰 알림음이 잇따라 울리는 것을 들었다.소만리의 핸드폰에서도 알림음 소리가 들렸다.기모진의 목소리가 곧이어 침착하게 들려왔다.“최신 인기 검색어가 나왔군. 눈이 있으면 볼 수 있겠지. 어떤 반응이 나오나 지금 나에게 똑똑히 보여줘.”그가 아직도 주저앉아 있는 기자를 날카롭게 쳐다보며 정중히 경고했다.“보고 나서 나한테 기어 와서 내 아내에게 사과해.”아내.그는 여전히 모든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소만리를 당당하게 아내라고 불렀다.지금 이 순간 기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최신 뉴스를 보기 위해 핫이슈를 클릭했다.이 기사는 국제범죄수사국 IBCI의 공식 인증 계정에서 나온 것이었다.기사를 몇 마디로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이렇다.[경연과 기모진은 모두 IBCI 멤버이며 이전에 업무상 필요 때문에 경연은 상부의 명령에 따라 소만리와 가짜로 결혼한 것임을 특히 강조하는 바입니다.]경연은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지 소만리의 진짜 남편이 아니었다. 그와 소만리는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관계일 뿐이었다.소만리는 깜짝 놀랐다. 이런 공지 내용을 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인터넷 댓글도 소만리와 기모진을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가장 더럽고 흉악한 키보드맨이 사라진 것 같았다.“뭐? IBCI? 가장 권위 있고 높은 국제범죄수사국 말이야?”“맞아. 나도 영화에서 봤는데 이 IBCI란 조직은 대단해!”“기모진과 경연이 모두 IBCI 멤버였구나...”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태도와 말투가 순식간에 달라졌다.가장 권위 있는 기관에서 직접 올린 해명을 보았기 때문이다.소만리와 경연은 단지 형식적인 결혼을 한 관계였을 뿐이고 기모진과 소만리는 그들이 생각하는 더럽고 부도덕한 관계가 아니었다.그래서 그들은 방금 이렇게 당당하게 서로를 인정하며 말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많은 사람들이 죄책감을 느꼈고 방금 몇 마디 욕만 한 것을 다행으로
소만리는 실험실로 가려던 마음을 바꿔 기모진이 있는 곳으로 갔었기 때문에 실험사는 구체적인 실험 결과를 보고서로 작성해서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하지만 기모진이 곁에 있었고 소만리도 그와 마주 보고 있었다.기모진이 그의 몸 상태를 그녀에게 알리길 원하지 않는 만큼 그녀도 자꾸 들추어내고 싶지 않았다.“소만리, 내가 집에 있으라고 했잖아? 당신 왜 따라왔어?”기모진의 의혹에 찬 목소리가 부드럽게 들려왔다.소만리는 핸드폰을 접어 넣으며 남자의 애틋한 시선을 올려다보았다.“약속했잖아.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우리는 함께 마주할 것이라고. 당신 혼자 비바람 한가운데 세워두지 않을 거야.”기모진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따뜻한 시선으로 소만리를 바라보며 살포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소만리.”“당신이 IBCI 사람에게 그 공지 기사를 올리라고 했어?”이번에는 소만리가 치고 들어와 질문했다. 기모진은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이 일을 잘 처리할 거라고 했잖아. 난 듣기 싫은 소리에 당신 이름이 거론되는 일을 그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을 거야.”그의 말을 들으니 소만리는 비로소 자신이 보호받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마음속 깊이 느끼는 이 심리적 안정감이야말로 가장 큰 안정감이다.한편, 경연은 컴퓨터를 보며 방금 IBCI가 발표한 공지를 한 글자씩 반복해서 곱씹었다.청초하고 온화한 그의 얼굴에 차가운 냉기가 안개처럼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그는 주소록을 뒤적여 누군가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인터넷 공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그는 상급자의 엄정한 말투로 그의 부서에 소속된 직원들에게 따져 물었다.앞서 기모진과 함께 강연을 체포했던 이 남자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상부의 지시였습니다. 저도 방금 봤어요.”경연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상급자? 기모진이 언제 IBCI 본사에 갔습니까? 본사에서 누굴 만난 거죠?”전화기 너머 남자는 대답했다.“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내가 아는
이때 소만리는 화장실에 가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아무도 없는 구석에서 슬그머니 숨어 실험사에게서 온 메시지를 열어 보았다.소만리는 맨 위에 배열된 데이터를 이해하지 못해서 바로 아래로 스크롤 했더니 실험사의 최종 결론을 볼 수 있었다.보고서가 말하길 이 사람은 몇 가지 알 수 없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고 이 바이러스들이 사람의 머리 색깔, 눈동자 색깔, 심지어 목소리까지 바꾸는 무서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혈액 투석 정도로 보아 당분간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는 말도 덧붙여 있었다.그러나 이 독소는 언제든지 변이를 일으켜 환자의 생명을 서서히 잠식해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고 했다.보고서 내용을 본 소만리는 관자놀이의 핏줄이 불뚝불뚝 튀어 오를 것만 같았다.모진, 역시 아직 낫지 않았어.그녀는 가슴이 먹먹해졌고 마음이 아파와 눈물이 앞을 가렸다.소만리는 기모진의 몸속에 있는 독소가 변이를 일으킬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그와 다시 만난 세상의 환한 불빛이 꺼지는 것 같았다.모진, 이번 생에 당신과 백발이 될 때까지 그저 평범한 사랑을 하고 싶었어. 그런데 이미 희망이 없는 것 같아.만약 정말 이렇게 끝날 수밖에 없다면, 앞으로 남은 날 동안 다시는 당신 손 놓지 않을 거야....예선은 인터넷에 올라온 기사를 보고 쓰레기 같은 기자들이 마구잡이로 글을 실어 나르는 것을 보았다.그녀는 먼저 소만리에게 기분 좋게 전화를 걸었다.“소만리, 경연과는 형식적인 결혼이었구나. 진작에 얘기했더라면 이렇게 걱정할 필요 없었잖아.”소만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사실 처음부터 이렇게 복잡할 필요가 없었는데 갑자기 경연이 이혼을 번복해서 일이 이렇게 됐어.”“번복? 경연이 번복했다고?”예선이 놀라며 말했다.“이건 그의 임무였다며? 그런데 왜 번복을 해?”소만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지만 이미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은 다 생각이 끝났다.“경연이 이혼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난 더 이상 기
의미심장한 뜻을 담아 경연이 되물었다.소만리는 그가 말하는 속뜻을 굳이 해석하고 싶지 않아서 그를 피해 앞으로 걸어갔다.경연은 스쳐 지나가는 소만리의 팔을 잡아당겼다.소만리는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쳤지만 경연의 힘이 더 세었고 저항하는 소만리를 한 번에 제압해 벽 쪽으로 밀었다.“당신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소만리도 이에 질세라 있는 힘껏 경연을 노려보았다.“난 당신을 해치고 싶은 마음이 없어.”경연은 입을 열었다. 그의 신비로운 검은 눈동자는 여전히 반항하고 있는 소만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소만리, 기모진이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해?”소만리의 안색이 달라졌다.“무슨 말이야?”경연은 담담하게 말했다.“기모진의 몸이 낫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겠지?”“...”경연이 기모진의 병을 인정하는 말에 소만리는 더욱 화가 나고 소름이 끼쳤다.그는 소만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조사했었기 때문에 그녀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그의 몸속에 있는 독소는 변이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 그래서 지금 기모진이 무사한 것 같아도 언제 어느 순간 변이가 폭발할지 몰라.”이 말을 들은 소만리는 경연을 밀어젖히며 말했다.“그래서 도대체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목적이 뭐야? 해독할 방법을 알려 주려는 건 아니잖아?”경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난 방법을 알지 못하지만 아는 사람이 하나 있지.”소만리의 눈에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불타올랐지만 경연의 말에는 여전히 의심을 품고 있었다.경연은 소만리가 자신을 의심하는 것을 눈치채고는 단호하게 얘기했다.“그 사람은 남사택이야.”남사택!소만리의 귓가에 또렷이 그 사람의 이름이 들어왔고 계속해서 경연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기모진 몸속의 독소는 남사택의 손에서 나온 것이어서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남사택 뿐이야. 난 그 사람의 행방을 알고 있어.”“당신 정말 남사택이 어디 있는지 알아?”소만리는 여전히 의심스러웠
소만리도 밀리지 않으며 노기를 가득 띤 경연의 얼굴을 마주 보고 말했다.“나한테는 이러고 싶지 않다고 하지 않았어? 그러니 실컷 때리게 해 줘!”“...”경연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소만리, 난 기모진이 아니야. 그 사람처럼 밑도 끝도 없이 다 받아들여 줄 수는 없어. 만약 오늘 날 거절한다면 기모진이 치료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놓치는 거야. 잘 생각해 봐.”경연은 잡았던 팔을 놓으며 돌아서서 소만리 곁을 떠나려고 할 때 귀띔했다.“사흘 안에 당신이 날 찾아오지 않으면 평생 절대 남사택을 찾지 못할 것이고 기모진은 기껏해야 2년 더 살 수 있어.”헉.소만리의 가슴 밑에서 묵직한 통증이 뻑뻑하게 전해져 왔다.2년.소만리는 2년 후에 기모진을 잃을 거라고 감히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소만리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아파하고 있을 때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기모진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들었다.“너 감히 소만리를 찾으러 오다니?”“소만리는 내 혼인 신고서에 있는 합법적인 내 아내야. 내가 여길 찾아오는 게 뭐가 잘못됐어?”경연은 정색을 하고 대답했고 그렇게 말하면 기모진이 자극받을 것임을 분명히 알고 한 말이었다.그러나 의외로 기모진은 아무 노여움도 없이 웃었다.“혼인 신고서는 그냥 종이 한 장 일뿐. 경연, 소만리의 진짜 남편이 누구인지 당신이 누구보다 더 잘 알 거야.”경연이 이 말을 듣고 얼굴에 언짢은 기색이 돌았고 무슨 말을 하려는데 소만리가 다가왔다.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기모진 곁에 와서 그의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여보, 쓸데없는 사람과 쓸데없는 말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우리 집에 가.”“그래, 우리 집으로 가자.”기모진은 소만리의 어깨를 껴안고 경연을 뒤돌아보지도 않고 곧장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닫힌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보던 경연은 속으로는 굉장히 화가 났지만 담담한 눈빛으로 말했다.“소만리, 정말로 그가 죽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날 찾아와야 될 거야.”
그것은 빨간 종이로 접은 작은 하트였다. 보니 딱히 특별한 건 없어 보였다.그러나 작은 꼬마가 이 하트를 준 것은 분명히 무슨 생각이 있을 것이다.기모진은 가만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눈을 들어 보니 어느새 기여온이 문틀 옆에 서서 빼꼼히 작은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그 초롱초롱한 눈은 마치 기모진이 무언가를 발견하기를 기대하는 것 같았다.기모진은 작은 하트를 뒤집어 보았더니 삐뚤빼뚤하게 쓴 글씨가 보였다.[아빠, 여온이 말 잘 들을게.]이 글을 보고 기모진은 정말로 자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그 작은 공주는 아빠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 그녀가 말을 잘 듣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그래서 기여온은 말을 잘 듣겠다고 쓴 것이었고 기모진이 그녀를 받아들여 주기를 바랬던 것이었다.기모진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손바닥 안에 있는 빨간 하트와 천진난만하게 미소 짓는 여온이를 번갈아 바라보며 빨간 하트를 살며시 테이블 위에 놓았다.그러자 기여온의 얼굴에 머물던 미소가 사라졌다.기여온은 입을 오므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가버렸다.“미안해. 여온아.”기모진은 기여온이 떠나가는 방향을 바라보며 조용히 읊조렸다.여온아, 넌 정말 착한 아이야. 하지만 아빠는 네가 짧은 시간 동안 아빠의 사랑을 받다가 또 잃어버리게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아. 네가 크면 넌 무자비하고 냉혈한 아빠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기묵비를 네 마음속 최고의 아빠로 기억하는 거야.그는 기여온이 직접 접은 작은 하트를 다시 손에 집어서 간직했다....아마도 마음의 상처가 깊었던 것인지 기여온의 여린 마음이 빨리 치유되지 않은 채 요 며칠 동안 우울해하고 있었다.유치원 수업 때도 건성으로 들었다.활동 시간에는 심술궂은 두 남자아이가 기여온 앞에서 그녀를 놀리며 따돌렸다.“우린 벙어리랑 놀지 않아.”“벙어리는 웃지도 못하니까 우리가 걔랑 놀아도 우린 즐겁지가 않을 거야!”기여온은 그들이 말하는 벙어리가 자신을 가리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