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모진은 아무 상관없는 듯 웃으며 말했다.“당신 아이 이름이 뭔지 나와 무슨 상관이야?”그는 무정한 말을 서슴없이 뱉으며 무심한 듯 얼굴을 돌렸다.“소만리, 당신 남편이랑 잘 지내. 더 이상 나에 대한 환상 같은 거 갖지 말고. 내가 예전에 당신한테 설렌 적은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야. 한때일 뿐이었다구.”먼 곳을 응시하던 기모진의 시선은 어느새 부연 안개로 눈앞이 뒤덮였지만 어조는 여전히 조롱하는 투였다.“이게 마지막이었으면 좋겠어. 난 정말 당신 다시 보고 싶지 않아.”그는 서릿발보다 더 차가운 말을 내뱉고는 미련 없이 출발했다.이렇게 말은 했지만 그도 이것이 진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그런데 돌아서고 나니 정말로 이것이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소만리는 그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눈앞의 모든 것이 검게 물들어 적막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당신과 나, 분명 한때는 일생일대 약속도 했었고 몇 년을 돌고 돌아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결국 헤어지고 말았어. 기모진, 이제부터 이 생에서 우리 두 사람 다시는 만나지 말자....병원.강연이 응급실에 들어간 지 얼마되지 않아 나왔다.비록 피는 흘렸지만 다행히 아기는 무사했다.강연은 한가롭게 침대에 누워 얼마 전 기모진이 소만리를 대하는 말과 행동을 되새기며 속으로 기뻐하고 있었다.소만리에 대한 기모진의 감정이 기본적으로 식었다는 것을 더욱 확신했다.기모진은 따뜻한 우유를 들고 병실로 향했고 막 입구에 이르렀을 때 강연이 우쭐거리고 뽐내며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다.“기모진의 마음속에 소만리가 무겁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까 모진이 날 위해 소만리를 혼내줄 때 얼마나 패기 있고 멋있었는지. 네가 꼭 봤어야 하는 건데.”“이 남자, 나 절대 놓치지 않을 거야. 영원히 내 말 듣게 할 거야! 영원히 내 남자가 될 거라구!”강연은 기쁨을 감추지 않고 한껏 자만하며 얘기했다
강연은 애교스러운 말투로 기모진을 향해 어리광을 부렸다.기모진은 소만리와의 추억 속에서 빠져나와 정신을 가다듬고 한껏 기대하고 있는 강연을 보고 흔쾌히 말했다.“강연, 약속할게. 내일 꼭 당신 인생에 가장 잊을 수 없는 날이 될 거야.”이 대답을 들은 강연은 자신이 하늘로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음이 정말 뛸 듯이 기뻤다.이 시각, 소만리는 기 씨 집에 머물고 있었다.기여온과 기란군 두 남매의 기분이 매우 안 좋아 보였다.소만리는 왜 두 남매의 기분이 가라앉았는지 짐작했다.왜냐하면 그녀 자신을 포함해 모든 사람들이 떠나기 전 기모진의 냉혈하고 차가운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경연이 기 씨네 집에 왔다.소만리는 기여온과 기란군이 기분이 좋지 않아서 두 아이 곁에서 함께 있고 싶다고 말했다.경연은 매우 사리에 밝고 합리적인 사람이어서 소만리를 기 씨 집에 아이들과 함께 머물라고 했다.사실 이런 상황은 그에게도 좋은 일인 셈이었다.그도 마침 소만리를 이틀 동안 기 씨 집에 머물게 할 이유를 찾고 있었던 참이었다.경연은 기 씨 집을 떠난 뒤 차에 탄 채 전화를 걸었다.“A 팀을 배치해 이틀 동안 기 씨 집 근처를 지키며 가족의 안전을 확보하세요.”상대방은 지시를 받은 후 즉시 임무대로 행했다.아이들이 기분이 좋지 않자 소만리는 손수 직접 저녁을 만들어 먹이고 노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두 아이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샤워를 한 뒤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그러나 기란군은 침대에 누운 채 눈을 감지 않았고 어린 녀석은 소만리를 바라보며 천진난만한 큰 눈으로 물었다.“엄마, 아빠가 집에 돌아올까요? 아빠 정말 우리를 원하지 않는 거야?”소만리는 어리둥절해하다가 미소를 지으며 기란군을 달래었다.“기란군은 경연 아저씨 안 좋아?”“아저씨는 아저씨고, 아빠는 아니잖아. 기란군은 우리 아빠를 원해.”기란군의 말이 소만리의 마음에 걸려 더할 수 없이 죄책감이 들었지
예선이 건넨 것은 사진 한 장이었다. 소만리가 그것을 건네받아 보니 그것은 그들이 대학을 졸업하던 날 찍은 사진이었다.사진 속의 두 숙녀는 너 나 할 것 없이 풋풋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니고 있었다.그렇게 즐겁고 기뻤던 나날들이 마치 엊그제같이 느껴졌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7, 8년이나 되었다.“소만리, 너 찾아냈어? 사진 속에 또 누가 있는지?”예선이 갑자기 이렇게 묻자 소만리는 눈을 내리깔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그제야 비로소 사진 왼쪽 상단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오늘 옛날 물건들 정리하면서 이 사진을 보기 전까지는 기모진이 널 정말 사랑한다는 걸 믿지 않았어. 그런데 소만리, 나 지금은 이제 믿어.”예선의 말투에서 소만리는 기모진에 대한 그녀의 마음을 알아챘다.소만리의 가장 친한 친구로서 예선은 몇 년 동안 기모진을 진심으로 미워했다.기모진이 자신에게 한 일을 소만리가 원망하지 않았을 때에도 예선은 줄곧 기모진을 원망하며 미워했고 소만리에게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고 분개하고 화냈다.하지만 이제 예선은 기모진을 미워하지 않는다.왜냐하면 예선은 소만리에 대한 기모진의 사랑이 얼마나 진실한지를 보았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미 늦은 것 같다.소만리는 경연과 결혼했고 그녀는 이미 경연의 아내가 되었기 때문이다.“에이...”예선은 눈앞에 흐르는 강을 바라보고 웃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소만리, 사랑하는 남자에게 시달려도 행복할 것 같은 그 당시의 네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아.”소만리는 예선이 하는 말속에 뭔가 짚이는 게 있어 예선에게 물었다.“예선아, 너 소군연 선배랑 혹시 무슨 일 있었어?”“정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으면 좋았게. 그랬으면 내가 가지 않아도 되겠지만. 아쉽게도...”예선은 눈을 감고 그날 밤 술에 취해 일어났던 일을 생각해 보았다.“소만리, 알고 보니 술이 다 웬수야. 정말.”“예선아? 설마 너 소군연 선배랑...”“아니 아니. 소군연 선
기모진은 소만리의 이름을 부르며 사진 속 그녀를 쓰다듬다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그는 진통제 한 알을 얼른 먹었지만 목구멍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밀려오는 피비린내를 막을 수는 없었다.기모진은 티슈를 입에 대고 피를 닦아내었다.티슈에 묻은 핏빛을 보니 이미 걸쭉한 갈색에 가까웠고 선명한 피 본연의 빛은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그뿐만 아니라 심장도 뭔가에 콕콕 찔리는 듯한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손가락도 저절로 덜덜 떨릴 정도로 조절이 되지 않았다.남사택이 개발한 이 독소는 후기에 접어들면 단순히 한 사람의 몸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심리적 자질을 시험한다.기모진은 사무실 한 켠에 있는 침실에서 하룻밤을 보냈다.다음날 일어나자마자 그는 강연의 전화를 받았다.이 여자는 퇴원했고 오후에 기모진과 함께 이 사업을 잘 마무리 짓겠노라 기세등등하게 말했다.사실 기모진은 본래부터 강연을 오늘 오후의 향연에 참석시키려고 이유를 궁리했었다.어떻게 이런 쇼에 강연이 빠질 수가 있겠는가.강연은 먼저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옷 중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원피스를 골라서 입었다.강자풍은 소만리에게 전화를 걸어 기여온을 보러 가려고 방을 나오다가 의기양양하게 걸어오는 강연을 마주하게 되었다.“이렇게 장사꾼처럼 차려 입고 어딜 가려고?”강자풍은 인정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강연의 들뜬 기분에 찬물을 끼얹으며 말했다.강연은 강자풍을 노려보며 말했다.“내가 흑강당에 방해되는 일만 한다고 날 싫어하지 않았어? 손해가 200억이라고? 내가 지금 가서 당장 그 200억 돌려줄게!”강자풍이 의아해하며 물었다.“강연, 네가 뭘 해서?”“네가 뭘 해서?”강연은 매섭게 쏘아붙이다가 강자풍을 향해 킥킥대며 말했다.“강자풍, 우리 세 남매 중에 가장 쓸모없는 것은 사실 너야. 네가 한 게 뭐야? 네가 먹고 마시고 놀고 하는 것 말고 뭐가 있어? 네가 사업에 대해 얘기해 본 적이나 있어? 장사를 할 줄 알아? 나와 강어가 아니었다면
강연은 차가운 눈빛을 하고 있는 기모진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그 뚱뚱한 남자가 바라보고 있는 문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양복을 입은 신체 건장한 남자들이 정색을 하고 마주 오는데 이 사람들의 목에는 모두 남색 사원증이 걸려 있었다.“누구세요? 누가 여기 들어오라고 했어요? 이 룸은 이미 예약되어 있는 거 못 봤어요? 당장 나가세요!”강연이 불쾌한 듯 재촉하며 물었다. 보아하니 강연은 아직 사건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남자들은 강연의 만류에도 들어와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강연을 바라보았다.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강연을 향해 말했다.“우리는 IBCI입니다. 현재 여기에서 당신들이 불법 거래를 하고 있다는 믿을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꼭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당신에게 불리한 증거가 되어 나중에 증거로 삼을 수 있습니다.”“...”IBCI?!국제범죄수사국?!강연은 눈앞에 나타난 이들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그녀의 머릿속은 한순간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았다.그 뚱뚱한 남자와 그의 경호원은 상황이 잘못됐다고 판단되어 저항하려고 했지만 IBCI 사람들은 모두 훈련이 잘 되어 있었고 하나같이 문예와 무술에 능해서 쉽게 이 사람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강연! 내가 여태껏 너를 믿어왔는데 이렇게 너와 네 남자친구가 나를 모함하다니!”뚱뚱한 중년 남자가 강연을 향해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강연도 그제야 조금씩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그녀는 룸에 들어온 사람들을 보고 완전히 놀라 멍해졌고 이렇게 한바탕 욕 세례를 받은 후에야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그리고 강연은 놀란 자신과 달리 놀라지도 않고 침착한 표정을 하고 있는 기모진을 바라보았다.강연의 눈에는 여전히 기모진에 대한 깊은 애정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돌아서서 그에게 다가갔다.“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모진, 당신...”그녀는 곤혹스러워하며 기모진에게 다가가고 있
”...”기모진의 말을 들은 강연은 온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아니! 절대 그럴 수가 없어!”그녀는 기모진이 그녀를 바둑알로 삼아 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소리쳤다.“아니야. 모진, 당신은 날 사랑하는 거야. 난 당신 아이까지 임신했어. 그런데 어떻게 날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어!”강연이 특히 이 점을 강조하며 소리쳤다.하지만 기모진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무시했다.IBCI의 동료가 강연을 체포하러 가자 강연은 갑자기 핸드백에서 총을 꺼내 저항하기 시작했다.“누가 감히 날 붙잡아!”그녀는 도도하게 눈을 들었고 눈도 깜짝하지 않는 기모진을 바라보았다.강연의 감정이 점점 붕괴하기 직전으로 치달아가고 있었다.“모진, 나랑 이런 농담하지 마. 말해 봐. 당신은 IBCI가 흑강당에 배치한 첩자라는 거야? 어? 어떻게 그럴 수가? 당신 잊지 마. 당신 몸속에는 아직 만성 독소가 있어. 내가 없으면 당신은 죽...”“정말 그런 걸로 날 조종하고 통제할 수 있을 줄 알았어?”기모진은 강연의 말을 끊고 날렵하게 생긴 눈꼬리를 치켜세우며 되물었다.“내가 다시 당신 앞에 자진해서 나타났을 때 이미 내 죽음의 카운트다운은 시작되었어. 강연, 이미 네가 준 담배는 피우지 않아. 내가 피우고 있는 건 IBCI의 교수님이 독소를 억제하기 위해 특별히 개발한 담배야.”“...”강연의 유일한 무기가 일순간 무너져버렸다.알고 보니 그는 진작에 그녀가 준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순간적으로 자신의 머리가 너무나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느낀 강연은 무너질 것 같은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고 갑자기 방아쇠를 당겨 IBCI요원들을 향해 총을 쏘았다.그러나 IBCI요원들은 민첩하게 강연의 총알을 피했다. 강연은 단념하지 않고 계속 총을 쏘려고 했다.그러나 그때 기모진이 성큼성큼 그녀 앞으로 걸어가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강연이 손에 쥐고 있던 총을 단숨에 제압함과 동시에 허리춤에 이미 준비해 두었던 수갑을 강연의 손목에 채웠다.
기모진의 시선을 따라 강연도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그 얼굴을 보자 강연은 문득 기모진이 전에 술집 입구에서 자신을 가로막아 섰던 그날 밤을 떠올렸다.그날 밤 강연은 기모진이 자기에게 복수하러 쳐들어온 줄 알고 두려워서 허둥지둥 떠나려 했지만 기모진은 오히려 그녀를 가로막고 담배를 달라고 물었었다.게다가 담배를 주는 조건으로 호텔 방을 잡으라는 강연의 요구도 들어주었다.그날 밤 그녀는 너무나 기뻤다. 왜냐하면 자신이 꿈에 그리던 남자와 하룻밤을 보냈기 때문이다.다음 날 방을 나갈 때 그녀가 문을 열자마자 용모가 다소 볼품없는 건달 같은 남자가 그녀를 쳐다보았다.당시 강연은 기분이 좋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런 것쯤 신경도 쓰지 않았다.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때 변변찮은 용모의 그 남자가 눈앞에 나타났다!“강연, 이제 알아봤어? 이 사람이 당신을 임신시킨 남자야.”“...”기모진의 말을 듣고 밉살스럽고 추하게 생긴 이 남자를 본 강연은 가슴이 답답해져왔다.“말도 안 돼! 내가 어떻게 이런 못생기고 역겨운 남자와 아이를 가질 수 있어!”그녀는 고함을 지르며 못생긴 얼굴을 쳐다보았다.그 남자는 무식한 건달이었고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지만 강연이 자신에게 욕을 하는 것만은 똑똑히 알아들었다.그는 시큰둥한 태도로 강연에게 침을 뱉으며 말했다.“내가 역겹다고? 난 아직도 네가 역겨워. 이 잘생긴 남자가 돈을 제대로 쳐주지 않았더라면 난 너 같은 여자는 건드리지도 않았을 거야. 몸은 무슨 장작개비마냥 말라가지고 빨래판에 비벼대는 것 같았다구.”“너, 너 뭐라구!”강연은 피를 토할 정도로 화가 나서 발을 들어 그 남자를 걷어차려고 했다.남자는 강연의 발차기를 피한 후 기모진이 그에게 준 잔금을 세어보고 만족스럽게 훌쩍 떠났다.강연은 화가 나서 뒤쫓아가려 했지만 갑자기 배가 심하게 아파오고 몸 아래에서는 점점 피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그녀는 고통스러워하며 배를 움켜쥐었고 얼굴빛도 점차 하얗게 물들
기모진은 황급히 떠나는 일행을 바라보다가 밖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흩어진 뒤에야 조용히 룸을 떠났다.그는 자신의 몸이 완쾌되더라도 소만리와 다시 재결합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들 사이에는 영원히 사화정과 모현이라는 두 생명이 가로놓여 있다.이 한계는 그들이 서로 사랑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남사택이 개발한 이 독소는 현재 아무도 해독할 수가 없고 심지어 남사택 자신도 독소를 제거할 방법을 개발하지 못했다는 것을 기모진은 잘 알고 있었다.기모진은 마음속으로 이미 최종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그는 혼자 차를 몰고 기 씨 집으로 달려가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했다.소만리는 집에서 세 아이를 돌보고 있었다.그녀는 시간을 체크하고 곧 공항으로 출발하여 예선을 배웅할 것이다.이때 핸드폰에 실시간 뉴스 이슈가 떴다.소만리는 별생각 없이 들어가 보니 여러 방향에서 사람들이 찍은 동영상이 올라왔다.장소는 센트럴 플라자의 한 유명한 호텔이었다.화면 속에서 소만리는 괴로운 표정으로 짓눌린 채 끌려가는 강연과 함께 강연의 손목에 채워져 있는 수갑을 보았다.강연이 체포당한 건가?강연을 체포한 사람들은 경찰인가?소만리는 네티즌들이 올린 최근 영상을 보며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려다가 갑자기 기모진에 대한 언급이 담긴 영상이 올라왔다.영상에서 기모진은 짙은 남색 양복을 입고 신체 건장한 사람들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그의 잘생긴 얼굴은 그의 멋진 모습을 사모하는 많은 여학생들의 관심을 끌었고 기모진을 본 행인들이 영상을 찍어 올리게 된 것이었다.소만리는 자신도 모르게 이 영상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다가 화면 속 기모진 때문에 왠지 마음이 아팠다.그러던 중 갑자기 소군연에게서 전화가 왔다.소만리는 그제야 자신이 공항에 배웅하러 가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그녀는 아이를 위청재에게 부탁하고 공항으로 차를 몰고 갔다.마침 소만리가 소군연의 전화를 받으려는데 옆에 놓아둔 전화기가 덜컹거려 발밑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